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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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4 (박희용 시인)나의 문학, 나의 시, 나의 내력
편집자
2940 2013-01-26
 산맥 속에서 춤추는 학 -나의 문학, 나의 시, 나의 내력 박 희 용 「풀씨가 날아와서 뼈를 추리던 그 해 여름에 삼강나루에서 김숙자를 만나 첫사랑을 하며 시를 쓰던 못난이가 이제 달맞이꽃 짠하게 피는 금강리에 서성이다.」 편집자의 자료요청을 받고 대표작 열편을 골라서 제목을 이어보니 한 사내의 남루한 내력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주어진 이야기꺼리가 <나의 문학관과 걸어온 길>이나, 사실 반백이 되도록 변방에서 우짖는 한 마리 새로서 내 시나 인간 됨이나 문학관이나 걸어온 길이나 모두 소슬하지만, 입춘을 앞 둔 겨울의 끄트머리에 문학마실을 지나가는 글 나그네여 촌장님이 이왕 멍석 깔아주었으니 심심풀이로 넋두리 한 마당 슬쩍 들어보시려나. 누구에게나 살아오면서 기억에 진하게 남는 몇 개의 장면이 있다. 특히나 시인에게는 유년의 기억이 창작의식의 팔 할은 차지하고 있는 것, 내 비록 시골에 사는 무명시인이지만 그래도 사십여 년 동안 시 비슷한 걸 긁적이거나 시를 써 왔으니 어찌 그 중에는 시적 느낌이 반짝이던 장면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제일 처음으로 감각의 화면에 또렷하게 찍힌 장면은 대여섯 살 때 문득 본 고향 냇물 소천의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설레는 현상,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그 이후 도처에서 만난 물결의 일렁임은 그것만 같지 못했다. 두 번째는 마을 앞 쏘로 아장아장 물놀이 하러 걸어가는 아이에게 쏟아지던 그 한 여름 날 땡볕. 세 번째는 중학교 시절에 소를 풀어놓고 풀밭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즐거움. 네 번째는 스물한 살 때인 1974년에 안동 문화회관 근처를 걸을 때 “저 옥상 위로 비둘기가 나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다”라 갈파하던 삼십대 초 젊은 소설가 김주영. 이러한 원초적 감각을 더듬이로 삼아, 내가 삶의 즐거움을 시 쓰기에서 찾게 된 연원을 거슬러 올라 생각해보니, 고향과 독서와 일기장이란 세 개의 키워드가 나온다. 나는 고향을 유난히 탔다. 1954년 6월 한여름 날 오전에 우주 은하계 태양계 지구 동북아시아 한반도 남부지방인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태백산이 남으로 가지를 뻗어 각화산, 왕두산, 형제봉 등의 높은 산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 정기가 송진방울처럼 떨어져 응결된 무학봉의 바로 아래 곳진마을에서 태어났다. 舞鶴峯은 이름 그대로 ‘춤추는 학’이다. 태백산맥 속 첩첩의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작은 산이지만 주위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 녹색 털빛의 한 마리 춤추는 학이다. 유년시절을 고향산천의 1급수와 맑은 솔바람 속에서 멋지게 놀았다. 그런데 웬걸 소천국민학교 2학년 때인 1961년 6월 초 장마기에 갑자기 강원도 황지로 이사 간다는 게 아닌가. 해바라기는 아직 어렸고 나팔꽃은 열매가 달렸기에 여동생과 함께 급히 담장 위의 덜 여문 나팔꽃 씨를 따 모아 챙겼으나 막상 이사 간 곳은 온통 시커먼 탄흙뿐이어서 심을 곳이 없었다. 황지로 이사 가서는 고향의 산천을 늘 그리워하였다. 독서는 만화부터 시작되었다. 황지국민학교 4학년 마칠 때까지 방과 후엔 놀이하고 저녁에는 만화책 실컷 보느라 집에서 숙제를 해본 기억이 전혀 없을 정도로 원 없이 자유분방했다. 소풍날 모처럼 생긴 용돈으로 오후 귀가 길에 만화방에 들렀다가 아차 싶어 정신차려보니 밤 10시, 학교와 집에서 아 찾아 난리가 나기도 했다. 어른들은 공부는 안 하고 만화만 본다고 꾸중했지만 그 당시는 만화가 꿈의 세계이자 교과서였다. 또 집에서 신문을 보아서 사진, 시사만화, 기사 등을 눈빛 반짝이며 읽었다. 이사 온 며칠 뒤 신문에서 본 색안경 박정희, 얼룩무늬 차지철, 훌쭉이 박종규 세 쿠데타 군인들이 떡 버티고 선 사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5학년이 딱 되어선 그만 학교 도서실에 붙잡혀버렸다. 복도를 지나다가 ‘도서실’이라고 해서 호기심이 생겨 들어가 몇 권 뒤적거리다가 그만 눌러 앉았다. 만화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5학년 내내 수업시간만 마치면 도서실에서 앉아 뭉갰다. “야야 선생님 퇴근시간이다”라는 도서 선생님의 말씀에 깜짝 독서삼매에서 깼다. 6학년 때는 수업시간 마치고부터 저녁 8시까지 촛불 켜놓고 입시공부 하느라고 도서실에 못 갔다. 북적북적 시장 같은 학교였지만 삼면이 책으로 꽉 찬 도서실이 있었음은 탄광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장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의 배려이리라.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이 때 나는 중요한 두 가지 선택을 했다. 하나는 이름이고 하나는 중학교였다. 원래 아버지께서 지은 이름은 ‘박일용’인데, 반농에다 목상 사업에 바빠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했단다. 며칠 뒤 면사무소에 가서는 아버지의 부탁이 생각났으나 적는 데 기억이 가물가물, 성는 박가고 형이 무슨 용인데 용인데 하다가 그만 ‘박희용’으로 신고하고 말았단다. 그리 불리며 살다가 1965년 겨울에 중학교 원서에 붙이는 호적초본을 떼 보니 이름이 달랐다. 아버지께서 “야야 니 이름을 어느 것으로 할래?”하고 묻자마자 또 호기심에 그만 “희용으로요”. 아버지께서 “니 이름은 면장이 지었다”라고 하셨다. 새 이름이 신기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하니 이름이 중요했다. 본 이름인 ‘일용’이었다면 ‘뛰어나게 일과 녹이다 용’이라는 뜻이고 부르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뚜렷한 느낌을 줘서 그런대로 괜찮은데, ‘기쁘게 녹이다’라는 모호한 뜻을 가진 ‘희용’이다보니 뜻이나 발음이나 히비리 한 게 내 육십 평생하고 똑 같다. 뿐만 아니라 시도 히비리한 게, 이 나이 되도록 좋은 시 하나 못 썼다. 이제 공적으로 ‘박희용’으로 안 써도 되니 본 이름 ‘박일용’을 찾는 개명신청을 할 작정이다. 그러면 시가 좋아지지 않을까? 두 번째 선택은 귀향이었다. 열세 살 때 부모 형제 곁을 떠나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 큰집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나팔꽃씨를 심을 수 없는 검은 탄광촌이 왜 그리도 싫었는지, “야야 일용아 니 소천중학교 갈래 황지중학교 갈래”라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단번에 “나 소천 갈래요” 했다. 이후부터 결혼 때까지 15년 동안을 혼자 생활했다. 이때부터 고독은 내게 편했다. 모든 선택을 나 혼자 해야만 했다. 반백이 된 지금이야 태백시로 개명한 황지가 아련한 추억의 땅이지만 40대 초까지만 해도 황지 하면 비서정의 시커먼 땅이었다. 탄광촌을 떠나고 싶다는 소원은 이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보낸 중학교 시절 3년은 목동이었다. 시골에서 알부자 소리를 듣는 큰집엔 아들이 없었다. 