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거림의 시적 심화

            -이승진의 시세계 抄-

박찬선

 

 자선시는 자기의 시를 자기가 가려낸 시이다. 자기가 빚은 시가 어느 것인들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많은 작품에서 한 권의 시집 분량이나 그보다 적게 열 편 정도를 가려내라면 어려울 때가 있다 편편마다 사연이 담겨있고 산고를 겪은 뒤에 태어난 작품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정해진 편 수에 넣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겪기도 하고 제외하는 아픔도 맛보아야 한다. 어쨌든 자선시는 자기의 시력詩歷에서 자기가 제일 아끼는 시를 이름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일생에 자선시집을 한 두 권 쯤 펴낸다.특히 인생을 정리하는 나이를 맞을 때나 특별한 기념이 될 만한 때를 맞추어 낸다. 이번 이승진 시인의 경우는 『상주문학』의 특집에 응하는 자선시인 것이다.

 「안주」,「사랑 박물관」,「친구 기다리기」.「양정역에 서서」,「거름지고 장가기」.「달못둑에 서서」,「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일곱 편은 이 시인의 첫 시집 『사랑 박물관』에 들어있는 것이고 「낙엽,「돌아가는 이유」,「행인 3」,「그리움 박물관」,네 편이 그 이후의 작품이다. 시의 이력을 가늠할 수 있는 분량이기도 하다. 먼저 이 시인의 시 이야기에 앞서 평범한 삽화 두 가지를 보자.

 

 삽화 둘

 

 삽화․1

 무더운 여름날 저녁,문학회 모임을 마치고 몇 사람이 시원한 밤바람을 쐬려고 용흥사 입구에 올랐다.시가지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도 누리고 산 속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고 싶어서였다.이곳은 지천 솔숲 가까이에 있는 연악서원에서부터 이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연악구곡이 있어서 상주의 옛 선비들이 연악문회(1500년대 商山四老:김충,류진,김범,김언건.1600년대 商山四皓:이전,이준,정졍세,강응철)를 베푼 곳이 아니던가.유서 깊은 내력이 있는 곳이기에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자판기에서 뽑아 든 커피의 향기가 밤바람과 함께 스며들었다.주차장 마당에서 마구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떨기를 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맑은 개울물소리와 숲의 정밀과 산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늦도록 서성거렸다.이 시인의 담배불이 마치 반딧불이의 깜박이는 빛처럼 보였다.

 

 삽화․2

 어느 해 초여름 초파일을 앞둔 어느 날,이 시인과 같이 노악산 등성이에 있는 중궁암에 오른 적이 있다.가파른 길이라 쉬엄쉬엄 오르면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이 시인이 한 얘기인즉 몇 해 전 섣달 그믐날 혼자 중궁암에 올랐단다.주지스님은 출타를 해서 안 계셨고 주인 없는 절간에 혼자 머물게 되었단다.주지스님과 통화를 하니 온돌방은 군불을 지펴 잘 데워 놨으니 푹 쉬면서 절이나 잘 보라고 하시더란다.갑자기 주인이 된 것이다.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주시가지의 불빛도 아름답고 밤이 이슥한 시간 적막을 깨우는 풍경소리가 정다웠으며 부시시 일어서는 산소리에 염불로 지새운 적이 있었단다.무섭지 않았느냐니까 부처님이 바로 곁에 계신다고 생각하니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오히려 든든했다고 이른다.아침 공양도 지어 올리고 주인 행세를 며칠 톡톡히 해냈단다. 

 

 여기서 삽화 1과 2를 조합해보자.삽화․1에서는 용흥사 아래에서 여름밤의 정취에 취하여 서성거렸다는 것이고 삽화․2는 주지스님이 안 계시는 중궁암에서 주인노릇을 며칠간 했다는 것이다.공교롭게도 이 두 삽화를 연결 지우면 이 시인의 시세계의 추출이 가능해진다. 

 ‘서성거리다’의 사전상의 의미는 ‘한 곳에 서 있지 않고 망설이며 왔다갔다 하다’이다.그러면 여름밤의 서성거림은 단순히 요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숲을 보고,반짝이는 별을 보며 물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나는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펼쳐진 현상만 보고 듣는 것으로 마친다는 것인가? 주어진 현상과 실체는 불가분의 것이다.시인의 서성거림은 단순히 서성거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성거림의 이면에는 실체를 파악하는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전방위적으로 펼쳐있는 촉수는 주체자로서 탐색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며칠을 대행한 중궁암의 주인행세는 암자의 안전을 책임짐은 물론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 일이며 예측 못할 일에 대해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다.밤을 깨우는 새소리도 앉히고 부처님의 잔잔한 미소도 품는 일이다.주인으로서 중궁암을 관장하며 중궁암의 공간과 관계 지워진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삼는 일이다.이 기간만은 중궁암과 내가 하나인 것이다. 

