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잠시 현관입구에 세워놓은 20리터짜리 가연성쓰레기봉투, 막 바닥으로 넘어져 안의 것들 모두 토해낼 태세다 그래서 나는 신발끈을 묶다가 기울어지는 쪽을 얼른 신발장에 기대어놓는다 그래도 한쪽 어깨 점점 기울어진다 길가 모퉁이에서 산 미나리 쌌던 검은 비닐 봉투, 칼날에 얇게 깎여 나온 연필밥과 젖은 저녁 무렵 박박 찢어낸 A4용지, 낙서투성이 신문지와 신정아도 먹고 싶었다던 삼양 짱구 봉지, 간밤에 야식으로 냈던 구운 감자 쌌던 호일뭉치와 접시에 남은 기름을 닦아낸 키친타월, 꼬깃꼬깃 뭉쳐서 버린 휴지로 가득 찬 무거운 적체다

 

  기울어지는 것은 한쪽이다 양쪽으로 동시에 기울어지는 것은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다 뒤뚱거리며 기어코 바닥에 떨어지려는 것은 한쪽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봉투 끝에서 법흥사 적멸보궁 처마에 고인 빗물이 떨어진다 미나리 파는 할머니의 빈손처럼 거칠지만 기댈 데가 있는 쪽이 나는 안심이 된다 천지간 무수히 많은 한쪽 중의 한쪽, 어느 쪽이든 한쪽을 차지해야 한다면 나는 기울어지는 쪽이다

 

 

 봄날, 파편을 응시하다

 

   세기말의 개 짓는 소리들이다 하지만 소리들이다

  그래도 흰옷 입은 인간들은……

 

  그것은 저만큼 떨어진 공중에서 터지는 풍선 같은 소리였다 터져 버린 풍선은 더 이상 풍선이 아니다 양재동 시민의 숲, 봄의 공원 위로 풍선의 파편이 날아다니다가 그리도 연한 빛깔로 하늘을 떠받친 채 바람을 가르는 나뭇잎에 걸려서 안식을 찾는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앞에서 어린 아동들이 졸졸졸 뛰어다니다가 나무에 기대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얼굴에 떨어지는 풍선의 파편에 호흡을 심는다 탄약냄새, 피 냄새, 회초리와 고함, 흰옷들과 말총들의 젖은 냄새를, 한참 동안 하늘과 수평을 유지하며 치켜 올린 머리, 마지막으로 바람에 쓸려 볼이 빵빵해지도록 아동은 바람을 마신다 그리고 사뿐히 짓밟고 지나간다 신록의 나뭇잎이 떨어뜨린 풍선의 파편을

 

  어느 누구도 파편을 나중에 쓰려고 몸속에 모아두지 않는다

 

 

 

 

사과와 낮잠                                        

           

                               

       

   고통으로 고통을 달래는

 

   고통이 청사과라면

   머릿속에 사과의 푸릇푸릇한 기운이 퍼지고

   잇몸 사이사이 뻗어나가

   딱딱 아래 위 흰 이빨 맞닿을 때

   사과즙 흘러내려

   온몸에 말라붙은 노란 허기, 상처딱지 같은 것들

   사막과 납골당, 팔려가는 것들 즐비한

   지구를 적시고                

   소녀가장이 사는 골목길에

   청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냄비 속의 식은 음식

   입속에서 청사과처럼 씹히고

   지구와 골목과 사막에게

   청사과가 오죽 많이 필요한지

   누나 동생 보고 울고  

   보고 웃다 불룩 나온 배 두드리며

   초여름 날 오후처럼

   낮잠 자는

   낮잠

   깨지만 않는다면

 

 

 여름           

  

  여름에 잎들이 더 짙어진다

  짙푸르다 못해 나무 잎잎

  침묵한다

  이제 그만

 

  계란 내피처럼 얇은  

  고도(古都)의 지도처럼 탈색된

  세상의 관계

  방패와 총도 없이

  맞닥뜨리는  

  뜨거운

 

  지금

  녹음은 빌딩 외벽만을 드리우고

  어디엔가 나둥그러져 있을 잔해

  폭격으로 무너진

  호주머니에서 떨어진

  녹슨 동전의 집 잃은 비명소리는

  햇빛에 더 도드라진

  핏빛처럼 붉어진 낮술 한 잔

  견딜 수 없는

  막다른

 

