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2호...
   2019년 10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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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2 (고희림 시인)우리가 알고 우리를 아는 분들께
편집자
1452 2015-02-13
우리가 알고 우리를 아는 분들께 1. 1950년 이영근씨는 청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1일3식 완전보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2. 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인은 품삯을 주지 않았다 일 한 사람들은 모두 일당을 받았다 주인은 일꾼들의 일 한 시간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너그럽게 대우했다 3. 우리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직접 소를 키워서 나오는 똥과 거름을 균배양해서 퇴비로 쓰고 우렁이를 넣어서 풀을 잡고 참개구리와 투구새우와 늑대거미를 비롯한 수많은 우군들이 병충해를 제압합니다 우리가 알고, 우리를 아는 분들께 파는 쌀이기 때문에 고집있는 쌀 드시고 건강해지십시오...이상 공동체 연리지에서 안내드렸습니다 (60년생 원주에서 태어나 대구서 자람, 99년도 작가세계 등단, 시집 평화의 속도, 인간의 문제 가 있음, 작가회의, 10월문학회 회원)  
41 (하재영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1275 2014-11-22
추억 뒤에서 갓 볶은 옛날과 지금 그리고 먼 후일의 이파리들이 어깨 위 떨어지고 연분홍 단풍에 햇살이 미끄러질 때 코스타리카 커피향도 넘실넘실 그래, 맞아. 커피향. 알래스카까지 갔던 연어의 귀향처럼 과거 세월로 한참 거슬러 신라 처자와 고려 총각이 걸어가는 발길 앞 그 향 지금 도착하였을지 몰라 세상천지 처음 맡아보는 커피 향에 처자와 총각 시대를 건너뛰어 남몰래 손잡고 걸으며 오늘을 꿈꾸었는지? 그 처자 날 그리워하고 나도 그 처자 그리워하는 예전 내 사랑 여전하여 가을은 반짝반짝 아득함으로 지금 빛나는지 몰라 거미줄 거미줄에 걸렸다 출근을 위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갔더니 주차한 차 앞 차 한 대 가로 놓여 있다 제기럴! 앞차 뒤쪽 트렁크를 잡고 밀고 미는데 미는 차 번호판 앞 쳐진 거미줄 어젯밤 좀 늦게 주차를 하였는데 나보다 더 늦게 주차한 차 꽁지에서 살림을 작정한 작은 거미 한 마리 거미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겠다고 지하 주차장 그것도 차 번호판 앞 거미줄을 쳤을까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출근하면서 그 차의 주인이나 나나 한 마리 거미란 생각 신호등 앞 움직이지 않은 긴 차량을 보며 떠올렸다 총총 세상 거미줄에 걸려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밟는 삶이 푸른 생(生)이다 보리누름 아리랑 태어남보다 죽음의 소식이 많은 세상에서 보리밭으로 가는 길들이 낡은 집처럼 허물어지고 있다 가시랭이 뾰족뾰족 어깨를 찌르던 천년도 더 굳어 뻗뻗한 힘줄로 이어온 보리밭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허물어져 뭉개진 시간의 이랑이랑 고랑이랑 묵정의 한가함을 진 바랜 지게를 호명하다가 농사꾼으로 자랐던 꿈들을 둥둥 밀어올리다가 은근슬쩍 서편으로 소망을 쓰러뜨리다가 휘인 낫 같은 초승달을 끌고 왔던 길 끝 어둠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풋보리, 청보리, 겉보리, 쌀보리, 꿔다놓은 보리보리 부대끼며 작은 소리로 고개고개 보릿고개 넘다가 쉰목소리로 난작난작 누름으로 누런 밭을 누르다가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샅을 잃으며 어른이 되었고 새들이 날 허공은 넓어 노랫소리도 공허했다 고라니 귀 움직임처럼 두리번두리번 놀란 빛으로 오뉴월 한나절 보리밭 이랑이랑 끌어당기는 이 땅 어머니의 갈라진 손톱으로 꿈꾸던 보리밭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보리누름 아리랑 물 한 잔 짧아지는 해 그림자 따라 먼 길 걸어왔다 잔 가득 붓지 않아도 목마름은 이미 목구멍에서 소리를 냈다 봄 지나 늘어진 계절은 사방을 초록으로 허물고 기억들은 자꾸 속말을 잇고 이었다 땀과 땀의 시간 헤맴으로 마주친 갈증 오래 걸었던 길은 울퉁불퉁하고 갇힌 말들이 그리움의 물꼬를 트며 오아시스는 갑옷처럼 덮어왔다 아름다움이 멀리 있지 않았음을 마주한 사람 앞 놓인 잔에서 찾는다 물 한 잔 졸졸졸 따라주는 일은 길 함께 걷자며 먼 소실점에 푸른 불 밝히는 일 허공에 둥둥 북소리 울리는 일 백로 목련꽃 진 마을 뒤쪽 산 하얀 꽃 하나 둘 셋…… 다시 피었다 참 다행이다. 올해도 산비탈 가득 수놓은 하이얀 날개꽃 참선짜장 귀가 어두워서가 아니다 한 끼 굶은 몸을 데리고 중국집에서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는데 맞은 편 앉은 손님 참선짜장을 주문한다 참선짜장? 그래 짜장 한 그릇 비우는 일도 참선이란 생각이 든다 고픈 배 추스르는 한 그릇의 참선 삼선짜장이 참선짜장으로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충만하다 가지꽃 가난한 살림살이 훤히 드러나 바람이 새들이 달님 별님도 스스럼없이 들랑거리는 울타리 없는 빈 집 텃밭에 보라 보랏빛 가지꽃이 피었다 꿀단지 같은 슬픔이 환하다 갑오년, 감산사(甘山寺)의 봄 애초에 그곳에 가려던 계획은 없었다 한 줌 남은 봄 햇살과 봄바람을 움켜쥐고 괘릉에서 문인상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인상 주름 닮은 구불구불 뒷길로 찾은 감산사 등 뒤로 토함산을 겉옷으로 걸치고 앞뜰에 수두룩 봄꽃 피우고 있었다 이런, 꽃들이 어찌 이리도 아름다워 슬픈고 처마 밑 노스님 마당가에서 중얼거리는 것 같은 햇살을 챙겨들고 살랑살랑 발걸음 옮기는데 한 때 이곳 넓고 깊은 곳 자리 지키던 석조미륵보살과 석조아미타불상은 국보로 지정되어 서울로 올라갔고 대적광전 앞 나무 그늘 큰 바위 위 앳된 크기의 돌부처 하나 손을 내미네 손 마주잡고 바라보고 또 마주보는데 꿰맨 바지 옷차림의 그 부처상이 정겨워 곁에 앉아 있으면 슬픔도 기쁨도 초월하겠다 꽃 옆에 나비처럼 살며시 앉아 흉내 내는데 세월 지나 저쪽 서산 산마루 넘어가는 봄 햇살 눈부신 노을 끌어안으며 참 슬픈 봄이 꽃잎 지듯 가고 있제 눈물 아직도 꽃술처럼 맺어 있는 봄이네 별 별이 별을 어깨동무하고 온다 환한 꿈길이다 어느 하루 대낮에도 별을 본 적 있다 속이 시커멓게 탔던 날이다 지나고 보면 하루하루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올리기 위해 공손히 두 손 모은 삶이다 내일도 별을 찾으러 별천지, 사막으로 가야한다 꽃 한 줄 은유로 만든 글이 사랑이라면 그 한 줄은 따스한 피 흐르는 꽃  
40 (하재영 시인) 나의 문학관 <글쓰기로 오르는 삶의 진홍빛 계단>
편집자
2110 2014-11-22
글쓰기로 오르는 삶의 진홍빛 계단 시인 하재영 나의 문학은 삶을 탐색하는 여행이고, 드러냄이고,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한 살 더 나이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내 생활의 많은 것들이 타성에 젖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늘 마음만은 푸릇하게 멋진 작품을 창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미 세월의 머리카락은 내가 젊은 시절 바라보던 조부님의 흰머리처럼 꼬부라진 흰색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음을 종종 깨닫고 내가 어째 이렇도록 게으르게 살아왔지 반문하곤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부질없는 생각이고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 떠는 일 같아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충실하고,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놓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나의 문학은 삶을 탐색하는 여행이다. 20대 초반이었다. 내 시와 창작 의욕을 바라본 선배 문인이 잡지에 추천해 주겠다고 하였다. 신춘문예에만 염두에 두었던 난 고맙다는 말만 하고 11월 밤을 글과 함께 지냈다. 정말 빛나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좋은 글은 외로움을 동반해야 함을 선배 문인들이 쓴 작품을 읽으며 발견하곤 했다. 글을 쓰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글로 그들에게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낯선 땅(포항)으로 직장을 옮기며 난 책읽기와 창작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결국 더딘 발걸음으로 문단을 향해 돌진한 난 ‘포항문학’이란 울타리 안에서 내 문학관을 조금씩 키울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난 후 그랬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판에서 서툰 글을 쓰면서 내가 욕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내가 젊은 시절 책을 통해 여행했던 작품들의 세계였다. 당시 난 구도자의 모습처럼 세계 명작 여행을 통해 인간 구원문제를 화두로 끌어안고 있었다. 특히 70년대 프랑스 콩쿠르 문학상을 받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내 문학 세계에 어떤 기준을 만들어 주었다. 문학은 적어도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야하고 그것은 인간의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것과 함께 오랫동안 나의 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책은 고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본 아나톨 프랑스의 ‘신은 목마르다’란 소설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인간의 나약함, 비참, 더 나아가 처참한 피흘림. 결국 사랑이야말로 신의 갈증이란 역설적인 작품으로 난 지금도 그 소설 제목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내가 남의 작품을 읽으며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것도 이런 소설이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세상의 문학을 보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음을 종종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막상 난 그런 작품을 꿈꾸었을 뿐 쓰지 못했다. 앞으로도 쓰지 못할 것이다. 결국 감성을 앞세운 폭 좁은 작은 그릇에나 어울리는 시를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도 전업 시인도 아닌 아마추어 시인이나 다름없는 문학인으로서 말이다. 시를 쓰면서 늘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내 시가 직장 동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일이다. 종종 쓴 시를 대학 아니 대학원까지 나온 동료들에게 보여주면 그들은 못 먹을 음식을 먹은 듯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한다. 한 마디로 어렵단다. 난 쉽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안타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우리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난 내 시가 미래의 독자에게 향하는 것도 좋지만 내 주변 사람에게 우선 사랑받기를 원한다. 더욱이 몇 편의 시로 유명하여 세상 많은 사람들이 독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런 일은 전업으로 시를 쓰는, (먹고 살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양다리 걸치듯 낮이면 직장에 나가고, 밤이면 이런저런 사람과 만나 술과 차를 마시며 글을 써 온 생활이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전업 문학인보다 직장인이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쓰고 싶다. 산 하나를 이룬 많은 작품이 아니어도 좋다. 일제감정기 이육사나 윤동주의 많지 않은 작품 수에도 그분들의 시가 후세에 널리 읽히듯 나도 그런 시를 쓰고 싶다. 그런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은 문학인 누구나 갖고 있는 욕심일 것이다. 정말로 멋진 작품을 쓰고 싶다. 꼭 쓸 것이다. 그것은 내가 꾸준히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고, 노력할 때, 파불로 네루다(Pablo Neruda)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시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 확신한다. 나의 문학은 일상의 드러냄이다. 난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프로 사진가도 아니면서 나처럼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해마다 한 대씩 카메라(디지털 자동)를 교체할 정도다. 늘 카메라들 들고 다니고, 곳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의 대상은 자연풍경에서부터 내 이웃의 예술가, 하물며 식당의 음식, 환경을 파괴하는 현장도 어김없이 들어간다. 사진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출발은 그랬다. 20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긴 글 쓸 때 상상으로만 쓰는 것보다 보다 정확한 묘사를 위해 찍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하나의 습성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어떤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도구다. 그렇다고 예술성 있는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다. 포토 다이어리 형태로 기억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는 것을 그저 찍을 뿐이다. 일기를 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영상의 시대라 할 요즘 긴 글은 이미 몇몇 눈 좋은 마니아 독자에게나 읽히는 힘든 문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 글 역시 좀 길게 쓰려고 작정하기에 읽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지만) 신문 기사 역시 사진 한 장의 의미가 억수로 길게 잘 쓴 기사보다 전달력 있음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 찍은 사진을 종종 책 넘기듯 보며 그것에 대한 이면을 들여다본다. 몇 년 전 난 포르투갈 카보다로카에 갔었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이다. 포르투갈 서사시인 카몽에스의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한다’란 싯구가 있는 곳으로 그곳을 찾았을 땐 억센 비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차에서 내려 상징탑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일조차 힘든 비바람이었다. 난 비를 몸으로 맞으면서 우산은 카메라를 가리고 그곳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을 찾았던 기억은 흐릿한 안개에 잠기는 풍경처럼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났어도 그 때 찍은 사진을 보면 당시의 풍경을 오밀조밀한 글로 쓸 수 있다. 사진이 글이 되고, 글이 사진이 되는 그러기에 나의 문학은 삶의 모습을 사진처럼 보여주는 드러냄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의 문학은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어떤 종교든 종교는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한다. 구원이라는 의미엔 종교 종파마다 다른 뜻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영원한 평화이면서, 현생 이후의 행복한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다. 문학을 통해 구원의 길로 들어선다는 일은 작품을 통해서 신을 찬미하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듯 한 편 시, 한 편의 동화, 한 편의 소설, 한 편의 수필은 인간이 창조한 언어로 재창조하는 위대한 작업이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작업은 신과 인간의 중간 위치에서 신성스럽게 의식을 하는 행위로 혼을 찾아 넣는 일이다. 그 일은 절대로 하루아침에 성사될 수 없다. 영적인 것을 작품에 넣는다는 일은 평범한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기에 창작 공간은 지성소며, 창작행위는 사제가 올리는 불가능의 세계에 접근하는 신비한 의식이다. 그렇기에 문학은 인간 구원의 한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이라 난 믿는다. 난 문학으로 내 삶을,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구원의 한 양식이 되어야 훌륭한 문학이 탄생한다고 지금까지 믿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문학은 내 생활의 한 부분 문학일 뿐이다. 내가 포항에서 만난 많은 선배 문인들이 문학을 하나의 종교처럼, 성전을 짓는 일처럼 혼신의 힘으로 전력질주한 것처럼 나도 그런 생활을 하고 싶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 때 난 진정으로 문학인이라는 이름표를 내 앞에 걸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 나이 예순 넘어 더 나이가 들었을 때가 될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 암시하고, 그렇게 되도록 내 인생을 끌고 나가려 약속한다. 그 때 내 문학관은 지금보다 확실하게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껍질뿐인 지금의 모습에서 알맹이를 채워나가는 일이 가장 중요함을 난 익히 알고 있다. 문학 세상에는 좋은 것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오직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글을 쓰는 일이다. 곱게 물든 벚나무 이파리 몇 장 늦은 가을 햇살에 살며시 지상에 내려앉으며 첼로 소리를 낸다. 아름다운 가을, 그 소리를 들으며 내 인생도 흐르고 있다. ***** 약력 ***** 충북 청원 출생 198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동화당선 1989년 아동문예 작품상 동시 당선 1990년 매일신문 신문문예 시당선 1992년 계몽사아동문학상 장편소년소설 당선 -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등 현, 지역무크 ‘포항문학’ 발행인  
39 (나병서 시인) 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066 2014-01-10
 내가 나에게 혹시 삶 속의 모든 관계 고리부분에서 잘못된 자리 그 모세의 의자를 거지처럼 갈망하지 않으세요 길가의 거지처럼 지나가는 모세들의 화려한 휘광을 배고파하지 않으세요 모세의 자리에 앉은 거지를 꿈꾸고 있지 않으신가요 天地不仁 사랑함으로 내버려진 들에 버려진 풀강아지는 혼자서 자주로 호숫가에 갑니다 모닥불 가에 있는 흰 옷 입은 사람을 찿고 있습니다 가짜로 사는 것은 참 지겹습니다. 옛날 옛적에 가난한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감자 열 몇 개 앞마당 샘물로 푹푹 쪄서 먹고 이 세상 하직하려 했던 날 길고 긴 가난에 지쳐 열흘 굶은 개처럼 사나와졌고 말린 무말랭이처럼 비틀어져버린 여위고 구부정한 마음으로 길가의 어린 거지에게 떨리는 손길로 때묻은 소반에 찐감자 열 몇 개 전부 먹으라고 건네주게 되었는데 어찌어찌하여 그렇게되었는지는 가난했던 과부와 길가의 거지만이 아는 일이라 그렇게 늙은 과부는 굶어서 죽고 길가의 어린 거지도 몇일 못가서 따라서 굶어 죽었다던데 감자밭 어귀에서 죽었다던데 그 과부 뭔 생각으로 전부 다 주었을까나 죽을 때 무척이나 주렸을텐데 20세기 묘비명 돼지머리를 조각한 비석을 세운 이십세기의 무덤에는 검은 烏石위에 선명한 황금색으로 그의 화려했던 일생이 새겨져있다 두려움의 우리에서 배부름을 바라며 살찐 돼지처럼 식욕에 반응했다 세줄로 새겨진 찬란했던 그의 백년이 사랑스런 후손들을 굽어보며 양지바른 명당자리에서 못다한 식욕을 아쉬워한다 비만했던 선조를 그리워하는 21세기의 한층 더 肥滿해진 후손들은 하루에 세 번씩 이십세기가 남겼던 유언을 생각한다 瑕疵있는 식욕을 補修하라 아 처인성 오백칠십걸음 둘레 열걸음 구릉을 가지고 맞서 싸웠다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는 뱃속의 내 아이들을 끄집어내고 내 누이의 가슴살을 도려내 먹는다는 제국의 공포에 나는 도리어 웃어버렸다 내가 지킨 것은 내년 봄 저 아래 들판에 뿌릴 볍씨 한움큼 이 한움큼의 볍씨에서 또다시 천년의 생명이 시작될 것이어서 아비와 어미가 찢겨져 죽고 누이의 배가 갈리우는 모습을 한줌 씨앗과 바꾸어 버렸다 오백칠십걸음의 둘레를 제국은 넘을 수 없었고 또다시 천년이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들7 한강다리 건너가다 만난 물에 빠져죽은 그 애는 해맑은 모습으로 조용히 내게 말해주었다 답답했어요 항상 가슴이 답답했어요 나는 열아홉살이었어요 다섯 살 고아 일찌감치 철이 들었고 얹혀사는 것이 눈치가 보여 그놈의 알바 하루에 열두시간 꼬박서서 일해서 팔십만원으로 살아왔는데 답답했어요 답답해서 퇴근길 걸어서 한강다리 건너다가 물살이 참 시원해보였어요 한강다리 걸어가다 만난 물에 빠져죽은 그 애는 해맑은 모습으로 조용히 내게 말해주었다 답답했어요 항상 가슴이 답답했어요 나는 열아홉살이었어요 내 동생은 열일곱살이에요 감추어진 별이야기 오늘 밤 내리는 눈 속에 베들레헴의 별이 감추어져 있다 그 별은 모든 이들이 보기를 원하지는 않아 가난하고 남루한 표적을 지닌 이 겨울 밤에 추워떠는 사람들에게만 아주 잘게 나뉘어져서 조용히 감추어진다 그 때 그 목동들처럼 바깥에서 추운 겨울 밤을 지키고있는 사람들만이 베들레헴의 별,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별은 작고 완전한 순백의 소리로 방금 태어난 아기의 힘겹고 가난한 울음소리같은 웅크린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비추인다 보리고개 세상에서 제일 높은 보리고개 꼭대기에 하늘같은 거울이 있다 거울 속에는 하늘의 마음을 닮아버린 예쁜 소냐가 웃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깊은 보리고개 밑바닥에 거울같은 하늘이 있다 하늘 속에는 하늘의 마음을 닮아버린 예쁜 소냐가 울고 있다 소냐는 나를 닮았다 나도 소냐를 조금 닮았다 지렁이2 물지게를 지고 언덕을 오르신다 물지게는 늘 흔들렸다 등허리 포대기에 업힌 애기 손 잡고 아장아장 단발머리 세 살 가시내 처음 기억나는 시간은 해가 넘어가는 소리 어둑한 저녁이었다 예배당 종소리에 빨려가는 처음 기억나는 모습은 항상 뒷모습이었다 겨울은 추웠고 얼어터진 손으로 걸레질하는 엎드린 등허리 타고노는 처음 기억나는 모습은 항상 기억하기 싫은 잘못이었다 지렁이 지렁이 지렁이가 꿈틀인다 인생의 모습으로 꿈틀인다 출발 신기하지 죽음의 모습이 지나면 맑은 초록빛 그 생명들이 어디서부터 나타나는지 분노와 두려움 탐욕과 시기 위선과 교만 저주와 달군 쇠꼬챙이 살이 타는 냄새 속에서도 맑은 생명 그 초록들이 어디서부터 깨어나는지 깊숙히 품고있는 죽음의 알 너희들의 익숙한 자리 밑에서 어째서 생명이 나타나는지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 늘 스스로 그러한 것이 참말로 신기하지 아주 조금만 두려워하지 거의 태워버렸으니 대부분 지나왔으니 지금부터는 같이가는거야 신기한 출발이 시작되지  
38 (나병서 시인) 문학관 - 말해야 한다는 것
편집자
1610 2014-01-10
 말해야 한다는 것 먼저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창조 이후에 지금처럼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소비해야만 유지되는 참으로 이상스러운, 두발로 걷는 짐승들의 반문명(反文明), 비문화(非文化)의 시대는 없었다. 경계와 경계, 그 음침한 균열의 틈사이에 숨어, 볼 수 없는 독가스를 흘리는 저들을 보라 오직 소비할 수 있는 자유만이 인간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이며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 인간들은 호모 사케르가 된다. 보다 더 심각한 것은 허락된 유일한 자유, 소비할 수 있는 자유의 길은 그 종착점이 소비능력의 상실이라는 호모 사케르의 집단 수용소로 통해있다는 것이다 자본은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유일한 선(善)이며 문화적,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가난은 전혀 쓸모가 없어졌고 이 시대의 한가지 범죄형태가 되었다 소비할 수 없는 계층은 재판이나 경고 없이 사살될 수 있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망으로 격리된 사막으로 운반된다, 화물처럼 얼마 남지 않은, 짐승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은 공포와 분노 사이를 불안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한다. 나와 당신처럼. 그러한 연유로 우선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것은 내가 살아있음이 확인된 후에 시작될 일이다. 수용소라도 확인작업은 필요하다. 만약에, 그렇지, 맞는 말이다. 만약에 말이지 살아있다면 다음으로 단순하고 쉬어져야 한다 단순하고 평이해 질 수 있다면 나와 당신은 은유(隱喩)로 감추어진 길, 집단 수용소를 탈출할 수 있는 빠삐용의 시체넣는 자루같은 은밀하고 가능성있는 탈출의 길을 찿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운이 좋아야 하고, 무엇보다 절실해야 한다. 억울함이 농익어 눈물처럼,콧물처럼, 오래된 목구멍 속 가래침처럼 흐르고 막을 수 없고 또한 반드시 냄새가 나야한다,아주 더럽게. 더러운 냄새가 날 정도로 단순하고 쉬어져야 한다. 저 친구는 쉬운 인간이야, 人間末子. 정말 더럽게 억울한가, 당신은. 그렇다면 춤을 출 준비가 된 것이다. 궁핍한 환상과 꿈만으로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은유의 춤을 출 준비가 된 것이다. 이 겨울 맨발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저 푸른 바다 위에서 둥글게 둥글게 춤출 준비가 된 것이다. 춤을 추면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 격렬한 몸짓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쁜 호흡이 필요할 지 모른다 (나는 단 한 번도 격렬한 몸짓의 경험이 없다, 숫총각같이 순결한 나) 혹시 몹시도 가파르고 위험한 가쁜 호흡의 춤을 추면서도 노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은 무슨 노래를 할 수 있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 가진 자들과 더 가지려하는 자들에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대받는 풀과 나무, 흐르는 강물과 눈물방울이 되어버린 바다에 대해 가슴 속 딱딱하게 굳어버린 눈물을 너무도 무겁게 지니고 사는 너와 나에 대해서, 길거리 遺棄犬에 대해서. 황금의 식탁위 황금의 포도주는 결코 마실 수 없음을 귀두확대수술을 갈망하는 거대한 시대에 대해 아주 위험하게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해 당신은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0년8월15일 생 한양대학교 정치외교 졸 한양대학교 동 대학원 중퇴 중앙일보사 19기 LG화학 현 노무인력  
37 (이승진 시인) 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1605 2013-11-12
 안주 고향산천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휘도 녀석이 묻는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해요, 커피를 좋아해요. -응, 커피 -왜요? 막걸리 안주는 김치고 맥주 안주는 땅콩인데 커피 안주는 그리움이거든 고향산천에 안개 깊은 날 커피 한 잔에 너무 많은 안주를 먹는다고 바람이 불고 바람이 울고 사랑 박물관 빈 돛단배라도 아름다울 것이다. 빈집이라도 고마울 것이다. 명월이 반공산 한 그대라면 더욱 좋겠다. 맑은 터를 골라 사랑 박물관 하나 짓고 싶다. 툭툭 깨어지던 타제석기 첫사랑 오순도순 걸어 나오는 빗살무늬토기 속의 빗금들이 다시 손을 잡는다. 호동 왕자, 낙랑 공주 황진이와 總角 그리고 어린 임제 심순애와 이수일, 윤심덕, 전혜린의 사랑 어느 이름 없는 시인의 아픈 짝사랑 편지도 한 쪽 넣어 긴 태풍을 태우고 남은 사랑의 사리로 하나 둘 탑을 올리는 사랑 박물관 한 채 지어 보고 싶다. 살아온 건 사랑하는 거였지 사는 건 사랑하는 것이겠지 박물관을 위하여 먼 길을 걸어서 온 계절과 을숙도 갈대를 대패질하던 나그네 모든 발자국이 모두 아름답기야 하겠느냐만 바다에 뜬 빈 돛단배라도 좋다. 상주 사벌에 남아도는 빈집이라도 좋다. 달빛 누운 을숙도 갈대밭 마당을 가진 아름다운 박물관 만들고 싶다. 사랑 박물관 지어 가는 도목수로 살고 싶다. 친구 기다리기 글쓰기 대표인 친구가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복도를 걸어가 창문 틈으로 친구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눈물을 잡고 그네를 타거나 조례대에 마음을 벗어놓고 희미한 운동장의 트랙을 서성거렸다. 플라타너스 둘레를 재어보고 잘 보이지도 않는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십리 길이 먼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기다리더라도 같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함께 가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서성거리는 것이나 나는 그 기다림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었다. 정아, 너는 내가 서성거림의 명수인 줄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지 공부만 계속하고 기다리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도, 가슴이 아픈 오늘은 플라타너스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나 정말 혼자 갈 지 모른다. 양정역에 서서 경상북도 상주시 사라진 양정역에 서서 내리지 않을 손님을 기다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속 어느 자리에 사라질 간이역을 짓는 것이다. 할아버지 기다리던 우리 할머니 뒤꿈치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양정역은 그리움이다. 있으나 사라진 사라졌으나 있는 양정역은 시다. 그리움이 내리면 초승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찰을 하는 양정역 사랑했었다는 고백처럼 언제나 늦어지는 완행열차가 초승달을 데리고 양정역을 떠나면 혼자 남은 키 큰 나무가 텅 빈 양정역을 쓸어내리며 또 먼 하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 순이가 첫눈처럼 내리는 날. 거름 지고 장가기 할아버지도 장에 가셨을 것이다. 봄이 무릎까지 차 오른 날은 마음 둥둥 걷으시고 어어, 어어 하시며 장에 가셨을 것이다. 마을 앞에 놓여있던 복숭아 살구꽃 지뢰밭을 어떻게 지나가셨는지 볼일 없이 장가는 삶 할아버지는 꽃보다 아팠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 봄처럼 수군거리는 소리 거름이 되고 다시 거름이 된 마음을 지고 장 가야하는 길 통째로 웃었지만 울었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는 거름 지고 장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던 할머니 마음에 때 아닌 꽃심과 불심도 일어나고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산과 들에는 눈물이 펑펑 피어나 마을로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겠느냐 거름 지고 장가는 길 그리움이 먼저 길을 나서고 외로움이 올망졸망 따라나섰지. 종일을 바람이 불고 종일을 바람이 울고 키가 조금 자란 손주 녀석이 그리움 더 얹은 거름을 지고 상주 장을 간다. 달못둑에 서서 좌향좌 했다가 돌아와 보니 서른 해가 지났다. 이 길 저 길 마차골에서 두릉까지 오솔길에 산길 물길도 새로 내며 하루 십리를 걸어 두릉 초등 다니던 길 해질 녘이면 꿈보다 길이 더 아름다웠다. 오늘은 아스팔트가 덮인 달못둑에 서서 돌아오지 않는 청둥오리 한 마리 기다린다. 이 푸른 달못을 희수랑 현옥이는 힘차게 건넜었지 단 한번도 헤엄쳐 건너지 못한 내 여름이 까만 물때를 묻혀 되오르면 청둥오리 물갈퀴가 바쁜 겨울을 걸어오고 있었다.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했던 달못이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하는 사랑으로 바뀐 오늘 내 서성이는 발길은 묵녹골, 큰골에서 달못의 첫물을 찾아 이름 부르던 그 날부터 준비된 그리운 물길 누가 내 그리움에 아스팔트를 덮어놓았나. 말줄임표를 까맣게 찍는 아스팔트가 덮이고 구미 여주간 고속도로 공사가 잠시 멈춘 달못둑에 서서 솜털 가득 그리움의 까만 물때를 묻히고 되올라오는 알몸뚱이 나를 만난다.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눈이 내린 아침 놀이터에 가 봐. 몇몇 녀석이 그네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참 이상해 어떻게 그네에 앉을 생각을 했지 밤새 이곳까지 오려고 힘들었을 눈을 생각해 봐 그네에 앉은 녀석들이 등을 밀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살금살금 다가가 녀석들이 앉아있는 그네를 밀어보아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누군가 그대가 탄 아름다운 놀이터를 살살 밀어줄 거야. 낙엽 가을 운동장은 운전면허 시험장이다. 저 많은 응시자들이 떨어지려 모여 있다. 녀석들, 푸른 수입증지를 덕지덕지 붙여오더니 오늘은 바람을 탄다. T 코스에서 헤매던 것들이 S 코스를 유영하기도 하고 어떤 놈은 완성된 후진을 하며 끝까지 흩날리기도 한다. 몇 놈은 벌써 도로주행 시험이다. 이-뿌~다 한 놈 한 놈 떨어질 때마다. 기러기 날아가며 합격 벨을 울린다. 기럭 기럭 기럭 기럭 이 운전 면허 시험장은 잘 떨어지는 것이 합격이다. 참 좋은 가을이다.  돌아가는 이유 남의 머리 물그릇으로 사용했던 그 분은 주인에게 얼마나 미안 했겠어? 돌아갈 수밖에는…. 게딱지에 밥 비벼먹다가 문득 그 분 생각하노니 남의 머리 밥그릇으로 사용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돌아가야 하는지 돌아서서 훌쩍이는 한 여인을 보았네. 돌아서서 훌쩍이는 바다의 등을 오래 바라보았네. 행인 3 화령초등학교에서 동창회 축구대회가 있는 일요일, 직원 중의 한 사람인 나는 그냥 출근을 했다. 준비-개회식-축구경기-시상식-행운권 추첨-뒷정리가 진행 되는 동안 본부석과 일정 거리를 두고 어슬렁어슬렁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 마시는 일을 하였다. 뒷정리 때는 시선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끙끙거리며 시선기를 운반하였다. 내가 맡은 배역은 본부석이나 운동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화면의 귀퉁이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행인 3이 되는 일이었다. 축구경기에서 공 한 번 마음 놓고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루가 갔다. 그대 삶에 출근을 하였지만 나는 행인 3이었다. 늘 본부석 뒤돌아보며 어슬렁어슬렁 마부용 커피를 마시며 사는 푸른 눈물이었다. 돌아서서 말없이 그러나 맛있게 먹는 일이었다. 감사하며 먹는 일이었다. 살면서 울면서 혹은 울면서 살면서 하루가 가도 소리 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행인 3은 그대 삶의 먼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 배우고 익히는 착한 학생부군이었을 것이다. 퇴근 무렵에는 그냥 퇴근했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움 박물관 50년 지난 촌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는다. 내 보내고 싶지만 마음 안에 살던 촌년 그대로 두기로 한다. 50년 지난 이 촌놈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36 (이승진 시인) -이승진의 시세계 抄 - 서성거림의 시적 심화
