[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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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2765 2014-11-03
626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美山정경해 file
편집자
1465 2018-01-31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쉿,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종종거리면서도 묵직한 걸 보니 그녀인가 봅니다. 기분 좋게 한 발 내딛던 나는 멈칫합니다. 저기 하얀 우산을 쓰고 그녀가 서 있네요. 토닥토닥 소리가 들립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비가 제법 내리는 새벽인데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섰나봅니다. 그녀는 나에게 오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어쩌면 나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걸 느낍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나는 그녀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립니다.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그녀의 생각을 읽어봅니다. ‘오늘은 어떤 빛깔일까. 폭우가 내린 직후처럼 탁하지는 않겠지. 비가 내리고 있지만 흐리지는 않겠지. 그가 품는 모래알과 풀잎은 어떤 표정일까. 방긋 웃어줄까. 아님 몸을 살살 흔들며 싱그럽게 일렁일까.’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입니다. 그녀의 생각에 장단을 맞추듯 나는 말갛게 씻은 얼굴을 내보입니다. 아직은 약간의 큼큼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도 신이 납니다.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흥얼거리며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녀가 나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요.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네요. 다행스럽다는 표정입니다. 오늘은 그녀의 얼굴이 밝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매번 다릅니다. 어떤 날은 걱정스러웠고, 또 어떤 날은 신기했습니다. 흐뭇한 표정이 되기도 했고, 암울한 표정이 될 적도 있지요. 그런가하면 귀여워 못살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저 혼자 웃곤 하지요. 더러는 울상을 지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처럼 밝은 표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는 기분에 따라 표정이 변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주로 나의 모습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얼굴로 나에게 와서도 내가 칙칙하거나 어두운 빛깔을 띠면 그녀도 덩달아 칙칙하고 어두워지거든요. 그녀에게는 나를 바라보는 나름의 기준이 있나봅니다. 단순히 나의 빛깔만 바라보지는 않거든요. 그녀는 올 때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세세히 훑어봅니다. 내가 품지만 나를 받쳐주는 모래와 자갈을 보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풀잎을 보고, 간간이 날아와 먹이를 쪼는 백로와 오리 떼도 바라봅니다. 그녀는 그들을 통해 나의 몸 상태를 짐작합니다. 그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의 표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나는 그녀를 십 수년째 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새벽이나 초저녁에 주로 나를 찾아왔지요. 날짜를 정해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틈틈이 나에게로 왔으니까요. 꼭 한가할 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바쁘게 보일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나를 바라볼 때만큼은 여유로워 보입니다. 종종걸음으로 와서는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 볼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가 우산을 접어 손에 든 것을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나봅니다. 그녀의 눈빛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내 갈 길을 갑니다.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낭떠러지 같은 계단을 만나네요. 솟구치는 몸을 다잡자마자 나를 가로막는 돌을 만났어요. 급히 휘돌아 나오며 숨을 몰아쉽니다. 잠시 평온한가했는데 쓰레기장 같은 곳이 불쑥 나타나네요. 공기 중에 떠돌던 온갖 불순물이 부유물로 둥둥 떠 있습니다. 아찔합니다.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만나는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발 내딛는 순간 요동을 칩니다. 흰 거품을 요란하게 일으키며 평정을 찾으려 애를 써 봅니다. 발을 딛자마자 거대한 바위를 만나 한차례 튀어 오르기도 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물보라 한번 일으키고 말지만 그 충격은 대단하네요. 현기증이 일지만 눈을 질끈 감습니다. 새롭게 태어나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첫발은 나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듯 나와 끊임없이 만나고 합쳐지는 수많은 물줄기가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물줄기를 만나 손을 잡고 점점 넓게 퍼져나갑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넓은 바다에 가 닿게 되지요. 사실 내가 이렇게 새롭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무수히 흔들리고 깎였습니다. 부딪고, 깨어지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만만치는 않아요. 모질게 재활훈련을 하고 건강을 되찾기까지, 다시 세상을 품어 안기까지 갈등은 또 얼마나 많았게요. 지금에 와서는 그조차 큰 기쁨입니다. 나는 작은 먼지를, 모래를, 돌멩이를 쓰다듬었지요. 물고기와 헤엄을 치고, 물가의 풀숲을 어루만졌지요. 그렇게 점점 퍼져나가 들판을 아우르고 거대한 산을 품었습니다. 살짝 말하지만 나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그녀도 끌어안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어느 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꼈지요. 나의 몸은 짙으면서도 엷은 빛깔입니다. 이제 막 떠오른 태양도 그런 내 안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나는 태양을 안고서야 맑은 물로 거듭날 것처럼 그를 품어 봅니다. 태양도 나와 한 몸을 이루었다는 듯 깊숙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네요. 그런 다음 물빛을 받아 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나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생명을 아우르며 끊임없이 흐를 수밖에 없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앉았던 자신을 되찾고 싶어서 굳이, 빗물정수장을 막 통과하는 나를 찾는 것인지도. 약력) 수필가 美山정경해 *경기 안성 출생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2008 『까치발 딛고』2011 『내 마음의 덧신』2016 *이메일 주소 : jeang120@hanmail.net  
625 사투(死鬪)를 벌이는 이유 외 1편/임영석 file
편집자
1700 2018-01-31
사투(死鬪)를 벌이는 이유 보석 하나를 만들어 파는 데도 수많은 사람이 사투를 벌인다 어느 사람은 땅을 파서 원석을 캐야 하고 어느 사람은 그 원석을 가공해야 하고 어느 사람은 진열장에 놓고 손님을 기다려야 하고 어느 사람을 거금을 들여 보석을 구입해야 한다 이 과정이 없다면 보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 보석을 손에 넣은 사람보다도 사투를 벌여 보석을 만들어왔던 사람들은 이미 눈동자 속에 귀한 보석 하나를 숨기고 산다 그 귀한 보석이 눈 속에 없다면 사투를 벌여서 보석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보석은 사투를 벌여 지켜내는 것이지 거금을 들여 사고파는 게 아니다 아이스크림은 왜 달콤한가?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기 위해서는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뜨거우면 녹고 너무 차가우면 딱딱해서 아이스크림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평화도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다 너무 뜨겁지 않고 너무 차갑지 않는 평화를 지켜내는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슈퍼마켓을 자유롭게 달려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국방비*가 43조원이 들어간다 아이스크림이 달콤한 이유는 평화롭기 때문이다 *2018년 우리나라 국방비 예산은 43조 1581억원이 편성되었다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1985년 『현대시조』등단, 시집 『받아쓰기』외 5권, 시조집 『초승달을 보며』외 1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들』이 있고,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2016년 제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등을 수상, 계간 스토리문학 부주간.  
624 동백에게 외 1편/하재영 file
편집자
1539 2018-01-31
동백에게 시린 바람의 숫돌은 거칠었다. 뿌리 하나하나 날카롭게 다듬으며 무딘 허공을 베고 벨 삶이 그러하듯 날 것인 생생한 언어 허공 가지에 얹혀두고 다시 불을 피우겠다며 붉은 피를 삼켰다. 봄으로 낮은 봄으로 들어서는 입구 치열함 곁에 두겠다고 다짐하는 동백의 문안 편지 다시 열 때 겨울 시린 바람은 시들어 가고 이월의 하늘로 눈은 녹으며 동백꽃 그 끝없는 핏물을 닦고 있다. 안개 늪 영하 십도 이상의 한파에 수도는 동파하지 않았는지 걱정하며 앞을 가리는 안개를 헤치며 시골로 가는 길에 청주 공항에 착륙할 베트남 다낭발 비행기가 일기불순으로 인천공항에 내렸다는 문자를 받았다. 짙은 안개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난 청주에서 세상에서 처음으로 해외로 편지를 썼던 베트남으로 다낭에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방전된 것 같은 오래 된 문자를 씹고 씹을 때 삼촌들이 총을 들고 목숨을 담보로 갔던 베트남은 가까웠다. 비뚤비뚤 당시 썼던 위문편지 그 나라에 도착했을지 궁금했다. 귀신도 잡는다는 무용담에 써늘했던 안개는 늪처럼 겨울을 등에 업고 며칠 추위를 견딜 다낭으로 나는 나를 전송하고 있었다. 하재영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작품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등 7feeling@hanmail.net  
623 작은 배, 수평선을 건너다 외 1편/이민숙 file
편집자
1624 2018-01-31
작은 배, 수평선을 건너다 작은 바람이 분다 작은 키스가 실려온다 작은 샘이 출렁이고 작은 그리움을 낳는 시간이 작은 항아리를 이고 온다 작은 새댁은 작은 새벽에 깨어 작은 오줌을 싸고 작은 콩을 넣은 작은 밥을 짓는다 작은 사랑방에 차린 밥상을 작은 거지들이 둘러앉아 작은 슬픔으로 한 숟갈 떠서 먹는데 작은 새 한 마리 작은 햇빛을 모아 찍! 똥을 갈기고 날아간다 작은 소리는 감미롭다 작은 귀가 작은 음표로 받아적은 작은 하루 작은 거지의 작은 딸이 작은 배고픔을 찍어 작은 동화를 쓴다 작은 동화의 작은 주인공은 오늘! 지금! 너와 나! 작아서 금세 사라질 것들에게 첫사랑의 옷을 입혔다 첫사랑은 작고 갑자기 태어난다 첫사랑은 작고 갑자기 황홀하다 첫사랑의 배가 수평선을 건너간다 작은 등대가 깜박거린다 작은 불안이 작은 눈을 찡긋 윙크한다 작아지고 작아지는 생, 화안하다! 입동, 은행나무 빗살무늬 토기를 살짝 건드리며 노래하던 은행나무가 말했어요 내 이파리는 오줌방울이야 메마른 대지를 가만히 적셔주고 싶어 부엉이 눈빛으로 레일 위를 빠르게 굴러오는 겨울이 어둠을 톡톡 두드리며 걸어올 때 철로 아래엔 레드 카펫이 펼쳐지네요 머리칼 붉은 여행객들은 배낭을 맨 채로 잠이 들었어요 언제나 캄캄 밤이었던 열세 살 소녀의 가슴 속 소설책이 오줌에 젖어 녹아내려요 끝없는 이야기, 밤마다! 어둠의 옷을 벗기네요 은행나무가 더 투명해진 눈빛으로 말했어요 내 오줌방울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쓴 노란 잉큿빛 시야 “뼛속의 만남만이 디엔에이를 바꿀 수 있단다” 골수이식을 마친 후 파르랗게 수염을 쓰다듬던 아버지가 말했어요 너는 나의 뼈, 나는 너의 이슬방울, 나머지는 뮤즈의 살(肉), 우연이나 순수 드디어 야생고양이가 된 은행나무 이파리가 갸릉 갈갈 으스대는 마을 골목길 오줌에 젖은 시가 은행이파리 연필 되어 춤추고 쓰러지고 하늘엔 열일곱 소녀의 가슴속 달이 흰 눈을 꿈꾸듯 창백하게 환한 이민숙 약력 1998년 《사람의 깊이》에 ‘가족’외 5편의 시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등이 있음. 여수 샘뿔인문학연구소에서 책읽기, 문학아카데미 프로그램 운영하고 있음.  