머슴이 한 사람 있었지만 오후에 소를 먹이는 소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집안 간의 합의로 내가 가게 된 것인데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고향 간다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별수 없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소를 먹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오후 시간이 없었다. 학교 시간 외에는 친구들과 놀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책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다행히 도서실이 있어 매일 들러 책을 빌려서는 소 먹이러 가면 소는 저만치 풀어놓고 풀밭에 엎드려서 책을 읽었다. 한참 읽다보면 소가 안 보여 멀리까지 찾아다니기도 했다. 입학 때는 촛불 입시공부 덕분에 수석합격 했지만 졸업 때는 가정학습을 못한 탓에 5등 이었다. 내가 시를 처음으로 읽고 느낀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62년이었다. 그 땐 여섯 살 위인 큰형이 큰집에서 소천중학교를 다녔는데, 명절이나 제사, 방학 때에 큰집에 가면 중학교 교과서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도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시와 산문들이 생각난다. 그 때 월북문인인 이태준의 이름도 알았다. 또 형이 보던 문예지 『학원』을 이불 덮고 엎드려서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요즘도 이불 덮고 엎드려 시집이나 문학지를 읽는 시간이 가장 흐뭇하다. 여자보다 훨씬 좋다. 요즘으로 치면 선행학습이랄까, 하여튼 중학교 국어책을 읽고 감동을 많이 먹었다. 지금도 그 때의 시 <향수>, <고향길>, <저녁산>를 외워내고, 소년 소녀의 풋사랑이던 희곡 스토리가 생생하다. 가장 깊게 감동 먹은 시 <향수>, 바다/ 저 편에 산이 있고// 산 우에/ 구름이 외롭다// 구름 우에/ 내 향수는 조을고// 향수는 나를/ 잔디밭 우에 재운다. 4연 8행의 작은 시이지만 강원도 탄광촌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가슴에 던져진 충격은 대단했다. 요즘은 토종인 유행성출혈열과 80년대 중반에 일본열도에서 이사온 쯔쯔가무시 때문에 함부로 눕지 못하지만, <향수> 먹고 난 다음부터는 가끔 풀밭에 누워 흰구름을 보며 그에 맞는 형상을 그려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이름을 모르다가 수십 년 뒤인 90년대에 시인을 겨우 찾았다. 미래사에서 발간한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8 김용호 시집 『주막에서』. 1921년 경남 마산 출생, 1938년 「맥」동인, 1941년 첫시집 『향연』(흥아사)을 동경에서 간행, 1946년 예술신문사 주간, 1948년 시문학사 주간, 1968년 단국대 문리대학장, 1973년 사망. 1983년 『김용호시전집』(대광출판사) 간행. 혹자들은 정지용의 <향수>를 치지만 내가 볼 땐 그건 별로고 김용호의 <향수> 44자 시어야말로 절창이다. 이런 덕분인지 시로서 처음으로 받은 상은 1학년 봄 백일장에서 <꽃>이란 시로 입선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좋은 책을 많이 읽었다. 도서실에서 빌려서 본 『얄개전』같은 책은 나로 하여금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인생관을 갖도록 하는 데 일조 했다. 또한 2학년 방학 때엔 황지 집에 가서 황지고등학교 도서부원인 중형이 가져온 두꺼운 원본 『부활』과 『동키호테』를 몇날 며칠 침식을 잊고 독파했는데, 그만 책 속의 주인공 두 사람이 내 성격의 양면을 이루고 말았다. 이후의 인생에서 기본적으로는 네휴르도프이다가 객기가 치받으면 동키호테가 되어 난조를 이루는 경우가 흔했다. 거기에다가 혼자 놀다보니까 햄릿도 친구가 되었다. 책 속 등장인물에게서 즉각적인 영향을 받다보니 그만 다중 성격이 되었다. 평생토록 비비안리를 연모하는 것도 카츄샤 이미지 때문이었다. 나쁜 영향을 끼친 책들도 많이 읽었다. 철암탄광의 광부인 4촌 매형 될 사람이 가져온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 새벽길 등 등 야한 책 한 스무 권을 정신없이 통독해버렸더니, 그 게 지금까지 영향을 끼쳐 연중 몇 번씩 풍만한 주막주의에 빠지도록 한다. 또 학교 도서실에서 빌린 『보나팔트 나폴레옹』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히틀러의 『나의 투쟁』 등의 책을 읽은 탓으로 소를 앞산 기슭에 풀어놓고는 마을 뒷산 무학봉을 내려다보면서 ‘나폴레옹의 모자를 닮았구나’하는 상상을 많이 한 탓인지 여학생들이 부르는 별명이 ‘육사생도’였다. 이러한 책들이 끼친 영향이 사십대 초까지 남아 가끔 오만스런 소영웅주의에 빠지게 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독서 행태가 작용 했는지, 해마다 교내 웅변대회에 단골 연사로 출전하여 반공과 북진통일을 무아지경에서 목 놓아 부르짖었다. “외칩니다! 소리 높여 외칩니다!” 하다보면 짝짝짝 박수 소리에 섞여 “딩동댕” 시간 오버였다. 1등은 한 번도 못하고 주로 2, 3등이었다. 원고는 내가 직접 썼다. 국어 선생님이 보시더니 “너 이 원고 형이 써 주었지?” 했다. “아니요, 제가 썼는데요”해도 믿지를 않았다. 큰형이 고대생이란 걸 알고 하는 소리였다. 소년시절의 두뇌는 스펀지와 같아 눈에 들어오는 대로 무조건 저장한다. 그 저장된 지식과 경험을 평생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시켜서 풀어먹으며 산다. 내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친 독재자들의 전기와 야한 대중소설이 밉다. 누나를 여자로 만들기 위해 외설담을 한 아름 가져다 준 매형, 시골 중학교 도서실에 왜 그런 책들을 사들여 놓았는지, 도서 담당 선생님의 안목이 지금 생각하니 원망스럽다. 이 사촌 매형의 아버지는 육이오 때 재산군인민위원장이었다고 한다. 수복 되고서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어머니는 소천 산성마을 박씨에게로 개가, 어린 아들은 재산의 일가집에 의탁해 살다가 스물 가까이 된 67년경에 생모의 주선으로 우리 큰집에 머슴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후 1972년 재수 때에 육사 33기 입시에서 1, 2차와 면접까지 통과 했는데 떨어졌다. 면사무소 다니는 친구 말을 들으니 연좌제에 걸렸다고 한다. 소천 두메 촌놈이 대처 영주에 나와 영주종합고등학교에 다니며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근근이 생활하였다. 학교 도서실도 없고 생활비가 빠듯하다보니 독서보다는 일기장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후 낭인시절, 교대시절 내내 돈 몇 푼 여유 있으면 주로 포켓용 문고판을 사서 읽었다. 이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책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고대인도철학서인 『우파니샤드』, 노자의 『도덕경』, 『릴케시집』, 『괴에테와의 對話』등이다. 사십대 이후 경제력이 생기고부터는 지적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인터넷서점에서 사 모은 책으로 서재를 꾸며놓고 지긋이 바라보며 ‘아! 나도 인텔리로구나.’라며 자위하는 게 사는 낙이다. 