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

나의 문학DNA * 權 千 鶴

 

나의 문학역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나의 문학이 시작되었을까?

한참을 더듬어나가야 할 것 같다.

 

나의 문학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지니고 있던 상상력과 DNA의 합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나의 상상력은 발동했을까?

그것들이 어디서부터 합성되고 발효되었을까?

 

<식물성의 시>

 

 

 

삼십여 년 전,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상가에 있는 꽃가게? 아니면 광화문 옆 골목의 꽃가게? 그곳에서 나의 감수성이 터졌는지도 모른다.

 

서울살이를 처음 시작하던 삼십대 무렵, 서울을 오르내리던 중, 우연히 터미널 지하상가로 내려가게 되었다. 구질구질한 통로를 빠져나가는데 어디선가 나는 상큼한 냄새. 그 냄새에 이끌린 곳은 울긋불긋 화려한 꽃들이 가득한 꽃가게였다. 꽤 큰 꽃가게 서너 개가 나란히 있는 그곳은 겨울의 한복판인 바깥세상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서울이란 이런 곳이구나!

서울도 내가 살던 시골과는 완전 딴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부터는 지상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리면 일부러 지하로 내려가 그 앞을 지나곤 했다. 그런 어느 날, 그 곳에서 꽃향기보다 더 상큼한 향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꽃가게에서 상록수와 꽃가지의 가지와 잎들을 쳐내며 화환을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파바박! 천둥이 지나갔다. ! 피 냄새!

촌뜨기인 나의 기억 속에 탄알처럼 박힌 것은 코를 통하여 맡은 나무의 피 냄새였다.

식물의 피 냄새가 이토록 향기롭다니!

 

서툰 서울살이를 하면서 자주 들랑거리던 광화문 거리.

시인협회에 드나들던 어느 날, 광화문 그 거리 모퉁이에서 또 그 냄새를 맡았다. 냄새를 따라갔다. 동료시인의 약국근처에 있는 화원(花園)이었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탄알처럼 박힌 그 냄새를 다시 맡으면서 드디어 나는 식물성의 시를 구상했다.

식물성의 시, 초록비타민……

화두가 되어 내 속으로 들어와 자리잡았다.

식물성의 시, 초록 비타민, 비타민, 나무, 바다, 사막……

끊임없이 내 속에서 발효하고 있었다.

 

나중 일이지만 결국은 나무테마시집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가 나왔고, 시문학에 일 년 간 연재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이 되었다.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는 원래 초록 비타민의 한 갈래로 나무를 테마로 삼아 내 안에서 발효 중이었는데, 마침 학도병으로 참전, 포로병이 되어 북한의 탄광에 억류되었다가 45년 만에 서해안으로 탈출해온 조창호씨의 생환이 터트려준 계기가 되었고, 1995, 시문학에 일 년간 연재한 바다연작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은 꾀까다로운 나의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제작년(2011)에야 시집으로 출판하게 되었고, ‘문학마실에서 소개해 준 바 있다.

 

나의 모든 시의 주제는 초록비타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시가, 초록비타민이길 바라고, 식물성의 시 쓰기를 고수하고 있다.

 

나의 문학, 나의 시 주제가 초록비타민이길 바라는 식물성의 시 쓰기, 싱그러운 식물의 피 냄새와, 나무들의 줄기를 타고 사락사락, 소락소락 오르내리는 물소리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싶다. 물소리를 찾아가려면 이전에 살던 부용(芙蓉)시절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부용(芙蓉) 시절>

 

 

 

 

지금은 김제시가 된, 김제군 백구면(白鷗面) 월봉리(月鳳里), 행정구역으로는 월봉리였지만 마을 이름은 부용(芙蓉)이었다. 당시 어린 나는 유난히 새가 많은 우리마을의 주소에 내 이름를 결부시키며 헛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권 천 학, 權 千 鶴.

백구(白鷗), 월봉(月鳳), 그리고 부용(芙蓉)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이름과 잘 어울리지 않는가.

(후후후,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익산시(구 이리시)에서 와이셔츠 공장을 운영하시면서 동시에 김제군에 속하는 부용에서 정미소와 제재소 그리고 양계장을 운영하셨다. 익산시의 와이셔츠 공장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와이셔츠 만드는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된 막네 삼촌의 요청으로 시작했던 만큼 관리를 거의 막네삼촌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아버지는 부용의 정미소와 양조장, 제재소에 주로 매달리셨다. 중학교2학년 때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익산시의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주말이 되면 부모님이 계시는 부용집으로 와서 보내곤 했다. 나중엔 아예 부용집에 고정으로 살면서 익산시로 기차통학을 하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다녔다.

