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극을 보다가

 

나도 한번 보리라

할인 받은 S석에 앉아

가극을 본다

 

수려한 시골 귀족 청년과

웃음을 덤으로 주면서 자신을 파는 불나비

그들의 사랑, 바위에 부딪혀 물방울처럼 흩어지리라

저 가극의 줄거리를 모른다 해도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통속이다

 

아니다, 쉽게 지껄이면 안 된다

천민에게 행하는 귀족의 횡포를 고발한다고

너는 말한다

 

그러나, 친구여

수많은 관객들의 넋이 풀린 무대와 선율에서

내 마음은 뒤돌아

고향의 들판으로 향한다

 

보이지 않는 채찍을 누가 휘두르는가

팔순의 어머니는 산밭에서 엉금거릴 것이고

남루한 오라비 내외는 서푼짜리 과원에

꽁꽁 묶여 신음할 것이다 

대대로 천민인 그들의 노역


나는 눈을 감고

어디선가 듣고 읽은

빅또르 쪼이의 음악을 생각한다



녹두꽃, 만발하다

 

층층 다랑논 벼포기들 검푸르다

구불구불 논둑따라 녹두꽃 자욱하다

 

저기 저 녹두꽃

그 멀리서 그 넓은 배들  들판에서

이 골짝 다랑논까지 뭐 하러 왔나

저기 저 다랑논

열세 살에 이국의 정글까지 끌려갔던 김씨할매

깨어진 몸과 마음  얼기설기 동여매고 돌아왔지만

윗 것들 대신해서 반 죽어 돌아왔지만

손을 잡는 사람보다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천지에서

김씨할매, 정글의 지옥에서도 살아왔는데

내 나라 내 고향에서 어찌 못 살까

겉보리 한 됫박에 종일 호롱기를 밟았고

장리송아지가 새끼를 낳고 낳아

저 다랑논 되었다네

천수답 저 다랑논 비 안 오면 어쩔꼬

산비탈 저 다랑논 물은 어찌 댈꼬

산 아래 저수지 물을 이고가다 지고가다

그렇게 몇 가마니 벼를 거두면

이고지고 날랐던 저수지물 값도 그 만큼 쌓여

할머니 목숨줄은 풀뿌리 나무껍질 따라서 이어졌다네

 

그 넓은 배들 평야에 들불을 질렀던 녹두꽃

아직도 타고 있는 그 빛은 이 골짝까지 뻗쳐

쓰러진 할머니 일으키고

불길처럼 물길을 끌고 와서

할머니 흔전만전 벼논에 물을 대어

다랑논 벼포기들 저리 검푸르고

그걸 또 지키느라 논둑마다 저리 자욱하다네

 녹두꽃, 



충주호 물길을 따라가다

 

관광선에 실려 충주호 물길을 에돌아 간다

사람과 짐승의 형상 같은 기암괴석이

영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저기 갑판에 서 있는 사람

그 때 보상금 받아 도시로 떠날

꿈에 부풀었을 사람일까

수위가 낮아 드러난 잡풀 무성한 저 둔덕이

물에 잠겨도 잃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던*

그의 집터일까 남자는 상념에 젖었다

 

이제 관광객이 몰려들고 유람선이 뜨는 이곳

속을 보여주지 않은 혼탁한 강물은

저 남자의 가난은 확실히 수장시킨 듯

초로를 향하는 남자는 수려한데

숲 속 몇 채 남은 인가는 아직 낮고 낮다

 

물가를 빙빙거리던 새 한 마리 문득

난간에 올라앉는다

찌그러진 오두막을 물속에 던지고 이대로

흘러흘러 한강에 닿으리라

불야성의 그 도시 서울에 스며들어

마지막 꿈을 조명탑처럼 펼치리라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람 거센 난간을

꽉 붙잡는 할미새 한 마리

 

유람선은 천천히 절경을 내보인다


*신경림의 강물2에서 차용




은행나무의 분신(焚身) 

