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에서 보이지 않는

 

 

-움직이는 것들

 

  길은 어디로 향하는 것이기에 길이라는 의미가 주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길은 차 없는 날, 대학로 한복판에서 아이가 마술사의 묘기를 서서 구경하거나, 정오의 빛이 거리에 쏟아질 때, 종로 종묘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노인,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잡지에 소개된 가게를 물어물어 찾아가는 여자, 휴가를 나온 군인이 일산 라페스타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고, 여의도 대형교회 앞에서 학생이 친구를 기다리며 잠시 서있을지라도 그들은 계속 길을 가고 있다. 몸은 잠시 멈춰있지만 마음은 이미 어디를 향해야할지 주파수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길은 움직이는 것이다. 길은 걸어가는 곳이지만 차를 타고 쌩쌩 달려가기도 한다. 길은 우리가 땅을 딛고 있는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있다. 똑같은 길을 또 다시 일주할지언정 끝이 나지 않는다. 길은 시작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길은 언제나 끝을 향해서 간다. 끝이 없는 길의 끝이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내밀한 의미

 

  남들이 많이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쉬워 보여도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많이 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설로, 시로 남들이 많이 하는 일이나 말을 남기는 것이다. 문학은 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 자신의 눈으로 받아들인 주관적인 입장이 개입된다.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길에서 만난 무수한 모퉁이와 모서리, 몇 군데 막다른 골목과 급커브, 평탄대로를 갑자기 만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가라면 그 길을 걸어오며 획득한 그녀, 혹은 그가 쓸 수 있는 문체가 있다. 문학작품은 그것이 태어난 시대적 현실의 직접적 소산으로 읽히는 일이니 각기 걸어온 길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기도 하다. 지나온 길에는 지금 여기보다 더 깊은 내밀한 의미가 함의되어 있기 마련이다.

 

 

 -코맥 맥카시의『로드』

 

 『로드』 에서 그리는 세계가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로드』에선 비축해두었던 식량은 모두 바닥이 났고 온 땅에 살인이 만연하다. 매카시는 서서히 붕괴하는 문명에 대한 끔찍하고도 준엄한 소설을 쓰기 위해 인간 감정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걸어 내려갔다. 모든 원인과 과정, 전조는 생략한 채 『로드』는 바로 증상 한 가운데서부터 시작한다. 세상은 곧 부모 눈앞에서 자식을 잡아먹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도시 전체를 시커먼 약탈자들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약탈자들은 폐허에서 굴을 뚫고 돌아다니다 잡석 더미에서 눈과 이만 새하얗게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남자는 아들이 더 큰 고통을 겪기 전에 아들을 죽이고 자신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극도의 공포에 시달린다.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들 아버지와 아들에게는 최소한 서로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절망 없는 절망 밖에 없다면 현실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쟁이 가족의 절규가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않는, 상식과 순리가 지배하는 평범한 세상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불확실한 존재다. 문학은 이 순간도 쉬지 않고 세상에 진동하는 무거운 증상의 원인을 지금 여기 인간을 통하여 말하고, 어딘가 있을 그 근원의 끝을 향해서 가는 일이다. 다시 또 절망할지언정 바로 지금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소설 속에서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기는 적나라한 자서전이다

 

  최근엔 일기를 쓰지 않지만 이전부터 일기를 오랫동안 써왔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일기는 내게 더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예전 일기에서 시를 건진 것도 많았고, 마음이 바로 동할 때 일기를 쓴 것은 일기를 쓸 당시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록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일기란 진실하지 않을 구석이 없는 것이므로 일기 대목이 그대로 시나 에세이가 되기도 했다.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나 소설대목이 되기도 했는데, 혹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시를 일기에 바로 기록하거나 그때그때 떠오르는 소설을 바로 구상하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생각만큼 더 새로운 것은 없다.

 

  지금도 운이 좋으면 길 위에서 비바람에도 묵묵히 피어있는 맨드라미를 만난다. 그 꽃을 보면서 잠시 유년으로 되돌아가보기도 하고, 한낮의 거리에서 자작나무의 그림자를 보고 러시아 시인의 시를 읊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길 위에서 제일 먼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다. 여자들, 남자들, 할아버지, 할머니들, 아기들, 청소년들, 여자 아이, 남자 아이, 장녀와 차녀, 대학생들, 알바생들, 샐러리맨들, 노숙자, 노점상, 실업자, 환자, 장애우, 노동자들……. 길 위를 지나가며 많은 사람들을 본다. 시인의 숙명처럼 아주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때론 벅찬 일이기도 하다. 길은 모든 사람의 도착지이기도 한 것처럼 길은 멈출 수 없는 문학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일

 

  현실과 인간세계에 대한 전망은 소설로 꿈을 꾸기도 전에 이미 불길하다. 내 문학의 방향 또한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딛고 서있는 길과 마주하고 있는 불안한 미래가 대부분이다. 천안함, 세월호의 안타까운 젊은 죽음들, 산업현장에서 재해를 당하고, 해고자복직 시위를 하다가 부상을 입은 사람들하며, 떡볶이 할머니의 좌판도 길 위에서 내동댕이쳐진다. 하지만 그 길에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길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앞에 놓인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외부 압력을 이겨내면서 끊임없이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일,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 작가로서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하는 일, 인간에 대한 생각이 퇴색되지 않는 한,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새로 도래하는 신처럼 계속 살아서 기능하는 일이 문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약력


2003년 시 「 마른 꽃」으로, 2006월간문학에서 단편소설 꽃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단편소설끝나지 않는, 녹슨으로 5.18문학상을 수상했고, 교보 <퍼플>에서 장편소설지하철 아이, 소설집 끝나지 않는, 녹슨, 로라의 게시판, 배달구역》을 비롯하여, 장편동화 <엄마의 달>,  제 1시집 <늪의 방식>과 함께 십여 권의 시집을 전자책으로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