 

부용(芙蓉)은 과수원이 많은 마을이었다.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친구와 함께 이른 아침의 과수원에 서 있었다. 사락사락, 소락소락, 나무줄기에서 물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가 들리냐고, 나를 이상하다고 핀잔주던 친구가 한없이 답답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마치 신들린 아이처럼 이른 새벽이면 이웃 과수원으로 스며들곤 했다. 안개 자욱한 새벽, 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의 시간에 나무의 줄기에 귀를 대고 소락소락 물 오르내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슬에 젖은 옷자락을 여미며 고양이걸음으로 살금살금 돌아오다가 엄마에게 걸려 된통 야단도 맞았다.

그때부터 나의 사춘기였던 모양이다.

물오르는 소리 외에도, 아버지의 제재소에서 들리는 톱날소리와 잘려나가는 송진냄새 풀풀 나는 나무 냄새가 나를 파고들었던 것을 보면.

 

우리집 담 너머로 보이는 탱자나무 길도 예사롭지 않았다. 희삼씨네 복숭아과수원과 조씨네 배나무 과수원 사이로 구부러진 길은 오래 된 무성한 탱자울타리로 둘러쳐져 봄이면 탱자꽃이 구름처럼 피어올랐고, 꽃이 지면 잎으로 덮힌 초록의 덩이로만 보이다가 다시 봄이 올 때까지는 가시만 무성했다.

나는 그 길이 좋아서 장독대 받침 돌 위에 서서 하염없이 넘겨다보며 사춘기답게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무도 모르는 혼자의 슬픔에 겨워하기도 하고, 혼자 왕녀(王女)도 되고, 혼자 상상실연(失戀)도 했다.

 

훗날, 그 시절이 시 [괴테의 과수원], [사슴눈 고성할배], 등의 연작시의 테마가 되었다.

 

두어 해 지나 마을에 익산시의 시내버스가 노선연장을 하여 마을을 지나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 첫단편 신작로>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초, 국어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숙제로 내준 글짓기 과제물들을 검사한 후 차례로 돌려주셨다. 나는 맨 앞줄에 앉는데도 이상하게 나의 이름을 맨 나중에 호명되었다. 과제물을 받으러 앞으로 나갔더니 나의 원고를 돌려주시면서 그 자리 서서 돌아서서 반 친구들에게 읽어주라는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2백자 원고지 10매 내외로 글짓기 해오라는 것이 여름방학동안의 국어숙제였다. 다들 10매를 채우기 어려워 서 너 장으로 제출한 아이도 많았는데 나의 원고만이 60매 정도였다. 소녀적(少女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쓴 신작로, 최초의 단편소설이었다.

당시에 즐겨 읽었던 인간의 조건’, ‘빙점등의 일본소설의 영향이 컸다.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을 넘어서자 친구들이 수런거리는 것 같더니 교실 분위기가 점점 야릇해져갔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흘긋 곁눈질해가며 다 읽었을 때 친구들의 한숨소리도 들리고, 박수소리도 들렸다. 선생님께서는 넌 소설가가 되렴 하셨다.

그때를 나의 문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첫동인 문예가족활동 시작>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말과 3학년 1학기 사이의 봄방학 때였다. 반 친구 두 명이 삼례에 있는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 삼례의 친구는 찾아온 두 친구를 데리고 근처의 한내천()에 데리고 봄바람 맞으러 나갔다. 마침 그 곳에 봄소풍을 나와 술잔을 기울이는 한 무리의 어른들이 있었다. 아저씨들은 뭐하는 분들이세요?로 시작되어 문학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내 친구 중에 글 잘 쓰는 친구도 있는데요, 연애편지 대필도 다 해줘요 했다. 하하하 그래? 그럼……,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나는 <문예가족>의 가장 나이 어린 일원으로 어른 들 속에 끼어들게 되었다.

<문예가족>은 그 몇 해 전, 그러니까 1960년대 초부터 전북지방의 유일한 문학동인이었고, 내가 참여한 것은 60년대 말이었다. 공무원, 신문사 편집장, 교사, 상의용사, 사회사업가, 자영업자 등등에 종사하는 동인들을 ’(‘의 전라도식 표현)이라고 부르며 무조건 사람이 좋아서 한 달에 한 번씩 전주나들이를 하며, 첫 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에 수록된 )-열여덟의 자화상』 『()등을 쓰던 시절이었다. 이십 대 초반을 전후해서 서너 번, 엔소로지의 표지그림도 그리고 전북일보에 소설 삽화도 그리고, 시도 발표하고, 시사(時事)글도 실었다.

