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판에서

 

부러져 넘어진 한 아름 바람을 버리고

오렌지빛으로 불타는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허공을 버리고

슬픔의 무게로 뚝뚝 떨어지는 눈발 속을

그대들은 어디로 가고 잇는가

이 세상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은 내려서 세상은 비어지고

바다 속 깊숙이까지 슬픔이 배인 지금

저마다 또 다른 짐을 꾸려 지고서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너디로도 통하지 않는 쓸쓸한 길 위에

표정 잃응 신호등을 나는 보았다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숨어서 우는 몇 날밤의 어둠과

멍든 바다의 조각들이 끝없다

잎이 진 나무들이 눈 쌓인 산길을 내려와

죽은 강물을 보고 울었다

아, 이제 이루어짐의 모드는 그개 rix에 없다

천근 무게로 밀려오는 잠의 더미 더미

머리 풀고 몸져누운 산하, 그 침묵의

마지막 날까지

빛바랜 낮달은 벤체에서 졸고 잇다

그대들이여 하고 소리쳐 불러도

안개 속에 피었다 질 뿐

허물 수 없는 벽 속에 갇혀서

허망한 몸짓만이 만났다 헤어진다

떠날 것 모두 저대로 떠나고

남은 것만이 허망하게 남아

몸부림해도 일어나지 않는 바람과

두들겨도 소리하지 않는 침묵만이

깊게 깊게 가라앉는다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지난여름

 

모래는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별은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바닷가 언덕에 모여 근심하였네

모래는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별은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손가락에 눈물 찍어

어둠에 대고 꼭 눌러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썼네

흩어진 별의 뼈

허물어진 모래성을 지나

지난여름 바닷가 빈 마을로

파도는 배가 고파 물 먹으러 간다

파도는 빈손으로 물 만자러 간다

파도는 눈물이 나서 물 보로 간다

1989, 시집 『눈물반응』

 

 

몸성히 잘 있거라

 

자주 가던 소주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이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를 따라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슬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2005년 시집 『쥐뿔의 노래』

 

 

간이역

 

비둘기호 열차를 탄

우리 인생 속절없이 흔들리고

혹은 남루하게 흔들리고

몇몇 친구들

쪽팔리게 살기 싫다며

간이역에서 내렸다.

잘 가라, 씨방새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흰 상복을 입은 여름이

안개와 더불어 조문 왔다 가고

간이역 모퉁이 빈 가지엔

찢어진 비닐 조각 만장처럼 나부꼈다.

내 인생 아직도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안개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2005년 시집 『쥐뿔의 노래』

 

 

어느 신부님의 강론

 

 먹이 사슬 꼭대기에 공룡이 살았습니다

먹을 줄만 알고 먹힐 줄을 몰랐습니다

암 세포도 공룡과 같습니다

다른 세포를 잡아먹으면서

다른 세포에 먹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룡이 죽었습니다

암 세포도 다른 세포가 다 죽으면 죽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주기만 하면 신적인 존재고 받기만 하면 암적 존재입니다

주기만 하면 영원히 살고 받기만 하면 죽게 됩니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 거두어 함께 사시는 신부님께서

이렇게 강론하시는 걸 들으며,

흰 눈 내려 겨울나무의 시린 발목 덮어주고

가지 위의 새도 아멘! 하였습니다.

2005년 시집 『쥐뿔의 노래』

 

 

낟알

 

이 풍진 세상에 한 알의 낟알로 태어나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겪으시고

이 되시다

뜨거운 솥에서 고난을 겪으시고

이 되시어, 도반들과 더불어

구절양장 머나먼 고행의 길을 거쳐

해우소에서 면벽수도, 용맹정진 하시다가

문득, 해탈하시어

의 형상으로 부활하시다

이밭 저밭 다니시며

이 세상 살아 있는 것들의

거름이 되시더라

<작가정신>

 

 

진달래 피는 풍경

 

서울 큰 병원 갔다 오는

영감 기다리는데

저 멀리 영감 지팡이 짚고 오시네

그래, 다리는 고쳐준답디까?

아니, 연골인지 뭔지가 닳아서 가망 없다네

그럼, 이제 지팡이 짚고 살아야 되니껴?

그렇지 뭐

할미는 앞이 캄캄하다

아이고, 우리 영감 다리가 세 개 됐네

곁에 있던 수다쟁이 할머니

세 개는 뭐가 세 개?

내사 보이 네 개다마는

할미가 그 흔적만 남은

한 개의 다리를 추억하는 동안

앞산 진달래 지천으로 피고……,

있었다

<내일을 여는 작가>

 

 

염 불

 

노스님 만나러 극락사에 갔다

스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늙었으니 눈도 침침하고

귀도 먹먹하고

다리도 성찮고 그렇지 뭐

이제 고기도 좀 드시고

건강도 돌보셔야지요

고기 먹으나

나물 먹으나

그기이 그기지

그래도 나물하고 고기하고 같습니까

소가 나물 먹고 컸으니

소 먹으나 나물 먹으나

그기이 그기지……

돌아오는 길

숲속에 새 몇 마리 염불을 한다

그기이 그기지

그기이 그기지

산 아래까지

염불 소리 따라오고.

2010. 10. <현대문학>

 

 

삼국지풍으로 이름나기

 

허수아비에 쫓기고

농약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며

방앗간 뒤켠에서

깨진 좁쌀 조각 쪼으며

오랑캐꽃처럼 울었다

참새만한 게, 라고 하고

수풀에 앉은 새라고 함이

나를 두고 이름이라

아, 엄혹한 세월 근근이 살아서

좋은 날 오려나 했더니

금강산 온정리 포장마차에선

통째로 구워져

사람들의 소주를 도왔도다

이게 얼마만의 참새구이인가

반가워하며, 그래도 이름만은

‘참새’라고 불러주니

세상에 그 이름 헛되이 나는 법 없느니

<문학들,21>, 2010. 가을.

 

 

폭 설

 

이따금 폭설이 내려

집과 집으로 난

마을과 마을로 난

길을 지워버리는 것은

그리하여 너와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그리움의 전용도로인

하얀 길을 만들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눈이 녹을 때까지

밤새워 긴 편지를 쓰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움의 자음과 모음이

맨발로 하얀 길을 가게 하려 하심이다

<작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