622 밤안개 외1편/서하 file
편집자
1528 2018-01-31
밤안개 묽은 미음만 드시던 형은 이제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풀어진 미음처럼 누군가 또 짖는다 그와 새끼손가락 걸었던 무언의 약속은 밤에 더 뚜렷해지고 무더기로 모인 저 울창한 소리, 참 어이없는 방류다 잔뜩 웅크린 귀는 안다 소리 없는 생애가 더 슬프게 짖는다는 걸 그건 이름 없는 별들이 전해주는 말이다 묶어둘 수 없는 삽살개처럼 언뜻언뜻 아득해지는, 눈을 반쯤 뜨고 보아도 네 허물보다 내 허물이 더 캄캄하잖아 막막한 나는 언제 철이 들지 안아줄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저 지극한 컹컹컹 소리가 없다 물의 마을 구름의 지느러미도 강의 치마폭에서는 잠시 쉬어간다 등 뒤의 햇살처럼 뭔가 풀리기 좋은 날, 양팔 벌려 반겨주는 오어사 원효교에서 물푸레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한 바가지의 나를 놓아 준다 잉크처럼 풀어지며 달리는 미꾸라지, 젖은 가슴 속으로 더 적시는 나도 저렇게 풀릴 때 있을까? 물 속 마을이 출렁한다 관절 풀리는 저 마을에도 사계절이 자라는지, 동네 어귀 당나무 그늘이 있는 집에서는 닭이 알을 품고 종아리 드러낸 채 아장아장 걷는 햇살 순해진다 이리 와! 걱정 많은 엄마 같은 물이랑이 저 혼자 부푼다 먼데 종소리 달려온다 완창이다 강물이 젖은 허리 접었다 편다 산그림자도 욜랑욜랑 없는 꼬리를 흔든다 차르르 날 밝는 게 두려워 밤마다 가슴에 돌을 안고 잠 들었다는 당신 엉덩이 털며 일어서는 구름 이야기 다 알아듣지 못하지만 젖지도 않은 그림자는 처음처럼 새것이다 서 하(徐 河) ♧경북 영천 출생 ♧1999년 계간『시안』신인상 수상 ♧2010년 시집 『아주 작은 아침』시안 출판 ♧2015년 시집 『저 환한 어둠』시와표현 ♧2015년 『대구문학상』수상 ♧한국 시인협회 회원, 대구시협 이사, 대구문협 회원  
621 구름 외 1편 /손창기 file
편집자
1440 2018-01-31
구름 구름 한 뭉치를 어머니는 절구통에 넣고 있었다. 절구통에 있던 구름이 가끔 튀어 오르기도 했다. 자궁 속처럼 시간이 갈수록 구름은 잘 빻아졌다. 구름은 자기끼리 뭉치고 헤어지곤 했다. 흙담을 드나드는 안개처럼 몸속에서 물기가 맴돌았으면 했다. 잘 빻아진 구름이 햇살과 함께 증발하기 시작하자, 구름이 어머니의 물기를 빨아 들였다. 구름이 허파를 점점 조여들게 하더니 어머니를 삼켰다. 부지깽이 두드리며 장작불을 지피자 굴뚝이 연기를 마구 뿜어냈다. 연기 품은 구름이 점점 비대해지자 어머니를 내놓았다. 프라이팬에 깨를 볶듯이 마당에서 물방울이 춤을 추었다. 몸속에 물방울이 맺혀 어머니가 식구들에게 슬픔의 구간區間을 줄였는지 모른다. 입을 따다 그대의 갈고리를 넣어 입을 따 보라. 짠물이 나가도록 간이 알맞도록 박달대게, 홍게의 입을 따 보라. 사각의 찜통 안에서도 사지육신四肢六身이 떨어지지 않고 바탕이 설 테니 쿠싱한 냄새를 끌어당기는 김살은 도드라진 모서리를 갉아 먹고 있다. 배 한척이 섬의 입을 따고 들어간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마블링이 끊어지지 않는다. 저 섬은 곧 삶기고 있는 중이다. 김살을 뿜어내 섬이 둥글어진다. 짠물이 몸에 가득하니 입을 따 보라. 섬 안에다 쟁기를 델 수 있을 테니 어떤 이유든지 입을 닫지 마라. 시퍼런 식칼로 객귀客鬼를 풀어낸 적 있어 사지 멀쩡하고 입에 밥알 들어간다. 약력> 손창기 - 경북 군위 출생.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달팽이 성자』가 있음. jangoyes@hanmail.net 주소> 경북 포항시 북구 우현동 우창서길 34번지 대동고등학교  
620 부활 외1편/심승혁 file
편집자
1763 2018-01-31
부활 노랗게 익어 가다가다 숲을 닮으려던 초록빛 젊음이 퍼런 서슬에 댕강 잘려왔다 바다에서 태어나 햇살로 키워진 저 짠내나는 투쟁의 것들이 쏟아지자 싱싱한 죽음이 하얀 숨을 몰아쉬는 몇 번의 자맥질로 풀이 죽어간다 이대로 부패일 리가 없다 돌아갈 수 없는 흙과 고난의 바다, 그 틈으로 발갛게 삭혀질 세월을 얹자 생생하게 발효될 아삭대는 숨을 불어 넣자 잊었던 새 맛의 삶을 기억해 낸 목울대가 침을 꼴깍이며 분주한 손길로 인공호흡 중이다 담금질 네 심장이 겨울 바다의 온도와 같아지면 내 그곳, 역동의 뜨거움을 두 손에 담아 열풍의 여름 바람처럼 던져주리라 얼어붙은 밤의 소리로 깨진 너의 파편은 내 붉도록 터져 나온 핏방울에 닿아 녹아든 하나의 심장으로 뛰게 될 테니 네 가슴마다에 태양의 바람이 불고 네 파편이 내 상처의 뜨거움과 같아지는 날, 더 이상은 차가울 리 없을 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을 우리로 만나게 되리라 문학광장 시부문 등단 문학광장 카페 부위원장 2017년 상주문학제 기념문집<우리는 하나> 참여 2017년 인천미술전람회 시화부문 특선, 입선  
619 안어울림소리 / 이양섭 file
편집자
1474 2018-01-01
안어울림소리 연기가 사라지며 향내를 퍼뜨리고 있다. 파르스레 피어오른 연기가 시간과 공간을 가르듯 하늘거리다 흩어진다. 염불소리는 천수경에서 회심곡으로 이어져 홀로 처연히 흐른다. 빈소에 셋, 접객실에 다섯, 괜히 사람 수를 세었다. 어머니 영정을 일별한다. 저 엷은 미소는 괜찮다는 걸까? 장례를 치르는 내내 되도록 아내와 부딪히지 않으려 한다. 잠시만 마주봐도 그냥 면상을 갈겨 버리고픈 마음을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재바르게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나마 내가 고마워해야할 어섯이다. 나는 집안일 앞에 늘 그렇듯 멀뚱거리며 제 역할을 찾지 못한다. 저녁이 되어도 빈소는 발길 끊어진 겨울 산처럼 황량하다. 어머니는 겨울을 기다려 온 눈처럼 때를 만나 깊은 산골의 암자로 들어가려는 것 같다. 막상 이렇게 되고 떠올려보니, 어머니가 가고 싶다던 그 암자는 이 세상에 있는 절이 아닐지도 모른다 싶다. 접수대 뒤에 여동생이 퉁퉁 부은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았고, 그 곁에 딸애가 입구를 쳐다보며 앉아있다. 문이 열리고 찬 기운이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들어봐도 이쪽 빈소로 오는 사람은 없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할 때,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울음이 길었던 사람은 여동생과 딸애 둘뿐이었다. 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술을 많이 먹었을 때처럼 끅끅거리기만 할뿐 곡소리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건성 눈물을 찍던 아내에 비해 서럽게 울어준 딸애에게 가당찮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딸애는 고3이었던 지난해에 학원은 고사하고 진학을 포기하라고 종용했었는데, 기어이 대학에 합격해 놓고 애비가 등록금을 만들지 못할까봐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대학에 들어가 꼬박 아르바이트를 했고, 내 생일에 지폐다발을 편지와 함께 몰래 넣어줘 나를 울렸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놈은 이 와중에도 어느 구석에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멀쩡히 가만있을 수도 없고, 딱히 할 짓도 없다. 그렇게 자고 싶었던 잠도 오지 않는다. 코딱지를 후비다가, 손끝에 걸리는 코털을 신경질적으로 뽑았다. 더럽게 아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멍히 어머니 사진을 보다가 불쑥 울음 같은 웃음을 흘린다. 좀 전에 집어넣었던 전화기를 다시 꺼낸다. 지독히 울리지 않는 전화기. 냅다 던져버리고 싶다. 절실히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하고 싶은데, 상대를 떠올려 생각하면 할 수가 없다. 이럴 때 누군가 전화를 해주면 말 배우는 애처럼 떠듬거리며 울먹일 것 같은데, 아무도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갑작스레 상을 당하고 애써 여기저기 연락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단체나 모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야간업소 딴따라인 직업상 아는 이들에게도 때가 때인지라 연락하기엔 염치가 없다. 건너편 접객실에는 어머니가 다니던 경로당의 회장, 총무 할머니 두 분이 와있고, 아내가 두 여인과 마주앉아 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여러 모임에 나가지만 시어머니 장례를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낮에 아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이 몰려와 예배와 찬송을 하려했을 때, 내가 길길이 큰소리로 말리자 동서 내외도 그 일행과 함께 가버렸다. 나는 대뜸 장례식장 측에 염불을 끊이지 않게 틀어달라고 했다. 음악을 좋아한다며 나를 따르던 아내는 이제 음악이 제일 징글징글해졌고, 언제부턴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운구 할 사람, 연락 됐어요?” 아내가 빈소로 건너와 똑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한다. 내가 행사에 불려갔을 때, 제 일만 잘하겠다고 딱딱거리는 진행요원 같다. “아, 새벽에 일 끝나면 애들 올 거라고 했잖아! 왜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퉁명스런 말투에 아내는 구시렁거리며 돌아선다. 사실 아내의 염려처럼 나는 애들과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냥 베이스와 오르간을 믿고 있을 뿐이다.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어머니의 주검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사서 옮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다. 유리된 이 공간의 바깥은, 이제 크리스마스이브 열기도 얼마큼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우리들도 일을 끝내고 한잔할 시간이다. 하필 크리스마스라니! 어머니의 시간은 정지되었을까? 어머니는 이제 연기와 냄새와 소리 따위로 이루어진 막의 저편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머니의 온갖 말투와 표정과 행동을 기억하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어느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제단 뒤로든 어디로든 뚫고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제단 왼편에 ‘미인비즈니스클럽 사장 변명구’라는 리본을 단 조화가 서있다. 양복상의를 허리 뒤로 젖히고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폼으로 침을 찍찍 갈기는, 대머리에 땅딸막한 똥개의 얼굴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흔든다. 똥개 변 사장은 내게 빚을 지고 있는데 그는 채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받아낼 재간이 없다. 두 번이나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어머니 명의의 아파트를 처분했고, 결국 내 목숨 줄 같았던 사업체마저 팔아 넘겼다. 내 돈이 투자된 영업장을 처분해 다른 영업장을 인수하면서도 내 돈은 투자 실패로 날아갔다고 억지를 부렸다. 돈 벌면 갚겠다면서, 그때까지 밥그릇 걱정은 말라는 그놈과 나는 어정쩡하게 갑을관계가 되고 말았다. 혓바닥을 뽑고 기름 낀 배때기에 구멍을 내주고 싶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잘라버릴 수도 없거니와 놈이 던져주는 일거리는 나를 따르는 식구들에게 당장의 밥줄이었다. “어머니! 제가 이 친구, 돈 벌게 해줄 겁니다. 저 없는 놈도 아니고, 믿어주세요! 이리 착한 친구가 잘 돼야죠, 제가 어머니를 일찍 잃어 외롭게 컸는데, 이참에 제 어머니가 되어주십시오!” 8년 전, 그의 제안에 어머니가 불안해한다고 하자, 49평이던 우리 아파트에 찾아와 똥개는 어머니 앞에 엎드려 그렇게 말했었다. 어머니는 표정 없이 시선을 피하며 잡힌 손을 빼려했다. 나중에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 지나고 결국 셋방으로 옮겼을 때, 어머니는 끝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방관하던 아내는 원망이 깊어졌다. 가족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은 나의 욕심과 오판으로 어이없게 허물어졌다. 책임도 미안도 없는 똥개는 이미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개새끼라는 욕은 개에게 미안한 인간말짜새끼!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아프도록 깨문다. 그 옆 조화에는 ‘성일엔터테인먼트 단장 성도화’라고 리본이 달려있다. 5년 전, ‘정성일 연예기획실’이던 악단사무실을 국악 하던 도화가 인수했는데, 성만 빼고 이름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나를 각별히 따랐던 도화는 그때부터 야멸친 사업가로 변신하여 거꾸로 나를 부리고 있다. 10년을 함께 일군 팀은 흩어지고 우리의 터전은 내 이름과 함께 도화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딸애의 등록금 때문에 아내와 대판 싸우고,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끌다시피 결국 도화를 찾아갔다. 악기를 담보하겠다는 내게 도화의 조건은 엉뚱했다. 자기가 하자는 대로 군말 없이 다하면서 생각 없이 하루를 같이 보내자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도화의 군말에 물든 볼모의 몸은 엉뚱하게도 강한 욕정이 일어났다. 양수리 강물이 바라보이는 러브호텔에서 붉은 와인을 마시며 발가벗고 뒹구는 동안,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다가 붉은 울음을 토하다가 캄캄해져 갔다. 낡아가는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 도화는 도취되려 했고 나는 이율배반의 야릇한 비애에 젖었다. “오빠, 우리 그냥,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면 안 돼? 가끔 이렇게 만나면서……” “넌, 이게 사랑이니? 풋! 이건 마지못한 달램이거나 갈증해소일 뿐이야.” “아니지, 오빠가 내 사랑도, 내 맘도 몰라주고, 날 사랑 안 해서 그런 거지.” “난, 이미 여자한테 질리기도 했지만, 셋방살이 꼴에 사랑은 무슨……” “그니까, 내가 하잔 대로 하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 그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무디고 뻔뻔하게 만들어야 해! 오늘처럼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우리 이벤트 회사 만들자! 오빤 음악하지 말고 영업하고 관리만 해. 내가 오빨 정말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럼 너, 내 속에까지 들어와서 사랑할 자신 있니? 사랑 그거, 결국 이기심을 가리는 탈이야. 남자의 가슴앓이, 그 날선 상처마저 안아줄 여자는 없어! 착각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세상에 오빠 마누라 같은 여자만 있는 줄 알아? 어찌 이리 여자의 진심을 모를까? 오빠가 그리 닫혀 있으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야.” “소통? 어떤 소통? 그래, 우리 일로 말해볼까? 무대에서 연주하는 사람은 자길 위해서기도 하지만, 아래에 있는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거야. 들으라고 하는 거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열광을 하지. 자기가 못하는 연주를 해주니까. 그런데 봐봐, 청중이 음악이 좋다고 무대에 막 올라오면 되겠어? 설령 올라온들, 그 무대 위의 뮤지션들과 어떻게 어울리겠어? 당장 리듬과 조화가 깨지고, 내려가지 않으면 쫓겨나지. 그러니까 무대와 객석 사이엔 막이 있는 거야. 막이 열렸을 때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로 소통하는 거지. 또한 막은 서로의 세계를 넘보는 경계야. 안 그래? 닫혀있는 나의 막을 네가 진정으로 연다면 소통이 되겠지.” 군말과 생각이 되레 많았던 그런 하루가 있었다. 왜 알토를 두고 18살이나 많은 남자의 재취가 되었냐고 묻자, 서로가 가진 것을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알토는 병사한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도화와 새 보금자리를 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도화는 애초에 알토를 그럴만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도화가 재력가와 결혼을 하자 외려 알토가 사무실에 나오기를 꺼렸다. ‘형, 온갖 구석이 다 불합리하고 불협화음이야……’ 알토는 다시 힘들어 했지만 도화는 종내 알토에 대해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시간이 사연들을 데리고 흘러갔다. 제단 오른쪽에 있는 조화에는 ‘기라성스탠드바 임직원 일동’이라고 붙어있다. 내가 악기를 들여놓고, 금빛 반짝이 무대의상을 입고 찍은 내 사진이 붙어있는, 변두리 중년층을 겨냥한 복고풍 스탠드바이다. 12개의 코너를 두고 정면에 무대와 춤출 공간을 배치했다. 그런 곳이라도 악단은 서로 들어가려 했다. 똥개의 소개가 있었지만 룸살롱 마담 출신의 사장은 나도 익히 아는 여자였다. 몇 년째 떠돌이 악사였던 나는 무엇보다 후배들과 마음 놓고 연습할 공간이 생겨 흥감했다. 멤버들과 자주 만나 연습하려는 욕심은 그룹사운드 때부터의 습관이지만 이제는 나이 때문에 느끼는 위기감이 컸다. 나날이 진화하는 기계음에 밀려나는 생음악은, 자칫 방심하면 달아날 애인이어서 자주 다독이고 안아줘야 하는 슬픈 사랑이었다. 가게는 순탄하지 않았다. 현수막을 걸고 알려진 연예인을 불러올 때는 썩 괜찮았지만, 고비용의 프로그램을 줄이자 대번에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나는 인맥을 동원하여 싼 값의 밤무대 애들을 불러 온갖 이벤트와 쇼를 시도하며 단골손님을 늘이려 애를 썼다. 마담은 내게 고마워하며 희망을 가지자고 했지만 나는 당장 애들에게 약속한 개런티를 채워 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바깥일을 늘려야 했고 도화의 일이든 똥개의 일이든 가릴 수가 없었다. 술이 한잔 당기지만 참기로 한다. 문득, 난 이제 고아가 되었다는 생각에 어깨가 더 처진다. “명아! 가서 업이 찾아 와! 이놈이 상주가 되어가지고 어디서 뭐해?” 부러 대나무 지팡이를 두드리며 졸고 있는 딸애에게 말한다. 좀 있으니 눈을 끔벅거리며 아들애가 들어와 넌지시 옆에 앉는다. 자정이 지나 한기를 느끼던 터라 애에게 덧입힐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 그냥 슬쩍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는다.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해지더니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어오는데 행색들이 가당찮다. 어깨아래까지 장발은 대부분이고 빨간 가죽점퍼를 입은 놈, 찢어진 청바지에 부츠를 신은 놈, 선글라스를 목에 건 놈, 입술에 쇠고리가 달린 놈을 포함해 7명이 우르르 올라와 두 줄로 선다. 거기다 나름 심각한 그들의 표정 또한 가관이다. 어쨌건 적막하기만 하던 빈소에 아연 활기가 살아난다. 동생이 옷매무세를 다듬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딸애는 아내를 부른다. 