 

매달 한 번씩 전주의 <문예가족> 동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 탱자나무 길을 지나가곤했고, 또 방과 후에 기차를 놓치면 다른 방향의 더 가까운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익산시에서 전주행 버스를 타고 오다가 반월리에서 내려 집까지 오는 그 과수원 사이의 탱자울타리 길을 통과했다.

 

시도 쓰고, <문예가족> 동인 활동도 시작하였으니 그 때가 나의 문학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느닷없이 전교생 독서량 조사를 했다. 교육청의 갑작스런 지시였다. 그 조사에서 가장 많이 읽은 학생이 바로 나였다. 선생님들도 놀랐지만 나도 놀랐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2백 몇 십 권쯤 되지 않았나싶다. 왜냐하면 당시에 120권짜리 소년소녀전집을 다 읽어 제쳤고, 위인전, 탐정소설 시리즈 등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로 그 시절 부잣집으로 알려져 있는 정미소나 양조장이 아버지의 사업이었는데도, 우리 엄마는 용돈에 엄청 짰다. 용돈이 짠 것만이 아니라 가정교육도 소리 나지 않게 엄격하였다. 우리 엄마아빠가 고향인 안동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는 처지였으므로 (‘경상도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더욱 그랬는지 아니면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의 우리집안 교육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용돈 짜고 책 귀히 여기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 형제들 살 속에 파고들었다.

용돈이 부족하니 책을 살 수는 없었다. 반 친구들의 손에 든 책을 발견하기만 하면 차례로 다 빌려 읽었고, 문성당 서점에서 샘플로 학교에 공급하던 위인전이나 문학전집 등은 도착하는 순간 모두 내 차지였다.

그 집에서 떠날 무렵엔 제인 에어의 폭풍의 언덕에 빠져있었다. 전에 살던 삼각주 안의 목천동 집을 배경삼아 소설을 구상하기도 했으니, 목천동 집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익산시 목천동시절>

 

 

 

 

목천동으로 이사 간 것은 김제의 황산(黃山)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친 후였다.

6학년으로 전학해서 이리여자중학교(지금의 익산시) 2학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큰 도랑이라고 부르는 수리조합(일제시대 축조) 물길이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 전군도로(전주와 군산으로 이어지는 길) 버스길과 나란히 흘러가다가 우리가 사는 목천동 마을 입구에서 물줄기가 나뉘어 우리 마을 쪽으로 흘렀다.

큰길 버스 정류장에서 다리를 건너 100미터쯤 되는 우리 집 옆에서 물길은 다시 우리 집의 앞쪽과 뒤쪽으로 나뉘어져 흘러 들판으로 이어졌는데 두 물길 사이에 꽤 넓은 삼각주 같은 형상의 땅을 이루었다. 삼각주 안이 모두 우리집이었다. 그 안에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정미소와 양조장이 있었고 집 뒤 뜰에는 양돈장이 있던, 소위 말하는 동네 부자 경상도집이었다.

앞쪽의 물길 따라 난 길엔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오는 다리와 양조장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다리가 아치 모양이었고 그 다리아래에는 우리집에서 기르는 거위와 오리떼가 노닐고 있었다. 그 두 개의 아치형 다리는 나에게 서양화의 한 풍경을 상상하게 했고, 거위 울음소리는 온 동네를 휘덮곤 했다.

 

목천동으로 이사 간 초기에 해당하는 6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새로 전입한 이리 남초등학교의 같은 반 친구 용덕이네 집에 놀러갔다가 마루 끝에 놓인 용덕이 오빠의 책을 보고 괜스레 허세 부리느라고 수준에 맞지도 않는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용덕이 오빠는 서울로 유학을 하는 유일한 대학생으로 여름방학이라서 내려와 있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왼쪽 페이지는 영어로, 오른 쪽 페이지는 한글로 되어있던, 지금의 문고판보다 약간 큰 판형의 책이었다. 이거 니가 읽을 수 있어? 용덕이 오빠가 으아해서 물을 때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럼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읽었는데요. 사실은 엄마가 읽는 것을 곁에서 보았을 뿐이었다. 뭐라구? 우리엄마가 읽기에 나도 따라 읽었거든요. 느이 엄마가? 녜에 그럼요. 그제야 내가 부리는 허세의 속을 들여다보았을 용덕이 오빠는 꼭 가져와야 한다 하면서 빌려주었다.