편집자
1534 2013-11-12
 서성거림의 시적 심화             -이승진의 시세계 抄- 박찬선    자선시는 자기의 시를 자기가 가려낸 시이다. 자기가 빚은 시가 어느 것인들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많은 작품에서 한 권의 시집 분량이나 그보다 적게 열 편 정도를 가려내라면 어려울 때가 있다 편편마다 사연이 담겨있고 산고를 겪은 뒤에 태어난 작품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정해진 편 수에 넣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겪기도 하고 제외하는 아픔도 맛보아야 한다. 어쨌든 자선시는 자기의 시력詩歷에서 자기가 제일 아끼는 시를 이름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일생에 자선시집을 한 두 권 쯤 펴낸다.특히 인생을 정리하는 나이를 맞을 때나 특별한 기념이 될 만한 때를 맞추어 낸다. 이번 이승진 시인의 경우는 『상주문학』의 특집에 응하는 자선시인 것이다.  「안주」,「사랑 박물관」,「친구 기다리기」.「양정역에 서서」,「거름지고 장가기」.「달못둑에 서서」,「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일곱 편은 이 시인의 첫 시집 『사랑 박물관』에 들어있는 것이고 「낙엽,「돌아가는 이유」,「행인 3」,「그리움 박물관」,네 편이 그 이후의 작품이다. 시의 이력을 가늠할 수 있는 분량이기도 하다. 먼저 이 시인의 시 이야기에 앞서 평범한 삽화 두 가지를 보자.    삽화 둘  삽화․1  무더운 여름날 저녁,문학회 모임을 마치고 몇 사람이 시원한 밤바람을 쐬려고 용흥사 입구에 올랐다.시가지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도 누리고 산 속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고 싶어서였다.이곳은 지천 솔숲 가까이에 있는 연악서원에서부터 이어진 풍광이 아름다운 연악구곡이 있어서 상주의 옛 선비들이 연악문회(1500년대 商山四老:김충,류진,김범,김언건.1600년대 商山四皓:이전,이준,정졍세,강응철)를 베푼 곳이 아니던가.유서 깊은 내력이 있는 곳이기에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자판기에서 뽑아 든 커피의 향기가 밤바람과 함께 스며들었다.주차장 마당에서 마구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떨기를 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맑은 개울물소리와 숲의 정밀과 산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늦도록 서성거렸다.이 시인의 담배불이 마치 반딧불이의 깜박이는 빛처럼 보였다.    삽화․2  어느 해 초여름 초파일을 앞둔 어느 날,이 시인과 같이 노악산 등성이에 있는 중궁암에 오른 적이 있다.가파른 길이라 쉬엄쉬엄 오르면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이 시인이 한 얘기인즉 몇 해 전 섣달 그믐날 혼자 중궁암에 올랐단다.주지스님은 출타를 해서 안 계셨고 주인 없는 절간에 혼자 머물게 되었단다.주지스님과 통화를 하니 온돌방은 군불을 지펴 잘 데워 놨으니 푹 쉬면서 절이나 잘 보라고 하시더란다.갑자기 주인이 된 것이다.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주시가지의 불빛도 아름답고 밤이 이슥한 시간 적막을 깨우는 풍경소리가 정다웠으며 부시시 일어서는 산소리에 염불로 지새운 적이 있었단다.무섭지 않았느냐니까 부처님이 바로 곁에 계신다고 생각하니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오히려 든든했다고 이른다.아침 공양도 지어 올리고 주인 행세를 며칠 톡톡히 해냈단다.     여기서 삽화 1과 2를 조합해보자.삽화․1에서는 용흥사 아래에서 여름밤의 정취에 취하여 서성거렸다는 것이고 삽화․2는 주지스님이 안 계시는 중궁암에서 주인노릇을 며칠간 했다는 것이다.공교롭게도 이 두 삽화를 연결 지우면 이 시인의 시세계의 추출이 가능해진다.   ‘서성거리다’의 사전상의 의미는 ‘한 곳에 서 있지 않고 망설이며 왔다갔다 하다’이다.그러면 여름밤의 서성거림은 단순히 요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숲을 보고,반짝이는 별을 보며 물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나는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펼쳐진 현상만 보고 듣는 것으로 마친다는 것인가? 주어진 현상과 실체는 불가분의 것이다.시인의 서성거림은 단순히 서성거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성거림의 이면에는 실체를 파악하는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전방위적으로 펼쳐있는 촉수는 주체자로서 탐색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며칠을 대행한 중궁암의 주인행세는 암자의 안전을 책임짐은 물론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 일이며 예측 못할 일에 대해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다.밤을 깨우는 새소리도 앉히고 부처님의 잔잔한 미소도 품는 일이다.주인으로서 중궁암을 관장하며 중궁암의 공간과 관계 지워진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삼는 일이다.이 기간만은 중궁암과 내가 하나인 것이다.   이 시인은 첫 시집 『사랑 박물관』‘시인의 말’에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바둑이의 ㄷ을 반대 방향으로 썼고,2학기에는 높이의 받침 ㅍ을 ㅛ로 쓴 적이 있다.가끔 유형 무형의 형상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처럼 받아쓰기를 불러줄 때가 있었다.이제 나는 좀더 깊은 받아쓰기를 하기 위하여 나머지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이 시인이 말한 ‘깊은 받아쓰기’는 시 쓰기이며 나머지 공부는 시 쓰기의 공부이자 삶의 공부이다.  서성거림(형상,받아쓰기를 불러주는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주인(ㄷ을 반대로 쓰고 ㅍ을 ㅛ로 쓰는 일,공부)이 되는 것이다.이제 서성거림이 서성거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성거림의 이면에는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알겠다.그것은 시의 가능성이요 시 쓰기의 전제가 됨은 물론이다.  서성거림의 시  화령초등학교에서 동창회 축구대회가 있는 일요일, 직원 중의 한 사람인 나는 그냥 출근을 했다. 준비-개회식-축구경기-시상식-행운권 추첨-뒷정리가 진행 되는 동안 본부석과 일정 거리를 두고 어슬렁어슬렁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 마시는 일을 하였다. 뒷정리 때는 시선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끙끙거리며 시선기를 운반하였다. 내가 맡은 배역은 본부석이나 운동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화면의 귀퉁이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행인 3이 되는 일이었다.                                      축구경기에서 공 한 번 마음 놓고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루가 갔다. 그대 삶에 출근을 하였지만 나는 행인 3이었다. 늘 본부석 뒤돌아보며 어슬렁어슬렁 마부용 커피를 마시며 사는 푸른 눈물이었다. 돌아서서 말없이 그러나 맛있게 먹는 일이었다. 감사하며 먹는 일이었다. 살면서 울면서 혹은 울면서 살면서 하루가 가도 소리 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행인 3은 그대 삶의 먼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 배우고 익히는 착한 학생부군이었을 것이다. 퇴근 무렵에는 그냥 퇴근했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았을 것이다.                                   -「행인 3」.전문  「행인 3」은 이 시인의 최근작이다.「행인 3」은 “ 내가 맡은 배역은 본부석이나 운동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화면의 귀퉁이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법을 배우는 일”이요 「행인 3」은 “그대 삶의 먼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 배우고 익히는 착한 학생부군이었을 것”이라고 했다.나는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소외되어 있다.동창회의 집단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함께 하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주변인인 행인 3이 되는 것이다.「행인3」은 서성거림이다.그렇다고 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동창회 축구대회가 있는 날 출근한 나의 한 의식과 동창회원들의 다른 의식 가운데서 자기의식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 헤겔이 말한 의식의 경험이다. 나는 축구경기를 하는 동창회원들이 있음으로써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그대 삶의 귀퉁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깨닫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소외된 나는 오히려 소외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는 변증법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겠다.나,테제,正이라는 사상이 나와서 모순이 생기면 다시 동창회원,안티테제,反이라는 사상이 나오고,시간이 지나면 부정의 관계에서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깨침,진테제,合이라는 사상이 도출하기 때문이다.이와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말하는 변증법은 시적 화자인 내가 대상을 관찰하여 시를 창작하는 시작과정과 견주어도 무방하리라. 글쓰기 대표인 친구가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복도를 걸어가 창문 틈으로 친구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눈물을 잡고 그네를 타거나 조례대에 마음을 벗어놓고 희미한 운동장의 트랙을 서성거렸다. 플라타너스 둘레를 재어보고 잘 보이지도 않는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십리 길이 먼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기다리더라도 같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함께 가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서성거리는 것이나 나는 그 기다림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었다. 정아, 너는 내가 서성거림의 명수인 줄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지 공부만 계속하고 기다리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도, 가슴이 아픈 오늘은 플라타너스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나 정말 혼자 갈 지 모른다.              -「친구 기다리기」 전문   「친구 기다리기」는 서성거림의 시다.이 시인의 서성거림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어 있는 것이다..글쓰기를 잘하는 정아가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창문 틈으로 정아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운동장 트랙을 서성이고,플라타너스 둘레를 재어보며 그렇게 서성거렸다.십리 길,같이 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나 삶을 서성거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으며 정아에게는 내가 서성거림의 명수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기다려서 같이 가는 동행인이 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며 믿음을 바탕으로 한 우정이자 사랑이다.기다리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양 공부만 하는 정아에게 직접 대고 말하지 못하고 플라타너스를 보고 한 마디 한 것이 ‘-나 정말 혼자 갈 지 모른다.’는 말이다.그러나 그 의탁 발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오히려 그 반대로 가지 않겠다는 반어적 의미가 강하게 전달되고 있음은 왜일까? 서성거림은 단정적이고 마침의 행동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이어짐의 행동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기다림 또한 미래를 열어 줄 마음의 자세가 아닌가?     과거의 체험과 패러디의 시    누구에게나 지난 시절의 과거가 있다.좋던 싫던 앙금처럼 남아 있는 일들이 있다.그것들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과거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이미 패러디는 자신의 씨를 묻고 있다.  “문학 전통을 의식하고 쓰는 시인 작가는 결국 자기작품을 통해 지난 날의 문학을 비판하며 부지중에 지난 날의 문학에 대한 패러디가 된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지난날의 관련 작품과의 유사성이나 부분적 전거 의존은 모방이나 모작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유와 문학적 과거의 의도적 병치라는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에서 우리는 패러디를 문학적 전통을 의식하고 쓰는 비판적인 글쓰기의 개념으로 그리고 인유의 한 형식으로 파악한다.빌려오기 즉 인유나 인용을 전제로 한 패러디는 의미내용을 효과적으로 얼마만큼 충족시키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남의 머리 물그릇으로 사용했던 그 분은 주인에게 얼마나 미안 했겠어? 돌아갈 수밖에는…. 게딱지에 밥 비벼먹다가 문득 그 분 생각하노니 남의 머리 밥그릇으로 사용한 나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돌아가야 하는지 돌아서서 훌쩍이는 한 여인을 보았네. 돌아서서 훌쩍이는 바다의 등을 오래 바라보았네.                            -「돌아가는 이유」 전문  「돌아가는 이유」는 원효스님이 661년(문무왕1)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서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던 도중이었다.비오는 밤길이라 어느 땅막에서 일박을 하는데 밤중에 갈증이 심해서 마침 하얀 그릇에 고인 물이 있어서 달게 마셨다.날이 밝은 뒤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더란다.  단맛과 구역질이 나는 물,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마음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心法을 깨쳤다는 이야기.거기에 나오는 해골을 인유한 것이다.남의 머리 물그릇과 게딱지에 밥 비벼먹는 나의 행위와의 연상은 절묘하리만치 상사점을 이룬다.그리고 돌아가야 하는 행위가 공통성을 지녔다.이러한 조건의 상사점은 “패러디가 현재를 과거와 닮은 익숙한 이미지로 변형시켜 현재와 미래를 과거와 연루시켜 놓는 재기호화 형식이다.”라는 말에 잘 부합되기도 한다.  좌향좌 했다가 돌아와 보니 서른 해가 지났다. 이 길 저 길 마차골에서 두릉까지 오솔길에 산길 물길도 새로 내며 하루 십리를 걸어 두릉 초등 다니던 길 해질 녘이면 꿈보다 길이 더 아름다웠다. 오늘은 아스팔트가 덮인 달못둑에 서서 돌아오지 않는 청둥오리 한 마리 기다린다. 이 푸른 달못을 희수랑 현옥이는 힘차게 건넜었지 단 한번도 헤엄쳐 건너지 못한 내 여름이 까만 물때를 묻혀 되오르면 청둥오리 물갈퀴가 바쁜 겨울을 걸어오고 있었다.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했던 달못이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하는 사랑으로 바뀐 오늘 내 서성이는 발길은 묵녹골, 큰골에서 달못의 첫물을 찾아 이름 부르던 그 날부터 준비된 그리운 물길 누가 내 그리움에 아스팔트를 덮어놓았나. 말줄임표를 까맣게 찍는 아스팔트가 덮이고 구미 여주간 고속도로 공사가 잠시 멈춘 달못둑에 서서 솜털 가득 그리움의 까만 물때를 묻히고 되올라오는 알몸뚱이 나를 만난다.                      -「달못둑에 서서」 전문  변화된 상황의 아스팔트가 덮인 달못둑에 서서 회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꿈보다 아름다운 두릉초등 다니던 길이며 헤엄쳐 가로지르지 못했던 유년의 푸른 달못,그리움의 까만 물때를 묻히고 되올라오는 나를 만나고 돌아오지 않는 청둥오리를 기다리고 있다.달못은 준비된 그리운 물길로 내 유년의 체험의 장이자 현재의 나를 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시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한갓 과거의 퇴적물에 불과한 추억의 무덤일 뿐이다.단지 돌아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다봄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청둥오리 물갈퀴가 바쁜 겨울을 걸어오고 있는 생명의 어기참이 있어야 한다.그것은 현존재의 탐구이자 내일을 밝히는 새빛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사라진 양정역에 서서 내리지 않을 손님을 기다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속 어느 자리에 사라질 간이역을 짓는 것이다. 할아버지 기다리던 우리 할머니 뒤꿈치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양정역은 그리움이다. 있으나 사라진 사라졌으나 있는 양정역은 시다. 그리움이 내리면 초승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찰을 하는 양정역 사랑했었다는 고백처럼 언제나 늦어지는 완행열차가 초승달을 데리고 양정역을 떠나면 혼자 남은 키 큰 나무가 텅 빈 양정역을 쓸어내리며 또 먼 하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 순이가 첫눈처럼 내리는 날.                 -양정역에 서서 전문   양정역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공검에 있는 기차역 이름이다.공갈못둑으로 오르기 전 옛길과 개울이 굽이도는 사이에 있었던 조그만 역.작은 역사와 외롭게 선 미루나무가 시골의 정취를 보여주었다.  시인의 내면에는 문명의 뒤안길로 사라진 양정역이 내리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는 역으로 존재한다.초승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개찰을 하는 양정역은 할아버지 기다리는 우리 할머니가 하마 오려나 하고 까치발 딛는 그리움이자 한 편의 시다.경북선 완행열차가 초승달을 데리고 양정역을 떠나면 키 큰 나무가 먼 하늘을 기다리는 양정역은 동화속의 그림 같은 역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사라진 양정역을 되살리고 가슴 속 한 켠에 간이역을 짓는 일을 사랑이라고 한다.양정역은 시인에 의해서 시로서 남아 다시 존재하고 첫사랑 순이가 첫눈처럼 내리는 날의 양정역으로 자긋이 젖어드는 기쁨이자 들뜨는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현재의 나와 지난 시절의 그리움의 인식이 사랑의 시로 승화하는 시의 내면적 흐름과 구조가 감동을 자아낸다. 시의 도목수로 살다 빈 돛단배라도 아름다울 것이다. 빈집이라도 고마울 것이다. (중략) 어느 이름 없는 시인의 아픈 짝사랑 편지도 한 쪽 넣어 긴 태풍을 태우고 남은 사랑의 사리로 하나 둘 탑을 올리는 사랑 박물관 한 채 지어 보고 싶다. 살아온 건 사랑하는 거였지 사는 건 사랑하는 것이겠지 박물관을 위하여 먼 길을 걸어서 온 계절과 을숙도 갈대를 대패질하던 나그네 모든 발자국이 모두 아름답기야 하겠느냐만 바다에 뜬 빈 돛단배라도 좋다. 상주 사벌에 남아도는 빈집이라도 좋다. 달빛 누운 을숙도 갈대밭 마당을 가진 아름다운 박물관 만들고 싶다. 사랑 박물관 지어 가는 도목수로 살고 싶다.                       -「사랑 박물관」 전문  사회가 분화될수록 박물관도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동시에 그 숫자도 늘어나고 있다.외국에는 유서 깊은 마을을 볼 수 있는 마을박물관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픈 회귀본능이 박물관에도 나타나는가 보다.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사랑 박물관」이라니 매력적인 박물관임에 틀림없다.  상주 화북 입석리에는 정란을 피해 내려온 원수 집안의 남여가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었다는 보굴암의 전설이 있고 괌도에는 원주민 차모로족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침략군 스페인 장교에게 강제로 결혼케 하자 사랑하는 연인과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바닷가 사랑의 절벽이 있다지만 사랑박물관이라니 더욱 호감이 간다.  살아온 건 사랑하는 거였고 사는 일이 사랑하는 것일진대 우리 삶이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사랑이 삶의 전부다.그래서 시인은 사랑 박물관을 짓고 싶어 한다.육신을 불태우고 남은 사랑의 사리로 탑 쌓듯 짓는 사랑 박물관.바다에 뜬 빈 돛단배나 상주 사벌에 남아도는 빈집이라도 좋단다.크고 우람한 현대식 건물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이다.누군가가 쓰다가 비어 있는 배요,살다가 떠난 집이다.비어 있는 배와 집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사랑이요,그 일을 하는 것이 시인의 몫이다.  시인의 정서는 달빛이 누운 을숙도 갈대밭 마당과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상주 사벌의 빈집에 머물고 있다.그것은 모태에 대한 사랑이요,사치스럽지 않는 서민적 정서에 비롯한다.이러한 배경은 시인의 시정신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살펴볼 부분) 50년 지난 촌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는다. 내 보내고 싶지만 마음 안에 살던 촌년 그대로 두기로 한다. 50년 지난 이 촌놈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움 박물관」 전문      「그리움 박물관」은 「사랑 박물관」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고향산천 휴게소에서/커피를 마시는데/휘도 녀석이 묻는다./선생님은/술을 좋아해요, 커피를 좋아해요.//-응, 커피/-왜요?//막걸리 안주는 김치고/맥주 안주는 땅콩인데/커피 안주는 그리움이거든(「안주」 일부)에서 보듯 시인은 그리움을 선호한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냥 퇴락하고 만다.사람의 훈기가 집과 함께하여 집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촌집-촌년-촌놈으로 이어지는 그리움 박물관은 상사점이 있다.촌집이라지만 50년 정이 든 집이요,그 집에 살던 무던한 촌년이 아니던가.넓고 큰 호화로운 집에 아름다운 여인을 새로 들여서 살 수도 있지만 아예 접어두었다.시류에 약삭빠르지 못하고 조금은 우둔하고 우직하여 무너지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그리움이 가득차서 무너지지 않는 그리움의 박물관에는 시인의 굳은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그런가 하면 원초적 그리움을 바탕으로 가을 운동장은/운전면허 시험장이다./저 많은 응시자들이 떨어지려 모여 있다.(「낙엽」 3행)에서 보듯 자연에 대한 그리움 참 이상해/ 어떻게 그네에 앉을 생각을 했지/밤새 이곳까지 오려고/힘들었을 눈을 생각해 봐//그네에 앉은 녀석들이 /등을 밀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살금살금 다가가/ 녀석들이 앉아있는 그네를 밀어보아/(「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2,3연)에서 보듯 동심에 대한 그리움 그래도 세상에는/ 거름 지고 장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던 할머니 마음에/때 아닌 꽃심과 불심도 일어나고/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산과 들에는 눈물이 펑펑 피어나/마을로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겠느냐/거름 지고 장가는 길/ 그리움이 먼저 길을 나서고/외로움이 올망졸망 따라나섰지./(「거름 지고 장가기」 일부)에서 보듯 삶에 대한 그리움 등 보고 듣고 생각하는 체험의 전영역이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이 시인의 세상을 향해 열려진 그리움은 우주론적 성향을 지녔다. 낯을 가림이 없이, 까다로운 선택도 없이 두루 미치는 그리움. 그에 있어서 그리움은 커피요,양정역이요,정아요,장가기이며,달못이요,낙엽이며 눈이다. 이 시인에 있어서 그리움은 이러한 모든 그리움한테 가는 길이요, 동력이며, 표상이요,사랑이자 존재이유이다.    이 시인의 시세계를 짚으면서 계속해서 따라붙는 것이 서성거림이었다.서성거릴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사벌이라는 전원의 토양,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상주지역 일상어의 언어환경,관망에서 판단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결정 등 그것이 내면적이던 외부의 환경에서 온 것이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벽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이렇다면 서성거림은 생래적인 것이요 환경적인 것이라 생각된다.특히 시와 연관된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마치 무당에게 신 내림이 있듯이 시 내림에 있어서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성거림은 내적이라기 보다는 외적 입장에 가깝다.안에서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을 보는 것이다.닫혀 있는 안이 아니라 열려진 밖의 시선이 훨씬 자유로울 것이다.이 시인의 서성거림은 바로 정신의 자유로움을 누리려는 욕구에서 비롯했다.시인은 정신의 자유인이다.결코 구속도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의지,그것의 즐김에 있다.그럼으로써 자기만의 공간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규제받지 않는 사유의 절대공간이다.  이 시인의 절대공간에는 모든 체험과 사물들이 사랑과 그리움의 옷을 입고 나온다.잔잔한 서정을 바탕으로 회상의 나래를 펴게 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며 더러는 언어의 패러디로 웃음을 자아낸다.이 시인의 서성거림을 통한 시적 탐색은 적극적인 자기방어의 시작업으로 深化되어 나타난다. 시의 도목수로서 사랑박물관에서 그리움박물관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시 박물관으로 대미를 거둘 그의 시작업의 성취를 기대한다.  졸문을 마감하고 창문을 여니 첫서리가 하얗게 내려있었다. 이승진 시인 약력 경북 상주 출생. 상주문협회원. 시집 "사링박물관"  
35 (강태규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048 2013-10-10
 왼쪽과 오른쪽에 대하여 개미가 모서리를 오르내린다 왼쪽과 오른쪽에 관하여 내가 알 길 없는 소통으로 나아간다 바람을 거슬러야 멀리 날 수 있는 새떼는 교행하는 법이 없다 한때 제 몸속에 갇힌 십자매의 불알에 대하여 궁리해 본 적이 있다 새도 개미도 제 몸속에 초록 신호등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많은 별들을 머리에 이거나 사막을 보듬어 제 몸을 통행한다 수캐가 내달릴 때는 온몸 따라 그것도 왼쪽으로 기뚱댄다 나는 한 번도 나무란 적 없다 목욕탕으로 드는 아들의 그것은 오른쪽이다 나도 그러하듯이 왼쪽으로 기우는 내 걸음은 노동의 무게 때문인 줄 안다 아니, 심장의 중량 때문이다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반복하는 내 오른쪽이 저리다 이제, 내 몸을 갓길로 댄다 사이에 사구에 갇힌 부레없는 넙치를 보다가 우주의 호기심은 왼쪽이라는 생각 하나와,동굴호수에 갇힌 망둥어를 보다가 우주의 암전 속에서 살아남는 생각은 오른쪽일거라는 생각 둘,사이에,내가 지구에 처음 왔을 때는 물 속을 유영하다가 대기권으로 던저졌다는 것 하나와, 개미나 새떼들의 교신법이 퇴화된 직립보행의 존재라는 둘,사이에,호기심과 호기심은 서로 투명망또를 두른 채 왼과 오른 사이에,내 생이 민물에 갇힌 넙치와 동굴에 갇힌 망둥어사이에,그 사이 사이를 질주하는 사이에나는 자꾸만 왼과 오른 사이에 던저진 실종들을 이야기하려 하지만,왼의 끝마디와 오른의 끝마디가 띠로 연결되는지 매듭으로 이어지는지 광년의 거리인지 모르겠다그 사이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사이에눈을 잃은 망둥어라는 생각과폭풍과 해일 속으로 되돌아갈 짠물을 두려워하는 넙치라는 생각사이에 나는 구절리에 사는 소를 찾으러 간다 시 한 개를 얻기 위해서는 한반백년쯤 외로운, 그런 사내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 곰곰 곱아보고 펴보니 나는 바래고 성긴 헝겊쪼가리이고사내는 원색의 촘촘한 직립 외줄로 오르는 벼랑에도 땅을 헤집는 삽날에도 꿋꿋하기만 한, 그런 선한 숨들이 멈춘 소한(小寒)날 사내의 전화를 받았다 직지사로 가잔다 내 귀에는 죽자사로들려 왜란, 호란, 동란, 4·3 그리고 5·18 때는 선한 사람들이 먼저 죽었고이번 겨울에는 착한 짐승들이죽고 시, 한 채 품기 위해 사내가 숨겨놓았을,구절리간다 세 무덤 작년 겨울에는무덤 셋이 나란히 있는산역山域을 지나면아내 둘 사이좋게 거느린어진 남자가 가운데 있었다 올 겨울은 잦은 폭설에조금 심약해졌는지 집나간 아들이 아비와 어미의 곁으로 왔다 하얀 고봉밥 차린 저녁사연들이 튀밥으로 솟았고온 하늘과 산들이 왁자했다 밤 깊어 눈이 벅차도록 더 와젖가슴이 더 불어 오르기도 하였고가슴끼리 더 가까이 붙기도 하였다 눈먼 고요의 젖물림 환영(幻影)으로부터어진 아낙이 깊은 눈을 풀어 헤치며성큼 걸어 나왔다 수음을 사주(使嗾)하다 들켰다 아니 정직하자면 태생적 관음을 토로해야겠지만 주워들었던 사주四柱가 그러하지 못하다 할 일 없다라지만 그것도 아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수음밖에 없다라고 하기에는 상상력의 수액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사주단자四柱單子 신부집에 보낼 적 좋은 날과 밤을 누려보자 했다지만꾸려온 사주가 그러하지 못했다 잉그리드 버그만을 흑백화면에서 불러내어4D 화면으로 끌어들여온 험프리 보가트가 되기로 한다그녀의 두 다리와 내 두 다리가 사주四柱가 되다가도그녀는 사라지고 남근을 담은 손끝에서 사주射注로 눈을 뜬다 수음이라는 것도어쩌다 주워온 사주가 아니라생명의 기원이 자웅동체의 사주임을 알아차리고선아주, 또는 제법 근엄하게나의 원시를 구체적으로 관음한 날, 있었다 광배 뒤로 숨었다 설악이 해를 감춘다 광배가 부처 뒤로 숨는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해 아래서 숨바꼭질 중이다 술래 된 눈으로 감아보면 너의 숨과 냄새를 좇는다는 것 너의 이름을 묵송하는 것 너를 잃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조차 숨을 곳 없어 내일이면 잊을, 다 버렸다는 거짓말까지 광배 뒤로 숨겼다 한 여름, 까마귀 되어 까마귀떼 빙글빙글 노는 한 여름이었는데 꾸벅꾸벅 땅만 보는 비석치기가 되기도하고 허둥허둥 직진만 하는 날이기도 했는데 뭉개뭉개 구름도 뭉게버린 여름하늘에 까마귀들 왼쪽으로만 맴맴맴맴, 또 맴맴 시침, 분침, 초침 할것 없이 어지럽기만 해 기웃기웃 왼쪽 날개 누르며 끼리끼리 오른쪽 놀이 눈 감고 솟구처 같이 붕붕붕붕 어라, 아니네 까마귀들 오른쪽으로 욍욍 왼 어깨 들썩이네 그냥 승부라 이름 짓고 승부에 닿으면 내 흘려보낸 봄빛들도 여한 없겠네 모르고도 닿았음직한 셀 수 없는 욕망들까지 가을빛에 닿아서야 빈 서랍 속으로 드네 승부에 닿으면 아무도 없어 좋겠네 봄 오지 못할, 한겨울 묻혀도 좋겠네 차라리 외길, 닫힌 길, 눈 속에라도 갇히어 이러저러지도 오도가지도 않아 좋겠네 그냥, 콱, 눈을 감고 뜨지 않아도 좋겠네 승부에 닿으면, 손수건 흠뻑 적셔도 좋겠네 세상은 울음들의 무덤이어서 세상은 비리고도 얼음에 채워진 어물전이어서 세상은 집과 여자를 탐하고 사냥에 나서는, 승냥이떼 캥캥대는 왕국이어서 차라리 빈 하늘, 땅, 승부라 이름 짓고 그곳에 살겠네 자식 떠나고 마누라 없어도 좋겠네 그냥, 승부라 불러보고 살아도 좋겠네 담배포도 없고, 막걸리집도 없고, 예배당도 없고 절집 없어도 좋겠네 내 맘, 오로지 승부에 닿기만 해도 좋겠네 그리운 것들은 애당초 변덕스럽고도 거추장스러워 잡지 못하거나 닿지도 못한 사랑조차 용서되는 곳, 아무도 닿지 않아 내 마음 쇠심줄로 이미 닿아있는 곳 나 하나 둘러업고 나서기만 한다면, 나 하나 부려놓을 한 뼘의 승부가 있기라도 한다면, 하조대 1. 도시락을 먹을까하다 삼각 김밥을 먹었다 하늘과 물과 바람을 등대계단의 빈틈, 삼각에 담아본다 지상의 반쯤은 이미 그늘이다 진주빛 백색 프레임이 제격이다 바람과 햇살은 가둘 수 없어 불안하다 행성의 푸른 한 토막을 빈삼각 바늘귀에 데려와 다시 들여다본다 좋은 것은 반 만 보아야겠다 좋은 것도 반 눈으로만 보아야겠다 그러면 반 부처는 되겠다 2. 사각에서 삼각으로 바뀐 내 팬티가 왼 무릎과 오른 무릎에 걸쳐있다 반 만 보고 일어서다가 누린빛 토막을 애써 들여다본다 산다는 건 그늘들을 담아보거나 그늘로 들어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삼각 김밥도 한 나절 내 몸을 지나면 둥글거나 길죽해진다 만화경 속, 끝 모를 프레임 놀이다 하씨와 조씨가 있던 곳에 강씨가 참견하는 빈 삼각을 그려 놓고는 그 그늘에 두 다리를 걸쳐본다 내 속에 오줌보가 참견한다. 삼각 파도가 또 달려든다. 나, 그런 숲에 살고 싶네 - 김사인 풍으로 나, 작은 숲을 보네. 할 일 없이 해거름 게으름으로 높은 산을 넘는 해를 보네. 내가 가진 두 개의 눈으로 내일도 동녘 너울 위로 움실거릴 해를 기다리거나, 오늘 밤처럼 그믐달 눈 감기며 새 한 마리 보듬고 싶네. 숲은 고요해, 오른 쪽 물결에 내 맘 주어버린다 해도 숲의 거미들이 어느새 발등 톡톡거리네. 나, 하릴없이 터벅대던 발바닥이, 봄의 고운 순들의 말을 듣고있네. 어쩌나, 벼랑 같던 외길이 토끼풀이며, 괭이밥이 나풀대는 길목에 머무네. 이쯤해서, 아랫목 뜨실 방 한 칸 만들어, 되돌이 봄으로 되살아볼까. 터무니는 어디서 왔는지 몰라. 잿물에 젖은 화롯불이 성큼 되살아나는 것은 무슨 기묘한 마법인가.나 빙벽을 흐르는 바람에 대들지 않고 살아볼까나, 홍길동처럼 도적질도 하며, 숲을 가르거나, 숲의 여왕도 훔쳐, 율도국으로 갈꺼나. 세상은 늪이고, 수렁이어도 고요한 호숫가 쪽배에 외낙 바늘로 아궁이 곁불에 얹힐 고기도 낚으리. 보쌈 풀어 내려놓은 처자, 구석진 벽에 붙어 여러 낮밤 울어대리. 이따금 마른번개 숲을 빗기며 그렁대리. 하늘 북채 쾅쾅대는 밤이면, 쾌쾌하거나 북슬대는 덥석부리 품으로 안기리. 서너 해 지나 사슴 같고 방울초롱꽃 같은 아이들도 곁방에서 고슬대리. 이 즈음해서 베껴온 동화책처럼 울긋불긋 숲과 호수가 한 낮처럼 환해지리. 늘그막,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도 이제는 도망 못가, 노을에 늙다가 한 숨 내어 쉬리. 가끔은 마른 몸에 불 지피거나, 재떨이 깡깡대며 맞담배도 하리. 나, 옛날 옛적 그런 숲에 살고싶네.  