젊어서는 문학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자연과학 분야의 책은 안 보았는데 10년 전부터는 생물학, 분자생물학, 유전학, 지구과학, 물리학, 천문학, 우주학, 화학 등의 과학 분야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무릇 시와 글을 쓰려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공부해야만 종합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일기장은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쓰기 시작한 일기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햇수로 47년이고 대학노트로 모두 108권인데 각 권마다 ‘黽鳴 맹명’, ‘洛江’, ‘華然’, ‘進化’, ‘湛然’, ‘華嚴’ 등의 그 당시의 화두를 담은 제목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름을 탐하지 말고 더욱 겸허한 배움의 자세를 갖자’라는 뜻으로 『無名錄』이라 제목 하여 쓰는 중이다. 일기를 쓰긴 중1 때인 1966년 3월부터였으나, 1970년 봄 어느 날 그만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정신과 육체의 갈등 때문이었다. 일기란 게 자기 반성인데, 중학교 때는 몰랐으나 고1 때 강 머시기 친구와 함께 자취하면서 배운 용두질 대문에 무척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짓은 교과서에서 배운 도덕심과는 상극이었다. 자제하고자 무척 노력하였으나 그 버릇은 전혀 양심과 체면이 없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형의 중학교 도덕책을 몇 번이나 읽으며 표지를 싸서는 <인생독본>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도덕관념에 투철했는데, 수음이라니, 도저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육체의 욕망조차 막지 못하는 자가 무슨 일기를 쓸 수 있는가라는 자괴감에서 그만 불을 놓고 말았다. 새로 시작한 고2 때인 1970년의 제1권의 제목은 『인생논문』이다. 첫 일기인 1970년 5월 7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씨는 雲. 四年 間 記錄했던 日記冊이 태워 없어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人生무상, 좋은 생각이야. 인간이 삶에 있어서의 궂은 일, 좋은 일이 최후에 도달할 목표는 차가운 영과 肉의 멸망이 있을 뿐, 死 후의 쟁쟁한 명예가 주검에겐 무슨 소용이 있을 소인가? 生前이나 死 후의 편안함을 위함이라면 人間은 모두 利己主義者가 아닌가? 가장 두려워하는 人間의 마음이라 古로부터 내려온 모든 철학적 예술이 아직도 모든 이치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까? 말이 무서웁다. 눈이 무섭다.」 군대에서도 숨겨 일기를 쓸 정도로 일기 쓰기는 나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내 일기는 하루 일과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요 느낌이요 사상이요 시의 들판이다. 깊은 밤에 생각과 느낌을 술술 산문으로 쓰다보면, 간수를 치면 두부가 엉키 듯 생각이 엉켜 시가 된다. 요즘은 컴퓨터가 있어 작업이 쉽지만 전에는 몇 장씩 넘겨쓰면서 퇴고를 했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새벽 서너 시, 한 편의 시를 만든 즐거움에 피곤한 줄 몰랐다. 두 상자 쯤 되는 일기장은 이어서 말할 습작기의 공책시집과 함께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아주 든든한 원천이다. 옛 시절이 생각나서 가끔 펴 보면 유치가 찬란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의 자산이다. 시간이 나면 이 둘을 차근차근 정리하여 비매품으로 발간해서 지기지우들에게 증정할 작정이다. 돌아갈 때는 무명보자기에 곱게 싸서 관속에 넣어 함께 보내달라고 당부할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초기 습작병을 앓게 되었다. 거기에는 내적 요인이 많았지만 외적 요인도 작용했다. 우선 과 선택에 대한 후회가 심각했다. 소천 중3 촌놈이 영동선에서 만난 영주종고 3학년에게서 들은 “화공과가 제일 쎄다”라는 말을 덜컥 믿고 입학원서에 ‘화공과’를 쓴 바람에, 과 수석으로 입학은 했지만 ‘아이쿠 잘못 했구나 여긴 진학이 아니라 취직인데’라는 후회로 화공과 공부를 접고 참고서를 따로 사서 3년 내내 진학공부를 홀로 했다. 그러다보니 학교 안 가는 날이 많았고, 자취와 독공 등으로 고독한 소년기를 보내게 되었고, 그 고독이 향하는 곳은 일기장이었다. 일기를 쓰다 보니 가끔 운문형식을 띄게 되었고, 그것을 따로 정리한 것이 바로 공책시집이다. 결론하면 화공과 선택이란 한 순간의 실수가 평생을 좌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글쎄 보통과에 갔다면 아마 어느 정도 성공은 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적 성공이야 풍요할 수 있지만,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세계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은 시인만이 알 수 있기에 그 당시와 40대 초까지는 느끼지 못했는데, 화공과에 진학해서 배운 유익한 점 한 가지를 40대 중반 넘어 나름대로의 사색이 깊어지면서 느끼게 되었다. 무엇인고 하니 바로 유물론이다. 지금도 뚜렷이 떠오르는, ‘야 분자와 원자라니, 물질을 잘게 쪼개면 분자가 되고 더 잘게 쪼개면 원자가 된다니, 그럼 나를 깔아뭉개려고 달려오는 저 자동차도 분자로 분해하면 금방 흩어지겠네’라고 생각하던 때는 화학 공부를 처음 배운 1969년 봄날이었다. 청춘시절에는 정신의 가치, 즉 도덕 우위의 관념론이 절대적이고 육체적 가치, 즉 물질은 상대적인 것으로써 정신과 물질은 주종관계라고 인식했는데, 살면서 경험하고 사색한 것들이 차츰 엉키면서 유신론과 유물론이 대등한 관계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더하여 50대 중반 넘어서부터는 오히려 유물론이 본질이고 유심론은 현상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유심론과 유물론의 관계에 대한 생각은 앞으로도 변화한다. 화공과 3년 동안 일반화학, 분자, 원자, 무기화학, 유기화학, 화학물리, 물리화학 등의 개념과 원리를 배울 적에는 그냥 한갓 평면적 지식 차원에서 암기했는데, 이후에 수십 년 동안 생활경험과 독서를 통해 다양한 지식과 정보들을 축적하면서 그 때 배운 개념과 원리가 효소 작용을 했는지 몰라도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보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성리학을 깊이 천착하면서 리기론과 원자론이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갖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물질에서는 이론물리학과 실천물리학의 관계, 정신에서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얻게 된 통찰력이랄까 예지의 원천이 바로 소년기에 화공과에서 배운 원자론과 분자론이었다. 철들어 돌아보니, 조선시대 성리학의 출발점이었던 격물치지 단계가 화공과 시절이었던 것이다. 