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저 단단한 슬픔이

익을대로 익으면

 

스스로

가슴팍을 열어젖히곤

하는데

 

하늘귀

어둠별 오르면

내려서는 뜨락의 별

 

꽃노을

붉은 울음

하늘 강에 풀 때

 

알알이 여문 결정

저리도 빛이 난다

 

자기를

쪼개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다

 

 

 

  

주산지 왕버들을 기억함

 

 

 

 

내려 올 데를 다 내려와

더는 내려갈 곳이 없다 여겼을 때

 

발등을 덮는 물

발목을 적시는 물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젖고

늘어뜨린 머리카락마저 젖은

 

이승을 살아도

이승을 벗은 나무

 

저 생을 살아도

오늘을 사는 나무

 

 

 

 

 

 

달팽이

 

 

 

밤이 이미 늦었는데

 

비가 내린다

 

귀를 바깥으로 내밀고

 

식구들을 기다리는

 

엄마의 귀가 젖는다

 

몸이 젖는다

 

모두 돌아올 때까지

 

온통 젖어

 

이미 밖이다

 

 

 

 

  

환하다

 

 

 

연두빛 싹 돋듯

한알 씨알에서 내가 생길 때

어머니 자궁 사방은

저리 환했을 것이다

 

질긴 덤불 끝에서

익을 대로 익은 나백이 호박을

쩡 소리 나도록 갈라놓은 날

씨앗을 품은 방 눈부시게 밝고

 

아아, 나도 저렇듯 환한

뱃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자라게 하는 모든 것 그 안은

이처럼 환하다, 환하다

 

 

 

 

 

즐거운 돌연변이

 

 

 

시집 한 권 꺼내어 70편의 시를 읽다가

그림 우월성 효과* 이론에 생각이 닿아

시집에도 삽화가 필요한가 하다가

글만 실린 시집을 최고로 치는 마음이라

본시 시라는 것은 말

악보 없는 노래이며 그림 없는 그림

글자만으로 서너 줄, 예닐곱 줄, 아니면 열 댓 줄

소리도 없이 노래하는 노래를 듣는

형상 없이 보여주는 그림을 보는

끝내 스러지지 않는 말을 건네는, 시란

그림 우월성 효과의 돌연변이

문득 유쾌해져서 시집을 쓰다듬는다

 

* 사람이 시각적인 정보를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을 가리켜 그림 우월성 효과라 한다

 

 

  

  

개구리

 

 

         

줄기의 가시가 거칠어도

부여잡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끄러운 잎 위로 

사뿐, 한 방울 물처럼 

올라서기도 한다

 

꽃 속의 방은 너무 환해서 

때론 꿈결 같지만 

이내, 뛰어내리는

 

한 마리 저 개구리처럼

삶의 길 위에서 

나 또한 그저 무심하게,

 

 

 

 

 

염소

  -모성(母性)의 방증(傍證)에 대한 보고서

               

 

 

1

 

새끼를 낳을 시각이 오면

어미염소는 외진 곳을 찾아내어

어미만이 아는 진통으로 울다가

홀로 서서 새끼를 낳는다

한우리의 염소들도 이때만은

새 생명 꼬물거리는 공간을

넘어 다니지 않는다

어미가 핥고 쓰다듬는 동안

어린 것은 첫울음을 내며

가느다란 다리를 비칠거리다가

기어이 땅을 딛고 일어선다

신통하게도

금세 어미젖을 찾아 문다

 

 

 

 

2

 

염소가 새끼를 낳을 때는

사람의 간섭을 넣지 않고

멀리서만 지켜본다

핥고 인식하는 수순을 놓치면

갓 낳은 제 새끼라도 

젖을 물리려 하지 않는다

비칠거리는 생명이

홀로 일어서도록 핥아주는 시간

새끼가 어미냄새를 따라가

젖꼭지를 찾아 무는 그 짧은 순간

핏줄기의 유대는 순간에 엮어진다

 

 

 

3

 

서툰 어미의 젖 물리기가 끝나고

새끼의 털도 보송보소송하게 마르면

하루 안에 무리들과 떼어놓으며

더 안전하도록 방을 옮겨주어야 한다

갓 태어난 한두 마리 또는 두세 마리의 새끼를 

가슴에 껴안은 사람이 뒷걸음질을 하며 

어미를 유도한다

순순히 따라오는 어미도 있으나

유독 겁 많고 초산이라 얼뜬 어미는

삼사 미터의 그 거리 이동이 쉽지가 않다

사람의 손에 안긴 새끼도 불안하고

살던 곳을 벗어나는 것도 불안해서

울며 따라가다가도 다시 되돌아서고

되돌아갔다가도 새끼울음에 다시 따라가는

무수한 도돌이표를 찍는다

울안은 어미와 새끼의 울음으로 가득해지고

생가지를 찢는다는 말뜻이 절로 알아진다

 

 

 

4

 

염소 울을 가득 채우던 울음소리며

이산가족이라도 되는 듯이 애처로운 시간도

어린 것의 울음에 답하며 따라가는

어미의 모정으로 마침내 끝이 난다

조용한 보육실로 옮겨 이틀을 지냈을 뿐인데

새끼들은 개구쟁이가 되어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그런 어린 것을 부르느라 어미들은

목이 다 쉬어버릴 지경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속 타는 건 언제나 어미의 몫이다

 

 

 

 안개꽃

                           

 

 

배경으로 서 있어도 즐거움을 아는지

 

환한 앞줄 내어주고 가운데도 비워주고

 

둥글게 품어 안는다, 비다듬는 손길로

 

 

때로는 돌아앉아 감춘 눈물 있었을까

 

야윈 손목 여린 눈이 하늘하늘 웃는다

 

옆옆이 간잔지런한 정()을 피워올리고

 

 

 

 

 

               

 

 

어느 암자 비구니 스님들이

채소밭 절반을 갈라놓았다

 

‘벌레들의 몫’

 

끈을 두른 그 밭머리

이름표가 붙어있는데

 

벌레는 

사람의 몫을 가리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의 몫만 드나든다는 것

 

갖기 위한 나눔아니라

주기 위한 구분이라서

 

, 그 경계가 환해진다

 

 

 

  

 

 

달빛 경전(經典)

 

 

 

 

다 파먹어 텅 빈 소라 껍질 누웠네

 

살포시 귀에 대면 들려오는 숨소리

 

어머니 낮은 젖가슴 달빛 번져 물결이네

 

누가 다  읽었는지 달빛만 조각조각

 

조각난 달빛 아래 관음보살 누워있네

 

비워야 소리를 품는 뿔피리가 누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