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한가운데였다


나무다리에 앉아 붉은 오디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강물은

오디 속으로 들어간 햇빛처럼 반짝였다

반짝이는 것들은 어지러웠다

얕은 다리가 풀어진 치마끈처럼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고 있었다

뻐꾹새 울음이 치맛주름 사이로 자꾸 흘러내렸다

다 마시지 못한 술을 강에 부었다

강이 붉었다

그는 물속으로 스며든 술 향기를 발가락으로 툭툭 차고 있었다

물속에서 이따금 기포가 올라왔다

술 취한 물고기의 노래 가락이었다

강물은 자신을 흔들며 흘러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바람과 햇빛 속

잠시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비


꽃이 피어서 꽃잎 안의 세상으로

밤비가 미끄러져 들어서

어둠 속에서 맨살의 세상을 어루만져서

어둠은 얼굴이 없어서 얼굴이 없는 것은 눈빛을 읽을 수 없어서

하나의 눈빛에도 우리는 쉽게 무너져서

살아있는 자들은 모두 이전에도 살았던 자들이어서

나무의 신념과 상상이 피워낸 꽃잎들

이전에도 살았고 생소한 미래에 소생한 꽃잎들이

한 세상 속에서 찢겨지고 있다

강물소리를 읽는 나무

흙을 읽는 나무

읽어서 더 캄캄해진 나무

죽은 자의 격렬한 침묵이 천둥처럼 뿌려진다

젖어서 지고 꽃잎

젖어서 피는 꽃잎

피어서

오는 밤비




나를 두고 온 것입니까


빛의 덩어리 같은 몸의 한 조각은 저 세상에 두고 왔다고 그분이 말합니다

그것이 언제 적 일입니까 내가 묻습니다

이 알 수 없는 진동에 이토록 휘둘리는 것이 두고 온 그를 열망하는 슬픔 때문입니까

눈물의 색깔이 나와 닮은 그대를 오래도록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흰 담장에 무더기로 핀 넝쿨장미를 만져보고 싶은 것도

사막에서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을 대야로 덮어놓았다가 선인장처럼 외로워지면 대야를 벗기고 그것을 보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깊은 밤 글자들이 몰려와서 자신들로 세상을 창조하라고 조르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정말 나는 나를 두고 온 것입니까

저녁 답 혼자 남은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은 누구입니까

어느 날 밤 나는 어딘가에서 돌아와 거울에 기대어 오열했던 적 있습니다 거울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던 그 기운은 누구입니까

꿈속이었지요 시간의 저쪽이라 했습니다 언덕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팔 벌려 노래 부르던 그 이상한 기운은 누구입니까

지는 해를 보며 노래 부르던 강변의 그대를 오래도록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나의 인도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인도자는 있는 것입니까

나는 햇빛을 향해 눈을 감고 서 있습니다 지금 내 눈꺼풀 안에서 어른거리는 이 빛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꿈꾸는 동안

- 소


나는 나무에 기대어 그녀를 기다렸어요 불에 구운 비스킷을 가득 실은 수레를 밀고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왔지요 그녀는 손바닥을 내밀었어요 값을 묻지도 않고 머리 위의 구름을 떼어 반만 주었어요 부족하다는 듯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어요 다시 지갑을 열고 꽃을 꺼내 주었어요 그녀는 가버리고

숲으로 가는 다른 길을 보았어요 잘 다져진 황톳길이었어요 키 큰 나뭇잎에서 햇빛이 반짝였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언덕 아래에는 분지에 갇힌 사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어요 반짝이는 사자의 등에 작은 새가 흰 날개를 접고 있었어요 나는 사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몸을 움츠렸지요 언덕 위로 사자가 올라올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떨렸어요

당신이 꿈을 꾸는 동안 나는 늙고 허약한 소 한 마리를 안고 숲으로 가고 있었어요 내가 왜 소를 안고 가야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언제 내 품에 있었던지 새끼 원숭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어요 소가 새끼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어요 길에 모인 원숭이들이 소리쳤어요 내려놔! 내려놔! 그 소리에 돌멩이들이 대굴대굴 굴렀어요 소를 내려놓았어요 문득 소는 없고 원숭이는 가버렸어요 멀리서 상수리나무숲이 일렁거리고 있었어요



연분홍이란 말


나무도감에 모과꽃은 연분홍이라 했다

연분홍이란 말

천년을 산다는 모과나무가

뿌리를 내리기 전에도 있었을 것 같은

연분홍이란 말

모과는 모르는 말

과실이 맺히기 전 과육의 말

그리고

허공엔 연분홍이 있었다

햇빛을 손에 쥐고서

손을 펼치면 꽃이 있었다

하였으나

볼 수 없는 자에겐 슬픔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은 모과나무

꽃의 표정을 모르는



연탄곡


피아노 독주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

밤하늘의 반달이 아득히 우물에 떠서 환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우물 안에서 물 위에 떠 있는 달을 보았다

빌딩이 있고 버스가 지나가고 가로등이 켜지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굉음을 지르며 오토바이가 사라졌다

달의 손가락이 동동댕 빌딩을 누른다 간판이 달린 낮은 지붕을 누른다

가로등을 누른다 달이 건반 위에서 쿵쾅쿵쾅 뛰어다닌다

연주자의 팔이 불빛에 반짝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모차르트를 칠 때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문의 문양을 보듯 나는 그녀를 보았다