구시대 성리학자들이 격물치지 하는 방법은 화두 집중과 오감으로 통한 관찰로서 관념론 위주였으나, 나의 격물치지는 거기에다 화학 이론과 실험검증을 통한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과학이 이룬 학문적 성과와 현실세계의 현상을 기존의 성리학 이론 체계에 응용하면서, 우주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리기론과 심성론을 사색하고 인성론과 수신론, 치국론에 접근하다보니 이전의 성리학과는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선배 성리학자들이 가질 수 있는 사색의 재료는 간단했지만 나는 비교적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까지 정리한 리기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주기론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논리는 정리해 놓은 성리학 관련 논문에 있으니 독자들은 인연이 닿은 다면 일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화공과 선택이 현실적 출세 면에서 보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내 인생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소년 시절에 나름대로 격물치지기를 경험함으로써 이후의 성리학 탐구와 시 쓰기에 큰 밑거름을 장만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구시대 성리학자들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자부심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은 내 성격의 가장 큰 단점인 자만심의 소치일 뿐이고, 학문 앞에서는 더욱 겸허한 자세를 갖춰야만 더 깊은 경지를 볼 수 있으니, 자중자애하며 꾸준히 사색과 학문의 길을 걷고자 할 따름이다. 문학과 시에 대한 넋두리인데 얘기가 번져 성리학 쪽으로 나갔다. 다시 본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 소년시절에 만든 공책시집으로 1970년 5월에 쓴 <飽滿> 외 60편이 들어있는 『松花』가 있다. 마침 박근혜 씨가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는데, 치졸스럽지만 들어있는 한 편을 옮겨본다. 朴正熙 將軍//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잡아/ 民族을 求한 우리의 英雄// 民族의 갈 길을 제시하시고/ 찬란한 太陽 높이 든/ 五千萬 韓民族의 領導者// 뻗어가는 國力으로 우리를 감싸시고/ 숙원 祖國統一과 滿洲 征伐/ 成功하실 稀代의 男兒// 半萬年 歷史에 轉換點을 기르시고/ 번영의 생활을 주신 우리의 太陽,//아, 榮光되어라/님이여, 千年을 노래하소서. (1970년 10월 6일). 11년 째 공교육을 받는 열일곱 살 소년의 눈으로 본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그랬다. 다른 통로의 지식과 정보는 전혀 보고 들을 수 없었다. 그 때가 아마 3선 개헌 직후였겠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유신총통제를 선포하고, 그로부터 6년 후에는 궁정동 안가에서 권총 몇 발에 생을 마감했으니, 3선으로 딱 마쳤다면 후세 역사에 두고두고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을. 2013년부터 5년 동안 펼쳐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 본인이야 얼마나 많은 감회가 서렸으랴. 아무쪼록 선친의 공과 과를 잘 분별하여 공은 늘이고 과는 보충함으로써 부녀 모두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기시라. 민주주의 선거 마쳤으니 찬반을 초월하여 이젠 덕담을 쌓아야지 안 그러면 국민들이 고달프다. 두 번째 공책시집은 고3 때인 1971년 1월 1일에 쓴 <삶> 외 66편이 들어있는 『白雲嶺』이다. 후일인 1975년 봄날 교대 2학년 때 교정에서 우연히 만난 전경 탈영병 김원섭이가 내 자취방에 며칠 눌러 살다가 이 공책 시들을 읽어보고는 다음과 같이 메모해 놓았다. 「地心은 빗물 먹고/ 나는 눈물마저 삼키지 못하는/ 4월 느즈막한 어느 날// 광인이 못내 그리워/ 광인이 못내 그리워// 어차피 正常人이 못된 우리/ 자네마저 그리운/ 이 날/ 돌아와 주게/ 내 곁엔 지금/ 허무뿐인데// 태산이 무너지고/ 지구가 날/ 배신할 적에// 나는 울었네/ 나는 슬펐어라// 못내 그리운/ 情아// 당신마저 날/ 버린다면// 나도/ 날 버려야겠네. 小時쩍/ 할아버지네 초가 처마 끝을/ 날아든 제비 한 쌍은// 그 땐/ 버들피리 불며/ 너와 내가 한 덩어리 되어/ 우리도 자연 속에 묻혔더라만// 오늘은/ 파멸의 창공을/ 찾아든 어리석은 짐승이 되어// 자연으로부터 추방당한/ 天刑의 죄인이 되어// 형극의 가시밭길을/ 함께 헤매는/ 고통스런 同伴者가 될 줄이야.」 물매암이처럼 혼자 끙끙대며 쓰는 일기와 습작이 그런대로 효과를 냈는지, 교내 백일장에서 두 번 상을 탔다. 2학년 때는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에서 산문부 차상으로 냄비를 부상으로 타 자취생 밥솥으로 잘 써먹었다. 3학년 한글날 기념에서는 시부 차하였다. 또 영주시 고전경연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세 번째 공책시집은 1972년 7월 17일에 쓴 <七月 -어느 날> 외 52편이 들어있는 『望鄕草』이며, 네 번째 공책시집은 1973년 4월 12일에 서울 남산공원에서 쓴 <슬픈 사람들> 외 50편이 든 『龍頭山』이다. 이때는 2년간의 낭인시절로서 쓴 장소를 보면 남산공원, 야간열차, 용산역, 효창공원, 술집, 역, 산 등인데, 보통사람들이 보곤 ‘저 인간 좀 이상하네’라고 할 정도로 하여튼 많이 긁적거렸다. 우리 시절엔 역이나 공원 구석진 곳에서 뭔가 메모하는 청년들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전혀 볼 수가 없다. 혹여 본다면, 좀 쉬다 하라며 맥주 한 캔 사 주겠다. 출구 없이 속으로만 휘몰아치는 습작기 동안 비비안리가 나의 애인이었다. 그녀의 잡지 사진 한 장을 어찌 구했는데 오른쪽 머리칼 색깔이 좀 희미해서 검정 볼펜으로 공들여 덧칠해서 공책에 척 붙여 놓고는, 美女訟// 白雪 같은 살결 위에/ 방금 뿜어나올 듯한 간드러운 유방 위에/ 그리운 날을 헤는 思索이 散步하고/ 예지에 빛나는 눈은 사랑을 갈구한다// 요염한 미소, 太古의 정적을 깨치며/ 火山처럼 터져 나오는 女人의 欲情,// 世上의 단맛 쓴맛을 모두 맛본 입술은/ 이제 새로운 甘泉을 찾아 간다// 純白으로 빛나는 보석,/ 윤기 흐르는 긴 흑발 휘날리며/ 東原을 갈 때 天地는 감격했었다/ 오직 당신만이 人生의 化身이라고,// 침중한 餘白에 싸여 흐트리는 분위기,/ 하얀 얼굴은 하루를 다듬는 정원,/ 太古의 꿈을 꾸며, 신비로운 미소 띄우며/ 人生을 간파한 女人의 눈은/ 黃昏에 작렬하는 落照의 사연. (1973년 9월 1일). 스물한 살 때인 1974년부터 여러 문청들과 어울리면서 지긋지긋한 중기 습작병을 제대로 앓기 시작했다. 거대한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낙동강이 흐르는 안동에서 2년 반 동안 화려하게 펼쳐졌다. 어영부영 두 해를 낭인신세로 보내고, 고3 때와 재수, 삼수의 낭인시절 때 그 어려운 예비고사에 매해 합격해 놓고도 대학 입시는 안 보고 꼭 병든 장닭처럼 비영비영하다가 징병검사를 받는 해인 1974년에 인근도시에 있는 안동교대에 들어갔다. 그것도 꼭 국민학교 선생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정형편 상, 군대 안 가려고, 우유부단한 기질 때문에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자아와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성 카오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그 불안은 사춘기와 청년기 7년 반 동안 모질게도 나를 갉아댔다. 나만 습작병을 앓는 줄 알았는데 안동에는 동병상린 하는 청춘들이 많았다. 