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

 

내가 아무리 받아쓰기를 잘 해도

그것은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

백일홍을 받아쓴다고

백일홍 꽃을 다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받아쓴다고

사랑을 모두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받아쓴다는 것은

말을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일 뿐,

나는 말의 참뜻을 받아쓰지 못 한다

나무며 풀, 꽃들이 받아쓰는 햇빛의 말

각각 다르게 받아써도

저마다 똑 같은 말만 받아쓰고 있다

만일,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불러주고

아이들이 각각 다른 말을 받아쓴다면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햇빛의 참말을 받아쓰는 나무며 풀, 꽃들을 보며

나이 오십에 나도 받아쓰기 공부를 다시 한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말 말고

받침 하나 넣고 빼는 말 말고

모과나무가 받아 쓴 모과 향처럼

살구나무가 받아 쓴 살구 맛처럼

그런 말을 배워 받아쓰고 싶다

 

똥을 싼 별

 

아름답기만 한 별들도

똥을 싼다

 

그 모습이 마치

참새가 제 새끼의 똥을 물어다가 버리듯

허공에 휙 버린다

 

순간의 일이다

 

똥을 싼 별

아무 일 없다는 듯

빛난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거미는 밤마다 어둠을 끌어다가

나뭇가지에 묶는다 하루 이틀

묶어 본 솜씨가 아니다 수천년 동안

그렇게 어둠을 묶어 놓겠다고

거미줄을 풀어 나뭇가지에 묶는다

어둠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나무가지가 휘어져도

그 휘어진 나뭇가지에 어둠을 또 묶는다

묶인 어둠 속에서 별들이 떠오른다

거미가 어둠을 꽁꽁 묶어 놓아야

그 어둠 속으로 별들이 떠오르는 것이였다

거미가 수천년 동안 어둠을 묶어 온 사연 만큼

나뭇가지가 남쪽으로 늘어져 있는 사연이

궁금해졌다 무엇일가 생각해 보니

따뜻한 남쪽으로 별들이 떠오르게

너무 많은 어둠을 남쪽으로만 묶었던

거미의 습관 때문에 나무도 남쪽으로만

나뭇가지를 키워 왔는가 보다 이젠 모든 것들이

혼자서도 어둠을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수천년 동안 거미가 가르친

어둠을 묶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거미는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뜨는 것을

가장 먼져 알고 있었나 보다

 

참새

 

참새는 제가 살 집은 짓지 않는다

집을 지어도 제 새끼를 키우기 위한 것으로

마지막 지붕은 제 몸을 얹어 완성한다

제 새끼에게 어미의 온기만 주겠다는 것이다

머리 위 은하수 별빛을 맘대로 바라보고

포롱 포로롱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주고 있다

참새는 제 자식에게 다른 욕망은 가르치지 않는다

제 몸을 얹어 집을 완성하는 지극한 사랑

그 하나만 짹짹짹 가르치고 있다

 

 

고래 발자국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고래들의 발자국을 보고 싶다

고래가 발을 버리고 왜 지느러미를 갖게 되었는지

무슨 아픔이 있어 바다로 몸을 숨겼는지

발자국을 보면 그 의문이 풀릴 것만 같다

새끼를 낳고 젖을 물리는 고래들의 발자국을

고고학자들은 왜 아무도 찾지 않을까

바닷속 어딘가는 두 발로 혹은 네 발로 걷던

발자국 무덤들이 가득히 있을 것인데

수천 년 동안 고래 발자국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역사(歷史)를 발로 쓰고 다닐 때

고래들은 천 리 밖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바닷속 가득 풀어놓고 낙엽처럼 밟고 다녔을 것이다

그 발자국 따라 오늘도 새우떼를 쫓을 것이다

 

足文

-구룡포에서

 

족문으로 써 내려간 갈매기의 생각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뒤를 향한 화살표다

제 몸이 뒤에 있다는 눈속임의 글 한줄

 

적벽에 그려 놓은 반가사유 미소처럼

알아도 모르는 척 그 글의 끝을 보니

날아가 쓰지 못한 글 모래알보다 더 많다

 

배경

 

 

내 허름한 지갑 속 반백의 사진 한 장

빗소리 먹물처럼 마음을 적시는 날

살포시 꺼내어 보면 눈가 주름 그대로다

 

