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황량한 겨울 들판 

 

 

털털거리는 경운기 위에서 아우는

공단으로 떠난 친구 얘기에 열을 올리고

아버진 끝내 한 말씀 안 하시며

새터 모래논에 참흙을 넣는다.

 

모래논엔 참흙이 제일이지

알맹이끼리 어울려 떼알무리가 되어

물스밈도 좋아지고 공기도 들락날락

화학비료만으로 높은 수량 내는 것은

땅힘의 수탈 위에 피는 한철뿐인 꽃이란다.

아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다문다.

 

지력의 수탈 위에 피는 단명의 꽃

떠나리라, 타관살이 십 수년에 돌아온 고향

헛되이 살아온 세월, 활활 벗어 던지고

알맹이끼리 어울려 떼알무리 만들어

벼이삭 알차게 하는 참흙.

 

가을을 위하여 우리는,

황량한 겨울 들판에 흙을 넣는다.

 

 

폭포

 

유계리 여름비 오락가락 하는 계곡에서

폭포 아래 들어가 물을 맞았다.

고개를 들기조차 어려운 물의 힘 앞에

어깨죽지 등허리 가득 물을 맞았다.

 

물은 갈라져서 쏟아지지만,

떨어진 뒤에도 이내 하나가 되어

웅덩이 가득 흘러 넘쳐

시내가 되어 흐른다.

 

유계리 동구 팽나무 숲에는

칠순 노인 너댓 명 둘러앉아서

막걸리를 들며 시국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워

귀를 열고 눈을 씻었다.

 

떨어져 부서져도 하나가 되는 물이여

온몸으로 달려 내려오는 폭포여

고개 들어 우러러 보았다.

부서져야 한다 친구여,

 

우리 함께 온몸으로 떨어져

부서져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폭포 아래 끝없이 부서지던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우리는.

 

 

단식 농성장에서

---저들의 미친 칼 아래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곳곳에서 가로막는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우리는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삼삼오오 모여든 제일백화점에서부터

온갖 비상한 수단을 다해 모여든 이 곳

고색 창연한 명동성당 본당 뒤 돌바닥 광장

우린 쓰러지러 왔다. 죽으러 왔다.

결코 걸어서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왔다.

 

태풍 주디의 비바람 속에서 새우잠을 자며 견뎠다.

아련히 일어나는 현기증, 담배 연기의 유혹.

노점상 형제들이 끓이는 된장국 냄새

벌겋게 끓고 있는 매운탕, 풋고추, 상추쌈, 호박잎

정문 앞 원분식집 간판에 있는

통만두, 물만두, 군만두, 비빔밥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우리는

생수와 식염으로 하루를 보낸다

오늘이 단식 7일째

아침 계성여고 학생들 등교하는 걸 본다.

 

마지막 수업을 하며 나는 애써 웃었지.

부끄러움의 양심으로 가장 괴로워했던 사나이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길’을 간다던

윤동주의「서시」를 가르치며

운동장 플라타너스에서

치열히 부르짖는 매미소리를 들었지

한 마리가 조심스레 울다 보면

마침내 이 곳 저 곳 수없이 울부짖는

염천 아래 매미들의 합창을 들으며

참교육의 길, 민주․민족․인간화교육의 길

교사의 자주적 교육권을 찾는 이 길,

양심으로 가지 못 한다면,

 

십 년 세월 아이들 앞에서

서시를 가르쳐온 내 삶이 거짓일 뿐이라고

교사의 양심을 지키는 이 길,

목소리 맞춰 부르짖지 못한다면,

다시는 아이들 앞에서「서시」를 가르칠 수 없기에

나는 ‘나의 길’을 가노라고 웃으며 말했지

십 년 세월, 얼마나 부끄러이 살아왔던가.

십 년 교단, 얼마나 괴로이 몸부림쳐왔던가.

이제는 나 당당하네

사랑으로 가르치는 이 길

이제는 나 떳떳하네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네

혼탁한 세월, 이기와 허영, 안일과 사치

부정과 부패, 왜곡과 과장, 거짓이 판치는 세상

인륜, 도덕,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에서

내 스스로 피 흘려 가르쳐줄 수 있는

이 작은 교사의 양심 한 조각.

 

우리는 죽으러 왔다. 명동성당 돌바닥에

대가리를 부딪치고 일어서다 퍽퍽 쓰러지고

두 발로 걸어서 나가지 않으리라

아직도 미친 발악을 하는 저들의,

저들의 미친 칼 아래 우리들의 모가지를 내밀고

저들의 칼날을 두려움 없이 받으리라.