뒷줄에서 제각각 엉성한 자세로 절을 따라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이, 일류 선배님들 여기 계신다니까, 꼭 뵙고 싶다고 해서……” 드럼은 강남의 유명업소에서 일하며, 친구가 하는 음악학원 일도 도와주는 실력파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학원생들이 드럼이 일하는 업소에 모여 회식을 했고, 드럼이 가야한다니 졸라서 함께 온 것이었다. 조금 후에 오르간과 보컬이 함께 와서 어제처럼 어머니께 절을 올린다. 딸애가 음식을 차려놓은 접객실로 옮긴 애들은 빈소에서의 표정과는 딴판으로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떠든다. 메리 크리스마스! 한 놈이 잔을 들며 얼결에 말했다가 주위 눈살에 고개를 팍 숙인다. 아내는 이쪽을 등지고 앉아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자기 동료에게 내 직업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리 없으니 이 이상한 문상객들을 뭐라 설명할까. 그보다 얘들로 아침에 운구를 시킬 작정인지 기가 막혀하는 아내의 걱정이 뒷모습에 어려 있다. 밤을 새워주신다던 경로당 할머니들도 일어나 애들을 힐끗거린다. 좁은 공간에 결코 섞일 수 없는 세 무리가 하나의 공통사로 자리하고 있다. 있으되 보이지 않는 막. 오르간의 어깨를 툭 치고 화장실로 간다. “연말행사 주문받은 일들, 애들 잘 맞춰졌냐?” “걱정 허덜 마소! 성님 이름에 금 가겐 안 할 텐게……. 참, 알토 성, 온다 했는디, 안 왔소?” “알토가 연락 됐냐? 강남 바닥, 오늘은 밤샘 영업할 텐데, 와 지겠냐……, 야, 올겐아, 똥개는 뭐라디? 온다는 말 없었냐?” “하따, 성님도 참. 아! 엄니헌티 죄 진 새끼가 여글 오것소? 아이고, 어째 우리 성님은 그 인간 같잖은 똥개한테만 쪽을 못 쓰까이?” “어떻게든 받아내야 될 거 아니냐? 울 엄마 피 같은 돈인데……” “성님, 처음 투자한 돈 받아낼 거라고, 우리 사무실 팔아 또 넣었자녀? 그라고 우찌 되었소?” “……, 세상엔 포기 못할 게 있다! 이걸 포기하면, 내가 그놈 죽일지도 몰라. 그럼 우린 어떻게 되겠냐?” 담배를 한 대씩 꼬나물고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서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또 눈물이 맺힌다. 화장실을 나오며 키가 작은 오르간이 팔을 높이 올려 키가 큰 퍼스트기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건반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손 위에 줄을 퉁기는 손이 얹어진다. 다시 한 번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찬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베이스가 기라성의 사장과 직원들 사이에서 헤벌쭉 웃으며 허리를 굽실했다. 이번에는 짧은 치마에 키가 큰 여자들이 많아, 다시 졸다가 눈을 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배인과 웨이터들은 다 검은 양복을 입었다. 반품할 거라며 싸놓은 음식들을 풀고 아내까지도 분주하다. “좀 일찍 끝내고 오려는데, 글쎄, 손님들이 나가줘야 말이죠.” “아이구, 대목인데, 저 때문에 일찍 끝내셨네요, 사장님 못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와야죠. 어떡해요,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 참. 나중에라도 성 단장님 오실 거예요. 어쩌면 변 사장님 모시고 올지도 몰라요. 아까 통화했어요.” “아, 그랬어요? 고맙습니다. 자, 뭐 좀 드시죠. 여러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 어머니, 가시는 길이…… 그래요, 고마워요…….” 어머니 생각도 치밀었지만 도화가 내 마음을 알고 똥개를 끌고 오려 한다니, 고마워 눈물이 나려한다. 이제야 그나마 상갓집다워져서 서로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는다. 나도 덩달아 흔감하여 술을 받아먹고 권하기도 한다. 아내는 내가 술 먹는 꼴을 흘겨보겠지만, 아내의 염려보다도 똥개가 오기 전에 내가 술에 취할 수는 없다. 똥개가 온다면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 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어머니 얘기 좀 해주세요. 많이 아프셨어요?” 주춤거리던 베이스가 느닷없이 말하자 좌중의 눈길이 나에게 쏠린다. 어떻게 말로 말할 수 있을까, 그 그림과 소리를. 그래, 똥개가 와서 어머니 앞에 엎드려 사죄를 하고, 이따 화장터에서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오를 때 도화가 살풀이 춤이라도 추어준다면, 나는 그만 어머니의 배를 놓아야 할 것이다. 내 가슴에 비끄러매어진 닻줄을 끊어주고 빈 배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 그날 아침 역시 밤새 일하고 맥없이 퇴근한 내게, 출근하는 아내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업이 깨워 밥 먹게 해요! 학원 늦지 않게. 노인네가 어째 저리 아침잠이 많아질까? 좀 일찍 주무시면 될 텐데, 그놈의 텔레비전, 끝날 때까지 보시니 원…….” 밉살스런 말본새에 가려 말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애를 깨워놓고 잠자리에 들면서 설핏 께름칙했다. 요 며칠 해 뜰 때에 맞춰 매일 하던 아침기도가 들리지 않았고, 아이를 깨우고 밥을 차려주는 모습이 전 같지 않았다. 양로원에 가고 싶다거나 꿈자리가 이상하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어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자는지 잠깐이라도 확인을 해보지 않았을까?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당신이 좀 챙기세요.’ 이렇게 말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아내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본새에는 앙금이 있었다. 거기에 대꾸하자면 결국 내 아침잠만 망칠 테니 일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며칠 남지 않은 12월은 마지막 날까지 바빠야 했다. 나는 쉬어야 했고 잠을 자야했다. 평소대로 어머니는 점심밥을 차려놓고 나를 깨울 것이고, 마주앉아 밥을 먹고, 어머니는 경로당으로 갈 것이고, 나는 가게로 나가 악기를 싣고 호텔 연회장으로 갈 것이었다. 내 또래들의 송년회에서 어린사람 행세를 하며 노래반주를 열심히 할 것이었다. 개런티 위에 얹어주는 팁보다도 행사가 일찍 끝나주어 야간행사 한 건을 더 뛸 수 있길 바랄 터였다. 그러고 가게로 가 취객의 흥을 돋우며 새벽까지 오부리(즉흥반주)로 푼돈벌이라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아래턱이 뒤뜰과 닿아있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뒤뜰보다 낮은 침대에 누워 몸을 옹송그렸다. 나는 곧 잠으로 들어가는 막을 통과해 몸과 마음이 포근한 어둠에 잠겼다. 머리 위로 유리창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소리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아기가 되고 침대는 요람이 되어 일렁이며 현실을 떠나갔다. 너무 눈이 부셨다. 온통 반짝거리는 강물 위로 크고 작은 스팽글에 투사되고 어룽지는 무수한 빛살이 요동치고 있었다. 요람은 하얀 돛단배가 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에는 완벽한 하모니로 어우러지는 소리들이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변화무쌍한 빛의 안개 속에서 연주되는 그 소리는 보이는 음악이었다. 그 위 남빛 하늘에 구름이 층층이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 파르스레한 너울을 쓴 여인이 오르고 있었다. 누구일까? 나는 그녀를 불러야 하는데 도무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득하던 여인이 너울을 벗고 나를 보려는 순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고 돛단배가 세차게 흔들리며 나아가지지 않았다. 놀라 흠칫하며 눈을 떴다. 나는 양손으로 침대모서리를 꽉 잡고 있었다. 찬란하지 않은 한낮의 햇살이 빗각으로 들어와 오래된 장롱과 얼룩진 벽지를 더듬고 있었다. 이 무엇일까? 꿈도 현실도 아닌 시공의 틈 거기, 드리운 막이 스르르 나른한 심신을 휘감거나 풀어주는 몽롱한 순간, 결코 머물 수 없는 그곳에서 그때에 보인 4차원의 그림, 보이는 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적요에 잠긴 집안. 거실에 놓인 접이식 침대에는 아들이 빠져나간 이불이, 벌레가 벗어놓은 고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식탁은 애가 밥을 먹고 나간 그대로였다. 이어지는 이상한 느낌에 별안간 아침에 아내가 한 말이 겹쳐지자 섬쩍지근한 기운이 몸을 휘감으며 진저리가 쳐졌다. 경로당에 가지 않았으면 정좌를 하고 불경을 읽고 있을 어머니가 평소에 하던 일을 하지 않았다면 화가 많이 났다는 시위였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비어있는 딸애의 침대 아래 좁은 바닥, 언제나 그 자리에 어머니는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불경, 안약, 혈압약봉지,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운 자세,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짐과 동시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웅웅웅웅…… 정수리로 들어오는 미세한 진동소리. 그리고 가늘고 희미한 낯선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알아 챌 수 없는 소리와 냄새였는데 나는 느꼈고, 이어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이 등줄기를 타고 뒤통수를 쳤다. 나는 엉거주춤 비틀거리며 엄마-? 불러보았다. 목소리는 천번만번 되울리며 내 귓전에서 맴돌았다. 엄마아아아~ 그 울림을 지우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방이 굉음과 함께 빙빙 돌아가고 머리가 터질 듯 윙윙거렸다. 틀니를 뺀 어머니의 입술은 안으로 말려들어 함몰되어 있었다. 입이 벌어진 동그란 구멍은 무저갱의 입구처럼 보였다. 저 속으로 무엇이 들어갔을까? 엄마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나는 싸울 듯 거세게 달려들었다. “안 돼! 아직 안 돼, 엄마! 일어나 봐, 얼른!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엄마, 엄마아!” 뺨을 비비고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입김을 불어넣고 가슴을 치고 흔들어보다가, 맥없이 쓰러져 어머니 곁에 누웠다. 손은 차가웠고 방바닥이 차진 않는데 이불 속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는 거야, 엄마? 소원 푸셨네, 맨날 자는 길에 가게 해달라고 빌어 쌓더니…… 난, 어쩌라고? 응, 엄마? 이제, 내 소원은 어떡해…….” 몸이 마구 떨려왔다. 눈물과 콧물이 마냥 흘러내려 어머니의 옷과 요를 적셨다. 어딘가로 전화를 해야 할 텐데,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점점 심하게 떨리던 내 몸도 자꾸 오그라들며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바퀴벌레 두 마리가 어머니의 목과 뺨을 오르내리다 사라졌다. 어머니의 몸은 오래 된 배였다. 세월의 강은 얼어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힘을 다해 얼음을 깨며 서쪽 강어귀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닻줄을 그러쥐고 있는 나를 외면한 채.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무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빨이 마구 덜덜거렸다. 아득한 시간이 지난 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학원에서 온 모양이었다. * 기라성 사장이 통화하던 휴대폰을 쭈뼛쭈뼛 내게 내민다. 제기랄! 도화가 아니었다. 똥개의 지나치게 큰 목소리는, 음악소리와 남녀가 뒤섞인 술좌석의 소음 때문일 것이다. - 아, 정 실장! 내가 꼭 가봐야 되는데 말이야. 지금 중요한 약속에 와있어서, 하, 이거 참, 어머님께 정말 미안하지만, 정 실장한테 좋은 일일 수 있으니 좀 이해해 주소. 아! 실은 내 친구가 이번에 카바레를 개업한다고 악단 문제로 만났는데, 내가 정 실장을 적극 밀고 있어요. 능글맞은 똥개의 말에 대번에 부아가 치미는데, 감도 좋은 전화기의 저편에서 ‘나, 여기 있단 말 하지 마, 오빠.’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예에, 변 사장님. 그 마음 압니다, 꽃도 보내주시고, 네네, 근데, 도화가 거기 같이 있어요?” - 누구? 아, 성도화! 성 단장이야 요새 우리 가게 자주 오지. 몰랐나? 성일에서 우리 가게 스페어 대기로 했거든. 아, 성 단장도 같이 얘기 잘하고 있으니, 계약되면 한 턱 낼 준비나 하소.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욕과 울분을 삼키며 잠시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요, 잘되면 좋겠네요. 도화에게도 걱정 말고, 우리 애들 일이나 많이 만들라고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전화기를 돌려주고, 나에게 쏟아지는 마뜩찮은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흘기던 눈길을 거둔 오르간과 베이스가 혀를 차며 술을 따랐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서서히 무너져 바닥에 꼬꾸라졌다. 발인제를 지내고 영구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술이 채 깨지 않아 넋 나간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늘이 잔뜩 내려와 사위는 온통 잿빛이었다. 오르간의 차를 앞세운 영구차는 미로 같은 길을 따라 도시를 벗어났다. 알토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비와 섞여오던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영구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물방울이 사선으로 흐트러지는 차창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었다. - 형, 나 좀 취했어, 추워서 차안에서 혼자 막 마셨어. 미안해…… 어제, 나 혼자서라도 갔어야 했는데, 그 연놈, 데려가려다 일이 꼬여버렸네. 형이 내 몫까지, 어머니 잘 모셔줘요……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도 대답은 않고, 제 말만 잇는 알토는 점점 흐느낀다. - 형, 우리 만난 지 30년이야. 그 세월 다 어디로 갔지? 난 왜 나팔을 불었을까? 고등학교 때 형이 정해준 거였지? 그때부터 형 말이라면 다 들었는데……, 나 섭섭한 적은 있었지만, 형 배신한 적 없어. 알죠? 형, 우리 지금까지 뭐 한 거야? 아니, 뭘, 잘못한거야? 음악다운 음악 하자며? 형이 그랬잖아! 그러면 음악만 했어야지……. 차창에 눈송이가 달려들어 녹아내린다. 흐린 창밖에 알토의 우울한 얼굴이 다가와 있다. 산과 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어디 있는 거니. - 나, 강가에서 눈 내리는 거 보고 있어…… 형, 화음이 계속 안 맞으면, 누가 삑사리를 내서라도 일단 멈춰야 하잖아? 그런데 다 눈치만 보면? 가만히 있는 게 비겁한 건데, 누군들 비겁하고 싶지 않겠어? 응? 아냐, 그냥, 우리 연습할 때 생각나서…… 옛날에 어머니가 팔다 남은 떡 싸주시면 뒷산에 올라가 연습했잖아, 그때가 생각나네! 좀 있으면 어머니…… 눈길 따라 하늘로 오르시겠네. 형,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올겐도 드럼도 베이스도……, 형, 괴로움이 없으면 치열하게 살지 못해, 한도 품고, 그냥 힘들게 잘 살아……, 에이 씨발! 전화가 끊어졌을 때, 차창 밖 저만치 수묵화인양 눈 내리는 언덕 위에 화장터가 보인다. 왠지 낯익은 풍경에 차에서 내린 나는 한동안 주변을 휘둘러본다. 어머니의 관이 화구에 들어갈 때마저 나는 끝내 시원한 울음을 토해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이름이 빨간 빛으로 점멸하고 있는 대기실 의자에 나의 살붙이들이 지친 몸을 서로 기대고 있다. 어머니가 남긴, 지나가면 잊힐 시간의 그림이 애틋하다. 그날 아침의 그림도 소리도 어머니가 보여준 것일까.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하얗게 하늘거리는 동안, 함박눈 송이 송이가 저마다의 진혼으로 살풀이춤을 추는 동안, 나는 地, 水, 火, 風, 네 개째 담배를 태운다. 눈은 허공에서 나부끼다 유유히 산야를 덮어간다. 겨울나무 빈가지에 백화가 피어나고 있다. 바람이 별로 없고 그다지 춥지도 않다. 깊은 산속 암자를 찾아 가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로 오르는 연기에서 향기가 날까 고개를 드니, 눈은 내 얼굴을 씻어주려는 듯 내려앉는다. 이대로 눈 속에 묻히고 싶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고 싶다. 눈을 감자 얼굴에서 녹은 눈이 물이 되어 눈가로 흘러내린다. 알토의 얼굴이 빗물 흐르는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려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그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이다. 퍼뜩 똥개와 도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제야 알토의 말이 섬쩍지근해진다. 설마, 사고를 칠까? 막아야 하는데……, 그냥 비겁해지기로 한다. 무심한 표정의 사내는 어머니의 유골을 모아 기계에 부었고 어머니는 삽시간에 눈보다 짙은 색의 가루가 된다. 아직 내 어머니인 상자를 안고 오르간의 차에 탄다. 조수석에는 아들이 할머니의 영정을 안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유골을 오래 납골당에 안치하려고 생각지 않는다. 깊은 산속의 암자를 찾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머니를 완전히 놓아드릴 심산이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여전히 셋방에 있어야 한다. 오르간은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어투로 보아 뭔 일이 터진 것 같지만 나는 짐짓 창밖으로 눈을 둔다. 눈꽃을 피운 나무들과 희끄무레한 들녘이 뒤로 휙휙 지나간다. 오르간이 백미러로 나를 살피며 말을 하려다 무르춤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호들갑스레 입을 연다. “하아, 참, 이럴 땐 뭐라해야 쓰까요, 성님. 똥개하고 도화가 많이 다쳤능갑소. 시방 병원응급실이라는디…… 아따! 차말로 천벌이 따로 없당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미러로 오르간을 쏘아보며 다음 말을 독촉한다. “참 요상시럽네요이, 도화 고것이 어디 붙어 묵을 넘이 없어서 똥개허고 그딴 델 갔으까이. 아, 쩌거 양수리 뭔 호텔 앞에서 둘이 뺑소니차에 치였다는디요……, 근디, 기라성 사장이, 알토 성님 여그 왔냐고 자꾸 물어쌌네요.” 안개구름 자욱한 저편 허공에 납골당 건물이 뿌옇게 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오르간에게 실없이 묻는다. “야, 올겐아. 너 혹시, 어디 깊은 산 속에 있는 암자 아는 데 없냐?” 시동을 끈 오르간이 뭔 엉뚱한 소리냐는 듯 뒤돌아본다. 눈은 안개비가 되어 흩날린다.  