  여름에 잎들이 짙어진다

  비록

  그래도

 

  

거리

  

  거리는

  언제나 그립다

  거리는

  죽은 시인들이 지나간 자리

  시인들이

  영혼을 훔쳐가 버린 거리는

  언제나

  빈 곳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거리를

  걸어도

  거리에

  서 있어도 마찬가지

  거리는

  결핍이다

  거리는

  허점이다

 

 

 

세상의 껌

 

   하얀색 껌 다섯 알이 떨어져 있다 누군가의 발에 껌이 밟힌다 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탄다 금강구두는 에스콰이아 구두에게 밀려 움직인다 구둣발을 들어 올릴 때마다 구두 밑창에 붙어 다니며 지하철 바닥 여기저기에 들러붙는 껌

 

  하얀색 껌 다섯 알을 떨어뜨렸다 립글로스를 발라 입술이 반짝거리는 여자는 방금 학교를 졸업했다 살색 스타킹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두꺼운 <오만과 편견>으로 훤한 무릎 위를 가렸다 여자는 껌을 입안에서 굴리며 침을 자꾸 삼킨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들도 침을 삼킨다 하얀색 껌 다섯 알이 여자의 다리 밑에 머물러 있다 여자가 떠나고 난 자리에 여드름투성이 남학생이 가서 앉는다 남학생의 발에 채인 껌 두 알이 아슬아슬하게 굴러다니다 지하철 바닥 중간에서 멈춘다 하모니카로 <즐거운 나의 집> 불며 지나가는 장님여자가 껌 한 알을 밟는다 껌은 납작해진다 사람들이 납작해진 껌을 보고 있는 사이 장님여자는 전철 칸 끝에까지 갔다가 하모니카로 <즐거운 나의 집>을 다 불기도 전에 되돌아온다 납작해진 껌은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또 밟힌다 몸이 무거워 보이는 남자가 들어와 바닥에 붙은 껌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지나간다 남자의 무거운 몸은 즉석복권을 긁듯이 눈을 두리번거리며 빈자리를 찾는다 여자가 떠나고 난 자리에 앉아있던 여드름투성이 학생이 자리에서 떠나자 남자는 얼른 앉는다 그 남자가 앉을 때 구둣발에 채여 껌 한 알이 구석에 박힌다 껌 한 알은 사람들 발 사이로 사라진다 껌 한 알은 남자의 편한 신발 락포트 밑창에 달라붙는다 그 남자 음음, 헛기침을 한다

 

  껌은 바닥에서 벽을 따라 지하철 천장에까지 들러붙는다

 

  

 

불가사리  

   

   거실에 나와 자다가

  심장이 아파 눈을 뜬다

  심장은 바닥에 그대로 붙어있다

  심장이 빠진 몸은

  욕실 거울 속의 누렇게 뜬 달을 바라보다

  칫솔에 페리오 치약을 발라

  싹 싹 싹 칫솔질을 한다

 

  싹 싹 싹

  닫혀있는 현관문으로 뱀처럼 은밀하게

  바닷물 스며든다

  파란 거품 냄새

  파랗게, 파랗게

  자꾸 스며들어와 거실을 채운다

  바닥에 붙어 있던 심장은

  수력에 떠밀려 물속에

  둥둥 뜬다

 

  황금 동전 같이 작고 예쁜 물고기들로

  물속이 환하다

  바닷물 속 둥둥 떠다니다가

  불가사리와 마주친 심장은

  귀퉁이부터 그와 몸을 맞춘다

 

  춤을 춰. 춤을 춰봐.

  이렇게 살랑살랑 강렬하게,

  몸을 움직여봐.  

