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 백동수와 놀다

 

 

치장이 무에고 격식이 무엔가

틀이란 제 스스로를 옭아 매는 일

순정고문(醇正古文)이란 게 무에냐

낭떠러지를 때리며 물줄기는 제 몸을 살라

솟구치고, 나르고, 곤두박질치고, 뒹굴고, 내리꽂히는 것을

제 몸 낱낱이 모여

산천을 흔드는 장엄이 되는 것을.

 

생각을 옭아매지마

글을 묶지마

옭아매면 맬수록 날이 서는 게야

흐트러지는 게야

저자거리의 말을 줄 세우지마

말은 호랑나비야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나비야

말은 벌이야 제 꽃을 따라 떠도는 벌이야

 

문체반정(文體反正)이 다 무에야

저자거리는 온통 훨훨 날개짓으로 가득한데

세상은 저토록 분방한데

형형의 빛깔로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비가 나리고 눈이 나리고 햇살이 강물처럼 흐르고

송홧가루처럼 이야기 세상을 퍼 나르는데

패관(稗官)이 무에야 소품(小品)이 무에야

패관도 소품도 정작 자갈물린 망아지

천길 절벽을 후려치는

자유인게야, 꿈인게야.

<2012.3.>

 

 

꽈리를 불다

 

호박넝쿨을 걷다가 아내가 다홍빛 꽈리를 한 줌 따들었다. 뜨거운 여름 내내 푸른 잎사귀를 너풀거리며 사방으로 손마디를 뻗친 호박넝쿨에 숨어 꽈리는 용케도 연보랏빛 꽃을 피우고 종처럼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아내는 꽈리를 집게손으로 조심스레 뜯고 열매를 꺼낸다. 잘 여문 앵두 같다. 아내는 열매 속을 열어 속씨를 발기고 입 안에서 오물거리며 꽈리를 분다. 어렸을 적 교문 앞에서 10원에 4개씩 하던 꽈리를 사 불었단다. 아내의 입 안에서 뽀드득하고 눈 밟는 소리가 난다.

호박넝쿨을 걷다말고 아내는 입 안에 꽈리를 오물거리며 삼십 년을 훌쩍 뒤돌아 유년으로 달린다. 뽀드득, 아내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지난다.

잘 익은 호박덩이와 함께 다홍빛 꽈리는 기숙학교로 떠나 휑한 아이 방 한켠에 걸린다. 텅빈 방안이 금세 환해진다. 아침, 텅 빈 아이 방을 열면 밤새 눈이 쌓이고 아이들 다홍빛 따뜻한 목소리로 눈밭을 뒹군다.

<2009.9.>

 

 

대숲

 

옛날 할아버지께서 하늘로 솟아 오른 대나무를 낫으로 깎으실 때는 모두 한마음으로 깎으셨나 봅니다. 몇 밤을 세상 돌며 봉두난발로 힘주어 손아귀에 잡고 그저 사람이 하늘이라며, 애처로운 식솔들 뜨악한 눈으로 가득 눈물 머금고 대숲 아래서 어금니 모질게 물던 밤. 바람은 송곳처럼 쉬쉬 마구 달려 나갔는가 봐요.

 

달 없던 밤 할애비 이슬 맞고 돌아오던 날, 세상은 예전처럼 비가 내리고 대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건 속절없는 바람 발뿐, 어쩌다 그 손주 놈 세상 살아남아 대숲 아래서 낫 들고 대쪽을 다듬었습니다. 이날도 예전처럼 바람은 웅성거리고 바람이 흘리고 가는 흉흉한 소문들만 댓 닢 위에 수북이 쌓였습니다. 청람빛 대쪽 끝에는 그저 투명한 맑은 빛이 고이고, 이따금 쌀죽이나 보릿죽 냄새가 묻어 나왔습니다. 흰빛을 뿌리며 날카롭게 다듬어지는 대쪽을 보며 손주 놈은 할애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철마다 지천으로 꽃망울 터트리는 이 땅, 할애비 묻힌 이 땅에 대쪽보다 더 뾰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88. 10.>

 

 

모기떼

 

예성강을 건너서 왔다. 바람을 뚫고 모진 비모래 뚫고 왔다. 숨죽이며 밤을 타고 걸었다. 비상의 방법을 몸에 익힌 아래 적막의 불빛만 자욱한 수 만 개의 포충망을 피해 그리운 피톨의 진한 향내에 촉각을 세우고, 멀리 울창한 별 숲이 드러누운 긴 강을 만났다. 끝없는 몸놀림에서 비로소 울음을 토할 수 있었다.

