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관 및 걸어온 길

( 두 편의 산문으로 대신)

 

울랄래미

 

약국집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애의 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했기 때문에 그 집을 약국집이라 불렀다. 약국 할배는 젊은 시절 과거공부를 했지만 세상이 바뀌어 시험도 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생계가 막막하였다. 아는 것이 한문뿐이기에 동의보감을 보고 한약 처방을 하여 섭생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약국 할배라 불렀다.

이분이 유난히 인자하고 자정이 많은 분이었다. 그런데 위로 두 손자를 낳자마자 잃은 뒤였으므로 이 아이는 자연 귀한 아이가 되었다. 이런 아이일수록 부실하기 마련이다. 아이는 몸이 약하고 입이 짧았다. 다른 집 아이처럼 푹푹 먹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뜻과 달리 그리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연필로 그려놓은 것처럼 가냘픈 형상이었다.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아이가 심심할 것 같아서 어른들은 걱정이었다.

“야야, 사랑방에 가라.”

그러면 조용히 일어나서 사랑방으로 갔다. 사랑방에서 어른들 뒤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가 심심할 것 같았다.

“야야, 니는 안방에 가라.”

그러면 또 조용히 걸어서 안방으로 갔다. 잘 먹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착한 아이라 할 수 있었다. 어른들 말씀 잘 듣는 아이가 가장 착한 아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아이에게 거친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 시절은 온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끼니를 잇기 어려운 집이 많았다. 이웃 아이들은 없어서 먹지 못하는데 이 아이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먹지 않으니 그의 어머니는 속이 상했다. 아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번 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좀 처먹어라! 요놈아!”

한 번도 거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후로 아이는 조금만 섭섭한 말을 들어도 우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서 울랄래미라는 별명이 붙었다. 울랄래미는 잘 우는 아이, 즉 평강공주와 같은 울보를 가리키는 지역 말이다. 아이는 웬만하면 울었다. 울지 않아야 할 때 우니까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장난삼아 울리곤 했다. 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매번 울었다. 멀쩡하다가도 누가

“운다. 운다.”

하면 울었다. 홍사용이라는 시인이 눈물의 왕국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라고 노래했는데 그 나라의 2대 왕으로 취임할 만했다.

아이가 점점 자라 총명이 과인하지는 못하나 세종임금이 만드신 한글 덕분에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한글을 대충 깨치게 되었다. 공책이 필요하여 난생 처음 장터까지 가서 공책 사야 할 일이 있었다. 평소 아이가 착했기에 그 집에서는 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고 필요한 만큼 스스로 가져가게 하였다. 아이는 한 번도 필요 이상의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날도 2원을 들고 공책을 사기 위해 5리길을 걸어서 장터에 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것이 공책보다 미리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를 잘라서 작은 피리 모양을 만들고 끝에 물들인 닭털과 고무풍선을 단 장난감이었다. 대나무 끝에 입을 대고 불면 풍선이 부풀고 입을 떼면 풍선의 바람이 빠지면서 리드가 떨려 빠앙~ 하고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것이 가지고 싶었다. 그걸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이 일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지 않은 터여서 그냥 사버릴 수 없었다. 값을 물어보니 얇은 공책이 1원이고 닭털 장난감이 1원이었다. 2원짜리 공책을 사지 않고 1원짜리 공책을 사면 남는 1원으로 그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들을 속이는 일이었다. 아이는 떨리는 가슴으로 부모의 허락 없이 공책과 닭털 장난감을 샀다. 아이 혼자 오솔길을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오월이었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엔 온통 아카시아가 키가 넘게 푸르게 자라나 있었다. 호젓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아이는 닭털이 달린 장난감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불었다. 풍선이 부풀어 오르고 숨이 가빴다. 빠앙~ 하는 소리가 온 산과 들판에 울려 퍼졌다. 아이는 무서웠다. 누가 숲 속에서 뛰어나와 나무랄 것 같았다. 소리가 나는 동안 가슴이 심하게 콩닥거렸다. 빨리 풍선의 바람이 빠져나가기를 가슴을 졸이며 빌었다. 그러나 장난감은 바람이 다 빠진 다음에야 소리가 그쳤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그게 아이의 첫 번째 범죄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몸이 약하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늦게 입학을 시켰다. 5리나 되는 길을 아이 혼자 보내기가 못미더워서였다. 아이는 선생님이 두렵고 낮선 친구들이 두려웠다.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음악 시간과 율동 시간이 싫었다. 노래도 율동도 모두 부끄러웠다. 할배 앞에 꿇어앉아 천자문을 배우며 선비의 몸짓을 익힌 아이에게는 신식학교의 경망스러운 교육과정이 어색하기만 했다.

