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검댕이 냄비 속을 휘휘 저으며 후루룩후루룩 먹는다. 남은 국물로 바닥이 보이는 젊은 시절 뜨겁게 앞날을 삼킨다.

 

대문 열고 뛰어 들어와 툇마루에 가방 던져 놓고, 자전거 타고 오신 아버지도, 밥그릇 탱탱 불은 검둥이도, 바구니 가득 나물 캐고 돌아온 누이도, 구둣방 털보 삼촌도, 홍옥 노점상 아제도, 약국집 고모도, 마늘 고추 무 파 놓고 푸성귀 파는 꼬부랑 할머니도 무릎 괴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먹는다.

 

공원 한 구석 노숙하는 소주병과 학교 앞 자취방 친구와 날 밤 새며, 애인과 둘이 먹다 싸우고 헤어진 그 라면, 불광동 먹자골목 친구네 분식집에서 먹던 그 라면, 노크하고 들어온 내무반에서 북의 병사에게 끓여 준 그 라면을 먹다가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저녁시간 전쟁이었다가 간식이었다가 주식이었다가 생명이었다가 죽음이었다가 사랑이었다가 바닥 얇은 노랑 냄비 남과 북을 휘휘 저으며 후루룩후루룩 평화를 먹는다.

 

 

 

 

 

 

 

 

 

 

 

 

 

 

 

따발총

 

 

 

 

 

깨알 같은 문자가 쏟아졌다 파란 하늘을 뚫고

외로움 타는 사람들이 깨밭을 터는 가을이다

완전무장한 신상품들이 거리를 휘젓고 다닐 때마다

총기 탈취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던 시절

총기마저 잃으면 죽은 목숨이라고 했다

죽음을 무릎 쓰고 순결을 지켜온 내 몸의

유전자들이 매양 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단한 알맹이만 빼앗아간 총알로 또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이 가을 메신저피싱이 기승을 부릴 거라는

첩보가 위성 안테나 넓적 귀에 걸려들었다

춤추며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의 미세한 흔들림도 잘 살펴야 한다

저마다 따발총은 몸에 잘 붙어 있는지, 벌레가 깨죽거리며

주머니 속에 똬리 틀고 앉아 깨를 털고 있지는 않은지

에스라인 코끝을 반질반질 문지르며

깨소금만 골똘히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쯤

따발총 된통 맞고 빈 털털이 낙엽처럼

길가에 나앉아 히죽히죽 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에 들면 세상 다 잊을까

 

이른 아침 배낭을 멘다.

 

탁 트인 하늘만 뵈는 산속에서 푹 쉴 거라고

 

산 나무가 수액 떨구며 안간힘을 쓰다가

가파른 능선 오른다는 걸

 

오늘도 까무룩 잊고 살아가는 산 아래 사람들

 

어디 앞산만 산인가

 

칼국수 먹고 자고 나면 오르는 물가

 

막막함도 산이다. 그대와 내가

 

날마다 오르는 산 넘어 산

 

 

 

 

 

 

 

귀뚜리가 사는 방

 

 

 

 

 

돌 속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이 들어있지

조금씩 나를 죽이는 돌 속의 방

독을 받치고 있는 돌 틈에 집을 짓고 귀뚜리가 산다.

찌르륵 귀뚜리가 울 때 돌문 살짝 열면 여자가 웃고 있다

내 몸을 휘어 잡아당기는 공간으로 지하철이 지나가고

설자리 없는 돌 위에 서서 멀고 먼 장거리 여행을 한다.

찌르륵 비빌 번호가 문고리 잡아챌 때

저녁이 메뉴보다 더 일찍 식탁위에 앉아 끓고 있다

흥겨운 귀가길 안테나의 귀가 커지고

방방마다 귀뚜리가 엄지에 지문으로 남아있다

시중은행 창구에서 잔무 하던 여자가 퇴근준비 서두르고

돌 머리를 톡톡 치면 귀뚜리가 폴짝폴짝 뛰어 간다

강물 따라 흐르는 달빛 환한 내 가슴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귀뚜리가 사는 방에서 찌르륵 찌르륵

 

 

 

 

 

 

 

 

 

 

 

 

 

 

수수꽃다리

 

 

 

사월 어느 화창한 오후, 나무 그늘 길에 머리숱 무성한 수수꽃다리 소녀가 코를 찌르고 달아난다.

 

나는 얼른 그 애를 붙잡아 앞가슴 깊숙이 찔러 넣고 온종일 호수공원으로 고궁 뜨락으로 데이트하고 다녔다.

 

며칠이 지났을까 와이셔츠 입으려다 깜짝 놀랐다. 내 앞에 서있는 그 수수꽃다리 소녀, 앞가슴 주머니에 보랏빛 립스틱을 덕지덕지 발라 놓았다.

 

그날 헤어질 때 세탁소 앞 골목에서 숨 가쁘게 입맞춤한 것이 화근이다. 영문도 모르는 채 다림질하던 아내는 붉은 낯으로 어쩔 줄 모르고 나는 그 일을 하얗게 잊고 있었다.

 

소용돌이 물속에서 그 소녀가 내 가슴을 쾅쾅 치며 사정없이 피를 토하고 울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지만 수수꽃다리는 이미 바다로 떠났다.