 

아직은 낯설은, 두고 온 피톨의 냄새와 흡사한 알싸한 취기로 긴장이 풀린 육신을 수습 할 수 있었다. 일어나리라. 두 손으로 그리운 피톨 속 잠행을 하며 심장 가득 채우리라. 어질한 향내에 코를 박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차가운 먼지로 날릴 때까지. 이렇듯 잠행의 분별없는 수소문으로 가득 가득 진한 향내 채우리라.

<1988.6.>

 

 

밥상

 

된장을 푼 배추국을 얹은 아침밥상을 놓고

아내와 뎅그마니 마주 앉아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는다.

지난 정월에 담근 된장이 제법 맛이 난다

아침밥상에는 이면수도 한 토막 올랐다

옛날, 강릉 사는 최 부자가 이면수 껍질 맛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날렸다는 물 좋은 이면수다.

연탄불에 노릿하게 구은 이면수 속살이 달다

아내가 속살은 접시 한 켠에 미뤄놓고

이면수 머리를 젓가락으로 헤집다가

도저히 자신이 없는 듯 빈 접시에 슬그머니 올려 놓는다

다시 아내는 빈 접시에 버려놓은 이면수 머리가

못내 아쉬운 듯 마른 침을 꿀꺽 다시며

젓가락으로 머리를 집어 들었다가

빈 접시에 도로 놓는다.

“할머니는 이면수 머리를 잘근잘근 깨물며 참 맛있게 자셨는데” 하며

아내는 이면수 머리에 곁눈질을 또 놓다가

슬쩍 고개 들어 안방 벽에 걸린 외할미 영정을 쳐다 본다

다섯 해 전에 세상을 버린 외할미는

부엌 장작불에 노릿하게 구워 낸 이면수 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지아비를 거두고, 딸의 핏줄을 일으켜 외손주 셋도 도맡아 키웠다.

아흔 셋에 세상을 뜬 외할미의 배냇 이빨은 그 흔한 충치하나 없이

말끔했다. 소주병을 이빨로 척척 따내시던,

외할미는 외손주 셋, 지아비와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살점은 모두 발겨 외손주를 거두고

늦도록 밥상머리에 혼자 앉아

이면수 머리를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잘근잘근 씹으며 못내 손가락도 빠시며

참 맛나게 자셨다.

<2012.3.>

 

 

서설(瑞雪)

 

경칩에 눈이 내렸다. 예고도 없이 내린, 보기 드문 함박눈이다. 밀려오는 봄기운을 버팅기듯 온 산천을 눈꽃으로 매달았다. 한풀한풀 벗어 던지며 마침내 은박지처럼 눈부신 속치마로 겨울을 덮고 봄을 받는다.

 

하얗게 달아오른 산천이 속살을 열고 생명수를 잦아 올리자, 개울이 풀리고 금세 개부랄꽃, 노루귀, 변산바람꽃이 솜털을 나풀거리며 꽃을 피운다.

 

뭍과 함께 바다도 열렸다. 서설(瑞雪)이 억센 바다의 등짝을 두들기자, 몸을 뒤채이며

바다는 한꺼번에 생명을 토해낸다.

진저리니, 토박이니, 말치니, 미역이니, 송곳나물이니, 국수말 따위의 바다나물이, 바다 밑바닥 혹은 갯바위에 단단히 뿌리박고 길게 목을 뽑아 올려 바다를 헤집는다.

 

음력 이월 초하루, 갯가 아낙들은 바람과 종자 신 영등할망이를 부르며 소지를 올렸다.

한 보름 내내 바다를 달구었다. 바다는 비릿한 봄내음 풀풀 날리는 여자들 판이다.

<2012.3.>

 

 

與民樂

 

오늘 못 팔면 내일 팔면 되는 거여. 애간장 탈일이 무에 있어. 집에 가면 마누라가 있어 자식새끼가 있어. 한 평생 이래 살아도 남의 주머니 넘본 적은 눈꼽만큼도 없어. 오늘이 설 대목장이라 울진장도 이젠 한 물 갔네. 옛날이사 좋았지. 약초 닷 단 묶어들고 전 펼치면 한나절도 안돼 술청에 앉았지. 돼지국밥 말아놓고 소주 한 잔 부으면 창자 속이 찌르르하니 근심은 봄눈 녹듯 사그라들고. 다음날이면 통리 장에서 전 펼치지. 인심은 통리 장이 젤이라, 석탄백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탄가루 풀풀 날리며 한 평생 곡괭이질 막장인생들이지만 인심 하나는 땅같은 사람들이제. 한 때는 눈 맞춘 대폿집 아낙도 있었는디. 한 삼 년 루핑 지붕 아래서 한 솥밥도 먹은는디. 다 부질없는 짓이라. 나이 칠십이 후딱 넘어 달을 쳐다보면, 시큼한 막걸리 냄새 솔솔 풍기며 가슴팍 파고들던 살집 실팍한 아낙 생각이 후딱후딱 나기도 해. 본시 오래 발 못 붙이고 사는 인생이라 발길 되돌리던 날 왠 달빛은 그리도 환하던지 달빛처럼 이어진 산길, 외줄기 산길 타면서 한사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네. 길은 가물가물 달빛만 그득했네.