아이는 한글을 읽을 줄 알았지만 부끄러워서 한 번도 손을 들고 책을 읽지 못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그가 바보인 줄 알았다. 2학년 교과서를 받았다. 새 책 냄새가 좋았다. 1학년 때와는 달리 그림보다 글자 수가 많아졌다. 도덕과 국어 교과서의의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책을 읽어볼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많은 글자가 있는 책이 읽기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읽을 수 있는데, 하고.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책 읽을 사람 없어?”

아이는 죽을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아이는 타고난 부끄럼쟁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얼굴은 빨갛게 되고 목소리는 떨렸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놀랐다. 바보가 글을 읽은 것이다. 그 뒤로 차츰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른들 말씀과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라고 마을에 소문이 났다. 아이들과 어울릴 적에도 수박서리, 콩서리 등을 하자고 하면 슬그머니 도망을 쳤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는 것이 무서워서였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기 집 아이가 이 아이와 어울려 놀면 안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사타구니에 옻이 올랐다. 부랄이 한 근은 되게 커져서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학교에도 처음으로 결석을 했다. 지팡이를 짚고 마실을 갔다. 아이들이 얼마나 아프냐고 물었다. 어떤 아이가 말했다.

“그래먼 자는 운대이.”

그러자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윤동주 시인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에 온통 부끄러움의 시를 썼지만 아이는 타고난 우랄래미요 부끄럼쟁이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도 부끄러운 기억을 하다가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운동회 때 여학생들은 두 다리에 고무줄이 있는 까만 팬티에 흰 러닝셔츠를 입었고 남학생은 고무줄도 없는 팬티에 흰 러닝셔츠를 입었다. 다리 사이로 부랄이 보일 것만 같았다. 아이는 두 가랑이에 고무줄 없는 팬티를 입는다는 것이 쪽팔려서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아이 어머니는 조선시대 사람이었다. 바지저고리나 두루마기는 맵시 있게 만들 줄 알았지만 아이에게 예쁜 신식 옷을 입힐 줄 몰랐다. 장터거리의 아이들은 항상 맵시 있는 옷을 입고 다녔지만 아이의 옷은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는 그게 부끄러웠다.

초겨울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을에 입기에 합당한 옷을 아이에게 입혀 주었다. 바지에 풀을 먹여서 걸어가는데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기에 좀 부끄러웠지만 어머니가 입혀주시는 옷인지라 그냥 입고 학교로 갔다. 혼자 오솔길을 걸어서 학교로 가는데 뒤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오고 있었다. 까만 교복에 하얀 옷깃이 잘 어울리는 예쁜 누나였다. 아이는 부끄러워서 걸음이 잘 되지 않았다. 누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가을 옷을 입었어.”

여학생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아이를 보고 까르르 웃었다.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울랄래미요 부끄럼쟁이인 그런 아이가 있었다. 제 구실을 할까 염려스럽던 그 아이가 자라서 시인이 되었다는 풍문이 들리기도 했다.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 중에서

 

 

문청시대

 