그 여름,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재미없어 첫 장에서 열두 번도 더 가다말다, 후퇴와 전진만을 거듭한 후 날짜가 임박하여져서 결국은 맨 뒷장으로 건너뛰어 억지로 활자만 겨우 읽어낸 후 돌려주었다. 돌려주면서 한 술 더 떴다. 좀 어렵긴 했지만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하고. 그리하여 노인과 바다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책이라는 인식으로 박혔고, 헤밍웨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 헤밍거리게 된 이름이었고, 삼십이 넘도록 읽지 않은 이유도 되었다.

나의 문학의 역사는 뽐내고 싶어 부린 허영 때문에 벌어진 그 책과의 전쟁으로 지루하게 보냈던 그 시절과 그 여름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황산, 어린시절>

더 거슬러 올라, 김제시의 공덕면 황산(黃山).

그곳이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부모님께서 고향인 경북 안동(安東)으로 가지 않고,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외할아버지의 사촌형 되시는 어른의 이끌음으로 낯선 전라도에 뿌리내린 첫 임지였다. 아장아장 부모님 따라 귀국한 나는 황산의 동리(東里) 마을에서 자라며 익산시의 목천동으로 이사 가기 전 까지,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까지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었다.

네 살의 어린나이로 육이오도 경험했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피신 갔던 돌팍제, 김제 시내 쪽으로 가는 마을 앞 다리가 비29가 쏘아대던 총탄에 맞아 폭파하는 장면, 마을 삼촌이 벌거벗은 몸에 가죽혁대로 얼기설기 묶여 제실(祭室) 앞 공터에 세워지고, 총부리를 들이대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던 나에게 사탕을 먹이던 일 등등, 전쟁의 기억들이 남아있다.

 

육이오가 지나가고, 아버지가 양조장 일을 하시던 그 시절, 엄마는 사진이 붙어있지 않은 누런색의 도톰한 종이로 된 앨범에 붓글씨로 구불구불 무엇인가를 써내려가던 모습이 선명하다. 엄마가 가끔 소리 내어 경상도 식으로 책을 읽던 기억들도 있다. 그것이 해방 직후 한국으로 건너 온 엄마의 유일한 여가선용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엄마가 쓰는 글의 내용도 모르고 있었지만 글자를 엮어낸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당시 엄마는 독서광이었던 같다.

어쩌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글에서 듣는 부모님들과는 달랐다. 다른 부모님들은 춘향전 필사본이니 홍길동 전이니 소위 우리의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읽거나 들려줬다고 하는데 우리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엄마의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가끔 들려주시긴 했지만, 엄마는 주로 당신의 독서에 열심이셨고 가끔 엄마가 읽은 책이야기를 해주셨다. 당시 엄마는 읽은 책들로 괴도 루팡’, ‘몬테크리스토 백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그리고 한국작가로는 방인근도 생각난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무슨 책이었는지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방인근의 무슨 소설인가를 읽다가 아빠가 일을 마칠 시간이면, 평소에 엄마가 읽던 책들을 반짇고리 귀퉁이에 두던 것과는 달리 벽장 속 비밀 장소에 깊이 감추던 일이었다. 나중에 아마 방랑의 가인이 아니었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내가 엄마로부터 흥미진진하게 들었건 이야기가 후에 알고보니 괴도 루팡또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 시절의 그 모든 기억들도 나의 문학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더 거스르자면,

 

 

<몸과 마음의 고향 그리고……>

 

 

 

Rainbows echo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할아버지 적부터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내려온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전라도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서울에서 사는 동안 내내,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어른들을 따라 안동을 찾곤 했었다. 길안 읍내 근처의 누레기에 있는 외가를 거쳐 공수골 본가까지, 외삼촌 등에 업혀서도 갔고, 육촌오빠와 동행도 하고, 어느 해엔가 물이 넘쳐 찦차를 개조한 판도차를 타고 가는 등 여러 가지 고향경험을 했었다.

산골짜기 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들은 선녀탕에 얽힌 전설을 비롯하여 내가 자라면서 간혹 고향에 갈 때마다 지나는 서당마며, 미네 약수터며, 도둑바위며, 송지(송사)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토일 쪽의 산길에 있는 너럭바위며 질기네미재며……

특히 할머니의 친정인 청송에, 할머니와 함께 갔던 일은 특별한 경험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나 혼자서만 저승의 개 짖는 소리와 한지 문살에 비쳐진 저승사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본가와 외가를 돌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끝은 항상 눈물겨웠다.

