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는,

 

어깨 처져 아이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가장의 손에 들린 호떡 한 봉지이고

하룻밤 젊은것들이 마음을 다 내려놓은 채

돈이니 출세니 하는 것들을 가볍게

혹은 우습게 넘기는 막걸리 한 통이고

봄 햇살 졸음 쏟아지는 좌판에서

그대의 사뿐한 발걸음을 기다리는

축축 늘어진 돌나물 한 소쿠리이고

무거운 한숨 속에서도 따뜻하게 건너가는

찰랑찰랑 소주 한 잔이고,

 

그러므로

지친 너를 가만 감싸주는

초저녁 벽소령의 구름안개이고 싶고

산속 응달 반쯤 허물어진 무덤 옆에서

그 집 주인을 생각해보는 더딘 발걸음이고 싶고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야윈

그러나 눈빛 고운 그대들을 보듬는

상처의 집 한 채이고 싶고

그 집의 오래된 주인이고 싶고,

 

 

경배

 

안성 칠현산 참나무 숲길

그 단풍 고운 것 미리 알고

노란 듯 불그레한 웃음 한 자락

풋풋한 벌레께서 떼어가셨다.

 

누가 감히

벌레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는가

사각사각 길게 숨죽이는

그 은밀한 사랑도 알지 못하면서,

 

 

왕년

 

가랑눈 어설프게 흩날리는 날

밤늦은 변두리 포장마차에서

나도 왕년에는 말이야,

탁자를 탁 내리치는 당신을 보면서

에이 뻥치지 마슈,

대뜸 한마디 척 올려붙이려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맥없이 흘러나오는

저, 저, 누런 콧물 때문에

그냥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려주고

아따 술이나 한잔 더 하슈,

빈 잔을 내밀었는데

그런 남의 속도 모르고

됐어, 벌떡 일어나 비틀비틀

외등 아래 그림자 무겁게 끌면서

지린내 전봇대 돌아가는 당신이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오늘 밤은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함박눈이나 오달지게 내렸으면 좋겠는데,

그럼 당신의 구슬픈 왕년도 눈 속에 묻혀

조금은 멀리 흘러갈 것 같은데,

 

 

묵호 등대

 

다시 묵호에 가면

묵호 등대에 등을 대고

불빛을 따라 밤바다에 나서 보리라

그 바닷길 따라

누구도 걱정 없는 내일이 오고

내가 사랑하는 그대가 오고

우리가 마음 놓고 끌어안을 수 있는

참세상이 마침내 올 것이라 믿으며

밤새 철썩거리는 푸른 파도에

순결한 달빛 한 줌도 뿌려 보리라

정작 자신은 비추지 못하지만

아득히 먼 누군가를 위해

십 초에 한 번씩 반짝이는 당신

이 얼마나 넉넉한 품새인가

간혹 묵호 등대를 올려다보면서

아무리 먹물 같은 세상이어도

사실은 절망과 희망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다시,

밤이 새도록 느껴보리라

 

 

개펄

 

태안 조개부리 마을에 가서

종일 엎드려 있는 개펄을 보았다

처음에는 햇볕이 따가워서 그런 줄 알았다

밤새 거센 파도에 시달려

삭신 쑤셔서 그런 줄로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개펄은

품고 있는 바지락이

아무 걱정 없이 자라라고

바다에서 돌아오는 소달구지 진흙길도

판판하게 단단하라고

닳고 닳은 무릎으로 함지박 밀고 가는

세상 모든 어머니의 허리가

더는 휘어지지 말라고

눈을 질끈 감고

가만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나자 비로소

유려한 곡선의 갯고랑

그 깊은 속살이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三笑窟에 들고 싶다

 

