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

 

고향산천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휘도 녀석이 묻는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해요, 커피를 좋아해요.

 

-응, 커피

-왜요?

 

막걸리 안주는 김치고

맥주 안주는 땅콩인데

커피 안주는 그리움이거든

 

고향산천에 안개 깊은 날

커피 한 잔에

너무 많은 안주를 먹는다고

 

바람이 불고

바람이 울고

 

사랑 박물관

 

빈 돛단배라도 아름다울 것이다.

빈집이라도 고마울 것이다.

명월이 반공산 한 그대라면 더욱 좋겠다.

맑은 터를 골라 사랑 박물관 하나 짓고 싶다.

툭툭 깨어지던 타제석기 첫사랑

오순도순 걸어 나오는 빗살무늬토기 속의 빗금들이

다시 손을 잡는다.

호동 왕자, 낙랑 공주

황진이와 總角 그리고 어린 임제

심순애와 이수일, 윤심덕, 전혜린의 사랑

어느 이름 없는 시인의

아픈 짝사랑 편지도 한 쪽 넣어

긴 태풍을 태우고 남은 사랑의 사리로

하나 둘 탑을 올리는

사랑 박물관 한 채 지어 보고 싶다.

살아온 건 사랑하는 거였지

사는 건 사랑하는 것이겠지

박물관을 위하여

먼 길을 걸어서 온 계절과

을숙도 갈대를 대패질하던 나그네

모든 발자국이 모두 아름답기야 하겠느냐만

바다에 뜬 빈 돛단배라도 좋다.

상주 사벌에 남아도는 빈집이라도 좋다.

달빛 누운 을숙도 갈대밭 마당을 가진

아름다운 박물관 만들고 싶다.

사랑 박물관 지어 가는 도목수로 살고 싶다.

 

친구 기다리기

 

글쓰기 대표인 친구가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복도를 걸어가

창문 틈으로 친구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눈물을 잡고 그네를 타거나

조례대에 마음을 벗어놓고

희미한 운동장의 트랙을 서성거렸다.

플라타너스 둘레를 재어보고

잘 보이지도 않는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십리 길이 먼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기다리더라도 같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함께 가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서성거리는 것이나

나는 그 기다림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었다.

 

정아, 너는 내가 서성거림의 명수인 줄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지

공부만 계속하고

기다리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도, 가슴이 아픈 오늘은

플라타너스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나 정말 혼자 갈 지 모른다.

 

양정역에 서서

 

경상북도 상주시

사라진 양정역에 서서

내리지 않을 손님을 기다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속 어느 자리에

사라질 간이역을 짓는 것이다.

 

할아버지 기다리던 우리 할머니

뒤꿈치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양정역은 그리움이다.

있으나 사라진

사라졌으나 있는 양정역은 시다.

그리움이 내리면

초승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찰을 하는 양정역

 

사랑했었다는 고백처럼

언제나 늦어지는 완행열차가

초승달을 데리고 양정역을 떠나면

혼자 남은 키 큰 나무가

텅 빈 양정역을 쓸어내리며

또 먼 하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 순이가 첫눈처럼 내리는 날.

 

거름 지고 장가기

 

할아버지도 장에 가셨을 것이다.

봄이 무릎까지 차 오른 날은 마음 둥둥 걷으시고

어어, 어어 하시며 장에 가셨을 것이다.

마을 앞에 놓여있던

복숭아 살구꽃 지뢰밭을 어떻게 지나가셨는지

볼일 없이 장가는 삶

할아버지는 꽃보다 아팠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 봄처럼 수군거리는 소리

거름이 되고 다시 거름이 된 마음을 지고

장 가야하는 길

통째로 웃었지만 울었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는

거름 지고 장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던 할머니 마음에

때 아닌 꽃심과 불심도 일어나고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산과 들에는 눈물이 펑펑 피어나

마을로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겠느냐

거름 지고 장가는 길

그리움이 먼저 길을 나서고

외로움이 올망졸망 따라나섰지.

종일을 바람이 불고

종일을 바람이 울고

키가 조금 자란 손주 녀석이

그리움 더 얹은 거름을 지고

상주 장을 간다.

 

달못둑에 서서

 

좌향좌 했다가 돌아와 보니 서른 해가 지났다.