  심장은 춤을 춘다                              

  하지만 몸을 잃어버린 심장에게                  

  춤은 외롭고 두려운 일이다                      

                                                 

  툭

  칫솔을 놓치고 만다

  파도가 하얀 세면대 위로

  산산이 부서진다

 

 

 

 

경계의 노래                            

 

   머리는 한낮 내내 뙤약볕 속에 방치된 돌멩이처럼 뜨거워지고  

  현실은 낡아서 물이 새고 온도조절이 되지 않아

  고장 난 스팀에서 뿜어대는 수증기 같다

  21세기로 넘어와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밀알 크기의 답도 없는 감동과 생활의 문제

  저렇게 더운 날 집이 없는 자는

  폭염의 한낮이 오뉴월 한을 품은 여자 같아 으스스하다

  그들 중 누군가 읊조리는 주술의 노래는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흐린 하늘같은 거였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이 예고되는 날

  집이 없는 자는

  쇳물이 끓고 있는 용광로 같은 세상 앞에서

  경계 너머에 있는 누추한 시멘트벽으로 가린 집에서

  비틀어진 노래라도 부를 수 있기를 바라고

  아름다운 하모니가 그친

  분수가 꺼진, 분수대 주위를 맴돌며

  돌멩이를 던질 기회를 엿보는 아이들

  아이들은 돌멩이를 던지고 싶어 한다

  명랑함이여. 어디서나 노래를 부르는

  소년들의 얼굴은, 목소리는 저리도 평화로운데

  세계는 왜 평화롭지 않을까?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다

  어른은 어른이 되지 못했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여

 

 

 

어머니와 올드무비와 찐빵

 

   귀갓길 모퉁이의 분식집 아저씨 손님들 앞에서 무쇠솥뚜껑을 들어 올리고 있다. 골목의 허름한 입구는 하늘의 문처럼 어둑해졌고 골목에서 우리를 부르던 젊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기억 속에 희미해진 올드무비처럼 제대로 재생되지 않는다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던 길고양이 한 마리는 담벼락 옆에 주차된 트럭 아래 땅 밑으로 사라지고 무거운 무쇠솥뚜껑이 열리자 찐빵이 부풀어 오른 냄새는 공중으로 부유하며 이내 골목전체를 차지한다 허연 소복 입은 귀신들이 한꺼번에 내가 먼저, 네가 먼저, 하며 떠오르고 나서야 검은 솥 속에 숨어있던 부풀어 오른 찐빵의 실체가 뜨겁다는 걸 안다 반으로 자른 찐빵 안에 든 팥소를 보는 순간 병상의 끝자락을 물들였던 어머니의 검은 피부와 마지막에 라라를 놓쳐버리고 차갑게 흔들렸던 오마 샤리프의 까만 눈동자가 떠오른다 너는 찐빵을 삼키지 못한다 그것이 전체가 아니라면 허연 성에가 낀 마차 바퀴를 굴리며 골목의 끝을 떠나가야 하리라 하지만 너는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가 제임스 블런트를 듣는다    

 

 

 

 무화과

 

   무화과가. 있었다, 없었다, 어제 같은 오늘이, 그래서 어제가 된 오늘과, 오늘이 된 어제와 내일이 될 오늘이. 있었다, 없었다. 달고나 눈을 가진 남자와 붉은 물고기의 벽화가. 있었다, 없었다. 거미가 고통을 참고 기어들어간 벽의 눈으로. 있었다. 없었다. 바람과 나무와 그림자와 흔들리는 관계에 대하여 노래하는 서시가. 있었다, 없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엇갈려 두 번이나 서로 어깨를 스치며 산책하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없었다. 무화과 속에는 이 모든 걸 무화시키는 그늘의 밥상과 얼룩진 흰 빛과 끈질기게 달라붙는 자본의 천박한 숲이. 있었다. 없었다. 가까운 계단들에서 어깨가 통째로 실려가 방에서 더 먼 거리가 되었다. 거미의 시체가 말라붙은 텅 빈 벽속으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있었다. 없었다. “있음”의 찰나가 지나갔다, 지나가지 않았다. 다시 있었다. 없었다. 사라졌다. 다시 사라지는 죽은 시인의 이끼 낀 시가, 다시 선글라스를 덧씌워서 팔아먹은 노을이, 다시 하늘의 천 개의 계단에 동전을 한 개씩 던지며 도착한 노을이. “없음”의 영원으로, 마지막으로 우리는 비어있는 바다를 해체시키며 철탑에 갇힌 면류관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지고 없었다. 무화과를 입 안에서 터뜨리는 소리가. 있었다.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