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볕의 임종

 

 

늦가을 볕의 긴 손가락이

허공을 가만히 감았다 놓았다하는 사이

 

뒷산 갈참나무숲에는

누가 죽어 가는지

흙이 붉어 가는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장수반점을 지나

흥농종묘를 지나

고추밭에 든 추월댁

체육복 등에 기대인 채

둘은 한참동안 따사로운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잡을 수 없어

늦가을 볕은 늦가을과 함께 자꾸 늙어가서

 

수숫단 꼭대기

잠자리 마지막 날개 위에서

한 줌 골고루 金光으로 번진 後에야

턱, 숨을 내려놓는데

 

체육복 등엔

어둠이 파스처럼 한 장 붙는데

 

 

그루터기 문신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의 차상위계층 안방 장롱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가 물고 있는 것은 얼음조각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식한 뿌리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있는 그루터기들

 

 

아직은 배후를 말할 수 없다

 

누런 설탕에 쟁여둔

까칠 복숭아

 

달이 서에서 동으로 기울 때

체액을 자꾸 밖으로 게워낸다.

 

마지막 병상에서는 너도

물 한 모금도 거절했지.

 

뼈를 간신히 감싼 살가죽만 남아 糖위에

떠있다.

 

滿月은

자기의 노르스름한 배후만 남기고

어느 구름 속으로 져버렸는가?

 

살을 받은 糖이라든가 화장장, 너를 태우고 날아간 연기 같은 것을 아직은 너라고 부를 수 없는 이 푸릇푸릇한 기억의 얼굴이 고무줄처럼 풀렸다가는 다시 되돌아오고야 마는데

 

 

마지막 힘

 

고구마를 걷어낸 밭에 상강서리가 내리던 날 늙고 썩어 버려두었던 사과나무에 활짝, 하얀 꽃이 피었다.

 

3년 내내 풍으로 앓아누운 주영광 씨 어느 날 번쩍, 눈떠 자기 마누라 한번 쓱 보더니 머라고,,, 한 마디 하더니 그 길로 세상을 떴다.

 

저 미안하다는 한마디 결구를 맺고자 참으로 오랜 세월 혼자서 무던히도 참고 몹시 아팠던 것이다.

 

 

무릉(武陵에서 길을 잃다

 

노모가 風으로 입원한 유리한방병원은 거대한 명부전冥府殿 같다.

열두 개의 침상에는 머리에 소복하게 눈 맞는 보살들이 산국山菊처럼 앉아있다.

현재와 과거로 가는 모든 실핏줄들은 끊겼는지 가끔씩 마른 손톱으로 식탁을 치는 목탁소리만 경내를 울린다. 이따금 주사바늘이 엉덩이에 죽비를 칠 때말고는 좀처럼 감은 눈을 뜨지 않는다. 종당에는 찾아온 아들까지도 영영 잊어버리고 무념무상이다. 가끔씩 노모의 눈을 들여다보지만 그 깊은 우물까지는 두레박을 뻗을 수 없어 나는 안절부절이다. 세상을 한 순배 돌고 온, 말을 버린 입술과 표정을 비운 얼굴로 길을 일러주지만 또 그 길을 읽을 수 없어 쩔쩔맨다.

 

이정표를 보니 이곳이 무릉武陵*이라 한다.

 

* 경북 안동시 무릉면에 있는 지명

 

 

 

 

당신의 流速은 너무 빨랐습니다

그럴수록 당신의 몸에 내 몸 섞으려는

제 마음의 보폭은 더 성급해져서…

 

저는 차창 밖에서

가만히 낯익은 발소리만 기다리는

항시 어떤 정거장일 뿐이었습니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전봇대에 매인

벽보 한 장의 삶일 뿐이었습니다

 

城밖 민박집을 나와

강둑을 걷다 보았습니다

 

강물의 속도가

얼음의 속도와 꽉 물려 있는

 

아주 편안한 체위로

흐르는 강물의 결 위에

자신의 몸을 슬쩍 얹고

눈부신 陰刻으로 만나는

 

어젯밤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요?

 

 

下流의 시

 

다가오는 것은 下流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를 견뎌준 건

먼 과거의 어느 시간쯤에서 만난

한 순간

 

순간의 火印

 

以後는 물에 갇힌 수몰주민의 생이었고

때로는 이미 지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어떤 多福을

나는 무성의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루가 습속이 된 이 가죽옷에도

나비의 날개가 헌 눈처럼 부서지고

 

시계를 보지 않아도 다가올 시간을 예감하는 나이

첫 소절만 들어도 노래의 끝을 개괄할 수 있는 나이

임종이 최후의 목적지가 아니어도

알고 보면 모두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지나가는 下流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흘러가지 않는 바람이 없었고

머물 수 있는 바람도 없었고

 

 

 

花氣

- 능소화

 

먹물 담뿍 적신 구름 떼

옥수숫대 바싹 마른 수염을 채색하는 늦여름

 

양조장집 뒷담 보초 서던

능소화

 

저 환한

주홍빛 일주문 열고 들어가면

미련도 미련 없이 해탈할까?

 

허공의 本殿까지는

사방팔방 문살

가장 먼 순례는

자기 내부로 뻗은 길

 

문짝을 뜯는 안간힘이

반짝

꽃술 필라멘트에

등불 켜지만

 

풀린 염주 알처럼

뒹구는

몸들

 

그 육즙 위를 뭉개며 마시며

늙은 구렁이 대낮부터 취해

담벼락 빠져나가네

 

 

 

천공天空

 

 

스물두 살 때

폐에 구멍이 생기는 기흉氣胸을 앓은 적 있었지

웃으면 가슴이 바늘로 찔린 듯

그래서 웃음의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던 시절

 

어찌어찌 不惑 지나 天命을 알리라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는 아직도 반 뼘 바람구멍이 있는 듯

 

채우자마자 휙,,, 휘리리,,, 풍선처럼 빠져나가는

천공天空이 숨어사는 듯

 

늘 복대를 하고 깻단의 마른 몸 이쪽저쪽을 옮겨 놓으시는

음지마을 할매의 몸속에도 그런 살바람 쿨럭이는 구멍이 있는지

 

흙바닥이 거울인양

서울로 공무원 살러간 아들의 주름살도 보이고

중증장애 손녀도 보이고

종종 영감도 다녀가시는지

 

오늘은 부처님의 영험까지도 고구마줄기처럼 내려오시는지

흙의 법당 마루로 자꾸 고개를 숙이는데

 

숙이기만 하고 가끔은 고개 드는 것도 깜빡깜빡하시는데,

삼배 삼백배 일만이천배를 느릿느릿 채우고 내려가는 고샅길 너머

 

빨리 온 가을,

빨리 늙는 은행나무 옹이 곁으로

한창 불붙은 맨드라미들 짙붉은 융단을 펼쳐들고

겹겹이 벽을 두르고 있는데

 

 

 

살구나무의 길

 

당신과는 거친 눈길 한번 흘긴 적 없습니다

 

당신이 하루 종일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저도 순한 초등생처럼 얌전해졌습니다

 

어쩌다 당신이 우수수 흔들리며

바람의 말 몇 마디 짧게 건네면

저도 포도씨 같은 말 몇 마디

조용히 뱉어냈습니다

 

나의 그늘이 너무 짧은 여름날

당신은 긴 어깨로 저를 감싸고

저는 제 마음을 당신에게 보낼 줄 몰라

긍긍하였습니다

 

아직 나에게는 이름이 없는 당신

 

흔하디흔한 그 나지막한 등성이

아직도 분홍 웃음으로 서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