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김종인

 

1. 들머리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시를 쓴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시는 내게 자연스레 찾아온 것 같다. 김천중학교 2학년 때, 작문을 가르치던 배병창 선생님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기(旗)’가 당선된 시조 시인이셨다.

그 때 우리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석정(石井)’이란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게 된 최초의 사건은 아마 이 때부터일 것이다. 우리는 선생님께 시조를 열심히 배웠다. 언어를 갈고 닦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시조의 전통적인 율격에 언어를 싣는 법을 그 때 배운 것 같다.

내가 쓴 ‘무지개’라는 시조가 처음 활자화되어 ‘송설’이란 교지에 실렸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문예반 특별활동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좋은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감상하게 했다. 아직도 나는 그 때 선생님께서 읊어주셨던 김종한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란 시를 잊지 않고 있다.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같은 구절이나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傳說)만 길어 올리시네” 같은 구절이 생각나면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는 흘러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즈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에서는 그만 아득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김천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맥향(麥鄕)’이란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맥향에서는 주로 선배들에게 시를 배웠는데,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은 동화작가 윤사섭 선생님이셨다. 당시 도서관을 맡고 있었던 선생님이 좋아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밤낮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참 행복했다. 도서관이야말로 나에게는 천국이었다.

당시 특별활동 시간에 문예반을 맡고 있었던 김문웅 선생님은 대구에서 고등공민학교 교사를 하면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면서 느낀’ 것을 쓴 자작시를 칠판에 적어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내 마음 속에 오래 오래 기억되고 있다. 도시 변두리의 불빛과 밤늦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화자의 마음과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는 나이 먹은 학생들의 삶이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오랜 세월 뒤 나는 떡갈나무 등걸에 박힌/ 내 화살을 찾았네/ 그것은 여태도록 꺾이지 않았네./ 노래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내 친구의 가슴속에 고이고이 되살아 있는 것을 나는 보았네.”

헨리 롱팰로우의 시 “화살과 노래(The Arrow and the Song)"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허공에 대고 화살을 쏘았는데, 어디에 떨어졌는지 몰랐으나, 오랜 세월 뒤에 떡갈나무 등걸에 박힌, 내가 쏜 화살을 발견했다는 것과 허공에 대고 노래를 불러, 그 노래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몰랐으나, 오랜 세월 뒤, 내 친구의 가슴속에 그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이고이 되살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온전히 기억할 수 없지만, 선생님이 가장 절실하게 쓴, 그 현실적인 삶을 노래한 시가 내 가슴속에 화살처럼 박혀 오늘 내 시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북대학교에 입학하여 복현문우회란 문학 동아리에서 시를 공부하면서 강의시간에 김춘수 시인에게 시론을 배웠다. 시집 “타령조 기타”부터 시선집 “처용”과 “꽃의 소묘”까지 열심히 읽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는 새로운 것이었다. 어렵고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무의미 시론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와 같은 ‘처용’이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越冬하는 인동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라는 ‘인동잎’을 줄줄 외우며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를 깨우치기 위해 무진 노력했으나 도무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초겨울의 붉은 열매’와 ‘꽁지가 하얀 새’,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과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이라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연결이 지금도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입술에 맴돌고 있다.

 

2. 시란 무엇인가.

 

시란 시인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샘물을 퍼내는 행위가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욕구를 풀어내는 행위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행위가 아닐까.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 시대와 자연과 사회와 사물과 자기 스스로와 대화하고, 고민하고, 발언하고, 소통하는 자가 아닌가.

신동엽 시인은 스스로가 “참여, 즉 자기와 자기 이웃에의 인간적인 애정과 성실성”을 갖춘 시인이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는 시인정신론에서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이나 “언어를 재료로 한 무의미한 공예품”을 비판하고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대로의 인생 인식과 사회 인식과 우주 인식과 우리들의 정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스런 몸짓으로 창조해 내야 한다”고 했다. 하여 시인은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해야 한다고 했다.

아아, 시인이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 것을 내가 왜 일찍이 몰랐던가!