 이 시인은 첫 시집 『사랑 박물관』‘시인의 말’에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바둑이의 ㄷ을 반대 방향으로 썼고,2학기에는 높이의 받침 ㅍ을 ㅛ로 쓴 적이 있다.가끔 유형 무형의 형상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처럼 받아쓰기를 불러줄 때가 있었다.이제 나는 좀더 깊은 받아쓰기를 하기 위하여 나머지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이 시인이 말한 ‘깊은 받아쓰기’는 시 쓰기이며 나머지 공부는 시 쓰기의 공부이자 삶의 공부이다.

 서성거림(형상,받아쓰기를 불러주는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주인(ㄷ을 반대로 쓰고 ㅍ을 ㅛ로 쓰는 일,공부)이 되는 것이다.이제 서성거림이 서성거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성거림의 이면에는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알겠다.그것은 시의 가능성이요 시 쓰기의 전제가 됨은 물론이다.

 

 서성거림의 시

 

 화령초등학교에서 동창회 축구대회가 있는 일요일, 직원 중의 한 사람인 나는 그냥 출근을 했다. 준비-개회식-축구경기-시상식-행운권 추첨-뒷정리가 진행 되는 동안 본부석과 일정 거리를 두고 어슬렁어슬렁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 마시는 일을 하였다. 뒷정리 때는 시선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끙끙거리며 시선기를 운반하였다. 내가 맡은 배역은 본부석이나 운동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화면의 귀퉁이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행인 3이 되는 일이었다.                                    

 축구경기에서 공 한 번 마음 놓고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루가 갔다. 그대 삶에 출근을 하였지만 나는 행인 3이었다. 늘 본부석 뒤돌아보며 어슬렁어슬렁 마부용 커피를 마시며 사는 푸른 눈물이었다. 돌아서서 말없이 그러나 맛있게 먹는 일이었다. 감사하며 먹는 일이었다. 살면서 울면서 혹은 울면서 살면서 하루가 가도 소리 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행인 3은 그대 삶의 먼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 배우고 익히는 착한 학생부군이었을 것이다. 퇴근 무렵에는 그냥 퇴근했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행인 3.전문

 

 「행인 3」은 이 시인의 최근작이다.「행인 3」은 “ 내가 맡은 배역은 본부석이나 운동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화면의 귀퉁이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요 「행인 3」은 “그대 삶의 먼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 배우고 익히는 착한 학생부군이었을 것”이라고 했다.나는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소외되어 있다.동창회의 집단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함께 하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주변인인 행인 3이 되는 것이다.「행인3」은 서성거림이다.그렇다고 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동창회 축구대회가 있는 날 출근한 나의 한 의식과 동창회원들의 다른 의식 가운데서 자기의식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 헤겔이 말한 의식의 경험이다. 나는 축구경기를 하는 동창회원들이 있음으로써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그대 삶의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소외된 나는 오히려 소외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는 변증법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겠다.나,테제,正이라는 사상이 나와서 모순이 생기면 다시 동창회원,안티테제,反이라는 사상이 나오고,시간이 지나면 부정의 관계에서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깨침,진테제,合이라는 사상이 도출하기 때문이다.이와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말하는 변증법은 시적 화자인 내가 대상을 관찰하여 시를 창작하는 시작과정과 견주어도 무방하리라.

 

글쓰기 대표인 친구가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복도를 걸어가

창문 틈으로 친구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눈물을 잡고 그네를 타거나

조례대에 마음을 벗어놓고

희미한 운동장의 트랙을 서성거렸다.

플라타너스 둘레를 재어보고

잘 보이지도 않는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십리 길이 먼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기다리더라도 같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함께 가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서성거리는 것이나

나는 그 기다림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었다.

 

정아, 너는 내가 서성거림의 명수인 줄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지

공부만 계속하고

기다리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도, 가슴이 아픈 오늘은

플라타너스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나 정말 혼자 갈 지 모른다.