붉은 피 철철 백주대낮, 삼복염천

이 명동성당 돌바닥에 선연히 흘리리라.

우리들의 깃발, 참교육의 기치 지키기 위해서라면

굴종보다는 서서 죽으리라. 굶어 죽으리라.

 

보라, 의연히 견디는 육 백여 동지들의 눈빛

‘살아 숨쉬는 교육’을 노래하는 결의에 찬 모습

벌써 50여 동지가 실려 갔다.

그들을 보내며 우린 눈물 흘리지 않았다.

이제 곧 우리들이 갈 길이기에

민주․민족․인간화교육을 위해서라면,

자주적 교육권, 진리와 양심으로

가르치는 교육을 위해서라면,

꿈이 살아 있고,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을 위해서라면,

우리들의 투쟁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라면,

이 땅의 교육민주화 없이

모든 민주화가 없음을 아는 우리들이 갈 길

간다, 저들의 미친 칼 아래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고

웃으며, 웃으며 간다.

교사들의 양심을 지키는 나의 길,

우리의 길, 웃으며 간다.

 

 

철조망 앞에서

 

지난 한 해는 위대했습니다

어깨 위로 내리치는 가공할 철퇴를 이기며

골리앗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행렬은 끝이 없었고,

시퍼렇게 일어서는 억새처럼

삽이나 괭이 든 손에

높이 더 높이 깃발을 세우는 사람들,

무너지는 장벽으로 통일 물결 넘쳐흘러 들어와

동방의 위대한 나라 마침내,

후꾼후꾼 달아오르는 용광로였습니다.

 

아직도 통일의 노래 부르던 사람들

신부며, 목사며, 아리따운 학생이 감옥에 있는데

겉으로 통일을 부르짖는 자들은 북방으로, 북방으로

자기들만의 독점으로 웃음을 팔고 있을 때

동해안 바닷가 대폿집에서 우리는,

쓴 막소주를 마셨습니다

수제선 따라 북으로 휴전선까지

삼천리 금수강산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반도

한 걸음 척 나서면,

망망대해 펼쳐지면 바닷가에서

쓴 막소주나 마시며 통일을 불렀습니다

어서 오라고 부르는 우리의 통일 노래는

철조망에 갇혀 바다로, 바다로 퍼져가지 않았습니다.

 

해는 지고 해안을 경비하는 어린 병사들

바닷가 모래밭에서 철조망 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 속으로 몰려가는 양떼들처럼

형편없는 모습으로 대폿집 좌판 위에 앉았을 때,

철조망은 우리 눈앞에서 하늘 끝까지 뻗쳐 올라가

초승달 싸늘한 그 끝에 걸리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르는 소리, 목에 잠겼습니다.

 

지난 날 삼팔선에 처음 철조망이 쳐지고

휴전선으로 고쳐져 이중삼중 철통같이 높아만 갈 때,

집이며 과수원이며 학교며 주요 관공서 울타리마다

한 겹 두 겹 철조망은 높아만 같습니다

방송국과 과수원과 학교 울타리까지 잡아먹고

그 놈의 쇠불가사리 같은 철조망은 마침내

마음과 마음에까지 둘러 쳐지고 말았습니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우리는 철조망 안에 길들여지고

철조망 안에서만 안심하고 잠들 수밖에 없었지만

빛나는 유월의 그 뜨거운 함성에서부터

이 땅의 모든 민주화와 함께

우리가 목매어 부르는 통일 소원으로

 

우리들의 논밭과 과수원에서 학교에서 방송국에서 집과 집

마음과 마음에서 철조망이 벗겨지고 있을 때,

쇠파이프와 최루탄으로 무장한 저들의 음흉한 음모아래

삼천리 금수강산 동해안 수제선 따라

새로운 철조망은 반도를 휘감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철조망 속에 갇혀 털이나 깎이우며 발버둥칠 때,

철없는 아이들은 철조망에 매달려 흔들고

흔들고 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갔습니다.