군에서 제대하고 울진종고에 초임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1980년대 초, 어느 날 국어시간. 나는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시인의 시를 가르치며 시와 삶에 대해 거품을 물었다. 한 학생이 왈, 그렇게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선생님은 시를 쓰느냐고, 어떤 시를 쓰는 시인이냐고?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정말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등단한지 20여 년 동안, 저 가혹한 80년대의 역사 한복판, 그 현장에서 발품을 팔아 온몸으로 시를 써 오면서 ‘교육과 문학’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허나 천생이 우둔하여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김종한 시인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처럼 아름다운 서정과 ‘맥향’에서 배운 현실주의적 절실함과 ‘복문’과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에서 배운 아름답고 선명한 이미지와 신동엽 시인의 시인정신을 자양분으로 하여, 쉽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 한 편 쓰고 싶다.

내 친구의 가슴속에 화살로 박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이고이 되살아나는 그런 시 한 편 쓰는 것이 소원이다.

 

3.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

 

현재 우리 나라에는 수만 명의 시인이 있으며, 한 계절에 발간되는 시집은 제쳐두고라도 20여 종의 문학지에 발표되는 시가 500여 편은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이름 있는 문학 잡지의 경우 잡지마다 10명 안팎의 시인들이 20여 편 정도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좋은 시를 실었겠지만, 그 많은 시들을 읽어보아도 가슴을 울리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감동적인 시 한 편, 정말 아름다운 이미지로 눈을 씻고 다시 읽게 하는 시 한 편,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입이 스스로 읊조리게 하는 리듬에 안달이 나는 그런 시 한 편 찾을 수가 없다.

‘푸념도 못 되는 넋두리’이거나, ‘저도 모를 소리를 암호처럼’ 나열한 것이거나, 풍자와 반어와 역설과 모순어법으로 저의를 감추고 난해함을 자랑하는 오만한 시거나, 아직도 음풍농월이요, 모더니즘이요, 이미지의 장난에 다름 아니니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하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집은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인은 차고 넘치는데, “시인다운 시인은 찾아보기 힘들구나”라는 장탄식 뒤에는 오늘날 우리들의 시에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는 말이다.

신동엽 시인은 이미 40여 년 전에 시인정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우리 현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大圓的)인 정신은 없다. 정치가가 있고, 이발사가 있고, 작자가 있어도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과 철인은 없다. 현대에 있어서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시인 정신이며 시인혼이 문제되지 아니하고, 그 시업가의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 문제된다. 핵분열 연구가가 헐리웃 광대에게 입힐 기구망신스런 옷을 꾸며내듯, 또는 발광한 빠리의 화가가 자기도 모를 색채로 화면을 난칠해 놓듯, 시업가들은 언어를 화구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 읽어보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비판이다.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일 뿐이며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으로 언어를 화구 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양산해 내고 있다는 비판이 귀에 따갑다. 주위를 둘러 보라. 신동엽 시인이 찾아 헤맨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 은 어디 있는가. 아니 그가 쓴 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시인 정신이며 시인혼으로 쓴, ‘생명의 발현이며,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시를 찾아 이 좋은 계절 여행을 떠난다.

 

4. 우리가 보통 시라고 부르는 것은 서정시를 말한다.

 

오늘 날 우리가 보통 시라고 부르는 것은 서정시를 말한다. 시의 종류, 시의 분류, 서정시란 무엇인가 따위의 학술적 논란은 워낙 복잡하니 그만두고, 소위 '서정시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통해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의 해답을 구해보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 - 이인로

시는 원리와는 관계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허균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정약용

요사이에는 시가 없다. 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다운 시가 없는 것이다. -김득신

시는 제 2 의 자연이요, 생명의 표현이므로 하나의 유기체다.-조지훈

 

우리들의 선조 시인들이 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견해들을 살펴 종합해 봤을 때, 서정적 장르로서의 시를 의미하며, ‘마음에서 우러난다, 생각함이 깊다, 사상이 있어야 한다, 생명의 표현이다’라는 것을 ‘시다운 시’로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하겠다. 서정적인 장르로서의 시는 주관적이고, 순간적이며, 감정적이다.

