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동백나무 숲에 후박나무 그늘 아늑한

 

오동도 전망대 아래서 매점을 하는 그녀는 수화가 아니었다.

수화, 그녀는 여전히 석천사 공양보살로 있었다. 매점에 있던 처녀는 바로 수화의 딸이었다. 나는 아내가 왜 나를 이 오동도로 향하게 했는지 그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끝내 아내는 나를 울게 만들었다.

 

낯선 길이었다. 30년 만에 온 길은 어디에도 옛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여수 역 이정표만 보고 달리고 또 달렸다. 역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사각형의 역 건물은 이미 예전 모습이 아니다. 일본식 건물이었던 역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무척 작은 역이었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지푸라기들이 날아다녔다. 아마 그 때가 정월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네모반듯한 작은 역 앞에 가지런히 정차된 승용차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상가 건물들이 즐비했다. 역을 들락거리는 사람도 없는 것을 보니 기차 시간이 아닌가 보다. 옆자리에 놓았던 동백 꽃무늬 실크 보자기로 쌓인 상자를 조심스럽게 보듬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역 안으로 성큼 들어갈 수가 없다. 광장에 있는 홍익 매점, 홍익 스넥이라는 상점 앞에 늙은 촌로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담배 생각도 간절히 났지만 담배 한 대 달라는 말을 건네기는 싫고, 그렇다고 한 갑을 사기도 뭣하고 하여 우선 홍익이란 말을 곱씹는다. 낱말이 정겹다. 弘益, 널리 이롭게 하는 이름 아닌가. 홍익 매점을 바라보고 한참을 서 있었나 보다. 갑자기 뱃속에서 꾸르르 소리가 난다. 그래, 우선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역사 주변을 둘러봤다. 제법 현대식으로 잘 지은 녹원 갈비집도 있지만 어쩐지 도로 옆에 붙은 허름한 식당에 더 정이 간다. 돌산갓김치 식당, 해풍 식당, 두 곳 중에 해풍이란 낱말이 맘에 들어 그 집으로 들어섰다. 뚱뚱한 아주머니와 날씬한 아저씨는 아무리 봐도 환갑은 넘었을 것 같은데. 아주머니의 푸짐한 몸매와 인상이 어딘지 낯이 익다.

수화, 그녀랑 헤어지기 전에 같이 저녁을 먹었던 집은 아닐까.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나 싶어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조차 없고 고개 푹 숙이고 밥숟가락만 들었다 놨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집이었을까. 그 땐 젊고 예뻤던 아주머니도 세월이 저렇게 삭혔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도 저 아주머니보다 더 추레한 모습 아닌가 싶어 새삼스럽게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한다.

“백반으로 주시고 조미료는 쓰지 마십시오. 소주 한 병 주십시오.”

모서리가 닳은 직사각형의 나무 상 두 개가 놓인 식당 안에는 나 외엔 손님이 없다. 상 앞에 앉자마자 술과 밥을 청해 놓고, 무릎에 얹었던 보자기로 싼 네모 상자를 옆에 놓았다. ‘여보, 당신 원대로 여수에 왔소.’

나는 보퉁이를 쓰다듬었다.

그 사이 물이 나오고, 술과 김무침 안주가 먼저 나와 빈속을 술로 데우는데. 싱싱한 갈치 굽는 냄새가 나더니 금세 밥상이 나왔다. 갈치 한 토막에 콩나물, 마늘장아찌 등 여남 가지 나온 반찬이 짭짜름한 것이 입에 맞는다. 특히 사골 육수를 진하게 내어 콩나물에 붓고 끓여야 제 맛이 난다는 얼큰한 콩나물 해장국이 별미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지만 입에 착 붙는 것이 먹을 만하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며칠인지라 뱃속이 금세 거부반응을 보인다. 술 한 잔을 더 털어 넣고 뜨거운 국물을 후룩후룩 마셨다. 국 한 그릇을 더 청했다. 아낙은 사골 국이라 금세 끓여 내야 맛있다면서 조금 기다리란다.

나는 주인 남자를 청해 술을 권했다. 소주 한 병이 금세 바닥났다. 다시 나온 국물에 밥 한 그릇을 말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어 치우고 숟가락을 놓았다.

“맛있을 께랍?, 근디 저거시 뭣이다요”

허겁지급 밥을 먹었던 탓일까. 전라남도 특유의 억양으로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나는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과 입가를 훔치며 씩 웃으며 말없이 보자기를 툭툭 두드렸더니 주인은 알았다는 듯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다시 거리에 나와 역을 바라보고 섰다.

그래,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여보, 당신과 함께 가 보는 거야. 우리가 살아온 날의 흔적과 비할 바 못되지만 당신이 그토록 원했으니 당신 원대로 해 줄게. 그래야 당신도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겠지.

나는 보퉁이를 소중하게 안고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냉방장치가 잘 된 역사 안은 서늘했다. 바다가 보였는데 싶어 창가로 가 봤지만 정차 되어 있는 기차만 눈에 들어왔다. 역사 플랫폼으로 들어갔더니 그제야 키 큰 나무들 사이 멀리 바다가 보였다. 저기 어딘가 선착장이 있을 텐데.