우리는 바닷가 대폿집에나 앉아 막소주 들이키고

입으로만 통일을 노래부를 때,

돌멩이를 던지고 꽃병을 던지고

철조망 울타리 밖으로 몰려나오는 아이들

무리 지어 몰려가 머리띠 동여매고 스크럼 짜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온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털이나 깎이우고 안심하고 있을 때,

저들이 불러주는 통일의 노래에 취하고 있을 때,

동해나 바닷가 선술집 좌판에서 술이나 먹다가

바닷가 모래밭으로 나아가 소주를 마시다가

해는 지고 총부리 들이대는 어린 병사들 앞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술도 못 마시냐고 우기고 있을 때,

칠천만 한겨레 살아가는 금수강산에 둘러쳐진

거대한 철조망 앞에서 함성이 들리고

함성이 들렸다가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어디론가 실려가고, 잡혀갔다가 풀려나고,

또 함성이 들리고, 피 냄새가 나고

최루탄 냄새가 거리를 덮고 돌멩이와 꽃병이 날고

그리고 더 큰 통일 함성이 들렸습니다

시인은 광장에서 교수는 강단에서,

음악가는 노래로 화가는 그림으로,

장사하는 사람은 물건으로, 실업가는 자본으로

운동 선수는 운동으로, 종교인은 복음으로

하늘이며, 땅이며, 물이며, 바람이며, 산천만물이 일어나

세상이 온통 함성으로 가득 찼을 때,

 

저들은 은밀히 자기들의 손아귀에 통일을 독점하고

정권의 유지와 가진 자들의 이익 보호에만 급급해

온갖 케케묵은 법으로 위장하고

온갖 교묘한 거짓과 술수를 동원하여

철조망은 이제 없는 듯이 보이고,

없는 듯하다가 있는 듯이 보이고,

온갖 달콤한 거미줄을 쳐

있으나마나 한 듯이 보였다가

장막을 들추는 사람들만 어디론지 사라지고

그러다가 이제는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들

아직도 이 거대하고 교묘한 철조망 안에서

털이나 여전히 깎이우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들이 들려주는 감미로운 통일의 노래에

스스로 마취되어 가는 우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겨울 동해 바닷가 선술집에서

문득 저 멀리 밀려오는 파도를 봅니다.

저 파도 한 무리 두 무리 지어

오, 자유를 한껏 누리며 밀려옵니다

바위에 부딪치고 또 물러가 무리 지어

허옇게 부서지며 밀려와 방파제 두들기고

끝없이 밀려와 부서져서 하나가 되나니

보셔요, 우리들 거대한 철조망에 갇혀

술이나 마시고, 털이나 얌전하게 깎이우며

길들여지고 있는 것을

이 겨울 동해안 철조망 앞에 와서

해만 지고 나면 들이대는 총부리를 보셔요.

감미로운 술에서 깨어나

 

떨치고 이 거대한 철조망 거두어내지 않으면

삼천리 방방곡곡 우리들 가슴마다에 쳐진 철조망

마침내 거두어지지 않음을

학자는 강단에서, 노동자는 공장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농민은 들판에서, 교사는 교단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에서 마침내, 시인은 거리에서

두 팔 걷어 부치고 철조망에 찔려 피 흘리며

이 거대한 철조망 걷어내지 않으면

우리들의 소원인 통일 노래는

저 자유의 한 바다로 나아갈 수 없음을

여기 이 동해바다 철조망 앞에 와서 보셔요.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무더운 장마와 불볕 더위를 거치고

홍수가 천지를 휩쓸고 대지 위에

낙엽이 하나 둘 지고 있다.

없는 사람에게는 더 빨리 찾아오는 겨울이

저만큼에서 제법 쌀쌀한 바람을

우리들 허한 목덜미 사이로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는 위대했다.

우리들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와

한번 올린 깃발

결코 내릴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사수했으므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사방이 얼음벽으로 가로막혀도

온몸을 부딪쳐 피워 올리는 사랑의 열기로

우리는 오히려 더웠다.

 

찬란히 밝아올 90년대의 봄,

역사의 한가운데 서리라 다짐하며

우리는 오히려 행복하였다

그러나,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배신과 좌절과 절망의 대야합을 보면서도

우리는 꺾이지 않았다

다시 오는 봄을 두 주먹 불끈 쥐고 맞으며

오이팔을 향해 발바닥 부르트게 뛰었다

 

해맑은 웃음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동지들이 타는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짐했다

눈앞의 이익을 바라고 택한 길이 아니라고.

 

이제는 다들 잊으려 하는 현실도 보았다

입으로만 말하는 공치사 앞에

허허로운 웃음을 날리며 돌아서기도 했다

눈물로 떠났던 사람들

안스럽게 바라만 보던 사람들

부끄러움 거두고 나타났을 때,

우리는 말없이 두 손을 굳게 잡았다.