첫사랑에 홀려 학보사와 일요문예동인회에 들어가면서 교육대학과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청과 문인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에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나보다 10년 정도 연장인 김주영, 김원길과 6년 정도 연장인 임명삼, 임병호, 김진택, 임관혁, 김지섭 등이 있었고, 교대 동기, 선배들로는 아래 위 두세 살 차이로 권석창, 황근식, 김선굉, 오승강, 주영욱, 서정오, 권보혁, 안태준, 이중현, 권오범 등이 있었다. 교대생이 아니고 안동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경서가 나보다 두세 살 적은데도 처음부터 말을 놓고는 함께 어울렸다. 각자들의 소속 문학모임은 안동문협, 글밭, 일요문예동인회, 맥향이었다. 우리는 주로 구시장 주점과 복개천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참 많이 마시고는 떼로 낙동강 가에 있는 육사시비에 가서 대성통곡을 한 다음에 백사장에 퍼질시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그 때 술값은 학보사 원고료가 주로 쓰였다. 당시의 화제 가운데 하나가 ‘명작의 고향’이었다. 저마다 나중에 자기 고향이 ‘명작의 고향’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올 거라고 자랑하였다. 그 당시에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던 사람들일수록 이후 이름이 차츰 빛나기 시작하더니 30여 년이 지난 현재에 보면 한국시단에서 중진으로 각자 위치하고 있다. 교육대학과 초등학교 교단이 갖는 특성과 한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시와 동화 쪽으로 흘러갔지만, 문청시절부터 자유시를 고수한 시인들은 결국 자유시인으로 이름 석자가 남았다. 다섯 번째 공책시집은 1974년 4월에 성은 김이요 이름은 QJ에게 바친 첫 시 <솔꽃이 피는 고개> 외 31편이 들어있는 『虛無魂』, 여섯 번째 시집은 <이 아침의 혁명 -그대를 그리며>외 31편이 들어있는 『心井』, 공책시집의 제7권은 주로 1975년에 쓴 시로 <東風賦> 외 40편이 들어있는 『靑銅衰』이다. 그런데 앞에 1~4권까지는 그런대로 평온한 정서적 습작풍이었으나, 5~7권은 그만 <솔꽃이 피는 고개> 이후부터 폭발한 첫사랑의 광풍 때문에 시 꼬라지가 피철갑이었다. 매친 듯이 맨날마다 써서는 학보사에서 만날 적마다 주었더니, “박희용씨 나중에 시인되면 한턱 내야되요”라는 딱 한 마디가 돌아왔다. 그녀에게 써 바친 혈시가 모두 한 100여 편? 나에게 닥쳐온 첫사랑이 남들만큼 아팠지만, 40년이 지나도 아직 시인이 못 되었으니 한턱 낼 날짜가 아득타. 그래서 기분이 흐리면 ‘동심초’를 즐겨 부른다. 「獻詩 솔꽃이 피는 고개/// 花冠의 님아/ 솔꽃이 필 때면/ 목 메이는 나그네/ 내 돌아가 살 땅을 주오// 영원한 세월의 江이/ 야리게 일렁이듯/ 내 그리워 할 影을 주오// 당신의/ 화사한 웃음이 사라진/ 龍鄕原의/ 쨍쨍스런 하루는/ 꼭꼭 눈물만 찍어내더이다// 하냥/ 남으라시면/ 당신의 映像을 손질하오며/ 千年이고/ 萬年이고/ 울잖고 기다리오리다// 花冠의 님아/ 먼 먼 훗날에/ 호호백발 할미 되어/ 솔꽃 피는/ 이 고개를 넘을 때면/ 불현듯/ 오늘이 그리울 게외다」 솔꽃은 해마다 피지만 이놈이나 그년이나 호호백발 다 되어 가니, 하루하루 짙어지는 치매끼 땜에 불현듯 그리워할 서정이 없음. 2년 동안 90학점을 이수해야 할 교육대학생이 훌륭한 국민학교 선생이 될 생각은 안 하고 ‘스트럼 운트 드랑크’만 즐기다 보니 교대공부를 팽개친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느라 끙끙대고, 설상가상으로 유신독재정권이 한창 독이 올랐을 때인 1975년 5월, 당시 꽤 잘 팔리던 『문학사상』에 실린 패망한 월남대학생들의 반성문을 대학신문에 전재하라는 주간교수의 명령에 거부하다가 편집국장에서 파면되어 번민, 방황하는 바람에 1학기말고사를 안 쳤으니, 남들 다 졸업한 뒤에 한 학기 학점을 따야 할 수 있는 추가졸업은 받아놓은 사약이었다. 그 때 『문학사상』 등의 문학지가, 어용문인들이 권력에 굽혀 어떤 짓을 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그래도 앞 기수까지의 선배들은 RNTC를 했기 때문에 추졸해도 군대를 안 갔다. 그 대표적 인물이 권 모 시인으로 추졸 두 번 하고도 참으로 운이 좋아 군대 안 갔다. 나도 그걸 믿고 배짱 좋게 뻗치다가 파면당하고 시험 보이콧해서 추졸했는데, 웬걸 남은 학점 따러 후배들 낯 바시는 강의실에 성실히 들어가고, 대부분 시간은 도서관에서 좋은 시 베껴 쓰며 광기를 다스리는 중인 1976년 4월에 군대 가야한다는 청천벼락이 날아왔다. 고놈의 벼락이 어찌하여 이 시골 교육대학의 허접한 인간에게 날아왔는지 뒷말을 들어보니 글쎄, 75년 봄에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북도교육청 초도순시 왔다가는 “교육대학생 가운데 추졸자들이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고는, “무어? 장차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교육대학생이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해. 고연 놈들 당장 군대 보내!”라고 했다 한다. 부랴부랴 75년도 추졸자까지는 군대 안 보내기로 하고, 76년도 추졸자부터는 보낸다고 대구교대와 안동교대로 공문을 보냈는데, 대구교대는 방학학기를 열어 추졸자를 없앴으나 안동교대는 그 공문을 그냥 쳐박았다고 한다. 제대하고 1979년 봄에 대구교대 복학해서 공부해보니 대구교대 교수님들은 정말 교수다웠다. 반면에, 추졸 징집 대상자들을 연구실에 불러선 “군대 안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하던 그 교수 생각난다. 그 땐 그 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박정희도 대구사범 다닐 때 성적이 뒤에서 몇 번이었다 하는 걸 보니 사범교육에 별 관심이 없었고, 문경보통학교 훈도 3년 남짓 하고는 혈서충성문을 쓴 덕택에 만주군관학교 입학해서 출세했으니 초등교육에 사명감이 별로였지 아니한가. 하여튼 유신정권 명령 때문에 편집국장 파면에다가, “군대 보내”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소중한 청춘시절 2년 동안 일주일에 6시간에다 여름방학 다 바쳐서 RNTC 군사훈련 받고도 군대에 가게 되었으니, 정말 나의 스물두 살인 1975년 을묘년은 재수에 옴 붙었다. 고2 때 <朴正熙 將軍>이란 칭송시를 썼는데도 말이다. 내가 말띠이니 토끼 한 마리가 앞에서 깡충깡충 뛰어가는 걸 심약하게 피하다가 크게 낙상한 쾌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탈영병 김원섭이가 내 공책시집을 읽고 예언한대로 <광인, 허무, 천형의 죄인, 형극의 가시밭길>을 따라 1976년 6월 21일 밤 포항역에서 논산행 입영열차를 탔다. 고3 때는 교대 가기 싫었고, 징집신검 전해엔 군대 가기 싫었다. 가정 형편과 나폴레옹의 모자에 혹해 육사시험은 쳤지만, 우유부단한 문학도의 특성이랄까, 부드러움과 자유에 상극인 군대에 참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군대 문제와 가정 형편 때문에 RNTC제도가 있는 교대로 마음을 굳혀 교육대학생으로 2년을 보냈는데, 결국 가게 되었다. 하여튼 중학시절에 형성된 햄릿형과 동키호테형의 이중성격 대문에 번번이 운명이 꼬였다. 입대 직전에 모진 마음을 먹고 찾아간 곳이 금정리다. 신작로 가 뉘 집 어느 여인이 심야에 라디오를 틀어 놓았나, 삼동산 우구치 아래 금정리의 밤하늘에 흐르던 ‘지고이네르 아이젠’, ‘짚시의 달’이 지금도 귀에 감미롭다. 살자, 죽는 것 보다 사는 게 훨씬 아름답다. 