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으로 건너온 내 몸의 시(詩)

 

-이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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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몹쓸, 내 詩의 첫걸음은 언제 어디서부터였을까? 적성도 고려하지 않고 진학한 공업고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1981년 여름. 지금도 이름이 생소한 기계 다듬질, 용접, 선반 작업 등 공업학교 실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 연습장에 휘휘 써 갈겼던 낙서가 내 시의 첫 걸음이었던 것 같다. 겨우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오랜 갈등과 번민 끝에 부모님을 설득하고, 인생의 향방을 새롭게 수정한 그 힘의 하나가 연습장에 침 묻혀가며 내 마음 속의 무늬를 써 내려간 언어들이었다. 詩가 뭐 별난 것이랴. 내 몸과 마음이 토해내는 넋두리가 詩 아닐까. 그리고 재수를 하여 인문계 학교로 진학하여 찾아간 문학 동아리에서 詩라는 것과 얼굴을 처음 마주했다. 그 詩라는 놈은 얼굴도 예뻤고 몸매도 고왔다. 나는 단박에 그의 매혹적인 향기에 포박되었다. 운동권이었던 대학 시절 나는 일부러 문학을 멀리 하기도 했지만 그와 끝내 헤어질 수는 없었다. 내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그는 그림자처럼, 하늘의 구름처럼 내 몸과 마음에 늘 붙어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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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때 염무웅 교수가 심사를 본 천마문학상 문학평론이 당선된 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평론을 하려고 몇 년간 애를 써 봤지만 그리 쉽지가 않았다. 문학평론을 제대로 하기에는 직장의 여건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시의 향기가 자꾸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詩의 매혹에 이끌려 창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포항 지역의 여러 시인들과 함께 시작한 ‘푸른시’동인 활동에서였다. 내 시의 첫 모양새는 모두 ‘푸른시’ 동인 활동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그때 시 창작의 교본으로 집중해서 읽었던 것이 장석남과 황동규, 정진규 시인의 시집들이었다. 이들의 시는 내게 시 창작의 고혹(蠱惑)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그 낭패(狼狽)를 조금씩 지워내면서 시를 매만지게 되었고, 어느 날 나는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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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시집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읽었고 또 앞으로도 가장 많이 읽을 시집은 아마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집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시집이 아니라 이른바 ‘이종암 시인이 가려뽑은 서정주 대표시선’이다. 미당이 남겨놓은 한 권의『서정주문학전집』(일지사,1972)과 15권의 시집 속에서 110편을 뽑아서 워드로 작업한 것을 손수 묶은 것이다. 이 시선집 제목을 나는 어떤 평론가도 주목하지 않은 미당의 9시집 제목을 빌려 ‘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라고 했다. 미당의 9시집에는『삼국유사』를 비롯하여『대동운옥』『연려실기술』『고려사절요』같은 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는 설화와 역사적 사실을 차용하여 우리 민족의 원형적 삶을 시로 건져 올리고 또 거기에서 우리네 삶이 지향해야 할 삶의 빛과 그늘을 그려내고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미당 시 창작의 절정을 이루었던 4-50대가 아니라 이미 한국시단의 大家로 불려지던 60대 후반의 나이에 씌어진 것이어서 그 극단으로까지 시의 내용을 밀고가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앞으로의 내 시가 추구할 방향의 한 몫을 감히 말한다면 미당 서정주 선생이 노래하려다 다하지 못한 그 부분일 터이다. 덜 지어진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未堂’, 서정주 시인은 자기 시의 집을 세우고 부숴버리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해온 시인이다. 그런 면에서 미당은 한국 시단의 단연 독보적인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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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을 비롯하여 소월, 백석, 지용, 목월 등의 先代(선대) 시인들과 우리 시대 여러 선배, 동료 시인들에게 내 시는 크게 ‘빚’을 지고 있다. 더 멀리로는 신라시대 세계적 고승 원측화상의 만법 유식사상과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저작『난랑비서』에서 말한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도(風流道) 사상과『진감선사비문』의 도불원인(道不遠人)의 큰 마음에 내 시는 역시 빚을 지고 있다. 시를 포함한 전 예술의 역사는 바로 이 ‘빚’의 관계로 가능할 터이다. 그리고 내 몸은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 끝없이 이어지는 혈연(血緣)의 ‘빚’으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이 또한 엄청난 빚이 아닐 수 없다. 19대조 이암(李嵒)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목은 이색의 스승이었던 할아버지는 고려말 조맹부체의 一家(일가)를 이룬 서예가요 시인이었고, 또 한국학의 대학자였다. 인민의 복지를 위해 원나라에서『농상집요』를 가져왔고, 민족의 역사서『단군세기』를 저술한 할아버지는 말년에 정승에서 물러나 강화도에서 불계(佛界)와 선계(仙界)를 노닐며 시를 쓰시던 분이다.

 

沙泉帶草堂(사천대초당) 모래샘이 초당과 마주하고

紙帳卷空牀(지장권공상) 책갈피가 책상위에 뛰논다.

靜是眞消息(정시진소식) 고요함은 이것이 진정 소식이러니

吟非俗肺腸(음비속폐장) 읊조리는 시구 속세의 마음 아니라네.

園林坐淸影(원림좌청영) 정원 숲속의 맑은 그늘 아래 앉아

梅杏嚼紅香(매행작홍향) 매실과 살구 씹으니 붉은 향기 그득하다.

誰住原西寺(수주원서사) 누가 원서사에 머물러

鐘聲送夕陽(종성송석양) 종소리를 저녁 햇살 아래 보내는가.

 

이암(李嵒) 할아버지의「草堂」이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나는 우리 집안의 족보와『철성연방집』을 통해 이암(李嵒) 할아버지를 만나고서부터 서예(書藝)의 길로 입문했다. 먹과 붓으로 내 詩의 빛깔을 깊고 새롭게 더해갈 작정이다. 내 삶이 다하기 전 이 세상에 미미한 ‘빚’ 하나를 남겨두기 위해 나는 거듭 공부하면서 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는 자, 천둥과 지뢰(地籟)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 세상을 울리는 커다란 퉁소소리 한 자락 남겨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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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몹쓸, 아니라 천하 내 몸 바로 그것, 詩! 내 몸이라는 악기를 통해 세상에 나온 내 노래가 끝내 외롭지는 않아야 할 터인데.

 

 

<약력>

이종암

1965년 경북 청도 매전 출생.

1993년『포항문학』으로 등단.

시집『물이 살다 간 자리』『저, 쉼표들』『몸꽃』

현재 포항대동고등학교 근무

mulgasara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