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온 길>

1954년 경상북도 금릉군 남면 초곡동(초실)에서 빈농이었던 아버지(김윤기)와 어머니(이말순) 사이, 장남으로 태어남. (호적에는 1955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갑오생 말띠로 일년 늦게 호적에 올려짐)

1962년 김천시 아포면 소재 대신초등학교에 아홉 살의 나이로 입학, 지역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단골로 참가했지만 장원을 해 본 적은 없음. 초등학교 1학년 때 『어깨동무』란 어린이 잡지를 읽게 됨. 교실 한 칸밖에 안 되는 작은 도서실의 책을 거의 다 읽음. 박영옥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책을 빌려서 읽기도 함. 한골에 사는 김상덕이란 친구의 집에서 친구 누나의 책을 많이 빌려 봄. 『철강왕 카네기』, 김형석의 수필 『영원과 사랑의 대화』, 『고독이라는 병』 같은 책을 밤새워 읽은 기억이 있음.

1968년 김천시에 있는 김천중학교에 입학함.

1969년 2학년 때, 작문 시간과 문예반에서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시조시인 배병창 선생님을 만나 문학 공부에 맛을 들이게 되었고, 문예반 친구들과 함께 문학 동아리 <석정(石井)>을 조직, 석정이란 팜플릿 동인지를 내어 학교에서 돌려 읽고 우쭐했던 기억이 있음. 배병창 선생님께 본격적으로 시조를 배웠으며, 교지 『송설』에 “무지개”란 제목의 시조가 실려 친구들로부터 문학 소년으로 인정받기 시작함. 교지에 실린 활자로 된 시를 처음 보고 가슴 떨리는 신비한 마력에 전율함. 이 때부터 습작을 하기 시작함. 주로 시와 시조, 소설을 쓰기 시작함. 배병창 선생님으로부터 김종한 시인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란 시를 배우고 너무 좋아 외우고 다니기도 했음.

1970년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구미에 사는 윤광주란 친구가 소설을 쓰는 것을 보고 부러워 소설을 쓰기 시작, 원고지 30매 정도의 『세 친구』란 소설을 처음으로 씀. 중학교 3년 동안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함. 도서관 담당 사서 교사이자 미술을 가르쳤으며 아동문학가인 윤사섭 선생님의 지도로 도서부가 되어, 마음 놓고, 자유롭게, 무한정, 책을 빌려 볼 수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함. 온갖 잡다한 책을 탐독함. 김소월, 이상, 유치환,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의 시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음. (그 당시 유행하던 『꿀단지』란 소설을 몰래 빼돌려 학급 내에서 선풍적인 호응을 박기도 했음) 박영준이란 친구의 누나가 만화방을 했는데, 그 집에 드나들면서 공짜로 만화 수백 권을 독파함. 무협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읽음. 때로는 무협소설을 노트에 쓰기도 했음.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목포 유세문을 수업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함. (영어를 가르쳤던 이승현 선생님이 그 유창한 달변으로 읽어줌)

1971년 한강 이남에는 송설이 있고 한강 이북에는 개성중학이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지역 명문 사학 김천고등학교(송설학원)에 입학함. 1학년 때 담임교사인 김문웅 선생님(후에 대구교육대학교 교수)에게 문예반에서 시를 배움. 선생님께서 대학교에 다닐 때, 복음고등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늦게 집으로 가며 느낀 것을 쓴 내용의 시였는데 현실적이며,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런 시로 기억함. 깊이 감명을 받음. 당시 김천고등학교에 있던 문학 동아리『맥향』에 가입하여 활동함. 백일장에도 종종 참가함. 후에 대학 동기로 시인이 된 윤희수 선배를 만남. 경북대 영어과를 나온 박춘호, 부산외대 교수가 된 현기홍 등과 함께 활동함. 당시 김천역 앞의 2층 목조 건물에 있던 양지다방이란 곳에서 배병창 선생님과 함께 백수 정완영 시조시인을 만난 기억이 있음. 배병창 선생님께 시조를 배우며 운율의 창조와 시어의 조탁에 대해 많이 배우고 고민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 김천극장에서 밤 9시에 상영하는 심야영화에 심취. (이 시절 무수한 공상과 상상과 환상, 술과 친구와 축구와 마라톤에 사로잡혀 지냄.)