이 길 저 길 마차골에서 두릉까지

오솔길에 산길 물길도 새로 내며

하루 십리를 걸어 두릉 초등 다니던 길

해질 녘이면 꿈보다 길이 더 아름다웠다.

 

오늘은 아스팔트가 덮인 달못둑에 서서

돌아오지 않는 청둥오리 한 마리 기다린다.

이 푸른 달못을

희수랑 현옥이는 힘차게 건넜었지

단 한번도 헤엄쳐 건너지 못한 내 여름이

까만 물때를 묻혀 되오르면

청둥오리 물갈퀴가 바쁜 겨울을 걸어오고 있었다.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했던 달못이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하는 사랑으로 바뀐 오늘

내 서성이는 발길은 묵녹골, 큰골에서

달못의 첫물을 찾아 이름 부르던

그 날부터 준비된 그리운 물길

 

누가 내 그리움에 아스팔트를 덮어놓았나.

말줄임표를 까맣게 찍는 아스팔트가 덮이고

구미 여주간 고속도로 공사가 잠시 멈춘 달못둑에 서서

솜털 가득 그리움의 까만 물때를 묻히고 되올라오는

알몸뚱이 나를 만난다.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눈이 내린 아침

놀이터에 가 봐.

 

몇몇 녀석이 그네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참 이상해

어떻게 그네에 앉을 생각을 했지

밤새 이곳까지 오려고

힘들었을 눈을 생각해 봐

 

그네에 앉은 녀석들이

등을 밀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살금살금 다가가

녀석들이 앉아있는 그네를 밀어보아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누군가

그대가 탄 아름다운 놀이터를

살살 밀어줄 거야.

 

낙엽

 

가을 운동장은

운전면허 시험장이다.

저 많은 응시자들이 떨어지려 모여 있다.

녀석들,

푸른 수입증지를 덕지덕지 붙여오더니

오늘은 바람을 탄다.

T 코스에서 헤매던 것들이

S 코스를 유영하기도 하고

어떤 놈은 완성된 후진을 하며

끝까지 흩날리기도 한다.

몇 놈은 벌써 도로주행 시험이다.

이-뿌~다

한 놈 한 놈 떨어질 때마다.

기러기 날아가며 합격 벨을 울린다.

기럭 기럭 기럭 기럭

이 운전 면허 시험장은

잘 떨어지는 것이 합격이다.

 

참 좋은 가을이다.

 

 돌아가는 이유

 

남의 머리 물그릇으로 사용했던 그 분은 주인에게 얼마나 미안 했겠어?

돌아갈 수밖에는….

게딱지에 밥 비벼먹다가 문득 그 분 생각하노니

남의 머리 밥그릇으로 사용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돌아가야 하는지

 

돌아서서 훌쩍이는 한 여인을 보았네.

돌아서서 훌쩍이는 바다의 등을 오래 바라보았네.

 

행인 3

 

화령초등학교에서 동창회 축구대회가 있는 일요일, 직원 중의 한 사람인 나는 그냥 출근을 했다. 준비-개회식-축구경기-시상식-행운권 추첨-뒷정리가 진행 되는 동안 본부석과 일정 거리를 두고 어슬렁어슬렁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 마시는 일을 하였다. 뒷정리 때는 시선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끙끙거리며 시선기를 운반하였다. 내가 맡은 배역은 본부석이나 운동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화면의 귀퉁이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행인 3이 되는 일이었다.

 

축구경기에서 공 한 번 마음 놓고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루가 갔다. 그대 삶에 출근을 하였지만 나는 행인 3이었다. 늘 본부석 뒤돌아보며 어슬렁어슬렁 마부용 커피를 마시며 사는 푸른 눈물이었다. 돌아서서 말없이 그러나 맛있게 먹는 일이었다. 감사하며 먹는 일이었다. 살면서 울면서 혹은 울면서 살면서 하루가 가도 소리 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행인 3은 그대 삶의 먼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 배우고 익히는 착한 학생부군이었을 것이다. 퇴근 무렵에는 그냥 퇴근했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움 박물관

 

50년 지난 촌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는다.

 

내 보내고 싶지만

마음 안에 살던 촌년 그대로 두기로 한다.

 

50년 지난 이 촌놈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