세월은 붉은 동백 해 마다 토해 내고

바람은 그 동백을 말없이 지우지만

동백 숲 배경을 삼아 혼자 웃는 어머니

 

수백 권 책을 읽고 수백 편 시를 써도

임종에 끓어 오른 어머니의 가래 소리

자식을 가슴에 담은 또 하나의 책이였다

 

물 위를 뜨기 위해 제 속을 다 파낸 배

물보다 더 가볍게 마음을 비우지만

어머니 가슴에 섬긴 불바다는 못 건넌다

 

어머니 마음같이 섬기는 삶의 배경,

낱알의 빗방울이 뱃길의 배경이듯

내 삶의 배경 뒤에는 어머니가 항상 있다

 

초승달을 보며

 

괄호도 아니고 반 괄호로 달이 떠서

어떤 말의 의미들을 풀어줘야 할 것인데

앞 문장 깊은 여백에 품은 글이 사라졌다.

 

내 나이 다섯 살에 죽었다는 아버지는

콩깍지 속 콩들처럼 칠남매를 남겼지만

어머닌 육십 평생을 반 괄호로 살았다.

 

괄호()로 묶어내도 쭉정이가 많을 건대

어떻게 칠남매를 혼자서 키웠는지

반 괄호 달빛을 보니 그 의문이 풀린다.

 

둥그런 달빛 속을 파고 든 저 그림자

제 몸을 다 내주고 그림자로 채운 마음

서로가 품고 품어서 반 괄호가 되어 있다.

 

불혹의 내 나이도 반 괄호가 되었지만

자식의 숨소리에 쫑긋 세운 내 두 귀는

언제나 초승달처럼 앞 괄호를 열어둔다.

 

無言

-故노무현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 바위에서

 

민들레가 피는 것도 제 영혼의 말일 건데

유언 한 줄 써 두고서 뛰어내린 이 바위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가슴 속에 새겼을까.

 

부엉이 울음들이 잠시 멈춘 그 틈에서

허공에 써 내려간 한 획의 뚫을 곤(丨)자

無言의 획으로 남아 무슨 글을 완성할까

 

참매미 나무 등에 혹처럼 매달려서

소리로 완성하는 글들을 남기는데

내 몸의 척추 뼈 같은 그 無言은 무엇일까

 

산다는 게 죄가 되면 절벽이 되는 건가

아무리 둘러봐도 바람 같은 말뿐인데

이 세상 두고 가는 말, 無言 말고 뭐 없을까

 

 

故鄕詩抄

 

1.

세월 앞에 묵묵한 산이

또 한 해를 다 보내고

 

빈 가지에 받쳐든 것은

팽팽한 메아리뿐,

 

바람은 구름을 몰고

어진 목숨을 다스린다.

 

2.

알타리무우 밭에 흐르는

노적가리 빈 그림자

 

산염불(山念佛) 하듯 서서

우짖는 세상사에

 

마실 온 하현 달마저

반백(半百)이 되어 빛난다.

 

3.

늦가을 농사 빚에

떠나고 싶은 고향

일년만 더 하던 것이

고추 붉듯 나이들어

 

어느덧 저승 문턱에

귀(耳)를 기울인 사춘형.

 

4.

섬돌 밑 저승바닥

드나드는 10월 달빛,

 

그 말 없는 말 속에서

쑥꾹새 잠재워 두고

 

득음을 이루워 살자

피리 불던 사람아.

 

5.

쇠죽가마 아궁이에

발을 구르며 앓던 시절,

 

잃어버린 세월 만큼

남아 있는 불씨 속에

 

해탈문(解脫門) 걸어 가듯이

가슴을 다 태운 나(我).

 

6.

잡목림(雜木林) 우거진 숲에

구구구 산비들기

 

사랑 맺는 정이 깊어

불 붙는 가을 단풍,

 

평생에 내 가슴 태울

시심(詩心)을 본 듯 하구나.

 

7.

어버이 저승 가시고

재롱떠는 아들을 보니

 

씨감자 눈 트듯이

무거운 罪의 시름만

 

한 장의 창지(窓紙)로 가려

동불(童佛)처럼 달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