 

우리들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빼앗긴 교단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서명을 할 때,

차오르는 희망과 가슴속 열기를 주체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한 동료애까지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

억장으로 무너지는 가슴 쥐어뜯었다.

 

교단에서 쫒겨나 거리의 교사 된지 1년

하릴없이 낙엽은 하나 둘 떨어지고

선들선들한 바람이 목덜미 사이로 불어오고 있다.

 

그 동안에도 참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억압과 굴종의 교육현실 속에서

먼저 시들어 떨어지는 못 다 핀 꽃송이들

죽어 가는 아이들 살려내자고 떨쳐 일어선 동지들

연탄가스로, 암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시 조여오는 억압의 사슬을 견디지 못해

대구에서, 청주에서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교사들이 쓰러지고 있다

하루종일 분필가루 속에서 과로하다보니

기관지와 폐와 위장과 간장,

허리 디스크, 관절염, 신경통으로

교사들이 쓰러지고 있다

 

최루탄과 방패와 쇠파이프에 찍히며

서울로 대구로 집회에 참가하느라

삼시 세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동지들

간염, 폐렴, 위장염, 과로로 쓰러지고 있다

어제의 동지들, 어느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을까

생활고에 시달려 말 못하고 떠난 동지도 많다

좌절과 절망과 불면의 밤을 어디서 곱씹고 있을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교육을 애타게 바라던 그들

죽어 가는 아이들 살려내는 교육을 하자던 이들이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거늘

아직도 우리는 논리와 이기에 빠져 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선 이 자리, 그들이 떠나간 이 교단에서

지난 날 부끄러움 같은 사치는 이제 버려야 할 때,

툴툴 털고 일어서 대오를 정비해야 할 때,

다시 참교육이란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할 때,

근무여건 개선운동으로 교육유해환경 척결운동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이제는

실천으로 무기 삼아야 할 때.

 

낙엽이 지고 나면 어느새

겨울은 우리도 모르게 닥쳐온다

겨울이 오기 전에

먼길을 떠날 채비를 차려야 한다

겨울로 통해져 있는 먼 길

이미 우리는 이 길을 많이 걸어 왔다

눈앞의 더운 밥을 위하여 택한 길이 아니다

오다가 화적떼를 만나기도 했다

애초 우리들이 택한 길이었으므로

우리들 이미 당당히 걸어온 길이었으므로

가다 보면 또, 어깨동무할 길동무도 만나고

열 고개, 스무 고개 넘고 넘어

 

때로는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릴 때도 있겠지만

마침내 우리 앞에 펼쳐질

참교육 해방의 지평을 위해서라면

지금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우리들이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세상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이 머나먼 길 위에 있다

무더위와 장마, 폭염과 홍수를 지나왔다

낙엽이 지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봄이 오고

또다시 낙엽이 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지금 우리는 가고 있다

그 날은,

우리가 바라는 그 날은

이 길 위에서 맞이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우리다함께 어깨 걸고 가는 지금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고래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마감하자

가도 가도 끝없는 망망대해

물밑 깊이 찾아다녀 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고

 

아득하고 막막함이여,

아스라이 수평선을 넘어가면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바다

내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으로

물밑 잠행의 세월이 너무 길었네

 

몸 속 한 방울의 물까지 다 내뿜어

은빛 분수로 솟아오르자 사랑이여,

번번이 검은 물 속에 곤두박히고 마는데,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청산하자

비겁과 안일과 욕심과 이기

또 무슨 말로써 수사가 필요하리

솟구쳐 올라 분수처럼 떨어져 온몸 다

저 치열한 바다에 던지자

사랑이여.

 

 

공용 게시판 앞에서

 

한 손에 풀통 들고 또 한 손엔 풀손 들고

골목 구석구석 게시판을 찾는다.

 

아이들은 지금쯤 꾸벅꾸벅 졸고

동료들은 분필가루 속에서

목이 쉴 시간,

우리들은 거리를 헤매며

포스터를 붙인다.

 

골목을 돌아서면

혹시나 아는 이라도 만날세라

여전히 뒤통수가 따갑지만,

잽싸게 풀칠을 하다보면

손등과 소매로 풀이 달라붙지만,

애써 웃으며 풀칠을 하고

게시판에 가득히 붙여놓으니

어두운 골목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다.