618 흐엉 1 외1편/권혁재 file
편집자
1647 2018-01-01
흐엉 1 가뜩이나 작은 체구의 흐엉이 유골 상자에 담겨 더 가벼워졌다 오래 견딘 중독증에서 수은처럼 차가운 죽음이, 납빛 살갗을 태우고 세 시간 만에 투명인간이 되었다 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야자수 빽빽한 흐엉의 외딴 집 긴 잠결에 유언도 없이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흐엉이 떠나갔다. 농카이에서 오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당황한 낯빛에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의 푸른 입술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농카이 유 노 농카이?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농카이에서 마셨던 맥주냄새가 시리게 올라왔다 저녁 강변 불빛에 젖어 넘실넘실 거리던 맥주 경계를 푼 그녀의 웃음이 거품처럼 하얗게 넘쳤다 온 지 석 달 된다는 그녀의 머릿결에서 맥아향기가 풍겨 나오는 듯했다 농카이 강변 둑에 늘어선 가로등같이 맥주가 최대한 오래도록 제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여전히 주저하는 몸짓으로 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에 농카이의 저녁 강물이 깊게 밟혔다. 농카이 - 라오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태국의 지명  
617 먼 땅에서 오고 있는, 외1편/김길녀 file
편집자
1495 2018-01-01
먼 땅에서 오고 있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겨울이 있는 도시 흰 눈의 계절을 살아보지 않은 나무의 생애는 외롭지 않고 명랑하다 사계가 없는 푸름 속에서 자란 나무들 성장촉진제를 맞은 키 큰 꽃과 같이 짧은 시간 안으로 긴 삶을 펼쳐놓는다 겨울 한가운데 일월과 이월 사이 식물원 제3산책로 초입에서 만난 늙은 아소카나무 한그루 죽은 이들이 잠들고 싶어 하는 나무의 지붕은 둥글고 따뜻하다 주먹만한 주황 램프꽃 조등처럼 주렁주렁 피어 빗속에서도 환하다 이파리 무성한 나뭇가지엔 공원지킴이 구렁이가족도 함께 지낸다 생애 처음 맞이하는 따뜻한 겨울 속 이국여자 창고 방에 쌓아둔 하양을 찾는 일에 열중이다 우기의 한 낮, 대서양을 넘어서 적도로 숨 가쁘게 달려온 귀한 햇살 지칠 줄 모르고 피고 지는 꽃잎들 족적을 환하게 비춘다 멀리 오면서 두고 온 먼 땅 얼음골의 함박눈 안부 폭설 같은 폭우 속 빗방울에 숨어서 이륙중이다 외투 안 깊이 겨울이야기 한아름 품은 채 오고 있는 당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국에서 만난 사람 기록도 없이 사라진 마을에 대해 말하던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마치 오래전 떠난 나의 누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노파가 기억하는 가족사에 대한 일이라고는 바람이 푸근했던 골목길과 뚱뚱한 나무 한그루 있던 기와집 넓은 마당이었다 노파의 눈빛은 오래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을 닮아 있었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을 이야기는 노파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진다고 했다 처음 간 나라에서 처음 만난 노파 죽은 나의 누이와 눈빛이 닮아 있었다 노파가 들려주던 이야기는 내 전생의 어느 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낯선 노파와 이야기를 나누던 식물원 산책길 12월 우기 속에서 주황 꽃송이 조등처럼 주렁주렁 피어 있었다 잠시, 따스한 바람이 내 곁을 스치고 갔음을 알았을 땐 한바탕 소나기가 다녀간 후였다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징조』 등 여행산문집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제19회 한국해양문학상(시) 수상  
616 작은 시의 노래 외 1편/오형근 file
편집자
1679 2018-01-01
작은 시의 노래 네 속 침묵의 웅덩이에 연꽃 피길 기다리지 말라 네가 올곧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그대로 한 송이 꽃이거늘 無題 아버지의 49재를 마쳤다 이제 죽을 자격을 얻었다 오형근 1955년 서울 출생. 1978년 《시문학》주최 전국대학문예 시 당선, 1988년《불교문학》과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환한 빈자리』, 『소가 간다』등이 있음.  
615 상선약수 외1편/나병서 file
편집자
1521 2018-01-01
상선약수 아래로 흐르더라 지나온 세월 미련없어 보이더라 하늘에서 땅끝까지 아래로만 스미더라 땅끝이라는 곳 가고싶지 않은 곳이 땅끝이라고 그곳까지 아래로 아래로 흐르더라 조약돌 어르신 산에 갔더니 작은 조약돌 시냇 가운데 우뚝 솟아선 바위 보고서 얘야 내가 어릴 적 꼭 너만 했단다 하더라 약력 2015년 2월 2015년 동경미술대전 한일문화교류축제 초대작 참가 *상수리 나무의 노래(일본 나가노시) 2016년 1월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기념 파리시화전 초대작 참가 *능소화 애가 (*france gainsbourg properties 2016 france paris new year exhibition france paris b. vhara/le d` art kfe) 시집 지렁이 똥  
614 가을경주 외1편/김진희 file
편집자
1514 2018-01-01
가을경주 1.황리단길 아직 덜 여문 단풍잎들 한 장 한 장 펼쳐 진열해놓은 작은 서점에서 푸른 빛 감도는 시집 한 권을 샀다 이제 남은 가을 그 시집과 함께 물들 일만 남았다 2.첨성대 옆 핑크뮬리 셔터를 누르면 앵글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급하게 공중에서 달려오는 주황빛 감 한낮의 느닷없는 별똥별 별똥별은 바닥에 철퍼덕, 터지고 기울어진 첨성대 어깨가 새로운 별자리 관측을 위하여 움찔거린다 사람들은 분홍억새 밭에 함부로 들어가 브이를 그리고 서로 뒷통수나 팔 하나, 다리 하나 또는 빈궁한 옆구리 한 켠씩 나누어 갖기도 한다 누군가는 더 크게 울고 아로니아 십 킬로를 주문했다 혼자 먹기엔 가당찮은 양이다 씻어서 널어놓고 며칠을 벼르다 민달팽이 두 마리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내고 효소를 담근다 서늘한 초가을 저녁 바람 500그램, 민달팽이 타액0.2그램, 아직 마르지 않은 물 30그램이 투명 유리병에 먼저 담긴다 간간이 미미한 한숨소리 한 줌도 딸려 들어간다 침침한 나의 눈을 밝혀줄 검은 동공 사이사이 갈색 설탕 대신 사각이는 풀벌레 소리 9킬로를 가득 채우고 뚜껑을 닫는다 유리병 안에도 밖에도 작은 벌레들 울음소리 가득 울려 퍼질 것이다 검은 아로니아는 그 울음들을 삼키고 삭이며 달콤하게 녹아내릴 것이다 짓물러진 눈으로 가을을 건너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그 사이 누군가는 더 크게 울고 누군가는 우리의 유리병 밖으로 영영 사라져 갈 것이다 *김진희 부산 출생. 시집 『굿바이, 겨울』 bullaeya@hanmail.net  
613 배롱나무 외1편/권현옥 file
편집자
1562 2018-01-01
배롱나무 월간 선생 사당 지키는 400년 된 배롱나무 지나간 삶은 버팀목에 기대고 앞으로의 생은 한두 방울 떨어지는 링거병에 맡겼다 굽은 등으로 진분홍 꽃피우고 뒤뚱거리며 일 년 제사 열다섯 번 모시는 청리 체화당 종부 저무는 새벽 바스락거리는 얼음길 밟으며 새벽 미사 가는 길 성에 낀 인력사무소 앞 오들오들 추운 눈들이 모여 있다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반짝이는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오늘은 방과후 교실 재계약하는 날 몇 년째 평가서 나올 때마다 학교 가는 길은 살얼음 자꾸 글 쓰라 카믄 방과후 끊을 거라요, 아이들 투정 한마디에도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성모님 앞에서 원망하다가 성당 환한 불빛 끌어안고 돌아서는 길 쓰레기통에 일회용 종이컵 수북한데 아직도 서성거리는 얼굴들 오늘은 햇살도 밀려났는지 날이 잔뜩 흐리다 권현옥 경북 문경 출생. ‘느티나무 시’동인으로 활동. kho-gn@hanmail.net  
612 라일락 /손달호 file
편집자
1456 2018-01-01
라일락 엊저녁의 충격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지 희붐한 새벽인데 눈이 떠졌다. 나의 상념은 곧바로 그녀의 내실로 옮겨가고 있었다. 남편도 지금 자신의 심장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잠에 곤한 아내를 보며 배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슴에는 지아비의 명줄을 실타래처럼 길게 잇기를 소망하는 흔적이 새벽 강처럼 아래로 흐르고 있으리라. 베란다에 놓여 있을 바이올렛, 베고니아의 향기가 촘촘하게 꿰맨 상흔에 살포시 내려앉아 졸고 있을 것만 같다. 여명에도 또렷할 거친 수술 자국을 바라보며 남편은 무슨 생각에 들었을까? 수화기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여직껏 너무 적조했던 터라 얘기가 온통 수다로 변했다. 나물 비빔밥으로 저녁 약속을 정하자는 것을 남자의 허세가 가로채어 고깃집을 우겼지만 꺾이질 않았다. 밥상과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담백한 나물을 담은 대접처럼 맑고 참했다. 거섶들을 꼭꼭 씹으면서 할끔할끔 나를 쳐다보다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복부에 대수술을 해서 고기는 아직 흡수가 안 된다고 했다. 귀를 의심하는 나에게 여물게 새로 반복해 주었다. 라일락 잎이 유난히 푸른빛을 날리며 수술실 창틈으로 날아든 날이었단다. 아낌없이 주고 싶은 사랑을 실은 라일락 향기가 피 냄새를 껴안아야 했던 시간들, 열네 시간의 이식 수술은 그녀의 간을 황천길만큼이나 멀리 있던 남편한테로 옮겨 놓는데 성공했다. 온몸이 축 처졌지만 정신만은 초롱같았던 그녀. 노력해선 안 될 게 없다는 그녀의 눈빛엔 천정에서 내리쏘던 새하얀 형광등 불빛도 무색해졌지 않았을까? 호흡을 짓눌렀던 물탱크만한 복수를 자신의 간으로 걷어낸 이 순간까지는 그녀의 인생 이력표이다. 초등학교만 서너 해를 같이 다니다가 일찍이 전학을 간 뒤로는 간간이 방학 때 만나는 게 다였다. 어느 겨울방학 땐가 우리는 고입을 앞두고 아랫마을에 토정비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노력해도 마음만 허비하고 얻는 것이 없다는 토정 할아버지의 말에 그녀는 금방 토라져 버렸다. 그녀의 화두는 늘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뽀로통해져 돌아서는 마음엔 최선을 다하면 토정비결도 바꿀 수 있음을 스스로 다짐받고 있었다. 돌담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그녀와는 동갑내기였지만 누나 같은 버거운 동무였다. 소꿉장난 할 때도 남편을 극진히 여기는 그 어른스러움이 왠지 거슬렸다. 기침 콜록거리면 이 빠진 공기에다 먼지 띄운 물을 찰랑하게 담아 숭늉이라며 감기 맞지? 하고는 의심스레 눈동자를 굴려댔다. 고개를 젓고 일어서려면 아래로 처진 바짓가랑이를 꼭 잡아당기며 빨리 마시라고 앙살을 부린다. 찬바람에 까칠해진 양 볼에는 욕심이 끼었고 눈망울엔 열정이 찼다. 조무래기시절부터 싹수가 달랐다. 그녀의 간 이식 집념에는 충무공 정신과 닮은 데가 있었다. 틈틈이 산을 오르내리며 몸에 지방분을 빼내고 맑은 공기를 마셔가며 오장을 신선하게 돋우었다는 얘기, 기름진 음식을 삼가고 텃밭에 손수 가꾼 무농약, 무공해 야채를 섭취하면서 깨끗하게 간을 가꿔온 이력들은 준비된 그녀의 간이식 역사였다. 여자의 간으로 모자랄 양에 대비해 큰아들을 수술대에 대기시켰다는 고백은 유비무환의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으로 수술실에 들어갔다는 절박한 심정을 털어낼 때는 끝내 눈가에 이슬이 굴러 떨어졌다. 그녀 앞에 앉은 내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아니, 몸에 칼은 고사하고 주사 바늘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찔려 본 적이 없는 나는 자꾸만 고개가 밑으로 처졌다. 나는 그 흔한 헌혈에도 솔직히 인색했다. 남아도는 피도 피 같은 피라고 하며 움켜쥘 줄만 알았다. 대중탕에서 흉한 수술 자국을 보면 ‘전생의 업보구나.’하고 방자한 마음을 내기에 급급했다. 한술 더 떠 불행 중 다행이라며 가르치려 든 적이 있었다. 그녀의 숭고한 자비의 상흔은 교만한 내 생각에 일침을 가하였다. 그녀의 삶은 의지를 싣고 철로 위를 달리는 케이티엑스이다. 그녀의 행로엔 장애물이 감히 얼찐거리지 못했다. 사랑과 열정으로 배합된 동력은 제트엔진같이 힘이 있었다. 서산으로 완연히 기운 남편의 사선을 밀어내고 자신의 배 위에 푸른 칼날로 사선을 판 그녀, 나는 비너스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의 가슴 위에다 라일락 꽃 한 송이를 올려놓는다. 손달호 교원문학상(2011년), 한국예인문학상(2017년), 수필집 <<소쇄원>>(북랜드, 2016년) 전 중등학교 교사 snfgjs@naver.com  
611 디딤돌 외1편/ 김가현 file
편집자
1666 2018-01-01
디딤돌 조심히 건너뛰라고 띄엄띄엄 놓인 돌들 붙여 놓으면 게을러질까 봐 태만 부리다 헛디딜까 봐 넘어져 여울물에 젖지 말고 조심히 등 밟고 가라 한다 마음 놓고 건너갈 징검다리 나도 누군가를 위해 만들 수 있을까 어제 못 본 저 디딤돌 거센 물살을 버티며 서 있다 부채 강한 돌풍은 성난 이의 함성이다 여름내 쉼 없이 언성을 높였다가 고함을 쳤다가 수 없는 반복에도 부채는 굳은 의지와 절개로 의리와 원칙을 지키며 시련을 이겨낸 고풍을 감싼다 대오리가 오금을 펼 때 부챗살의 우아함에 세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소용돌이도 안색을 낮춘다 겸허한 손이 온화한 꽃바람을 일으키고 교만한 손이 거센 댑바람을 만들 듯 한 번의 부채질에도 청량한 바람이 일도록 정성을 다해야겠다 한들거리는 춤사위 살랑 부는 미풍에 햇살도 처마 밑 그늘에 나직이 쉬어간다 2017 문학광장 제10회 시제경진대회 장원 수상작  
610 서로 통하는 사이/김인기 file
편집자
1413 2017-12-05