수화, 그녀랑 같이 쾌속정에서 내려 역까지 걸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멀리 바다를 봤다. 크고 작은 배들이 물 위에 부표처럼 떠있다. 움직임을 저지당한 것처럼 아무 요동도 없는 배를 보면서 나는 수화, 그녀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무리 그려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형상이 없다. 너무 오랜 세월 묻어버리고 산 탓일까. 묻었다하면서도 나는 그녀를 전혀 묻은 적이 없는데. 왜 그녀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는 것일까. 긴 머리를 묶었었지. 키가 컸든가. 작았든가.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아담했던 것 같다. 품에 쏙 들어오던 그녀, 그녀의 형상을 그려보니 어느새 아내가 그 자리에 서 있다. 단아하던 모습, 언제나 한결같았던 편안함과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주던 그녀, 겨우 오십도 못 채우고 떠나간 그녀, 갑자기 발병한 자궁암으로 이승을 떠난 그녀, 자궁암은 자궁 적출수술만 하면 완치 가능하다는데 그녀의 암은 이미 온 몸에 퍼진 상태였다.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몰랐더란 말인가. 아파도 참았을 것이다. 참는 것이 아내의 주 특기였으니까.

그녀의 소원대로 나는 수화를 찾아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여수 역을 나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여보, 여기야,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지만 여기 맞아.

나는 크고 작은 배들이 방파제 안에 둥글게 묶여 있는 것을 바라보며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내는 아직 내 품에 안겨 있다. 내게 수화는 과거지만 아내는 현재다. 그 아내가 과거가 되면 나는 어떻게 할까. 막막하다. 아내를 절대로 놓아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아내는 자꾸만 수화를 찾으라고 재촉한다. 언제부터 아내에게 그녀가 그렇게 소중해진 것일까.

“당신, 수화, 그녀를 꼭 찾아야 해요. 만약 당신처럼 그녀도 평생 당신을 가슴에 품고 있다면 분명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산 이십여 년의 세월,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것도 행복일 때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당신이 내게 소홀했던 적이 없으니까. 난 믿어요. 그녀만큼은 아니라도 내 자리도 분명 당신 마음 속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그 자리에서 시작하세요.”

아내는 왜 그랬을까. 좀 더 일찍 나 때문에, 아니 내가 들려준 사랑 이야기 전부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딴 여자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 나랑 사느냐고 따지지 않았을까. 차라리 그렇게 부부 싸움이라도 하면서 살았다면 난 오히려 홀가분하게 아내를 떠나보낼 수 있을 텐데.

나는 다시 길을 되 집어 역 있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도 오소소 한기가 든다. 그녀의 흔적이 나를 서럽게 하는 것인지, 아내의 짧은 생이 나를 서럽게 하는 것인지.

 

내가 여수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대학에 낙방하고 재수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떠난 여행길에서였다. 서울 신림동 집에서 가볍게 챙긴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났던 내가 남해 대교까지 내려간 것은 순전히 남해 대교 때문이었다. 미국의 금문교를 본떠 만들었다고 광고된 다리를 보고 싶었다. 남해가 서울에서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줄도 몰랐으니 진주에 도착해 하룻밤을 여관에서 자고, 다음날 남해 가는 차를 갈아타고 겨우 도착했던 시각이 점심때였다. 점심도 굶고, 남해 대교를 건너 다리 밑에 있는 선창가에 나가 얼쩡거리다가 만난 것이 그녀였다. 그 때 막 떠나는 쾌속선 배가 있었다. 하얀 배가 아주 이색적이었다. 카페리 호라고 했지만 여객선이었는지 유람선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다만 그 배를 타고 싶었지만 내겐 집에 갈 차비 밖에 남지 않았다. 배를 타고 싶은데. 배 삯이 없으니 탈 수가 없었다. 배 삯은 또 너무 비쌌다. 배가 떠난다고 긴 뱃고동을 울렸다. 사람들이 서둘러 승선을 했다.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쫓으며 선창가에 서 있었다. 그 때 선뜻 다가선 것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그녀였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든 무척 따뜻해 보이는 털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저 배 타고 싶지요?”

“타고 싶은데 뱃삯이 너무 비싸네요.”

“그래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매표소로 뛰어가더니 배 표 두 장을 끊어 와 뱃전으로 뛰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빨리타 라는 신호였다. 아주 잘 아는 사이처럼 구는 그녀의 선심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미지에 대한 동경 탓이었다. 배를 타고 싶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만 살아온 내게 바다와 배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배를 탈 수가 있다. 앞 뒤 잴 필요도 없이 나는 뛰었다. 승선이 끝난 배가 닻을 끌어올리기 전에 배에 뛰어내렸다. 여자는 생긋 웃더니 선실로 들어가 앞자리에 앉았다. 나 역시 그녀의 뒷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가만히 주시했다. 저 여자가 무슨 맘으로 내 표를 사 준 것일까. 내가 어수룩해 보이는 것일까. 여자는 창밖만 바라봤다. 뒤에 앉은 내게 일별도 주지 않았다. 어찌 보면 논다니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천진난만해 보이는 여자였지만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돈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고, 배도 처음 타 보고, 여수라는 곳도 처음인 내게 그녀도, 바다도, 배도 모두 도박이었다. 좋다. 나도 남잔데 유혹하는 여자를 마다할 까닭이 없지. 어디든 가 보는 거야. 어차피 집 나왔으니 안 되면 노가다라도 하여 차비 좀 벌어 집에 돌아가지 뭐. 그렇게 맘을 다지고 나니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밀조밀한 섬을 돌고 돌아 배는 물 위를 매끄럽게 지나갔다. 천천히 가는 것 같은데. 크고 작은 섬들이 휙휙 지나쳐 갔다. 나는 바다 풍경에 눈을 고정시킨 채 생각에 빠졌다. 한려수도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 수백 척을 침몰 시킨 바다 아닌가. 역사의 현장을 답사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진다. 내가 거북선을 타고 창을 들고 섬과 섬 사이를 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배를 첨 탄다더니 넋이 나갔군요. 다 왔으니 내릴 준비해요.”