그리고 전라도에 살면서도 경상도집으로 불리던 것도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키웠다.

 

 

<나의 문학 DNA>

토론토에 오가며 살기 시작할 무렵에, 한국방문 길에서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인 안동지역을 돌아온 일이 있었다.

길안 송사초등학교 교문 앞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아버지가 어릴 적 다니던 추억을 더듬어 이야기 해주시기도 하고, 서당친구 이야기며, 청석바위 이야기며, 그 건너편의 깎아지른 절벽 위 산수갑산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때 문득, ‘산수갑산이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성장기를 보낸 고향 전라도의 온갖 추억들, 김제평야며 흥복사며 목천강이며……, 정신의 고향인 안동을 오가며 느끼고 겪었던 경험들

 

그 모든 것들도 다 나의 문학역사가 아닐까?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문예가족> 동인활동이나,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진단시(震檀詩)동인> 활동을 하면서 춘향’ ‘장승’ ‘백결…… 등 전통을 테마로 시를 썼던 일이나, 개인적으로 백제, 삼국유사 등에 초점을 맞추었던 일, 지금 외국에서 살면서도 끝내 놓지 않고 내 생애의 끝까지 함께 갈 작정으로 몰두하는 이 외로운 작업 또한 나의 문학의 역사로 녹아들었다고 확신한다.

 

첫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이후 백제테마시집 청동거울속의 하늘과 영어번역시집 2H2 + O2 = 2H2O, 열 권의 시집 외에도, 나의 삶 전체에 그 모든 것들이 녹아 발효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기를 바라기도 한다.

 

얼마 전 어떤 시를 쓰다가 문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라보았던 산수갑산이 떠올랐다. 내가 걷는 문학의 길이 그 높은 절벽을 향한 것이었으며, 문학의 길을 걷는 나, 그 속에는 피의 내림이 스며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토록,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나의 DNA, 그 속에 문학으로 가는 미로가 잠겨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 문학과의 불화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도란도란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며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고 싶다   *    權  千  鶴

 

 

문학관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진 않다. 그러나 특별한 것 없이 특별하고 싶다.

한때는 거창하게 버거울 정도로 문학에 대해서 심오하게 생각했었다.

문학이 과연 구원인가? 하다보면 절망이었고, 절망이다, 하고 보면 구원이었다. 그렇게 문학과 어부렁더부렁 젊음도 보냈다. 마치 적과의 동침 같았다.

지금도 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지만 방법을 바꿨다.

내가 문학에게 다가가기만 할 게 아니라 문학이 나에게 다가오게 하고 싶다.

 

그저 열심히, 세상보다 앞서가진 못하더라도 그러나 너무 많이 뒤지지 않게, 한 두 발짝쯤만, 적당히 떨어져서 훑어보고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세상 귀퉁이를 뜯어먹으며 맛본 간을 짭조름하게 내 글들 속에 넣는다. 넣어서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길 바란다.

 

나에게 문학 행위는 어쩌면 옛날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부용(芙蓉)의 과수원에 선 아침, 나무에 물 오르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던 친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는 아무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나를 핀잔했고, 나는 내 귀에 들리는 소리를 못 듣는 친구가 답답했었다. 때로는 말귀 못 알아듣는 세상을 향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때로는 세상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니까.

 

이제는 친구와 같은 동행이다. 문학과 화해의 길이다.

 

 

Seasons Gone By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늘 한계에 시달렸다. 능력이 없어서였다. , 명예, 배경, 학문 기타 등등을 통틀어서 세상살이에 대한 총체적인 무능력, 그래서 늘 허기졌고, 미안했다. 그렇게 지금 내 앞에 남아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버렸다.

문학에 대해서도 다를 바 없다. 문학에게 늘 미안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문학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다. 살아버린 시간보다 더 많이, 할 수 있는 만큼 전력투구함으로서 문학에게 오래 동안 품어온 미안함을 덜고 싶고 싶다. 나의 의견도 섞어가며 조율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시인 초년병 시절,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나는 한 선배시인과 대화 중에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 후 그 선배는 나의 그 말을 자신의 시집 서문에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는 후배시인의 말을 새겨본다고 적은 것을 봤다.

 

사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었다. 싶다.  매우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싶다. 그래서 늘 허기졌다. 허기지다. 그러나 이제, 진정으로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고 싶다.

나의 자작시 유명한 무명시인처럼,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는 것. 그것이 지금 나의 문학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