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무덤, 안개무덤, 시

 

안개

 

 

안개는 산에서 내리고 바다에서 오르고 강에서 핀다. 안개는 뱀처럼 기어 골목골목으로 스며들어 온 동네 휩쓴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흐르는 안개 물러가지 않는다. 물러서기는커녕 내 몸속까지 들어와 살림 차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눈 뜨고 안개의 얼굴 두드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에 안개 섞고 비빈 안개의 밥 먹는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문 열고 안개의 길 떠난다. 안개는 성큼성큼 앞서서 간다. 안개의 뒤 따른다. 어느 사이 안개 사라진다. 사라졌다가 어느 사이 또 허둥대는 내 뒤에 다가와 가볍게 등 떠민다.

 

안개와의 동거는 즐겁다. 아늑하게 아름답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베개 배고 안개의 이불 덮고 안개의 잠잔다. 안개의 잠 속에서 꾸는 안개의 꿈은 달다. 안개의 꿈속에서 안개의 시 쓴다. 안개 향한 시 쓴다.

 

안개의 시는 달다. 안개와 나는 찰떡궁합이다. 안개 속에서 밤새 헐떡이며 무기 벼린다. 아침이 되면 무기는 곧 안개 속으로 스며든다. 안개 속으로 스며든 무기는 힘을 잃는다. 무기는 곧 안개가 된다. 내가 벼린 무기는 좀체 무기가 되지 못한다.

 

안개의 칼날은 날카롭다. 안개의 몽둥이는 무지하다. 애써 잡고 있으려 하면 안개의 칼날에 손 베인다. 안개의 몽둥이에 가슴 멍든다. 안개와의 동거 달아도 안개 돌아서면 스스럼없이 떠나보낸다. 그리고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산모퉁이 돌아 바다 건너 강물 거슬러 또 다른 안개 내게로 기어온다.

(2007. 03)

 

 

무덤

 

오랫동안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다. 무덤가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시를 쓴다. 애써 무덤가를 떠나라, 떠나라, 언제나 속삭이는 삶을 위하여 언제나 무덤가를 떠나지만, 또 번번이 다시 무덤가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시를 쓴다. 느껴서 떠나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이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이 무덤가에서 마시는 술은 무덤의 술이다. 이 무덤가에서 부르는 노래는 무덤의 노래다. 이 무덤가에서 꾸는 꿈은 무덤의 꿈이다. 해서 이 무덤가에서 쓰는 시는 당연 무덤의 시다.

 

언제부터 이 무덤가에 머물렀을까, 언제부터 이 무덤가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을까, 생각해본다.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난 뒤인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전 내기로 결정한 때쯤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님, 어쩌면 처음부터 이 무덤가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 무덤가를 떠나 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 이전 무덤가에 대한 기억과 반복해서 무덤가를 떠나고 돌아온 기억이 없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 기억이 아니라 애써 지운 기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운 기억은 지운 기억일 뿐 어떠한 경우에도 없는 기억은 아니다.

 

오늘도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다. 서성이며 시를 쓴다. 몸은 때로 이 무덤가를 착각처럼 떠나 바쁘게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시간에도, 시만은 고집스럽게 이 무덤가를 서성이게 하고 시를 쓴다. 무덤의 술을 마시며, 무덤의 노래를 하며, 무덤의 꿈을 꾸며, 시를 쓴다. 당연 무덤의 시를 쓴다. 무덤의 꿈이 되는, 무덤의 노래가 되는, 무덤의 술이 되는, 무덤의 시이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술이 진정이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노래가 진정이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꿈이 진정이다. 해서 이 무덤가에서는 당연 무덤의 시가 진정이다.

(2012. 01)

 

 

안개무덤

 

지금은 무덤에 안개가 짙다. 온갖 먼지들이 겹겹이 껴있는 안개다. 안개에 껴있는 먼지는 오래된 먼지다. 과거의 논리로 따지자면 한편 굳건한 먼지이기도 하다. 이런 먼지와 안개가 뭉쳤으니 안개는 너무 두꺼워 애써 벗기려 한다고 쉽사리 벗겨질 것 같잖다. 해서 이제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라 안개무덤이다.

 

이때껏 무덤이라도 보려고 하기만 하면 보기는 했으나 안개가 너무 두꺼우니 이제부터는 보려 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무덤이 무슨 잊지 못 할 애인이라고 못 보는 것이 서러워 무덤 속으로 뛰어들 일이야 없겠지만, 무덤 앞에서 무더기로 봉사 귀머거리 벙어리가 될 수도 있으니 이건 서러워 아니할 수가 없다.

 

잠을 설친다. 속은 쓰리고, 하루, 이틀, 사흘, 연속해서 잠을 설친다. 잠이 대체 내게로 올 생각을 않는다. 오는 잠이야 애써 쫓을 일 없겠지만 아예 오지를 않으니 이건 또 어쩔 도리가 없다. 해서 잠을 설친다. 갔으면 싶은 속 쓰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잠은 대체 오지를 않아, 나흘, 닷새, 잠을 설친다.

 

그리고 오늘은 이렛날이다. 잠을 가로막은 벽이 무너진다. 이 잠의 벽을 무너뜨린 건 무엇이었나. 아니 이 잠의 벽을 쌓은 것은 무엇이었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중요한 건 벽이 아니라 끝, 시작의 반대편에도 있으나 옆자리에도 있는 끝,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잠은 기절처럼 와서 강물 깊이 가라앉는다.

 

14시간을 내쳐 잔다. 자고 일어나 생각한다. 안개가 짙을 때는 안개의 시를 쓰고,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시를 썼으니, 무덤에 안개가 덮였으면 안개무덤의 시를 쓰자. 시작이나 희망 같은 상투적인 말없이 여태처럼 본대로의 시를 쓰자. 해서 이제부터 쓰는 시는 안개무덤의 시. 이것이 그 첫 안개무덤의 시다.

(2012. 12)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리토피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