 

흘러 닿는 곳마다 독한 핏물은 살을 뚫고 문신을 새겼다. 내 심장에 도톰한 하트 문양 수수꽃다리 수수꽃다리 수수꽃다리…

 

 

 

 

 

 

 

 

 

 

 

 

밥상

 

 

   

 

오늘은 누가 죽어서 양식이 된 걸까

날마다 밥상머리에 앉아 드리는 제사

거룩한 밥상에는 파도치는 하루가 들어있다

농부의 소금창고가 들어있다

초록 숲에 뿌리내리는 무덤

날마다 죽는 사람들의 뼈와 살이 고봉으로 들어있다

정들어 되새김질하는 너와 나의 타액이 들어 있다

삶의 고비마다 넘기는 한 숨이 들어 있다

배가 불러 죽은 몸통에서

배고파 죽은 풀뿌리가 들어 있다

울다 웃다 죽은 하늘이 다 들어 있다

 

 

 

 

 

 

 

 

 

 

 

 

 

 

 

 

 

우포 클럽

 

 

 

물갈퀴 접고 백조가 상승할 때

하늘 담은 늪 물에 세상 우울증 다 묻었다.

바람소리 물소리 입체음향 저물녘

목련꽃샹들리에 별꽃 서치라이트 환한 밤

풀벌레 오케스트라 흥얼대는 코스요리 나온다.

콩콩 뛰는 심장 소리 들으며 너털웃음 달 지배인

빵 터지게 먹고 마시고 즐기고 가라하네.

음식 나르기 바쁜 검정 옷 하얀 나비넥타이 종업원들 따오기, 댕기물떼새, 생이가래, 살사 춤추는 쇠물닭, 해오라기 자매, 꼬마줄물방개, 대칭이, 긴꼬리투구새우, 늪반딧불이, 마름, 소금쟁이, 애기부들, 창포, 개구리밥

우울증 백신 경운기 소리에 장바구니 들고

아기 업은 옥수수 아줌마 스텝 밟으면 바스락 바스락 몸이 꼬인다.

대형 스크린 늪 물 위에 춤꾼들 이슬땀

백년 묵은 멍울 풀어서 가시연꽃 피었다.

 

 

 

 

 

 

 

 

 

 

 

바람꽃

 

   

언젠가 네게 찾아온 바람은 산골 마을 가로등 아래에서 죽었다.

숙이네 옆 골목에서 따스한 목부터 온몸을 휘감던 바람은

창경궁 돌담 아래서 소용돌이치다가 대곡역으로 달려갔다.

대기실 벽에 부는 바람은 팔이 뒤엉켜 석고상처럼 앉아 있다.

두 송이 흔들이 시계는 마지막 열차를 삼키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니던 숲정이가 비에 촉촉 젖고 있다

빗물에 막혀 침투할 수 없는 바람은 다시 떠돌이가 된다.

떠돌이 바람은 성철스님의 고뇌가 섞인 구름을 타고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갔다.

바람은 언제나 바람 위에 머물고 꽃이 되어 흘러갔다.

바위 적시는 어느 길 위에 바람은 꽃향기 불쑥 피우고, 또

한 무더기 봄을 머리에 이고 찾아온다.

 

 

 

 

 

 

 

 

 

 

 

 

 

벚꽃 장례식

 

 

 

 

나 오늘, 안산에 연도 하러 간다.

 

새벽 미사 반주하러 가던 길

눈 먼 트럭 달려와서 굉음 지르며 삼켜버렸다

벚꽃으로 활짝 핀 그녀의 청춘을…

청첩장을 돌리고 며칠 후 마카오로 신혼여행 떠난다고 했는데

 

아니, 세상에 다 피우지 못한 외동딸과 의사 사위

하늘도 무심하다고 가슴 후려치며 실신한 어머니

메마른 주름살에 붉은 핏물 뚝뚝 떨어져 꽃비내리는 장례식장

상주도 문상객도 모두 얼 나갔다.

 

만장 흔들며 다시 오는 봄날 그녀는 신혼여행 왔나보다

화사한 벚꽃이 되어 그리운 얼굴 보러 왔나보다

나무 발아래 뿌린 하얀 재로 화장을 하고 분홍 면사포 쓰고 왔나보다

해맑은 웃음 곱더니 하늘에서 더 곱다

 

바람 부는 봄날, 얼 나간 사람들과 함께

나 오늘 연도하러 간다. 안산 벚꽃 길에

 

 

 

 

 

 

꿈길

 

 

졸린 눈으로 낡은 옷 보따리 하나 들고 오후 지하철 안을 어슬렁거리는 굶주린 사자

 

바로 옆자리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다.

구멍 난 빨간 양말 속살이 비치는 낡은 정글화를 신고 한 가닥 굵은 울음으로 포효하던 시절 꿈꾸는 듯

살짝 어깨를 들먹이자 젊은 사내가 지하철 문밖으로 튕겨 나갔다.

순간 검은 석고상이 털썩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빌딩 숲 밀림을 내달릴 때 늠름한 모습이었을 얼굴, 둥근 운전대 옷 보따리 두 손으로 그러안고 과거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목적지를 지나쳐 길을 잃고 말았다.

미로의 길에 접어들어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다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 숨 가쁜 포클레인

거대한 상아를 이고 해체의 계곡을 찾아가는 늙은 코끼리의 신성한 귀향을 본다.

 

누구나 되돌아가야 하는 길을 잃고 우리는 날마다 흔들리고 있다.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고향 꿈길 안내하는 사자와 긴 강줄기를 따라 흘러가고 있다.

 

다 비운 젖병처럼 이따금 바람 소리 들려오고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어머니 품속일까 흔들흔들 평온한 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