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의 눈 속에 / 이해리

 

 

여름 아침

토란잎이 가만히 받쳐들고 있는

이슬을 보아라 간밤에 분명

 누군가가 울고 간 흔적이 있다

얼마나 투명하고 깊은 슬픔이 몰래

밤길 다녀 간 것일까

바람이 일렁이면 초록 손바닥 펴드는 토란잎 위에서

깨어질 듯 방울방울 빛나는 눈물

산도 하늘도 새소리도 그 속으로 들어가

한 방울 보석되어 고요하다

 함부로 울 수 없는 세상

몰래 울고 난 자국 저렇듯 영롱할 수 있다면

나도 한 방울 찬란한 슬픔이 되고 싶다

 

 

포석정, 호랑가시나무 / 이해리  

호랑가시나무, 꽃의 향기는 비단보다 부드럽고 쟈스민보다 향긋한데 잎의 가시는 호랑이 발

톱을 닮았다. 한 몸 안에 감미로운 향기와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을 함께 키우는 나무, 그 애

틋한 이중성 안엔 무슨 쓸쓸한 비밀을 숨겼는가, 초록 발톱 이파리들이 우우 옹립하고 있는

가지의 우듬지에 샛별보다 작고 하얀 꽃이 적막을 깨물고 피어 있다. 망국의 황녀가 자결을

결심할 때 독하게 알몸에 바르는 독약 같은 향기, 발톱은 그 향기를 사수하기 위해 외부로 뽑

아 든 칼날인가, 그렇지만 향기란 것이 칼날로 지킬 수 있는 슬픔이던가 대항할 힘을 잃은 군

졸들처럼 가을 잎 떨어지고 서늘히 쓰러져 뒹구는 것에 마음 끌려 찾아온 가을 포석정, 마지

막 잔을 마시고 불콰한 왕이 슬픈 이사금 슬픈 이사금 탕진되지 않는 슬픔을 들고 내 가슴에

쓰러져 운다.

 

 

그대 누구인가/이해리

 

 

이렇게 비 내리는 밤에는

먼 곳부터 먼저 몸 젖은 어둠이

내 창 앞까지 찾아와서 비를 맞고 서 있다

문을 열어도 들어오지 않고

닫아도 돌아서지 않는 흐린 침묵이

문틈 새로 새어나간 가느다란 불빛에

가슴을 패이고 있다

그대 누구인가

밝고 찬란한 것들 모두

마른 이불 속에 곤히 잠 든 시각

어둡고 흥건한 곳만  디디고 와서

들뜬 꽃잎처럼 덜컹거리는 창문과

빗소리 사이에 머물러 있는 그대

불 꺼진 손바닥이 만져지지 않는 그대를 만져본다

크고, 어둡고, 텅 빈 빗소리뿐인 그대를

 

 

어느 날의 열차표는 역방향이다/이해리-

 

 

ktx 타고 간다

역방향에 앉아

차창 밖을 보며 간다

모든 다가오는 것이 지나간 것이다

지나간 것만 보고 간다

보이는 게 한 물 간 것 뿐인데

새로운 것을 목표하며 간다

같은 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좌석이 생이라면

나의 생 출발부터 누군가에게 밀렸음이다

, 차별 받은 내 좌석, 불리한 내 여정

이건 자연스레 피 돌리는 내 박동과는 다른 일

여학교 때 단체로 맞춘 교복 중에

내 것에만 나있던 흠결과도 다른 일

방향이란 원래 누구의 점유물이 아닐진대

누군가 차지하고 남은 방향

내자리라 하고 간다

남들이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등으로 세상을 더듬는 자리

내 자리 비좁고 속 울렁겨려도

순방향으로 꾸고 싶은 꿈 하나는

고속레일보다 뜨거워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가지만

도착하면 그 뿐, 누가

타고 온 방향을 묻겠는가

 

 

보슬비

 

이 해 리

 

보고 싶고 보고 싶었지만

보고 싶은 것도 죄될까

말없이 다가갔다가

소리 없이 돌아간다

 

많고 많은 당신을 보아 왔지만

진정 보고 싶은 당신은 보지 못하고

이 대지 저 하늘 기웃거린 만큼

젖고 젖어서

 

목마른 몸만 끌고 돌아간다

 

 

어둠 또는 허공이 된 사람 /이해리

 

현관 센서등이 한참 있다가 켜진다

 뒤죽박죽 몇 켤레 어둠이 발등을 밟을 때까지

안 보이는 외출 더듬더듬 챙길 때까지 기척도 않다가 정작

 내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힐 때 벌컥 켜진다

참 센스도 없는 센서등, 그러므로 센서등에 있어 나는

가까이 오면 캄캄한 이거나 텅 빈 어둠이다가

안 보이게 사라지고 나면 뚜렷이 감지되는 어떤 존재이다 

센서등을 지날 때마다 이 된 나는 조금 쓸쓸하다,

어떤 때는 없는 나를 인식해 보라고 손 휘저어 본다

있는 내가 결코 어둠이 아니라고 소리 질러본다

허연 천정에 매달려 묵묵부답인 센서등

첨벙첨벙 물 속 같은 어둠을 풀어내려

시효가 어긋난 사랑 같은 것 삶 같은 것을 떠내려 보낼 뿐이다

시험 끝난 후에 번쩍 생각나던 정답 같은 것

열차 떠난 후에 문득 생각 난 시각표 같은 것

아아, 가까이 있을 땐 몰라보고 멀리 떠난 후에 들어오는

등불 같은 것들 허공에 밟힌다

 