여자가 몸을 돌려 돌아보며 손으로 내 가슴을 쿡 찔렀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여자의 생글거리는 얼굴만 바라보는데. 뱃고동을 크게 울리면서 배는 천천히 선착장 앞으로 들어섰다.

한 40여분 탔을까. 여수 앞바다였다.

“아쉽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을 챙겼다. 가방이래야 어깨에 걸치는 보라색의 조그만 것이었다. 배를 탄 사람이 여남 명밖에 안 되었지만 그 사람들이 다 내리도록 뒤에 쳐졌다가 마지막에 배에서 내렸을 때 여자가 물었다.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아니오. 처음입니다. 이상한 곳에 온 것 같아요. 배에서부터 말귀를 못 알아듣겠어요. 어디 외국에 나온 것 같이.”

“전라도 사투리가 좀 특이해서 그래요. 제주도 사투리보다는 그래도 많이 알려졌을 텐데. 내겐 익숙한 곳이지만. 사실 나도 아직 이곳 사람들 사투리를 다 알아듣지는 못해요. 어디 가실 거예요? 아참, 처음이랬지. 갈 곳도 없죠?”

당연한 것을 그녀는 묻고 있었다.

“음, 그럼 어떻게 할까. 나랑 같이 다녀요. 나도 여행 나온 참인데. 여기저기 구경할 곳이 많지만 우선 역에 먼저 가요. 기차 시간표를 알아봐야 하니까. 참 나 수화예요. 수화. 그 쪽은?”

“이 정각이요”

부처처럼 삶의 깨달음에 이르라는 뜻으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준 이름 정각, 정각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대학 입시에 낙방하고 아무도 몰래 집을 뛰쳐나온 내가 나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에게 코 꿰어 다니는 것이 남세스러운 일 같지만 그 곳은 낯선 곳이었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조차 없는 낯선 곳이란 것이 참 편하고 좋았다.

‘정각’ 여자가 입속으로 가만히 내 이름을 외더니 내게 바짝 다가서서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 눈 속에 내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을 감아버렸다.

“당신 좀 귀여운 데가 있어. 앞으로 우리 친구하자.”

“도대체 당신이란 여자 몇 살 먹었소? 말을 탁 까네. 보니 나랑 비슷할 것 같은데.”

내가 볼멘소리를 툭 내지르자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아이고, 떠꺼머리 총각님, 지가 요래 뵈도요 유부녀랍니다. 성질나서 집을 나와 뿌렀지만. 허니 내가 어른이지. 아직 솜털도 안 마른 총각보고 예예 할까 그럼? 꼭 나이를 알고 싶다면 말하지 나 스물 셋.”

난 그녀를 누나라고 불러야 했지만 곧 죽어도 누나 소리가 안 나와서

“저기요 그냥 수화라고 하면 안 될까요? 친구 하자했잖아요.”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었다. 무슨 이유로 집을 나왔는지도 모르고, 정말 유부녀인지도 모르지만 우린 의기투합해서 역에 들어가 기차 시간표를 봤다. 서울 가는 기차는 그 곳에서 아예 없었다. 순천 나가서 기차를 타고 가서 그 곳에서 다시 갈아타야 했다. 그것도 다음 날 아침 9시 몇 분에 있었다.

내가 실망하는 표정이자 수화는 그것 보라는 듯이 웃으며 ‘클 났다. 순진한 숫총각 내가 잡아가야겠네.’ 하면서 놀렸다. 역을 나오니 여자는 자신만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역 앞에 있는 재래시장에 들어가더니 사과를 한 봉지 샀다. 내게 그것을 들고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가 찾아든 곳은 산비탈 숲 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절 마당이었다. 미래산 석천사! 요사 채에 신발들이 가득하다. 동안거를 맞아 불교 학생회에서 온 학생들이 참선중이라는 것이다. 나도 그 속에 한 사람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설법이나 배우며 며칠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수화는 서슴없이 공양 간으로 들어가더니 공양주로 있는 늙수그레한 아주머니에게 무슨 이야긴가를 하더니 나보고 따라 들어오라 한다. 그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니 내 인사를 받고 ‘반찬 없어도 마이 드이다.’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밥솥을 뒤져 밥 두 그릇을 퍼 담고, 나물과 된장국을 떠서 부뚜막에 놓더니 나 보고 걸터앉아 먹잔다.

“배고팠지? 보살님께 부산서 온 남동생이라 했어. 누나 대접 잘 해야 해.”

밥을 먹으면서 수화는 석천사의 내력을 간단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나는 역사 공부 새로 하는 셈치고 귀를 기울인다. 여수는 이순신 장군과 왜군을 빼면 이야기가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모든 유적지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다. 조선조 초에 왜적의 침략으로 경상도 뿐 아니라 전라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입이 속출하자 서해안 진출 및 전라도 길목에 위치한 여수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을 설치하여 417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 존속하였다 한다.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장소 선소, 충민사, 진남관,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 세검정, 군기고, 굴강, 풀뭇간 등 모두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군에 얽힌 이야기들이 산재한 곳이다. 석천사도 그 중의 하나다. 충무공을 흠모한 승군 자운선사, 옥형대사에 의하여 창건된 절이라 한다.