             -「친구 기다리기」 전문 

 

 「친구 기다리기」는 서성거림의 시다.이 시인의 서성거림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어 있는 것이다..글쓰기를 잘하는 정아가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창문 틈으로 정아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운동장 트랙을 서성이고,플라타너스 둘레를 재어보며 그렇게 서성거렸다.십리 길,같이 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나 삶을 서성거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으며 정아에게는 내가 서성거림의 명수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기다려서 같이 가는 동행인이 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며 믿음을 바탕으로 한 우정이자 사랑이다.기다리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양 공부만 하는 정아에게 직접 대고 말하지 못하고 플라타너스를 보고 한 마디 한 것이 ‘-나 정말 혼자 갈 지 모른다.’는 말이다.그러나 그 의탁 발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오히려 그 반대로 가지 않겠다는 반어적 의미가 강하게 전달되고 있음은 왜일까? 서성거림은 단정적이고 마침의 행동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이어짐의 행동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기다림 또한 미래를 열어 줄 마음의 자세가 아닌가? 

 

 과거의 체험과 패러디의 시

 

 누구에게나 지난 시절의 과거가 있다.좋던 싫던 앙금처럼 남아 있는 일들이 있다.그것들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과거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이미 패러디는 자신의 씨를 묻고 있다.

 “문학 전통을 의식하고 쓰는 시인 작가는 결국 자기작품을 통해 지난 날의 문학을 비판하며 부지중에 지난 날의 문학에 대한 패러디가 된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지난날의 관련 작품과의 유사성이나 부분적 전거 의존은 모방이나 모작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유와 문학적 과거의 의도적 병치라는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에서 우리는 패러디를 문학적 전통을 의식하고 쓰는 비판적인 글쓰기의 개념으로 그리고 인유의 한 형식으로 파악한다.빌려오기 즉 인유나 인용을 전제로 한 패러디는 의미내용을 효과적으로 얼마만큼 충족시키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남의 머리 물그릇으로 사용했던 그 분은 주인에게 얼마나 미안 했겠어?

돌아갈 수밖에는….

게딱지에 밥 비벼먹다가 문득 그 분 생각하노니

남의 머리 밥그릇으로 사용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돌아가야 하는지

 

돌아서서 훌쩍이는 한 여인을 보았네.

돌아서서 훌쩍이는 바다의 등을 오래 바라보았네.

                           -「돌아가는 이유」 전문

 

 「돌아가는 이유」는 원효스님이 661년(문무왕1)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던 도중이었다.비오는 밤길이라 어느 땅막에서 일박을 하는데 밤중에 갈증이 심해서 마침 하얀 그릇에 고인 물이 있어서 달게 마셨다.날이 밝은 뒤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더란다.

 단맛과 구역질이 나는 물,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마음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心法을 깨쳤다는 이야기.거기에 나오는 해골을 인유한 것이다.남의 머리 물그릇과 게딱지에 밥 비벼먹는 나의 행위와의 연상은 절묘하리만치 상사점을 이룬다.그리고 돌아가야 하는 행위가 공통성을 지녔다.이러한 조건의 상사점은 “패러디가 현재를 과거와 닮은 익숙한 이미지로 변형시켜 현재와 미래를 과거와 연루시켜 놓는 재기호화 형식이다.”라는 말에 잘 부합되기도 한다. 

 

좌향좌 했다가 돌아와 보니 서른 해가 지났다.

이 길 저 길 마차골에서 두릉까지

오솔길에 산길 물길도 새로 내며

하루 십리를 걸어 두릉 초등 다니던 길

해질 녘이면 꿈보다 길이 더 아름다웠다.

 

오늘은 아스팔트가 덮인 달못둑에 서서

돌아오지 않는 청둥오리 한 마리 기다린다.

이 푸른 달못을

희수랑 현옥이는 힘차게 건넜었지

단 한번도 헤엄쳐 건너지 못한 내 여름이

까만 물때를 묻혀 되오르면

청둥오리 물갈퀴가 바쁜 겨울을 걸어오고 있었다.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했던 달못이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하는 사랑으로 바뀐 오늘

내 서성이는 발길은 묵녹골, 큰골에서

달못의 첫물을 찾아 이름 부르던

그 날부터 준비된 그리운 물길

 

누가 내 그리움에 아스팔트를 덮어놓았나.

말줄임표를 까맣게 찍는 아스팔트가 덮이고

구미 여주간 고속도로 공사가 잠시 멈춘 달못둑에 서서

솜털 가득 그리움의 까만 물때를 묻히고 되올라오는

알몸뚱이 나를 만난다.

