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뒤에서



갓 볶은

옛날과 지금 그리고 먼 후일의 이파리들이

어깨 위 떨어지고

연분홍 단풍에 햇살이 미끄러질 때

코스타리카 커피향도

넘실넘실


그래, 맞아.

커피향.

알래스카까지 갔던 연어의 귀향처럼

과거 세월로 한참 거슬러

신라 처자와 고려 총각이 걸어가는 발길 앞

그 향 지금 도착하였을지 몰라

세상천지 처음 맡아보는 커피 향에

처자와 총각

시대를 건너뛰어 남몰래 손잡고 걸으며

오늘을 꿈꾸었는지?


그 처자 날 그리워하고

나도 그 처자 그리워하는

예전 내 사랑 여전하여

가을은 반짝반짝 아득함으로 지금 빛나는지 몰라





거미줄



거미줄에 걸렸다

출근을 위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갔더니

주차한 차 앞

차 한 대 가로 놓여 있다

제기럴!

앞차 뒤쪽 트렁크를 잡고

밀고 미는데

미는 차 번호판 앞 쳐진 거미줄

어젯밤 좀 늦게 주차를 하였는데

나보다 더 늦게 주차한 차 꽁지에서

살림을 작정한 작은 거미 한 마리

거미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겠다고

지하 주차장 그것도 차 번호판 앞

거미줄을 쳤을까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출근하면서

그 차의 주인이나 나나 한 마리 거미란 생각

신호등 앞

움직이지 않은 긴 차량을 보며 떠올렸다

총총 세상

거미줄에 걸려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밟는 삶이

푸른 생(生)이다




보리누름 아리랑



태어남보다 죽음의 소식이 많은 세상에서

보리밭으로 가는 길들이 낡은 집처럼 허물어지고 있다

가시랭이 뾰족뾰족 어깨를 찌르던

천년도 더 굳어 뻗뻗한 힘줄로 이어온 보리밭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허물어져 뭉개진 시간의 이랑이랑 고랑이랑

묵정의 한가함을 진 바랜 지게를 호명하다가

농사꾼으로 자랐던 꿈들을 둥둥 밀어올리다가

은근슬쩍 서편으로 소망을 쓰러뜨리다가

휘인 낫 같은 초승달을 끌고 왔던 길 끝 어둠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풋보리, 청보리, 겉보리, 쌀보리, 꿔다놓은 보리보리

부대끼며 작은 소리로 고개고개 보릿고개 넘다가

쉰목소리로 난작난작 누름으로 누런 밭을 누르다가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샅을 잃으며 어른이 되었고

새들이 날 허공은 넓어 노랫소리도 공허했다

고라니 귀 움직임처럼 두리번두리번 놀란 빛으로

오뉴월 한나절 보리밭 이랑이랑 끌어당기는

이 땅 어머니의 갈라진 손톱으로 꿈꾸던 보리밭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물 한 잔


짧아지는 해 그림자 따라

먼 길 걸어왔다

잔 가득 붓지 않아도

목마름은 이미 목구멍에서 소리를 냈다

봄 지나

늘어진 계절은

사방을 초록으로 허물고

기억들은 자꾸 속말을 잇고 이었다

땀과 땀의 시간

헤맴으로 마주친 갈증

오래 걸었던 길은 울퉁불퉁하고

갇힌 말들이 그리움의 물꼬를 트며

오아시스는 갑옷처럼 덮어왔다

아름다움이 멀리 있지 않았음을

마주한 사람 앞

놓인 잔에서 찾는다

물 한 잔

졸졸졸 따라주는 일은

길 함께 걷자며

먼 소실점에 푸른 불 밝히는 일

허공에 둥둥 북소리 울리는 일




백로


목련꽃 진 마을

뒤쪽 산


하얀 꽃

하나 둘 셋……

다시 피었다


다행이다.


올해도 산비탈 가득

수놓은

하이얀 날개꽃




참선짜장


귀가 어두워서가 아니다

한 끼 굶은 몸을 데리고

중국집에서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는데

맞은 편 앉은 손님

참선짜장을 주문한다

참선짜장?

그래 짜장 한 그릇 비우는 일도

참선이란 생각이 든다

고픈 배 추스르는 한 그릇의 참선

삼선짜장이 참선짜장으로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충만하다


가지꽃



가난한 살림살이 훤히 드러나

바람이

새들이

달님 별님도 스스럼없이 들랑거리는

울타리 없는 빈 집

텃밭에

보라 보랏빛

가지꽃이 피었다

꿀단지 같은 슬픔이 환하다




갑오년, 감산사(甘山寺)의 봄


애초에 그곳에 가려던 계획은 없었다

한 줌 남은 봄 햇살과 봄바람을 움켜쥐고

괘릉에서 문인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인상 주름 닮은 구불구불 뒷길로 찾은 감산사

등 뒤로 토함산을 겉옷으로 걸치고

앞뜰에 수두룩 봄꽃 피우고 있었다

이런, 꽃들이 어찌 이리도 아름다워 슬픈고

처마 밑 노스님 마당가에서 중얼거리는 것 같은

햇살을 챙겨들고 살랑살랑 발걸음 옮기는데

한 때 이곳 넓고 깊은 곳 자리 지키던

석조미륵보살과 석조아미타불상은

국보로 지정되어 서울로 올라갔고

대적광전 앞 나무 그늘 큰 바위 위

앳된 크기의 돌부처 하나 손을 내미네

손 마주잡고 바라보고 또 마주보는데

꿰맨 바지 옷차림의 그 부처상이 정겨워

곁에 앉아 있으면

슬픔도 기쁨도 초월하겠다

꽃 옆에 나비처럼 살며시 앉아 흉내 내는데

세월 지나 저쪽 서산 산마루

넘어가는 봄 햇살 눈부신 노을 끌어안으며

참 슬픈 봄이 꽃잎 지듯 가고 있제

눈물 아직도 꽃술처럼 맺어 있는 봄이네





별이 별을 어깨동무하고 온다

환한 꿈길이다


어느 하루 대낮에도 별을 본 적 있다

속이 시커멓게 탔던 날이다


지나고 보면 하루하루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올리기 위해

공손히 두 손 모은 삶이다


내일도 별을 찾으러

별천지, 사막으로 가야한다





한 줄 은유로 만든 글이

사랑이라면

그 한 줄은 따스한 피

흐르는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