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의 서정시란 순수한 감정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언어의 의미 전달 기능보다는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이 자기 개개의 상태에 있어, 체험에 있어, 줄거리 없이 표출하려 할 땐 우리들 앞에는 서정시가 놓인다.”라고 치모프예브가 「문학이론」에서 밝힌 것은 서정시에는 ‘개개의 상태, 체험, 줄거리가 필요 없는 표출’을 서정시의 기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서정시란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이란 주관적임을 뜻하므로 시인의 눈을 통하여 관찰되는 사물, 시인의 영감에 의하여 감지되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정시이다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표현이다”라고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 서문에서 말했다. 물론 이 말에는 감정의 중요성이 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헤겔 역시 “서정시의 내용은 주관적이며 내면적인 세계이고, 숙고하고 느끼는 감정의 세계이다.”라고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서정시를

“고양된 감성의 서술”이나“열정적 감정의 직접적 표현으로 보게 된 것이다.

 

5.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 강물은 흘러가고

산은 언제나 푸른 자태로 저렇게 서 있는 것이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 미학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중에서

 

고단한 몸 주저 마시고 오세요

가까이 와서 가만히 볼을 비벼 봐요

가파르게 오른 길보다 더 숨이 찼던

당신의 화산지대를 지워드리겠어요

사느라 이마에 맺힌 땀이 꽃보다 향기로워요

삶이란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

마음놓고 키가 클 수도 없고

앞을 내다볼 수도 없는 안개의 세월

가슴 속 깊이 뿌려주는 사랑의 비로

내 오래 간직한 빛깔을 가져가세요

내 오래 품어온 향기를 묻혀가세요

그러고도 잊지 못할 그리움이 있다면

빈손이어도 좋으니 다시 걸어오세요

맨발이어도 반가우니 다시 다가서세요

그땐 꽃잎 살포시 열어 웃고 있겠어요

(김윤현, ‘두메양귀비- 들꽃시편 Ⅱ’ 전문)

 

두메양귀비는 고산지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데, 7-8월에 황록색의 꽃이 피는 야생화이다. 두메양귀비가 시적 화자가 되어 속삭인다. “고단한 몸 주저 마시고 오세요/ 가까이 와서 가만히 볼을 비벼 봐요”라고. 두메양귀비가 사는 곳까지 찾아갔다면, 그는 아마 지치고 피곤한 몸일 것이다.

"삶이란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이니 "사느라 이마에 맺힌 땀"이 그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두메양귀비는 다시 속삭인다. “내 오래 간직한 빛깔을 가져가세요/ 내 오래 품어온 향기를 묻혀가세요”라고.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를 맞으면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빛깔과 향기를 나눠주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이미지가 두메양귀비이다.

이것이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란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들꽃처럼 아름답고 예쁜 서정시이다.

 

귀뚜라미가 울음을 멈췄을 때

어머니 돌아가셨다

 

마당에 동그랗게 남아 있는

달빛

 

고목이 된 느릅나무는 옛 자리에

그대로 서서 두 손 맞잡고 머리 숙였다

 

남쪽으로 갔다는 아들은

반 백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하늘가 저쪽 구석에서 누군가

이것이 다다 이게 다다 라고 외쳐댔다.

(김규동 “임종” 전문)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쓴 시인 것 같다. 마당에 동그랗게 남은 달빛, 고목이 된 느릅나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한다. 아니 고목이 된 느릅나무가 곧 어머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시가 끝났다면 거저 평범한 어머니들의 죽음일 뿐이지만 시인은 그 의미를 확산시킨다. ‘남쪽으로 갔다는, 반 백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임종을 맞이하는 북쪽에 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슴이 찡해온다.

개인의 슬픔을 넘어 민족의 슬픔이요, 그러한 어머니들이 남과 북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남과 북으로 헤어진 어머니와 아들들이 만나고 있다. 이대로 만남이 지속된다고 해도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고, 만남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수많은 늙으신 어머니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아들도 없이 쓸쓸하게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하늘가 저쪽 구석에서 “이게 다다”라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것이 다인데 왜 그들은 만나지 못하는가.

이대로 남과 북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마지막 소망을 정치적인 이유로 끝내 외면할 것인가. 하루빨리 남과 북의 모든 어머니와 아들, 형제자매들과 아버지들의 마지막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백석의 시를 보는 것 같다. 짧지만 그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감동적이며 심금을 울린다. 서정시의 본령을 보는 것 같다.