나의 문학청년 시대는 늦게 시작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술과 담배를 하며 문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없는 듯한 학생이었다. 글을 써서 교지에 발표한 적도 없으며, 문학 동아리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시화전을 열고 여학생을 만나고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 뿐 문학 소년의 티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변방교육대학에 입학했다. 교육대학은 대학이라기보다 초등교원 양성 기관이었다. 젊으나 젊은 나이에 초등학교 교원이라는 미래가 정해진다는 것은 꿈이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황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학점을 따지 못해 가을 코스모스 필 때 졸업하는 낙제생들의 모임인 ‘코스모스’ 동아리에 신입생 때부터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 밖에서는 문학을 하는 선배들 모임에 어울리는 것이 일과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낙제를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 2년에 졸업하는 학교를 3년 만에 겨우 졸업했다. 그 3년이 나에게는 문학청년 시절이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지역 문학단체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니까 문학회의 회원이 되라고 했다. 그래서 이른바 문인이라는 사람들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문인이나 시인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가장 설레게 하는 어휘들이었다.

모임에 나가면서부터 모임의 유일한 학생 회원이 되었다. 학교에 가는 일보다 문학회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더 잦았다. 그들은 담배를 피웠으며, 술도 잘 마셨으며, 욕도 잘 하였다. 아, 시인은 그래야 되는구나, 하고 나도 술과 담배를 배웠다. 담배는 가장 값이 싼 새마을부터 시작하여 가장 비싼 신탄진까지 한 갑씩 단계적으로 학습했다. 학습이 끝난 다음 경제적으로 나에게 합당한 백조에 정착했다. 필터가 없는 담배였다. 그런 담배를 피우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담배만은 비싼 걸 피우던 것이 그때 학생들의 풍속도였다. 왜 학생이 그런 담배를 피우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늘 대답을 준비하고 다녔다.

“담배를 맛으로 피우나, 이름으로 피우지.”

그러면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학습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기가 김부식이 정지상 귀신에게 불알을 잡혔을 때와 같았다. 심장이 뛰고 더 마시면 결국 전봇대를 잡고 모두 토해내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도 주석에는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그리고 가끔 기회를 봐 가며 욕설을 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난한 노력의 결과로 술은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토하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욕설을 해도 사람들이 욕이라 여기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나는 술 마시고 담배 피고 욕하는 것만 늘었지만,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는 세월이 지난 다음 누구라면 알 정도의 문학적 성과를 거둔 분들이 많다.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 문학청년 시절 나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문학회 모임이 있는 음악다방에 나갔다. 다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한 사람이 제 시간에 맞추어 와 있었다. 검정 고무신에 허름한 작업복차림이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썼다. 얼굴은 영락없는 시골 농부의 얼굴이었다.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겸손했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는 동화를 써서 갓 문단에 나온 동화작가라 했다. 직업은 시골 교회의 종지기라고 했다. 학력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고 했다. 명문 학교를 나와야 훌륭한 문인이 되는 줄 아는 것이 내가 배운 전부인데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이가 어떻게 문학을 하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떻게 글을 그렇게 잘 쓰니껴?”

“몰래요. 자꾸 읽고 자꾸 쓰다 보이 되데요.”

그리고는 통 말이 없었다. 모임에서 늘 배경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회의를 마치고 우리가 음주를 하러 갈 때 그는 늘 없었다. 그는 그때 이미 깊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첫 동화집 출판 기념회가 시내 교회에서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치기어린 문학청년들을 말함이다, 출판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로 갔다. 교회에는 그가 종지기로 있는 교회의 신도들이 한복을 차려 입고 와 있었다. 목사님도 몇 분 와 계셔서 온통 교회 사람들로 가득하여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출판기념회가 시작도 되기 전에 이미 조금씩 취해 있었다. 축하의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되었다. 교회 사람들은 찬송가를 불렀다. 문학회에서도 축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가운데 몇이 나가 축가를 불렀다. 군대를 금방 제대한 친구의 의견대로 군대에서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입술만은 돼도 입술만은 돼도 그것만은 안돼요~”

어쩌구 하는 속된 노래였다. 좌중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러나 곧 글쟁이들이란 그런가 보다 하는 분위로 바뀌었다. 주인공인 동화작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민망한 축가가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리라.

