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대형마트 진영대 위,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완두콩 통조림

금빛 양철 뚜껑을 열어젖히는 순간

오래된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들은

거세당한 얼굴들로 빠져 나오고

생의 절정인 그 순간만을 불하받은

푸른 알갱이들은 유효기간도 모르는 채

둥글고 깊은 진공 속에서 발아의 꿈을 꾸고 있다

 

이도시의 중앙으로 진공의 통로가 열려있다

그 길 따라 가면 발아점을 상실한 21세기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선택되어 포박당한 우리들의

탱탱하게 부풀어진 욕망의 결정들

부패되지 않게 봉인되어 역사의 한켠에

빼곡하게 진열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한 두엄조차 될 수 없는……

 

 

봄날은 간다

 

오봉순, 삼십대, 나이 정확히 모름

경북 경산시 하양읍 동서3리, 이장님의 눈총과

배려 속에 마을회관에서 2년째 살고 있는 여자

남편, 가끔 보이기도 함

출생내력, 알지 못함

한글을 모를뿐더러 숫자개념이 없어

시간제로 일하는 단순노동의 임금을

종종 떼어먹히는 줄도 잘 모름

유일한 희망이자 낙은 그날 번 일당으로

마을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맥주 한 병 사 마시는 일

아이 셋, 또래와 같이 학원도 보내야 하고 컴퓨터 사 달라고 졸라

당분간 맥주 한 잔 포기한다고 구멍가게 아줌마와 이장님께 선언함

 

대추꽃 피는 마을

마을회관 높은 방 벽과 벽 사이 삼각의 꼭지점

거미, 집을 짓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막

기진맥진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투명한 알 지금 부화 중이다

 

 

직소*에 들면

 

길 있는가 내 안에

곧게 뻗은 길 있는가

내 정신을 직선으로 깍아 내릴수록

삶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生이여

내가 나를 얼마나 더 깍아 내려야

너의 정점과 만나겠느냐

 

스스로 높아지기 위해 제 살을 깍아온 절벽까지 와서야

꼿꼿하게 일어서는 직소에 들면

굽히지 않으면서 낮은 곳으로 흐를 줄 아는

직소에 들면,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패배나, 굴욕이나, 기다림……

때론 엉겨 붙지 못하는 희망 같은 거

순결한 저 물소리에 씻겨지겠냐

 

내 정신의 절벽까지 와서

生이여! 너에게 묻노니

나 이대로 직소에 들면

네에게서 곧은 길 하나 얻어

저 관음에 이르겠느냐

 

*직소 : 변산8경 중 제 1경인 직소폭포

 

 

 

깡,

 

꽃잎을 반이나 뭉텅 뜯기 우고도

시들지 않은 수레국화가

뜯긴 꽃잎의 무게만큼 땅 쪽으로 기우는 몸을

끙, 들어 올린다

무심하게 놀린 누군가의 손짓거리가 분명해

바라보는 내가 참 불편하다

차라리 깔끔하게 지고말지, 무슨 깡을 부리나

생각하는 사이

벌 한 마리 날아와 꿀을 빤다

꽃의 목대가 파르르 떨린다

수레국화가 생애의 완성을 위해

반편의 얼굴로 매춘하는 지금

꽃의 뿌리는 깡,깡,깡 울 것 같다

반편인 내가 살아 보겠다고

파르르 떨 때 마다 저 까마득한 곳에서

깡,깡,깡 우는 엄마처럼

살아오는 동안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

목울대가 눌리어 파랗게 질릴 때

내가 내미는 히든카드는 ‘깡’,

울어서,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린

내 뿌리의 마른 울음인 그 깡,이다

 

 

행운

 

내가 ‘행운’이라 말하며 뚝 꺾었을 때

악! 하고 새파랗게 질렸을 그 순간이

빳빳하게 정지 된 채 있습니다

 

토끼풀 一家는 원하지 않은 일족을

어떻게든 내쳐야 했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하늘은 맑죠 햇살은 눈부시죠

아롱아롱 여울지는 초록의 촘촘함에서

행운이라 명명되어진 특별히 다른 하나를

가져가라는 유혹

얼마나 매혹적이었겠는가를

하여, 이제는 부끄러운 내 싸구려 취향은

토끼풀 가의 음모에 휘말려

그들이 축출시킨 가문의 기형아와 함께

 

깔끔하게 코팅처리 되어 책갈피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늦은 봄날

나는

토끼풀 일가가 찾은 행운이였던 거지요

 

 

꽃들의 팔뚝

 

연뿌리 두어 개를 사왔다

뽀오얗게 다듬어 얄팍얄팍 썰어 놓으면

꽃 모양 반찬이 되는 그것 이전의,

팔뚝같이 생긴 연꽃의 뿌리

흙 털고 껍질 벗기는 중에 스치는 생각

뿌리가 뿌리 이전의

한 알의 씨앗이었을 때의 설레임이

꽃을 피우는 일은

깜깜한 진흙 속에 파고들어

통뼈인양 시치미를 떼고 버티는 노고

숭숭숭숭 바람 든 이력을

짜-잔 하고 꽃모양으로 변해주는 눈물겨운 결단

깨끗이 다듬어져 도마 위에 나란히 뉘인

백골 같은 그 뿌리 겨냥해 칼 갖다 대다가

해 본 생각

진흙구렁텅이인 이 땅덩어리에 피어 있는

꽃들의 팔뚝

 

 

경배,

 

그 절집 뜨락에

불두화 피었습니다

등애……,나비……, 진딧물 까지

도나 개나 다 모여 들었습니다

와중에

꿀벌 한 마리 그만 코 박고 죽었습니다

둥글고 환한 불두佛頭가 감춘 건

꿀이며 독이었던 것

부처도 아닌 것이 부처의 형상만 훔쳐

야단법석, 난장을 펼치는

저것을 우러러

손 모아 절한 이 어찌 저 꿀벌뿐이겠습니까

밥줄이거나 사랑이거나

오체투지로 가 닿아 절명한 곳이면

그도 성지 아닐런지요

 

 

접견하다

 

서울 사는 오모시인이

부처님 오신 날 즈음해서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원 합니다, 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안부를 전자 우편으로 보내 왔다

아내와 함께 도봉산 산행 길에 들렀던

관음암에서 찍었다는 사진 한 장도 따라 왔다

현판도 주련도 보이지 않는 당우

햇살이 사선으로 비켜 가는 섬돌 위에

나란히 계신 흰 고무신 한 켤레

닳고, 닳아서 찢어진 뒤꿈치를

이제는 사라진 일거리 인, 이불호청 꿰맬 때나 쓰는

굵은 흰 무명실로 꽁꽁 꿰맨 고무신 한 켤레

나도 모르게 두 손 가슴에 모우고

모니터를 향해 꾸벅 절했다

 

 

침향

 

그것은

구천까지 가 닿았으나 내침당한 생목숨이

다시,

사랑 같은 지독한 문양을 새긴 죄로

천길 땅속에 매장 당한 나였던 것

한 천 년

내가 나를 버리다가

항아의 물길이 열릴 때

수월관음 발아래 엎디어 젖은 몸 사루는 것

뼈 속까지 태워 흔적 없어지면

비로소

화엄에 침투 할 수 있는 것

 

 

차경借憬

 

이제 막 피고 있는 석류꽃

 

꽃 진 자리가 불안한 늙은 산능금나무

 

어제처럼 그렇게 지는 해

 

어제 보다 조금 더 비켜서 눕는 내 그림자

 

가, 있는 마당에

 

흰나비 한 마리 왔다가 가네

 

왔다가 그냥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