<2011.5>

 

 

외가(外家)

 

그날도 할미는 구들장을 들춰 색 바랜 지전들을 꺼내셨다. 검버섯이 신열처럼 후두둑 불거지는 지전 보다 얇은 손등을 건너 세월만큼 죽음이 얽혀 있었다. 인공 때던가, 할미는 그 손으로 감옥소를 드나들며 지아비의 밥을 날랐단다. 그저 산목숨이면 이쪽저쪽이 무슨 소용이시냐며 찬 서리를 털 듯, 지난 일을 생각하면 손끝부터 저려 오신 단다. 흐르는 게 물 뿐이랴. 궁상처럼 목숨도 흘러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외손주 바램없이 기다리며, 구들장 한 잎 한 잎 지전을 쌓는다. 할미는 접힌 지전을 알뜰히 펴시며 지아비를 빼앗아 간 전쟁을 떠올리실까. 유복자 딸자식의 피를 일으켜 세운 외손주의 이마, 지아비를 뵙는 듯 두 눈을 감으시는 아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할미의 앙가슴 밑바닥엔 눈물이 말라 타는 논바닥처럼 턱턱 골이 패였을까.

 

저무는 외가의 오랜 기왓장을 두들기며 쏴사사아 대숲이 울었다.

<1988.11>

 

 

임진년 섣달 열아흐레

 

아흔세살 난 배롱나무 밑둥을

뭉턱 자르고 싶었다.

 

할애비가 열여덟 살림나던 해

본가에서 옮겨 심었다는

일곱 살 모자라는 백년 살이 배롱나무

도끼질로 뭉턱

자르고 싶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나이 들어 한 해 두 해

늙어간다는 게

이토록 가질게 많은 것인지

이토록 지킬게 많은 것인지

 

쉰 몇 해를 살아오며

그저 아흔 세 살 난 배롱나무처럼

어김없이 제 때를 기다려

붉은 다홍빛 꽃을 피우고

나이만큼 퍼트린 가지

땅으로 늘어뜨리며

봄날 연록의 새순을 내밀고

무성한 잎사귀를 다는 것 인줄

알았다.

 

임진년 섣달 열아흐렛 날

날 선 도끼 움켜쥐고

처연하게 서 있는

배롱나무 밑둥

뭉턱 잘라내고 싶었다.

 

내 꿈속으로 들어와

내 가슴을 키우던

배롱나무, 저 처연한 내숭덩이

뭉턱 쳐내고 싶었다.

<2012.12.>

 

 

讚 몽유도원도

 

안평의 흰 도포자락이 바람에 날린다

팽년이 바투 어깨를 나란히 걷는다

절벽으로 이어지는 걸음이 가볍다

솔향이 바람을 흐트린다

가슴 속이 솔내음으로 가득찬다

안평이 휘청, 몸이 기운다

팽년이 얼른 손을 뻗친다

두어마장 쯤 뒤로 숙주와 최항이

너풀너풀 안평을 따른다

 

수 백 구비 조도잔(鳥道殘)을 돌아

외줄기 샘을 만난다

엎디어 단숨에 물을 마신다

허트러진 상투 끝이 물빛에 어른거린다

복사꽃 몇 잎 물길을 흐른다

문득 고개를 드니 복사꽃비가 하늘을 수놓는다

자하(紫霞), 복사꽃잎이 붉은 안개를 피워올린다

아이들 복사꽃비를 쫒는다

아비들 잠뱅이 걷고 밭을 간다

어미들이 뜯는 나물 내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마득하다

뒤 돌아 보니 울울첩첩

조정은 아마득하다

숙주와 최항이 손을 휘저으며

헐떡헐떡 쫒아오다가

안개 너머로 되돌아선다.

훅, 바람결에 비릿내 그득하다

 

되돌아 나오는 길, 새발자욱 좇아

천길 낭떠러지로 고꾸라진다

몽상이다. 줄줄 식은 땀이 흐르는

적삼 깃에

복사꽃이파리 한 점

핏빛이다.

<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