그는 그 후로도 마을 사람들이 지어준 오두막에 김 서방이라는 개와 살면서 동화를 썼다. 그러면서 성자가 되어 갔다. 동화를 써서 받는 고료가 수월치 않았지만 그는 그 돈을 모두 어려운 이웃에 주고 자신은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했다. 그의 오두막에 갔을 때 식사 시간이 되면 소면을 한줌 삶아 건지고 까만 장물 한 종지 내어놓고 만다.

“자, 먹시더.”

그게 그의 식사법이었으며 옷은 한 벌 마련하면 다 해져서 못 입게 될 때까지 입었다. 그 동화작가의 집에 임 형이 자주 들렸다. 시를 쓰는 임 형도 고향은 이곳이지만 가족들 모두 떠나고 혼자 산다. 임 형은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젊은 사업가였지만 국가보안법 관계로 모처에서 심신이 피폐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임 형은 매일 밥은 한 공기 정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술로만 사는 이였다. 술도 먹지 않는 동화작가의 집에 찾아가서 소주를 사내라 하여 밤새 마시고 밤새 울고 난리를 떨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동화작가는 몸이 건강하지 못하였으므로 견딜 수 없었다. 거의 성자가 된 사람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동화작가가 말했다.

“귀신은 병호 안 잡아 가고 머 하노?”

이게 그가 태어나서 한 말 가운데 가장 곱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임 형은 문학청년들과 함께 문학행사 하는 일과 술 마시는 일로 지역 문학판의 중심에 있었다. 그 후로 임 형은 실천문학에서 시집 한 권을 남기고 일찍 갔다.

내가 교사를 하며 밥을 먹는 동안 동화작가는 기념비적인 동화를 썼다. 그가 쓴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수필을 읽고 문득 성자가 된 그가 보고 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그를 찾았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외식을 하자고 하니 거절했다.

“집에 밥이 있는데 머 할라꼬 돈 주고 사 먹니껴?”

그가 외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구상에 굶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음식 소비를 할 수 없다고 했다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그를 당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따뜻한 밥 한 그릇 먹고 싶다는 나의 목적도 소중했다. 나는 그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로 했다.

“모두 외식 안 하면 식당 하는 사람은 머 먹고 사니껴?”

그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게 그와 마지막 식사였다.

문청시절 또 다른 임 형이 있었다. 그는 이마가 훤하고 입이 크다. 문우를 만나면 큰 입을 최대한 벌려 시원하게 웃었다. 수필의 매력에 빠져서 전업 수필가가 되겠다고 교사를 그만두고 구멍가게를 차렸다. 그때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박연구 수필가의 수필집 『바보네 가게』를 좋아해서 가게 이름을 ‘바보네 가게’로 하였다. 시 쓰는 임 형을 비롯한 우리들은 술집에 갈 돈이 없으면 바보네 가게에 죽치고 앉아서 소주랑 안주를 축냈다. 산적 같은 청년들이 가게에 죽치고 있으니 손님이 쉽게 들어올 수도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보네 가게’는 쫄딱 망했다. 임 형은 후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된 뒤에도 가끔 승복을 입고 나타나곤 했는데 원래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깎으니 더 보기가 좋았다. 나도 나이가 더 들어 대머리가 되면 가발을 쓰지 않고 남은 머리를 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친일불교 연구에 일가를 이룬 학승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천재성을 인정받아 시집을 낸 바 있는 신 형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몹쓸 병을 얻어 잘 걸을 수가 없었다. 이 지역 문학청년들의 선망인 그를 찾아갔다. 조그만 셋방에 살았는데 도회풍의 천사 같은 여자가 그의 곁에서 수발을 들고 있었다. 해사한 얼굴에 달변인 그는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는 문학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술을 마셨다. 벽에 붙은 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위트에 넘치는 언어의 발랄함이 있었다. 그를 보면서 시를 잘 쓰면 미인을 얻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몰래 했다.

