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담장 아래 어깨 축 늘어진 호박잎 위

 

게으른 햇살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다

 

한가로이 누워있는 개 등짝에 붙어

 

파리 두 마리가 천연덕스레 짝짓기를 하고 있다

 

갈비마트 앞 종이박스 줍는 노파의 무덤덤한 눈빛 속에서

 

엿물처럼 녹아든 세월을 본다

 

손님 없는 홀을 지키며

 

대형선풍기가 하품하며 저 홀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을 가졌다

 

길을 걸을 때나 일할 때

덩그렁 덩그렁 소리를 내며 심금을 울린다

혼자 있을 땐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려

고요한 생각의 강으로 나를 데려간다

사는 일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울 때

슬픔의 어둔 그림자가 머리를 감쌀 때도

말없이 문을 열고 앉아

남빛 우물 같은 안을 들여다본다

 

살아온 날만큼 햇살과 바람으로 단단해진,

아무도 열 수 없는

 

나는 꽃과 새 그리고 별이 수놓아진 문을 가졌다

 








돌담

 

 

바람의 살과 뼈로 만들어진 담이 있다

 

돌은 스스로를 버리고

몸에 몸 맞닿아 한 마음을 이루고 있다

 

또랑또랑한 새벽 계곡물소리

어린 새들의 어설픈 날갯짓소리

초저녁 별들의 웃음소리가 산다

 

다람쥐 눈치 보며 도토리 까먹는 소리

햇살이 만개한 손으로 상수리나무 등 긁어주는 소리

용흥사 다녀오는 사람들 크고 작은 발걸음소리도 산다

 

솔밭 그늘 아래 하얀 이불 내어 덮은 구절초

귀 활짝 열어

돌담이 전하는 이야기 구절구절 새기고 있다.






버려짐에 대하여

 

 

어둠이 잿빛 발로 걸어오는 저녁 어스름

전봇대 아래 박스에 담긴

강아지 한 마리 낑낑거린다

 

, 낯선 세상에

, 썩은 모과처럼 처박힌

그의 눈은 눈곱 반 눈물 반

엉치털 숭숭 빠져나간 자리에

십 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선홍빛 도장 자국

 

버려진다는 건 어둠의 사막을 맨발로 걷는 일

 

검은 꽃과 검은 나무와 검은 하늘과 검은 햇빛

검은 웃음과 검은 눈물과 검은 말, 말들

긴 터널 건너와도 기억 저편 얼굴들은 검은빛 투성이

 

세상의 죄 죄다 끌어안은 눈빛으로

갈 곳 잃은 강아지 한 마리

벼랑 끝 목줄 잡아당긴다

 

흐린 눈 크게 뜨고 반달이 따라온다





봄을 읽다 

 

 

창녕 말흘리 태암 선생 댁

서둘러 달려온 봄이 다리 뻗고 앉아있다

 

봄볕은 마당 구석구석 기웃거리며

꽃망울 몇 개 터트려놓고 흥얼흥얼

 

긴 우울증 끝내고 바깥으로 나온 진진이*

모닝커피 향 진하게 코끝에 올려놓자

솜털바람 진진이 등을 타고 놀고 있다

 

목단꽃 닮은 화가 사모님

텃밭에 호미로 그리는 그림

연둣빛, 분홍빛으로 깨어나는데

 

화왕산 그림자 슬며시 내려와

툇마루 나와 앉은 고서를 어눌하게 읽고 있다

 

 

* 태암 선생께서 붙여준 진돗개 이름





장씨 아저씨

 

 

  저 길길이 날뛰는 꼴 좀 봐, 지랄났네 지랄났어 등등한 기세 온 세상 다 삼켜버리고도 남겠어 조무래기들은 얼씬도 못하지 전생부터 이승까지 못다 한 욕지거리 마구마구 퍼붓는 저 시커먼 아가리 시큼한 막걸리 냄새 진동하는 것 좀 봐, 미쳤군 미쳤어 요양원에 누워있는 아흔아홉 노모도 못 말리고 아부지 따돌리고 혼례 치른 외아들도 못 말리고 십년 전 남의 아내 된 마누라도 못 말렸던 풍물거리 초입 장씨 아저씨의 술주정, 상산인력 사장 머리통을 몇 번씩이나 박살내고 선술집 딸어라 마셔라 다리 부실한 의자가 저만치서 나뒹구는데 삿대질하는 손가락 태양을 찔렀는지 함지박 엎은 듯 쏟아지는 땡볕, 한 서린 세상을 향한 또 한 번의 발악이 지나간 자리 훌러덩 벗겨진 때 절은 모자가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건너고 있는 장날 오후





흔적

 

 

저리 쉽사리 꽃 진자리 지워질 수 있는가

 

담쟁이넝쿨 붉은 손 우주로 뻗어나가던

 

가을 저물녘의 기억

 

하마 지워지고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 대궁만 남아

 

겨울바람 앞에 숭숭숭 울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손 갈퀴에 숨겨진 필사(必死)의 손놀림과

 

담벼락에 각인된 푸른 시간들




자목련

 

 

 

안으로만 삼켜온 소리 없는 울음

 

삼월 하늘에 걸려있다

 

때론 생이

 

걸어온 흔적을 지우는 마른 물길질이어도

 

일찍이 엿본 환한 이승의 봄날이

 

화인으로 찍힌 가슴

 

상처가 피워올린

 

붉은 절규




양은주전자

 

 

 

비마저 단풍들어 붉게 내리는 날

막걸리를 마신다, 찌그러진 몸으로

하 많은 허기 술술 달래주는

너를 보면 상주시 무양동 고향집 생각이 난다

술 취한 노을이 초가지붕 위로 쓰러지던 저녁

논고랑 뛰어다니며 잡은 메뚜기 담아놓던

양은주전자, 캄캄한 여름밤 반딧불이처럼

깜빡깜빡 졸던 할배의 긴 대꼬바리 생각난다

놋재떨이 탕탕 부아나신 듯 내려치시면

쪼던 감 내동댕이치고 달아나던 감나무의 까치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배가 쥐여주던 뚜껑 헐렁한 주전자

눈 흘기며 막걸리 부어주던 구멍가게 숙이 언니는

서울로 시집갔다지

갔다가 다시 왔다지

골목길 돌아서며

출렁이는 막걸리 한 모금 슬쩍 마셔보면

달짝지근하면서도 코끝이 찡했다

 

오늘 고향집 앞마당 낙엽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양은주전자 너를 끌어안고

그날의 노을처럼 취하고 싶다

 



등꽃1

 

 

등을 보이고 떠나는 사람의 등 뒤로

 

등꽃은 핀다

 

정든 발걸음소리 아슴아슴 멀어질 때마다

 

보랏빛 꽃송이 잠결에 눈뜨듯 피어난다

 

그래서 등꽃은 그리움일까

 

보내는 가슴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온 씨앗을

 

가는 이의 등 위에 빽빽이 뿌려놓고

 

참아도, 참아내어도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눈물로 키워낸 그리움일까

 

그래서 등꽃은 그렁그렁 피는 걸까

 

등꽃을 보려고 눈을 비비면

 

떠나는 사람의 덩그런 등이

 

그래서 보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