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축구나 탁구, 농구에 하프라인이 있고 중간선이라 부른다. 나뭇잎, 풀잎을 들여다 보면 줄기가 서로 닮은 대칭을 붙들고 있고, 짐승이나 사람도 미간에서부터 생식기까지 닮은꼴로 대칭되어 겉모습은 적당히 대칭이다. 유전정보를 만들고 나누는 DNA 조차 꽈배기 사슬모양의 대칭으로 풀어지고 붙어 생명의 연대를 저장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한 쪽과 또 알기 힘든 짝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섭리는 닮은 한 쪽은 닮지 않으려는 쪽과 긴장을 나누기도 한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 임을 안다.

 

우주가 만물의 조화 속에 있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 공간이며 따라서 섭리의 종착역조차 해피엔딩은 결코 없다. 다 부숴지고 에너지를 소멸하여 지구덩이가 주먹크기로 응축되어 먼지로 없는 듯 있다가 블랙홀을 통해 새로운 물질로 몸바꿈한다. 기억 전과 후를 전부 포맷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토록 허망할 종착역을 아는, 이른바 신세기 말에 잠시 있어보는 것인데, 기막히게 아름다운 행성에 있어보는 것인데, 괴롭도록 어긋나는 탄생과 생존과 소멸을 베껴쓰기로 한다. 새들도 벌레들도 우리의 시력과 청력으로 가늠하기 힘든 신호들로 소통한다.

좀 거룩한 척 해 본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내 바깥에 신호를 쏘아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나, 접속장애가 발생한다. 어쩌면 발신 쪽의 문제일 수도 수신 쪽의 문제 일수도, 아니 메시지의 작성과 그 송출방법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내가 가지고자 하는 것들이 더 이상 소용이 없고, 접속의 문제만 남는다. 내 바깥의 신호들을 안테나를 길게 뽑아 받을수 있도록 돌기를 세워야하고, 그가 주는 신호를 오감과 육감, 그리고 프리즘으로 여과하여 해독하려 애쓰다가도 그냥 단속되거나 오독하기도 한다.

 

나는 무한대의 접속을 원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수신기와 발신기의 노화가 시작되고 있다. 오음계와 칠음계의 음이 아닌 반음과 중음에 치우친다.

 

「그런 숲」에 살고 싶다가도 「하조대」등대 아래의 틈에서, 砂丘의 「사이에」서, 「세 무덤」에 참견하면서, 접속에 실패하여 새로운 접속지로 나서며, 「그냥 승부라 이름짓고」, 「소를 찾으러 간다」고 허풍을 널어놓는다. 다리 사이의 「수음을 사주」하기도 하며 고상한 척 「광배 뒤로 숨었다」고도 한다. 하늘 공간으로 올라 「한여름, 까마귀 되어」보기도한다. 드디어 「왼쪽과 오른쪽에 대하여」그 불편한 동거와 역할에 대한 의심을 품어보면서도 허망할 그 사이에 허둥대는 나를 힐끔본다.

 

그 틈과 사이가 중요하다. 그 곳에 접속이 있으므로, 나는 시를 쓴다.

 

 

강태규
서울 종로 소격동에서 태어나다. 2003년 산문집「평창이야기」2009년 시집「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로 문단에 나가다.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다. 미국 FDA 산하 연구소에서 신종마약을 연구하였으며, 식약청 및 미8군 병원 방역관으로 약물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한성대학 대학원에서 <신종 마약론> 강의와 논문지도를 하였으며, 근래 강원도에서 기생충, 벌질병연구 및 축산농장관리 및 유통연구소를 운영중이다. 성공회대학원에서 동아시아 문화사 강좌들을 이수중에 있다. 시에문학회와 영주작가회, 한국작가회의와 경북작가회의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