서로 통하는 사이 김인기 순대는 나도 가끔 먹는 음식인데, 근래에야 겨우 거뭇한 색의 비밀을 알았다. 그간 여기에 돼지의 피가 들어간 줄 몰랐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몰라도 그만이었으니까. 하아, 이건 좀 심했다! 이렇게 한탄하던 중 문득 엉뚱한 질문이 떠올랐다. 작년 12월 초순이었다. 누가 거리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 걸 들었던가 보다. 이 친구가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박근혜와 태진아가 무슨 관계에요? 아까 광화문에서 보니까, 사람들이 ‘박근혜는 태진아랑…….’ 그러던데.” 당시에는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기 전이었다. 도대체 이분이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태진아 씨랑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냐? 나도 궁금했는데, 바로 아래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아마도 ‘박근혜는 퇴진하라!’를 잘못 들으신 듯…….” 시위대들이 손에 든 팻말이나 전단만 해도 그 얼마냐. ‘박근혜 퇴진’이라 적힌 깃발도 수두룩했다. 그런데도 현장에서 ‘퇴진하라’를 ‘태진아랑’으로 듣는 그 말귀도 놀랍지만, 이렇게 엉뚱한 질문에도 ‘태진아랑’이 ‘퇴진하라’인 줄 아는 그 감각도 놀랍다. 질문자의 정체야 뭐 그리 중요할까? 저마다 나름대로 추측은 할 수 있다. 혹시 중학생이 아닐까? 이것도 확실치 않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물정 모르는 어른들도 많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이런 개탄에 근거가 있다. ‘이 시대의 한 시민으로서 소양이나 관심이 부족했던가 보다.’ 이런 의심도 드니까. 그러나 이것도 얼마쯤은 꼰대들의 횡포이다. 각자가 누군가에게 ‘시민’이라느니 ‘국민’이라는 둥으로 불리다가 금방 버려지기도 하니까. 이런 처지에서 누가 ‘시민의 소양과 관심’을 들먹이나. 나는 거리에서 행인이고, 서점에서 손님이다. 날마다 밥을 먹고, 밤마다 잠을 잔다. 농담도 한다. 글도 쓴다. 하품도 한다. 이런 일거일동이 곳곳에 미미하나마 영향을 미친다. 만물이 나와 상응한다. 나 때문에 파리나 모기마저도 몇몇은 행로를 바꾸지 않는가. 우리들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상사를 이루어낸다. 그런데 이런 걸 하찮다며 무시하고 난데없는 이념이나 사명을 법률로 강제하면 어떻게 되나? 그게 아무리 고귀하고 절실하더라도 상대방의 동의가 없이는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외부에서 누가 기어이 나서려나. 이게 또 민심을 어지럽힌다. 민의 없는 법치의 폐단은 심대하다. 법의 존엄도 난망하다. 독재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자기들 멋대로 법률을 압제의 도구로 악용하면 준법은 명예가 아니라 바로 굴욕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법원에 가서 해결하자.’는 게 악담이다. 도리어 현행법을 무시하고 권력자에 저항하는 게 자랑이 되고. 과거 내력과 현재 상황을 보면 주권재민의 원칙도 의미심장하다. “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부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것들이 작당해서 내 재산을 빼앗아가지나 않을까?’ 이치가 그렇잖아. 그러나 이건 공연한 걱정이다. 누가 너그러워서가 아니다. 빈민들 역시 차후에 부자가 될 수 있는데, 자기 재산이 남들한테 넘어가기를 바라랴. 부자들이 이걸 납득하고서야 비로소 안도했다. 이 논리에는 전제가 있다. 빈자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 극빈자도 기꺼이 대부호의 재산권을 옹호한다. 이게 어디 재물에만 이럴까? 특히나 개천에서 난 용은 너도나도 환대한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으니까. 악전고투에도 꿋꿋이 견딘다. 더러는 비리에도 너그럽다. ‘그렇더라도 웬만하면 야박하게 굴지 말자.’ 여론이 이러니까, 그 죄를 두둔할 구실도 수두룩하다. 심지어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마저도 종종 망각한다. 이게 이런 만큼이나 그 역도 진실이다. 정의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사회에서는 무장괴한이 관공서를 습격해도 시민들이 통쾌하게 여긴다. 부자가 거리에서 맞아죽어도 그러려니 한다. “과연 하늘이 무심치가 않았구나.” 혹자는 하늘을 들먹인다. “쯧쯧쯧……. 어쩌면 저렇게나 끝까지 흉하나!” 더러는 혀를 찬다. “사필귀정이지, 사필귀정이야.” 아무도 망자를 편들지 않는다. 오늘도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총성이 울린다. 말이 좋아 공권력이다. 군인이나 경찰도 나빠. 공익의 수호자여야 할 것들이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이들 사이에도 갖가지 불화가 생기더니 더러는 외세와 결탁한다. 급기야 내전이 벌어진다. 재화도 불안하니까 바라는 것이다. 온통 미쳤다, 아주 미쳤어. 이게 어느 정도 있어야 충분한가? 불안하지 않을 만큼! 그러나 불안에는 끝이 없다. 어렵다, 어려워. 하물며 제 손으로 이력서 한 장 써본 적 없으면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이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급기야 상속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찬다. 사람은 감정이 있어서 수시로 흔들린다. 그러니 피차 남의 인격을 모독하지 말자. 너나없이 실수할 권리도 있고 분통을 터뜨릴 권리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지. 그 자리가 별나서 ‘유명세’야 치르더라도 생트집을 잡을 것까지야 있나. 누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모두 나서서 침을 뱉을 거야 있나. 저마다 감수성이나 상상력도 제각각이다. 착각마저도 환경과 체험에 뿌리가 닿아있다. 그런 만큼 유유한 태도가 화근일 수 있다. 인간들이라고 다 그렇게 순박하지가 않아. 더러는 남들의 침묵이나 관용을 무죄의 근거로 삼는다. 이들이 바로 잠시 납작 엎드린 자들이다.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이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후인들이 어쩌면 무관심으로 일관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런 몰상식의 극치가 잠시나마 통했다는 이 시대가 이들한테는 흥미롭지 않을까? 여러모로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날이 언제쯤일까?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오로지 그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경험은 함정이 있는 자산이다. 너무 참혹한 기억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는다. 이게 오로지 한쪽에만 집착하는 외눈박이로 만든다. 이들한테는 아무도 말리지 못할 고집이 있다. 더러는 여기에 제 존재의 의의를 두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발언만이 아니라 기억마저도 제대로 하려면 우선 당사자가 용감해야 한다. 휴전 이후 60여년이 지났으나 공포는 여전하다.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주위가 온통 불바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는 통일이 되지도 않는다. 결국은 주변국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어정쩡하게 봉합이 되겠지. 상황이 이런데도 망언을 떠벌리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무지몽매하거나 흉악무도하다. 이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따위 소리가 이리도 쉬이 나오나. 더러는 이런 짓거리가 통하나 보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인식도 좀 명징해야지. 아직까지도 자기들의 행태에 비난여론이 쏟아지자 난데없이 ‘인민재판이냐?’ 떠드는 자들이 있다. 말하자면 인민군들이 엉터리 재판을 열어 민간인들을 마구 죽였다는 것이다. 이게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국군들이 늘 선량했더냐? 여기는 그런 형식마저 없었다. 누구는 저쪽의 손에 죽어서 부당하고, 누구는 이쪽의 손에 죽어서 합당한가? 이럴 수는 없다. 민간인들이 양측 군인들의 오인사격에 죽기도 했다. 더러는 유탄에 맞았고, 더러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작전지역에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도 숱하게 저질러졌다. 희생자들은 지천으로 널렸어도 가해자들은 몽땅 사라졌다. 이게 이상하지도 않나. 비열한 자들! 아무도 말하려 들지는 않지만, 자기들끼리도 총질을 했다. 진실은 왕왕 사람들을 참담하게 한다. ‘눈을 감자. 살자면 이럴 수밖에 없어!’ 이게 체질이 되었다. 이러고도 어떻게 화해와 치유의 길로 나아가랴. 어림도 없다. 철부지들의 무지야 그렇다 하자. 그러나 글깨나 읽었다는 어른들이 고비마다 나타나 추태를 부리는 꼬락서니는 봐주기 어렵다. ‘싫다. 정말 싫다!’ 진절머리가 난다. ‘저들을 제발 안 볼 수는 없나?’ 여기에도 주의해야 할 구석이 있다. 무엇에 질려 영영 관심조차 놓아버리는 게 나쁜 선택일 수 있다. ‘어쩌다가 내가 이러나…….’ 때때로 회의도 든다. 혹자는 후닥닥 물러났다. 누가 누굴 탓할 건 없다. 우리들은 어차피 한계를 지닌 채로 산다. 사람은 각자의 역량과 성품대로 살아야지. 누가 영웅호걸이 되라고 했나. 이른바 팔자라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술꾼의 이런 소망마저도 존중해야 한다. ‘세상 모든 종류의 술을 다 마셔봤으면…….’ 누구는 돌덩이를 만지작거리고, 누구는 애완견을 데리고 외출한다. 누구는 산에 간다. 누구는 노래를 부르고, 누구는 춤을 춘다. 누구는 립스틱 수집광이다. 날이면 날마다 저기 저 양반은 저렇게 바닥에 앉아 뜨개질을 하네. 그러나 누가 알랴. 내게는 다만 무의미할 뿐인 저런 일들로 해서 저들이 미치지 않았을지. 어떤 질문에는 정답이 아예 없거나 너무나 많다. 어떤 질문에는 끝끝내 답하지 말아야 한다. 약간의 훈수가 필요할 때도 있고, 그저 바람잡이 노릇에 그쳐야 할 때도 있다. 나는 대체로 정답보다 질문이 더 소중하다고 여긴다. 영원히 정답을 내지 못해도 좋다. 질문은 가능성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런 눈길을 던진다. ‘봐라, 모모인이 이십여 년 또는 삼십여 년 동안을 알고 지냈다. 직장동료로서 어울려 즐겁게 지낸 날들도 많았다. 이랬으면 이들이 설령 퇴직을 하거나 이직을 하더라도 모두 귀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 비록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그 마음은 한결같아야지.’ 이게 거의 기적에 가깝다. 마치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선배들의 현재가 곧 후배들의 미래이다. 그래도 당장은 자신이 이런 직장이나마 다녀서 다행이다. 자리에서 떠나자 연락도 끊긴다. “그래, 마침 잘 됐네. 짜장면이라도 같이 먹자.” 누가 반갑게 이러지도 않는다니까. 어제까지도 너나들이했던 녀석들이 전화조차 받지 않아. 속이 쓰리다. ‘저런 잡것들을 친구로 알았다니…….’ 이런다고 풀릴 속도 아니다. ‘여태 그걸 몰랐어요?’ 도리어 이런 눈총이나 면하면 다행이다. 이런 곤경이 자업자득이다. 팔자소관이기도 해. 그러나 이런 체념으로 활로를 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너무 몰두했구나.’ 때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이 체제의 포로였구나.’ 그래도 이렇게 자위한다. ‘나는 잘못이 없었어. 나는 나름대로 성실했다!’ 가정사도 불안하다. 너무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를 외면하다 끝내 파경에 이른다. 누가 누굴 덜 사랑해서가 아니다. 누가 딱히 멍청해서도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불화가 있다.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라. 이들 가운데 자기가 바보라 하는 이들이 몇 명이나 있나. 나날의 삶이 이러면서 도대체 누가 누굴 비웃나. 이러니 ‘퇴진하라’를 ‘태진아랑’으로 듣는 거야 별것도 아니지. 누가 내내 이래도 무방하다. 그래도 본인이 딴에는 똑똑하다며 기세가 등등했다. 그래, 그렇다니까! ‘나도 한때는 억장이 막혔고, 더러는 잘못도 저질렀다. 그러므로 자신이 늘 위대했다고는 주장하지 않겠다.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잖아.’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어. 이건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들이 평소에는 한심하다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존재들에도 주목한다. 언제나 버려진 것들은 싸구려로 보인다. 모두 알몸으로 있는데 나 홀로 성장이라거나, 모두가 성장인데 나 홀로 알몸이라거나. 이러나저러나 어색하다. 그러나 이런 외양의 차이도 때로는 거리낌이 없다. 바로 이들이 서로 통하는 사이일 때이다. ‘아아, 나는 통하고 싶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횡설수설하는 중일 것이다. 열망은 있으나 길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는 중언부언하는 중일 것이다. 상대가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나, 여기에 자신이 없다. 그런가 하면 더러는 거짓말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분투하는 중이다. “어휴, 저 머저리!” 그러므로 이런 막말도 더러는 칭송이다. 사람들은 자기 몸의 췌장이나 맹장마저도 탈나기 전에는 어디에 붙은 장기들인지 모른다. 가뭄이 들어야 하늘도 원망을 하지. 뒷담화도 복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걸 홀로 할 수는 없으니까. 바로 열흘 전이었다. 모임에 나갔다. 서로 인연을 맺은 지도 20년이 넘은 분들도 여러 명이다. 이러면 누구누구를 두고 회원이나 문우라 하기는 뭔가 아쉽고 도반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린다. 나는 별반 아는 게 없었으므로 조용히 남들의 의견을 들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본디 작가들은 글을 읽고 쓰는 걸로도 행복한 자들인데, 더러는 이런저런 잡사들을 마지못해 떠맡았다. 그 자리에서 나온 의견이라는 것들의 내력이 대개 이랬다. 그러니 난들 어찌 무심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잠시나마 풍경이 되고자 했다. ‘딱히 별난 것도 없어 보이고, 그저 곁에 앉아 밥이나 먹는데도, 그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재수가 좋다.’ 어쩌면 문학도 이렇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런 선순환이 좋다. 실지로 주위에는 이런 분들도 있다. 나는 이것이 오로지 행운이라고만 여기지도 않는다. 이것도 이럴 만하니까 이런 것이다. 여기서 잠깐 순대 이야기를 더 해 보자. 만약에 내가 갈색의 정체를 예전부터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내 감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이건 으레 이런 거니까. 그러나 뒤늦게 이런 줄 아니까 어째 마음이 편치가 않다. ‘지독하다. 이렇게 피까지 먹을 게 뭐 있나?’ 나는 족발도 신나게 뜯어먹는다. 언젠가는 돼지껍데기도 맛있다며 먹은 적 있다. 이런 처지에 무슨 보살이라고! 그렇잖아. 순대에 피가 들었다며 까탈을 부려? 이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문득 궁금하다. 마침내 ‘태진아랑’이 ‘퇴진하라’인 줄 알게 된 미지의 그 사람은 그새 변했을까? 그가 잠시 손바닥으로 이마를 몇 번 탁탁 치고 말았을 수도 있다. 사람이 변하기는 어려우니까. 그러나 몇 달 사이에 이 사회 분위기는 참 많이도 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딴은 그렇긴 해. 어떻게 ‘퇴진하라’를 ‘태진아랑’으로 듣나. 심하다, 심해! 내가 오지랖을 더 펼치자 익명의 그 인간이 아주 별종으로 보인다. 내 주위에 이런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보다 더 행복하다거나 훌륭하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발표작 [2017.6.16.] 김인기 1962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1991년《월간에세이》로 등단한 이후 수필집으로 『함께 가는 우리들』과『참 좋은 날』을 내었다. 현재 대구경북작가회의와 대구수필가협회 회원으로 있다. 전자우편: gagozigo@hanmail.net  