34 (강태규 시인)거울과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편집자
1939 2013-10-10
 거울과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축구나 탁구, 농구에 하프라인이 있고 중간선이라 부른다. 나뭇잎, 풀잎을 들여다 보면 줄기가 서로 닮은 대칭을 붙들고 있고, 짐승이나 사람도 미간에서부터 생식기까지 닮은꼴로 대칭되어 겉모습은 적당히 대칭이다. 유전정보를 만들고 나누는 DNA 조차 꽈배기 사슬모양의 대칭으로 풀어지고 붙어 생명의 연대를 저장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한 쪽과 또 알기 힘든 짝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섭리는 닮은 한 쪽은 닮지 않으려는 쪽과 긴장을 나누기도 한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 임을 안다. 우주가 만물의 조화 속에 있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 공간이며 따라서 섭리의 종착역조차 해피엔딩은 결코 없다. 다 부숴지고 에너지를 소멸하여 지구덩이가 주먹크기로 응축되어 먼지로 없는 듯 있다가 블랙홀을 통해 새로운 물질로 몸바꿈한다. 기억 전과 후를 전부 포맷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토록 허망할 종착역을 아는, 이른바 신세기 말에 잠시 있어보는 것인데, 기막히게 아름다운 행성에 있어보는 것인데, 괴롭도록 어긋나는 탄생과 생존과 소멸을 베껴쓰기로 한다. 새들도 벌레들도 우리의 시력과 청력으로 가늠하기 힘든 신호들로 소통한다. 좀 거룩한 척 해 본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내 바깥에 신호를 쏘아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나, 접속장애가 발생한다. 어쩌면 발신 쪽의 문제일 수도 수신 쪽의 문제 일수도, 아니 메시지의 작성과 그 송출방법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내가 가지고자 하는 것들이 더 이상 소용이 없고, 접속의 문제만 남는다. 내 바깥의 신호들을 안테나를 길게 뽑아 받을수 있도록 돌기를 세워야하고, 그가 주는 신호를 오감과 육감, 그리고 프리즘으로 여과하여 해독하려 애쓰다가도 그냥 단속되거나 오독하기도 한다. 나는 무한대의 접속을 원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수신기와 발신기의 노화가 시작되고 있다. 오음계와 칠음계의 음이 아닌 반음과 중음에 치우친다. 「그런 숲」에 살고 싶다가도 「하조대」등대 아래의 틈에서, 砂丘의 「사이에」서, 「세 무덤」에 참견하면서, 접속에 실패하여 새로운 접속지로 나서며, 「그냥 승부라 이름짓고」, 「소를 찾으러 간다」고 허풍을 널어놓는다. 다리 사이의 「수음을 사주」하기도 하며 고상한 척 「광배 뒤로 숨었다」고도 한다. 하늘 공간으로 올라 「한여름, 까마귀 되어」보기도한다. 드디어 「왼쪽과 오른쪽에 대하여」그 불편한 동거와 역할에 대한 의심을 품어보면서도 허망할 그 사이에 허둥대는 나를 힐끔본다. 그 틈과 사이가 중요하다. 그 곳에 접속이 있으므로, 나는 시를 쓴다. 강태규 서울 종로 소격동에서 태어나다. 2003년 산문집「평창이야기」2009년 시집「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로 문단에 나가다.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다. 미국 FDA 산하 연구소에서 신종마약을 연구하였으며, 식약청 및 미8군 병원 방역관으로 약물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한성대학 대학원에서 <신종 마약론> 강의와 논문지도를 하였으며, 근래 강원도에서 기생충, 벌질병연구 및 축산농장관리 및 유통연구소를 운영중이다. 성공회대학원에서 동아시아 문화사 강좌들을 이수중에 있다. 시에문학회와 영주작가회, 한국작가회의와 경북작가회의에서 활동하고 있다.  
33 (최순섭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656 2013-09-11
 라면 검댕이 냄비 속을 휘휘 저으며 후루룩후루룩 먹는다. 남은 국물로 바닥이 보이는 젊은 시절 뜨겁게 앞날을 삼킨다. 대문 열고 뛰어 들어와 툇마루에 가방 던져 놓고, 자전거 타고 오신 아버지도, 밥그릇 탱탱 불은 검둥이도, 바구니 가득 나물 캐고 돌아온 누이도, 구둣방 털보 삼촌도, 홍옥 노점상 아제도, 약국집 고모도, 마늘 고추 무 파 놓고 푸성귀 파는 꼬부랑 할머니도 무릎 괴고 앉아 후루룩 후루룩 먹는다. 공원 한 구석 노숙하는 소주병과 학교 앞 자취방 친구와 날 밤 새며, 애인과 둘이 먹다 싸우고 헤어진 그 라면, 불광동 먹자골목 친구네 분식집에서 먹던 그 라면, 노크하고 들어온 내무반에서 북의 병사에게 끓여 준 그 라면을 먹다가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저녁시간 전쟁이었다가 간식이었다가 주식이었다가 생명이었다가 죽음이었다가 사랑이었다가 바닥 얇은 노랑 냄비 남과 북을 휘휘 저으며 후루룩후루룩 평화를 먹는다. 따발총 깨알 같은 문자가 쏟아졌다 파란 하늘을 뚫고 외로움 타는 사람들이 깨밭을 터는 가을이다 완전무장한 신상품들이 거리를 휘젓고 다닐 때마다 총기 탈취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던 시절 총기마저 잃으면 죽은 목숨이라고 했다 죽음을 무릎 쓰고 순결을 지켜온 내 몸의 유전자들이 매양 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단한 알맹이만 빼앗아간 총알로 또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이 가을 메신저피싱이 기승을 부릴 거라는 첩보가 위성 안테나 넓적 귀에 걸려들었다 춤추며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의 미세한 흔들림도 잘 살펴야 한다 저마다 따발총은 몸에 잘 붙어 있는지, 벌레가 깨죽거리며 주머니 속에 똬리 틀고 앉아 깨를 털고 있지는 않은지 에스라인 코끝을 반질반질 문지르며 깨소금만 골똘히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쯤 따발총 된통 맞고 빈 털털이 낙엽처럼 길가에 나앉아 히죽히죽 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 산에 들면 세상 다 잊을까 이른 아침 배낭을 멘다. 탁 트인 하늘만 뵈는 산속에서 푹 쉴 거라고 산 나무가 수액 떨구며 안간힘을 쓰다가 가파른 능선 오른다는 걸 오늘도 까무룩 잊고 살아가는 산 아래 사람들 어디 앞산만 산인가 칼국수 먹고 자고 나면 오르는 물가 막막함도 산이다. 그대와 내가 날마다 오르는 산 넘어 산 귀뚜리가 사는 방 돌 속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이 들어있지 조금씩 나를 죽이는 돌 속의 방 독을 받치고 있는 돌 틈에 집을 짓고 귀뚜리가 산다. 찌르륵 귀뚜리가 울 때 돌문 살짝 열면 여자가 웃고 있다 내 몸을 휘어 잡아당기는 공간으로 지하철이 지나가고 설자리 없는 돌 위에 서서 멀고 먼 장거리 여행을 한다. 찌르륵 비빌 번호가 문고리 잡아챌 때 저녁이 메뉴보다 더 일찍 식탁위에 앉아 끓고 있다 흥겨운 귀가길 안테나의 귀가 커지고 방방마다 귀뚜리가 엄지에 지문으로 남아있다 시중은행 창구에서 잔무 하던 여자가 퇴근준비 서두르고 돌 머리를 톡톡 치면 귀뚜리가 폴짝폴짝 뛰어 간다 강물 따라 흐르는 달빛 환한 내 가슴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귀뚜리가 사는 방에서 찌르륵 찌르륵 수수꽃다리 사월 어느 화창한 오후, 나무 그늘 길에 머리숱 무성한 수수꽃다리 소녀가 코를 찌르고 달아난다. 나는 얼른 그 애를 붙잡아 앞가슴 깊숙이 찔러 넣고 온종일 호수공원으로 고궁 뜨락으로 데이트하고 다녔다. 며칠이 지났을까 와이셔츠 입으려다 깜짝 놀랐다. 내 앞에 서있는 그 수수꽃다리 소녀, 앞가슴 주머니에 보랏빛 립스틱을 덕지덕지 발라 놓았다. 그날 헤어질 때 세탁소 앞 골목에서 숨 가쁘게 입맞춤한 것이 화근이다. 영문도 모르는 채 다림질하던 아내는 붉은 낯으로 어쩔 줄 모르고 나는 그 일을 하얗게 잊고 있었다. 소용돌이 물속에서 그 소녀가 내 가슴을 쾅쾅 치며 사정없이 피를 토하고 울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지만 수수꽃다리는 이미 바다로 떠났다. 흘러 닿는 곳마다 독한 핏물은 살을 뚫고 문신을 새겼다. 내 심장에 도톰한 하트 문양 수수꽃다리 수수꽃다리 수수꽃다리… 밥상 오늘은 누가 죽어서 양식이 된 걸까 날마다 밥상머리에 앉아 드리는 제사 거룩한 밥상에는 파도치는 하루가 들어있다 농부의 소금창고가 들어있다 초록 숲에 뿌리내리는 무덤 날마다 죽는 사람들의 뼈와 살이 고봉으로 들어있다 정들어 되새김질하는 너와 나의 타액이 들어 있다 삶의 고비마다 넘기는 한 숨이 들어 있다 배가 불러 죽은 몸통에서 배고파 죽은 풀뿌리가 들어 있다 울다 웃다 죽은 하늘이 다 들어 있다 우포 클럽 물갈퀴 접고 백조가 상승할 때 하늘 담은 늪 물에 세상 우울증 다 묻었다. 바람소리 물소리 입체음향 저물녘 목련꽃샹들리에 별꽃 서치라이트 환한 밤 풀벌레 오케스트라 흥얼대는 코스요리 나온다. 콩콩 뛰는 심장 소리 들으며 너털웃음 달 지배인 빵 터지게 먹고 마시고 즐기고 가라하네. 음식 나르기 바쁜 검정 옷 하얀 나비넥타이 종업원들 따오기, 댕기물떼새, 생이가래, 살사 춤추는 쇠물닭, 해오라기 자매, 꼬마줄물방개, 대칭이, 긴꼬리투구새우, 늪반딧불이, 마름, 소금쟁이, 애기부들, 창포, 개구리밥 우울증 백신 경운기 소리에 장바구니 들고 아기 업은 옥수수 아줌마 스텝 밟으면 바스락 바스락 몸이 꼬인다. 대형 스크린 늪 물 위에 춤꾼들 이슬땀 백년 묵은 멍울 풀어서 가시연꽃 피었다. 바람꽃 언젠가 네게 찾아온 바람은 산골 마을 가로등 아래에서 죽었다. 숙이네 옆 골목에서 따스한 목부터 온몸을 휘감던 바람은 창경궁 돌담 아래서 소용돌이치다가 대곡역으로 달려갔다. 대기실 벽에 부는 바람은 팔이 뒤엉켜 석고상처럼 앉아 있다. 두 송이 흔들이 시계는 마지막 열차를 삼키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다니던 숲정이가 비에 촉촉 젖고 있다 빗물에 막혀 침투할 수 없는 바람은 다시 떠돌이가 된다. 떠돌이 바람은 성철스님의 고뇌가 섞인 구름을 타고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갔다. 바람은 언제나 바람 위에 머물고 꽃이 되어 흘러갔다. 바위 적시는 어느 길 위에 바람은 꽃향기 불쑥 피우고, 또 한 무더기 봄을 머리에 이고 찾아온다. 벚꽃 장례식 나 오늘, 안산에 연도 하러 간다. 새벽 미사 반주하러 가던 길 눈 먼 트럭 달려와서 굉음 지르며 삼켜버렸다 벚꽃으로 활짝 핀 그녀의 청춘을… 청첩장을 돌리고 며칠 후 마카오로 신혼여행 떠난다고 했는데 아니, 세상에 다 피우지 못한 외동딸과 의사 사위 하늘도 무심하다고 가슴 후려치며 실신한 어머니 메마른 주름살에 붉은 핏물 뚝뚝 떨어져 꽃비내리는 장례식장 상주도 문상객도 모두 얼 나갔다. 만장 흔들며 다시 오는 봄날 그녀는 신혼여행 왔나보다 화사한 벚꽃이 되어 그리운 얼굴 보러 왔나보다 나무 발아래 뿌린 하얀 재로 화장을 하고 분홍 면사포 쓰고 왔나보다 해맑은 웃음 곱더니 하늘에서 더 곱다 바람 부는 봄날, 얼 나간 사람들과 함께 나 오늘 연도하러 간다. 안산 벚꽃 길에 꿈길 졸린 눈으로 낡은 옷 보따리 하나 들고 오후 지하철 안을 어슬렁거리는 굶주린 사자 바로 옆자리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다. 구멍 난 빨간 양말 속살이 비치는 낡은 정글화를 신고 한 가닥 굵은 울음으로 포효하던 시절 꿈꾸는 듯 살짝 어깨를 들먹이자 젊은 사내가 지하철 문밖으로 튕겨 나갔다. 순간 검은 석고상이 털썩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빌딩 숲 밀림을 내달릴 때 늠름한 모습이었을 얼굴, 둥근 운전대 옷 보따리 두 손으로 그러안고 과거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목적지를 지나쳐 길을 잃고 말았다. 미로의 길에 접어들어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다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 숨 가쁜 포클레인 거대한 상아를 이고 해체의 계곡을 찾아가는 늙은 코끼리의 신성한 귀향을 본다. 누구나 되돌아가야 하는 길을 잃고 우리는 날마다 흔들리고 있다.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고향 꿈길 안내하는 사자와 긴 강줄기를 따라 흘러가고 있다. 다 비운 젖병처럼 이따금 바람 소리 들려오고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어머니 품속일까 흔들흔들 평온한 꿈길  
32 (최순섭 시인)나의 문학관 및 약력
편집자
2545 2013-09-11
 나의 문학관 지하철을 타면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너도 나도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잠시라도 궁금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실시간 돌아가는 세상일을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가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다. 바로 옆자리 앞자리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눈 길 한 번 주지 않고 스마트폰에 몰입해 있다. 공원 벤치에서도 커피숍에서도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눈은 서로 다른 곳에 머물러 있다. 안방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가족들도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대화를 한다. 엄마와 아빠의 대화가 그런 모습이고 무리지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청소년들도 저마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시간을 보낸다.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좇고 있음에 틀림없다. 예나 지금이나 문화의 흐름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날마다 쏟아지는 정보를 뒤적이며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지식과 웃음과 행복이 다 들어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들어있고 철학이 들어있고 예술이 들어 있다. 놀이터 게임이 들어있고 신상품이 백화점보다 더 많이 들어있다.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나라까지 찾아가 볼 수 있다. 영화가 들어있고 연극이 들어있다. 시가 들어있고 소설이 들어있고 문학이 들어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무서운 일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에 중요한 것을 빼앗기고 있는 중이다.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누구의 말도 믿으려 하지 않고 궁금하면 말없이 찾아가면 된다. 생각의 기준도 그곳 정보에서 얻고 판단한다. 이제 아무도 말릴 수 없다. 너는 너 나는 나 로봇 같이 차가운 모습에 상실한 것이 너무 많다. 채우기만 하고 버릴 줄 모르는 생활에서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찾아 나서지만 정작 그 안에 내가 없다. 자연을 닮은 사람이 그립다. “친구야! 잘 있니?” 귀뚜리가 안부를 묻는다. 여름내 맹렬히 뻗어가던 초록 이파리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예쁜 빛깔로 열매를 매달아 놓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던져 주려고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았다. 자기를 비워야 새 생명이 싹트는 줄 아는가 보다. 지상의 모든 것이 흙으로 빚어 진 줄 아는가 보다. 하늘의 기운으로 세상을 쓰고 있다는 걸 아는가 보다. 최순섭 : 충남대전 출생. 1978년<시밭>동인으로 작품활동. 2007년 <작가연대> 등단. 한국문인협회, 열린시조학회. 고양작가회 감사, 창작21작가회장, 서울특별시서부교육지원청근무  
31 (권선희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739 2013-06-24
 노을 사내는 자고로 화끈해야 한다고 말끝마다 노래하던 사내, 훌라판 뒷구녕에서 개평 챙겨 가끔은 쫄깃한 슬픔도 시켜 먹었다 삶은 온통 계약 만기였으나 수천 번 구르다 보면 분명코 땡 잡을 날 온다고 배짱 하나 꼬불치고 뻥치고 등치며 머릿기름 확실하게 발라 넘겼다. 흰운동화 만큼은 눈부시게 빨아 신었다 긁으면 긁을수록 부풀어 오르는 가려운 저녁일수록 잃고 따는 법칙을 좆나게 읽었다 사내는 자고로 화끈해야 한다고 말끝마다 노래하던 사내, 시원하게 그었다 생의 카드깡 활활 붉은 손목 화끈하게 타고 있었다 편지 당신은 저기 저 녹음 속 추녀 겨우 보여주는 미소사에 잠을 풀고 나는 산하촌 여인숙에 몸을 맡겼지요 그 거리 이승과 저승처럼 닿아있어도 밤새 잡을 수 없었소이다만 아, 다행히도 혼몽 지나며 뜨거워진 영혼이 몸뚱 몰래 일어나 주더이다 나는 그 새벽 유령처럼 산으로 향하고 당신은 내려오고 그러다 샛푸른 솔향기 아래 우뚝 멈추었을 때, 그렇소 사실은 당연한 거였소 당신과 내가 아무리 몸을 꽁꽁 동여매고 따로 누워도 영혼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겨우 잠든 사이를 절대 놓치지 않았을 것이오 그리하여 결국은 지름길 가로질러 서로 반씩 달려가 민숭달팽이처럼 끈끈한 새벽을 누리고야 말 것이었소 몸튼 소나무 한 그루 아래를 스님 혹여 지나신다 해도 그 새벽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더욱 정갈한 템포로 익을 것이라 확신하오 그래봤자 꿈일 뿐이라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고 당신은 우길지 모르나 천만에, 나는 아오 이 편지만으로도 당신에게 미소사微笑寺는 더 이상 절이 아니라 새벽임을, 흐흐 방생일화 향일암에서 내려와 온양서 오신 보살님들과 셔틀버스 탔지요 정월대보름 방생법회 왔다시는데요 미꾸라지 풀고 돌아가는 길이라데요 동백나무에서 톡톡 달아나고 피어나는 꽃 보며 그러시구나 끄덕이다 가만있자 바다에 미꾸라지라, 괜찮겠냐고 물었지요 괜찮을겨유 찝찌름하니 아마도 좋아할겨유 방생放生인지 방사放死인지 공양供養인지 뻣뻣하게 죽은 미꾸라지와 훨훨 헤엄치는 파도 사이가 암만 생각해도 갸우뚱한데요 보살님 한 분 두 분 졸기 시작할 무렵, 글쎄 아홰나무 너머 고단한 남해는 왜 그리 푸르던 지요 숙주宿主 괄약근을 푼 똥꼬는 새집 같았다. 나는 비닐장갑을 낀 둘째손가락으로 살살 똥을 주웠다. 오목한 새집에서 알이 굴러 나왔다. 손바닥에 안기는 까만 어머니는 작고 귀여웠다. 낡아 허물어질 때마다 보수 기회를 놓친 몸에서 똥은 칠십구 년이나 잘 살다 완전히 떠났다. 친절한 독촉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에 오늘은 아파뜨 관리비 마감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막바로 농협에 가가 내야 하지마는 바쁘신 양반들은 뭐시 오늘 오전 중으로 여기 관리실에다 갖다 주므는 지가 대신 내 줄라카이 일로다 갖다 주시믄 고맙겠니더. 그라고 여지껏 멫 달이고 밀리가 돈이 늘어난 분들으는 다맨 을매라도 우선 갚아 주시믄 좋겠니더. 통째로 낼라꼬 미라두믄 마 자꾸 늘아가 낸중에는 감당 몬하고 그기 마캐 다 빚이 되는 기라요. 그라이까네 다맨 을매라도 쪼매씩이라도 갖다 내이소. 그라믄 내가 퍼뜩 농협에 가가 대신 내 줄끼요. 에, 에, 한성아파뜨 주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리니데이. 내가 오후에는 바빠가 여 없으이 오전 중으로 꼭 좀 갖다 주시믄 고맙겠니더. 마캐 알아 들었능교? 부적符籍 아내는 지난여름 떼로 몰려 온 우환을 겨우 치르고 삼재가 들었다는 말 한 마디에 뱀띠 부적 하나 똘똘 말아 끼운 단풍나무 목걸이 걸고 다니다 그만 잃어 버렸는데요 다시 재앙의 복판에 선 듯 불안을 안고 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떠난 밀양 어딘가에 있다는 그 절, 나 참, 대단한 큰스님이 써준 것도 아니고 십이지신마다 수십 개 수백 개씩 복제되어 걸린 불교용품점에 그걸 구하러 간 것이 한심하다가 문득,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네’ 벽에 붙은 한 구절에서 그만 붉어지는데요 눈발 뚫고 가는 그 길이 바로 부적입디다요 11월의 저녁식사 뱃공장 언덕 조광상회 검둥이 눈매 깊은 국 꾸무리한 먼 산 지느러미 조림 덕장 시누대 비늘 볶음 수평선 총총 오징어배 집어등 무침 제일 먼저 불 켠 제일교회 첨탑 위 벌건 십자가 구이 그러고도 빌어먹을, 그리움 한 잔 수장水葬 모로 누운 등 뒤에서 나를 껴안는 낯선 바다 밀고 드는 물기둥 속에서 쿨렁쿨렁 간지러운 치어 떼와 수초들이 풀려나왔다 숨죽인 귀로 눈송이처럼 터져 심해로 간 사람들과 산란을 향하는 뱀장어의 긴 유영과 검은 해류를 지나는 푸른바다거북의 안부가 흘러들었다 금빛복숭아를 들고 돌아오는 저녁처럼 비로소 붉어진 나는 눈 감은 채 젖을 무는 바다 이마를 쓰다듬었다 꼬리 떠나란다고 훌쩍 떠난 당신 족히 백 리는 더 갔을 터인데 쇳줄 끌고 빙빙 도는 검둥이 나는 뱃공장 언덕 조광상회 검둥이만 쓰다듬다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꼬리 읽고 만다 감추지 않는 속내다 버려두어 살아남은 정직한 반응이다 미안하다 핥지마라 속내 읽지 못하고 떠난 이별 탓이 아니다 증오조차 달콤하게 굴리는 흉측한 고깃덩어리 혀만을 갈고 닦은 탓이다 정작 사랑 앞에서 힘차게 흔들려야 할 꼬리 잃은 것조차 잊어버린 내 탓이다 배들이 내항 돌아 나가는 저녁 북실한 반응 차오르는 꼬리뼈가 울고 있다 봄 물장화 고무장갑 냅다 던지고 고무줄바지 낡은 버선 돌돌 말아 처박고 꽃내 분내 관광 간다 굼실굼실 떡도 찌고 돼지머리 꾹꾹 눌러 정호반점 앞에서 버스 한 대 씨바씨바 출발이다 소주도 서너 박스 맥주도 서너 박스 행님아 아우야 고부라지며 구룡포에서 하동까지 자빠질 듯 자빠질 듯 흔들며 흔들리며 간다. 매화야 피든 동 말든 동 간다. 빗줄기야 치든 동 개든 동 쭉쭉 뻗은 길 따라 죽은 영감 같은 강 따라 술 마시고 막춤 추며 씨바씨바 봄은 간다  
30 (권선희 시인) 나의 문학관 - 이기적인, 지독히 이기적인
편집자
2454 2013-06-24
 -이기적인, 지독히 이기적인 “엄마, 나 어릴 때 혹시 시인이 될 조짐 같은 거 없었수?” 오랜 만에 모녀는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별반 특이사항이라곤 없다. 유리병이 귀하던 시절 참기름을 마당에 다 쏟아 버리고는 그 병에 꽃을 꼽아 놓고 예쁘지 예쁘지 하다가 혼줄이 났다는 얘기가 그나마 감성 쪽으로 근접한 것인데 그게 어디 조짐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가. 말도 느리고 동작도 느리고 게다가 하는 짓도 야물지 못해 ‘털팔이’라 불렸다니 타고 난 시인은 일단 아니다. 그렇다고 후천적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문예반 활동 한 번 한 적 없고 독서는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그다지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복잡한 가족사나 지독한 가난 속에서 움튼 절실한 체험 또한 없었으니 그야말로 상황은 문학과 가까이 있기엔 너무 빈약했다. 학창 시절, 나는 문학일랑 저 멀리 던져두고 참 잘 놀았다. 명동으로 종로로 저녁마다 디스코텍에 출근부를 찍었다. 도끼빗으로 당시 유행하던 짱구퍼머를 최대한 부풀리고는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미팅을 했다. 학교 근처 영화진흥공사에서 초대권을 발행했는데 시사회 때마다 수업을 빼먹고 얼굴이 조막만한 배우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오만 똥멋 만을 쫒는데 청춘을 고스란히 받치던 시절이었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후기대학에도 떨어진 주제에 시집까지 가겠다고 우기던 나를 엄마는 문창과에 쑤셔 넣었다. 덕분에 몇 개의 상장과 추천서로 특별전형 입학을 했지만 내가 탄 상장들은 실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 덕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엔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정규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입학한 경우도,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예창작과를 간절히 원하고 스스로 선택한 그들은 진지했다. 나는 딱 한 번 백령도로 가는 애인을 배웅하며 쓴 시를 칭찬 받은 기억이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잠시 솔깃해서 춤을 춰대고도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글을 쓰며 살 종자가 못되는 것 같았다. 학기마다 발간하는 작품집에 의무적으로 시와 단편소설을 실었을 뿐, 신춘문예 응모나 등단에 대한 열정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모르겠다. 시가 환상적인 미래를 보장하는 기미를 보여줬다면 악을 쓰고 달려들었을지도. 학교를 떠난 지 꼭 13년 만에 시와 마주했다. 서점에서 시집을 들추거나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을 사들고 오는 일, 두어 문예지를 정기 구독하는 일은 습관처럼 진행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철저한 독자의 입장이었다. 새해 첫 신문을 펴고 낯익은 이름이 있나 없나 들여다보았는데 그 다음에 따라와야 할 부럽고, 속상하고, 배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끊어도 아주 제대로 끊었던 것 같았다. 포항에 정착하면서 만난 푸른시 동인은 내 첫 글동무들이었다. 축산에 내려와 사시던 김명수 시인의 집을 찾아가 ‘푸른시’란 이름을 짓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각자 두 편의 작품을 들고 와 토론했다. 몇 번의 동인 모임을 갖고 돌아오며 내 시쓰기가 시작조차 없었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만났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 앞에서 괜히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한 그런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왜일까. 어느 잠 못 드는 날 새벽녘 내린 결정이 구룡포 행이었다. 조금 빠른 행보로 정확하게 이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내륙에서 자란 내게 포항은 바다를 자랑했다. 특히 구룡포란 포구는 시집 한 권이 충분히 나오고도 남을 곳이었다. 가서 살면 분명 얻을 것이라 믿었다. 아침 식탁에서 낭군에게 통보를 했을 때 대답이 놀라웠다. “좋아, 당신이 나를 13년 동안 도왔으니 앞으로 딱 13년은 내가 당신을 돕지.” 결혼 후 군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2년 주기로 이사를 다녔던 고달픈 세월을 셈하였거나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말은 내 생에 다시없을 귀한 선물이 되었다. 당장 매매 광고를 아파트 게시판에 떠억 붙였다. 다음 날, 다닥다닥 붙은 광고들을 제치고 내 집을 찾아 온 부부와 바로 계약서를 썼다. 낭군은 구룡포로 근무지 발령 신청서를 냈고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는 보름 만에 전학을 했다. 내 생에 가장 추진력 있던 시절이었다. 구룡포에 들어와 본격적인 시쓰기를 했다. 돌아보면 그 무렵이 참 재미있었다. 아침마다 트롤 판장으로 활어 판장으로 나갔다. 처음엔 내가 바라 본 풍경을 썼다. 시간이 흐르자 눈인사를 건네는 이웃이 생겼다. 그들은 내가 관광객이 아니라 마을 사람이라는데 후한 점수를 주었다. 말걸기가 시작되고 난 뒤에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썼다. 구룡포 연작시를 쓰면서 운 좋게도 여러 지면의 청탁을 받게 되었다. 물론 내 시에 대한 가치보다는 구룡포라는 포구가 주는 호기심과 골짜기를 죽어라 물어뜯고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격려의 의미가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로 인해 좋은 독자도 얻었으며 오래전 함께 공부했던 동기와도 연락이 닿았다. 선배도 생겼고 후배도 생겼다. 구룡포는 떠돌이처럼 외롭게 살았던 내 가족에게도 많은 것을 선물했다. 이웃이 되어주고 먹을 것을 나눠 주었다. 시집 한 권을 묶으면 당연히 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7년 만에 ‘구룡포로 간다’는 제목을 걸고 시집을 얻었지만 나갈 수 없었다. 말씨도 사는 방식도 다른 사람들이 주던 생경함이 무뎌질 무렵, 놀랍게도 익숙함의 매력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속내를 안다는 것, 상황을 공유한다는 것, 함께 사는 것은 서로의 본질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바다가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니듯 좁은 포구에 붙박이처럼 사는 우리들의 삶도 결코 제자리가 아니었다. 그들과 내 안에는 상승이나 하강의 개념이 아닌 스멀거리는 변화가 늘상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곳에 정말 제대로 스며들고 말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시인이라는 걸 알면 주변의 지인 중 얼른 시인을 찾아내 들이민다. 아무개 아세요? 등단은 어디로 했어요? 막막하다. 많은 시인을 알지도 못하고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 공모에 응모한 적 역시 한 번도 없다. 내 시는 모두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문장술이나 독특한 발상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미리 인정한 탓이다. 아닌 게 분명한 것에 부딪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약력을 쓸 때는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 이라고 기분 좋게 쓴다. 좀 더 알아주는 문예지를 쓰지 그러냐는 의견도 있지만 그럴 마음은 전혀 없다. 그나저나 이제는 ‘포항문학’의 제호가 ‘문학만’으로 바뀌었으니 이럴 땐 어찌해야 하나 고민 좀 해야겠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가끔 구룡포를 알리기 위해 글을 써주어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다행히 양심은 남아 있는지 진심으로 펄쩍 뛴다. 솔직히 나의 모든 글쓰기는 처음부터 오로지 나를 위한 작업이었음을 고백한다. 글을 쓰는 일이 홀로도 즐거운 법을 가르쳐 주었고, 여행을 떠나게 했고, 외롭게 했고, 아프게 했다. 구룡포는 내가 사는 마을이고 내가 쓰는 글 속 무대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오히려 인세나 원고료의 10%는 내놔야 한다. 혹여 글쟁이가 하나 끼어 사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얹어지는 즐거움의 하나일 뿐. 주문한 분량을 채우느라 장황히 풀어 놓은 이야기가 난전의 좌판 같다. 요즘말로 “그냥 쪼대로 살고 쪼대로 써요.”하면 될 것을 부족한 만큼 덧칠을 해댄 꼴이다. 구룡포가 싫어지면 나는 미련 없이 보따리를 쌀 것이다. 가서 살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다. 나의 시도 분명 나를 닮았을 테니 그 또한 내가 싫어지면 떠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지겹도록 보았던 포구 한 귀퉁이가 볼 때마다 다른 문장으로 일어서는 여기 구룡포, 내가 생을 풀고 사는 이곳이 모든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 잦아지는 걸 보니 당분간은 보따리를 싸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도, 나의 시도. / 권선희 *약력 및 기타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활동 -저서: 시집<구룡포로 간다(도서출판 애지 2007)> 항해기<우리는 한배를 탔다(해양문화재단 2009)> 도보여행기<바다를 걷다, 해안누리길(도서출판 생각의 나무 2010)> 공동 르포집 <예술밥 먹는 사람들 (도서출판 눈빛 2008)> 2인 공저 다큐<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 2009)> 경북 해양 문화 속 인,생,길< 뒤안 (도서출판 아르코 2012)> 외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 사무국장(현)  