 

가을비에는 휘발유가 섞였을까

점화의 불꽃같던 이파리 하나에서

큰 불길이 치솟는 은행나무 한 그루

 

몸에 불을 붙인 그 사람

저렇게 타올랐을 그 사람

힘차게 뻗친 저 가지는

노동법을 손에 든 그의 팔뚝 같아

화염이 수북한 저기가

불길보다 뜨거웠을 그의 가슴 언저리 같아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마라

마지막 생명을 짜낸 외마디 소리일까

그의 입술처럼 누런 잎 하나 살짝 움직이네

 

저기 할머니 한 무리, 그가 그 토록 아끼던

그 때의 순이 영희 영자였던가

그의 분신 후 혈서를 쓰던 그 날처럼

붉은 단풍잎 손에 들고

꽹과리 북소리처럼 떠들썩하네

 

천년을 타오를 은행나무

맹렬하고 깨끗한 분신 앞에

한 여자 고요히 손을 모우네


*3연 전태일 평전에서 차용


복숭아꽃밭을 찾던 여자  

 

저 여자

이제 그 꽃밭을 찾았을까

얇은 입술에

꽃잎 한 점 묻어있네

 

옛 사람이 거닐었다는

복숭아꽃밭은 어디 있을까

번쩍이는 불빛 속에 숨었을까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

 

속을 다 보여주지만

그 만큼 지독한 게 또 있을까

무릉도원은 분명 그 속에 숨었을 게야

벌컥벌컥 병째 소주를 들이키던 여자

 

자욱한 담배연기

요술램프 연기처럼, 문득

도원에 데려다 놓을 것 같아

쿨럭쿨럭 줄담배 피우던 여자

 

아아, 그의 가슴은 정말

활짝 핀 복사꽃밭일 거야

어린 것들 떼어놓고

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던 여자, 저 여자.




새로운 학설


공무도하가는 예언의 노래라네

오늘 그 예언의 성취를 보네


웃옷을 풀어헤친 더벅머리 중년 사내

그라목손 병을 들고 비틀비틀 강가로 가고

발끝에 꿰었던 고무신을 팽개치고

가지 마라, 그러지 말거라

꼬부랑꼬부랑 쫒아가다 엎어지는 그의 어미


어스름이 모래밭을 삼키는 낙동강 가에서

공무도하가를 성취시키는 저 추레한 사내는

산 너머 마을에 서마지기 다랑논 일구고

돌담위로 벙글벙글 해바라기 올리던 사람 

어린것들 재롱에 너털웃음 웃던 사람


그러나 강물은 역류했네, 조개더미 싣고

소용돌이치며 밀려들어 마을은 패총이 되고

그는 이제, 예언을 성취시키네

낡은 운동화 가지런히 물가에 벗어놓고

공무도하가를 다 이루었네




슬픈 장미


여자의 허리에 장미가 피었다


여자가 팔을 올리고 발을 내밀며

작고 빵빵한 궁디를 흔들 때마다

붉은 장미 한 송이, 흰 셔츠 밖으로 이슬을 턴다


뜨거운 밤, 거리의 잡것들은

허리에 피는 장미를 식탐하지, 그래서

하우스 재배보다 수익이 좋다고

여자는 웃음을 꽃잎처럼 날리는데

웃음은 사뿐히 어디에 앉을까

샤넬일까 피아제일까

하나뿐인 아이가 그려내는 도원의 풍경일까 입체화법일까

대낮에도 게게풀려 소파와 변기를 한통속으로 보는 사내

그 사내에게로 아직도 이어지는 순정일까


능구렁이 하나 스르르, 여자의 허리를 감으면

오늘 밤도 대박이라고, 오늘 밤도 대승이라고

꽃잎을 활짝 여는 장미, 가시를 떼어버리고.