밤이 깊었다. 그 때만 해도 그 절엔 전기 시설이 없었다. 촛불과 석등에 불을 밝힌 절간은 현실 같지 않았다. 저녁에 그녀랑 산책을 나갔다. 석천사 뒷길을 돌아 숲길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낮에는 엄마처럼, 누나처럼 굴던 그녀도 밤이 무서운가 보다. 함께 호젓한 산길을 걷자 슬그머니 내 손을 잡더니 아예 팔짱을 끼고 착 달라붙는다. 나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하루 만에도 그렇게 정이 드는 것이 남여일까. 멀리 여수 만에 떠있는 배의 불빛도, 길 아래 아슴푸레하게 내려다보이는 길쭉하게 뻗은 여수 읍의 불빛이 참으로 아늑했다.

“근데 누나, 왜 집을 나오셨어요? 아이는 없어요?”

“누나 소리 징그럽네. 둘이 있을 땐 그냥 수화라 불러. 친구잖아 우리. 그리고 아이는 무슨.......”

한참을 뜸을 들이며 앞서 걷던 그녀가 다시 내 곁에 오더니 살그머니 팔을 잡았다.

“난 말이야. 돈에 팔렸어. 우습지? 우리 아버지가 날 무식한 뱃놈에게 팔았어.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가 나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야. 나 부산이 고향이야. 아버지가 부산 어시장에서 건어물상을 해. 그 사람과 거래를 했다더군. 무슨 돈 관계가 얽혔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어느 날, 조그만 회사의 경리를 보던 내게 강제로 결혼하라고 했어. 결혼날짜도 아버지 맘대로 받아놨다더군.”

그녀는 부산에서 여상을 갓 졸업한 풋내기 사회 초년생으로 세상 물정에 때도 묻기 전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물설고 낯선 순천으로 오게 되었단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결혼을 했으니 결혼 생활이 평탄할리 없었다. 더구나 뱃사람이었던 남편은 늘 바다에 나가 살았고, 가끔 집에 와도 살가운 정이 없었다. 더구나 잔정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고, 모질기조차 했던 남자에게 정을 붙이기엔 그녀는 너무 어렸다.

“한 달 쯤 전일까. 그 남자가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들어 온 거야. 난 그 남자 몸에 배인 비린내가 싫어. 정말 싫다. 아무리 목욕을 해도 그 비린내는 가시질 않는 거야. 내가 잠자리를 거부하자 그 남자가 이러데. ‘너 아니라도 여자 있다. 그 여자는 나 없으면 못 산다. 넌 돈에 팔려온 여자야. 그 사실을 잊지 마라. 너거 아버지가 널 팔았어. 나 아니었으면 너거 집 거덜 났을 거다. 은공도 모르고 잘난 체 하는 나쁜 년.’ 이러는 거야. 그 남자랑 살 붙이고 사는 여자가 여기 여수 어디 바닷가에 있다나. 대포 집을 한대.”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지만 친정에도 갈 수 없고, 나선 김에 여수에 가서 그 여자 얼굴이나 찾아보자고 여수로 찾아든 길이란다. 처음 여수 역에 내렸을 때는 참 막막하더란다. 아는 사람도 없고, 잘 곳도 없고, 말도 잘 통하지 않고, 하여 길가는 사람에게 가까운 절을 물었더니 석천사를 알려 주더란다. 절에 찾아와 주지스님께 사정 이야기를 하고 그 때부터 이 절에 있게 됐다면서. 낮엔 여기저기 바닷가를 쏘다니며 대폿집 한다는 여자 집을 수소문 해 봤지만 알 수가 없고, 며칠 지나자 그게 다 부질없는 짓 같아서 접어버리기로 했단다. 오늘 아침에 유람선 선착장까지 걸어갔다가 남해 가는 카 페리호가 있어 무조건 올라탔었고, 그 배가 오후 2시에 출발한다기에 남해 시내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나를 만난 것이란다.

“그 남자가 찾으면 어쩔 건데?”

“아마 지금쯤 우리친정이 난리 났을 거야. 보나마나 뻔하지. 나 안 찾아내면 돈 갚으라고 우리 아버질 닦달하겠지. 어떻게든 이혼할 길을 찾아야지. 내 인생 이렇게 종치기는 싫어. 내 꿈이 뭔 줄 알아? 화가야. 돈 벌어서 미대 가려고 했는데. 가자. 내 방에 가면 여기 와서 스케치 한 것들 있어. 보여줄게.”

그녀의 방은 대웅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와 뚝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다. 판자로 얽기 설기 엮은 하꼬방 같은 방인데. 그래도 옆에 화장실도 있고,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방을 혼자 쓰고 있었다. 방구석에 그녀의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스케치북을 폈다. 섬세한 필치다. 나도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극성으로 미술학원에 다닌 경험이 있어 스케치라면 좀 자신이 있지만 그녀처럼 섬세하진 못했다. 여수의 해돋이, 여수항의 풍경, 기차 길 옆에 사는 사람들, 재래시장, 해수욕장 풍경, 나무와 숲, 섬과 바다. 두툼한 스케치 북에는 그림들로 꽉 차 있다. 새벽에 일어나 공양 간 일 하고, 절 청소 끝내고 나면 남는 시간은 돌아다니며 스케치 하는 것이 일이란다. 스케치북을 들고 있지 않았잖아 라는 내 말에 웃으면서 그녀가 내 놓는 것은 가방 안에 든 작은 스케치 북이다. 그 곳에 대충 잡아와서 집에 와서 틈나는 대로 다시 그린다고 했다. 나중에 이젤과 유화 물감을 사게 되면 이 스케치 한 것들을 다 화폭에 담을 것이라고 했다.