29 (남효선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1682 2013-04-10
 협객 백동수와 놀다 치장이 무에고 격식이 무엔가 틀이란 제 스스로를 옭아 매는 일 순정고문(醇正古文)이란 게 무에냐 낭떠러지를 때리며 물줄기는 제 몸을 살라 솟구치고, 나르고, 곤두박질치고, 뒹굴고, 내리꽂히는 것을 제 몸 낱낱이 모여 산천을 흔드는 장엄이 되는 것을. 생각을 옭아매지마 글을 묶지마 옭아매면 맬수록 날이 서는 게야 흐트러지는 게야 저자거리의 말을 줄 세우지마 말은 호랑나비야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나비야 말은 벌이야 제 꽃을 따라 떠도는 벌이야 문체반정(文體反正)이 다 무에야 저자거리는 온통 훨훨 날개짓으로 가득한데 세상은 저토록 분방한데 형형의 빛깔로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비가 나리고 눈이 나리고 햇살이 강물처럼 흐르고 송홧가루처럼 이야기 세상을 퍼 나르는데 패관(稗官)이 무에야 소품(小品)이 무에야 패관도 소품도 정작 자갈물린 망아지 천길 절벽을 후려치는 자유인게야, 꿈인게야. <2012.3.> 꽈리를 불다 호박넝쿨을 걷다가 아내가 다홍빛 꽈리를 한 줌 따들었다. 뜨거운 여름 내내 푸른 잎사귀를 너풀거리며 사방으로 손마디를 뻗친 호박넝쿨에 숨어 꽈리는 용케도 연보랏빛 꽃을 피우고 종처럼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아내는 꽈리를 집게손으로 조심스레 뜯고 열매를 꺼낸다. 잘 여문 앵두 같다. 아내는 열매 속을 열어 속씨를 발기고 입 안에서 오물거리며 꽈리를 분다. 어렸을 적 교문 앞에서 10원에 4개씩 하던 꽈리를 사 불었단다. 아내의 입 안에서 뽀드득하고 눈 밟는 소리가 난다. 호박넝쿨을 걷다말고 아내는 입 안에 꽈리를 오물거리며 삼십 년을 훌쩍 뒤돌아 유년으로 달린다. 뽀드득, 아내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지난다. 잘 익은 호박덩이와 함께 다홍빛 꽈리는 기숙학교로 떠나 휑한 아이 방 한켠에 걸린다. 텅빈 방안이 금세 환해진다. 아침, 텅 빈 아이 방을 열면 밤새 눈이 쌓이고 아이들 다홍빛 따뜻한 목소리로 눈밭을 뒹군다. <2009.9.> 대숲 옛날 할아버지께서 하늘로 솟아 오른 대나무를 낫으로 깎으실 때는 모두 한마음으로 깎으셨나 봅니다. 몇 밤을 세상 돌며 봉두난발로 힘주어 손아귀에 잡고 그저 사람이 하늘이라며, 애처로운 식솔들 뜨악한 눈으로 가득 눈물 머금고 대숲 아래서 어금니 모질게 물던 밤. 바람은 송곳처럼 쉬쉬 마구 달려 나갔는가 봐요. 달 없던 밤 할애비 이슬 맞고 돌아오던 날, 세상은 예전처럼 비가 내리고 대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건 속절없는 바람 발뿐, 어쩌다 그 손주 놈 세상 살아남아 대숲 아래서 낫 들고 대쪽을 다듬었습니다. 이날도 예전처럼 바람은 웅성거리고 바람이 흘리고 가는 흉흉한 소문들만 댓 닢 위에 수북이 쌓였습니다. 청람빛 대쪽 끝에는 그저 투명한 맑은 빛이 고이고, 이따금 쌀죽이나 보릿죽 냄새가 묻어 나왔습니다. 흰빛을 뿌리며 날카롭게 다듬어지는 대쪽을 보며 손주 놈은 할애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철마다 지천으로 꽃망울 터트리는 이 땅, 할애비 묻힌 이 땅에 대쪽보다 더 뾰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88. 10.> 모기떼 예성강을 건너서 왔다. 바람을 뚫고 모진 비모래 뚫고 왔다. 숨죽이며 밤을 타고 걸었다. 비상의 방법을 몸에 익힌 아래 적막의 불빛만 자욱한 수 만 개의 포충망을 피해 그리운 피톨의 진한 향내에 촉각을 세우고, 멀리 울창한 별 숲이 드러누운 긴 강을 만났다. 끝없는 몸놀림에서 비로소 울음을 토할 수 있었다. 아직은 낯설은, 두고 온 피톨의 냄새와 흡사한 알싸한 취기로 긴장이 풀린 육신을 수습 할 수 있었다. 일어나리라. 두 손으로 그리운 피톨 속 잠행을 하며 심장 가득 채우리라. 어질한 향내에 코를 박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차가운 먼지로 날릴 때까지. 이렇듯 잠행의 분별없는 수소문으로 가득 가득 진한 향내 채우리라. <1988.6.> 밥상 된장을 푼 배추국을 얹은 아침밥상을 놓고 아내와 뎅그마니 마주 앉아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는다. 지난 정월에 담근 된장이 제법 맛이 난다 아침밥상에는 이면수도 한 토막 올랐다 옛날, 강릉 사는 최 부자가 이면수 껍질 맛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날렸다는 물 좋은 이면수다. 연탄불에 노릿하게 구은 이면수 속살이 달다 아내가 속살은 접시 한 켠에 미뤄놓고 이면수 머리를 젓가락으로 헤집다가 도저히 자신이 없는 듯 빈 접시에 슬그머니 올려 놓는다 다시 아내는 빈 접시에 버려놓은 이면수 머리가 못내 아쉬운 듯 마른 침을 꿀꺽 다시며 젓가락으로 머리를 집어 들었다가 빈 접시에 도로 놓는다. “할머니는 이면수 머리를 잘근잘근 깨물며 참 맛있게 자셨는데” 하며 아내는 이면수 머리에 곁눈질을 또 놓다가 슬쩍 고개 들어 안방 벽에 걸린 외할미 영정을 쳐다 본다 다섯 해 전에 세상을 버린 외할미는 부엌 장작불에 노릿하게 구워 낸 이면수 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지아비를 거두고, 딸의 핏줄을 일으켜 외손주 셋도 도맡아 키웠다. 아흔 셋에 세상을 뜬 외할미의 배냇 이빨은 그 흔한 충치하나 없이 말끔했다. 소주병을 이빨로 척척 따내시던, 외할미는 외손주 셋, 지아비와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살점은 모두 발겨 외손주를 거두고 늦도록 밥상머리에 혼자 앉아 이면수 머리를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잘근잘근 씹으며 못내 손가락도 빠시며 참 맛나게 자셨다. <2012.3.> 서설(瑞雪) 경칩에 눈이 내렸다. 예고도 없이 내린, 보기 드문 함박눈이다. 밀려오는 봄기운을 버팅기듯 온 산천을 눈꽃으로 매달았다. 한풀한풀 벗어 던지며 마침내 은박지처럼 눈부신 속치마로 겨울을 덮고 봄을 받는다. 하얗게 달아오른 산천이 속살을 열고 생명수를 잦아 올리자, 개울이 풀리고 금세 개부랄꽃, 노루귀, 변산바람꽃이 솜털을 나풀거리며 꽃을 피운다. 뭍과 함께 바다도 열렸다. 서설(瑞雪)이 억센 바다의 등짝을 두들기자, 몸을 뒤채이며 바다는 한꺼번에 생명을 토해낸다. 진저리니, 토박이니, 말치니, 미역이니, 송곳나물이니, 국수말 따위의 바다나물이, 바다 밑바닥 혹은 갯바위에 단단히 뿌리박고 길게 목을 뽑아 올려 바다를 헤집는다. 음력 이월 초하루, 갯가 아낙들은 바람과 종자 신 영등할망이를 부르며 소지를 올렸다. 한 보름 내내 바다를 달구었다. 바다는 비릿한 봄내음 풀풀 날리는 여자들 판이다. <2012.3.> 與民樂 오늘 못 팔면 내일 팔면 되는 거여. 애간장 탈일이 무에 있어. 집에 가면 마누라가 있어 자식새끼가 있어. 한 평생 이래 살아도 남의 주머니 넘본 적은 눈꼽만큼도 없어. 오늘이 설 대목장이라 울진장도 이젠 한 물 갔네. 옛날이사 좋았지. 약초 닷 단 묶어들고 전 펼치면 한나절도 안돼 술청에 앉았지. 돼지국밥 말아놓고 소주 한 잔 부으면 창자 속이 찌르르하니 근심은 봄눈 녹듯 사그라들고. 다음날이면 통리 장에서 전 펼치지. 인심은 통리 장이 젤이라, 석탄백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탄가루 풀풀 날리며 한 평생 곡괭이질 막장인생들이지만 인심 하나는 땅같은 사람들이제. 한 때는 눈 맞춘 대폿집 아낙도 있었는디. 한 삼 년 루핑 지붕 아래서 한 솥밥도 먹은는디. 다 부질없는 짓이라. 나이 칠십이 후딱 넘어 달을 쳐다보면, 시큼한 막걸리 냄새 솔솔 풍기며 가슴팍 파고들던 살집 실팍한 아낙 생각이 후딱후딱 나기도 해. 본시 오래 발 못 붙이고 사는 인생이라 발길 되돌리던 날 왠 달빛은 그리도 환하던지 달빛처럼 이어진 산길, 외줄기 산길 타면서 한사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네. 길은 가물가물 달빛만 그득했네. <2011.5> 외가(外家) 그날도 할미는 구들장을 들춰 색 바랜 지전들을 꺼내셨다. 검버섯이 신열처럼 후두둑 불거지는 지전 보다 얇은 손등을 건너 세월만큼 죽음이 얽혀 있었다. 인공 때던가, 할미는 그 손으로 감옥소를 드나들며 지아비의 밥을 날랐단다. 그저 산목숨이면 이쪽저쪽이 무슨 소용이시냐며 찬 서리를 털 듯, 지난 일을 생각하면 손끝부터 저려 오신 단다. 흐르는 게 물 뿐이랴. 궁상처럼 목숨도 흘러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외손주 바램없이 기다리며, 구들장 한 잎 한 잎 지전을 쌓는다. 할미는 접힌 지전을 알뜰히 펴시며 지아비를 빼앗아 간 전쟁을 떠올리실까. 유복자 딸자식의 피를 일으켜 세운 외손주의 이마, 지아비를 뵙는 듯 두 눈을 감으시는 아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할미의 앙가슴 밑바닥엔 눈물이 말라 타는 논바닥처럼 턱턱 골이 패였을까. 저무는 외가의 오랜 기왓장을 두들기며 쏴사사아 대숲이 울었다. <1988.11> 임진년 섣달 열아흐레 아흔세살 난 배롱나무 밑둥을 뭉턱 자르고 싶었다. 할애비가 열여덟 살림나던 해 본가에서 옮겨 심었다는 일곱 살 모자라는 백년 살이 배롱나무 도끼질로 뭉턱 자르고 싶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나이 들어 한 해 두 해 늙어간다는 게 이토록 가질게 많은 것인지 이토록 지킬게 많은 것인지 쉰 몇 해를 살아오며 그저 아흔 세 살 난 배롱나무처럼 어김없이 제 때를 기다려 붉은 다홍빛 꽃을 피우고 나이만큼 퍼트린 가지 땅으로 늘어뜨리며 봄날 연록의 새순을 내밀고 무성한 잎사귀를 다는 것 인줄 알았다. 임진년 섣달 열아흐렛 날 날 선 도끼 움켜쥐고 처연하게 서 있는 배롱나무 밑둥 뭉턱 잘라내고 싶었다. 내 꿈속으로 들어와 내 가슴을 키우던 배롱나무, 저 처연한 내숭덩이 뭉턱 쳐내고 싶었다. <2012.12.> 讚 몽유도원도 안평의 흰 도포자락이 바람에 날린다 팽년이 바투 어깨를 나란히 걷는다 절벽으로 이어지는 걸음이 가볍다 솔향이 바람을 흐트린다 가슴 속이 솔내음으로 가득찬다 안평이 휘청, 몸이 기운다 팽년이 얼른 손을 뻗친다 두어마장 쯤 뒤로 숙주와 최항이 너풀너풀 안평을 따른다 수 백 구비 조도잔(鳥道殘)을 돌아 외줄기 샘을 만난다 엎디어 단숨에 물을 마신다 허트러진 상투 끝이 물빛에 어른거린다 복사꽃 몇 잎 물길을 흐른다 문득 고개를 드니 복사꽃비가 하늘을 수놓는다 자하(紫霞), 복사꽃잎이 붉은 안개를 피워올린다 아이들 복사꽃비를 쫒는다 아비들 잠뱅이 걷고 밭을 간다 어미들이 뜯는 나물 내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마득하다 뒤 돌아 보니 울울첩첩 조정은 아마득하다 숙주와 최항이 손을 휘저으며 헐떡헐떡 쫒아오다가 안개 너머로 되돌아선다. 훅, 바람결에 비릿내 그득하다 되돌아 나오는 길, 새발자욱 좇아 천길 낭떠러지로 고꾸라진다 몽상이다. 줄줄 식은 땀이 흐르는 적삼 깃에 복사꽃이파리 한 점 핏빛이다. <2011.9>  
28 (남효선 시인)문학관 및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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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 2013-04-10
 문학관 남효선 아흔살 화전농꾼의 신산한 삶 스무 몇 해 전에 문단이라는 곳에 처음 얼굴을 내밀고 난 그 해 구월에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작은빛내마을’에서 여든이 넘은 화전농꾼 어른을 만난 적이 있다. 울진지방 민속조사 조사 차 들렀던 참이었다. 처음 발을 들여놓은 소광리 ‘작은 빛내마을’은 하늘을 온통 덮고 있는, 울울창창 송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하늘을 받치듯 곧게 뻗어 온통 솔숲을 이루고 있던 소나무가 최근 ‘금강소나무’로 각광받고 있는 ‘황장목’이었다. 황장목은 조선조 정부가 황장봉계를 지정하고 엄격하게 관리하던 국가관리 소나무 숲이다. 솔향만 가득한 첩첩산중에서 평생 화전을 일구며 벙어리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화전뙈기 어른을 만났다. 어른은 안태 고향이 영월 ‘꼬치바우’라 했다. 겨우 제 어머니 얼굴을 기억할 무렵에 소광리 ‘작은 빛내’로 양친을 따라 들어왔다고 했다. 여기서 평생 화전을 일구며 같은 마을 화전농꾼 달과 결혼해 삼남매를 낳아 두 딸은 대광리 ‘큰 빛내’마을로 시집보내고 하나 뿐인 벙어리 아들하고 살고 있다 했다. 팔십 평생을 화전농꾼으로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어른의 눈빛이 황장목 솔숲을 흐르는 작은빛내 무구한 맑은 빛처럼 잔잔했다. 그 기억을 스무 해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팔순 화전농꾼이 들려주시는 신산한 삶은 작은빛내 속살을 퍼올려 울리는 천상의 소리였다. 화전농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야기에 묻어 나오는 소리와 향내로 머리가 빙 돌며 아득해졌다. 아득함은 이내 작은빛내 마을을 평생 가꾸고 지켜온 화전농꾼들의 땀 냄새로 가슴 가득 밀려왔다. 태어난 곳에서도 마저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산으로 쫒긴 화전농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땅의 또 다른 핍박과 수탈이었다. 이들 화전농꾼들이 평생 산을 가꾸고 평생 산을 지켜 온 ‘산의 질서’이자 ‘산의 경관’이었다. 스무 해가 훌쩍 지난 어는 여름 날, 소광리 작은빛내 마을을 찾았다. 스무 해 전 화전농꾼의 안부를 물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한줄기 바람이 황장목 솔숲을 흔들며 지나갔다. 평생을 함께 해 온 할미가 세상을 버릴 때처럼 초겨울 산바람이 금강솔숲을 흔들던 날처럼 솔바람이 일던 날 세상을 뒤로 했다는 ‘화전 농꾼 칠구 영감’이 일구는 바람소리였다. 화전농꾼 칠구영감의 평생은 ‘생의 마감’이 아니라 ‘산이 물려준 질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또 하나의 산의 경관’이었다. 작은빛내를 한참 걸어 솔숲을 벗어나는 내내 칠구 영감의 바람이 내 가슴을 쓸었다. 남효선 경북 울진서 태어나다. 1989년 「문학사상」시 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가다. 동국대학교와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공부하다. 시집으로 「둘게삼」과 사화집으로 「길 위에서 길을 묻다」「눈에도 무게가 있다」등 다수를 펴냈다. 「도리깨질 끝나면 점심은 없다」「남자는 그물치고 여자는 모를 심고」등의 민속지를 펴냈다. 안동 참꽃문학회와, 울진문학회,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에서 활동하다.  
27 (권천학 시인)대표 자선작 10편 imagefile
편집자
2588 2013-03-11
 동물의 피 ─나는 아직 사과 씨 속에 있다 權 千 鶴 모두들 충혈 되어 있었다 야적장의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도 동물성의 피를 가진 사람들과 광물성의 쇠붙이들이 날뛰었다 이 세상은 그들먹하게 떠들어대는 한 판 술자리 같고 동물성의 피와 광물성의 잡쇠들이 서로 얽혀서 있지도 않은 우라늄 광맥을 찾아다니다가 죽어나가는 젊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황산의 나비들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17 權 千 鶴 눈만 감으면 출렁거린다 김제평야의 드넓은 나락 밭 위에서 부황 뜬 시절을 지낸 유년을 살찌우던 가을이 출렁거리고,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은 들판으로 나가 독새기 풀씨 받으며 타넘던 논두렁 잡풀도 그렇게 명(命)을 이어주던 한때의 시절이 출렁거리고, 양조장집 식구(食口)통에 줄 선 동네 사람들 술지게미의 취기로 허기를 달래던 시절이 비틀비틀 출렁거리고, 동리마을 성머리 아름드리 정자나무 아래 정갈한 모시옷 차림으로나앉아 온종일 말없이 먼 하늘만 바라보시던 고성할배의 단아한 모습이 먼 바다 빛으로 출렁거리고, 김제(金堤) 읍내로 가는 재빼기 너머까지 춘자(春子) 따라갔던 어느 해 봄, 아지랑이 덮씌워진 산을 헤매다 진달래 한 아름 안고 벌겋게 꽃물이 들어 돌아온 어스름 저녁, 회초리 든 어머니의 눈빛마저 물들이던 꽃빛깔이 출렁출렁 노랑나비 봄꿈 꾸는 공자리 밭에 들어가 꽃모갱이 꺾다 놓쳐버린 풋내 나는 꿈들이 부화한 황산(黃山)의 나비들, 지금도 가끔씩 나풀나풀 꿈에 나타나 노랗게 노랗게 빈혈 일으키며 사는 내 중년을 출렁이게 한다 괴테의 과수원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57 權 千 鶴 중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부용(芙蓉)집 담 넘어 반월리(半月里)로 굽어지는 괴테네 과수원 탱자 울타리에 밤새 내려와 집을 짓고 등을 밝히던 별들은 날이 밝아도 떠날 줄 모르더니, 수밀도(水蜜桃) 익어가던 복숭아나무 아래 앉아서 떠나버린 통학열차가 유강리 쪽 모퉁이로 돌아설 때 꼬리 흔들어 내던 기적(汽笛) 소리 들으며 두근두근, 늘 안부가 궁금한 괴테를 꿈꾸며 소설을 구상하던 소녀시절을 소설처럼 끌어안고 있는 덧없는 세월의 가시, 하얗게 하얗게 덮어주는 탱자꽃 구름처럼 일어나는 이 흔들림이, 가시에 찔린 상처에 접시꽃잎 말려 붙이던 추억이, 지병(持病)이 된 두통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것을 찻잔에 동동 떠오르는 쑥부쟁이 꽃잎차를 마시는 중년의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괴테의 과수원엔 지금도 눈이 내릴까 제재소 옆을 지나며 * 權 千 鶴 속살의 아픔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한 생애를 뭉턱뭉턱 잘라먹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나이테 속으로 얇게 얇게 저미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무너진 몸뚱이의 옹이를 파내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죽지 못한 가지들을 쳐내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바로 서게 하는 기둥으로 바로 눕게 하는 널빤지로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속살이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생애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분노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옹이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산보다 높은 희망이 되어 한 그루 소나무로 한 자루 톱날로 유명한 무명시인 * 權 千 鶴 시인 초년병 시절, 한 선배 시인에게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말했다 '니가 뭘 몰라' 묘하게 웃던 선배는 그 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이 주렁주렁해졌다 그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도 '중견'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붙여지는 은둔과 칩거의 무명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무명으로 남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무명’은 이루었지만 아직 유명을 이루지는 못했다 내가 한 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유명해지는지를 몰라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하지만 주렁주렁한 이름 대신 시가 주렁주렁해 지는 일 더 어려운 그 일에 매달려 여전히 고집 부리듯, 변명하듯 세상의 변두리에서 외롭게 살며 아직도 덜 뜬 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아직도 덜 뜬 나의 눈을 닦아내곤 한다 탄천(炭川) -한강5 權 千 鶴 소문난 재주와 꾀로 염라사자를 속이고 속여 삼 천 갑자를 살고도 부족한 명줄 더 잇고 싶어서 중국을 떠나 조선으로 도망쳐온 동방삭이, 번다한 서울을 피해 경기도 땅 용인 근처 어디쯤에서 숨어살고 있었겄다 뒤쫓아 온 염라사자, 사람 많이 나다니는 길목들을 지키며 염탐을 하다 보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느 화상이 동방삭이인지 알 길이 없는지라, 고심 고심 궁리 끝에 동방삭이 놈 걸어 넘어뜨린 꾀 하나 떠올라 무릎을 쳤겄다 그 날부터 서울사람 용인사람 다 지나다니는 길목 냇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하릴없이 숯을 빨고 있었으니 오가는 사람마다 하 이상해서 이유를 물을라치면 ‘숯을 하얗게 하려고 빨고 있는 중이오’ 하고 천연덕스럽게 던지는 대답에 아리송해지는 사람들, 그 때 마다 고개만 갸웃둥 그러던 어느 날, 제법 똘똘해 뵈는 길손 하나 지나다가 그 광경을 보았는지라 그 역시 염라사자 하는 짓이 야릇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겄다, 가던 발길 멈추고 까닭을 물어본즉, 염라사자 능청스레 똑같은 대답을 했겄다 “숯을 희게 하려고 빨고 있는 중이니 귀하께선 괘념치 마시고 가던 길이나 가시지오”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힌 길손 왈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혼잣소리처럼 하고도 참을 수 없어 “내가 삼 천 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희게 하려고 냇물에 빠는 어리석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거들먹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덜미 잡힌 동방삭이 그제야 염라사자에게 잡혀 저승으로 끌려갔으니, 재주와 꾀를 재주와 꾀로 덮어 가리며 헛된 망상의 탑을 쌓느라 혈안이 된 서울바닥 어디에선가 지금도 누군가 열심히 숯을 빨고 있을 것이고, 쫒고 쫒기는 놀음판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또 누군가, 개미지옥 즐비한 함정의 도시에서 열심히 제 꾀에 넘어가 무너지고 있으려니 신 놀부 타령 -놀부의 넋두리 權 千 鶴 얼쑤, 세상 사람인심 좀 보소! 속절없는 여름비에 옷 적실 내 아니지만 이런 답답한 경우가 있나? 배운 것 없어 증권투자 넘보지 않고 봇장 없어 땅 투기 꿈도 꾸지 않았는데 놀부 심뽀가 어떻다고? 얼쑤, 잘 돌아간다! 사사건건 속 보이는 조작놀음 숫자놀음에 놀아난 바 없고, 그 흔한 복권이나 딱지 한 장 손에 쥔일 없는데도 까닭 없는 뜬소문으로 밀어붙이고 잔가지에 이는 바람 홍수에 물 불어나듯 하는 세상이고 보니 이만한 처지면 노류장화(路柳墻花)에 화초첩(花草(妾) 두엇 쯤 거느릴 법함을 자타가 인정하겠지만, 내 본디 천성이 맑아 누대(累代)에 걸친 가풍을 더럽히지 않고자 아예 두문불출, 화초장 등에 지고 입심 굵은 마누라와 심심파적 소일하는 터 일찌거니, 내 분수 알아채고 제법 한다하는 사람들이 써먹는 말로 마음 비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내 이름자에 타고 난 운수대로 살면서 사주팔자에 실리지 않은 자식 탐내지 않고 친척 인척 줄줄이 늘어서는 꼬락서니 보기 싫어 하나 있는 혈육마저 정갈하게 다스리는데 어라, 세상 사람들로서 제 집 기둥뿌리 썩는 줄 모르고 남의 말 하기 쉬워 함부로 내 말하니 이 아니 답답한가 사람 먹는 음식에 독(毒) 넣어 놀부밥 만들고, 아무 데나 시커먼 매연과 고약한 냄새 뿜어내고, 안 보이는 곳에 스을쩍 폐수(廢水)와 정액(精液)을 빼내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치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고도 누가 감히 놀부 심뽀 들먹여? 나 이래 봬도 이름 빙자하여 국록(國祿) 빼돌린 일없고, 권력 휘둘러 거둬들인 거 없고, 금박(金箔) 명함으로 겁주고 기죽인 일없고, 골프 폼 잰 일없고, 고스톱 판에는 끼어 든 일없는 보통양반으로, 바라건대, 더도 덜도 말고 물려받은 유산 온전히 간수하려는 것뿐, 굳은 땅에 물괴는 이치 왜들 올라? 내게 흠이 있다면 제비다리 분지른 정도인데 그야 털어 먼지 적당히 나야 제격인 요즘 세상에 너무나 인간적인 모양새 아닌가베, 그만한 배알도 없으면 어찌 놀부로서 체면 유지가 될꼬, 혀서 무책임하게 퍼지르고, 힘 안 들이고 호박이 넝쿨 째 굴러오길 노려 남의 눈치 살피며 손바닥 비벼 만두 잘 빚어내고, 눈물 콧물 짜내며 굽신대는 기회주의자 흥부놈 처세에 비하면 백 번 낫지 암, 낫고말고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데, 얼쑤! 아니리 춘향가 -춘향 3 權 千 鶴 소문이란 본시 믿을 게 못 되는 것 어둡고 때 낀 과거를 지울 수 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해서, 각색하여 퍼트린 자전적(自傳的)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줄이야. 요새 같으면 저작권 수입만으로도 짭짤할 텐데…… 하여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에 방울을 달고…… 내 친구 애랑이 고 기집애 장난기가 좀 심해서 탈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교 있어 그 바닥에서 주가 올리다가 얼굴값 하느라고 <베비장전> 주연자리 따내어 영화판에 나서더니 요샌 국제영화제 진출을 노린다하고 천박하고 약아빠져 하는 일마다 눈총 받는 일만 골라하던 밉살댕이 추월이 고년은 눈총? 흥! 콧방귀로 밀어붙이고 화냥기 밑천 삼아 희번득 요사부리며 열쇠고리 쩔렁이더니 제 버릇 개 줄 리 없다고 요샛날 영동으로 옮겨 앉아서도 생긴 대로 놀면서 그저 수표에 박힌 동그라미 숫자만 꿰어내느라 눈알이 시뻘겋다니 쯧쯧, 혹시 히로뽕은 안 쓰는지 몰라 아무리 그렇고 그런 판이라 해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야 하거늘 이그! 정나미 떨어져 머리에 든 게 많아 제법 고상하게 놀던 황진이 가슴 또한 유난히 깊어 보기 드문 멋쟁이 지성인이 됐지 걘, 가야금 잘 타던 솜씨로 사내 어우러 타는 솜씨 또한 뛰어나나 송곳 같은 정에 약한 것이 흠이 되어 못 견뎌 지는 마음 원고지 칸칸마다 꼭꼭 쟁이더니 나와는 노는 판이 달라 얄밉긴 하지만 지금도 이불 속으로 시냇물 소리 끌어들여 밤 허리 적시고 가야금 줄마다 문장 풀어 얽어매고……. 가끔씩 시 낭송에도 불려 다닌다지 아마 또 있지 빠트려선 안 될 내 친구 요절해서 가슴 아프게 한 논개년말야 하기사, 가끔 보면 일찍 죽어 빛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더라만 사주마다 개가 끼어 어려서부터 개라 불리더니 끝내는 웬수같은 왜장 새끼 물어뜯고야 말았으니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 내 친구 중에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그깟 죽고 사는 게 어디 대순가 요샛날 살아서도 죽은 목숨으로 뵈는 개뼉다귀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죽어서도 살아있는 논개가 개 같은 세상에 사람 같은 사람이지 남 얘기 해 놓고 내 얘기 안 할 수 없어 털어놓는 얘기지만 나 춘향이는 내세울 게 하나 없는 얼치기 반쪽 양반으로 태어날 때부터 한이더니 불우한 어린 시절 맺힌 설움만으로도 한 짐인데 출신성분 독하게 따지는 세상에서 내림기생이라니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 어둡고 때 낀 세월을 지울 수 만 있다면 조상 묘자린들 못 팔아먹을 까 남 설움에 내 설움 실어 우는 사람 마음 다 한 가지로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한 마디로 내 출세는 덩달아 춤추는 세상 덕이 반이고 나머지 반의반은 터트려 준 매스컴 덕, 터졌다 하면 와 몰리는 무리들 곧잘 따라 웃고 따라 우는 순진한 사람들 애간장 노려 도화선에 불붙이듯 살짝 건드려 준 것뿐인데 꼬리에 꼬리에 거품을 물고, 꼬리에 꼬리에 바퀴를 달고…… 시끌벅적한 세상 정치 문제 노사문제 게다가 교원노조까지 들어 가뜩이나 지친 사람들에게 달짝지근한 연애얘기에 눈물 살짝 발랐지 뭐 친정식구 같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본디 찬스 포착에 강하고 연극에도 소질 있던 나 춘향이 아닌가 속으로 칼 갈며 때만 노리던 터에 운 좋게도 꽃다운 나이 때맞추어 바람기 있는 미스터 리를 만났으니 그 또한 왔다였지, 솔직히 말해서 출세 싫은 사람 있을까, 속보이는 소리 그만들 하라고 혀! 적당히 주무르고 삶아서 신분조장부터 받아놓고 그네 줄 밀고 당기듯 사내 속 녹여내는 연출에 열정을 다 쏟아 열녀라는 덧 이름까지 이력서에 새겨 넣었으니 그게 다 속 두고 한 짓이라, 은근 슬쩍 미스터 리 뒷대 눌러가며 받아둔 문서 덕으로 일테면 난 기상출신 VIP가 된 셈이지, 이만하면 나도 이 바닥에서 썩긴 아까운 인물이라 요즘 것들은 몰라 눈에 뵈는 것밖에 젊은 날의 모험적인 활약으로 지금은 제법 그럴 듯한 네임벨류 지니고 살면서 한 자리 하고 있는 내 남편 이 서방에 걸 맞추느라 여가선용 삼아 사회활동도 적당히 하는데 그 중에 지난날의 행적이 적극적인 여성상으로 평가받아 여권협회에도 고문 격으로 앉아서 간간이 신문에 얼굴도 내밀고 남편의 내조도 반들반들 해내는 데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이라 살기 이만 허니 아무도 모르는 야무진 꿈 또 하나 갖게 되었으나 아직은 말하기 좀 곤란해 사람팔자 시간문제라고 그깟 베스트셀러 작가로 머물 순 없고 내 친정 식구 같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말야 저어……. 거시기……. 있잖아……, 하여튼말야 내 실력쯤이면 누구처럼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서 감당 못 할 만큼 저질러놓지도 않고 촉새 마냥 낄 데 안 낄 데 마구 끼어 드러나게 미움을 사지도 않을 것이며 적당히 품위 유지해 가며 아니 기가 막히게 날 한번 해 볼 텐데, 끝내 주게 잘 해서 요게 진짜 <춘향전> 주인공이다 하고 꽝 터트릴 텐데…… 춘란(春蘭) 향기 한번 기차게 뿜어볼 텐데…… 오늘 밤 퇴근해 온 남편 또 한 번 주물러 놔야지 춘향이의 입덧 -춘향 2 權 千 鶴 이게 꿈은 아니겠지? 향단아 간밤에 불불새 한 마리 품안으로 날아들어 둥지를 틀더니만 그 고운 깃 속에 알을 품더구나 산그늘에 젖는 언덕배기 휜 길 소나무 숲에 지는 석양을 걷어내며 히끗히끗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더라고?! 정녕 아카시아 꽃은 아니겠지, 향단아 쑥대머리 꺾어 젖히며 풀어놓는 동편제 한 가닥 바람결에 들리더란 그 말 그만 두자꾸나 황사바람 저 켠에 더디 오는 봄 진저리쳐 지는 꽃 피고 있을 테니 그만 두자꾸나 향단아 꽃 진 자리마다 이글거리는 입덧 맺힌 열매 영글리는 여름 오고야 말테니 그대 오시려나 -춘향 1 權 千 鶴 그대 오시려나 젖은 내 눈물자국 위로 그리움 가득 품어 안고 휘어지는 요천수 푸른 물결을 건너 그대 오시려나 오색실 엮어 매어 놓은 그네 빈 바람에도 흔들리는 내 열 아홉의 뜨락으로 해질녘 땅거미 등을 타고 그대 오시려나 그리움은 끝도 없어 밤마다 키우는 외로움에 움이 돋고 달빛 머무는 들창 너머로 숙고사 치맛자락 쓸리는 그리움은 끝도 없어 걷어붙인 옷소매 다홍 끝동에 물색 고운 비단 수 원앙 옷고름 뜯겨진 자리에 은장도 칼날 번뜩이는 새벽을 지나 햇보리 이랑을 넘어 그대 오시려나  
