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시로 통한다.

                                  박찬선

 최근에 내가 주로 쓰고 있는 것은 연작시다.이를 것도 없이 연작시는 하나의 주제나 제재를 가지고 이어서 쓰는 것을 말한다.시적 대상이 한 작품으로 마무리를 할 수 없을 때,부족해서 다함이 없다거나 줄기차게 천착하고자 할 때 비롯한다.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내용이 풍부하고 깊어서 한 작품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을 때 이뤄진다.한 마디로 내용의 심원성과 풍요성,제재의 다양성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그것은 시의 광맥이다.노다지를 찾아서 파고 들어가는 광부의 작업이나 풍년 농사를 위해 해마다 경작을 하는 농부의 일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연작의 작업에 尙州와 동학과 낙동강이 있다.내 시의 토양이자 사랑과 보은의 대상으로,나아가 하늘과 땅과 인간을 아우르는 시적 이상으로서의 尙州와 성誠,경敬,신信을 바탕으로 한 정신의 곳집으로서의 동학과 영남의 젖줄로서 풍요를 일궈준 문화가 흐르는 낙동강이 있다. 

 

 상주시 만산동 631번지는 7대째 이백 년이 넘도록 살고 있는 붙박이 터.천봉산이 안아주고 북천이 열어주는 곳.시가지 중심이나 도회로 이사 갈 생각도 없이 곰같이 참으로 우직하게 살아왔다.

 “상주는 내 선조들이 뼈를 묻고 다져온 터전이요,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며 내 아이들이 자라는 고향이다.어진 이웃들이 흙을 가꾸며 살고 있는 곳이요 소를 키우며 소의 눈망울에 고인 눈물로 가슴을 적시며 사는 곳이다.그런가 하면 상주의 어디엔가 있을 이상향인 우복동의 이야기를 믿고 흙이 지닌 생명과 고향의 의미를 새기며 사는 고장이다.이처럼 상주는 나와 숙명적으로 맺어진 地緣이 두터운 곳이다.상주는 떠도는 내 영혼의 귀의처이자 보금자리이며 내 시의 화두이기도 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자기와 관계 지워진 모든 대상에 대한 고마움을 갖는 행위라 한다면 시는 그 대상에게 언어의 옷을 입혀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것이다.”라고 시집 『尙州』(문학세계사 1986)서문에 적었다.

 상주의 설화와 문학,교육과 동학,민요와 축제 등 상주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상주에 뜻을 펴게 되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지역 상주를 통해서 역사와 세계를 보게 되었다.  

 

 동학은 눈뜸이요 깨침이자 자존이다.동학은 인간 사랑이요 생명운동이다.수운과 전봉준으로 이어지는 혁명적 실천의 진보적인 면과 수운과 김주희(1860-1944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 창설)로 이어지는 영적 구원을 주창하는 보수적인 면이 공존하는 상주 동학.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이 상주읍성을 점령하고 패퇴하는 과정에서 100여명이 희생됨을 비롯하여 태평루와 남사정 등지에서 60여명이 포살되었다.그해 12월에는 상주유격병대와 일본군이 보은 북실에서 농민군과 접전,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농민군 26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런가하면 천도를 배워 익혀서 체천행도體天行道를 실천함으로써 선천시대의 태평성대를 열어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데 목적을 두고,수운의 이원론적 신관(상제의 내 마음과 수운의 네 마음이 하나라 하여 내유신령內有神靈의 관점을 암시함으로써 일원론적 세계관을 내재시킴)과 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의 주장에 김주희는 하님(天,天主)은 사람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재적 실재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신관 즉 체천주의體天主義로 대변되는 상주은척동학.하님을 모시고 조화를 이루어 영생하고자하는 기원이 담겼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서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든 민족적 자각과 변화를 읽는다.나는 동학에서 풋풋한 솔잎과 댓잎 같은 백성의 소리를 듣는다.구제역으로 기르던 소 돼지를 땅에 묻으며 함께 묻히고 싶다는 농부들의 눈물과 한숨 소리를 듣는다.우리의 學인 동학은 지금도 유효하다.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한 천삼백 리 낙동강은 강다운 강으로 흘러가는 것은 상주에서다.낙동강 칠백 리는 상주에서 비롯한다.옛 상주의 지명인 상낙上洛의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낙동강.낙동강과 상주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구석기 시대(1만년-250만년 전)의 유적과 신라 13대 첨해왕 때 석우로에 의해서 병합된 사벌국 옛터며 낙동강 제일의 경관인 경천대.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류성룡,정경세,이준 아홉 선생을 모신 영남의 수서원首書院인 낙동강 가 무임포에 세운 도남서원.고려말 백운 이규보로부터 조선말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 까지 666년 동안 지속된 낙강시회.조우인의 매호별곡과 채득기의 봉산곡이 빚어진 문학의 현장.모심기노래의 백미인 공갈못 노래의 배경.서애로부터 계승된 퇴계학이 우천학파를 형성하여 영남학 최후의 보루가 된 삼산이수 매화낙지 명당의 이강정사.역사,학문,문학,민요,농업,교통 등 총체적 상주문화의 중심에 낙동강이 있다.유장한 낙동강이 흐르고 흘러 큰 바다에 닿는 자연의 순환과 순리를 본다. 

 위에 예로 든 상주와 동학과 낙동강은 지역성을 지녔다.지역의 일부로서 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면서도 광역성을 지녔다.지역은 소외된 삶의 변두리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요,현장이다.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주체이자 주인이다.지역에는 그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역사가 있고,지역정신과 생명이 있다.지역이 단순히 지역으로 머무르지 않는 이유이다.더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유형과 무형의 세계를 가늠하면 그 진폭은 훨씬 넓어진다.

 지역은 내 시의 중심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지금까지의 내 詩作은 넓게 보면 지역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지역을 아우르는 총체적 요소 중에서 광활한 지역의 극히 작은 일부를 나타냈을 뿐이다.그러한 나머지 지나치게 왜소하고 국부적인 사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든다.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왜냐하면 지역의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보편성의 획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결국 시가 추구하는 구경의 이상적 경지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비상과 초월,회귀의 의지가 거기에 있다.나로부터 떠나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지속성과 일관성을 지닌 詩作.지역 안의 시에서 시 안의 지역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시의 새로운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귀결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시심詩心을 가지고 정갈하고 뜨거운 시혼詩魂을 불사를 일이며 구경에는 시도詩道를 깨칠 일이다.그렇게 할 때 자연스럽고 여운이 깃든 새로운 세계의 시경詩境이 열려 지리라.

 

그렇다.지역은 시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