거대한 아가리를 탁 닫으며

잡것들의 우두머리, 두 눈을 사르르 감는다

캐피탈리즘



절필을 생각하다


내 시가 부끄럽다

시인이란 이름표 장미처럼 달았거나

국어사전 눈 감고도 복사하듯 베끼거나

시어가 수정처럼 빛나는 시, 그

앞에서가 아니라네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농투성이 둘째 오라버니

그 앞에서, 시 쓴다고

내 시가 부끄러워, 시 쓴다고 말 못하네


노모의 틀니 값도 아슬아슬한 배밭에서

폭염의 몰매를 맞던 오라버니, 나

시냇가 버드나무 아래, 물놀이를

거침없이 써내려가 부끄럽네

쳐들어오는 어둠을 향해 전조등을 쏘아대며

자정까지 탈곡기를 밀고 가던 오라버니, 나

달맞이꽃의 기다림만 노래해서 부끄럽네

추곡수매 하던 날, 해장술 몇 잔에 휘감겨

멱살잡이 주먹질로 피멍든 오라버니 ,나

왜 저 지랄이냐 소리쳐 부끄럽네

빈 우렁이 껍질 같아, 누런 거품만 일어

부끄럽네


이것도 글 쓴다고, 시 쓴다고

절필이라

유식하게 이름하여 부끄럽네



뿌리내리다


첫사랑이 고개 돌리지 않았다면

이만한 딸아이 내게도 있을지 몰라

벙그는 목련꽃 같은 스물 하나

눈 내리는 창가에 처연하던 스물 하나

 

아기가 태어난 지 몇 달째인가

큰소리로 띄엄띄엄 물으니

오개월요 나직하고 또렷한 우리말

이제

동네 앞 느티나무처럼 굳건하다는 듯

아가의 손을 흔들어 보이고

 

수백 송이 꽃들 중에 최고 이쁜 것을 골랐다고

그래도 또 한 번 가고 싶다고

사이버 결혼상담소 벽에 붙은 여자아이 전신을

마우스로 더듬어 내리면서 요 이쁜 것 요 이쁜 것

군 침 삼키던 이 남자

아기의 할배뻘은 될 것 같은 이 남자

 

침상에 꽂았던 최고 이쁜 것을

이제 가슴으로 옮겼을까

그럴 거야

가슴 깊이 심었을 거야

아기와 색시에게 보내는

그윽한 저 눈 빛!



고향은 지상에 없다


노을이 주황기를 내릴 때까지

비닐부대를 부레처럼 끌어안고 물장구 판을 벌였던 시냇물이 없어요

금빛 응원수술처럼 햇살을 흔들던 미루나무가 나무가 없어요


성가신 동생을 따돌리다 숨어들었던 텃밭의 댑싸리가 없어요

기대서서 철수를 불렀던 돌담이 없고 그 돌담에

꽃가지를 얹어주던 살구나무가 없어요


그을음 냄새는 어머니 냄새,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부지깽이 끝에 붙은 불을 구정물에 적시며 불을 때던 부엌이 없어요

여름 한 낮, 샘물을 가득 안고 뻘뻘 땀 흘리던 두멍이 없어요


까치발로 안달해도 키를 낮추지 않던 시렁이 없어요

실뿌리 따라 내리던 맑은 물소리

콩나물시루가 없어요


사과 한 개를 돌아가며 베물어 먹던 친구들이 없어요

내 미소가 눈부시다던 동네 오라버니가 없어요

대보름 날 집집마다 찾아가 풍물치고 복을 빌던 걸립패가 없어요

겨울밤, 음담을 이불처럼 펴놓던 이웃 아지매들이 없어요

검은머리 수국숭어리처럼 쪽을 찌고

풀먹인 흰 광목 앞치마 허리에 두른 어머니가 없어요


그 서먹한 곳이 내 고향이라니

이 나침반은 나사가 풀렸을까요

아니, 아니요. 그 곳은

내 심중에 들어찬 고향이지요

환삼덩굴까지도 그리워라 그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