26 (권천학 시인) 나의 문학관 및 걸어온 길 image
편집자
1961 2013-03-11
 <걸어온 길> 나의 문학DNA * 權 千 鶴 나의 문학역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나의 문학이 시작되었을까? 한참을 더듬어나가야 할 것 같다. 나의 문학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지니고 있던 상상력과 DNA의 합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나의 상상력은 발동했을까? 그것들이 어디서부터 합성되고 발효되었을까? <식물성의 시> 삼십여 년 전,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상가에 있는 꽃가게? 아니면 광화문 옆 골목의 꽃가게? 그곳에서 나의 감수성이 터졌는지도 모른다. 서울살이를 처음 시작하던 삼십대 무렵, 서울을 오르내리던 중, 우연히 터미널 지하상가로 내려가게 되었다. 구질구질한 통로를 빠져나가는데 어디선가 나는 상큼한 냄새. 그 냄새에 이끌린 곳은 울긋불긋 화려한 꽃들이 가득한 꽃가게였다. 꽤 큰 꽃가게 서너 개가 나란히 있는 그곳은 겨울의 한복판인 바깥세상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서울이란 이런 곳이구나! 서울도 내가 살던 시골과는 완전 딴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부터는 지상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리면 일부러 지하로 내려가 그 앞을 지나곤 했다. 그런 어느 날, 그 곳에서 꽃향기보다 더 상큼한 향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꽃가게에서 상록수와 꽃가지의 가지와 잎들을 쳐내며 화환을 만들고 있었다. 그 순간, 파바박! 천둥이 지나갔다. 앗! 피 냄새! 촌뜨기인 나의 기억 속에 탄알처럼 박힌 것은 코를 통하여 맡은 나무의 피 냄새였다. 식물의 피 냄새가 이토록 향기롭다니! 서툰 서울살이를 하면서 자주 들랑거리던 광화문 거리. 시인협회에 드나들던 어느 날, 광화문 그 거리 모퉁이에서 또 그 냄새를 맡았다. 냄새를 따라갔다. 동료시인의 약국근처에 있는 화원(花園)이었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탄알처럼 박힌 그 냄새를 다시 맡으면서 드디어 나는 ‘식물성의 시’를 구상했다. 식물성의 시, 초록비타민…… 화두가 되어 내 속으로 들어와 자리잡았다. 식물성의 시, 초록 비타민, 비타민, 나무, 바다, 사막…… 끊임없이 내 속에서 발효하고 있었다. 나중 일이지만 결국은 나무테마시집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가 나왔고, 시문학에 일 년 간 연재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이 되었다.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는 원래 초록 비타민의 한 갈래로 나무를 테마로 삼아 내 안에서 발효 중이었는데, 마침 학도병으로 참전, 포로병이 되어 북한의 탄광에 억류되었다가 45년 만에 서해안으로 탈출해온 조창호씨의 생환이 터트려준 계기가 되었고, 1995년, 시문학에 일 년간 연재한 바다연작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은 꾀까다로운 나의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제작년(2011년)에야 시집으로 출판하게 되었고, ‘문학마실’에서 소개해 준 바 있다. 나의 모든 시의 주제는 ‘초록비타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시가, 초록비타민이길 바라고, 식물성의 시 쓰기를 고수하고 있다. 나의 문학, 나의 시 주제가 초록비타민이길 바라는 ‘식물성의 시 쓰기’는, 싱그러운 식물의 피 냄새와, 나무들의 줄기를 타고 사락사락, 소락소락 오르내리는 물소리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나싶다. 물소리를 찾아가려면 이전에 살던 부용(芙蓉)시절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부용(芙蓉) 시절> 지금은 김제시가 된, 김제군 백구면(白鷗面) 월봉리(月鳳里), 행정구역으로는 월봉리였지만 마을 이름은 부용(芙蓉)이었다. 당시 어린 나는 유난히 새가 많은 우리마을의 주소에 내 이름를 결부시키며 헛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권 천 학, 權 千 鶴. 백구(白鷗), 월봉(月鳳), 그리고 부용(芙蓉)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이름과 잘 어울리지 않는가. (후후후,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익산시(구 이리시)에서 와이셔츠 공장을 운영하시면서 동시에 김제군에 속하는 부용에서 정미소와 제재소 그리고 양계장을 운영하셨다. 익산시의 와이셔츠 공장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와이셔츠 만드는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된 막네 삼촌의 요청으로 시작했던 만큼 관리를 거의 막네삼촌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아버지는 부용의 정미소와 양조장, 제재소에 주로 매달리셨다. 중학교2학년 때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익산시의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주말이 되면 부모님이 계시는 부용집으로 와서 보내곤 했다. 나중엔 아예 부용집에 고정으로 살면서 익산시로 기차통학을 하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다녔다. 부용(芙蓉)은 과수원이 많은 마을이었다.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친구와 함께 이른 아침의 과수원에 서 있었다. 사락사락, 소락소락, 나무줄기에서 물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가 들리냐고, 나를 이상하다고 핀잔주던 친구가 한없이 답답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마치 신들린 아이처럼 이른 새벽이면 이웃 과수원으로 스며들곤 했다. 안개 자욱한 새벽, 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의 시간에 나무의 줄기에 귀를 대고 소락소락 물 오르내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슬에 젖은 옷자락을 여미며 고양이걸음으로 살금살금 돌아오다가 엄마에게 걸려 된통 야단도 맞았다. 그때부터 나의 사춘기였던 모양이다. 물오르는 소리 외에도, 아버지의 제재소에서 들리는 톱날소리와 잘려나가는 송진냄새 풀풀 나는 나무 냄새가 나를 파고들었던 것을 보면. 우리집 담 너머로 보이는 탱자나무 길도 예사롭지 않았다. 희삼씨네 복숭아과수원과 조씨네 배나무 과수원 사이로 구부러진 길은 오래 된 무성한 탱자울타리로 둘러쳐져 봄이면 탱자꽃이 구름처럼 피어올랐고, 꽃이 지면 잎으로 덮힌 초록의 덩이로만 보이다가 다시 봄이 올 때까지는 가시만 무성했다. 나는 그 길이 좋아서 장독대 받침 돌 위에 서서 하염없이 넘겨다보며 사춘기답게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무도 모르는 혼자의 슬픔에 겨워하기도 하고, 혼자 왕녀(王女)도 되고, 혼자 상상실연(失戀)도 했다. 훗날, 그 시절이 시 [괴테의 과수원], [사슴눈 고성할배], 등의 연작시의 테마가 되었다. 두어 해 지나 마을에 익산시의 시내버스가 노선연장을 하여 마을을 지나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 첫단편 『신작로』>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초, 국어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숙제로 내준 글짓기 과제물들을 검사한 후 차례로 돌려주셨다. 나는 맨 앞줄에 앉는데도 이상하게 나의 이름을 맨 나중에 호명되었다. 과제물을 받으러 앞으로 나갔더니 나의 원고를 돌려주시면서 그 자리 서서 돌아서서 반 친구들에게 읽어주라는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2백자 원고지 10매 내외로 글짓기 해오라는 것이 여름방학동안의 국어숙제였다. 다들 10매를 채우기 어려워 서 너 장으로 제출한 아이도 많았는데 나의 원고만이 60매 정도였다. 소녀적(少女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쓴 『신작로』, 최초의 단편소설이었다. 당시에 즐겨 읽었던 ‘인간의 조건’, ‘빙점’ 등의 일본소설의 영향이 컸다.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을 넘어서자 친구들이 수런거리는 것 같더니 교실 분위기가 점점 야릇해져갔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흘긋 곁눈질해가며 다 읽었을 때 친구들의 한숨소리도 들리고, 박수소리도 들렸다. 선생님께서는 넌 소설가가 되렴 하셨다. 그때를 나의 문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첫동인 ‘문예가족’ 활동 시작>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말과 3학년 1학기 사이의 봄방학 때였다. 반 친구 두 명이 삼례에 있는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 삼례의 친구는 찾아온 두 친구를 데리고 근처의 한내천(川)에 데리고 봄바람 맞으러 나갔다. 마침 그 곳에 봄소풍을 나와 술잔을 기울이는 한 무리의 어른들이 있었다. 아저씨들은 뭐하는 분들이세요?로 시작되어 문학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내 친구 중에 글 잘 쓰는 친구도 있는데요, 연애편지 대필도 다 해줘요 했다. 하하하 그래? 그럼……,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어 나는 <문예가족>의 가장 나이 어린 일원으로 어른 들 속에 끼어들게 되었다. <문예가족>은 그 몇 해 전, 그러니까 1960년대 초부터 전북지방의 유일한 문학동인이었고, 내가 참여한 것은 60년대 말이었다. 공무원, 신문사 편집장, 교사, 상의용사, 사회사업가, 자영업자 등등에 종사하는 동인들을 ‘성’(‘兄’의 전라도식 표현)이라고 부르며 무조건 사람이 좋아서 한 달에 한 번씩 전주나들이를 하며, 첫 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에 수록된 『鶴)-열여덟의 자화상』 『기(旗)』 등을 쓰던 시절이었다. 이십 대 초반을 전후해서 서너 번, 엔소로지의 표지그림도 그리고 전북일보에 소설 삽화도 그리고, 시도 발표하고, 시사(時事)글도 실었다. 매달 한 번씩 전주의 <문예가족> 동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 탱자나무 길을 지나가곤했고, 또 방과 후에 기차를 놓치면 다른 방향의 더 가까운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익산시에서 전주행 버스를 타고 오다가 반월리에서 내려 집까지 오는 그 과수원 사이의 탱자울타리 길을 통과했다. 시도 쓰고, <문예가족> 동인 활동도 시작하였으니 그 때가 나의 문학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느닷없이 전교생 독서량 조사를 했다. 교육청의 갑작스런 지시였다. 그 조사에서 가장 많이 읽은 학생이 바로 나였다. 선생님들도 놀랐지만 나도 놀랐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2백 몇 십 권쯤 되지 않았나싶다. 왜냐하면 당시에 120권짜리 소년소녀전집을 다 읽어 제쳤고, 위인전, 탐정소설 시리즈 등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로 그 시절 부잣집으로 알려져 있는 정미소나 양조장이 아버지의 사업이었는데도, 우리 엄마는 용돈에 엄청 짰다. 용돈이 짠 것만이 아니라 가정교육도 소리 나지 않게 엄격하였다. 우리 엄마아빠가 고향인 안동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는 처지였으므로 (‘경상도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더욱 그랬는지 아니면 대대로 내려오는 안동의 우리집안 교육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용돈 짜고 책 귀히 여기는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 형제들 살 속에 파고들었다. 용돈이 부족하니 책을 살 수는 없었다. 반 친구들의 손에 든 책을 발견하기만 하면 차례로 다 빌려 읽었고, 문성당 서점에서 샘플로 학교에 공급하던 위인전이나 문학전집 등은 도착하는 순간 모두 내 차지였다. 그 집에서 떠날 무렵엔 제인 에어의 ‘폭풍의 언덕’에 빠져있었다. 전에 살던 삼각주 안의 목천동 집을 배경삼아 소설을 구상하기도 했으니, 목천동 집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익산시 목천동시절> 목천동으로 이사 간 것은 김제의 황산(黃山)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친 후였다. 6학년으로 전학해서 이리여자중학교(지금의 익산시) 2학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큰 도랑’이라고 부르는 수리조합(일제시대 축조) 물길이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 전군도로(전주와 군산으로 이어지는 길) 버스길과 나란히 흘러가다가 우리가 사는 목천동 마을 입구에서 물줄기가 나뉘어 우리 마을 쪽으로 흘렀다. 큰길 버스 정류장에서 다리를 건너 100미터쯤 되는 우리 집 옆에서 물길은 다시 우리 집의 앞쪽과 뒤쪽으로 나뉘어져 흘러 들판으로 이어졌는데 두 물길 사이에 꽤 넓은 삼각주 같은 형상의 땅을 이루었다. 삼각주 안이 모두 우리집이었다. 그 안에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정미소와 양조장이 있었고 집 뒤 뜰에는 양돈장이 있던, 소위 말하는 동네 부자 ‘경상도집’이었다. 앞쪽의 물길 따라 난 길엔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오는 다리와 양조장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다리가 아치 모양이었고 그 다리아래에는 우리집에서 기르는 거위와 오리떼가 노닐고 있었다. 그 두 개의 아치형 다리는 나에게 서양화의 한 풍경을 상상하게 했고, 거위 울음소리는 온 동네를 휘덮곤 했다. 목천동으로 이사 간 초기에 해당하는 6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새로 전입한 이리 남초등학교의 같은 반 친구 용덕이네 집에 놀러갔다가 마루 끝에 놓인 용덕이 오빠의 책을 보고 괜스레 허세 부리느라고 수준에 맞지도 않는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용덕이 오빠는 서울로 유학을 하는 유일한 대학생으로 여름방학이라서 내려와 있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왼쪽 페이지는 영어로, 오른 쪽 페이지는 한글로 되어있던, 지금의 문고판보다 약간 큰 판형의 책이었다. 이거 니가 읽을 수 있어? 용덕이 오빠가 으아해서 물을 때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럼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읽었는데요. 사실은 엄마가 읽는 것을 곁에서 보았을 뿐이었다. 뭐라구? 우리엄마가 읽기에 나도 따라 읽었거든요. 느이 엄마가? 녜에 그럼요. 그제야 내가 부리는 허세의 속을 들여다보았을 용덕이 오빠는 꼭 가져와야 한다 하면서 빌려주었다. 그 여름,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재미없어 첫 장에서 열두 번도 더 가다말다, 후퇴와 전진만을 거듭한 후 날짜가 임박하여져서 결국은 맨 뒷장으로 건너뛰어 억지로 활자만 겨우 읽어낸 후 돌려주었다. 돌려주면서 한 술 더 떴다. 좀 어렵긴 했지만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하고. 그리하여 ‘노인과 바다’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책이라는 인식으로 박혔고, 헤밍웨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 헤밍거리게 된 이름이었고, 삼십이 넘도록 읽지 않은 이유도 되었다. 나의 문학의 역사는 뽐내고 싶어 부린 허영 때문에 벌어진 그 책과의 전쟁으로 지루하게 보냈던 그 시절과 그 여름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황산, 어린시절> 더 거슬러 올라, 김제시의 공덕면 황산(黃山). 그곳이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부모님께서 고향인 경북 안동(安東)으로 가지 않고,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외할아버지의 사촌형 되시는 어른의 이끌음으로 낯선 전라도에 뿌리내린 첫 임지였다. 아장아장 부모님 따라 귀국한 나는 황산의 동리(東里) 마을에서 자라며 익산시의 목천동으로 이사 가기 전 까지,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까지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었다. 네 살의 어린나이로 육이오도 경험했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피신 갔던 돌팍제, 김제 시내 쪽으로 가는 마을 앞 다리가 비29가 쏘아대던 총탄에 맞아 폭파하는 장면, 마을 삼촌이 벌거벗은 몸에 가죽혁대로 얼기설기 묶여 제실(祭室) 앞 공터에 세워지고, 총부리를 들이대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던 나에게 사탕을 먹이던 일 등등, 전쟁의 기억들이 남아있다. 육이오가 지나가고, 아버지가 양조장 일을 하시던 그 시절, 엄마는 사진이 붙어있지 않은 누런색의 도톰한 종이로 된 앨범에 붓글씨로 구불구불 무엇인가를 써내려가던 모습이 선명하다. 엄마가 가끔 소리 내어 경상도 식으로 책을 읽던 기억들도 있다. 그것이 해방 직후 한국으로 건너 온 엄마의 유일한 여가선용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엄마가 쓰는 글의 내용도 모르고 있었지만 글자를 엮어낸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당시 엄마는 독서광이었던 같다. 어쩌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글에서 듣는 부모님들과는 달랐다. 다른 부모님들은 춘향전 필사본이니 홍길동 전이니 소위 우리의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읽거나 들려줬다고 하는데 우리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엄마의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가끔 들려주시긴 했지만, 엄마는 주로 당신의 독서에 열심이셨고 가끔 엄마가 읽은 책이야기를 해주셨다. 당시 엄마는 읽은 책들로 ‘괴도 루팡’, ‘몬테크리스토 백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그리고 한국작가로는 방인근도 생각난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무슨 책이었는지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방인근의 무슨 소설인가를 읽다가 아빠가 일을 마칠 시간이면, 평소에 엄마가 읽던 책들을 반짇고리 귀퉁이에 두던 것과는 달리 벽장 속 비밀 장소에 깊이 감추던 일이었다. 나중에 아마 ‘방랑의 가인’이 아니었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내가 엄마로부터 흥미진진하게 들었건 이야기가 후에 알고보니 ‘괴도 루팡’ 또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 시절의 그 모든 기억들도 나의 문학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더 거스르자면, <몸과 마음의 고향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할아버지 적부터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내려온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전라도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서울에서 사는 동안 내내,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어른들을 따라 안동을 찾곤 했었다. 길안 읍내 근처의 누레기에 있는 외가를 거쳐 공수골 본가까지, 외삼촌 등에 업혀서도 갔고, 육촌오빠와 동행도 하고, 어느 해엔가 물이 넘쳐 찦차를 개조한 ‘판도차’를 타고 가는 등 여러 가지 고향경험을 했었다. 산골짜기 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들은 선녀탕에 얽힌 전설을 비롯하여 내가 자라면서 간혹 고향에 갈 때마다 지나는 서당마며, 미네 약수터며, 도둑바위며, 송지(송사)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토일 쪽의 산길에 있는 너럭바위며 질기네미재며…… 특히 할머니의 친정인 청송에, 할머니와 함께 갔던 일은 특별한 경험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나 혼자서만 저승의 개 짖는 소리와 한지 문살에 비쳐진 저승사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본가와 외가를 돌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끝은 항상 눈물겨웠다. 그리고 전라도에 살면서도 ‘경상도집’으로 불리던 것도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키웠다. <나의 문학 DNA> 토론토에 오가며 살기 시작할 무렵에, 한국방문 길에서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인 안동지역을 돌아온 일이 있었다. 길안 송사초등학교 교문 앞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아버지가 어릴 적 다니던 추억을 더듬어 이야기 해주시기도 하고, 서당친구 이야기며, 청석바위 이야기며, 그 건너편의 깎아지른 절벽 위 ‘산수갑산’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때 문득, ‘산수갑산’이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성장기를 보낸 고향 전라도의 온갖 추억들, 김제평야며 흥복사며 목천강이며……, 정신의 고향인 안동을 오가며 느끼고 겪었던 경험들 그 모든 것들도 다 나의 문학역사가 아닐까?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문예가족> 동인활동이나,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진단시(震檀詩)동인> 활동을 하면서 ‘춘향’ ‘장승’ ‘백결’ …… 등 전통을 테마로 시를 썼던 일이나, 개인적으로 백제, 삼국유사 등에 초점을 맞추었던 일, 지금 외국에서 살면서도 끝내 놓지 않고 내 생애의 끝까지 함께 갈 작정으로 몰두하는 이 외로운 작업 또한 나의 문학의 역사로 녹아들었다고 확신한다. 첫시집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 이후 백제테마시집 『청동거울속의 하늘』과 영어번역시집 『2H2 + O2 = 2H2O』 등, 열 권의 시집 외에도, 나의 삶 전체에 그 모든 것들이 녹아 발효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기를 바라기도 한다. 얼마 전 어떤 시를 쓰다가 문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라보았던 ‘산수갑산’이 떠올랐다. 내가 걷는 문학의 길이 그 높은 절벽을 향한 것이었으며, 문학의 길을 걷는 나, 그 속에는 피의 내림이 스며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토록,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나의 DNA, 그 속에 문학으로 가는 미로가 잠겨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 문학과의 불화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도란도란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며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고 싶다 * 權 千 鶴 ‘문학관’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진 않다. 그러나 특별한 것 없이 특별하고 싶다. 한때는 거창하게 버거울 정도로 문학에 대해서 심오하게 생각했었다. 문학이 과연 구원인가? 하다보면 절망이었고, 절망이다, 하고 보면 구원이었다. 그렇게 문학과 어부렁더부렁 젊음도 보냈다. 마치 적과의 동침 같았다. 지금도 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지만 방법을 바꿨다. 내가 문학에게 다가가기만 할 게 아니라 문학이 나에게 다가오게 하고 싶다. 그저 열심히, 세상보다 앞서가진 못하더라도 그러나 너무 많이 뒤지지 않게, 한 두 발짝쯤만, 적당히 떨어져서 훑어보고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세상 귀퉁이를 뜯어먹으며 맛본 간을 짭조름하게 내 글들 속에 넣는다. 넣어서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길 바란다. 나에게 문학 행위는 어쩌면 옛날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부용(芙蓉)의 과수원에 선 아침, 나무에 물 오르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던 친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는 아무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나를 핀잔했고, 나는 내 귀에 들리는 소리를 못 듣는 친구가 답답했었다. 때로는 말귀 못 알아듣는 세상을 향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때로는 세상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니까. 이제는 친구와 같은 동행이다. 문학과 화해의 길이다.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늘 한계에 시달렸다. 능력이 없어서였다. 돈, 명예, 배경, 학문 기타 등등을 통틀어서 세상살이에 대한 총체적인 무능력, 그래서 늘 허기졌고, 미안했다. 그렇게 지금 내 앞에 남아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버렸다. 문학에 대해서도 다를 바 없다. 문학에게 늘 미안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문학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다. 살아버린 시간보다 더 많이, 할 수 있는 만큼 전력투구함으로서 문학에게 오래 동안 품어온 미안함을 덜고 싶고 싶다. 나의 의견도 섞어가며 조율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시인 초년병 시절,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나는 한 선배시인과 대화 중에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 후 그 선배는 나의 그 말을 자신의 시집 서문에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는 후배시인의 말을 새겨본다’고 적은 것을 봤다. 사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었다. 싶다. 매우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싶다. 그래서 늘 허기졌다. 허기지다. 그러나 이제, 진정으로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고 싶다. 나의 자작시 ‘유명한 무명시인’처럼,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는 것. 그것이 지금 나의 문학관이다.  
