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를 놓다

 

그러니까 까닭 없이 답답하고 우울하면

아니, 세상에 나를 내보낸 인연 그리워

태어나고 자란 곳

금천 지나 매전 고향 마을 찾아간다

 

동곡재 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황사 구름 속

겹겹의 산 능선들 눈앞에 마주 선다

병풍같다

무릎 꿇고 절하고 싶다

 

병풍에 새겨진 그림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들 누대의 삶이 수(繡) 놓은 것

저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

 

병풍,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저기

아버지 마중 나오는 소리가 있다

언젠가 나도 내 아들도 가서

병풍 속 수 하나 또 놓을 것이다

 

 

詩塚

 

말조심의 뜻으로 전해져오는 언총(言塚)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만나고는 캬- 무릎을 치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았건만, 얼마 전 한 평론집 서문에서 만난 시총(詩塚)은 왜 그리 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던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백암 정의번의 무덤. 시총의 주인공 백암공은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적에 포위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훗날 시신도 찾을 수 없어 그 아비가 아들의 옷과 갓을 들고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하여 빈소를 마련하고, 생전에 뜻을 나누던 지우(知友)들의 애사(哀詞)를 모아 관에 담아 묻으니 세상 처음 시총이 나온 바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기룡산 기슭 십만 평의 영일 정씨 하천묘역. 장방형 묘역에 돌올하게 솟은 80여 기의 무덤들 거대한 책 속의 무슨 글자들만 같다. 시총을 찾아가 비문을 손으로 찬찬히 읽고는 엎드려 절하니 사람 묻은 곳보다 더 깊은 무덤이다. 무덤 속에 있을 여러 편의 시와 공을 추모하며 봉분을 둘러보는데, 홀연 나비 두 마리 무덤을 열고 푸르륵 날아오른다. 나비 허공으로 날아간 궤적에 일순간 펼쳐진 문장을 나는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고 태산보다 크나니, 육신이 없어져도 마음은 남아 時空을 초월하여 通한다.> 무덤 속 백암공과 지우들이 남긴 시들도 나비처럼 날아올라 하늘의 별로 빛나는가. 어둠이 깔리니 열사흘 달빛 아래 하늘의 별과 땅 위 시총의 상응이 무한정 좋다. 시공을 건너는 저 시들은 비바람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겠다. 무덤 속 하얀 언어들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꾸 내게로 건너온다.

 

*나는 정진규 시인의 시집『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2009)에서 언총(言塚)을, 그리고 박현수 교수의 평론집『황금책갈피』(예옥,2006)에서 시총(詩塚)을 만나 이 시를 쓸 수 있었다.

 

 

개밥바라기塚

 

시를 묻어둔 무덤이라고 요즘 막 세상의 이목을 받고 있는 시총(詩塚) 바로 앞자리에 작은 무덤 하나 놓여있다. <忠奴億壽之墓>, 영일 정씨 문중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 붙들려간 주인을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한 노비를 어여삐 여겨 문중의 하천묘역 안에 고이 모셔놓은 것. 함께 죽은 주인의 무덤 시총보다 턱없이 작은 게 얼핏 보면 개집 같고 무슨 단추 같기도 하다. 이 작은 무덤의 사연을 세상에 내민다. 시총에 시가 있다면 노비 억수의 무덤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가. 시총의 주인처럼 노비 억수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면 이 무덤 속에는 대체 무엇이 묻혀 있는가. 마음이겠다. 주인을 구하려는 노비 억수의 마음, 그의 죽음을 안타깝고 고맙게 여긴 영일 정씨 문중의 따스한 마음이 여기에 있을 터. 그러면 이는 마음을 모셔놓은 심총(心塚)이다. 마음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여 세상의 빛깔을 바꾸게 한다. 또 마음의 깊은 자리는 세월을 넘어 이승과 저승에까지 이어져 썩지 않는 끈이 된다. 주인의 무덤 시총 앞 <忠奴億壽之墓>는 초저녁 초승달 위에 피어난 별, 개밥바라기를 닮았다. 개밥바라기塚이라 이름을 붙여드린다. 시총과 개밥바라기총 어울림의 앉음새가 하늘의 그림 같다. 개밥바라기총, 세월이 가도 그 자취 없어지지 않고 빛도 잃지 않겠다. 총, 총,

 

 

홍홍

 

여기로 붓글씨를 배운 지 몇 해

한자를 찾다가 옥편에서 우연히 만난

글자, 囍(희)

사십년 전 동네 잔치마당을 펼쳐놓는다

 

한 일(一)도 두 이(二)도 모르던 일곱 살

무슨 글잔지 아무도 모르는 애들 앞에서

잘난 체 했다 홍홍이라는 글자 아니냐고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囍를 세로로 나누면 喜가 둘이니

홍홍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다)

 

동네 잔칫날이면 회관 창고에서 나온

마을 공동소유 사기 그릇 밑바닥

또렷이 새겨진 글자, 囍

쌀밥에 고깃국 실컷 먹으니 얼마나 기쁘냐

그러니 囍는 홍, 홍 좋다는 말이라고

홍홍이라고

한자 모르는 애들 앞에 자랑처럼 빛나던

 