1974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 ( “제발 대학을 가지 마라. 네 동생들도 생각해야지. 네 때문에 소를 팔고 나면 농사는 어떻게 짓느냐. 5급 공무원이나 되어 남면 사무소 면서기를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식자우환이다. 네 4촌 형들을 봐라. 4.19 때, 6.25 때 다 죽었지 않았느냐. 농사가 제일이라, 농사보다 맘 편한 게 없다.” 라는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고 가출과 좌절과 절망과 포기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고3 때 담임 이재민 선생님 말씀과 평소 존경하던 국어과 전장억 선생님의 영향으로 경북대 사대 국어과에 진학함.) 1학년 때, 지금까지 교육마당과 문학판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배창환, 김윤현, 김재환 시인, 정병윤, 정만진 소설가 등을 처음 만남. 문학 동아리 『복현문우회』에 가입하여 문학 토론과 시화전에 참여하였음. 2학년 때 김춘수 시인에게 시론을 배움. 이미지에 대해 많이 배웠음. 『문맥』이란 학과지에 수필이나 소설이 실리기도 했음.

1978년 2년 동안 훈련을 받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제16기 ROTC 육군 소위로 임관함. 전라북도 여산에 있는 육군하사관학교에서 군대 생활을 함. 전주, 부여, 익산, 논산, 강경, 군산, 서산, 대천, 옥구 등지를 헤매며 시작에 몰두함. 첫시집에 나오는 시들은 대부분 이 때 쓴 것임. 광주민주화운동을 군대 내에서 간접적으로 겪음. 많은 충격을 받음. (군대에서 교관으로 근무할 당시 별명이 F.M(야전 군사교범적인 모범 군인)으로 경계교육에 매진하여 제대 후 후배들에게 많은 폐를 끼침.)

1980년 6월 말에 제대하여 울진종합고등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음. (교단에 선 이래 지난 30여 년 동안 포항중학교를 거쳐, 김천지역 학교에서 주로 근무해 옴.) 울진 지역의 『울림』이란 문학 동인들과 어울림. 매년 여름방학이나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울진 지역의 방언, 민요, 고시조, 고전가사, 고소설 등을 발굴, 조사하러 다님. 시조 딱지 30여 수, 고소설(이대봉전, 양주봉전, 반씨전 등 발굴), 고전 가사 화전가, 관해록 등 발굴. 대구 한일극장 앞 사무기기 판매점에서 747타자기를 사서 매일 밤 소설을 씀. 몇 번 신춘문예 등에 응모했으나 매번 소식도 없이 떨어짐. 밤마다 들리는 타자기 소리 때문에 주인집 할아버지로부터 수상한 간첩으로 오인되어 신고될 뻔함.

1983년 『세계의 문학』겨울호에「강구에서」외 3편을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하게 되었음. (친구 정만진 왈 “이번 겨울호에 시를 발표한 김종인이 우리가 아는 동기 김종인인지 연락해 보자” 라는 모의에 의해 대구에서 천리 떨어진 울진에서 친구들의 확인 요청 전화를 받고 그 해 겨울 동안 대구의 배창환, 정만진, 김윤현 등을 만나 대학 졸업 이후의 일들을 서로 나누며 회포를 품었음.)

1984년 2월 동아백화점에서 있었던 대구의 『오늘의 시』 동인 시낭송회에 배창환, 김용락 등과 참석하면서 함께 동인을 하기로 약속한 것이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이미 오늘의 시 동인을 하고 있었던 배창환과 함께 뒤풀이를 빠지고, 청주에서 온 도종환, 김창규, 김희식 등을 만나 의기투합, 새로운 동인을 만들기로 약속함. 그 날로 『분단시대』동인을 결성. 5월에 동인지 1집 『이 땅의 하나됨을 향하여』(온누리)를 발간함. 5월에 포항 지역의 대표적인 문인 손춘익(작가) 선생님을 만나 포항문인협회 회원들인 김일광(동화작가), 김정구, 김만수, 이대환(소설가), 정안면, 정원도, 윤석홍 시인 등 문우들을 만남.

1985년 1월에 분단시대 동인지 2집 『이 어둠을 사르는 끝없는 몸짓』(온누리), 12월에 『분단시대 판화시집』(대구, 도서출판 우리)을 내고(분단시대 판화시집은 분단시대 1집에 이어 판금조치를 당했고, 여기 실린 시 때문에 많은 동인들이 고초를 겪었음. 심지어 정보과 형사와 도교육청 장학사는 시행의 곳곳에 빨간 밑줄을 긋고,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함. 특히 ‘민심은 천심이라 모조리 갈아엎고, 새로운 흙을 넣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 “객토”란 시를 문제 삼아 토요일 오후 내내 교장실에서 시달려야 했음). 대구우리문화연구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당시 포항여고에 근무하는 김재환, 제철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윤일현, 강원산업에 근무하던 정원도, 제철화학의 김석춘, 포항제철의 김정구, 윤석홍, 공광규 등과 함께 <포항우리문화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지로 <포항문화>란 소책자를 간행하였으며, 12월에 서울의 온누리 출판사(사장 김용항)에서 제1시집 『흉어기의 꿈』을 간행, 포항의 남화랑에서 출판기념회를 함.