 

공사판, 자갈에 깨지고 흙에 뒹군

하루를 등에 진, 사내가 방에 들어선다

장화에 곤죽이 되어 들러붙은 허기진 저녁도

그를 따라 들어선다

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나날의 노동에 겨워 자신의 몸이 늪이 되는 밤,

붉은 꽃망울 터 올린 가로등이

탈진한 육신의 향기 진동하는 방에

무단 침입해 있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

장마 곰팡이들은 잠 속까지 번져든다

구절초 푸른 혈관을 쥐어 잡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일터에서 하얗게 버티던 시간들이

그가 잠든 동안 삐걱거리는 그의 식탁 위에

고봉밥으로 올라와 있다

그의 몸이 맑게 개여 다시 깰 때를 기다려

구절초 수북하게 차려져 있다

(권순자 “구절초” 전문)

 

공사판에서 하루의 노동을 마친 사내가 곤죽이 되어 그 피로하고 허기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왔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의 꿈속에 고봉밥 같은 구절초가 핀다.

“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라고 하지만 기실 사내의 방에는 구절초가 없어도 좋다. 아니면 공사판에서 일하다 돌아오는 길에서 구절초 한 그루를 캐어 화분에 올리고 사내의 방에 가져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사내의 식탁 위에 고봉밥처럼 피어 있는 구절초, 사내는 일용할 한 끼의 고봉밥을 위해 곤죽이 되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와 쓰러졌다. 그 식탁 위에 피어난 구절초의 이미지가 바로 고봉밥 같다는 것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놀고 먹는 부자들의 식탁에 구절초가 고봉밥으로 피었다면 말이 되지 않지만, 공사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지쳐 쓰러진 사내의 꿈속에서 고봉밥으로 피어나는 구절초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아름답다. 꼭 맞는 표현이다. 가을의 초입에서 우리들의 산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쑥부쟁이나 구절초의 모습을 보면서 이 시를 읽어보자. 좋은 시란 이런 것이다. 감동적인 시란 이런 것이다. 서정시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푸른 안개에 덮인 골짜기를 지나며

나도 머리를 깎고 싶어졌다

허공에 걸린 절집에 머물면서

 

새들만 날아드는 산속에서

차르르 어깨를 흔드는 기척

검고 숱 많은 내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인 듯 서늘해지는데,

 

산이 꺾이는 골짜기 벼랑 위

한 뼘 햇살이 머무는 곳에

작은 무덤,

언젠가 산에서 만난 아이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처럼

은방울꽃 피어서 웃고

 

무덤 주인은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갔을 터인데

이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생을 무덤 곁에서 우는 벌레도 있다

두 손 모아 절을 하듯 날개를 비비며

(김수영, “은방울꽃 무덤” 전문)

 

옛날 그리스의 전설에 용감하고 두려움 없이 싸우는 청년이 있었는데, 사냥을 갔다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독사를 만나 힘겨운 격투 끝에 승리를 했다. 그러나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질 듯이 걸어가는 그의 발자국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고 그 핏방울이 떨어진 자리에서 예쁜 꽃이 방울처럼 피어났다고 한다. 바로 이 꽃이 "은방울꽃"이다.

초여름에 높이 20~35㎝의 꽃줄기가 나오며, 지름이 약 1㎝ 쯤 되는 종 모양의 순백색 꽃이 5~10개 가량 나란히 밑을 향해 핀다. 가느다란 줄기에 초롱초롱 매달린 하얀 꽃망울들을 야생화 답사에서 본 적이 있다. “푸른 안개에 덮인 골짜기”에 많이 피는 은방울꽃, “허공에 걸린 절집”을 연상하고는 하얗고 매끄러운 “종 모양의 꽃”을 보면서 머리를 깎고 싶다고 한다.