609 청게/안지숙
편집자
1300 2017-12-01
청게 덩어리 언니, 엄마가 병원 데려다준다고 빨리 나오래. 방문 밖에서 미니가 소리를 질렀다. 잠은, 아까부터 깨어있었다. 나는 몸을 뒤집어 방바닥에 엎드렸다. 묵직한 몸이 배를 눌렀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팔과 다리를 번쩍 들어 버르적거렸다. 한번 그래보고 싶었다. 팔꿈치와 무릎이 헐렁한 느낌이었다. 한바탕 버르적거리고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오른쪽 목에 검푸른 멍이 보였다. 살이 쪄서 둥그스름한 어깻부들기에도 붉은 멍이 선명했다. 어제 차가 한 바퀴 돌 때 부딪친 자리였다. 어제 아침, 내가 오피스텔을 계약했다고 하자 지니는 집들이선물을 사주겠다고 했다. 지니는 나를 끌고 집을 나섰다. 잠깐만 있어봐, 아빠한테 차키 얻어올게. 지니가 길모퉁이에 있는 기장활어횟집으로 달려갔다. 카운터에 삼촌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나는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고 큰길로 내려갔다. 여기까지 오는 데 지니의 도움이 컸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면접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내게 지니가 대학선배를 소개했다. 사람들이 몰라봐서 그렇지, 얘 진짜 실력 괜찮아요. 지니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나를 소개했다. 지니의 대학선배는 초짜인 내게 사보 일러스트와 인디자인 작업을 맡겨주었다. 일이 손에 익으면서 몇 군데 다른 출판사와도 연결이 됐다. 나는 누끼 따는 작업도 마다않고 하루 열네 시간씩 일했다. 오피스텔 전세금을 마련하는 데 4년이 걸렸다. 내가 오피스텔 전세금을 모으는 동안 지니는 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지니는 한 달 전 임용고시에 최종합격을 했다. 그날 지니는 나를 붙잡고 펄쩍펄쩍 뛰다가 친구들을 만난다며 나갔다. 지니가 외출을 하고 혼자 남게 되자 마음이 심란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감이 급한 쇼핑몰 밑그림을 그리다 말고 태블릿 펜을 던져버렸다. 결국 나는 의자를 뒤로 물리고 일어섰다. 내 방이 부엌방이어서 문을 열면 바로 주방이었다. 방문 옆에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있는 대로 꺼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어쩌면 고픈 것도 같았다. 주걱으로 밥통에 남은 밥을 양푼에 퍼담았다. 나이 들면서 많이 나아졌는데, 마음이 불안할 때면 예전 버릇이 나왔다. 임용고시 축하선물로 사두었던 장지갑은 아직 내 책상서랍에 들어있었다. 지니가 횟집 뒤편에서 차를 몰아 내려왔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지니를 보며 헤벌쭉 웃었다. 임용고시 합격 파티는 친구들과 했지만, 지니 곁에 앉는 사람은 나였다. 고장이 났는지 뻑뻑한 안전벨트를 당겨서 채우자 불룩한 뱃살이 눌려 숨쉬기가 불편했다. 매고 있는 시늉만 해. 지니가 차를 출발시키면서 말했다. 나는 벨트를 풀고 창을 내렸다. 지니가 라디오를 켰다. 이것 봐. 나는 휴대폰에 담아놓은 오피스텔 사진을 지니에게 내밀었다. 거실이 방처럼 분리돼 있어서 두 사람이 쓰기에 좋은 구조야. 방은 너 혼자 써. 난 거실에서 작업하고 잠도 소파에서 자면 돼. 음악소리가 시끄러워 나는 고함을 질러댔다. 지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니가 웃으면서 차를 사차선 도로로 올리는데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거 왜 이래. 지니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 순간 쾅, 소리와 함께 차체가 튀었다. 빛줄기가 눈을 때렸고 앞이 캄캄해졌다. 클랙슨이 사방에서 울렸다. 이봐요.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괜찮아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누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주변이 흐릿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차가 부딪치면서 충격으로 문이 열렸던지, 내 몸이 차 밖으로 널브러지듯 나와 있었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정신을 수습했다. 부서진 공중전화 부스에 차 앞 범퍼가 들어가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집으로 가자 마루에 앉아있던 숙모가 달려왔다. 어디 안 다쳤니? 의사는 뭐라던? 지니는 숙모에게 자동차 키를 넘겼다. 차가 한쪽으로 좀 쏠렸어. 새침하게 말하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니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지니가 들어가고 딸깍, 문 잠그는 소리가 났다. 저럴 때 나는 서운했다. 내가 삼촌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다. 지니는 스케치북이며 데생연필 같은 것을 챙겨주며 살갑게 굴다가 기분이 틀어지면 쌩하고 돌아섰다. 지니가 쌩하고 돌아서면 나는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 같았다. 자신이 매정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내가 상처받는 것을 몰랐으므로, 지니의 매정함은 무심함에 가까웠다. 그 무심함이 밉고, 부러웠다. 무심하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있었다. 바다에 나갔다 오는 아버지의 배에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청게의 발이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갑판을 정리하고 그물을 거두어 내린 뒤에도 청게의 끊어진 발이 갑판 위에서 벌벌 움직였다. 그물망태기에서 용케 빠져나온 청게들은 벌벌 움직이는 발들을 타넘으며 뱃전으로 기어올랐다. 무심하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저 독뫼 끄트머리하고 낙동강 하구가 이 마을 앞에서 바다하고 만난다. 그래서 여기를 독뫼마을이라고 안하나. 이삿짐을 싣고 달리는 용달차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었다. 저거는 수심신호대다. 자리를 잘못 찾아 꽂아놓은 신호등처럼 바다 한가운데 서있는 기둥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계속해서 말했다. 기둥 옆에 작대기들이 튀어나온 거 보이나? 저 작대기 개수로 물때를 짚는다. 야광페인트를 칠해놔서 밤에는 등대 역할도 한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고 홀가분해 보였다. 옆에 앉은 엄마는 창밖으로 눈길을 둔 채 조용했다. 용달차에 탄 뒤로 엄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낙동강 하구에 내리쬐는 땡볕으로 갯둑과 포구가 달궈진 여름 한낮이었다. 아버지는 기장 청강리에 식당을 차렸다가 망했다. 식당을 차린 지 얼마 안 돼 주변에 있던 노후아파트가 철거되면서 동네주민이 빠져나갔다. 군청 직원들은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해결했고, 퇴근 후에는 자가용과 부산행 직행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아버지는 식당을 정리하고, 청게를 대주던 아저씨한테서 배를 샀다. 청게잡이가 그렇게 좋으면 자기가 하지, 당신한테 배를 팔까. 엄마가 목소리를 높이면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독뫼마을에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엄마는 선착장에서 회와 소주를 팔다가 기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엄마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장사를 하던 선착장에서 놀았다. 선착장에서 놀고 있으면 회와 소주를 파는 좌판 이모들이 멍게꼭다리를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멍게꼭다리를 씹으며 공기받기를 하다가 선착장 끝으로 달려가곤 했다. 선착장에서는 수문과 배수 펌프장과 독뫼가 한눈에 보였다. 어부아저씨들이 내던진 전어와 웅어 새끼를 차지하려고 날아다니는 갈매기들도 보였다. 푸른빛이 군데군데 섞인 주황 노을이 독뫼산 물그림자에 스며들 즈음, 마을의 배들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수심신호대에 붙은 작대기가 세 개가 되면 배를 타고 나가 그물을 던졌다. 작대기가 다섯 개쯤 보일 때 다시 배를 타고 나가 청게가 걸려든 그물을 끌어올렸다. 새벽 물때에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지던 아버지가 죽고, 몇 년째 소식을 끊었던 엄마가 집으로 왔다. 엄마는 장례를 치르고 수협 아저씨들을 만나면서 바쁘게 보냈다. 사흘 뒤 엄마는 나를 외할머니한테 맡기고 다시 떠났다. 나는 엄마가 사놓고 간 새 옷을 입고 새 운동화를 신고 외할머니와 함께 기차를 탔다. 내가 안고 있는 가방에는 엄마가 사준 24색 크레파스가 들어있었다. 삼촌집에 가면 시키는 대로 해라.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도 보내줄 거다. 열차를 타고 오면서 외할머니는 열 번쯤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심하게 멀미를 했고, 삼촌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토했다. 삼촌과 숙모, 내 또래 여자애 둘이 마루에 앉아 있었다. 나는 토사물을 내려다보며 비죽비죽 울었다. 괜찮아. 울지 마. 두 여자 아이 가운데 머리를 길게 기른 아이가 마당으로 내려왔다. 나는 지니야. 너랑 같은 5학년. 나는 입가에 묻은 것을 닦고 지니를 보았다. 지니가 생긋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지니를 따라 마루로 올라갔다. 삼촌집으로 온 다음날 숙모가 전학수속을 했다. 교무실에서 만난 선생님을 따라 5학년 7반 교실로 갔다. 교실 안에 지니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인사를 하자 아이들이 경상도 억양을 흉내 내며 떠들었다. 종례가 끝난 뒤 아이들이 나를 불렀다. 나는 아이들을 따라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타라. 우리가 돌려줄게. 원판 가장자리를 따라 쇠막대를 드문드문 박아놓은 뺑뺑이 앞에서 아이들이 말했다. 타고 싶지 않았다. 웃는 표정들이 수상했다. 어서 타라니까. 아이들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원판에 올라서자 아이들이 쇠막대를 나눠 잡고 돌리기 시작했다. 금세 속도가 붙었다. 어지러웠다. 멀미가 났다. 내 몸이 쇠막대 사이로 튀어나가 담장에 패대기쳐지는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비명을 지르다 왼손을 놓쳤다. 동시에 왼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붕 떴다. 시소와 늑목과 철봉과 장미넝쿨이 휙휙 지나가더니 시커먼 벽이 눈앞을 덮쳤다. 죽었나 살았나. 아이들이 둘러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도 안 나는데 엄살 떨지 마. 누군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땅바닥에 누운 채 꼼짝하지 않았다. 일어나. 땅바닥에 누운 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죽었는데……. 꿈인가. 아닌데. 분명 아버지 목소린데, 생각하며 눈을 떴다. 나는 방파제에 누워있었다. 얼른 일어나거라. 그러다 청게한테 물린다. 아버지가 말했다. 청게는 여기 들어있는데 내가 와 물리노. 나는 그물망태기를 발로 차는 시늉을 했다. 어디 보자. 아버지가 손질하던 그물을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저씨들한테 가서 당근을 얻어왔다. 봐라. 아버지가 그물망태기를 툭툭 건드렸다. 어, 하는 사이, 그물망태기 새로 집게발이 나와서 당근 끄트머리를 싹둑 잘랐다. 나는 움찔 손가락을 오므렸다. 니 아나. 아버지가 물었다. 뭐를? 나는 아버지가 구멍 난 그물을 손질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청게가 니같이 쪼맨한 아이를 붙잡으면 바다로 끌고 가는 거.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말도 안 된다. 내 말을 못들은 척 무연히 바다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청게가 깊은 바다로 가는 길인데, 만약에 니가 청게한테 붙잡히면 어떻게 되겠노.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해를 등지고 선 채 아버지는 그늘 같은 주름을 접으며 웃었다. 오늘은 바람이 없어서 청게가 바다로 내려가지는 않겠다.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그해 청게잡이 철이 끝날 무렵 죽었다. 