“근데 왜 이 방에 혼자 있어?”

“원래 이 방은 오갈 데 없어 절에 와 살던 불쌍한 할머니를 위해 만든 방인데. 그 할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셨데. 그 후 허드레 창고로 사용하던 것을 내가 대충 치워서 기거하는 거지.”

“절에는 밥값 안 내도 되나.”

“몸으로 때우는 거지. 여기 공양주가 좀 게을러 터졌거든. 동네 아주머니가 오며 가며 스님 뒷바라지를 하는데 영 맘에 안 차나봐. 그러니 스님은 내가 푹 눌러 있었으면 싶지. 이래보여도 새벽 세시면 발딱 일어나서 밥 하러 가거든. 음식 솜씨 좋지 바지런하지. 나 같은 공양주를 어디서 구해. 그러니 공짜 아니잖아.”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서로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정말 내 옆에 없었다. 나중에 밥 먹으러 오라고 데리러 온 그녀를 보고 나는 눈이 부셨다. 헐렁한 승복 차림의 그녀의 또 다른 변신에 놀라고 있었다.

 

여수 역까지 다시 온 나는 승용차에 올랐다.

아내를 옆 좌석에 얌전하게 앉히고 석천사 쪽을 바라봤다. 그 절엔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옛 모습이 사라져버렸을 절, 절 앞으로 높이 오른 아파트 건물과 빼곡하게 들어 찬 건물들을 바라보며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저 절엔 가지 말자. 대신 다른 곳에 가자. 당신과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절이 여기 어디 있을 거야. 석천사는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담한 절만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만성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여보, 만성리 해수욕장 알지? 검은 모래가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고 한 말 기억하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해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든가. 그 곳에 가고 있어. 그 곳이었어. 그 때 난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몰라. 그녀를 난 평생 잊지 못하고 내 가슴에 묻어두고 살 거란 사실을.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정말 그랬어. 그때 이미 내 영혼이 오직 그녀 때문에 숨 쉬고 살게 될 것을 예감했었는지 몰라. 내 기억엔 지금 이 길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던 것 같은데. 고개 하나를 넘어 시골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에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지. 그런데 너무 변했다. 만성리 해수욕장 팻말을 보니 전혀 반대 방향이네. 시내를 들어가서 빙 둘렀던 것 같은데. 여수 역에서 바로 길이 나버린 건가봐.

 

그랬다.

다음날 우리는 만성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주지스님께 텐트를 빌려왔다. 주지스님이 등산을 좋아해서 등산 장비는 다 갖추고 있다고 했다. 저녁노을이 멋지다며 노을을 스케치 하고 오겠다고 했더니 추운데 텐트를 가지고 가서 쳐 놓고 놀다 오라고 했단다. 스님이 그녀에게 너무 자상하게 군다 싶어 은근히 질투심이 났지만 나는 부산에서 온 동생 역할을 제대로 해야 했다.

여수 시장에 들어가 장을 봤다. 쌀 한 봉지, 감자 서너 개, 고등어 통조림, 쥐포, 과자, 소주를 샀다. 시장 본 것을 배낭에 넣어 등에 걸치니 영락없이 연인끼리 여행 나온 형색이다. 수화가 어찌나 사근사근한지 정말 그녀는 이상한 여자였다. 잠깐만 같이 있어도 십년지기나 된 듯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만성리 해수욕장이라는 장소에서 내렸다. 길옆에 허름한 가게 집이 있었고, 그 가게 집을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 곳이 바로 바닷가였다.

검은 모래로 유명하다는 겨울 해변에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이 우리 둘 뿐이었다. 바다 곁에는 나무가 쭉쭉 뻗어있었고, 풀밭도 있었다. 우리는 그 풀밭에 텐트를 쳤다. 텐트를 쳐 놓고, 등산용 작은 가스버너에 불을 붙여 커피를 끓였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들에 익숙한 것인지 몰라도 너무 익숙했다. 나는 남자 체면을 구길 정도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숙맥이었고, 그녀는 정말 누나답게 척척 잘도 해 냈다. 커피 잔을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둘이 검은 모래에 발을 묻고, 그녀는 스케치를 하고, 나는 그 옆에 누워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봤다. 푸르디푸른 하늘이 오직 그녀와 나만을 위해 존재했다. 그녀와 나란히 누워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드는 하늘을 보았다. 둘이서 소꿉장난을 했다. 텐트 밖에서 저녁을 짓는데. 그녀가 가게 가서 물 좀 얻어오라면 물통 들고 가서 얻어 오고, 파 좀 얻어오라면 얻어 오고, 그렇게 지은 뜨끔뜨끔한 설익은 밥이 세상에 태어나 먹어본 가장 맛있는 밥이었다. 그 날 밤 우리는 만성리 해수욕장에서 군용 모포 한 장을 덮고 텐트 안에서 잠을 청했다. 그 곳에서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비너스를 만났다. 춥지도 않았다. 가스버너에 올린 코펠의 물이 끓듯이 그녀와 나도 끓었다.

아침에 연두 빛 텐트의 둥근 문을 열어놓고 턱을 괴고 엎드려서 바다 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봤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도 모르게 소원을 빌었다. 나와 그녀의 소원이 일치할리 없지만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자. 내가 당신을 찾든지, 당신이 나를 찾든지. 찾지 않아도 만나게 되면 더 좋겠지.’ 나는 그런 소원을 빌었었다.