1986년 5월 포항우리문화연구회 주관으로 채광석 시인 초청 문학 강연과 <제1회 민중시 낭독회>를 포항 죽도성당 대회의실에서 열었음. 이 낭독회 사건은 당시 포항 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만들어 200여 명의 교사, 종교인, 야당 인사(김병구), 문화예술인, 노동자, 문인 등이 대거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음. (포항지역 최초로 전경이 동원되어 죽도성당 앞 골목길에 진을 쳤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재환 선생은 영해로, 윤일현 선생은 제철학원에서 쫓겨나 대구 일신학원으로 가야하는 계기가 됨. 당시 포항교육청에서는 나에게 울릉도로 가라고 종용하였으나 그 제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버팀. 당시 독서토론회를 함께 하던 회원 중 윤일현, 공광규, 윤석홍, 정원도, 김재환 등이 시인으로 등단하였음.). 포항 영일 지역에 전해지는 고전소설, 가사, 민요 등을 수집하여 <포항문학>에 싣고 정리함.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4.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문인 서명이 5월 30일 서울신문에 보도됨. (도교육청 장학사와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서명을 철회하라고 강요함. 끝까지 서명 철회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방송국으로 서명이 잘못되었다는 항의문까지 써서 보내라는 강요가 있었지만, 버티고 버티는 도중 6월 항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떠 밀려감. 포항지역 민주인사들이 노동자와 결합하여 육거리를 점거하고, 육거리에서 오거리에 이르는 중앙통과 포항역 광장과 형산대교 근처에서 벌인 많은 행사에 뛰어다니면서 6.29를 맞았음. 6.29이후에는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조용해졌음.) 6월 <분단시대> 동인지 제3집 『민중의 희망을 노래하자』(학민사)를 출간. 10월 31일 대구경북교사협의회 창립. 87년 5월부터 준비한 포항교사협의회를 12월 초에 결성하여 사무국장을 맡았다가, 다음해 3월 갑자기 김천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김천으로 오게 됨(후문에 의하면 포항교육장, 장학사 등이 특별히 힘을 모아 후배를 아끼는 마음에서 고향인 김천으로 발령을 냈다고 함). 포항문학의 대부인 손춘익 선생님의 권유로, 경북문인협회에 가입하여 김일광, 하재영, 조무근, 이대환 등과 함께 활동함.

1987년 실천문학사에서 발행한 교육시선집, 『내 무거운 책가방』에 ‘사회수업 외 1편’을 실음.

1988년 3월 김천여고에 부임. 5월에 대구경북 교협 활동을 하던 한일여중의 구자숙 선생님을 만나 함께 김천지역 교사들을 규합하여 12월에 김천교사협의회를 결성, 사무국장을 맡게 됨. 김천중학교 은사 윤사섭 선생님의 권유로 김천문인협회에 가입하여 노중석, 장병우, 황명륜, 박기하 등 시조 시인과 권숙월, 민경탁 시인 등과 함께 <김천문학>에서 활동함. 8월 <분단시대> 동인지 제4집 『분단문학에서 통일문학으로』(학민사)를 펴냄. (분단시대 동인들이 각기 자기 지역의 교육 운동에 앞장을 서는 바람에 자주 모일 수 없게 되고 자연히 동인 활동은 주춤하게 됨). 민중시 특집호 『금수강산 오량캐꽃』(군을 주제로 한 민족자주화 70인 시선집)에 ‘부동자세’ 외 2편 실림.