 

 

배추를 묶으면서/이해리-

 

 

안지 않으면 묶여주지 않겠다는 듯

퍼들퍼들 벌어지는 잎들,

부둥켜안고 묶으면서 알았다

배추 한 포기도 안아야 묶여준다는 걸, 묶여야

속을 채워 오롯한 배추가 된다는 걸

안는다는 건 마음을 준다는 것

마음도 건성 말고 진정을 줘야한다는 걸

보듬듯이 배추를 묶으면서

쓸 곳이 너무 많았던 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잠시 방심 했다고 죽어버린 화초들과

매일 살피지 않는다고 날아 가버린 펀드와

깜박해서 태워버린 빨래와

어느새 가버린 사람

 

나는 안는다고 안았지만

안긴 것들은 부족함을 느꼈던가 보다

대체 내 마음의 용량은 얼마만해야 하는 걸까

 

풀 먹인 옥양목소리 싱싱한 배추를

파랑파랑 묶으면서

감싸 안고 안아도 안겨지지 않던 당신이라는

서운한 바람에게 오늘은 내가 안겨 묶여본다.

 

 

안개를 안아 보다/이해리

                                    

 

  외로움도 사무치면 안개도 사람인가하여 안아보는 밤이 있습니다 안

아도 안아도 실감이 없는 사람, 뼈도 살도 없이 푸르스름 분위기만 있는

그를 품는 밤엔 내가슴에 한 겹 더 허무의 지층 쌓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수묵담채빛 선경은 길을 잃어도 좋은 피안입니다 멀리 無優寺 연등 물결

눈물처럼 가물거리고 사십 리 복사꽃밭은 분홍 꽃잎만 공중에 둥둥 떠내

려 보낼 때 어디선가 귀촉도귀촉도 두견이 울어 그도 나처럼 살고 싶은

누구입니까

 

  마음은 자욱하나 드러낼 수 없는 실물을 가진 누구입니까 그의 가슴을

만지면 잠시 사랑했다 헤어진 이름 생각나고 희미해진 이름 끌고 골짜기

배회하는 서늘한 누군가가 느껴집니다.

 

  어쩌면 너무 멀어서 쉽게 만져보기 어려운 슬픔의 입자들과 하룻밤 뺨

대고 싶어 길을 잃는 저녁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서야 무릉도원을 만나는

그런 밤이 있습니다.

 

코스모스/이해리

 

 

 

그 시절에

코스모스 길을 걸어가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조건 없이 좋듯이

스모스가 피어있어 그냥 좋았다

그 때 코스모스는

지조 높은 정령인 듯 꼭 가을에만 피었다

황금빛 나락 출렁이는 들길에

기차가 산모롱이 돌아가는 철로 변에

교복 입은 학생이 자전거 몰고 가는 오솔길에

어머니 상여 나가던 송정리 뒷길에

한들한들 피어서 나를 불러냈다

코스모스는 나그네와 친하고 싶은 꽃인지

길 가는 내 가까이 가까이 피어 주었다

그 가녀린 몸매와 맑은 꽃잎으로

내 몸을 한 번씩 스윽 스쳐 주기도 하었다

스쳐 주고 제 자리로 가는 꽃대궁 속에서

가끔 벌 나비 떼 화르르 날아오르고

이슬도 몇 방울 찰랑 떨어 뜨려

 내 사랑과 사색과 낭만을 풍성하게 흔들어 주었다

이제 코스모스는 가을에만 피지 않는다

아무 때나 핀다

코스모스가 아무 때나 피고부터 물질은 풍요해 지고

나의 가을은 실종 되었다

나의 사랑도 사색도 낭만도 자꾸만 누추해져 갔다

 

 

 

밤길

 

이 해 리

 

 

가야겠다고 살며시 나오니

눈발이 날린다 눈발도 눈나라 어디서

살며시 빠져나온 손님일까

어둠은 소리 없는 눈을 받아

어디에 쌓는지 보여주지 않고

바람은 천상도 지상도 아닌 곳을

고속으로 달리는

내 헤트라이트 속에 한 줌씩 뿌려댄다

불처럼 타오르며 재처럼 잦아들며 눈발은

분분한 춤을 춘다 온몸으로 하얗게

춤추고 나면 그뿐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겨울밤 흥청거림에 취해

내가 간 줄도 모르겠지만 오늘밤 나는

사라진 줄 모르게 떠나는 눈발이 되어

방향감각 잃은 산야에 펄펄 날리고 싶다

살아보니 알겠더라 끝까지

눌러 붙어 흥청거리는 삶은

아쉬움의 연인이 되지 못한다는 걸,

나 그대에게 아무 아쉬움 없는

방구들이 될까봐 고민하였지

다 떠난 뒤에도 남아 뒹구는

술병처럼 될까봐 두려워하였지

아쉬움 잃은 따뜻함보다

그리움에 사무치는 흰 뼈로 펄펄 날리는

혹한이 나의 것

가야겠다고 살며시 나오니 눈발이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