 

보아라, 저 힘차게 치켜든 손

부릅뜬 눈, 벌린 입에선

모이자, 모이자, 모이자!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풀칠을 하자

썩썩썩 힘차게 풀칠을 하자

나의 지나온 세월 위에

부끄러움과 허위, 위선과 가식 위에

말로만 호사스러운 스승 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풀칠을 하자

손등과 손바닥에 말라붙는 풀쯤이야!

 

너덜너덜 붙어 있는 온갖 잡것들 가려버리고

우리들 참교육의 깃발 휘날리며

의연히 부르짖는 사나이를 보아라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노동 뒤에

우렁우렁 들리는

‘살아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풀칠을 한다

교육악법 위에,

온갖 비열한 탄압 위에,

거짓으로 왜곡된 선전물 위에,

우리들 참교육의 깃발을 휘날린다

포스터를 붙인다.

어두운 저 골목골목을 환히 밝히고

불이 켜질 때까지

우리들의 발길은 점점 물이 오른다.

 

 

또 다른 고향

 

갈수록 험악해져 가는 저들의 음모

어디에선가 흉흉한 소문이 눈앞에 다가온다

 

전교조 교사는 빨갱이라고,

당국의 온정 어린 설득에도

남아 있는 우리는 사상범이라고,

사랑하는 아이들, 동료 교사들 앞에서

오늘도 미소 띤 얼굴로 매도하는데

양심을 팔아서 밥을 빌라

참교육을 팔아서 살아야 하나

모두들 무심히 잠든 밤에 일어나

먼 데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낮이나 밤이나 저 놈의 개 짖는 소리,

차라리 이 한 몸 물어뜯어라

갈기갈기 옷이 떨어지고

살점이 떨어지고 피 흘려

얼어붙은 이 땅 적신다면

하마 우리들 쌓아온 죄를 씻으랴

 

내일은 한가위, 고향에 가야 한다.

저들이 빨갱이라 매도하는 것만 믿어

온 집안 어른들 남부끄러워 하는 고향

고향이 날 나무라네

배운 놈이면 배운 값을 하라네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서 하는데

실정법을 어겨가며 반역해서 되느냐고

하늘같은 스승을 노동자가 웬 말이며

6․25 때, 우리 마을 적치하에 들어가

구들장까지 파헤쳐진 것 벌써 잊었냐고

소 팔고 논 팔아 대학까지 시켜서

학교 선생 노릇 자랑으로 여겼는데

나쁜 물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며

막무가내 나무라는 고향에 가야 한다.

 

십 년 세월 교단에서 피땀 흘려 지키려는

오직 참교육 한마음뿐인데

가자, 찾아가자 내 고향

우리들 이미 올린 깃발 앞세우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그곳으로 가자,

피 터지게 쓰러지면서도 가야 할

우리들 양심이 지키는,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위하여.

 

 

 

별을 보아라

돌바닥을 베개삼아 누워서

서울이라 도심 명동하늘 쏟아지는

별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마냥 허위허위 다려온 지난 날

하늘 한번 쳐다볼 여유 없이 살아온 세월

이렇게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며

저렇게 도심의 빌딩 숲 아스라이

별이 별로서 빛나고 있음을 보아라

 

희뿌연 소금 같네

생수와 함께 한 알 한 알 씹어온 소금

내 안에서 자라나 하늘 가득히

은하수로 머리 위에 걸려 있으니

가을이 이제 멀지 않았네

 

누구의 눈물인가?

오로지 양심 하나 지키려는 마음으로

이렇게 돌바닥에 누워서 바라보면

아이들의 슬픈 눈 망울망울 보이네

 

마침내 저 하늘 별로 떠올라

말없이 도타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 수많은 별을 보아라

부패한 세상에 소금 한 알 한 알

썩지 않고 자라나

하늘 가득 별이 되는 것을.

 

 

한 송이 붉은 꽃

 

아이들은 내게

한 송이 붉은 꽃이 되라 하네

책상 위 빨간 장미 한 송이,

꽃이파리 떨어져

그네들 포근한 꿈이 되라 하네

꽃다운 젊음 지키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라 하네

 

가시에 심장이 찔려

흐르는 피로 땅을 적시고

앙상한 몸뚱이

푸른 희망으로 덮일 때까지,

스스로 붉은 꽃,

자꾸자꾸 피워 올리는

한 그루,

붉은 꽃나무가 되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