19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고 7월 10일 전교조 김천지회를 창립하여 사무국장을 함. 전교조 참여교사로 징계위에 회부되면서 교단에서 쫓겨나게 됨. 8월초부터 열흘간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을 함. 농성 중 <민족문학의 밤>에서 “단식농성장에서”란 시를 낭독함. (이 시는 전교조 신문과 『노동해방문학』에 실리게 됨.) 8월 19일부로 징계위에서 해임 결정을 받아 해직교사의 길에 서게 됨. 청주의 도종환, 대구의 배창환, 정만진, 김천에서 김종인 등이 전교조 결성 혐의로 교단에서 해직되고, 분단시대를 통한 문학 활동은 잠시 뜸하게 됨. 전교조 김천지회장으로 활동. 해직. 현직교사들의 신작교육시집, 『교사는 노동자다(교육문예창작회)에 ‘법정에서’ 외 3편 발표. 8월 17일 해직된 이후 전교조 김천지회 사무국장, 제2-3대 지회장 등을 하면서 관내 90여 개 학교를 방문하고, 전교조 합법화의 정당성과 논리를 광고, 선전하면서 이상석 선생, 도종환 선생, 유상덕 선생 초청강연회를 개최함. 제3문학시선 55인 시선집, 『교과서와 휴전선』에 ‘스승의 날에’ 외 1편을 실음.

1990년 실천문학사에서 제2시집 『아이들은 내게 한 송이 꽃이 되라 하네』(서울, 실천문학사) 출간. 대구 영남일보에서 대량 해직된 기자들과 합세하여 신왕 기자를 중심으로『우리신문』 창간 작업을 하면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나, 결국 창간 준비호를 내는데 그치고 자본의 힘 앞에서 신문 창간에 실패함. 참교육을 위한 전교조 문집, 『단식일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엮음)에 전교조 명동성당 단식농성 때 쓴 ‘단식일기’가 실림. 1990년 상반기 올해의 좋은 시에 “별”이 선정됨.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온갖 잡다한 선언문, 항의문, 추도문, 수필, 꽁트 등을 씀. 포항 MBC 구성작가로 1년 동안 매달 50분짜리 『영남시대』(교양 다큐멘타리)에 구성과 글을 맡아서 함(이보근 피디와 최부식 피디 담당). 지역 현안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한 토론 프로그램의 구성과 글을 씀(이보근 피디 담당).

1991년 환경시집, 『이 땅에 살기 위하여』(한국영상문학연구회 엮음)에 ‘철강공단’이 실림.

1992년 대구에서 『우리신문』 창간 작업을 하던 전 영남일보 해직기자들과 『하나신문』 창간 작업을 하다가 신문은 어렵게 창간했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도중하차함. 자유사상시선 『시는 어디 있는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창작위원회 엮음)에 ‘객토’, 한반도의 젊은 시인들 제2집 『서로 일으키는 땅』에 ‘감포 어부의 노래’ 외 2편, 교육문예창작회 신작시집, 『대통령 얼굴이 또 바뀌면』에 ‘그대에게 가는 길’이 실림.

1993년 대구의 『하나신문』 기자를 그만 두고 김천으로 와서 김천 지역신문인 『새김천신문』(발행인 김영만) 취재 부장으로 지금의 『김천신문』권숙월 국장(시인)과 함께 근무함. 김천에서 극단 『삼산이수』(대표 강정식)를 창립하고 지역 최초의 극단으로 등록. 「청산리 벽폐수야」, 「방황하는 별들」, 「산불」 등을 공연하면서 기획, 총진행 등으로 참여함 (이후 10여 년 간 총 15회 공연).

1994년 5년간의 해직 생활을 청산하고 복직 기념으로 제3시집『별』(대구, 사람의 문학)을 출간. 3월 1일부로 감문중학교에 복직한 이래 1997년 지례중학교, 2000년 김천중앙고등학교, 2004년 김천여고를 거쳐 2006년 이후 현재까지 구미 선주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음. 대구에서 『분단시대』 동인을 중심으로 문학종합계간지를 발간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정대호, 김윤현, 김용락, 윤일현, 정만진, 배창환 등과 함께 종합문예지 계간 [사람의 문학] 발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함. (94년 봄호를 창간호로 첫선을 뵌 후 12년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잡지를 발행해냈다는 사실에 그 의의가 깊다. 이후 사람의 문학은 2007년 현재 통권 53호를 기록 중)

1998년 시와 현실 9인 신작시집, 『메마른 일상에서 돌아와』에 ‘봄날은 가네’ 외 5편, 포항문학시선 『몸속을 지나는 바람』에 양파 외 3편을 실음.