감정의 무풍지대인 교육대학에서 ‘라스트 로맨티스트’라고 자부하며 설쳐대던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그렇게 끝났다. 「사금파리의 유언// 내 몸이 흩어져/ 다시 모래알로 흙으로/ 돌아간다만/ 한 평생 살던/ 하늘을/ 날카롭게 금 그어/ 방울방울 솟아나던 혁명을/ 흔적 하여 다오」 「戀歌 26 철길// 마음도 하 서러워/ 별빛이 총총히 들어서는 날/ 철둑을 베고 누웠다가/ 기적소리 쯤에야 아예 놀라지 않다가/ 비로소 징징거리는 철길의 울음에/ 다섯 길 풀언덕 아래로/ 풍만한 몸을 굴리는/ 여인 있었다」 육군제2하사관학교와 육군행정학교의 훈련생활과 울산 제622고사포대대에서 군대 생활을 꼭 30개월 동안 했다. 그 동안에도 늘 시를 생각하고 책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때 『님의 침묵』을 절실하게 읽었다. 스물다섯 때인 1978년 봄에 첫 휴가 나와서 대구매일신문사에 <비비추새>를 투고했더니 4월시단에 실렸다. 아가씨들 펜레터 받을 욕심에 주소를 7232부대로 한 탓에 보안에 걸려 자칫하면 영창 갈 뻔 했다. 공책시집 만드는 버릇은 여전해서 78년 봄 작전과에서 일할 때 폐지도지로 입대 이후에 쓴 <유사.3 -패랭이꽃처럼> 외 8편을 담은 공책시집 제8권 『頓曉詩集 -패랭이꽃처럼』을 타이핑해서 만들었다. 빡쎈 훈련으로 몸과 마음이 정화되어서인지 입대 전의 광기가 사라지고 비로소 시 비슷한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군대시절이란 단련기가 없었다면 1976년 여름에 분명히 정신과 육체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유사 3 -패랭이꽃처럼// 옛날 나의 할아버지 한 분은/ 황산벌에 모인 계백의 5천 결사대의 한 사람이었다/ 그날 새벽, 싸움을 앞두고/ 할아버지는 허리춤에다 자꾸 달빛을 감추고 있었다/ 달빛이 하얗게 피는 이깔나무 가지 위/ 목청이 좋은 까치 한 마리가 박자를 맞춰서 울고 있었다/ 전쟁터이라 소반에 올릴 눈물도 없는데/ 손님은 뉘일까/ 퍼올려도 퍼올려도 마를 날 아득한 이별가 너머로/ 벌판을 덮던 조상들의 죽음을/ 영기 그늘 아래 패랭이꽃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시간의 죄 없는 목숨을,/ 손님은 뉘일까/ 천지에 가득한 패랭이꽃의 죽음을 밟고 오는/ 달빛에 젖은 손님은 뉘일까 」 「생명연습 1// 그날 바람이 조금 불었다/ 죽음의 나무에는 청자빛 풀잎이 피었다 이울었다가/ 못된 사내아이가 버린 곰인형은 바람 따라 훌쩍훌쩍 울었다/ 모성의 노을 속으로 까마귀 한 마리 깍깍깍 길게 울었다/ 나는 풀잎 하나 따 물고 풀잎의 절개를 연습하면서 수백 번 엎어졌다/ 그날 바람이 조금 분 후 아무 데도 풀잎은 보이지 않았다/ 풀이란 풀은 하늘 끝까지 말아 올리고 흙이란 흙은/ 뜨겁게뜨겁게 사형되던 날」 「비비추새/// 몇 마디 언어는/ 하늘에서 풀풀풀 떨어져 내리다가/ 이윽고 비비추새가 되어 날아갔다// 환시의 하늘 한가운데/ 붉은 고추잠자리 떼가/ 수없이 시간을 뿌려대고 있었다//몇 마디 언어는/ 언덕에서 풀풀풀 굴러져 내리다가/ 이윽고/ 민들레꽃으로 피어났다// 청동의 거울무늬/ 허물어 내리는 비비추의 하늘을/ 나는/ 수없이 민들레꽃씨를 날리고 있었다」 「아침 병영// 鍾소리도 얼어/ 짧은 아픔을 토하는 겨울날 아침 병영/ 南道의 참새들은 울기도 유난하다」 「새/// 인동의/ 껍질을 깨고/ 의식의/ 가장 깊숙이/ 흩어지는 종소리처럼/ 새/ 금빛 깃 새떼의/ 행방// 성난 자정의/ 살기를 쪼아 물고/ 부활하는/ 오 새벽으로/ 날개 짓 하는/ 새/ 일천 일 만 마리/ 새의 목숨은/ 녹슬었다」 1978년 12월에 제대를 하고, 이듬해인 1979년 영남일보 3월 시단에 <필부가>, 1981 영남일보 7월 시단에 <강 언덕 너머에는> 발표로 이제 겨우 중기 습작기를 벗어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공책시집 제9권은 1976년부터 1985년까지 쓴 <風景 2> 외 65편이 들어있는 『開山詩集』이다. 8권 째인 25세부터 거친 습작기의 불안한 광풍이 잦아들더니 제9권 째인 30세 가까이 되어서야 비로소 늦깎이로 중기 습작병이 갈피를 잡았다. 「낙동강/// 낙동강 칠백리를 떠내려온/ 풀씨 하나/ 오늘은 강변 모래톱에 뿌리 내렸다/ 발돋움해도 발돋움해도 보이지 않는/ 네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꽃은,/ 이제는 떠내려가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풀뿌리 움켜잡으며/ 아비의 삽날에 찍힌 벼 포기들이/ 오늘은 강가에 벌거숭이로 누워있다/ 누가 버렸을까 국산 크림통에/ 가득히 고인 가난/ 그 아득한 마을에 큰물이 나면/ 해 긴 여름날 하루 종일/ 세월을 물레질하던 어머니// 마침내 강가 모래톱 한 구석에/ 이름 없이 묻혀/ 썩어서 무엇이 되는가 풀씨여」 「匹夫歌// 네 손에 거머쥔 한 줌 흙의/ 깊은 밤이면 흘리는 땀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네 눈에 들어와 박히는 한 더미 반도의/ 뜨거운 피 흘림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아우여 가슴을 벌리고 한껏 쬐는/ 눈부신 자유의 의미를/ 너는 아직 모른다/ 갈매기가 끌고 가는 수평선의 끝 간 데에/ 이따금씩 분수지는/ 부끄러운 네 눈 속의 그리움을/ 너는 아직 모른다」 「강 언덕 너머에는/// 강 언덕 너머에는/ 사람이 산다/ 마을을 떠나/ 강을 향하여 등을 돌린/ 삶의 비 내리는 부분에도// 갑남을녀/ 후줄근한 이름의 사람들이 산다// 강 언덕 너머에는/ 한 뼘의 마당귀에 피어난/ 패랭이꽃의 꿈만하게/ 시간이 출렁이고// 아내여/ 삶의 풍요는 어디 있는가」 다음으로, 나의 문학활동에서 가장 기력이 왕성했다고 할 수 있는 안동에서의 『말ㅆ․ㅁ』 시절을 정리해 본다. 1979년 10월에 경산군 숙천국민학교에 발령 받아 1982년 2월까지 2년 여 동안의 경산군 선생 생활을 마치고, 1982년 봄에 안동으로 전근을 와서부터 1986년 봄에 녹전으로 전근가기까지 29세부터 32세 까지 4년 동안의 ‘말쌈문학동인시절’을 펼쳤다. 동인은 임명삼, 서정오, 권보혁, 주영욱 등 5명으로 일러서 ‘洛江五友’이라 칭하며 걸걸하게 놀았다. 각자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길안과 청송, 경산에서 생활한지 서너 해, 비록 몸은 국민학교 교단에 얽혀있지만, 교대시절에 제대로 태우지 못한 문학정열이 우리들의 가슴 가득 들끓고 있었다. 문학을 향한 작은 발걸음을 함께 다시 시작해보자는 의논을 한 끝에 장강의 뿌리가 산 계곡에서 시작하듯 우선 회보 형태로나마 동인지를 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 봄에 『同人 말씀』 제1집을 냈다. 서정오가 필경한 14쪽 원본을 안동농아학교에서 100부 정도 복사하였다. 박희용이가 숫자를 시어로 사용한 <眞理>와 <本性> 두 편의 시를, 권보혁이가 소설 <어떤 삶>과 촌평 <달라진 게 없었다>를, 서정오가 우화소설 <舜 임금의 금혼령>과 촌평 <왜 말하기가 두려운가?>를 썼다. 2집부터 제자를 ‘말’ 자와 ‘ㅆ +아래 아 + ㅁ’으로 써서 ⌜말ㅆ․ㅁ⌟으로 나타내고, 말을 쌈 싸서 먹는다는 뜻으로 “말쌈”으로 읽었다. 출판기념회는 1982년 4월 4일 예안호에서 셋이서 자기 낚시대를 호수 가 여기저기 펼쳐놓고, 낚시대에 붙인 두루마리에 쓴 현수막에다 소주잔을 부어 고사를 지내며 조촐하게 했다. 서정오의 <舜 임금의 금혼령>은 나중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곧 교대 한참 위 선배이자 안동농아학교 선생이었던 임명삼이 합류하였다. 형편이 조금 나아져 한여름인 1982년 8월 17일에 광석동 허름한 인쇄소에서 27쪽 인쇄본으로 『말ㅆ․ㅁ제2집』 200권을 냈다. 글모임의 명칭도 ⌜말ㅆ․ㅁ동인회⌟로 하였다. 제2집에는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1 誓願 2 탈 3 사람이 죽던 날 4 풀잎 5 사람의 싸움 6 傷心>, 권보혁의 소설 <사랑, 그 첫 번째>, 임명삼의 수필 <탑돌이>, 서정오의 소설 <大明天地>가 실렸다. 