그녀는 기념할 것을 남겨야 한다고 스케치 북을 들었고, 나의 누워 있는 모습과 텐트와 미루나무를 그렸다.

 

나는 천천히 운전대를 잡고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옛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섭섭하진 않았다. 이미 과거는 과거일 뿐인데. 나는 잊고 산 것을 아내만 잊지 못하고 산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아니,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서 아내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아내는 내게 과분한 여자였다. 서른이 넘어 만난 여자였지만 그 때까지 수화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나를 품어준 여자였다, 수화를 찾아가란 말을 해 주지 않은 유일한 여자였다. 청년이 되어, 결혼 적령기가 되어 만난 여자들, 하나같이 수화 이야기를 하면 왜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가지 않고 나를 만나느냐며 떠나갔다. 그러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수화,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게 겁난다는 내 말을 이해해 줬다.

나는 바닷가 주차장에 차를 댔다. 보퉁이를 안고 바닷가로 나갔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모래사장에 퍼질러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전에 그토록 넓게 보였던 검은 모래밭도, 검은 자갈밭도 손바닥만 했고 푸르게 찰랑거리던 물도 좁은 입구만 열어놓은 채 양쪽으로 빙 둘러 둥글게 만들어진 방파제 탓에 맑게 보이지 않았다. 방파제에 가로막힌 바다는 이미 바다 같지 않았다.

저렇게 변하도록 나는 뭘 했나 싶었다.

아내가 속병을 앓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선생이라는 직업에 충실하게 학교와 집을 다람쥐 체 바퀴 돌듯이 왔다 갔다 했지 않았나 싶다. 중학교 국어 선생이라는 직업, 중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은 중학생 수준 밖에 안 된다고 누가 말했던가. 나는 정말 고지식하고 앞 뒤 꽉 막힌 샌님이었다. 어쩌면 나는 아내를 떠나보내면서 비로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늘 과거의 한 시점에 붙잡혀 현실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아내의 장례를 치루면서 깨달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 아닌가. 하나 뿐인 아들에게도 아비 노릇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환학생으로 캐나다로 떠난 후 타인처럼 잊고 살았다. 학비만 보내주면 아비 노릇 다 하는 걸로 생각하고 살았지 않나 싶다. 아내가 떠난 자리에서 아내는 아비 노릇까지 혼자서 다 해 냈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은 제 어미의 초상을 치르자마자 출국해 버렸다. 화장 해다 여수 오동도 바닷가에 뿌려달라는 유언 때문에 한 줌 가루로 변한 아내의 유골을 내 품에 안기고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다시 오동도로 향했다.

마지막 날, 그녀와 나는 오동도에서 이별 잔치를 했다. 석천사에서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배낭을 챙겨 절을 나섰다. 수화 역시 따라나섰다. 우리는 말없이 걸어 여수 역까지 갔고, 역 앞의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모른다. 그 해풍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침을 먹고 또 말없이 걸어 오동도 선착장으로 향했다. 오동도 들어가는 첫 배를 탔다. 그 때는 오동도가 육지가 아니라 섬이었고,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배가 있었다. 배를 타고 들어갔다. 사방에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뒹굴었다. 섬을 한 바퀴 돌면서 동백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신발에 차이는 선홍색의 붉디붉은 동백꽃을 차마 밟을 수 없어 줍고 또 줍다보니 손아귀 가득 붉은 물이 들기도 했다.

“나 서울 올라가면 후기 대학이라도 갈 거야. 가서 빨리 졸업하고 수화 찾으러 올게. 4년 후 여기서 만나 점심 때. 그 땐 혼자되어 있으면 좋겠어. 만약 그 남자랑 잘 산다면 안 나와도 되지만 꼭 나왔으면 좋겠어.”

“네가 안 올 수도 있잖아. 나만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군. 어쩌면 평생 기다릴지도 몰라. 넌 서울 가면 금세 날 잊어버리고 잘 먹고 잘 살지도 모르고. 우리 약속은 말자. 행복했던 기억만 잊지 말자.”

그 4년이 30년이 되었다.

오동도는 이미 섬이 아니라 육지였다. 선혈처럼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의 환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했을 때, 그 곳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뱃길이 사라지고 찻길이 생겼다는 것, 핏기 없이 해맑기만 하던 한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보일 뿐이었다.

오동도 들어가는 표를 샀다. 안내원에게 몸이 안 좋아 먼 길을 걸을 수 없다면서 저 섬에 취재차 가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승용차를 가지고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남자 안내원이 나와 차를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목에 걸린 비싼 사진기와 근 한달 잠을 설친 얼굴이니 병자로 보였으리라. 핼쑥한 볼이며, 충혈 된 눈이며,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은 부스스한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지. 껑충한 키에 비해 헐렁한 개량한복 차림의 나는 누가 봐도 정상 같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운전석에 앉으면서 옆 좌석에 앉은 아내를 툭툭 부드럽게 두드렸다.

드디어 왔군요. 잘하셨어요.

아내가 속삭인다.

당신을 여기 데려온 것은 수화 때문이 아니야.

나는 힘차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정말 수화 때문이 아니다. 그 여자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할 약속 때문에 온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그 날 약속 장소에 왔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해마다 그 날이 오면 나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밤을 새웠다는 것이다. 이제야 여기 온 것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위해 온 것이다. 그녀에게 지키지 못한 약속이었기에 아내와의 약속은 꼭 지키고 싶어서. 그래서 왔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승용차를 천천히 운전하여 섬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나를 본다. 그들은 걷고 있지만 여유롭다. 땀을 닦고, 부채질을 하고, 양산을 쓰고 가기도 하지만 그들은 여유로웠다.