1999년 여름 시노래 모임 『시하나 노래하나』 창립 기념 음반에 「한 송이 붉은 꽃」(곽우영 작곡, 국순철 노래)이 실림. <김천 부곡초등학교 뒤 공터에서 노래공연 기획 중(친구 박병주와 함께) 장마와 태풍으로 열리지 못함.>

2000년 오랫동안 포항의 손춘익 선생님과 함께 경북작가회의 창립을 준비해 왔으나 지역이 워낙 넓고 사람이 부족하여 창립을 미루던 중, 5월 포항의 이대환을 중심으로 (사)민족문학작가회의 경북지회를 결성하여 김천지부장을 맡음(지회장-이대환(소설가) 부지회장-안상학(시인) 사무국장-이종암(시인) 구미지부장-육봉수 예천지부장-임대수 안동지부장-조영옥 울진지부장-김진문 영천지부장-이중기).

2001년 사람시선 『작은 새가 잠긴 늪』( 21인 공동시집, 사람의 문학 발간) ‘가만히 겨울나무를 보라’ 외 5편이 실림.

2002년 경북작가회의시선집 『너의 빛깔이기도 하다』에 ‘압해’도 외 2편. 교육시선집, 『나는 선생이 아니다』(우리교육)에 ‘낙엽을 태우면서’가 실림. 김천지역에서 나홍연, 김양헌(평론가), 손정호, 이교상, 김대호, 구미의 박원식, 김영수 등의 시인들과 함께 <등등시> 동인을 결성, 독서 토론과 시에 대한 토론으로 매월 만나 문학기행, 시낭독회, 문학 강연, 백일장 등을 하면서 2003년 동인지 제1집 『광장으로 간 소나무』 ( ‘이어진 바위는 길을 막는다’ 외 7편을 실음)를 발간하고, 2005년까지 동인지 3호까지 발간. (그 동안 이교상 시인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서 당선, 김영수 동인이 진주신문 문예공모에서 시부문 당선 등의 성과를 거둠.)

2003년 제3시집 『별』을 발간한 후 10년만에 『나무들의 사랑』(대구, 문예미학사)을 발간. 김천자유예식장에서 고 박원식 시인이 시 퍼포먼스를 하는 가운데, 화가 이성환 선생이 그린 시화전을 겸해서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함. 8월 경북작가회의시선집 [벼랑의길](도서출판 출판시대)에 참여. 등등 동인지 제2집 『푸른 것으로부터 온 답신』에 ‘산수유 같은’ 외 7편으로 참여함.

2004년 동인지 제3집 『저기, 얼마 전 순수』에 ‘세느강 편지’ 외 8편.

2005년 경북작회의시선집 『기느리댁 사랑채』(권석창외 42인)에 ‘난지도에 버려진 적이 있다’외 2편, 경북, 울진 시인들의 시선집 『푸른 문장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저녁’ 외 7편.

2006년 <등등시> 동인들의 내부 사정으로 동인을 전격 해체하고 <세모시> 동인을 결성. 김천의 나홍연, 손정호, 이교상, 김대호, 박화남, 구미의 김영수, 조영숙, 김연화 시인이 참여함. 경북작가회의 대표시선집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강상률 외 33인)에 ‘이 황량한 겨울 들판 외 2편을 실음. 근무지를 구미 선주고등학교로 옮기면서 구미지역의 대표적인 문학단체인 <수요문학회> 카페를 기웃거림. 같은 학교 한문과 교사이며 성균관대학교 한문학 박사 출신인 권오웅 선생과 함께 구미지역 구석구석, 여기저기의 문화와 삶의 현장을 답사함.

2007년 제5시집 『내 마음의 수평선』 (시와에세이) 발간. 경북작가회의 시선집 『붉디붉게 환장하도록』(경북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 금오산8 외 2편 발표.

2008년까지 구미 선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2009년 다시 김천으로 돌아와 김천농공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매년 포항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 작가정신, 시에, 사람의 문학, 김천문학, 경북작가회의 시선집 등에 거의 의무적으로 시를 발표하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짐. 1960년대 김천 지역의 향토지에서 한문으로 쓴 장시 『감문가』와 『구성가』를 발굴하였으며 감문가는 주석을 달고 감수하여 김천문학에 발표하고, 구성가는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권오웅 박사의 감수를 거쳐 작가정신에 발표함.

2011년 김천농공고의 교지를 발간하다가 1951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발간된 김천농고의 교지 추풍령을 발굴하여 지역 신문에 그 사실(김천농고 출신의 오세도 변호사의 제보를 받고 김복술 전 김천농고 교장이 소장해 온 1951년 발간한 교지 제6호)을 소개, 게재하고 교지 추풍령을 발간하였으며, 2012년 현재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구 김천농공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