다시 불이 꺼지고 객석은 그림자처럼 조용했다

브람스의 대학축전서곡과 비극적서곡의 피아노연탄곡에 이르러서는

곡이 빠른 춤을 추며 내 몸을 친친 감았다

나는 짐짓 등을 세우고 몸을 약간 앞으로 밀어 곡과 곡 사이에 귀를 댔다

차가 터널을 지날 때 달의 환한 선율이 잠시 끊겼다

그때 차는 비로소 제 스스로 검은 건반을 누르며 달렸다

한밤,

내 방문을 노모가 두드리며 들어와 엉덩이를 내리고 앉는다

-내 노란 바가지 우쨌노

-여기가 어디냐

눈을 가늘게 뜨고 둘러본다

또 묻는다 여기가 어디냐

노모는 지금 어느 컴컴한 우물 속에 갇힌 것인가

노모와 나의 연탄곡은 몇 악장을 치고 있는 것인가

이 밤 우물 속 혹은 우물 밖에서 나는



울다


미술관에 왔다 점심 때 쯤이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데

배에서 낮은 도가 운다

모른 척

‘빛과 시공간’을 지나가고 검은 먹과 옅은 먹을 지나가고 ‘천지’의 고요한 물 밑을 지나가는데 연신 낮은 도가 운다 ‘시간과 공간’의 모래를 몰고 가는 바람 속에서도 울고 ‘대지의 시적호흡’의 섬세한 한 붓질 사이에서도 낮은 도가 운다

우는 도를 달래며 거리에 나섰다 눈길이 간판을 훑으며 내리막길을 간다

두부촌

명동칼국수

전주풍남회관

마포갈비

오양회참치

정장보다는 티나 반바지 차림 같은 것 간단한 것이 좋겠다고 낮은 도가 칭얼대는 듯하여 화살표를 따라 낯선 길을 걸어 포장마차 ‘요기’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해안선을 잡아 꽂아 놓은 듯한 꼬치오뎅에서 김이 오르고 서로 비스듬히 기대고 누운 김밥엔 단풍이 들었다 해안선과 단풍이 내 테이블로 옮겨오고 고스란히 낮은 도의 음계 속으로 옮겨가고…… 낮은 도의 고픈 울음이 잦아질 즈음 어디선가 다시 솔...하고 울음이 일었다

‘빛과 시공간’이 ‘천지’가 ‘시간과 공간’이 ‘대지의 시적호흡’이 어느새 내 만선의 뱃전에 올라와 솔... 솔... 하며 제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오십 센티의 유머


바구니 안에서 입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볼에 닿는 것 있으며 빨려고 고개 돌려 입을 대는 사람

그러다가 찡그리고 입 벌리고 우는 사람

가래떡 같은 팔다리 버둥거리는 사람

어미가 물려주는 젖 물고 빨다가 스르르 잠드는 사람

흔들어도 눈 안 뜨는 사람

말없이 똥 싸고 오줌 싸는 사람

하나같이 누런 탯줄을 달고 나온 사람들이 어미 품에서 울고 있다

아직 눈뜨지 못한 사람이 입을 벌리고 목청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양수를 막 빠져 나온 알몸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고 있다

고개 옆으로 돌리고 잠만 자는 사람

아무 생각 없이 속싸개에 똘똘 감긴 사람

자다가 문득 웃는 사람

목욕하고 배내옷 갈아입고 새카만 머리털이 잠만 잔다

뜨개실 왕관을 씌워도 잠만 잔다

바구니 안에서 잠만 잔다

웃고 울고 잠자고 싸고 버둥거리는

50센티의

사람



오는 것이 있다


저 얼굴 없는 것이 온다 시간도 아닌 것이 시간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이

형체도 아닌 것이 형체가 아닌 것도 아닌 것이

온다 돌연한 것이 온다 돌연하지 않은 것이 온다

혼돈이 온다

끝없는 길이 온다 노래가 온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던 밤바다의 물결이 온다 플랑크톤을 데리고 온다 긴 노를 저으며 온다 철썩철썩 물소리 내며 온다 벌거벗은 달이 온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온다

청춘이 손을 잡고 온다 빙글빙글 돌며 온다

사냥꾼 어깨에 걸친 뿔사슴이 온다 해바라기 사이로 흰 말이 끄는 마차가 온다 갈기를 날리며 온다 갈색 말의 탱탱한 엉덩이가 온다 우유통을 실은 목동의 자전거가 온다 노래 불러줄게요

문을 열고 허공이 온다

불꽃처럼 온다 없는 것으로 꽉 찬 씨앗이 온다 소용돌이가 온다 눈 뜬 침묵이 온다 오래된 기호가 온다 녹슨 구멍이 온다 벅벅 긁으며 온다 피를 묻히며 온다 손를 뒤틀며 온다 노래 불러줄게요 얼굴도 없는 것이 얼굴이 온다



카페 그레이스


대한성공회 대성당 마당의 천막 카페에는

북녘에서 온 눈이 커다란 여인이 커피를 내립니다

그녀가 포터필터를 걸고 커피를 내리는 것은

길 없는 길을 걸어걸어 닿은 자유이고

쪽문으로 하늘을 내다보는 그리움이고

혼자 불러보는 노래이고

목이 긴 꿈인지도 모릅니다

GFS우물가 카페 그레이스는 탈북인의 일터입니다

우물가에서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의 나그네에게 물 한 바가지 건네는 일

그 물 나도 마시는 일

예수님께 물 한 바가지 드리는 일입니다

카페 그레이스는

눈이 작은 기쁨이 키가 작은 기쁨에게 한 잔 커피를 건네고

눈이 큰 아픔이 키가 큰 아픔에게 커피 한 잔 사는 자리

먼저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랑이 나중 오는 사랑에게

손 흔드는 자리입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북쪽과 남쪽에서 커피를 찾아오는 발걸음

걸음은 이들의 꿈을 보듬는, 아니

우리들의 꿈을 보듬는 우리들의 푸른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포터필터를 걸고 커피를 내립니다

눈이 커다란 여인이 커피 같은 하늘의 향기를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