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관

 

  “시인 아저씨, 상대 나왔어요?

 

  동길산 시인

 

  나는 상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처음 인사 나누는 사람에게 자기소개 한답시고 상대 출신이라고 밝히면 대개는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다. 시를 쓰니 문학전공이라 여겼으리라. 며칠 전 중1짜리 친구 아이와 저녁을 먹다가 장래 희망을 묻게 되었고 이야기 끝에 내 전공을 들추게 되었다. 그러자 아이도 의아한 듯 되묻는다. “시인 아저씨, 상대 나오셨어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상대에 갔는지. 상대 간 이유를 누가 물어보면 난감하다. 나도 이해 못하는데 남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상대를 가고 경제학을 택한 걸 내놓고 후회한 적은 없지만 잘했노라고 떠벌린 적도 없다. 나는 도대체 왜 상대 갔을까.

  그래도 다행이다. 상대 간 이유는 딱히 내세우지 못해도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유는 콕 집어 말할 수 있으므로. 사실 나는 국문학과에 가야 했다. 고교 동기나 아는 사람은 으레 그러려니 했다. 고교 문예부장이었고 내 방엔 문학책이 가득했으니.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책만 보고도 ‘야코’가 죽었다.

  문학서적은 꽤 되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보수동 헌책방을 뒤져 책을 사 모아 고교 졸업반이 돼서는 가히 장서 수준이었다. 문예부 동기는 5. 3명이 대학에 있거나 있었다. 부산대 국문학과 고현철 교수, 서울대 정외과 강원택 교수, 동국대 김무곤 교수다. 고현철은 대학총장 직선제 약속을 지키라며 2015년 한여름 투신했다. 동국대 김무곤은 무슨 과 교수인지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종이책 읽기를 권한다는 책을 냈다. 문예부 한 해 후배도 쟁쟁하거나 쟁쟁했다. 문학평론가인 한수영 연세대 교수, 서울대 정치과를 나왔던 소설가 채영주가 그들이다. 채영주는 의사도 모르는 병을 앓다가 2002년 해운대 바다에 뿌려졌다.

  고교생 때 이미 장서 수준이었지만 국문학과는 가지 않았다. 문학을 즐기고 싶어서였다. 국문학과에 적을 두면 문학은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머리 싸매고 작성해야 하는 리포트의 대상이 되겠거니 지레짐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한 이분법의 오류지만 그땐 그랬다. 문학을 평생지기인 양 곁에 두고 즐기고 싶다는 단순 무지하면서도 ‘어마무시’한 결기가 나를 문학 관련 학과에 등 돌리게 했다.

  학과는 등 돌렸지만 문학마저 등한시하진 않았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글과의 인연은 이어 갔다. 대입 한두 달 후 부대신문사 시험에 응시했고 붙었다. 주간이 영문학과 홍기종 교수였고 간사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창근 시인이었다. 면접 때 내 어눌한 발음을 갖고 이만규 편집국장이 딴지를 걸었다. 감히 대들었다. 신문기자가 글로 원고를 쓰지 말로 원고를 쓰느냐고. 동기 중 3명이 경제학과고 나 말고는 모두 언론계로 갔다. SBS 영남취재본부장인 송성준 기자, 부산MBC 보도국장을 지낸 이희길 등이 동기다. 학보사 입사 당시 3학년 기자였던 이명관 선배는 부산일보 사장을 지냈다.  

  학생기자를 하니 상대 교지 담당 선배가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경맥’ 편집에도 참여했다. 내가 맡은 꼭지 가운데 사진과 시를 곁들인 포토포엠은 내가 봐도 잘 썼다. 러브레터를 받을 만했다. 상대에 여학생이 드문 게 아쉬웠다. 시는 열심히 썼다.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내키는 대로 썼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기본이 되지 않았다. 2학년 마치고 방위 소집을 앞둔 무렵 시집 한 권 분량으로 추려서 문예지 ‘세계의 문학’ 출판사인 민음사에 보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퇴짜 맞았고 하나밖에 없던 육필 원고마저 잃어버렸다.

  나는 80학번이다. 팔십년대 첫 학번이다. 소위 380으로 불리며 뜨기도 했고 가라앉기도 했던 세대 맨 앞줄이다. 시작은 거창했다. 장밋빛이었다. 유신독재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봄이었다. 학내 민주화에 힘입어 총학생회장 직선제가 치러졌다. 고교 문예부 선배 정해조 현 부경대 교수가 출마하면서 연설문 작성을 떠맡게 되었다. 낮에는 연설회장에 가서 다른 후보는 무슨 말을 하나 엿듣고 저녁에는 무슨 글을 쓸지 토론하고 그리고 밤새워 연설문을 작성했다. 새벽에 잠시 쪽잠을 잤다. 그런 강행군을 열흘 가까이 지속하였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전두환 군부가 들어서면서 총학생회가 구성되기도 전에 봄은 끝났다. 학교는 휴교했다. 광주 5·18 그 무렵이었다. 학교가 언제 정상화될지 내 주변에선 아무도 감을 잡지 못했다. 설만 분분했다. 포항 해병대가 학교에 주둔해 출입을 통제했다. 둘째 형이 마침 포항 해병대였다. 형 면회를 핑계 대고 아무도 없는 학보사에 들어가 책이니 서류를 챙겨 나왔다. 학보사 열쇠는 출입문 위턱에 놔두는 게 학보사 전통이자 관례였다. 지금도 그랬으면 좋겠다. 언제든 책이니 서류를 챙겨 나오게.  

  봄은 끝났고 연속성이 끊기면서 모든 게 시들해졌다. 전라도로 충청도로 무전 여행했다. 돌아와선 형수의 도움을 받아 문전에서 포장마차를 했다. 형수 도움을 받아 닭발 따위를 장만했다. 지금은 학산여고 국어 선생을 하는 동네친구 손영수가 단골이었다. 사실은 손영수가 거의 유일한 손님이었고 학생 신분이라 외상하기 일쑤였다. 요즘도 만나면 그때 못 받은 외상값 명목으로 술을 얻어 마신다.

  술은 참 지독하게도 마셨다. 군대 간다고 휴학하고는 100일 동안 매일 마셨다. 술 마시는 것도 시들해져서 100일 동안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100일이나 마시는 건 힘들었지만 100일이나 마시지 않는 건 더 힘들었다. 시도 시들해져 그만 쓰자고 작심했다. 시 쓰는 것도 힘들었지만 시 쓰지 않는 건 더 힘들었다.

  봄이면 어김없이 꽃은 폈다. 엄동을 꿋꿋이 견뎌 내고 꽃 피우는 저 풀에게 저 나무에게 나도 뭔가를 보여 줘야 했다. 엄동을 견뎌 내고 뜨거운 꽃을 피우는 저들이야말로 나에겐 평생을 두고 읽어야 할 문학책이었다.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시였다.

 

  꽃은

  피면 핀다고 아프고

  지면 진다고 아프다

  손을 대어 짚어 보아라

  절절 끓는 이 뜨거움

  꽃이 뜨거운 것이냐

  손이 뜨거운 것이냐

  피는 꽃 짚어 보느라

  지는 꽃 짚어 보느라

  몇 발짝 걷다간 멈춰 서는

  뜨거운 봄날

    - 동길산 시 ‘꽃 몸살’

 

  * 부산대 동문회보 2012년 겨울호 수록 글 일부 수정, 재수록



동길산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무화과 한 그루’ 등 다섯 권과 산문집 ‘포구를 걷다’ 등 다섯 권을 펴냈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추모하는 304행 장시 ‘세월호’를 썼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