산 계곡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가 차츰 꼴을 갖추게 되자 지역의 문학인들과 문화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타 지역 문인들의 격려가 좀 있게 되자 용기를 얻은 동인들의 창작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동인회도 한층 태를 내기 시작했다. 2집을 어디서 보았는지 울진 후포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는 최영욱이가 합류하였다. 『말ㅆ․ㅁ제3집』은 1983년 1월 20일 영남사에서 인쇄본 58쪽으로 300권을 냈다. 동인들이 20여 권씩 나누어 가진 다음에 전국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및 안동교대시절 인연한 동료, 선후배들에게 보냈더니 많은 격려 답신이 왔다. 제3집에는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7 鬼神論 8 패랭이꽃처럼 9 元曉 10 首陽山고사리 11 全琫準 12 供出>과 <강 언덕 너머에는>, <낙동강>, <水平線> 등이, 임명삼의 수필 <下午의 風景>과 <서울과 지도>가, 최영욱의 희곡 <風土病>이, 권보혁의 소설 <통고산>이, 서정오의 소설 <뒤 따라오는 사람>이 실렸다. 1월 22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김원길, 강윤수, 최유근, 권석창, 장종규, 김진술, 최종식, 김경숙, 김근환, 김충길, 박혜경, 김종숙, 김완배, 임종우, 기영주, 임형규 등이 축하와 부조를 하는 가운데 출판기념회를 했다. 전국에서 많은 축하와 격려 서신이 왔는데 충주의 박재륜 시인이 격려 붓글씨를 한 폭 보내왔다. 『말ㅆ․ㅁ제4집』은 자필 유일본을 내자는 서정오의 의견에 따라 책 형태의 큰 노트에다 여러 동인들이 돌려가면서 1983년 말 경에 거의 다 썼다. 다 되면 그것을 복사하여 나누어 갖자고 했는데 유사인 박희용이가 잘 챙기지 못하여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아마 포항의 안태준이에게 가 있지 않은가 한다. 청송 진보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는 주영욱이가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최영욱은 이후 연락이 없었다. 『말ㅆ․ㅁ제5집』은 1984년 7월 28일 65쪽으로 영남사에서 300부를 냈다. 제5집에는 주영욱의 시 <겨울까마귀>, <西녘구름 Ⅱ>, <노을앞에서>, <離別>, <絶望>, <幻影>, <決別>, <노을> 등이, 박희용의 연작시 <神市 13 僻地에서 14 막걸리를 마시며 15 弔辭 16 강강수월래 17 뼈를 추리며 18 免賤介同이 19 覺華寺에서>가, 임명삼의 수필 <잃어버린 마을>, <단 하루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洛江五友> 등이, 서정오의 소설 <容態>이, 권보혁의 소설 <배앓이>가 실렸고, 마지막 장에 有事인 박희용의 <말ㅆ․ㅁ 5집을 펴내면서> 발문이 실렸다. <洛江五友>를 읽어 본 정보경찰이 안동농아학교로 임명삼을 찾아와 글을 쓴 의도와 동인들의 신상을 물었다고 했으나 뒤탈은 없었다. 출판기념회는 1984년 7월 28일 안동문화회관에서 오승강, 박경서, 김원길, 박인영, 이진구, 장종규, 김춘수, 기영주, 권석창, 강기석, 박성철, 박영교, 김지섭, 안태준 등이 참석하여 부주 및 축하를 해주었고, 한국일보사, 김시종, 김진태, 허형만, 박덕규, 손춘익, 구상, 이윤수, 지용옥, 강영환, 박신환, 이정룡, 방태석, 강윤수, 김필곤 등이 서신을 보내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김춘수가 문화회관에 어찌 왔다가 동인지 출판기념회 안내문을 보고 왔는데, 이미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교재로 돌려 읽었으며, 유풍에서 모여 술을 마실 적마다 성삼문의 <북소리 인명을 재촉하니/ 저승길 주막이 없어라>라는 절명시를 소리높이 읊는 우리로서는 <꽃>은 좋으나 민정당 국회의원이 된 김춘수는 영 시답잖아 대접을 거칠게 했다. 이후 1984년 말에 서정오가 대구로, 1985년에 임명삼이 대전으로, 1986년에 박희용이 녹전으로 전근 가면서 동인들이 얼굴 마주할 기회가 차츰 귀해지더니 동인활동이 소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말ㅆ․ㅁ동인⌟들 몇몇의 문필활동은 쇠약해지기는커녕 더욱 내면화, 외면화하면서 2010년대에도 그 시절의 정열을 잃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임명삼은 1985년 말에 대전으로 식솔을 끌고 이사 가서 원명학교에 근무하며 수필집 『사랑하며 영원을 사랑하며』내고는 없는 머리칼이지만 더 깎아 스님이 되어 경기도 이천에 마련한 부석암에서 『친일불교론』, 『불교사 100장면』, 『종정열전 1, 2』 등 많은 책과 『친일인명사전』의 <친일승려들> 편을 쓰면서 시공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정오는 1985년에 더 넓은 세상인 대구로 식솔을 데리고 이사 가 효성학교에 근무하면서 소설보다는 아동문학과 옛이야기를 되살리고 다시 쓰는 일에 노력하고 있다. 『언청이 순이』, 『꼭 가요 꼬끼오』, 『옛이야기보따리 시리즈 10권』, 『일곱 가지 밤』 등 많은 책을 펴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쓴 글 여러 편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박희용 역시 1986년 봄에 안동 시내를 떠나 식솔들을 데리고 시골인 녹전면 녹남국민학교로 전근을 갔다. 시의 길에 들어선지 30년 만에 그동안 쌓아놓기만 했던 시들을 모아 2000년 7월에 시집 『霜寒圖』를 펴냈다. 2001년 3월에 『교단문학 통권 제29호』의 제31회 교단문학신인상 시 부문에 <바람 부는 날>외 2편이 당선되었다. 2004년 이후부턴 영주작가회의 회원, 경북작가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영주작가』, 『작가정신』, 『경북작가회의 시선집』, 『사람의 문학』 등의 문학지에 시를 발표하고 있다. 2008년 5월엔 대운하 반대와 생명의 강을 모시기 위한 시인 203인의 특별 공동시집 『그냥 놔두라 쓰라린 백년 소원 이것이다』에 <삼강주막>을 발표하였다. 또한 2010년 2월엔 2002년 이후 여러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발표한 時論들을 모아 『兩白集 秋 疏論筆談』을 펴냈고, 현재는 두 번째 시집인 ‘兩白集 春’과 산문집인 ‘兩白集 夏’, 學讀集인 ‘兩白集 冬’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1982년에서 1985년 까지 약 4년 간 이루어진 ⌜말ㅆ․ㅁ동인회⌟활동을 통해 동인들의 문학적 안목과 역량이 비로소 무게 중심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막역한 사이의 문우들이었지만, ‘同人’이란 서로를 더욱 섞이게, 충돌하게, 비교하게 하는 큰 양푼과 같은 존재였다. 저마다 다른 행보로 걸어온 20대 초, 중기의 문청시절을 마감하며, 20대 말기부터 30대 초까지와 안동이란 시공간에서 전개한 활발한 동인활동은 개인적으로는 창작 의욕을 더욱 매섭게 불러일으키며 좁은 아집의 세계에서 벗어나 사회와 시대의식에 눈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ㅆ․ㅁ동인회⌟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으로서의 문학과 사회로서의 문학이 만나 문학 본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을 필독서로 하여 돌려보며 토론회를 자주 가진 정황에서 볼 수 있듯이 동인 모두가 변방의식에 근거한 비판정신이 투철하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한창 서슬 푸른 80년 대 초라는 시대적 환경과 공룡 서울공화국이라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지방 소도시 안동의 젊은 문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賊’을 돌림자로 하여 山, 馬, 水, 草, 海를 앞에 놓아 각각의 호를 지어 ‘五賊’이라 부르며 막걸리 잔으로 울분을 토로하였다. 