25 (박희용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084 2013-01-26
 풀씨가 날아와서 풀씨가 날아와서 풀씨가 날아와서 내 살 땅을 달라네 거친 삶 추스리며 천리만리 훨훨 날아 노래 흩어진 언덕 잿빛 침묵의 기슭에 작은 발 디디며 내 살 땅을 달라네 정든 사람 떠난 땅, 비 피하듯 사라진 신작로 끝내 버리고 오늘은 어느 하늘 끝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인지 막걸리 한 사발로 아린 속 적셔내며 망초 개망초 하얗게 부서진 땅 무늬 진 손끝으로 일으켜 세우며 풀씨가 날아와서 풀씨가 날아와서 그대 죽을 땅을 달라네 찬란한 오기로 돋아난 지칭개 여뀌 땅비수리 모두 거느리고 손님으로 날아와서 뼈를 추리며 神市 16 쓸만한 뼈는 거두어라 십년도 못 견딜 뼈는 아예 멀리 던져버려라 메뚜기 한철 지나면 저절로 우수수 삭아질 잔뼈들은 그냥 두어라 군데군데 꺼멓게 썩어가는 척추뼈 입만 살아 휘어지는 갈비뼈 모두 던져버려라 쓸만한 뼈는 거두어라 펄펄 날리는 눈발 속으로 신발 끈 동여매고 성큼 나서는 발뼈 꺾일지언정 휘지는 않으리라 속으로 새김질하는 목뼈 그 해 여름 (▲ 한 인민군 전사의 소지품에서 나온 사진으로김용호, 리영록, 김기원, 김용생, 김두형, 주중환 여섯 동무가 568연대 직속 사격장 밑에서 촬영 하였다고 기록돼 있었다.<2007.6.24 오마이뉴스>) 따발총을 내려놓고 군모를 벗고 견장을 풀면 공산군 표정이 금방 사라지는 익숙한 얼굴들 뿔이 없는 김용호 리영록 김기원 김용생 김두형 주중환 여섯 젊은 동무들 남과 북 어느 학교 어느 출석부에 흔한 이름 석 자 뉘 집 귀한 아들인지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만나는 편안한 사람들 그해 여름 가슴 주머니 속에 붉게 간직한 한 장 흑백사진 이름 여섯 눈매 여섯 이제 남의 것이지만 모니터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부르면 따발총을 내려놓고 군모를 벗고 견장을 풀고 화르르르 달려올 청춘들 삼강나루 수심가 한 보따리 이고 와 진하게 풀어놓는 방물장수 눈정 뒤에 우두커니 핀 진달래 붉은 하소 실어 나르는 산비둘기 푸른 울음 강마을 낮은 가락 초가 한 채 수묵화로 강 건너다 백사장에 아랫도리 젖어 하루 종일 노는 조선 백로 한 마리 낙동강 칠백리 숨 쉬는 이정표 홀어미 혼자 자기 심심해 중얼중얼 삼강주막 나그네들 답례로 흔들흔들 강물 따라 흘러가다 콘크리트에 막힌 마음이 서걱서걱 김숙자 문전옥답을 물밑에 넣고 보상금이 풀리자 사내들의 주머니 속으로 진한 화장을 한 철새들이 몰려들었다 이주단지 아랫녘 합판지붕 술집 마다 아 아 예안의 밤이여 젓가락 장단소리 새들이 부르는 유행가 요란했다 새 한 마리 돌아가지 못했다 숱 많은 머리 둥근 눈망울 붉은 입술 그만 돌아 갈 날 잊고 말았다 가방 가득히 지폐를 담아 남행열차 따라 훌훌 날아가야 했는데 한 사내가 세운 하루 밤 더운 사랑에 그만 청춘이 매이고 말았다 호반식당 있던 자리에서 늦은 점심이다 노릿한 꽁치구이 냄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집 한 채를 세내어 이젠 아가씨가 아니라 주인으로 잉어회를 뜨며 술을 팔았다 사내를 꼭 닮은 아이 둘 예안 호 푸른 물속에 넣지 않고 키웠다 손님 방 벽에 아이들의 상장을 걸어놓고 가끔 악몽처럼 찌르는 신분의 못을 탱탱한 엉덩이로 꾹꾹 눌렀다 그 언니 인물은 참 좋았지요 출신이 솔직히 첩이잖아요 송씨 아재는 두 아들을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질 않았지요 서른이 넘도록 벌이는 안 하고 부산 바다에 낚시만 다닌 데요 분열증 약을 먹으며 모텔엔가 청소 다닌 데요 아직 뒤태가 처녀 같아요 남자 성 보고 결혼 했다는 식당 여주인은 그 언니 사는 꼴 보고 가슴이 아팠단 말을 여러 번 했다 종유석처럼 자란 못은 끝내 철새의 뒤태를 뚫고 아이들의 서른 살을 꿰고 말았다 첫사랑 홍매 지고 일 년 내내 기다리던 자리 다시 첫사랑 어리다 맑은 실핏줄 펴 옛 하늘 손짓하는 얇은 가지 가지마다 다시 첫사랑 고이다 푸른 이내 자욱한 날 먼 길 걸어가 소실점이 되는 여인의 하얀 고무신 닮은 낮달 그 홍매 사라지자 깊이 울던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황사 부는 어느 날 문득 살아서 휘는 마디 마디마다 첫 화선지 피다 시 내 시가 떨어져 옹천역전 키 큰 은행나무들 슬며시 지운 잎 따라 돈이 된다면 오후 두 시 화물 열차 곱배 가득 서울로 가 정든 골목마다 한 보따리씩 가만히 놓으리 누구마다 한 줌씩 가져가 살아있는 즐거움 활짝 피도록 내 시가 떨어져 양식이 된다면 산에 들에 기약 없이 떨어지는 함박눈이 된다면 크고 작은 생물들 한 바가지씩 퍼 가 식구들 허기 달래고 남는 건 하늘에 돌려 그 이가 쓴 보이지 않는 글자마다 그리움이 숨 쉰다고 달맞이꽃 초등학교 27 현학이 현국이 형제 아기 때 갔던 길 되짚어 돌아왔다 녹전에서 사북까지 아버지 한 생애 석탄 속에 묻고 4학년과 2학년 되어 키 껑충한 어머니 손잡고 크고 작은 달맞이꽃 지천으로 핀 고향에 돌아왔다 달맞이 꽃씨 기름이 비싸요 몸에 그리 좋다네요 황 선생이 하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얘들아 동네 여기저기 달맞이꽃 참 많지 기름이 그리 비싸단다 너희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용돈 벌이가 될 거다 며칠 뒤에 현학이가 선생님요 엄마하고요 달맞이꽃씨를 많이 따 모았어요 어떻게 하면 되요 달맞이꽃씨 사시지요 몸에 좋다는데요 교무실에서 만난 황 선생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두 형제와 달맞이꽃 어머니가 부지런히 따 모았을 까만 꽃씨들 말 한 마디로 두 형제를 노동 시킨 선생은 대답이 막막하였다 못난이 초등학교 80 올해도 닭 기릅시다 잡아도 먹고 사모님들 좋아하게 집에도 가져가고 병아리하고 사료 값은 선생들이 내고 관리는 이 주사 겨울이 지난 빈 우리에 주먹만한 병아리 스무 마리를 넣었다 병아리 사세요 봄 트럭에 실려 온 암 병아리 열 셋에 수 병아리 일곱 양지바른 우리에서 모양과 크기가 고만고만한 것들 다정하더니 한 달 남짓 지나자 처녀와 총각 편으로 갈라졌다 어린 암탉들은 수줍게 모여 떨고 어린 수탉들은 떼로 우우 몰려다녔다 가끔 수탉들끼리 싸움이 붙더니 승자의 벼슬이 더 붉게 높아졌다 모이를 주면 수탉들이 허겁지겁 먼저 먹고 암탉들은 슬며시 그 사이에 들었다 수탉 여섯이 하나를 콕콕 쪼아서 모이를 못 먹게 했다 수탉 여섯은 날이 갈수록 덩치가 커졌으나 하나는 왜소했다 덩치가 가장 큰 수탉이 암탉 등에 올라타 씹을 하고 난 다음에 다른 수탉들이 주뼛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번개 씹을 했다 암탉들도 못난이에게는 보지를 주지 않았다 못난이는 하루 종일 도망 다니다가 겨우 구석에서 비실비실 하더니 어느 날 아침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조용히 죽었다 자지 차고 태어나 한 번도 써먹지 못했다 선생들도 못난이는 재수 없다며 먹지 않고 퇴비더미에 버렸다 저 놈이 대장이라고 혼자 너무 설쳐 안 되겠어 다른 닭들은 살이 안찌니 저놈을 먼저 잡아먹어야지 대장이 삶아지고 난 몇 시간 후에 새 대장이 섰다 金江里 몇 학년이니 오학년이라고 남자친구 안 만나고 엄마 일 거드는구나 이집 반찬이 맛있지 저 봐 삐졌잖아 아 우리 딸도 있는데 자 빨리 먹고 오후 공사 해야지 우리 신가가 4대째 살고 있는데 반대도 많이 했지만 이젠 다른 수 없고 이주단지나 잘 되면 거기 가서 살고 산이나 확 밀어 시설채소 같은 생계대책이나 해 주면 좋지요 강동리 석씨네 문중산인데 밀면 한 이만사천 평 투기꾼이 달려들어 난릴시더 고시 되면 덜 하겠지요 예고개는 생계대책이 없어요 해발 200이란데 160까지 물 찬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니 관광객들이 많이 오면 점빵이나 잘 되면 좋고요 이주단지 그 거요 교수들이 와서 제일 낫다고 평가한 곳인데 공무원과 오운리 사는 모씨가 장난치는 바람에 투표한다는데 무어 순리로 안 될리껴 젊은 사람들이 앞장 서 일하다보니 여러 소리 듣니더 머 욕심낸다고 일보다도 그런 소리 들으면 힘이 빠져요 안동댐 예안단지 꼴 안 나도록 생계대책도 수자원공사와 시에서 세워줘야 해요 나라에서 하는 일 어찌 할 도리 없지만 당최 시끄러워 살 수가 없어 저기 솔 솔 사이로 뵈는 저놈의 쇳덩어리들 하루 종일 강바닥 긁어대니 금강마을 성황 되어 산지 오백 년인데 이제 사람들 떠나고 물이 들면 어떡해 따라 갈 수도 없고 물귀신 되어야지 그래 맞아 나도 자네와 같은 신세 우리 인동장씨 여기 터전 잡은 지 오백 년 저놈의 영주댐 때문에 자손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져야 한다니 누워 있어도 잠이 안 와 그 스님 이곳 터 잡아주며 천 년은 넘긴다더니 반 토막 내 뼈가 어디로 갈지 겨울시인 한 잔 더 주게 강산을 저리 깎아대면 끝이 안 좋은데 업보는 나중 일이고 서울 사는 지주들이야 쌀 도지보다 보상금 목돈이 훨씬 좋고 묵은 산밭 갈아엎어 사과나무 촘촘하게 심은 산주들이야 횡재해서 좋지만 남의 땅 부쳐 먹던 농꾼들이 낭패여 낭패 가솔하여 어디 가서 뭐해먹고 살꼬 한숨 소리 깊이 아파 내야 바위를 미륵불로 만들어 줘 한 사백 년 해마다 공양 받으며 편히 살았고 지방문화재이니 새마을로 안 데려가겠나 거기 가서도 장씨들 복 지켜주며 살면 되겠지 성황당신 한잔 남의 조상신 한잔 미륵불 두잔 겨울시인 석잔 안주는 마른 벌레집 묘 이장 공고 묵은 기와집 낯선 간이역  
24 (박희용 시인)나의 문학, 나의 시, 나의 내력
편집자
2848 2013-01-26
 산맥 속에서 춤추는 학 -나의 문학, 나의 시, 나의 내력 박 희 용 「풀씨가 날아와서 뼈를 추리던 그 해 여름에 삼강나루에서 김숙자를 만나 첫사랑을 하며 시를 쓰던 못난이가 이제 달맞이꽃 짠하게 피는 금강리에 서성이다.」 편집자의 자료요청을 받고 대표작 열편을 골라서 제목을 이어보니 한 사내의 남루한 내력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주어진 이야기꺼리가 <나의 문학관과 걸어온 길>이나, 사실 반백이 되도록 변방에서 우짖는 한 마리 새로서 내 시나 인간 됨이나 문학관이나 걸어온 길이나 모두 소슬하지만, 입춘을 앞 둔 겨울의 끄트머리에 문학마실을 지나가는 글 나그네여 촌장님이 이왕 멍석 깔아주었으니 심심풀이로 넋두리 한 마당 슬쩍 들어보시려나. 누구에게나 살아오면서 기억에 진하게 남는 몇 개의 장면이 있다. 특히나 시인에게는 유년의 기억이 창작의식의 팔 할은 차지하고 있는 것, 내 비록 시골에 사는 무명시인이지만 그래도 사십여 년 동안 시 비슷한 걸 긁적이거나 시를 써 왔으니 어찌 그 중에는 시적 느낌이 반짝이던 장면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제일 처음으로 감각의 화면에 또렷하게 찍힌 장면은 대여섯 살 때 문득 본 고향 냇물 소천의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설레는 현상,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그 이후 도처에서 만난 물결의 일렁임은 그것만 같지 못했다. 두 번째는 마을 앞 쏘로 아장아장 물놀이 하러 걸어가는 아이에게 쏟아지던 그 한 여름 날 땡볕. 세 번째는 중학교 시절에 소를 풀어놓고 풀밭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즐거움. 네 번째는 스물한 살 때인 1974년에 안동 문화회관 근처를 걸을 때 “저 옥상 위로 비둘기가 나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라 갈파하던 삼십대 초 젊은 소설가 김주영. 이러한 원초적 감각을 더듬이로 삼아, 내가 삶의 즐거움을 시 쓰기에서 찾게 된 연원을 거슬러 올라 생각해보니, 고향과 독서와 일기장이란 세 개의 키워드가 나온다. 나는 고향을 유난히 탔다. 1954년 6월 한여름 날 오전에 우주 은하계 태양계 지구 동북아시아 한반도 남부지방인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태백산이 남으로 가지를 뻗어 각화산, 왕두산, 형제봉 등의 높은 산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 정기가 송진방울처럼 떨어져 응결된 무학봉의 바로 아래 곳진마을에서 태어났다. 舞鶴峯은 이름 그대로 ‘춤추는 학’이다. 태백산맥 속 첩첩의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작은 산이지만 주위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 녹색 털빛의 한 마리 춤추는 학이다. 유년시절을 고향산천의 1급수와 맑은 솔바람 속에서 멋지게 놀았다. 그런데 웬걸 소천국민학교 2학년 때인 1961년 6월 초 장마기에 갑자기 강원도 황지로 이사 간다는 게 아닌가. 해바라기는 아직 어렸고 나팔꽃은 열매가 달렸기에 여동생과 함께 급히 담장 위의 덜 여문 나팔꽃 씨를 따 모아 챙겼으나 막상 이사 간 곳은 온통 시커먼 탄흙뿐이어서 심을 곳이 없었다. 황지로 이사 가서는 고향의 산천을 늘 그리워하였다. 독서는 만화부터 시작되었다. 황지국민학교 4학년 마칠 때까지 방과 후엔 놀이하고 저녁에는 만화책 실컷 보느라 집에서 숙제를 해본 기억이 전혀 없을 정도로 원 없이 자유분방했다. 소풍날 모처럼 생긴 용돈으로 오후 귀가 길에 만화방에 들렀다가 아차 싶어 정신차려보니 밤 10시, 학교와 집에서 아 찾아 난리가 나기도 했다. 어른들은 공부는 안 하고 만화만 본다고 꾸중했지만 그 당시는 만화가 꿈의 세계이자 교과서였다. 또 집에서 신문을 보아서 사진, 시사만화, 기사 등을 눈빛 반짝이며 읽었다. 이사 온 며칠 뒤 신문에서 본 색안경 박정희, 얼룩무늬 차지철, 훌쭉이 박종규 세 쿠데타 군인들이 떡 버티고 선 사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5학년이 딱 되어선 그만 학교 도서실에 붙잡혀버렸다. 복도를 지나다가 ‘도서실’이라고 해서 호기심이 생겨 들어가 몇 권 뒤적거리다가 그만 눌러 앉았다. 만화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5학년 내내 수업시간만 마치면 도서실에서 앉아 뭉갰다. “야야 선생님 퇴근시간이다”라는 도서 선생님의 말씀에 깜짝 독서삼매에서 깼다. 6학년 때는 수업시간 마치고부터 저녁 8시까지 촛불 켜놓고 입시공부 하느라고 도서실에 못 갔다. 북적북적 시장 같은 학교였지만 삼면이 책으로 꽉 찬 도서실이 있었음은 탄광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장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의 배려이리라.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이 때 나는 중요한 두 가지 선택을 했다. 하나는 이름이고 하나는 중학교였다. 원래 아버지께서 지은 이름은 ‘박일용’인데, 반농에다 목상 사업에 바빠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했단다. 며칠 뒤 면사무소에 가서는 아버지의 부탁이 생각났으나 적는 데 기억이 가물가물, 성는 박가고 형이 무슨 용인데 용인데 하다가 그만 ‘박희용’으로 신고하고 말았단다. 그리 불리며 살다가 1965년 겨울에 중학교 원서에 붙이는 호적초본을 떼 보니 이름이 달랐다. 아버지께서 “야야 니 이름을 어느 것으로 할래?”하고 묻자마자 또 호기심에 그만 “희용으로요”. 아버지께서 “니 이름은 면장이 지었다”라고 하셨다. 새 이름이 신기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하니 이름이 중요했다. 본 이름인 ‘일용’이었다면 ‘뛰어나게 일과 녹이다 용’이라는 뜻이고 부르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뚜렷한 느낌을 줘서 그런대로 괜찮은데, ‘기쁘게 녹이다’라는 모호한 뜻을 가진 ‘희용’이다보니 뜻이나 발음이나 히비리 한 게 내 육십 평생하고 똑 같다. 뿐만 아니라 시도 히비리한 게, 이 나이 되도록 좋은 시 하나 못 썼다. 이제 공적으로 ‘박희용’으로 안 써도 되니 본 이름 ‘박일용’을 찾는 개명신청을 할 작정이다. 그러면 시가 좋아지지 않을까? 두 번째 선택은 귀향이었다. 열세 살 때 부모 형제 곁을 떠나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 큰집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나팔꽃씨를 심을 수 없는 검은 탄광촌이 왜 그리도 싫었는지, “야야 일용아 니 소천중학교 갈래 황지중학교 갈래”라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단번에 “나 소천 갈래요” 했다. 이후부터 결혼 때까지 15년 동안을 혼자 생활했다. 이때부터 고독은 내게 편했다. 모든 선택을 나 혼자 해야만 했다. 반백이 된 지금이야 태백시로 개명한 황지가 아련한 추억의 땅이지만 40대 초까지만 해도 황지 하면 비서정의 시커먼 땅이었다. 탄광촌을 떠나고 싶다는 소원은 이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보낸 중학교 시절 3년은 목동이었다. 시골에서 알부자 소리를 듣는 큰집엔 아들이 없었다. 머슴이 한 사람 있었지만 오후에 소를 먹이는 소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집안 간의 합의로 내가 가게 된 것인데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고향 간다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별수 없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소를 먹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오후 시간이 없었다. 학교 시간 외에는 친구들과 놀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책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다행히 도서실이 있어 매일 들러 책을 빌려서는 소 먹이러 가면 소는 저만치 풀어놓고 풀밭에 엎드려서 책을 읽었다. 한참 읽다보면 소가 안 보여 멀리까지 찾아다니기도 했다. 입학 때는 촛불 입시공부 덕분에 수석합격 했지만 졸업 때는 가정학습을 못한 탓에 5등 이었다. 내가 시를 처음으로 읽고 느낀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62년이었다. 그 땐 여섯 살 위인 큰형이 큰집에서 소천중학교를 다녔는데, 명절이나 제사, 방학 때에 큰집에 가면 중학교 교과서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도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시와 산문들이 생각난다. 그 때 월북문인인 이태준의 이름도 알았다. 또 형이 보던 문예지 『학원』을 이불 덮고 엎드려서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요즘도 이불 덮고 엎드려 시집이나 문학지를 읽는 시간이 가장 흐뭇하다. 여자보다 훨씬 좋다. 요즘으로 치면 선행학습이랄까, 하여튼 중학교 국어책을 읽고 감동을 많이 먹었다. 지금도 그 때의 시 <향수>, <고향길>, <저녁산>를 외워내고, 소년 소녀의 풋사랑이던 희곡 스토리가 생생하다. 가장 깊게 감동 먹은 시 <향수>, 바다/ 저 편에 산이 있고// 산 우에/ 구름이 외롭다// 구름 우에/ 내 향수는 조을고// 향수는 나를/ 잔디밭 우에 재운다. 4연 8행의 작은 시이지만 강원도 탄광촌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가슴에 던져진 충격은 대단했다. 요즘은 토종인 유행성출혈열과 80년대 중반에 일본열도에서 이사온 쯔쯔가무시 때문에 함부로 눕지 못하지만, <향수> 먹고 난 다음부터는 가끔 풀밭에 누워 흰구름을 보며 그에 맞는 형상을 그려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이름을 모르다가 수십 년 뒤인 90년대에 시인을 겨우 찾았다. 미래사에서 발간한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8 김용호 시집 『주막에서』. 1921년 경남 마산 출생, 1938년 「맥」동인, 1941년 첫시집 『향연』(흥아사)을 동경에서 간행, 1946년 예술신문사 주간, 1948년 시문학사 주간, 1968년 단국대 문리대학장, 1973년 사망. 1983년 『김용호시전집』(대광출판사) 간행. 혹자들은 정지용의 <향수>를 치지만 내가 볼 땐 그건 별로고 김용호의 <향수> 44자 시어야말로 절창이다. 이런 덕분인지 시로서 처음으로 받은 상은 1학년 봄 백일장에서 <꽃>이란 시로 입선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좋은 책을 많이 읽었다. 도서실에서 빌려서 본 『얄개전』같은 책은 나로 하여금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인생관을 갖도록 하는 데 일조 했다. 또한 2학년 방학 때엔 황지 집에 가서 황지고등학교 도서부원인 중형이 가져온 두꺼운 원본 『부활』과 『동키호테』를 몇날 며칠 침식을 잊고 독파했는데, 그만 책 속의 주인공 두 사람이 내 성격의 양면을 이루고 말았다. 이후의 인생에서 기본적으로는 네휴르도프이다가 객기가 치받으면 동키호테가 되어 난조를 이루는 경우가 흔했다. 거기에다가 혼자 놀다보니까 햄릿도 친구가 되었다. 책 속 등장인물에게서 즉각적인 영향을 받다보니 그만 다중 성격이 되었다. 평생토록 비비안리를 연모하는 것도 카츄샤 이미지 때문이었다. 나쁜 영향을 끼친 책들도 많이 읽었다. 철암탄광의 광부인 4촌 매형 될 사람이 가져온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 새벽길 등 등 야한 책 한 스무 권을 정신없이 통독해버렸더니, 그 게 지금까지 영향을 끼쳐 연중 몇 번씩 풍만한 주막주의에 빠지도록 한다. 또 학교 도서실에서 빌린 『보나팔트 나폴레옹』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히틀러의 『나의 투쟁』 등의 책을 읽은 탓으로 소를 앞산 기슭에 풀어놓고는 마을 뒷산 무학봉을 내려다보면서 ‘나폴레옹의 모자를 닮았구나’하는 상상을 많이 한 탓인지 여학생들이 부르는 별명이 ‘육사생도’였다. 이러한 책들이 끼친 영향이 사십대 초까지 남아 가끔 오만스런 소영웅주의에 빠지게 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독서 행태가 작용 했는지, 해마다 교내 웅변대회에 단골 연사로 출전하여 반공과 북진통일을 무아지경에서 목 놓아 부르짖었다. “외칩니다! 소리 높여 외칩니다!” 하다보면 짝짝짝 박수 소리에 섞여 “딩동댕” 시간 오버였다. 1등은 한 번도 못하고 주로 2, 3등이었다. 원고는 내가 직접 썼다. 국어 선생님이 보시더니 “너 이 원고 형이 써 주었지?” 했다. “아니요, 제가 썼는데요”해도 믿지를 않았다. 큰형이 고대생이란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소년시절의 두뇌는 스펀지와 같아 눈에 들어오는 대로 무조건 저장한다. 그 저장된 지식과 경험을 평생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시켜서 풀어먹으며 산다. 내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친 독재자들의 전기와 야한 대중소설이 밉다. 누나를 여자로 만들기 위해 외설담을 한 아름 가져다 준 매형, 시골 중학교 도서실에 왜 그런 책들을 사들여 놓았는지, 도서 담당 선생님의 안목이 지금 생각하니 원망스럽다. 이 사촌 매형의 아버지는 육이오 때 재산군인민위원장이었다고 한다. 수복 되고서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어머니는 소천 산성마을 박씨에게로 개가, 어린 아들은 재산의 일가집에 의탁해 살다가 스물 가까이 된 67년경에 생모의 주선으로 우리 큰집에 머슴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후 1972년 재수 때에 육사 33기 입시에서 1, 2차와 면접까지 통과 했는데 떨어졌다. 면사무소 다니는 친구 말을 들으니 연좌제에 걸렸다고 한다. 소천 두메 촌놈이 대처 영주에 나와 영주종합고등학교에 다니며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근근이 생활하였다. 학교 도서실도 없고 생활비가 빠듯하다보니 독서보다는 일기장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후 낭인시절, 교대시절 내내 돈 몇 푼 여유 있으면 주로 포켓용 문고판을 사서 읽었다. 이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책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고대인도철학서인 『우파니샤드』, 노자의 『도덕경』, 『릴케시집』, 『괴에테와의 對話』등이다. 사십대 이후 경제력이 생기고부터는 지적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인터넷서점에서 사 모은 책으로 서재를 꾸며놓고 지긋이 바라보며 ‘아! 나도 인텔리로구나.’라며 자위하는 게 사는 낙이다. 젊어서는 문학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자연과학 분야의 책은 안 보았는데 10년 전부터는 생물학, 분자생물학, 유전학, 지구과학, 물리학, 천문학, 우주학, 화학 등의 과학 분야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무릇 시와 글을 쓰려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공부해야만 종합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일기장은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쓰기 시작한 일기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햇수로 47년이고 대학노트로 모두 108권인데 각 권마다 ‘黽鳴 맹명’, ‘洛江’, ‘華然’, ‘進化’, ‘湛然’, ‘華嚴’ 등의 그 당시의 화두를 담은 제목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름을 탐하지 말고 더욱 겸허한 배움의 자세를 갖자’라는 뜻으로 『無名錄』이라 제목 하여 쓰는 중이다. 일기를 쓰긴 중1 때인 1966년 3월부터였으나, 1970년 봄 어느 날 그만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정신과 육체의 갈등 때문이었다. 일기란 게 자기 반성인데, 중학교 때는 몰랐으나 고1 때 강 머시기 친구와 함께 자취하면서 배운 용두질 대문에 무척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짓은 교과서에서 배운 도덕심과는 상극이었다. 자제하고자 무척 노력하였으나 그 버릇은 전혀 양심과 체면이 없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형의 중학교 도덕책을 몇 번이나 읽으며 표지를 싸서는 <인생독본>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도덕관념에 투철했는데, 수음이라니,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육체의 욕망조차 막지 못하는 자가 무슨 일기를 쓸 수 있는가라는 자괴감에서 그만 불을 놓고 말았다. 새로 시작한 고2 때인 1970년의 제1권의 제목은 『인생논문』이다. 첫 일기인 1970년 5월 7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씨는 雲. 四年 間 記錄했던 日記冊이 태워 없어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人生무상, 좋은 생각이야. 인간이 삶에 있어서의 궂은 일, 좋은 일이 최후에 도달할 목표는 차가운 영과 肉의 멸망이 있을 뿐, 死 후의 쟁쟁한 명예가 주검에겐 무슨 소용이 있을 소인가? 生前이나 死 후의 편안함을 위함이라면 人間은 모두 利己主義者가 아닌가? 가장 두려워하는 人間의 마음이라 古로부터 내려온 모든 철학적 예술이 아직도 모든 이치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까? 말이 무서웁다. 눈이 무섭다.」 군대에서도 숨겨 일기를 쓸 정도로 일기 쓰기는 나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내 일기는 하루 일과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요 느낌이요 사상이요 시의 들판이다. 깊은 밤에 생각과 느낌을 술술 산문으로 쓰다보면, 간수를 치면 두부가 엉키 듯 생각이 엉켜 시가 된다. 요즘은 컴퓨터가 있어 작업이 쉽지만 전에는 몇 장씩 넘겨쓰면서 퇴고를 했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새벽 서너 시, 한 편의 시를 만든 즐거움에 피곤한 줄 몰랐다. 두 상자 쯤 되는 일기장은 이어서 말할 습작기의 공책시집과 함께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아주 든든한 원천이다. 옛 시절이 생각나서 가끔 펴 보면 유치가 찬란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의 자산이다. 시간이 나면 이 둘을 차근차근 정리하여 비매품으로 발간해서 지기지우들에게 증정할 작정이다. 돌아갈 때는 무명보자기에 곱게 싸서 관속에 넣어 함께 보내달라고 당부할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초기 습작병을 앓게 되었다. 거기에는 내적 요인이 많았지만 외적 요인도 작용했다. 우선 과 선택에 대한 후회가 심각했다. 소천 중3 촌놈이 영동선에서 만난 영주종고 3학년에게서 들은 “화공과가 제일 쎄다”라는 말을 덜컥 믿고 입학원서에 ‘화공과’를 쓴 바람에, 과 수석으로 입학은 했지만 ‘아이쿠 잘못 했구나 여긴 진학이 아니라 취직인데’라는 후회로 화공과 공부를 접고 참고서를 따로 사서 3년 내내 진학공부를 홀로 했다. 그러다보니 학교 안 가는 날이 많았고, 자취와 독공 등으로 고독한 소년기를 보내게 되었고, 그 고독이 향하는 곳은 일기장이었다. 일기를 쓰다 보니 가끔 운문형식을 띄게 되었고, 그것을 따로 정리한 것이 바로 공책시집이다. 결론하면 화공과 선택이란 한 순간의 실수가 평생을 좌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쎄 보통과에 갔다면 아마 어느 정도 성공은 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 성공이야 풍요할 수 있지만,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세계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은 시인만이 알 수 있기에 그 당시와 40대 초까지는 느끼지 못했는데, 화공과에 진학해서 배운 유익한 점 한 가지를 40대 중반 넘어 나름대로의 사색이 깊어지면서 느끼게 되었다. 무엇인고 하니 바로 유물론이다. 지금도 뚜렷이 떠오르는, ‘야 분자와 원자라니, 물질을 잘게 쪼개면 분자가 되고 더 잘게 쪼개면 원자가 된다니, 그럼 나를 깔아뭉개려고 달려오는 저 자동차도 분자로 분해하면 금방 흩어지겠네’라고 생각하던 때는 화학 공부를 처음 배운 1969년 봄날이었다. 청춘시절에는 정신의 가치, 즉 도덕 우위의 관념론이 절대적이고 육체적 가치, 즉 물질은 상대적인 것으로써 정신과 물질은 주종관계라고 인식했는데, 살면서 경험하고 사색한 것들이 차츰 엉키면서 유신론과 유물론이 대등한 관계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더하여 50대 중반 넘어서부터는 오히려 유물론이 본질이고 유심론은 현상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유심론과 유물론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앞으로도 변화한다. 화공과 3년 동안 일반화학, 분자, 원자, 무기화학, 유기화학, 화학물리, 물리화학 등의 개념과 원리를 배울 적에는 그냥 한갓 평면적 지식 차원에서 암기했는데, 이후에 수십 년 동안 생활경험과 독서를 통해 다양한 지식과 정보들을 축적하면서 그 때 배운 개념과 원리가 효소 작용을 했는지 몰라도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보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성리학을 깊이 천착하면서 리기론과 원자론이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갖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물질에서는 이론물리학과 실천물리학의 관계, 정신에서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얻게 된 통찰력이랄까 예지의 원천이 바로 소년기에 화공과에서 배운 원자론과 분자론이었다. 