“작은 무덤,/ 언젠가 산에서 만난 아이”에서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로 은방울꽃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있다. 절묘하게 은방울꽃을 형상화하고 있다. 아니다. 아름답다. “이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라면서 딴청을 부리는 듯하지만 “일생을 무덤 곁에서 우는 벌레”로 연결하면서 향기가 벌레소리로, 다시 절을 하듯 날개를 비비는 모습으로, 즉 향기-벌레소리-절을 하듯 비비는 날개로 후각적인 이미지가 청각적인 이미지로, 다시 시각적인 이미지로 은방울꽃을 형상화시키고 있다."고양된 감성의 서술"이나“열정적 감정의 직접적 표현”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서정시라 하겠다.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을 풀어 쓴 정민 교수는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픈 사랑의 이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시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연암은 말한다. 그런데도 정작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쓰지 않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고 쓰고 있구나. 먼데 사람까지도 이목구비를 단정히 그려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화가는 이발소 그림이나 그려서 좋을 화가다. 이런 자들과 어찌 문장의 정경(情境)을 말하랴. 사랑을 모르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 사랑의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을 얹어낼 수 없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림에 먼 뜻이 담길 때라야 경(境)은 살아난다. 할 말을 다 해버리면 경(境)은 사라진다. 이 이치를 모르고서는 문장의 정경(情境)을 운위하지 말라. 벌레의 더듬이를 보고, 꽃술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는 문심(文心)이 있는 자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보고 무릎을 치는 사람은 글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물과 만나 그 의미를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도 사물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나 진배없다. 아름다운 새소리에 아무 느낌도 일지 않는 사람은 귀머거리나 한가지다. 정신의 귀가 멀고, 가슴의 눈이 멀고 보면 예술은 빛을 잃는다. 성색정경(聲色情境)은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물들 속에 녹아 있다.”

좀 길게 인용한 것은 위의 시를 읽으면서 너무도 아쉬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프다고 쓰지 않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고 쓰고 있구나.”란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리 처절한 사랑의 아픔을 경험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시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아니다. 감동이 물결쳐 오지 않는다. 아픔이 가슴을 적시면서 여운이 남아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랑의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을 얹어낼 수 없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를 보라.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6. 다시, 시란 무엇인가

 

고등학교에서 시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시란 무엇인가 물어 보았다.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시의 여러 가지 요소들과 이미지와 운율과 의미에 대해서 얘기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시란 무엇인가’를 자꾸 되묻는 것은 지금 우리 나라의 시단에서 이미지와 운율에 경도된 많은 모더니즘 시인들의 시들이 너무도 의미를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흥기(興起)할 수 있고, 득과 실을 관찰할 수 있으며, 조화롭게 무리 지을 수 있으며, 성내지 않으면서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로는 임금을 섬길 수 있고,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시(詩) 공부를 강조했다.

다산 선생은 시에 대한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다산 선생의 말씀이다.

다산 선생은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써,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아야 시가 되며,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바탕에서의 미의식(美意識)은 현실 비판적 요소가 강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풍자적이면서도 기법 면에서는 사실주의적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미의식은 다산의 언급처럼 부단한 자기 수양과 성실한 공부를 통해, 한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과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고민하는 현실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는 “무릇 시(詩)는 뜻을 주장으로 하는데, 뜻을 갖추기가 제일 어렵고 사연을 엮는 것이 그 다음이다. 뜻은 또한 기(氣)를 주장삼으니 기의 우열(優劣)에 따라 깊고 얕음이 있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 근본하여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가 모자라는 자는 글을 만들기에만 힘쓰고 뜻을 먼저 두려 하지 않는다. 대개 그 글을 새기고 치장함에 있어서, 구절을 단청(丹靑)하면 실로 아름답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깊고 무거운 뜻이 없어서 처음 읽을 때는 잘된 듯하나 두 번째 씹으면 벌써 맛이 없다.”고 했다.

또한 농암 김창협은 그의 진시(眞詩)론에서 이르기를 “시의 정도(正道)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시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성정과 천기가 드러나는 꾸밈없는 시, 즉 <진시(眞詩)>여야 한다.”고 했다.

 

7. 마무리 - 대저 시란 무엇인가?

 

이 계절에 수백 편의 시를 읽으면서 느낀 아쉬운 점은 조태일의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에서 말하고 있는 “시인은 사회 현실과 자기 내부 간의 갈등을 끊임없이 부딪쳐 현실도 밝히고, 미래도 밝히는 불꽃을 점화시켜야 합니다. 이 점화의 순간이 시를 쓰는 순간이요, 시 완성의 순간이 됩니다.”라는 말에 합당한 시를 찾지 못함이다. 또한 이 계절에 그리운 서정시를 찾아서 떠난 여행에서 정말 아쉬운 점은 다음과 같은 신동엽 시인의 말이다.

 

“하여 내일의 시인은 제왕을 실직케 할 것이며,

제주를 실업케 할 것이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할 것이다.”

 

아, 나는 스스로 천기를 예보하는 시를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