                     -「달못둑에 서서」 전문

 

 변화된 상황의 아스팔트가 덮인 달못둑에 서서 회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꿈보다 아름다운 두릉초등 다니던 길이며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했던 유년의 푸른 달못,그리움의 까만 물때를 묻히고 되올라오는 나를 만나고 돌아오지 않는 청둥오리를 기다리고 있다.달못은 준비된 그리운 물길로 내 유년의 체험의 장이자 현재의 나를 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시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한갓 과거의 퇴적물에 불과한 추억의 무덤일 뿐이다.단지 돌아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다봄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청둥오리 물갈퀴가 바쁜 겨울을 걸어오고 있는 생명의 어기참이 있어야 한다.그것은 현존재의 탐구이자 내일을 밝히는 새빛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라진 양정역에 서서

내리지 않을 손님을 기다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속 어느 자리에

사라질 간이역을 짓는 것이다.

 

할아버지 기다리던 우리 할머니

뒤꿈치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양정역은 그리움이다.

있으나 사라진

사라졌으나 있는 양정역은 시다.

그리움이 내리면

초승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찰을 하는 양정역

 

사랑했었다는 고백처럼

언제나 늦어지는 완행열차가

초승달을 데리고 양정역을 떠나면

혼자 남은 키 큰 나무가

텅 빈 양정역을 쓸어내리며

또 먼 하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 순이가 첫눈처럼 내리는 날. 

               -양정역에 서서 전문 

 

 양정역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공검에 있는 기차역 이름이다.공갈못둑으로 오르기 전 옛길과 개울이 굽이도는 사이에 있었던 조그만 역.작은 역사와 외롭게 선 미루나무가 시골의 정취를 보여주었다.

 시인의 내면에는 문명의 뒤안길로 사라진 양정역이 내리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는 역으로 존재한다.초승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찰을 하는 양정역은 할아버지 기다리는 우리 할머니가 하마 오려나 하고 까치발 딛는 그리움이자 한 편의 시다.경북선 완행열차가 초승달을 데리고 양정역을 떠나면 키 큰 나무가 먼 하늘을 기다리는 양정역은 동화속의 그림 같은 역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사라진 양정역을 되살리고 가슴 속 한 켠에 간이역을 짓는 일을 사랑이라고 한다.양정역은 시인에 의해서 시로서 남아 다시 존재하고 첫사랑 순이가 첫눈처럼 내리는 날의 양정역으로 자긋이 젖어드는 기쁨이자 들뜨는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현재의 나와 지난 시절의 그리움의 인식이 사랑의 시로 승화하는 시의 내면적 흐름과 구조가 감동을 자아낸다.

 

시의 도목수로 살다

 

빈 돛단배라도 아름다울 것이다.

빈집이라도 고마울 것이다.

(중략)

어느 이름 없는 시인의

아픈 짝사랑 편지도 한 쪽 넣어

긴 태풍을 태우고 남은 사랑의 사리로

하나 둘 탑을 올리는

사랑 박물관 한 채 지어 보고 싶다.

살아온 건 사랑하는 거였지

사는 건 사랑하는 것이겠지

박물관을 위하여

먼 길을 걸어서 온 계절과

을숙도 갈대를 대패질하던 나그네

모든 발자국이 모두 아름답기야 하겠느냐만

바다에 뜬 빈 돛단배라도 좋다.

상주 사벌에 남아도는 빈집이라도 좋다.

달빛 누운 을숙도 갈대밭 마당을 가진

아름다운 박물관 만들고 싶다.

사랑 박물관 지어 가는 도목수로 살고 싶다.

                      -「사랑 박물관」 전문

 

 사회가 분화될수록 박물관도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동시에 그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외국에는 유서 깊은 마을을 볼 수 있는 마을박물관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픈 회귀본능이 박물관에도 나타나는가 보다.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사랑 박물관」이라니 매력적인 박물관임에 틀림없다.

 상주 화북 입석리에는 정란을 피해 내려온 원수 집안의 남여가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었다는 보굴암의 전설이 있고 괌도에는 원주민 차모로족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침략군 스페인 장교에게 강제로 결혼케 하자 사랑하는 연인과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바닷가 사랑의 절벽이 있다지만 사랑박물관이라니 더욱 호감이 간다.

 살아온 건 사랑하는 거였고 사는 일이 사랑하는 것일진대 우리 삶이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사랑이 삶의 전부다.그래서 시인은 사랑 박물관을 짓고 싶어 한다.육신을 불태우고 남은 사랑의 사리로 탑 쌓듯 짓는 사랑 박물관.바다에 뜬 빈 돛단배나 상주 사벌에 남아도는 빈집이라도 좋단다.크고 우람한 현대식 건물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이다.누군가가 쓰다가 비어 있는 배요,살다가 떠난 집이다.비어 있는 배와 집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사랑이요,그 일을 하는 것이 시인의 몫이다.