철들어 돌아보니, 조선시대 성리학의 출발점이었던 격물치지 단계가 화공과 시절이었던 것이다. 구시대 성리학자들이 격물치지 하는 방법은 화두 집중과 오감으로 통한 관찰로서 관념론 위주였으나, 나의 격물치지는 거기에다 화학 이론과 실험검증을 통한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과학이 이룬 학문적 성과와 현실세계의 현상을 기존의 성리학 이론 체계에 응용하면서, 우주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리기론과 심성론을 사색하고 인성론과 수신론, 치국론에 접근하다보니 이전의 성리학과는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선배 성리학자들이 가질 수 있는 사색의 재료는 간단했지만 나는 비교적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까지 정리한 리기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주기론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논리는 정리해 놓은 성리학 관련 논문에 있으니 독자들은 인연이 닿은 다면 일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화공과 선택이 현실적 출세 면에서 보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내 인생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소년 시절에 나름대로 격물치지기를 경험함으로써 이후의 성리학 탐구와 시 쓰기에 큰 밑거름을 장만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구시대 성리학자들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자부심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은 내 성격의 가장 큰 단점인 자만심의 소치일 뿐이고, 학문 앞에서는 더욱 겸허한 자세를 갖춰야만 더 깊은 경지를 볼 수 있으니, 자중자애하며 꾸준히 사색과 학문의 길을 걷고자 할 따름이다. 문학과 시에 대한 넋두리인데 얘기가 번져 성리학 쪽으로 나갔다. 다시 본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 소년시절에 만든 공책시집으로 1970년 5월에 쓴 <飽滿> 외 60편이 들어있는 『松花』가 있다. 마침 박근혜 씨가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는데, 치졸스럽지만 들어있는 한 편을 옮겨본다. 朴正熙 將軍//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잡아/ 民族을 求한 우리의 英雄// 民族의 갈 길을 제시하시고/ 찬란한 太陽 높이 든/ 五千萬 韓民族의 領導者// 뻗어가는 國力으로 우리를 감싸시고/ 숙원 祖國統一과 滿洲 征伐/ 成功하실 稀代의 男兒// 半萬年 歷史에 轉換點을 기르시고/ 번영의 생활을 주신 우리의 太陽,//아, 榮光되어라/님이여, 千年을 노래하소서. (1970년 10월 6일). 11년 째 공교육을 받는 열일곱 살 소년의 눈으로 본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그랬다. 다른 통로의 지식과 정보는 전혀 보고 들을 수 없었다. 그 때가 아마 3선 개헌 직후였겠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유신총통제를 선포하고,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궁정동 안가에서 권총 몇 발에 생을 마감했으니, 3선으로 딱 마쳤다면 후세 역사에 두고두고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을. 2013년부터 5년 동안 펼쳐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 본인이야 얼마나 많은 감회가 서렸으랴. 아무쪼록 선친의 공과 과를 잘 분별하여 공은 늘이고 과는 보충함으로써 부녀 모두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기시라. 민주주의 선거 마쳤으니 찬반을 초월하여 이젠 덕담을 쌓아야지 안 그러면 국민들이 고달프다. 두 번째 공책시집은 고3 때인 1971년 1월 1일에 쓴 <삶> 외 66편이 들어있는 『白雲嶺』이다. 후일인 1975년 봄날 교대 2학년 때 교정에서 우연히 만난 전경 탈영병 김원섭이가 내 자취방에 며칠 눌러 살다가 이 공책 시들을 읽어보고는 다음과 같이 메모해 놓았다. 「地心은 빗물 먹고/ 나는 눈물마저 삼키지 못하는/ 4월 느즈막한 어느 날// 광인이 못내 그리워/ 광인이 못내 그리워// 어차피 正常人이 못된 우리/ 자네마저 그리운/ 이 날/ 돌아와 주게/ 내 곁엔 지금/ 허무뿐인데// 태산이 무너지고/ 지구가 날/ 배신할 적에// 나는 울었네/ 나는 슬펐어라// 못내 그리운/ 情아// 당신마저 날/ 버린다면// 나도/ 날 버려야겠네. 小時쩍/ 할아버지네 초가 처마 끝을/ 날아든 제비 한 쌍은// 그 땐/ 버들피리 불며/ 너와 내가 한 덩어리 되어/ 우리도 자연 속에 묻혔더라만// 오늘은/ 파멸의 창공을/ 찾아든 어리석은 짐승이 되어// 자연으로부터 추방당한/ 天刑의 죄인이 되어// 형극의 가시밭길을/ 함께 헤매는/ 고통스런 同伴者가 될 줄이야.」 물매암이처럼 혼자 끙끙대며 쓰는 일기와 습작이 그런대로 효과를 냈는지, 교내 백일장에서 두 번 상을 탔다. 2학년 때는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에서 산문부 차상으로 냄비를 부상으로 타 자취생 밥솥으로 잘 써먹었다. 3학년 한글날 기념에서는 시부 차하였다. 또 영주시 고전경연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세 번째 공책시집은 1972년 7월 17일에 쓴 <七月 -어느 날> 외 52편이 들어있는 『望鄕草』이며, 네 번째 공책시집은 1973년 4월 12일에 서울 남산공원에서 쓴 <슬픈 사람들> 외 50편이 든 『龍頭山』이다. 이때는 2년간의 낭인시절로서 쓴 장소를 보면 남산공원, 야간열차, 용산역, 효창공원, 술집, 역, 산 등인데, 보통사람들이 보곤 ‘저 인간 좀 이상하네’라고 할 정도로 하여튼 많이 긁적거렸다. 우리 시절엔 역이나 공원 구석진 곳에서 뭔가 메모하는 청년들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전혀 볼 수가 없다. 혹여 본다면, 좀 쉬다 하라며 맥주 한 캔 사 주겠다. 출구 없이 속으로만 휘몰아치는 습작기 동안 비비안리가 나의 애인이었다. 그녀의 잡지 사진 한 장을 어찌 구했는데 오른쪽 머리칼 색깔이 좀 희미해서 검정 볼펜으로 공들여 덧칠해서 공책에 척 붙여 놓고는, 美女訟// 白雪 같은 살결 위에/ 방금 뿜어나올 듯한 간드러운 유방 위에/ 그리운 날을 헤는 思索이 散步하고/ 예지에 빛나는 눈은 사랑을 갈구한다// 요염한 미소, 太古의 정적을 깨치며/ 火山처럼 터져 나오는 女人의 欲情,// 世上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입술은/ 이제 새로운 甘泉을 찾아 간다// 純白으로 빛나는 보석,/ 윤기 흐르는 긴 흑발 휘날리며/ 東原을 갈 때 天地는 감격했었다/ 오직 당신만이 人生의 化身이라고,// 침중한 餘白에 싸여 흐트리는 분위기,/ 하얀 얼굴은 하루를 다듬는 정원,/ 太古의 꿈을 꾸며, 신비로운 미소 띄우며/ 人生을 간파한 女人의 눈은/ 黃昏에 작렬하는 落照의 사연. (1973년 9월 1일). 스물한 살 때인 1974년부터 여러 문청들과 어울리면서 지긋지긋한 중기 습작병을 제대로 앓기 시작했다. 거대한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낙동강이 흐르는 안동에서 2년 반 동안 화려하게 펼쳐졌다. 어영부영 두 해를 낭인신세로 보내고, 고3 때와 재수, 삼수의 낭인시절 때 그 어려운 예비고사에 매해 합격해 놓고도 대학 입시는 안 보고 꼭 병든 장닭처럼 비영비영하다가 징병검사를 받는 해인 1974년에 인근도시에 있는 안동교대에 들어갔다. 그것도 꼭 국민학교 선생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정형편 상, 군대 안 가려고, 우유부단한 기질 때문에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자아와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성 카오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그 불안은 사춘기와 청년기 7년 반 동안 모질게도 나를 갉아댔다. 나만 습작병을 앓는 줄 알았는데 안동에는 동병상린 하는 청춘들이 많았다. 첫사랑에 홀려 학보사와 일요문예동인회에 들어가면서 교육대학과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청과 문인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나보다 10년 정도 연장인 김주영, 김원길과 6년 정도 연장인 임명삼, 임병호, 김진택, 임관혁, 김지섭 등이 있었고, 교대 동기, 선배들로는 아래 위 두세 살 차이로 권석창, 황근식, 김선굉, 오승강, 주영욱, 서정오, 권보혁, 안태준, 이중현, 권오범 등이 있었다. 교대생이 아니고 안동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경서가 나보다 두세 살 적은데도 처음부터 말을 놓고는 함께 어울렸다. 각자들의 소속 문학모임은 안동문협, 글밭, 일요문예동인회, 맥향이었다. 우리는 주로 구시장 주점과 복개천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참 많이 마시고는 떼로 낙동강 가에 있는 육사시비에 가서 대성통곡을 한 다음에 백사장에 퍼질시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그 때 술값은 학보사 원고료가 주로 쓰였다. 당시의 화제 가운데 하나가 ‘명작의 고향’이었다. 저마다 나중에 자기 고향이 ‘명작의 고향’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올 거라고 자랑하였다. 그 당시에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던 사람들일수록 이후 이름이 차츰 빛나기 시작하더니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 보면 한국시단에서 중진으로 각자 위치하고 있다. 교육대학과 초등학교 교단이 갖는 특성과 한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와 동화 쪽으로 흘러갔지만, 문청시절부터 자유시를 고수한 시인들은 결국 자유시인으로 이름 석자가 남았다. 다섯 번째 공책시집은 1974년 4월에 성은 김이요 이름은 QJ에게 바친 첫 시 <솔꽃이 피는 고개> 외 31편이 들어있는 『虛無魂』, 여섯 번째 시집은 <이 아침의 혁명 -그대를 그리며>외 31편이 들어있는 『心井』, 공책시집의 제7권은 주로 1975년에 쓴 시로 <東風賦> 외 40편이 들어있는 『靑銅衰』이다. 그런데 앞에 1~4권까지는 그런대로 평온한 정서적 습작풍이었으나, 5~7권은 그만 <솔꽃이 피는 고개> 이후부터 폭발한 첫사랑의 광풍 때문에 시 꼬라지가 피철갑이었다. 매친 듯이 맨날마다 써서는 학보사에서 만날 적마다 주었더니, “박희용씨 나중에 시인되면 한턱 내야되요”라는 딱 한 마디가 돌아왔다. 그녀에게 써 바친 혈시가 모두 한 100여 편? 나에게 닥쳐온 첫사랑이 남들만큼 아팠지만, 40년이 지나도 아직 시인이 못 되었으니 한턱 낼 날짜가 아득타. 그래서 기분이 흐리면 ‘동심초’를 즐겨 부른다. 「獻詩 솔꽃이 피는 고개/// 花冠의 님아/ 솔꽃이 필 때면/ 목 메이는 나그네/ 내 돌아가 살 땅을 주오// 영원한 세월의 江이/ 야리게 일렁이듯/ 내 그리워 할 影을 주오// 당신의/ 화사한 웃음이 사라진/ 龍鄕原의/ 쨍쨍스런 하루는/ 꼭꼭 눈물만 찍어내더이다// 하냥/ 남으라시면/ 당신의 映像을 손질하오며/ 千年이고/ 萬年이고/ 울잖고 기다리오리다// 花冠의 님아/ 먼 먼 훗날에/ 호호백발 할미 되어/ 솔꽃 피는/ 이 고개를 넘을 때면/ 불현듯/ 오늘이 그리울 게외다」 솔꽃은 해마다 피지만 이놈이나 그년이나 호호백발 다 되어 가니, 하루하루 짙어지는 치매끼 땜에 불현듯 그리워할 서정이 없음. 2년 동안 90학점을 이수해야 할 교육대학생이 훌륭한 국민학교 선생이 될 생각은 안 하고 ‘스트럼 운트 드랑크’만 즐기다 보니 교대공부를 팽개친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느라 끙끙대고, 설상가상으로 유신독재정권이 한창 독이 올랐을 때인 1975년 5월, 당시 꽤 잘 팔리던 『문학사상』에 실린 패망한 월남대학생들의 반성문을 대학신문에 전재하라는 주간교수의 명령에 거부하다가 편집국장에서 파면되어 번민, 방황하는 바람에 1학기말고사를 안 쳤으니, 남들 다 졸업한 뒤에 한 학기 학점을 따야 할 수 있는 추가졸업은 받아놓은 사약이었다. 그 때 『문학사상』 등의 문학지가, 어용문인들이 권력에 굽혀 어떤 짓을 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그래도 앞 기수까지의 선배들은 RNTC를 했기 때문에 추졸해도 군대를 안 갔다. 그 대표적 인물이 권 모 시인으로 추졸 두 번 하고도 참으로 운이 좋아 군대 안 갔다. 나도 그걸 믿고 배짱 좋게 뻗치다가 파면당하고 시험 보이콧해서 추졸했는데, 웬걸 남은 학점 따러 후배들 낯 바시는 강의실에 성실히 들어가고, 대부분 시간은 도서관에서 좋은 시 베껴 쓰며 광기를 다스리는 중인 1976년 4월에 군대 가야한다는 청천벼락이 날아왔다. 고놈의 벼락이 어찌하여 이 시골 교육대학의 허접한 인간에게 날아왔는지 뒷말을 들어보니 글쎄, 75년 봄에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북도교육청 초도순시 왔다가는 “교육대학생 가운데 추졸자들이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고는, “무어? 장차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교육대학생이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해. 고연 놈들 당장 군대 보내!”라고 했다 한다. 부랴부랴 75년도 추졸자까지는 군대 안 보내기로 하고, 76년도 추졸자부터는 보낸다고 대구교대와 안동교대로 공문을 보냈는데, 대구교대는 방학학기를 열어 추졸자를 없앴으나 안동교대는 그 공문을 그냥 쳐박았다고 한다. 제대하고 1979년 봄에 대구교대 복학해서 공부해보니 대구교대 교수님들은 정말 교수다웠다. 반면에, 추졸 징집 대상자들을 연구실에 불러선 “군대 안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하던 그 교수 생각난다. 그 땐 그 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박정희도 대구사범 다닐 때 성적이 뒤에서 몇 번이었다 하는 걸 보니 사범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고, 문경보통학교 훈도 3년 남짓 하고는 혈서충성문을 쓴 덕택에 만주군관학교 입학해서 출세했으니 초등교육에 사명감이 별로였지 아니한가. 하여튼 유신정권 명령 때문에 편집국장 파면에다가, “군대 보내”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소중한 청춘시절 2년 동안 일주일에 6시간에다 여름방학 다 바쳐서 RNTC 군사훈련 받고도 군대에 가게 되었으니, 정말 나의 스물두 살인 1975년 을묘년은 재수에 옴 붙었다. 고2 때 <朴正熙 將軍>이란 칭송시를 썼는데도 말이다. 내가 말띠이니 토끼 한 마리가 앞에서 깡충깡충 뛰어가는 걸 심약하게 피하다가 크게 낙상한 쾌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탈영병 김원섭이가 내 공책시집을 읽고 예언한대로 <광인, 허무, 천형의 죄인, 형극의 가시밭길>을 따라 1976년 6월 21일 밤 포항역에서 논산행 입영열차를 탔다. 고3 때는 교대 가기 싫었고, 징집신검 전해엔 군대 가기 싫었다. 가정 형편과 나폴레옹의 모자에 혹해 육사시험은 쳤지만, 우유부단한 문학도의 특성이랄까, 부드러움과 자유에 상극인 군대에 참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군대 문제와 가정 형편 때문에 RNTC제도가 있는 교대로 마음을 굳혀 교육대학생으로 2년을 보냈는데, 결국 가게 되었다. 하여튼 중학시절에 형성된 햄릿형과 동키호테형의 이중성격 대문에 번번이 운명이 꼬였다. 입대 직전에 모진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 금정리다. 신작로 가 뉘 집 어느 여인이 심야에 라디오를 틀어 놓았나, 삼동산 우구치 아래 금정리의 밤하늘에 흐르던 ‘지고이네르 아이젠’, ‘짚시의 달’이 지금도 귀에 감미롭다. 살자, 죽는 것 보다 사는 게 훨씬 아름답다. 감정의 무풍지대인 교육대학에서 ‘라스트 로맨티스트’라고 자부하며 설쳐대던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그렇게 끝났다. 「사금파리의 유언// 내 몸이 흩어져/ 다시 모래알로 흙으로/ 돌아간다만/ 한 평생 살던/ 하늘을/ 날카롭게 금 그어/ 방울방울 솟아나던 혁명을/ 흔적 하여 다오」 「戀歌 26 철길// 마음도 하 서러워/ 별빛이 총총히 들어서는 날/ 철둑을 베고 누웠다가/ 기적소리 쯤에야 아예 놀라지 않다가/ 비로소 징징거리는 철길의 울음에/ 다섯 길 풀언덕 아래로/ 풍만한 몸을 굴리는/ 여인 있었다」 육군제2하사관학교와 육군행정학교의 훈련생활과 울산 제622고사포대대에서 군대 생활을 꼭 30개월 동안 했다. 그 동안에도 늘 시를 생각하고 책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때 『님의 침묵』을 절실하게 읽었다. 스물다섯 때인 1978년 봄에 첫 휴가 나와서 대구매일신문사에 <비비추새>를 투고했더니 4월시단에 실렸다. 아가씨들 펜레터 받을 욕심에 주소를 7232부대로 한 탓에 보안에 걸려 자칫하면 영창 갈 뻔 했다. 공책시집 만드는 버릇은 여전해서 78년 봄 작전과에서 일할 때 폐지도지로 입대 이후에 쓴 <유사.3 -패랭이꽃처럼> 외 8편을 담은 공책시집 제8권 『頓曉詩集 -패랭이꽃처럼』을 타이핑해서 만들었다. 빡쎈 훈련으로 몸과 마음이 정화되어서인지 입대 전의 광기가 사라지고 비로소 시 비슷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군대시절이란 단련기가 없었다면 1976년 여름에 분명히 정신과 육체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유사 3 -패랭이꽃처럼// 옛날 나의 할아버지 한 분은/ 황산벌에 모인 계백의 5천 결사대의 한 사람이었다/ 그날 새벽, 싸움을 앞두고/ 할아버지는 허리춤에다 자꾸 달빛을 감추고 있었다/ 달빛이 하얗게 피는 이깔나무 가지 위/ 목청이 좋은 까치 한 마리가 박자를 맞춰서 울고 있었다/ 전쟁터이라 소반에 올릴 눈물도 없는데/ 손님은 뉘일까/ 퍼올려도 퍼올려도 마를 날 아득한 이별가 너머로/ 벌판을 덮던 조상들의 죽음을/ 영기 그늘 아래 패랭이꽃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시간의 죄 없는 목숨을,/ 손님은 뉘일까/ 천지에 가득한 패랭이꽃의 죽음을 밟고 오는/ 달빛에 젖은 손님은 뉘일까 」 「생명연습 1// 그날 바람이 조금 불었다/ 죽음의 나무에는 청자빛 풀잎이 피었다 이울었다가/ 못된 사내아이가 버린 곰인형은 바람 따라 훌쩍훌쩍 울었다/ 모성의 노을 속으로 까마귀 한 마리 깍깍깍 길게 울었다/ 나는 풀잎 하나 따 물고 풀잎의 절개를 연습하면서 수백 번 엎어졌다/ 그날 바람이 조금 분 후 아무 데도 풀잎은 보이지 않았다/ 풀이란 풀은 하늘 끝까지 말아 올리고 흙이란 흙은/ 뜨겁게뜨겁게 사형되던 날」 「비비추새/// 몇 마디 언어는/ 하늘에서 풀풀풀 떨어져 내리다가/ 이윽고 비비추새가 되어 날아갔다// 환시의 하늘 한가운데/ 붉은 고추잠자리 떼가/ 수없이 시간을 뿌려대고 있었다//몇 마디 언어는/ 언덕에서 풀풀풀 굴러져 내리다가/ 이윽고/ 민들레꽃으로 피어났다// 청동의 거울무늬/ 허물어 내리는 비비추의 하늘을/ 나는/ 수없이 민들레꽃씨를 날리고 있었다」 「아침 병영// 鍾소리도 얼어/ 짧은 아픔을 토하는 겨울날 아침 병영/ 南道의 참새들은 울기도 유난하다」 「새/// 인동의/ 껍질을 깨고/ 의식의/ 가장 깊숙이/ 흩어지는 종소리처럼/ 새/ 금빛 깃 새떼의/ 행방// 성난 자정의/ 살기를 쪼아 물고/ 부활하는/ 오 새벽으로/ 날개 짓 하는/ 새/ 일천 일 만 마리/ 새의 목숨은/ 녹슬었다」 1978년 12월에 제대를 하고, 이듬해인 1979년 영남일보 3월 시단에 <필부가>, 1981 영남일보 7월 시단에 <강 언덕 너머에는> 발표로 이제 겨우 중기 습작기를 벗어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공책시집 제9권은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쓴 <風景 2> 외 65편이 들어있는 『開山詩集』이다. 8권 째인 25세부터 거친 습작기의 불안한 광풍이 잦아들더니 제9권 째인 30세 가까이 되어서야 비로소 늦깎이로 중기 습작병이 갈피를 잡았다. 「낙동강/// 낙동강 칠백리를 떠내려온/ 풀씨 하나/ 오늘은 강변 모래톱에 뿌리 내렸다/ 발돋움해도 발돋움해도 보이지 않는/ 네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꽃은,/ 이제는 떠내려가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풀뿌리 움켜잡으며/ 아비의 삽날에 찍힌 벼 포기들이/ 오늘은 강가에 벌거숭이로 누워있다/ 누가 버렸을까 국산 크림통에/ 가득히 고인 가난/ 그 아득한 마을에 큰물이 나면/ 해 긴 여름날 하루 종일/ 세월을 물레질하던 어머니// 마침내 강가 모래톱 한 구석에/ 이름 없이 묻혀/ 썩어서 무엇이 되는가 풀씨여」 「匹夫歌// 네 손에 거머쥔 한 줌 흙의/ 깊은 밤이면 흘리는 땀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네 눈에 들어와 박히는 한 더미 반도의/ 뜨거운 피 흘림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아우여 가슴을 벌리고 한껏 쬐는/ 눈부신 자유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갈매기가 끌고 가는 수평선의 끝 간 데에/ 이따금씩 분수지는/ 부끄러운 네 눈 속의 그리움을/ 너는 아직 모른다」 「강 언덕 너머에는/// 강 언덕 너머에는/ 사람이 산다/ 마을을 떠나/ 강을 향하여 등을 돌린/ 삶의 비 내리는 부분에도// 갑남을녀/ 후줄근한 이름의 사람들이 산다// 강 언덕 너머에는/ 한 뼘의 마당귀에 피어난/ 패랭이꽃의 꿈만하게/ 시간이 출렁이고// 아내여/ 삶의 풍요는 어디 있는가」 다음으로, 나의 문학활동에서 가장 기력이 왕성했다고 할 수 있는 안동에서의 『말ㅆ․ㅁ』 시절을 정리해 본다. 1979년 10월에 경산군 숙천국민학교에 발령 받아 1982년 2월까지 2년 여 동안의 경산군 선생 생활을 마치고, 1982년 봄에 안동으로 전근을 와서부터 1986년 봄에 녹전으로 전근가기까지 29세부터 32세 까지 4년 동안의 ‘말쌈문학동인시절’을 펼쳤다. 동인은 임명삼, 서정오, 권보혁, 주영욱 등 5명으로 일러서 ‘洛江五友’이라 칭하며 걸걸하게 놀았다. 각자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길안과 청송, 경산에서 생활한지 서너 해, 비록 몸은 국민학교 교단에 얽혀있지만, 교대시절에 제대로 태우지 못한 문학정열이 우리들의 가슴 가득 들끓고 있었다. 문학을 향한 작은 발걸음을 함께 다시 시작해보자는 의논을 한 끝에 장강의 뿌리가 산 계곡에서 시작하듯 우선 회보 형태로나마 동인지를 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 봄에 『同人 말씀』 제1집을 냈다. 서정오가 필경한 14쪽 원본을 안동농아학교에서 100부 정도 복사하였다. 박희용이가 숫자를 시어로 사용한 <眞理>와 <本性> 두 편의 시를, 권보혁이가 소설 <어떤 삶>과 촌평 <달라진 게 없었다>를, 서정오가 우화소설 <舜 임금의 금혼령>과 촌평 <왜 말하기가 두려운가?>를 썼다. 2집부터 제자를 ‘말’ 자와 ‘ㅆ +아래 아 + ㅁ’으로 써서 ⌜말ㅆ․ㅁ⌟으로 나타내고, 말을 쌈 싸서 먹는다는 뜻으로 “말쌈”으로 읽었다. 출판기념회는 1982년 4월 4일 예안호에서 셋이서 자기 낚시대를 호수 가 여기저기 펼쳐놓고, 낚시대에 붙인 두루마리에 쓴 현수막에다 소주잔을 부어 고사를 지내며 조촐하게 했다. 서정오의 <舜 임금의 금혼령>은 나중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곧 교대 한참 위 선배이자 안동농아학교 선생이었던 임명삼이 합류하였다. 형편이 조금 나아져 한여름인 1982년 8월 17일에 광석동 허름한 인쇄소에서 27쪽 인쇄본으로 『말ㅆ․ㅁ제2집』 200권을 냈다. 글모임의 명칭도 ⌜말ㅆ․ㅁ동인회⌟로 하였다. 제2집에는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1 誓願 2 탈 3 사람이 죽던 날 4 풀잎 5 사람의 싸움 6 傷心>, 권보혁의 소설 <사랑, 그 첫 번째>, 임명삼의 수필 <탑돌이>, 서정오의 소설 <大明天地>가 실렸다. 산 계곡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가 차츰 꼴을 갖추게 되자 지역의 문학인들과 문화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타 지역 문인들의 격려가 좀 있게 되자 용기를 얻은 동인들의 창작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동인회도 한층 태를 내기 시작했다. 2집을 어디서 보았는지 울진 후포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는 최영욱이가 합류하였다. 『말ㅆ․ㅁ제3집』은 1983년 1월 20일 영남사에서 인쇄본 58쪽으로 300권을 냈다. 동인들이 20여 권씩 나누어 가진 다음에 전국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및 안동교대시절 인연한 동료, 선후배들에게 보냈더니 많은 격려 답신이 왔다. 제3집에는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7 鬼神論 8 패랭이꽃처럼 9 元曉 10 首陽山고사리 11 全琫準 12 供出>과 <강 언덕 너머에는>, <낙동강>, <水平線> 등이, 임명삼의 수필 <下午의 風景>과 <서울과 지도>가, 최영욱의 희곡 <風土病>이, 권보혁의 소설 <통고산>이, 서정오의 소설 <뒤 따라오는 사람>이 실렸다. 1월 22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김원길, 강윤수, 최유근, 권석창, 장종규, 김진술, 최종식, 김경숙, 김근환, 김충길, 박혜경, 김종숙, 김완배, 임종우, 기영주, 임형규 등이 축하와 부조를 하는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했다. 전국에서 많은 축하와 격려 서신이 왔는데 충주의 박재륜 시인이 격려 붓글씨를 한 폭 보내왔다. 『말ㅆ․ㅁ제4집』은 자필 유일본을 내자는 서정오의 의견에 따라 책 형태의 큰 노트에다 여러 동인들이 돌려가면서 1983년 말 경에 거의 다 썼다. 다 되면 그것을 복사하여 나누어 갖자고 했는데 유사인 박희용이가 잘 챙기지 못하여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아마 포항의 안태준이에게 가 있지 않은가 한다. 청송 진보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는 주영욱이가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최영욱은 이후 연락이 없었다. 『말ㅆ․ㅁ제5집』은 1984년 7월 28일 65쪽으로 영남사에서 300부를 냈다. 제5집에는 주영욱의 시 <겨울까마귀>, <西녘구름 Ⅱ>, <노을앞에서>, <離別>, <絶望>, <幻影>, <決別>, <노을> 등이,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13 僻地에서 14 막걸리를 마시며 15 弔辭 16 강강수월래 17 뼈를 추리며 18 免賤介同이 19 覺華寺에서>가, 임명삼의 수필 <잃어버린 마을>, <단 하루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洛江五友> 등이, 서정오의 소설 <容態>이, 권보혁의 소설 <배앓이>가 실렸고, 마지막 장에 有事인 박희용의 <말ㅆ․ㅁ 5집을 펴내면서> 발문이 실렸다. <洛江五友>를 읽어 본 정보경찰이 안동농아학교로 임명삼을 찾아와 글을 쓴 의도와 동인들의 신상을 물었다고 했으나 뒤탈은 없었다. 출판기념회는 1984년 7월 28일 안동문화회관에서 오승강, 박경서, 김원길, 박인영, 이진구, 장종규, 김춘수, 기영주, 권석창, 강기석, 박성철, 박영교, 김지섭, 안태준 등이 참석하여 부주 및 축하를 해주었고, 한국일보사, 김시종, 김진태, 허형만, 박덕규, 손춘익, 구상, 이윤수, 지용옥, 강영환, 박신환, 이정룡, 방태석, 강윤수, 김필곤 등이 서신을 보내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김춘수가 문화회관에 어찌 왔다가 동인지 출판기념회 안내문을 보고 왔는데, 이미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교재로 돌려 읽었으며, 유풍에서 모여 술을 마실 적마다 성삼문의 <북소리 인명을 재촉하니/ 저승길 주막이 없어라>라는 절명시를 소리높이 읊는 우리로서는 <꽃>은 좋으나 민정당 국회의원이 된 김춘수는 영 시답잖아 대접을 거칠게 했다. 이후 1984년 말에 서정오가 대구로, 1985년에 임명삼이 대전으로, 1986년에 박희용이 녹전으로 전근 가면서 동인들이 얼굴 마주할 기회가 차츰 귀해지더니 동인활동이 소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말ㅆ․ㅁ동인⌟들 몇몇의 문필활동은 쇠약해지기는커녕 더욱 내면화, 외면화하면서 2010년대에도 그 시절의 정열을 잃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임명삼은 1985년 말에 대전으로 식솔을 끌고 이사 가서 원명학교에 근무하며 수필집 『사랑하며 영원을 사랑하며』내고는 없는 머리칼이지만 더 깎아 스님이 되어 경기도 이천에 마련한 부석암에서 『친일불교론』, 『불교사 100장면』, 『종정열전 1, 2』 등 많은 책과 『친일인명사전』의 <친일승려들> 편을 쓰면서 시공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정오는 1985년에 더 넓은 세상인 대구로 식솔을 데리고 이사 가 효성학교에 근무하면서 소설보다는 아동문학과 옛이야기를 되살리고 다시 쓰는 일에 노력하고 있다. 『언청이 순이』, 『꼭 가요 꼬끼오』, 『옛이야기보따리 시리즈 10권』, 『일곱 가지 밤』 등 많은 책을 펴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쓴 글 여러 편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박희용 역시 1986년 봄에 안동 시내를 떠나 식솔들을 데리고 시골인 녹전면 녹남국민학교로 전근을 갔다. 시의 길에 들어선지 30년 만에 그동안 쌓아놓기만 했던 시들을 모아 2000년 7월에 시집 『霜寒圖』를 펴냈다. 2001년 3월에 『교단문학 통권 제29호』의 제31회 교단문학신인상 시 부문에 <바람 부는 날>외 2편이 당선되었다. 2004년 이후부턴 영주작가회의 회원, 경북작가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영주작가』, 『작가정신』, 『경북작가회의 시선집』, 『사람의 문학』 등의 문학지에 시를 발표하고 있다. 2008년 5월엔 대운하 반대와 생명의 강을 모시기 위한 시인 203인의 특별 공동시집 『그냥 놔두라 쓰라린 백년 소원 이것이다』에 <삼강주막>을 발표하였다. 또한 2010년 2월엔 2002년 이후 여러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발표한 時論들을 모아 『兩白集 秋 疏論筆談』을 펴냈고, 현재는 두 번째 시집인 ‘兩白集 春’과 산문집인 ‘兩白集 夏’, 學讀集인 ‘兩白集 冬’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1982년에서 1985년 까지 약 4년 간 이루어진 ⌜말ㅆ․ㅁ동인회⌟활동을 통해 동인들의 문학적 안목과 역량이 비로소 무게 중심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막역한 사이의 문우들이었지만, ‘同人’이란 서로를 더욱 섞이게, 충돌하게, 비교하게 하는 큰 양푼과 같은 존재였다. 