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956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하다. <만경강> 동인, 교육문예창작회 활동을 하면서 1992년 <이 땅의 헤엄 못 치는 선생이 되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가 있으며 현재 목포작가회의 회장, <포엠만경>동인, 전남제일고등학교 교사로 있다.

 

나의 문학의 길

 

초등학교 3, 4학년 때 담배은박지를 주우려 다녔다. 학교에서 가져오라고 했는데 그 용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은박지가 많은 곳은 구실아짐 댁이었다. 그 집 문간방 측백나무울타리에는 담뱃갑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우리는 거기 울타리 구멍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은박지를 모았다. 거기 문간방에는 기인이 형이 살았다. 기인이 형은 거기서 소설을 쓴다고 했다. 어쩌다 기인이 형은 우리들을 불러들여서 먹을 것도 주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 햇빛 쏟아지는 문간방 툇마루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 문학과의 처음 만남이었다.

기인이 형은 1년 정도 지나서 문학상을 탔다. 부상으로 송아지를 받아 와서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그날 아버지에게 나도 기인이 형처럼 소설을 써서 송아지를 타겠다고 불쑥 말했더니 아버지는 코웃음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이놈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느리라.”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담임선생님께서 내 글을 뽑아 주셨다. 제목이 <우리 아기>였을 것이다. 그때는 글이라는 것도 몰라서 그냥 일기 쓰듯이 썼는데 그것이 뽑힌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도 <수업시간>을 글제로 시를 썼는데 국어선생님께서 칭찬을 해 주시며 직접 그 시를 읽어 주셨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막내외삼촌이 왔다. 나보다 4살 많아서 형처럼 따르는 외삼촌이다. 그때 외삼촌은 서라벌예고에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연극대사도 외워대고 노래도 곧잘 했다. 그날 저녁에 한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심심하다며 시 읽자고 시집을 찾았다. 그래서 가영이 누나 집에서 빌려 왔다. 김소월의 <<못잊어>>였다. 외삼촌이 곧바로 시낭송을 시작했다. 낭랑한 목소리로 서글픈 가락들이 읊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만 시는 외워서 읽어야 제 맛이라며 나보고 따라 읽으라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외웠던 시가 <초혼>이다. <초혼>의 가락이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진달래꽃>도 <산유화>도 <못잊어>도 외워서 읽었다. 외삼촌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심정으로 낭송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밤을 꼬박 세워서 시낭송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아름다운 밤이었다. 이것이 나의 문학의 뿌리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내 꿈은 부풀어져서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게 어떤 상인지도 모르고 그냥 막연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느리라’라는 코웃음을 받아야 했다. 그런 문학적 열망을 가지고 문학 소년이 되어서 중, 고교를 보냈고 대학도 국문과로 진학했다.

1989년은 나에게서 삶의 분기점이 되었던 해였다. 전교조 운동으로 교직을 버리느냐 그대로 남느냐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갈등 속에서도 해직의 길을 택했다. 사실 그 때 해직의 길을 택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이 기회에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는 한참 글이 나오려 했던 때라 그 길을 간다고 해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보다 교육운동가의 길이 우선 급한 것이었다. 글보다는 우선적으로 현장의 무너진 조직을 복원하는 게 급선무였다. 학교를 방문하여 전교조 신문과 유인물을 돌리고 현장교사들 북돋아 일으켜 세워야 했고 지역 단체와 연대를 꾸리고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거리 캠페인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다고 해서 나 혼자 편하자고 그 틈바구니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글을 쓴다는 것은 사치로나 여겨졌다.(지금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물론 그 때도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로 교육시나 논평 같은 것을 썼지만 본격적인 시의 길을 갈 수 없었다고나 할까? 어떻든 교육운동에 치중하다 보니 글 쓰는 것은 차 순위로 밀리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동지들과 부대끼면서 논쟁하고 변혁을 꿈꾸다가 절망하기도 했다. 나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작은 일에도 환호하고 아파하고 신음하고 분노하고 화해하면서 삼사십 줄을 넘어왔다.

그런데 나에게도 기특하게도 글쟁이의 기회가 왔다. 몸이 아파서 1년 정도 요양한다는 작정으로 외딴 섬을 자원해서 부임했는데 거기서 그리움을 찾게 된 것이다.

 

가거도에는

 

가거도에는

갯돌이 많다.

오라지게 물밑을 구르다가

문들어져 심(心)만 남은

갯돌도 많다.

 

가거도에는

후박나무가 많다.

사시사철 푸르디푸르게

질긴 울음 우는

후박나무도 많다.

 

가거도에는

그리운 아내도 많다.

오매불망 몸살하며

만물정령으로 태어나는

아내도 많다.

 

시집<나무 위의 여자> 중에서

 

나에게서 아내는 동지이자 후원자였다. 전교조 문제로 밥줄이 잘릴 때에도 누군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며 필자를 북돋아 주었다. 해직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상할 때에도 함께 해 주었던 사람이 아내였다. 그런 아내와 떨어져 살다보니 그리움이 쌓여서 아내를 소재로 시를 쓰게 되었다. 그것도 1주일에 두세 편씩 나왔다.

그것을 엮어서 첫 시집 <<나무 위의 여자>>를 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첫 시집을 내고 나서 필자에게도 자신감 같은 것이 붙었다. 까짓 것 혼자 즐기면서 여가로나 취미로나 글을 쓰다가 그렇게 빛발로 나섰더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모색으로 꽃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졌다. 들이나 산이나 민가에서 피어나는 들꽃들이 인간사의 갖가지 모습으로 보였다. 방죽머리에서 피는 수련은 고독한 절대자의 모습으로 보였고 용천사의 꽃무릇에서는 뒷북치는 짝사랑의 아픔이 배어났고 금계화는 아메리칸 이글 바람을 일으켰고, 사대풀꽃은 이주노동자의 모습이 배여 있었다.

나이 오십을 지천명이라고 했던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치를 조금은 깨달을 나이에 이르러서 두 번째 시집 <<만다라화>>를 펴냈다. 재작년에는 어머님께서 저 세상으로 가셨다. 불치병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소재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마음에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엮은 시집이 <<어머니의 나라>>이다. 올해에는 우리 현실을 반영했던 시들을 모아서 시집 <<나쁜 사과>>를 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빗겨가지 않고 온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세상의 아름답고 슬프고 피 흘리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시들이다. 정권교체기에 해가 바뀌면 사장될 지도 모르는 이런 시들을 모은 것이다.

내 성격은 되도록 자신을 감추고 나서지 않는 내성이다. 이런 내성 때문인지 나는 들꽃을 좋아했다. 들판이고 산이고 후미진 곳에 가면 내 눈에 들꽃들이 잘 든다. 외딴 곳에 피어 있는 들꽃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한다. 사람들이 잘 가꿔주는 정원에는 가기 싫고 구중궁궐에서 호강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이름 없는 들녘에서 살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들꽃이 되고자 한다.

어쩌면 내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딴 곳에서 피어난다고 해서 들꽃의 삶이 시시한 것은 절대 아니다. 들꽃의 삶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었다. 봄에는 가뭄을 걱정해야 하고 여름에는 열사를 걱정해야 하고 가을에는 비를 걱정해야 하고 겨울에는 냉해를 걱정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쉽게 피는 꽃이 그 어디 있으랴? 비바람과 무서리와 숱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시심을 피우려고 한다. 더 많이 사색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각고하면서 세상의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는 꽃으로 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