사십년 전 잔치마당처럼 쌓여가던 삶의

무늬 囍, 시나브로 지워져 이제는 헐겁다

아버지들은 다들 어떻게 떠났을까

여기 홍홍을 놔 두고서

 

 

구만리

 

드센 바닷바람 와글와글 구만리* 구릉

끝없이 출렁대는 보리밭 위로

노래처럼 봄날 깊어 가니

밭고랑의 보리 빛깔 하늘로 타오른다

 

누릿누릿 황금색으로 점점 번져가는 보리밭과

봄볕으로 따스하게 데워진 하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

연거푸 쏟아져 내린다

 

구만리 바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만큼

몸 바꾸는 보리밭의 색과 노래 잔치

가까운 듯 먼 듯 허공의 종달새 따라

소풍 나온 시인들 또 뭐라 노랠 부른다

 

봄날은 간다고 떠나가는 봄날의

노랫가락에 속이 다 타들어 가는

구만리 허공이 꽉 찬다

 

*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

 

 

건너가다

 

포항의료원 중환자실 심장과 폐, 신장 몸 다 망가진 채 건너가려고 며칠 째 저리 사투를 벌인다 넉 달 전, 마누라 먼 곳 떠나보내고 눈물로 하루 또 하루를 보내다 이젠 기어이 먼 길 건너가려 한다 육신의 고통 극에 달하는지 여든 다섯 노인 아이처럼 엄마, 엄마를 부르다 정신을 놓고 다시 봉순아 마누라 이름 부르며 꺼억, 꺽-꺽 숨넘어가는 우리 장인 볼 수도 없고 울지도 못한다 나는 가능만 하다면 어서 건네주고 싶다 몇 시간 후, 고요히 입적에 드신다 산소마스크 심장박동기 내던지고 호呼와 흡吸의 사이마저 다 지우고 혼자서 적멸로 가는, 저 일대사一大事, 노을보다도 더 장엄하다

 

 

집 한 채 새로 들어서다

 

둘레 산세가 꼭 연꽃 모양의

포근한 대전현충원에

한 줌 뼛가루 장인, 장모를 모신다

 

자기한테 가는 길이 참 힘들더라

그러셨는가요 수고했어요, 당신

또 한집에 이렇게 살게 되는군요

마누라, 고맙데이 다시 손 잡아주니

 

뼛가루를 담은 두 개의 항아리

땅 아래 곱게 모셔두고

세상에 덜렁 남은 못난 자식들

순서대로 흙을 덮고 두 번 절하고

일어서니, 집 한 채 새로 지어졌다

 

배 병

위 장

신 박

봉 정

순 갑

 

 

 

고래심줄

 

텔레비전에서 새끼 낳는 걸 봤다

고래고래

 

古來로 어미의 자식 사랑은

고래심줄이라 했지만

 

혼자 사는 여든여섯 어미는 대상포진

죽도 물도 넘기기 힘겨운데

고래심줄 다 닳아 간당간당하는데

 

애지중지 일곱 자식들

제 나온 뜨거운 끈 까맣게 잊고

그저, 저 먹고살기에만 바쁘고

 

 

애인과 꽃놀이 가다

 

대상포진에 기진맥진 집에만 누워있는

늙은 애인 꼬드겨 깊어가는 봄날

꽃놀이 간다

 

어딜 가나 꽃들이 즐비하다

저기 배꽃 살구꽃 좀 봐요

입술연지 바른 복사꽃도 피었네요

길 아래 저 노랑노랑 유채꽃밭

유치원 아동들의 그림 같지 않아요

 

내 말 듣는 둥 마는 둥, 우리 어매

꽃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둘째 아들만 쳐다보고

무어라 뭐라 얘기하기에만 바쁘다

 

하늘의 해를 향해 목을 빼면서

꽃들 피듯

애인에겐 내가 하늘의 태양인 모양이다

늙은 애인한테

못난 내 낯짝 자주 보여 드려야 하느니

 

 

詩論

 

3학년 9반 교실 독서 수업 시간, EBS수능특강 언어영역 60쪽 황동규 선생의 시 퇴원 날 저녁을 가르치다가 “주인이 나오기 전에/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에 밑줄 그으라고, 시인은 저렇게 배터리 닳아가는 자동차에게도 말을 건네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시인은 위대한 거라고, 아이들에게 받아 적으라고 윽박지른다. 괄호 열고, 우리의 이종암 시인 또한 위대하다, 괄호 닫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은 에이, 웩웩, 책상 두드리고 고함지르고 난장판이다. 아이다 야들아, 진짜라니까. 내 말 못 믿는 사람,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와서 봐라. 내 책상 위 물컵 속에 며칠 전 화단에서 꺾어온 매화가지 활짝 웃고 있단다. 그거 내가 자꾸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말 건네서 활짝 웃으며 꽃 핀 거라니까.

시(詩), 세상에 말 걸기이다. 수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