그의 병세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그는 목발을 짚고 우리가 자주 모이는 음악이 있는 찻집에 가끔 나타났다. 그는 여자에게 얹혀사는 처지고 나는 학생이니 술 마실 돈이 없었다. 가게에서 소주를 사와서 다방에 앉아 술을 마셨다. 1970년대 찻집마다 똑같은 갈색의 엽차 잔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어 엽차 잔에 따르고 엽차 마시는 것처럼 몰래 마셨다. 사실 그의 몸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태였다.

그는 달변이었고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와 함께 했던 분위기가 매우 시적이었다는 느낌이다. 얼마 후 그는 하늘로 갔다. 늘 그가 하늘로 가는데 일조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아마 별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가 김 형은 담배조합에 서기로 일하는 분이었다. 돈을 한 가방 넣고 시골에 가서 농민들이 농사지은 잎담배를 사오는 일을 한다. 퇴근 무렵에는 큰 가방을 들고 오는 경우가 있다. 가방에는 잎담배를 사고 남은 돈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 가방을 들고 대폿집으로 퇴근하는 날이 더러 있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돈이 많았다. 술값은 언제나 그가 냈다. 때로는 그의 집에 가서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까만 후배들인 우리를 황공하게도 그의 부인에게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술상을 보아오라 했다. 밤늦게까지 마시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우리가 겨우 잠에서 깨면 그는 이미 깨어서 엉덩이를 하늘로 추켜들고 엎드려 글을 쓰고 있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깨알 같은 글씨로 대학노트에 빽빽하게 적었다.

나는 늘 돈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술자리가 파할 때면 매번 그는 당당하게 걸어가서 주모에게 말한다.

“마구 얼매이껴?”

마구는 모두의 고장 말이다. 그 자리의 모든 매상을 계산하겠다는 뜻이다. 그런 당당한 뒷모습이 더 없이 멋있게 보였다. 나도 언젠가 당당한 모습으로 ‘마구 얼매이껴?’라고 묻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담이 좋았다. 술자리에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얼마 지나면 문예지에 그가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그대로 소설로 발표되곤 했다. 그의 단편이 평론가들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결혼을 머 그키 일찍 했니껴?”

“늦게 하면 그걸 마이 못하지.”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그리고 그는 아내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조선에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음악이 있는 찻집이 있었다. 나는 가끔 혼자 찻집에 우두커니 혼자 있을 때도 있었다. 저쪽 자리에 그가 미모의 여성과 마주 앉아 있었다. 한참을 심각하게 앉아 있더니 여자가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내 자리로 왔다. 술 마시러 가자고 했다.

아예 여관에 들어 밤새 마시자 했다. 도우미 여성도 한 사람 불렀다. 그리고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 여관에서 서각이와 술 마시고 늦게 간다 했다. 술이 오고 여자가 왔다. 막 시작하려는데 자그마하고 예쁜 그의 부인이 들어왔다. 집에 전화해서 장소를 소상하게 일러준 게 화근이었다. 도우미 여자는 황급히 도망을 갔다. 그의 예쁘고 착한 부인은 연암 박지원의 소설에 나오는 허생의 아내처럼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는 신이 뚤버져서 아침에 라면 봉지로 틀어막아 신고 학교 갔니더. 그런데 이게 머이껴?”

그는 큰 키를 구부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 했네.”

그는 시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아내를 따라갔다. 늘 그가 술값을 내기에 나는 그가 돈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기도 어려우면서 가난한 문청들에게 늘 보시를 했던 걸 그제야 알았다. 얼마 후 그는 전업 작가가 되어 서울로 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서울에 상 받으러 갔을 때 그는 무교동 어느 대폿집에서 축하주를 사 주었다.

나는 추운 겨울 상 받으러 간다고 처음으로 단벌 양복을 입고 갔다. 몹시 춥게 보였을 것이다. 그의 부인은 소설가가 입던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입혀 주었다.

“시인은 이런 걸 입어야 되니더.”

그 겨울 그걸 입고 중앙선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 문청 시절의 객기와 치기와 열정과 슬픔이 차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중에서

 

권서각(權鼠角)

1951년 경북 순흥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권석창. 안동교육대학과 대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벌판에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물 반응』『쥐뿔의 노래』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등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