차창을 열었다. 더운 열기가 훅 들어온다. 순간, 단순하게 가을이라지만 걷기엔 햇살이 너무 따갑겠다고 생각했다.

차를 오동도 섬 안에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주차장에 세웠다.

나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숲 속을 통과한다. 오름길이다. 음습하다. 서늘한 기운이 온 몸을 관통 한다. 냉기가 흐르는 숲, 비릿한 냄새, 이끼가 파랗게 낀 축축한 계단, 빛 한 줄기 받기 위해 죽으랴 동쪽을 향해 솟구쳐 오른 가늘고 긴 산죽의 휘어진 허리, 내 기억에 한 아름은 족히 될 것 같았던 동백나무는 한 둥치가 아니라 회색 밋밋한 가지 뻗기로 건강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아야’ 소리치던 동백 꽃 붉은 꽃송이는 아무 곳에도 없다. 가을에 봄꽃을 찾는 게 이상하지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뜻이다. 무엇하나 내 기억에 없는 것들 천지다.

그래도 여수는 건재할 것이고, 오동도 역시 존재할 것이다. 세인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는 이순신 장군은 아니라 해도 내 가슴에, 내 아이들의 가슴에 평생 살아있을 아내가 존재할 곳이다.

나는 손에 들었던 보퉁이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당신과 처음으로 여길 왔군. 내가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자리건만 당신은 한번도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지. 당신 자존심이었는지 몰라. 아무리 그래도 평생 가슴에 품고 살건 뭐요. 살다보면 잊기도 하고, 기억해 내기도 하는 것이 과거란 이름인데. 내가 잊고 살았던 수화를 그댄 못 잊었다는 게 말이 되오?

아내에 대해 자꾸 섭섭해진다. 내게 수화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내에게 왜 좀 더 살갑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 주었을까.

섬의 능선에 올랐다. 오솔길이 아늑하다. 예전에 그토록 울창하던 동백나무는 쉽게 눈에 띄지 않고 아름드리 큰 후박나무 군락이 더 돋보인다. 큰 나무 아래 자잘하게 자라고 있는 어린 동백을 쓰다듬어 주었다.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둔 대나무 울타리도 없던 그 시절, 전망대도 없던 그 시절, 그 곳엔 오로지 동백나무 숲길이었다. 길바닥에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까린 그 길을 그녀와 손잡고 걸었었다. 걷다가 지치면 동백나무에 기대어 흙길에 퍼질러 앉아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이별은 그렇게 아팠다. 할말도 없었다. 안타깝기만 했다. 가능하면 같이 있고 싶었다. 가능하면.

쭉쭉 뻗은 산죽이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로 모여 있다. 전망대에 올라갔다. 이층이 그렇게 높은 줄 처음 알았다. 한려해상 국립공원답게 바다위에 정박한 화물선과 섬과 마을과 도시, 그리고 오동도 숲 전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오동도에는 194종의 희귀 수목과 기암절벽이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했든가.

전망대에서 내려와 다시 동쪽으로 난 가파른 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갔다. 울퉁불퉁한 바위벽으로 이루어진 길 아래는 푸른 파도가 부드럽게 찰싹찰싹 때리고 갔다. 바닷물 곁의 바위 끝에 가 앉아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 나무 상자가 나오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하얀 항아리가 나왔다. 잿빛의 아내는 얌전하게 나를 봤다.

“당신 고생했어요. 여기 나를 풀어주세요.”

아내의 말이 미풍을 따라 귓전에 닿았다.

나는 살그머니 그녀를 안아 바다 속으로 가라앉혔다.

아내를 보내면서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전망대와 사무실이 있는 자리로 다시 올라와 내가 걸어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 한 처녀가 매점을 열어 놓았다. 늘씬한 키에 약간 핏기 없는 얼굴에 상큼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나를 반겼다.

“시원한 냉커피 있어요. 한 잔 하고 가셔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수화, 아직도 여기에 당신이!.......” 끝“



 수필 : 나무들 참선에 들다.

 

섣달이다.

마지막 남은 달력의 햇수를 헤아리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올 한 해는 참 다사다난 했다. 가을엔 벼 수매가와 쌀값 하락으로 농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쌀과 채소들이 시청과 군청 마당을 뒹굴었다. 개인적으로는 환경 파괴의 주범인 무분별한 농어촌 개발사업의 피해자가 되어 울분에 떨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고장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벌인 사업이라는데. 관광순환도로 개발 사업에 순응하게 되었고, 어제는 마당을 에워싸고 있던 사철나무 울타리와 정원수를 옮겼다.

굴착기로 정원수들을 옮기는 작업은 생각 외로 힘들었다. 지정된 장소가 아닌 가식을 했다가 다시 옮겨야 할 처지에 놓인 정원수다. ‘명 긴 놈은 살겠지.’하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속상하긴 마찬가지다. 살림집부터 지어서 옮긴 후에 정원 손질을 해야 옳은 데. 도로 공사 측에서 더 추워지기 전에 길을 넓히는 공사를 끝내야 한다고 사정을 한다. 덕분에 나무들만 생고생을 하게 생겼다.

30년생인 탐스럽고 아름다운 금목서는 두 번 옮기다가는 명 보존 못 할 것 같아서 안전 장소에 옮겼다. 밑동이 워낙 실해서 굴착기로 뽑아 올리는 데도 애를 먹었다. 나무는 나무대로 비명을 질렀다. 상처가 난 나무를 쓰다듬으며 ‘죽지 마. 내 사랑 죽지 마.’기도 했다.