경봉 큰스님이 열반에 들 때까지 기거했던,

포항 사는 사진쟁이 이해준 형이

가끔씩 들어가서 며칠씩 묵고 오는,

양산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가끔은 나도 그 소굴에 들어가서

며칠씩 두문불출, 틀어박혀서

같잖은 인생 뒤집어보고 싶다

온몸을 뒤집어서 가진 것 탈탈 털어내고

마음도 죄다 뒤집어서 오뉴월 댓잎

그 푸른 그늘 아래 아흐레쯤 널어놓고 싶다

그렇게 한 세 번쯤 저 소굴에 드나들면

고집 센 위아래가 없어지고

눈초리 추어올린 안팎도 슬그머니 사라져서

너와 나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우리 앞에

저 극락교 아래 잔잔한 수련과 같이

극락암 부처님도 웃음 한 자락 툭 던지시고

영축산 바위 능선도 허허, 허허 따라 웃으며

땅거미처럼 가만 사람의 마을로 내려올 것 같다

모든 마음의 경계 앞에서

늘 안쓰럽게 머물렀던 내 발걸음

가벼워, 참으로 가벼워

세상 속으로 훌쩍 스며들 수 있을 것 같다

 

 

화엄벌 억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눈부시게 늙어가는 것

누가 있거나 말거나 힐끔거림도 없이

햇살에 목덜미 통째로 내어놓고

제대로 말라가는 것

가끔 달빛 따라 먼 길 떠났다가

태연하게 발목 적시며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눈 씻고

다시 또 황홀하게 말라가는 것

세상이 온통 하얗게 될 때까지

가진 것 탈탈 털어내며

이제 그만 이제 그만도 소용없이

천천히 하염없이 말라가는 것

외롭고 슬프다는 것까지도 끌어안고

함께 기꺼이 말라가는 것

 

어쩌나, 눈부심도 없이

온통 하얀 황홀함도 없이

외로움도 슬픔도 먼저 말라버린 나는

돌아서는 발걸음이 자꾸만 무거워져,

 

 

餘慶庵

- 조용한 말씀

 

오래된 이 절집도 좋고

세상 가득 꽃피울 배롱나무도 좋은데

부처님은 제발 찍지 마세요

오랜 세월 나다니다 돌아오신 지

이제 겨우 몇십 년인데

지금은 그냥 쉬셨으면 좋겠네요

부처님 담아가시면 내 마음도 아프겠지만

티끌세상 돌아오시는 길 얼마나 힘들겠어요

사람들 속에서 여기 기웃 저기 갸웃

쉽게 돌아오시지 못할 거예요

그게 부처님 마음인 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발길 그냥 돌려가세요

정 서운하면 마음이나 한 쪽 떼어놓고 가세요

아침마다 염불 공양 잘 올려 드릴게요

우리 부처님도 간혹

넉넉한 웃음 한 자락씩 던져주실 거예요

 

 

금오산 부처

 

하동 금오산 중턱, 남쪽 바다 아늑하게 내려다보이는, 구멍 숭숭 석굴암에 잠시 세들어 사는, 이마 훤하게 불거진 부처의 일과는, 어둑한 석굴에 누런 허울을 벗어놓고, 하얀 고무신으로 이슬진 남새밭과 오래전 봉수대를 느릿느릿 오르내리다가, 일 년 내내 마르지 않고 맛도 제각각이라는 석간수로 속을 씻은 뒤, 지나는 등산객을 불러 모아 한바탕 국수를 삶아먹고, 낑낑거리는 강아지 소리를 베고 누웠다가, 세상으로 내려가는 뒷덜미들을,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눈길로 가만 붙들어, 그 발걸음들이 석굴암 그늘 아래, 저물도록 머물게 하는 것

 

 

그대를 위한 바다

 

속 뒤집어진다고 탓하지 마라

진드근히 견디지 못한다고 나무라지도 마라

평온에 잠겨 사라지는 삶은 버린 지 오래

가끔은 옴팡지게 뒤집고 흔들어야

신안 젓새우도 토실해지고

벌교 꼬막도 알차게 여물어지는 것

그러니 그대

판판함에 기대어 쉽게 눈감지 마라

맥없이 사그라지지도 마라

바다는

또 내일도 지친 그대를 위해

기꺼이 아픈 제 몸 뒤집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