 시인의 정서는 달빛이 누운 을숙도 갈대밭 마당과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상주 사벌의 빈집에 머물고 있다.그것은 모태에 대한 사랑이요,사치스럽지 않는 서민적 정서에 비롯한다.이러한 배경은 시인의 시정신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살펴볼 부분)

 

50년 지난 촌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는다.

 

내 보내고 싶지만

마음 안에 살던 촌년 그대로 두기로 한다.

 

50년 지난 이 촌놈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움 박물관」 전문

   

 

 「그리움 박물관」은 「사랑 박물관」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고향산천 휴게소에서/커피를 마시는데/휘도 녀석이 묻는다./선생님은/술을 좋아해요, 커피를 좋아해요.//-응, 커피/-왜요?//막걸리 안주는 김치고/맥주 안주는 땅콩인데/커피 안주는 그리움이거든(「안주」 일부)에서 보듯 시인은 그리움을 선호한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냥 퇴락하고 만다.사람의 훈기가 집과 함께하여 집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촌집-촌년-촌놈으로 이어지는 그리움 박물관은 상사점이 있다.촌집이라지만 50년 정이 든 집이요,그 집에 살던 무던한 촌년이 아니던가.넓고 큰 호화로운 집에 아름다운 여인을 새로 들여서 살 수도 있지만 아예 접어두었다.시류에 약삭빠르지 못하고 조금은 우둔하고 우직하여 무너지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그리움이 가득차서 무너지지 않는 그리움의 박물관에는 시인의 굳은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그런가 하면 원초적 그리움을 바탕으로

가을 운동장은/운전면허 시험장이다./저 많은 응시자들이 떨어지려 모여 있다.(「낙엽」 3행)에서 보듯 자연에 대한 그리움

참 이상해/ 어떻게 그네에 앉을 생각을 했지/밤새 이곳까지 오려고/힘들었을 눈을 생각해 봐//그네에 앉은 녀석들이 /등을 밀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살금살금 다가가/

녀석들이 앉아있는 그네를 밀어보아/(「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2,3연)에서 보듯 동심에 대한 그리움

그래도 세상에는/ 거름 지고 장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던 할머니 마음에/때 아닌 꽃심과 불심도 일어나고/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산과 들에는 눈물이 펑펑 피어나/마을로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겠느냐/거름 지고 장가는 길/

그리움이 먼저 길을 나서고/외로움이 올망졸망 따라나섰지./(「거름 지고 장가기」 일부)에서 보듯 삶에 대한 그리움 등 보고 듣고 생각하는 체험의 전영역이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이 시인의 세상을 향해 열려진 그리움은 우주론적 성향을 지녔다. 낯을 가림이 없이, 까다로운 선택도 없이 두루 미치는 그리움. 그에 있어서 그리움은 커피요,양정역이요,정아요,장가기이며,달못이요,낙엽이며 눈이다. 이 시인에 있어서 그리움은 이러한 모든 그리움한테 가는 길이요, 동력이며, 표상이요,사랑이자 존재이유이다.

 

 

 이 시인의 시세계를 짚으면서 계속해서 따라붙는 것이 서성거림이었다.서성거릴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사벌이라는 전원의 토양,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상주지역 일상어의 언어환경,관망에서 판단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결정 등 그것이 내면적이던 외부의 환경에서 온 것이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벽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이렇다면 서성거림은 생래적인 것이요 환경적인 것이라 생각된다.특히 시와 연관된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마치 무당에게 신 내림이 있듯이 시 내림에 있어서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성거림은 내적이라기 보다는 외적 입장에 가깝다.안에서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을 보는 것이다.닫혀 있는 안이 아니라 열려진 밖의 시선이 훨씬 자유로울 것이다.이 시인의 서성거림은 바로 정신의 자유로움을 누리려는 욕구에서 비롯했다.시인은 정신의 자유인이다.결코 구속도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의지,그것의 즐김에 있다.그럼으로써 자기만의 공간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규제받지 않는 사유의 절대공간이다.

 이 시인의 절대공간에는 모든 체험과 사물들이 사랑과 그리움의 옷을 입고 나온다.잔잔한 서정을 바탕으로 회상의 나래를 펴게 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며 더러는 언어의 패러디로 웃음을 자아낸다.이 시인의 서성거림을 통한 시적 탐색은 적극적인 자기방어의 시작업으로 深化되어 나타난다. 시의 도목수로서 사랑박물관에서 그리움박물관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시 박물관으로 대미를 거둘 그의 시작업의 성취를 기대한다.

 졸문을 마감하고 창문을 여니 첫서리가 하얗게 내려있었다.

 

 

이승진 시인 약력

경북 상주 출생. 상주문협회원. 시집 "사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