그물코에 걸려 넘어지면서 뱃전에 머리를 부딪쳤고, 바다로 떨어졌다. 허참, 사람이 우째 어이없이 죽노.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찼다. 아버지처럼, 나도 운동장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죽고 싶었다. 아니, 아버지처럼 나도 바다로 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 청게를 따라 바다로 갔다. 마을에서 어린 청게들을 방류하면 깊은 바다에서 자란 뒤에 낙동강 하구로 돌아온다고 아버지가 가르쳐주었다. 낙동강 하구에서 짝짓기를 하고, 개펄과 모랫바닥에서 살이 단단해진 청게들은 다시 수심신호대를 지나 바다로 돌아간다고 했다. 뺑뺑이판에서 떨어졌던 날 저녁,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온 지니가 내 방으로 왔다. 다친 데가 어디야? 많이 아파? 잠깐만 있어봐. 지니가 도로 나가더니 약상자를 들고 왔다. 아프겠다. 지니는 살이 벗겨져 불긋불긋한 무릎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오른쪽 뺨과 손목에도 피딱지가 앉아있었다. 약을 적신 면봉을 갖다 대자 땅바닥에 쓸린 상처가 따가웠다. 길게 기른 머리를 귀 뒤로 야무지게 넘기고 입김을 호호 불던 지니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이제 안 아프지? 나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지니가 두 팔을 벌려 내 어깨를 안아주었다. 네가 와서 너무 좋아. 어디 가지 말고 우리집에서 같이 사는 거다. 지니의 입김에 귀가 간질간질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웃었다. 지니는 아침부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숙모와 함께 병원에 갔다. 어제 갔던 병원이었다. 딱히 아픈 데는 없었다. 멀미를 할 때처럼 속이 메슥거렸고, 몸과 마음이 붕 떠서 뭔가 못 견디겠다는 느낌이었다. 의사는 목과 어깨, 등으로 번져있는 멍을 꼼꼼히 살폈다. 멍이라는 게 피가 죽어서 그런 것인데 색이 노래지다가 없어질 것이라고, 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숙모가 얼굴을 폈다. 지니는 밤이 다 되어 내 방으로 왔다. 병원에 같이 가줘야 되는데, 미안해. 나는 등을 돌려 누웠다. 그동안 내가 임용 되려고 고생한 거 너도 알잖아. 어제 사고로 문제라도 생길까봐 걱정돼서 한숨도 못 잤어. 나는 손가락을 구부려 이 사이에 물었다. 지그시 힘을 주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꿈치로 파닥파닥 통증이 올라왔다. 여기가 파랗다. 지니가 내 등 뒤에 누워 어깨를 쓰다듬었다. 멍은 금방 없어지잖아. 며칠 있으면 표도 안 날거야. 지니한테서 술 냄새가 났다. 지니한테서 나는 술 냄새는 삼촌한테서 나는 술 냄새처럼 역하지 않았다. 지니가 내 등에 글자를 썼다. 미.안.해. 파닥거리던 통증이 차차 가라앉았다. 나는 잇새에 물고 있던 손가락을 빼고 돌아누웠다. 다음 주에 오피스텔 잔금 치를 거야. 나랑 같이 가. 지니가 내 어깨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어쩌지, 내일 동유럽으로 여행 가는데. 임용 합격되면 배낭여행 가자고 친구랑 약속 했거든. 너한테 말했는데 기억 안나? 지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우리 둘이서 여행을 가자고 한 적은 있었다. 오래 전이었다. 지니는 세계여행이 꿈이라고 했다. 공부하다가 졸리면 내 방으로 쫓아와서 베르사유궁전과 오로라와 갠지스강과 마추픽추에 대해 인터넷에서 긁어온 내용으로 수다를 떨었다. 나중에 우리 같이 살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다 가보자. 둘이서만 살면 되게 재밌을 거야. 지니의 말에 나는 벌쭉벌쭉 웃었다. 나는 지니에게 어리숙하고 천진하게 보이는 데 온 에너지를 썼다. 우리 순둥이. 지니는 그럴 때마다 곰 인형을 안 듯 나를 껴안았다. 지니가 안아줄 때면 부끄럽고, 슬프고, 외롭고, 고마웠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종종 소공원을 갔다 오곤 했다.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비탈길을 10분쯤 걸어 오르면 운동기구가 놓인 소공원이 있었다. 우리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캔맥주와 새우깡을 놓고 벤치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마을은 오징어 배들이 불 밝힌 밤바다 같았다. 불빛이 어두워지는 마을 저편으로 홍제천이 흘렀다. 저건 수심신호대 같다. 수심신호대는 바다에 서있는 기둥인데 수심도 알려주고 등대 역할도 해. 나는 마을 한가운데 솟은 교회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울에서는 바다 보려면 인천이나 강릉까지 가야 돼. 우리 외갓집이 강릉에 있잖아. 알지? 지니가 말했다. 그럼, 알지. 강릉인 거. 방학 때마다 숙모랑 미니랑 같이 거기 가잖아. 탓하는 것처럼 들릴까봐 나는 속으로 말했다. 지니는 외갓집으로 가면 사나흘쯤 지나서 돌아왔다. 삼촌은 식당 때문에 같이 가지 않았다. 나는 혼자 집을 지켰다. 저녁 먹은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과 마루에 불을 끄고 나면 그때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대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얼굴이 차가워지면서 몸이 뻣뻣해졌다. 악몽을 꿀까 봐 잠드는 게 무서웠다. 잠이 들려고 하면 차갑고 비린내를 풍기는 손이 들어왔다. 옆구리에, 가슴에, 다리에 꾸무럭거리는 손이 달라붙었다. 씨발, 싫다고! 비명이 튀어나오는 입을 내 손으로 틀어막았다. 닥닥닥 사정없이 떨리는 잇새에 손가락을 넣고 콱 깨물었다. 이빨에 찍힌 통증이 비명을 막았다. 악몽에 갇혀 죽는 것보다 비명을 질러 악몽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더 무서웠다. 내가 왜 손톱과 손마디를 물어뜯는지, 피멍이 들도록 손목을 꾹꾹 무는지 지니는 몰랐다. 지니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내 손목에 새겨진 피멍이 지니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일까, 서운해지는 마음도 꿀꺽 삼키면 그만이었다. 지니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원수업을 받느라 늘 지쳐 있었다. 식탁에서 지니가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먹는 데 집중했다. 밥과 국을 먹고, 생선토막과 소시지와 김치를 먹고, 마늘장아찌 같은 밑반찬까지 긁어먹었다. 말이 하고 싶을 때도 먹었고, 말이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먹었다. 먹는 만큼 살이 쪘고, 살이 찌는 만큼 마음이 무뎌졌다. 삼촌은 먹을 걸 입안에 밀어 넣는 내 모습을 못 봐주겠는지 눈길을 돌렸다. 살 것 같았다. 나는 더 많이, 뭐든지 삼킬 수 있었다. 저러다 우리까지 먹어 치우겠다. 숙모의 농담에 지니와 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두고 던지는 농담에 지니가 웃을 때는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마음이 쓰렸다. 마음이 쓰릴 때마다 뱃속에 똬리를 튼 덩어리가 딴딴해졌다. 뱃속에서 딴딴하고 묵직해진 덩어리는 청게의 집게발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로 나를 찔렀다. 지니와 함께 소공원 벤치에 앉아 서로의 꿈을 나눌 때 나는 청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청게를 잡다가 바다로 내려간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뱃속에 뭉쳐져 있는 덩어리가 말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청게를 따라 간 거지. 어린 청게를 방류하면 바다로 내려가거든. 깊고 멀고 너른 심해바다로 간대. 내 말에 지니가 까르르 웃었다. 청게가 어떻게 심해바다까지 내려가니. 헤엄을 치지도 못하는데.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야. 내가 봤어. 지니가 맥주캔을 비우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어떡해. 우리 너무 오래 있었다. 빨리 가서 공부하자. 지니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때처럼,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못했는데, 등 뒤에 누워있던 지니가 일어나 앉았다. 다음엔 우리 둘이서 가자. 동유럽에도 가고 파리에도 가자. 그럼 되잖아. 지니가 내 볼살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내일 못보고 갈지 몰라. 새벽 일찍 공항 가야 하거든. 나는 일어서는 지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놀래라. 지니가 손목을 잡힌 채 약간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나는 지니의 손목을 잡은 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음에 언제? 우리 둘이서 언제 동유럽에 가고 언제 파리에 가? 내 목에서 뻑뻑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지니에게 그런 식으로 물은 적이 전에는 없었다. 따지듯 묻고 나자 분하고 서러운 어떤 감정이 물꼬를 튼 듯 솟구쳤다.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이거 놓고. 지니가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힘을 주어 풀었다. 몸통에서 떨어진 청게의 발처럼 손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올 때 선물 사올게. 미술관 책자 같은 거 괜찮지? 나는 팔을 늘어뜨린 채 말했다. 이사는, 네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하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쇳가루를 삼킨 듯 목이 갑갑했다. 지니가 나가고, 나는 거울 앞으로 가서 입을 벌렸다. 불빛의 각도에 맞춰 고개를 한쪽으로 꺾은 채 목구멍을 살폈다. 목젖 뒤로 퍼런 녹 같은 게 끼어있었다. 보름쯤 지나자 온몸에 퍼런 멍이 번졌다. 의사는 골수검사니 뭐니 몇 가지 검사를 하고는 혈소판감소증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사소한 자극에도 멍이 새로 들 수 있으니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햇볕에 나가는 것도 삼가라고 했다. 햇볕이 피부조직을 손상시켜 멍이 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 경우 혈소판감소증이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생긴 것 같으니 휴식만 잘 취하면 차차 나아질 거라고 했다. 의사의 처방대로 나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종일 방에서 누워 지냈다. 저 언니 보면 이상하게 기분 나빠. 오피스텔 구했다면서 왜 이사 안 가. 방에 누워있으면 주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식탁 치우는 소리가 나고, 숙모가 식반을 들고 왔다. 내가 식탁에서 자꾸 국을 엎고 그릇을 떨어트리자 숙모가 식반에 밥을 차려 갖다 주었다. 어째 멍이 없어지질 않냐. 차차 나아질 거라더니. 내가 몸을 일으키자 숙모가 등을 받쳐주었다. 나는 식반을 잡았다가 도로 밀쳐놓았다. 얼마 전부터 나는 눈앞에 먹을 것이 있어도 입에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다. 입맛 없어도 먹어. 식당도 바쁜데 내가 떠먹여줘야겠니. 요즘 같아서는 손이 열이라도 모자란다. 나는 숙모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지니는요? 아직 아무 연락이 없어요? 이미 수십 번쯤 나는 지니에 대해 물었다. 물으면서, 혹시 전화가 왔는데 나한테 알려주지 않는 건지 숙모의 표정을 살폈다. 올 때 되면 알아서 오겠지. 지니는 놔두고 네 몸이나 신경 써라. 숙모가 내 턱밑으로 식반을 밀어놓고 일어섰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식반에 놓인 젓가락을 잡았다. 방안에서만 지내서 그런가, 갈수록 몸을 움직이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났고, 손과 발이 따로 놀았다. 팔다리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게 아니라 힘 조절이 안 됐다. 거기다 엄지손가락의 관절이 부어오르면서 쇠공처럼 두툼해지는 바람에 젓가락질 같은 섬세한 동작을 하는 데 애를 먹었다. 녹이 쓴 것처럼 온몸이 퍼레지고, 관절이 덜거덕거리는 것 말고도 내 몸에 일어난 변화는 또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살이 붙기 시작해 80킬로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던 몸에서 비곗살이 빠져나갔다. 세 겹 네 겹으로 접히던 뱃살과 옆구리와 어깨에 시루떡처럼 얹혀있던 살집이 사라졌다. 질긴 살가죽이 뼈를 감싸면서 팔다리와 등과 어깨가 막대아교처럼 딴딴해졌다. 뱃속에서 쿡쿡 쑤셔대던 덩어리가 물렁살을 뚫고 나와 전신을 덮어쓴 것 같았다. 살갗이 아교처럼 딴딴하고 끈끈해진 탓인지 날씨가 더워지면서 몸 구석구석이 가려웠다. 한 번 가렵기 시작하면 어깻죽지와 등이, 손목 발목이, 잇몸이 다 미치게 가렵고 근질근질했다. 엄지손가락의 관절이 두툼해지면서 집게발처럼 변한 팔을 반대쪽 겨드랑이 밑으로 넣으면 옆구리와 등의 절반을 긁을 수 있었다. 긁다 보면 딱딱한 피부에서 뭔가 오톨도톨한 것이 만져졌다. 돌기를 긁어낼 만큼 손가락에 힘을 주어 박박 긁어도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근질거림은 살갗이 아니라 몸 안쪽에서 돋아나오는 것 같았다. 몸통 속의 근질거림끼리 부딪치게 하면 시원해질까 싶어 나는 발작하듯 몸을 꿈틀꿈틀 움직였다. 으으, 보기 흉해. 몸을 뒤집어가며 꿈틀거리는데 미니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좀 전까지 식탁에서 쩝쩝거리던 삼촌과 숙모, 미니가 문간에 서있었다. 삼촌과 숙모는 질린 표정이었다. 숙모가 방문을 닫았다. 흉한가. 보기에. 내가. 말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끈적끈적한 땀이 목으로 흘러내렸다. 더운 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갑갑해도 닫아놓는 게 마음이 편했다.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방안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종일 이부자리 위에 엎드려 있었다. 