저마다 다른 행보로 걸어온 20대 초, 중기의 문청시절을 마감하며, 20대 말기부터 30대 초까지와 안동이란 시공간에서 전개한 활발한 동인활동은 개인적으로는 창작 의욕을 더욱 매섭게 불러일으키며 좁은 아집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회와 시대의식에 눈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ㅆ․ㅁ동인회⌟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으로서의 문학과 사회로서의 문학이 만나 문학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필독서로 하여 돌려보며 토론회를 자주 가진 정황에서 볼 수 있듯이 동인 모두가 변방의식에 근거한 비판정신이 투철하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한창 서슬 푸른 80년 대 초라는 시대적 환경과 공룡 서울공화국이라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지방 소도시 안동의 젊은 문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賊’을 돌림자로 하여 山, 馬, 水, 草, 海를 앞에 놓아 각각의 호를 지어 ‘五賊’이라 부르며 막걸리 잔으로 울분을 토로하였다. 시대가 삐딱해지면 선비들과 문사들은 몸을 감추는 법, 중국에 죽림칠현이 있었고 광해군 때 여강남안에 강변칠우가 있었다면, 1980년대 초의 안동에는 낙강오우가 있었다. ⌜말ㅆ․ㅁ동인회⌟는 엄동의 시대에 관변문학단체만 존재하던 북영남 지역의 경직된 문학풍토에 민중, 민족, 민주를 지향하는 문학 본연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여명이었다. 동인들은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의 다양한 문학 장르를 망라한 각각의 작품에 안동지역의 정서와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확고한 선비정신과 문학관을 갖고 부화스런 세상에 쉬이 굽히지 않았다.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동인회 활동기간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학정신 본연의 자유로운 서정과 사상을 작품과 행동으로 표현했던 노력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연결고리로서, 분명 이후의 북영남문학 발전에 거름이 되는 뚜렷한 문학사의 한 마디가 되었다. 1986년의 삼십대 이후부터는 시와 학문이란 두 길을 걷기로 작심하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후 15년간은 시골 초등학교 교사의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낮에는 호구지책에, 밤에는 일기, 독서, 창작은 이어졌으나 정신의 웅덩이 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구에 사는 서지행이가 민주화운동, 전교조 운동, 민족문학 운동 등에 관한 자료를 보내오고 참여를 권유했지만, 시골 초등학교 선생 노릇에 안일하다보니 시대의 흐름에 뒤지고 말았다. 90년대 초에 안동의 <글밭>에 가입하여 작품 활동을 했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들과의 교류를 접었다. 그러다가 서정오의 권유로 2000년에 시집 『霜寒圖』를 펴내 그간의 갈증을 면한 다음에, 2004년 50대 나이에 들어서 인터넷 카페 ‘양백재’를 만들어 사람들과 교류하고 영주작가회의와 경북작가회의에 가입해서 활동하다보니 글쓰기에 더욱 재미가 들어서 10년 동안 시와 산문을 많이 썼다. 이걸 보면 혼자 하는 문학이란 물매암이처럼 맨날 자기 생각에서만 맴돌지만, 다른 작가들이나 독자들과 교류하는 열린 문학을 함으로써 자기의 그릇이 넓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나의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바로 물매암이 시절이었음을 통감할 뿐이다. 나의 문청시절에, 문학의 길을 이끌어 줄 스승이나 선배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그렇도록 건조한 나르시시즘과 퇴폐주의에 매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문청들은 모두 자기만의 고뇌에 휩싸여 몸부림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어쩌다 만나면 상대방의 아픔엔 전혀 관심이 없이 “우리들의 스승은 술이다!”라고 외치며 술부터 마셔댔으니, 무슨 도움을 받아서 내 시가 자랄 것인가 말이다. 글 선배들도 “시 잘 쓰려면 술 잘 먹어야 해!”하며 그저 술잔만 거듭 권했다. 교대 오기 전까지는 술을 몰랐는데, 그렇게 배운 술 문화 때문에 ‘문인들은 만나면 당연히 술부터’라는 고정관념이 수십 년 동안 뇌에 저장되어 있다. 「예안 장터// 창수네 옥이네 모두 돌아와/ 지난번에 못다 꾼 꿈 이루더라고/ 물먹은 기와장/ 십 년 너머 물살이 하는/ 초가지붕 화안한 박꽃/ 오랜만에 옥희로 오랜만에/ 지상에 나타나 반가운 오후/ 골목어귀 미장원집 미스 정도 돌아와/ 한 겹 서울 먼지 산뜻 털어내고/ 미스 정 오늘 오후는 한 그루 산벚꽃/ 이루지 못할 꿈 오르지 못할 나무/ 다음 세상 기약하며/ 우리끼리 돌아와 따스한 오후/ 초가 이어진 골목 돌아 몇 채 기와집/ 감나무 한 그루 일년국화 곱던 길섶/ 마음속에 그렸다 지웠다/ 하루 종일 수선스런 예안 장터」 「안경을 안 쓰면// 안경을 안 쓰면 눈물이 난다/ 낡은 가을 햇살이 풀어내는 비문증일까//한 하늘을 이고 사는 몇 개의 사물들이/ 생활의 둘레에서 늘 낯선 손님이다/ 안경을 안 쓰면/ 직장생활을 같이 하는 덧니가 이쁜 그 여인이 생각나고/ 카플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꼭 사십 분간/ 대화를 나누는 그 사내의 속내가 궁금하고/ 적막이 늦은 강가 서로 몸을 기대어/ 시든 색이 되는 풀꽃들의 과거가 궁금하다/ 안경을 안 쓰면/ 평은강 너머 저 쪽 오번 옛 국도/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자동차 속에 앉은 인간들의 근황이 궁금하고/ 가로수로 서서 세상을 피해 사는 것들 은행/ 열매는 맺었을까 혼자 묻고 답하는/ 어느 토요일 오후 억새풀도 외면하는 가을강/ 안경을 안 쓰면/ 가벼운 신랑을 등에 업은 때때메뚜기 암컷 하나/ 배고픈 사랑이 만드는/ 생명들이 가만히 떨어지다 피다 사라지는/ 짧은 유리로 된 그 침묵이 서럽다」 「그리운 히프/// 예고개 그 화장실 첫째 칸/ 안경 벗고 핸드폰 벗고/ 재래식 구겨질까 바지 벗고 정조준/ 지긋이 힘을 주는 생리현상을/ 물끄러미 감상하는 낯익은 곡선// 어느 가난한 사내의 비린 육정이/ 검정 볼펜 선으로 남아 희미한/ 후장체위 그림 한 점/ 옥이의 히프였지 아마/ 육기 없이 앙상한 그 것// 인간의 눈 속에 타는 차가운 불꽃/ 차마 못 뱉어/ 서리서리 가슴 속에/ 무자수배암처럼 사려 두었다가/ 조립식 화장실 한 칸에서 혼자 즐거운/ 아련한 곡선미로 남아/ 지상 모든 사내들의 배설을/ 도매금으로 받아주는/ 옥이 후한 사랑이었지 아마// 새벽길 고랭지 배추를 가득 싣고/ 달려와 잠시 쉬는 대구80바 화물차 운전수의/ 이쁜 색시가 되다가/ 이른 아침 출근길 머리 허연 사내의/ 가을 되어 고개 숙인 중산층 자지를/ 잠시 일으켜 세우다가// 여인의 물빛 같은 한 생애 그린/ 담배 은박지 잘게 접어/ 고개 숙여 얼굴 감추며/ 다시 예고개 그 화장실 첫째 칸에/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신부로 돌아와/ 한 점 선으로 만든 히프를/ 살랑살랑 흔드는 옥이/ 하루 종일 꽂히는 사내들 눈정 따라/ 백일홍 붉은 가지 같은 그리움을/ 살랑살랑 흔드는 옥이」 남들은 늦어도 이십대 중반에 습작기를 마치고 이십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를 토해내는데, 나는 습작기 정리와 시 토하기가 10년이 늦었다. 등단도, 안동에서 문청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76년, 77년쯤에 동아신춘, 조선신춘, 시문학 추천, 심상 추천 등으로 훨훨 나는데 나는 스물다섯 살인 78년에 지방신문 월평 난에 겨우 시를 활자화 시켰고 40대 후반인 2000년에야 겨우 첫 시집을 내고, 그 덕으로 대구일보 문화면을 장식하고 『교단문학』에서 신인상을 탔으니, 참으로 재주가 아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목마른 자 물을 구하듯이 절실하게 뛰어들어 일찍 등단을 도모할 것을, 문단 출입을 자주 하면서 이리저리 친교 하여 줄을 잡아 볼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시도 훨씬 풍요로워졌을 것이고 문명도 높을 것 아닌가. 그랬다면 문인들과 만났을 적에 “아 박 시인 어디어디 출신이지, 중앙지 출신이야, 대단해”하는 존경사와 후한 대접을 좀 받고 좌석에서 말발이 좀 안 섰겠나. 이거 뭐 지방신문 흔해빠진 월 시단에 겨우 비비적댔고, 늦깎이로 시집 한 권 달랑 낸 신세이다 보니 모임에선 늘 술상 귀퉁이 차지다. 하지만 핏줄 탓인지 성격 탓인지 환경 탓인지 그렇게 설치고 싶지는 않았다. 지방신문 월시단 세 번 발표도 그냥 투고했더니 실어주었고, 동인지 『말ㅆ․ㅁ』 내고는 두루 보냈더니 반응들이 좋았다. 첫시집 『霜寒圖』를 내서 보냈더니 역시 반응이 좋았고, 이걸로 2001년에 『교단문학』에서 신인상을 주어서 받았다. 또, 고맙게도 맹문재 평론가가 이 시집을 받고는 시 「보리들」을 『농업기반』통권 198호에 실어주더니 2002년 봄에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집』(북갤럽)에 실어주어서 이름 석 자가 비로소 빛을 봤다. 여태까지 유명시인이나 편집자를 찾아가 인사 땡기고 뭐 좀 하고 부탁한 적이 없다. 이것도 성격인데, 그 성격도 핏줄 타는지 조상 내력이 그렇다. 우리 8대조께서 봉화 소천 두메로 은둔하신 후 선조들께서 해마다 선영들이 있는 충주 목행마을에 묘사를 다녔는데, 한 번은 증조부께서 말을 타고 어느 마을 앞을 지나다니 종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선 “어느 놈이 감히 우리 양반마을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느냐”며 시비하더란다. 증조부께서는 의젓하게 말 위에서 “소천 박 아무개 지 말 지 타고 간다 해라아”라고 하셨다는 구전이다. 핏줄 내림은 어쩔 수가 없는 지,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시에서도 나는 자만이 심한 편이다. 비록 못난 시라 하더라도 내 시 내가 쓰는 데 무어 꿇릴 일이 있으랴! 시든 학문이든 빚진 게 없다. 시 스승과 글 스승이 있는 사람들은 스승의 그늘과 동문들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나는 스승 없이 자득하고 있으니, 눈치 보아 깎고 보탤 까닭이 없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인이다. 말을 보탠다면, 각 분야에서 태두인 사람들은 모두 자득파였지 스승의 문학과 학문을 그대로 답습하는 순종파가 아니었다. 또 시는 청춘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감성의 시를 일컫는 경우이고, 진중한 시는 젊은 날의 반짝이는 재기가 아니라 자아와 타아의 삶을 깊이 사색하는 걸음걸음에서 엉킨 오랜 내공에서 우러나오고, 또 그렇게 할 때 시가 비로소 청춘의 문학이 아니라 생애의 문학이 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철석같으니, 비록 문단의 변방에 위치한다 해도 ‘인부지이불온불역열호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내 소년시절부터 시작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문청시절을 거쳐 장년시절을 통과하더니 이제 노년시절로 접어들었다. 문학의 길을 걷는 많은 동지들이 그러하듯 나도 초기 습작기와 중기 습작기간 내내 참담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내게 시는 투철한 자기응시였다. 집요하게 내면을 응시하면 샘물이 차츰차츰 차올라 저절로 넘쳐흐른다는 맹신만을 가졌다. 재주가 모자라는 걸 진작에 알고 시를 포기했다면 편케 살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무언가 모를 강렬한 욕구가 내면 저 깊숙이에서 치받아 오르는 바람에 도저히 안온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안온한 것도 아니다. 재주가 없다보니 시로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학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이모의 머리털이 되었다. 정상적으로 문학공부를 배웠다면 훨씬 쉬운 길을 걷고 좋은 시를 많이 썼을 텐데, 실업계 고등학교와 낭인시절, 그리고 교대시절과 군대시절, 또 호구에 바쁜 초등학교 교사생활에 골몰하는데다가 본래 성격이 청강스럽고 고집스러우며 자존심이 강하다보니 배움과 사귐이 넓지를 못했다. 그러다보니 경험과 식견이 쪼글해지면서 시도 생기를 잃고 말았다. 스승을 모시고 정규로 문학을 배운 게 아니라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자득하다보니 깊고 견고한 이론은 없다. 단지 영감이랄까, 시는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피로 그리는 것이라는 느낌 하나만을 붙들고 예까지 왔다. 그래서 유창한 시론을 대하면 괜히 지근지근 골치만 아프다. 정치한 이론과 견고한 구조를 가진 시론을 갈파하는 논객들을 보면 ‘야 저 정도로 이론에 밝으니 시는 얼마나 잘 쓸까?’ 부럽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쓴 시는 내 수준으론 참 난해하다. 내가 볼 때는 삶에 대한 통찰력보다는 미학적 이론만 승한 것 같은데 많은 시인들이 그러한 시를 높이 치고, 대학 강단문학론에서 주류를 이룬다.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시단에서는 창작과 평론이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도 이 둘이 혼재되어 편리하게 쓰인다. 그리하여 작가, 평론가, 독자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생산자와 중개자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작가가 소비자와 중개자의 요구에 따라 물건을 대량생산 해내는 공장공업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시란 게, 아니 정신작업인 예술, 학문, 종교까지도 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성과 전문성이란 두 개의 큰 흐름을 이룬다. 정신문화론자들의 논문 결론은 그 둘의 조화가 상투이지만, 더 엄밀히 논한다면 그 둘은 영원한 평행선이다. 평행선이라야 개념과 적용이 분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화론을 주장하며 초점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좁혀서 시만 보더라도, 전문성이 높은 시는 극소수 시인들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대중성이 높은 시는 잘 팔려 거금을 손에 쥐기도 하고 유명인이 되어 이리저리 강연 다니며 존경을 받는다. 잘하면 대학교수도 쉽게 되고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는 관운도 거머쥘 수 있다. 그래서 ‘시인 + 대학교수 + 평론가 + 감투’가 완성되면 전문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췄다고 공인받는다. 그런데, 큰 흐름 중 하나인 전문성이란 난해한 시론공학으로 만든 기계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직접 몸으로 생산한 생물시를 말한다. 생물시란 김소월의 시가 갖는 대중성과 이상의 시가 갖는 난해성의 교감이 아니라, 시가 언어로 표현되는 미학 예술의 정수란 기본에 충실할 때 자연히 응결되는 구름이다. 대부분의 나날 동안 그 구름이 그냥 한 하늘을 흘러가지만, 옳게 엉키면 뚝뚝 비 되어 삼라만상을 촉촉이 적신다. 구름이 어찌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는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는 것은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뿐이다. 그 매연은 대량인구의 시대가 요구하는 대량서정용 구름 과자일 뿐, 비를 만들지 못한다. 젊은 날에 들었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수십 수백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언뜻 손바닥에 생기는 꽃이 바로 시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오십 대 이후부터 머리털 다 빠지도록 골몰한 덕분에 날꽃은 아니지만 종이꽃을 만들어 일반시집 한 권, 초등학교 연작시 두 권, 산문집 두 권 분량을 정리하며 출판 준비 중이다. 또한 넓게 보아 문학 영역에 걸치기도 하지만, 시골생활을 시작한 1986년의 30대 초부터 논어부터 한문고전을 독학하기 시작해서 그럭저럭 한 20여 년 꾸준히 하다보니 문리가 약간 틔어 공부가 손가락 한 마디 남짓 발전한 덕분인지 학문집 세 권 정도 펴낼 분량이 축적되었다. 이걸 보면 내 팔자가 늦깎이인 게 확실하다. 이 넋두리의 제목을 ‘산맥 속에서 춤추는 학’이라고 했는데, 고향 집 배산 이름이 무학봉이다 보니 짐짓 차용한 거고, 내가 학 만큼이야 훨씬 못 되지만 춤 흉내라도 내다가야 안 되겠나 하는 생각이 요즘 자꾸 든다. 그런데 춤추는 학이 맞긴 맞는데 발목이 묶여 있다. 주욱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이 아니라, 태백의 산줄기가 남으로 내리치다가 꽈악 한 번 조였다가 확 푼 산이 무학봉이다. ‘꽈악 한 번 조였다가 확 푸는’ 부분은 바위 절벽으로 고등학생 때 내가 이름 지어 龍鄕原이라 하였다. 그런데 곧 착공 될 삼척 가는 4차선 도로가 그 조인 부분을 치고 나간다고 한다. 그러면 발목을 묶고 있는 줄이 끊기고, 수천 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학은 한 바탕 화려한 춤을 추고는 소천을 따라 도호까지 간 다음, 어느 선비가 운둔하였다는 제비산의 음기를 충전하여 일단 낙동강 상류를 타고 이륙비행을 하다가 안동쯤에서 우뚝 비상하여, 북영남 땅 곳곳에서 비상한 여러 학들과 함께 훨훨 구만리 장천을 날아갈 것이라는 쾌. 두 해 전에 명퇴를 한 덕분에 이제 나만의 시간을 한껏 가질 수 있으니, 숨 질 직전까지 펼쳐질 후기 습작기 동안 화려하게 살면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시 세 편만 썼으면 좋겠다. 자연과 인간이 고르게, 적당하게, 알맞게 교감하는 시, 자연의 아름다운 의미를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거나 대변하는 시, 인간의 아름다운 의미를 자연의 언어로 표현하는 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잇는 시, 본질이 현상의 원천이며 진실이란 현상이 본질에 충실할 때임을 증거 하는 시, 제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언하는 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진화가 선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의 시를 쓰고 싶다. 무겁고 둔탁한 언어가 아니라 가볍고 낭랑한 우리말로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을 부르는 시를 쓰고 싶다. 열 살 남짓 때 먹은 <향수>의 감동을 더 진하게 해서 후인에게 전달하고 싶다. 큰 학재가 없고 예리한 관점은 미숙하지만, 기존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정수를 체득한 다음에 나만의 학설을 정립하고 싶다. 나의 학설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월등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보통 정도는 된다는 후인들의 평가와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우주의 침묵에 속상해 하는 인간들에게 한 줄기 이해의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고,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아파하는 의식인들에게 한 가닥의 치유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이왕에 성리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더욱 궁구를 심화하여 ‘근거와 치유’의 묘책을 찾아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하여 형이상학이 유형화 될 수 있음을 내 생애에서 증명할 수 있을는지. 연못에 떨어진 낙엽 한 닢이 그리는 동심원이 조용히 퍼져나가고, 물이 넘치면 흐르듯이 내 마음에 흡족한 시라면 남의 마음에도 흡족할 것 아니랴. 학문에서도, 천성이 아둔한 자이다 보니 화려한 명예는 없을 것이지만, 반백이 전백이 되도록 공책시집과 일기장에서 에너지를 보충 받으며 한 시와 한 학문을 마침내 이루어, 후인들로부터 ‘춤추는 학의 산’ 舞鶴峯이 낳은 시인이자 학자란 소리 듣고자 하나 글쎄. 水禪 어르신이 실수하신 모양이지요 화장실 바닥에 미처 두 점 괄약근을 지나 노천탕에 앉으니 꼭 맞다 둥둥 뜨는 몸 늘 무게를 받기만 하던 하체가 따뜻한 물에 상체를 띄우고 휴우 좀 쉬자 머리칼 다 빠지고 추리하기만 해 좀 깔끔해야 하는데 내가 할 소리 남이 하는 혼자 말 들으며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옷을 입는다 2013년 1월 23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開山兩白 박 희 용 넋두리하다 약력 1. 1954년 6월 14일 경북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출생 2. 안동교육대학, 대구교육대학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과 졸업 3. 1978년 대구매일신문 4월시단에 「비비추새」, 1979년 영남일보 3월시단에 「필부가」, 1981년 영남일보 7월시단에 「강 언덕 너머에는」 발표로 작품 활동 시작 4. 1982년 ~ 1985년 안동에서 임명삼, 서정오 등과 문학동인회 <말ㅆ․ㅁ> 활동 5. 2000년 7월 시집 『霜寒圖』( 도서출판 그루) 발간 6. 2001년 3월 『교단문학』 제31회 신인상에 시 「바람 부는 날」, 「풀」, 「神詩 ․ 5 인 간의 싸움-」으로 당선 7. 2010년 『兩白集 秋 疏論筆談』(주)에세이퍼블리싱) 발간 8. 2005년부터 <경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회원.  
23 (남태식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1973 2012-12-26
 몽상가들의 마을 몽상가들의 마을에서는 몽상이 비처럼 음악처럼 또 신화처럼 흐른다. 신화는 데카메론의 시절 수세기동안 내와 강과 바다를 넘나들며, 빈번한 급사 객사 과로사로 한 대륙을 휩쓸어 인적 드문 마을로 새 판 짜던 토스트. 도시에서 세차게 일어난 신화는 하수구를 거쳐 운하를 타고 시골과 숲과 사막까지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신화에 자발적으로 감염된 몽상가들, 쥐 먹은 토스트를 삼키고 미처 봄 오기도 전에 공든 탑 부수고 나가 봄날 꽃노래에 취한다. 신화는 이제 몽상가들 마을의 최선의 주식. 신화에 얹는 아빠의 손맛으로는 부자와 성공이 단연 으뜸. 몽상가들은 부자와 성공을 곁들인 신화 식탁으로 온 몸 다 밀어 한껏 줄기를 뻗는다. 가난의 맵고 쓴 맛 씹든 씹지 않든 신화 토스트 전염에 적극 자원한 광신화 바퀴들, 부자와 성공의 광고판을 높이 달고 이리저리 행을 걸치며 우물우물 빠르게 말 굴리며 달리는 밤. 신화 토스트 뼈 속속 침투시킨 몽상가들, 봄여름가을 부지런히 잎 주고 꽃 주고 열매 주고도 깊은 잠에 드는 겨울마저 깨워 쉴 사이를 잊는다. 온 줄기에 주렁주렁 살과 피를 태우는 조팝꽃등 달고, 슬쩍 연을 걸친 부자와 성공의 신화 문장 틈에서 덧쌓이는 피로 맨몸으로 견디며 억억, 틔는 열꽃 밤새 터뜨린다. (2009. 02) 오늘은 오늘은 꿈이 자살처럼 솟는 날이다. 오늘은 꽃이 기절처럼 터지는 날이다. 오늘은 봄이 비명처럼 틔는 날이다. 오늘은 저 먼 길의 끝을 당겨 우뚝, 절벽을 세운 날이다. 짧고 뜨거운 봄 여름 가을 꿈결인 듯 지나쳐 차고 거친 긴 겨울을 문득, 덥석, 안은 날이다. 돈에 휩쓸려 애써 잊은 만성두통을 찾은 날이다. 우리 미처 잠을 다 깨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봉오리를 다 빚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화음을 다 맞추지 않은 날이다. 당긴다고 당겨온 길의 끝이 벼락처럼 꺼져 오가는 길 모두 돈처럼 가르는 날이다. 오늘은 잠도 꿈도 아닌 잠에서 깨어 다시 깊은 잠을 자는 날이다. 올곧은 꿈을 꾸는 날이다. 사철 숨과 숨을 이어 환하게 터지는 꽃, 다시 씨앗을 뿌리는 날이다. 오래 함께 환호하며 부를 봄노래, 다시 목청을 가다듬는 날이다. 꿈이 이미 자살처럼은 솟지 않는 날이다. 꽃이 이미 기절처럼은 터지지 않는 날이다. 봄이 이미 비명처럼은 틔지 않는 날이다. 돈으로 일찍 늙힌 민주 회춘하여 오늘은 굽은 머리카락 허리 펴는 날이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해보는 날이다. (2009. 05) 아니오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2010. 01) 벗다 무덤에 안 드니 경칩 지난 눈바람도 무지 매섭다. 골골 휘저으며 눈발로 등성이를 내리 뭉개니 시려 가슴을 웅크려 오므린다. 눈밭에 몸을 숨기니 겨울은 아무래도 못 건넌다. 무덤에 드니 한겨울의 칼바람도 다소곳하다. 찬 기운 오래 일도록 밤새 빚은 눈의 뼈 굳히지 않고, 잠깐 든 햇살에도 모두 삭힌다. 무덤에 몸을 묻으니 겨울은 아무튼지 건넌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다 벗는다. (2010. 04) 앓는 강 막무가내 모래를 퍼 올리는 기계소리에 꿈이 어지럽다. 없는 무덤에서 고려장 당한 주검으로 웅크려 숨을 졸인다. 물길을 막으니 오탁에 썩어 찌든 눈언저리의 검은 그림자가 두껍다. 오랜 선잠에 샘이 끊어진 마른 눈이 쓰라리다. 인공샘물을 채우고 더듬거리며 꺼풀을 찢는다. 보일락 말락 언뜻번뜻하는 눈동자는 맑은 하늘을 담지 못 한다. 오래 하늘을 품지 못한 눈동자는 녹이 슬어 벌겋다. 인공샘물은 밑 빠진 독이다. 묻지 마 관광에 묻지 마, 미래를 저당 잡아 당겨쓰는 이 누구인가. 마침내 밑 빠진 시멘트 독에 취해 실명하니 첫 키스의 풍경을 다 잃는다. 미래가 가뭇없다. (2010. 04) 무너져라, 벽! 큰 집 대문과 무덤 사이에 벽이 있다. 귀를 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벽은 눈을 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벽은 입을 잃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벽은 번듯한 군대마냥 나름 꿋꿋하고 도시에 쏟아진 폭설처럼 호들갑스러우나 시방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춘 피로한 식물이다. 가로막은 벽 이 편 무덤가에는 큰 집 대문을 향해 나아가는 무덤을 뛰쳐나온 거듭 거듭나는 여러 무리의 새 아이들 벽을 무너뜨려라. 쿵!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앞서며 땅을 밟으니 쿵! 쿵!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뒤이어 땅을 밟고 쿵! 쿵! 쿵! 또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연이어 땅을 밟는다. 무너져라, 벽! 무너진다, 벽! (2011. 01) 양치기 이 양치기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착한 양치기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노을을 등진 늙은 양치기 (근대화양치기친일양치기반공양치기사대주의양치기신자유주의양치기시장만능싹쓸이양치기자유민주주의양치기역사망각노예육성양치기......) 수시로 붉은 안개 속에 얼굴을 감추고 이념의 모자를 바꾸어 써도 모자 아래의 이마는 늘 탐욕으로 번지러워 근본은 전혀 바뀌지 않는 1% 기득권자 들판 가운데 버려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잃었다는 한 마리의 양까지 끝끝내 찾아서 가두네. (2011. 10) 꽃과 새가 있는 집 1. 꽃들이 창백하다. 이 집에 든 꽃들이 창백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름만으로도 앞뒤 어떤 꾸밈말 없이 색깔만으로도 어울림만으로도 어여쁘고 빛나는 이름들이 이 집에 들어 창백하다. 하늘의 무지개 하늘의 별도 이 집에서는 경쟁이다! 전쟁이다! 모두, 창백하다. 2. 일요일, 봄맞이 산행을 갔다. 마른 나무껍질을 비집고 틘 어린 새들을 보았다. 무엇을 버티는 것일까, 날개를 한껏 오므린 어린 새들. 내려올 때 보니 올라갈 때보다 더 날개를 말며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뒤집힌 계절의 깡 추위와 오랜 가뭄이 이 어린 새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감옥이구나, 무덤이구나. 뒤이어 떠오르는 아이 생각. 0740 0730 0720 0710 0700 에서 2300 2310 2320 2330 2340 까지. 아이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학교에 갔다. 3. 나의 꽃잎, 너의 꽃잎, 나의 깃털, 너의 깃털, 하나만이라도, 창백한 꽃잎, 오므린 깃털, 그러하더라도,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자꾸 내밀고 또 내밀게 바꾸면, 처음엔 한 이파리 스치듯 지나는 가벼운 바람일지라도, 내민 꽃잎 내민 깃털 함께 꼭 잡게 바꾸면, 협력의 물결 고요하게 일렁이고, 공생의 바람 반란처럼 온 이파리 흔들어, 마침내 바뀌는 집, 마침내 따라 다 바뀌는 세상. 우선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2012. 06.) 숨은 꽃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 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손닿을 수 없는 벼랑 끝의 영원히 손닿지 않는 꽃이다. (2012. 07) 하늘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실직한 30대 전직회사원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무직의 20대 청년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술에 취한 일용직 30대 노동자가,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분노한 30대 전직회사원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절망한 20대 청년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술에 취해 자포자기한 30대 노동자가,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뭉뚱그려 우리는 이 모두를 묻지 마 범죄라고 부른다. 묻지 마 하류, 묻지 마 벼랑 끝, 묻지 마 칼부림, 묻지 마......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분노한 하늘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절망한 하늘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자포자기한 하늘이,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2012.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