지난번에 옮긴 느티나무도 산 것 같지가 않은 데. 내년 봄에 싹이 돋아 봐야 알겠지만 큰 나무들은 겨울에 옮기면 잘 산다는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두 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멍들어야 할 나무들이다. 배나무는 옮기는 과정에서 중턱이 부러져 뽑아버렸다. 매실나무와 산딸나무와 모과나무, 포도나무, 능소화, 등나무도 온전하지 않아 내 살이 아팠다. 라일락과 차나무는 무더기 째 옮겼다. 꺾꽂이해서 키운 개나리는 지난봄부터 겨우 탐스러운 개나리꽃을 볼 수 있어 행복했는데 싶어 괭이를 찾아 들고 내가 직접 옮겼다. 대왕 참나무는 밑동이 너무 굵은 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으니 옮길 재간이 없어 아예 밑동을 잘라 버렸다.

우리 집 정원수는 사랑과 애정을 먹고 자란 나무들이다. 남편과 내 손길이 가지 않은 나무는 없다. 어린 나무를 사다가 심어 날마다 물 주느라 호스와 물통을 들고 살았다. 만 9년을 키운 정원수다. 어디 그 뿐이랴. 나뭇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까지도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떠 올리며 나는 속삭인다.

나무들아 가식을 한 후엔 참선에 들어라. 내년 봄 땅심이 깨우면 힘차게 뿌리 뻗음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겨울잠을 자거라. 새로운 자리로 옮겨 줄 그날까지 알았지?

어떤 분은 어린 묘목을 사다가 다시 심으면 될 텐데. 뭐 하려고 헛일을 하느냐고 한다. 큰 나무는 옮겨 심어도 살리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가식을 했다가 다시 옮긴다니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했다. 비싼 정원수라 해 봤자 몇 그루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헛고생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끈끈이 같은 이 정을 어찌 뗄거나.

나무도 생각한다. 사람처럼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생명의 귀함은 안다. 가꾸는 사람의 정성에 보답하는 것이 나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나무다. 공기를 정화시켜 주고,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것이 나무다. 나무의 고마움을 어찌 인간의 얕은 심성으로 알 수가 있을까 마는 나는 나무에게 참 많이 미안하다. 사람 같으면 비명을 지르고 앙탈을 부리기도 하련만 거친 굴착기의 휘둘림에도 말없이 순종하는 나무를 보면서 가슴이 아리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라도 죽일 수가 없는 심정이다.

또한 빈틈없이 펼쳐진 잔디밭이 굴착기의 바퀴에 뭉개지는 것을 보는 것도 마음 아프다. 그대로 버릴 수밖에 없는 잔디지만 키운 정성을 생각하면 다 옮겨 다시 살리고 싶다. 잔디밭을 제대로 가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만한 사람은 알게다. 한 해는 잔디밭의 풀 뽑아내기가 지겨워 잔디만 살고 잡풀은 죽는 제초제를 쳤더니 주위의 정원수 잎까지 말라 비실거렸다. 그 뒤론 제초제를 치지 않는다. 들며나며 소일 삼아 풀을 뽑았다. 애써 키워 온 토종 잔디밭이 뭉개지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속수무책이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촘촘하게 자라 집을 아담하게 감쌌던 사철나무 울타리도 파냈다. 울타리가 없어진 마당은 폐가처럼 어수선하고 집은 난달(사방이 휑하니 빈)이 되어 바람이 마구 심술을 부린다. 막아줄 울타리도 정원수도 없어졌으니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는 바람이구나 싶다. 마음이 춥다. 허름한 농가지만 사철나무 울타리와 나무들이 숨쉬고 있을 때는 그 안이 참 아담하고 운치 있었는데.

이틀 동안 굴착기 작업을 끝내고나니 남의 집 같다.

“힘들고 속상해서 죽겠어.”

“일은 내가 하는 데 성은 지가 다 내고 있네. 나무는 금세 자라니 너무 속상해 할 것 없다.”

남편 속이라고 편할 리 없을 텐데도 나는 또 남편 속을 긁는다.

집 옆의 못에 물도 뺐다. 축대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황톳물이 사흘을 빠졌다. 바닥이 드러난 못 속을 두루미 몇 마리 날아와 먹이를 찾는다. 물 배미 아래 웅덩이에 붕어 떼가 옹송그리다 산짐승의 먹이가 됐다. 지난봄에 갖다 넣은 붕어 새끼가 그새 어른 붕어가 되어 있었다.

마당가에 황홀하게 피었던 봉숭아와 살사리꽃도 흔적이 없다. 꽃씨를 듬뿍 받아 놓긴 했지만 해마다 저절로 싹이 터서 여름에서 가을까지 쉬지 않고 피고 지기를 거듭하여 내 마음을 향기롭게 하던 꽃이기에 여간 아깝지 않다.

모든 것이 변해 간다. 내 얼굴에 주름 살 하나 더 늘어나듯이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삶이라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멍드는 자연과 농심은 누가 지켜 줄 것인지.

내 삶의 터전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가식해 놓은 나무들이 한 그루도 남김없이 살아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호스를 찾아 수도꼭지에 끼운다. 내 생전에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다시없기를 바라면서 나무에게 물을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의 흐름이 있다면 나무의 영혼과 만나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나무들 참선에 들어 내년 봄까진 깨어나지 말기를.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새 터전에서 한 그루도 빠짐없이 소생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