등이 딱딱해지면서 누워있는 것보다 엎드려 있는 자세가 편했다. 온몸을 긁고 뒤집느라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가려운 데도 없고, 기분이 한결 상쾌했다. 관절이 제자리를 잡았는지 덜거덕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거울 앞으로 기어갔다. 벽에 기대어 둔 거울 속에서 청동색의 껍데기를 등에 진 청게가 쇠망치 같은 집게발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냄새가 나서 못살겠다. 너도 우리 눈치 보느라 갇혀 지내는 것보다 혼자 문간방을 쓰는 게 편할 거다. 숙모가 마당에 서서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나는 마루에 엎드려 숙모의 말을 들었다. 마당에서 반사되는 여름햇살에 몹시 눈이 부셨다. 식당에서 갖고 온 밀차를 마루 밑에 대놓고 삼촌과 숙모가 양쪽에서 내 등껍데기를 붙잡았다. 청동색의 등껍데기는 며칠새 더 두껍고 더 단단해져 웬만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혼자 걸어가겠다고 했는데, 숙모가 밀차를 고집했다. 휘뚝휘뚝 걷다 자빠지면 뒷감당을 누가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굳이 밀차를 못 탈 것도 없어 다리를 마루 밑으로 하나씩 내렸다. 밀차에 집게발을 걸치고 올라서는 순간,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다른 쪽 집게발을 쳤다. 불에 덴 듯 화끈한 통증이 덮쳐왔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잡으려고 버르적거리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밀차의 상판 귀퉁이에 가슴을 처박았다. 아이고, 괜찮으냐? 조심을 하지. 숙모가 우는 소리를 냈다. 나는 수선을 떨기 싫어 밀차에 얌전히 엎드렸다. 밀차가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비어있던 문간방으로 옮겨온 뒤로 나는 좀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더 슬프거나 비참하지는 않았다. 몸에 붙어있던 비곗덩어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감정의 거품도 꺼졌는지 웬만해서는 분하거나 서운한 감정이 일지 않았다. 몸의 고통마저 사소하게 느껴졌다. 오른쪽 집게발이 목각인형의 다리처럼 흔들거리고, 밀차 귀퉁이에 다친 가슴에서 푸르스름한 진액이 흘러나왔지만 내버려두었다. 문간방에서 지낸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지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닫이문을 열자 쌀쌀한 바람이 들어왔다. 마당 건너 집안에서 지니와 숙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니는 발령을 받았고,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구해 따로 나가서 살고 싶어 했다. 말소리가 다 들리는 건 아닌데, 집안에서 오가는 어떤 대화는 거의 감지할 수 있었다. 식당공사를 하는 바람에 여유가 없다는 숙모에게 지니는 내가 모아놓은 전세금을 들먹였다. 가서 말해 봐요. 나중에 은행이자보다 높게 쳐서 돌려준다고 하면 되잖아. 숙모가 지니에게 직접 가서 말하라고,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면 또 들러붙을 거란 말이야. 나, 쟤 좀 그래. 스토커 같다니까. 지니의 목소리에는 배낭을 메고 먼 곳을 여행하고 온 피로의 냄새가 배어있지 않았다. 나는 지니에 대해 예전처럼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끔 지니가 마당을 건너와 쪽마루에 식반을 내려놓고 갔다. 나는 지니를 부르지 않았다. 지니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하루 중 대부분을 귀퉁이가 떠들린 장판과 구석구석 죽어있는 벌레들을 보며 엎드려 있거나 잠을 잤다. 몸을 뒤척이던 잠결에 흔들거리던 집게발이 떨어져 나갔다. 진액으로 짓무른 가슴께에서는 고름 냄새가 나고 구더기가 슬었다. 구더기는 살을 뚫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종종 사지를 뒤틀리게 하는 이물감과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뱃속을 관통했다. 통증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때면 선박엔진이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웽, 하는 소리의 진동이 방바닥과 벽을 타고 다리로, 배로, 가슴으로 전해졌다. 사람들 말소리, 웃음소리가 엔진소리에 섞여 날아들었다. 곰팡이로 얼룩진 벽이 물때가 바뀔 때의 바다처럼 일렁거렸다. 바다 위로 발갛게 해가 떠올랐다. 부신 눈을 찌푸리자 수심신호대를 지나가는 청게 떼가 보였다. 바다에서 자란 뒤 강 하구로 돌아와 개펄과 모랫바닥에서 살을 찌운 청게들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있는 거였다. 청게의 기억 속으로 어떤 사람이 들어섰다. 방파제에서 엉킨 그물을 풀고, 바다에서 걸려 나온 찌꺼기를 빼내던 남자, 저렇게 손질한 그물을 던지다 발이 걸린 남자가 있었지. 뱃전에 머리를 부딪치고 바다로 떨어진 남자는 청게 떼를 따라갔어. 청게 떼를 따라 가는 남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붉고 서글퍼졌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벽을 쳐다보다가 그쪽으로 몸을 옮겨갔다. 톱니 같은 게 솟아난 왼쪽 집게다리를 들어 아래쪽 벽을 쳤다. 틈이 벌어져 있던 아래쪽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벽 아래쪽에 생긴 구멍으로 골목을 내다보며 오후를 보냈다. 여자애들 몇이 골목을 들락거렸다. 담배를 피우며 떠들던 여자애들이 몰려가고, 헌옷 수거함 뒤에서 작은 머리통이 삐져나왔다. 갈색 고양이였다. 쓰레기봉투를 노리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고양이를 보자 꾸르륵 허기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지를 모으는 늙은 여자는 매일 저녁 가로등이 들어오는 시간에 나타났다. 밤이 깊어지면 여자애들이 담배를 피우던 자리에 누군가 오줌을 누고 갔다. 술 냄새와 오줌 지린내가 벽의 구멍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취객들의 발걸음 소리가 지나가고, 깜박 잠이 들렸는데 문이 열렸다. 방안의 어둠 속에서 삼촌이 옆구리를 더듬었다. 차갑고 비릿한 손이 달라붙은 살가죽이 길게 벌어졌다. 목구멍에서 녹을 긁는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는 거냐. 엉, 뭐라는 거냐. 삼촌이 헐떡였다. 눈과 귀와 입으로 비린내를 흘려 넣으며 삼촌의 몸이 반쯤 들어왔을 때 길게 벌어졌던 상처가 꽃봉오리처럼 오므라졌다. 아교풀처럼 끈끈한 살가죽이 오므라들면서 삼촌을 눌렀다. 조금씩, 더 단단히 눌러 마침내 삼촌이 뭉텅 잘렸다. 피가 퍽, 쏟아졌다. 잘리고 남은 몸통이 힘줄에 달린 채 덜렁거렸다. 방안의 날벌레들이 들러붙기 전에 피칠갑된 상처 주둥이가 덜렁거리는 몸을 훌떡 삼켰다. 삼촌을 삼켜 없애는 동안 집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오래 전 청게의 몸이 되어 미니를 삼키고, 숙모마저 삼켜 없앴던 건지 기억이 흐릿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지니가 마당을 가로질러 다박다박 걸어왔던 것도 같았다. 지니는 선물을 내밀며 삐친 내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그게 뭐였더라. 미술관 책자였나. 지니가 책자를 안고 서있던 모습이 기억 속에서 돋아났다. 내가 지니를 향해 말을 걸었다. 보기에 좀 그렇지? 놀라지 말고, 들어와. 방문을 열고 머뭇거리던 지니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나는 진심이었다. 지니가 내 얼굴을 뜯어보고 나서 말했다. 그동안 일이 좀 있었어. 프라하에서 아는 선배를 만났는데 몇 달만 가게 일을 도우면서 있어 달라더라. 그 선배, 선물가게를 했거든. 발령 날 때까지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은 거야. 네가 이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돌아오는 건데. 마음이 너무 안 좋다. 많이 힘들지? 지니는 말을 쏟아내면서도 나하고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처음엔 불편했는데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이제 너도 왔고. 지니가 내 등껍데기에 손을 얹었다. 저번에 얻으려고 했던 오피스텔 있잖아. 그 근처에 비슷한 오피스텔이 나왔더라. 네 공인인증서 비번 그대로던데, 그 돈으로 계약하자. 네 이름으로 할게. 괜찮지? 나는 지니를 보려고 턱을 들었다. 지니가 내 등껍데기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생김새가 이상하게 변해버린 애완동물을 보듯 지니는 나를 골똘히 봤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를 애완동물로 보든, 스토커로 보든, 오천만 원짜리 통장으로 보든 상관없었다. 나는 집게발을 들어 지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이래. 이거 놔.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던 지니가 손목을 잡힌 채 방바닥에 넘어졌다. 버둥거리는 지니한테서 달큼한 냄새가 났다. 나를 안아준 말랑한 팔을, 내 상처에 약을 발라준 다정한 손을, 둘이 살면서 여행을 같이 다니자고 말할 때 생긋거리던 얼굴을 삼켰다. 다정하다가 매정하고 매정하다가 다정한 엄마처럼, 내게서 등을 돌렸던 몸통을 온전히 삼키고 나서 지니에게 대답했다. 그럼, 괜찮아. 나는 늘 괜찮다고 했잖아. 나는 괜찮았다. 미니를 삼키고, 숙모를 삼키고, 삼촌을 토막 내어 삼키는 건, 역겹지만 치러야 할 일이었다. 지니를 삼킬 때는 이제 겨우 한 몸이 되어 살겠구나, 생각했다. 뱃속에서 영양소로 변해갈 지니의 몸을 생각하면 웃음이 삐져나왔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속이 좀 메스꺼웠다. 근육과 뼈와 힘줄이 새로 맞물린 데다 집어삼킬 수 있는 건 다 집어넣은 뱃속이 곤죽이 된 모양이었다. 마당은 비어있고, 집안에 인기척이 없는데 웽,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방안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이 흘러드는 벽의 구멍을 지켜보다가 남은 집게발로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몸은, 시멘트를 발라놓은 듯 단단하고 묵직했다. 벽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서 뱃전에서 뛰어내리듯 몸을 내던졌다. 방패 같은 등껍데기가 벽을 칠 때마다 선착장에 묶어놓은 선외기 보트들이 맞부딪칠 때처럼 턱턱 소리가 났다. 금이 가있던 벽에서 흙부스러기가 쏟아지고 굴이 뚫리듯 큰 구멍이 생겼다. 웽, 하는 소리가 사라졌다. 밤의 정적을 가르며 고양이 울음소리가 날아왔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골목 끝 저만치 수심신호대가 보였다. 갯비린내 나는 바닷바람이 먼저 불어왔다. 네가 있어서 너무 좋아. 속살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따라왔다. 잠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서있던 나는 골목으로 터덕터덕 걸어 들어갔다. 한쪽 집게발이 떨어져 나가긴 했어도 걸을 만했다. 야광페인트를 칠한 수심신호대의 빛이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방패처럼 껴입었던 등껍데기와 몸통에서 떨어진 집게발은 방안에 남겨져 죽은 벌레들과 함께 바스러졌다.  
608 체크무늬 외1편/김만수 file
편집자
1710 2017-12-01
체크무늬 평생 그 속에 갇혀 있었다 잔잔한 떨림으로 번져오던 칸 칸 이어지는 직선 무늬를 타고 계단들이 자라 올랐고 그 직선을 타고 떠나왔다 때로는 찌그러지는 체크무늬를 만들고 껴입기도 하면서 세상의 빈칸에 파고들곤 했다 따스하기도 하고 꽉 찬 칸에서 튕겨나 세상의 끝자리에 매달려 대롱거리기도 하면서 젖은 현수막으로 걸려있기도 했다 늑골에 소복한 보푸라기들을 찌르며 마분지 같은 칸들이 밀려와 매달렸다 저녁 새들이 물고 오던 칸들이 있었다 구름 경전이 칸 가득 쌓이기도 하고 다시 그 질긴 교직交織에 갇히고 풀리기도 하면서 헐거덩거리며 왔다 정물 혹은 자화상 자주 창 안에 걸려 있었다 설핏 남은 햇살이 펴는 길을 가고 싶었다 턱을 조금 당기고 걷다가 멈춰 선다 오래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이 조금씩 끌어당기는 거라 생각하며 나를 당겨본다 창 안이다 주전자는 늘 왼쪽에 있고 오른쪽 치마 단이 좀 더 길게 주름져 내린 여자가 주전자와 나란히 앉아 있다 가끔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으로 하여 그 의자에서 내려앉기도 하지만 격렬한 고요 속 그냥 갇혀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아침 치자꽃잎이 고양이를 보고 있는 동안 아무도 창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의자와 종소리와 덮어놓은 경전이 여전히 창 안에 있고 가만히 입 다물고 걸린 벽 문틈 기어드는 바람의 끝이 잠시 곁에 머물다 지난다 약력) 김만수: 포항생. 1987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회원. 포항문학회원 해양문학상. 장시 <송정리의 봄> 시집<소리내기>.<햇빛은 굴절되어도 따뜻하다>.<오래 휘어진 기억>.<종이눈썹> <산내통신>.<메아리 학교>.<바닷가 부족들>.<풀의 사원>  
607 가장 넓은 귀 외1편/최순섭 file
편집자
1686 2017-12-01
가장 넓은 귀 모두가 죽어가는 들판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꽃들이 수런거리는 가을이다 슬픔보다 어둠이 깊어 새벽은 더 멀리 물러나 뉘를 사랑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사는 게 저리 힘들어… 시시콜콜 꽃들이 던지는 말 혀 꼬리 돌돌 말려 흐려질 때 지상의 주파수만큼 간절한 귀들이 울고 있다 하늘은 파랗고 드넓은 접시안테나 천지에 없는 귀 있는 귀 다 열고 가만가만 들어주고 있다 호프집 소소한 저녁 서둘러 레이더를 수리하는 거미 한 마리 찬거리 마련하려고 푸른 나뭇잎 사이로 내려와 가게 문을 열고 있다 비를 뿌리며 다가오는 덩치 큰 먹잇감 먹구름이 무사히 통과했다 회오리도 한입에 삼키는 바람 집 끈적거리는 여름밤 내 발에 감지되는 몇 사람 거미줄에 걸려 허둥거린다. 최순섭 시인. 1978년<시밭>동인으로 작품 활동. 환경신문 에코데일리 문화부장, 한국가톨릭독서아카데미 상임위원, 동국대 경기대 평생교육원 출강, 시집 『말똥,말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