시대가 삐딱해지면 선비들과 문사들은 몸을 감추는 법, 중국에 죽림칠현이 있었고 광해군 때 여강남안에 강변칠우가 있었다면, 1980년대 초의 안동에는 낙강오우가 있었다. ⌜말ㅆ․ㅁ동인회⌟는 엄동의 시대에 관변문학단체만 존재하던 북영남 지역의 경직된 문학풍토에 민중, 민족, 민주를 지향하는 문학 본연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여명이었다. 동인들은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의 다양한 문학 장르를 망라한 각각의 작품에 안동지역의 정서와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담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확고한 선비정신과 문학관을 갖고 부화스런 세상에 쉬이 굽히지 않았다.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동인회 활동기간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학정신 본연의 자유로운 서정과 사상을 작품과 행동으로 표현했던 노력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연결고리로서, 분명 이후의 북영남문학 발전에 거름이 되는 뚜렷한 문학사의 한 마디가 되었다. 1986년의 삼십대 이후부터는 시와 학문이란 두 길을 걷기로 작심하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후 15년간은 시골 초등학교 교사의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낮에는 호구지책에, 밤에는 일기, 독서, 창작은 이어졌으나 정신의 웅덩이 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구에 사는 서지행이가 민주화운동, 전교조 운동, 민족문학 운동 등에 관한 자료를 보내오고 참여를 권유했지만, 시골 초등학교 선생 노릇에 안일하다보니 시대의 흐름에 뒤지고 말았다. 90년대 초에 안동의 <글밭>에 가입하여 작품 활동을 했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들과의 교류를 접었다. 그러다가 서정오의 권유로 2000년에 시집 『霜寒圖』를 펴내 그간의 갈증을 면한 다음에, 2004년 50대 나이에 들어서 인터넷 카페 ‘양백재’를 만들어 사람들과 교류하고 영주작가회의와 경북작가회의에 가입해서 활동하다보니 글쓰기에 더욱 재미가 들어서 10년 동안 시와 산문을 많이 썼다. 이걸 보면 혼자 하는 문학이란 물매암이처럼 맨날 자기 생각에서만 맴돌지만, 다른 작가들이나 독자들과 교류하는 열린 문학을 함으로써 자기의 그릇이 넓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나의 ‘스트럼 운트 드랑크 시절’이 바로 물매암이 시절이었음을 통감할 뿐이다. 나의 문청시절에, 문학의 길을 이끌어 줄 스승이나 선배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그렇도록 건조한 나르시시즘과 퇴폐주의에 매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문청들은 모두 자기만의 고뇌에 휩싸여 몸부림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어쩌다 만나면 상대방의 아픔엔 전혀 관심이 없이 “우리들의 스승은 술이다!”라고 외치며 술부터 마셔댔으니, 무슨 도움을 받아서 내 시가 자랄 것인가 말이다. 글 선배들도 “시 잘 쓰려면 술 잘 먹어야 해!”하며 그저 술잔만 거듭 권했다. 교대 오기 전까지는 술을 몰랐는데, 그렇게 배운 술 문화 때문에 ‘문인들은 만나면 당연히 술부터’라는 고정관념이 수십 년 동안 뇌에 저장되어 있다. 「예안 장터// 창수네 옥이네 모두 돌아와/ 지난번에 못다 꾼 꿈 이루더라고/ 물먹은 기와장/ 십 년 너머 물살이 하는/ 초가지붕 화안한 박꽃/ 오랜만에 옥희로 오랜만에/ 지상에 나타나 반가운 오후/ 골목어귀 미장원집 미스 정도 돌아와/ 한 겹 서울 먼지 산뜻 털어내고/ 미스 정 오늘 오후는 한 그루 산벚꽃/ 이루지 못할 꿈 오르지 못할 나무/ 다음 세상 기약하며/ 우리끼리 돌아와 따스한 오후/ 초가 이어진 골목 돌아 몇 채 기와집/ 감나무 한 그루 일년국화 곱던 길섶/ 마음속에 그렸다 지웠다/ 하루 종일 수선스런 예안 장터」 「안경을 안 쓰면// 안경을 안 쓰면 눈물이 난다/ 낡은 가을 햇살이 풀어내는 비문증일까//한 하늘을 이고 사는 몇 개의 사물들이/ 생활의 둘레에서 늘 낯선 손님이다/ 안경을 안 쓰면/ 직장생활을 같이 하는 덧니가 이쁜 그 여인이 생각나고/ 카플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꼭 사십 분간/ 대화를 나누는 그 사내의 속내가 궁금하고/ 적막이 늦은 강가 서로 몸을 기대어/ 시든 색이 되는 풀꽃들의 과거가 궁금하다/ 안경을 안 쓰면/ 평은강 너머 저 쪽 오번 옛 국도/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자동차 속에 앉은 인간들의 근황이 궁금하고/ 가로수로 서서 세상을 피해 사는 것들 은행/ 열매는 맺었을까 혼자 묻고 답하는/ 어느 토요일 오후 억새풀도 외면하는 가을강/ 안경을 안 쓰면/ 가벼운 신랑을 등에 업은 때때메뚜기 암컷 하나/ 배고픈 사랑이 만드는/ 생명들이 가만히 떨어지다 피다 사라지는/ 짧은 유리로 된 그 침묵이 서럽다」 「그리운 히프/// 예고개 그 화장실 첫째 칸/ 안경 벗고 핸드폰 벗고/ 재래식 구겨질까 바지 벗고 정조준/ 지긋이 힘을 주는 생리현상을/ 물끄러미 감상하는 낯익은 곡선// 어느 가난한 사내의 비린 육정이/ 검정 볼펜 선으로 남아 희미한/ 후장체위 그림 한 점/ 옥이의 히프였지 아마/ 육기 없이 앙상한 그 것// 인간의 눈 속에 타는 차가운 불꽃/ 차마 못 뱉어/ 서리서리 가슴 속에/ 무자수배암처럼 사려 두었다가/ 조립식 화장실 한 칸에서 혼자 즐거운/ 아련한 곡선미로 남아/ 지상 모든 사내들의 배설을/ 도매금으로 받아주는/ 옥이 후한 사랑이었지 아마// 새벽길 고랭지 배추를 가득 싣고/ 달려와 잠시 쉬는 대구80바 화물차 운전수의/ 이쁜 색시가 되다가/ 이른 아침 출근길 머리 허연 사내의/ 가을 되어 고개 숙인 중산층 자지를/ 잠시 일으켜 세우다가// 여인의 물빛 같은 한 생애 그린/ 담배 은박지 잘게 접어/ 고개 숙여 얼굴 감추며/ 다시 예고개 그 화장실 첫째 칸에/ 색동저고리 곱게 차려입은 신부로 돌아와/ 한 점 선으로 만든 히프를/ 살랑살랑 흔드는 옥이/ 하루 종일 꽂히는 사내들 눈정 따라/ 백일홍 붉은 가지 같은 그리움을/ 살랑살랑 흔드는 옥이」 남들은 늦어도 이십대 중반에 습작기를 마치고 이십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를 토해내는데, 나는 습작기 정리와 시 토하기가 10년이 늦었다. 등단도, 안동에서 문청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76년, 77년쯤에 동아신춘, 조선신춘, 시문학 추천, 심상 추천 등으로 훨훨 나는데 나는 스물다섯 살인 78년에 지방신문 월평 난에 겨우 시를 활자화 시켰고 40대 후반인 2000년에야 겨우 첫 시집을 내고, 그 덕으로 대구일보 문화면을 장식하고 『교단문학』에서 신인상을 탔으니, 참으로 재주가 아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목마른 자 물을 구하듯이 절실하게 뛰어들어 일찍 등단을 도모할 것을, 문단 출입을 자주 하면서 이리저리 친교 하여 줄을 잡아 볼 것을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시도 훨씬 풍요로워졌을 것이고 문명도 높을 것 아닌가. 그랬다면 문인들과 만났을 적에 “아 박 시인 어디어디 출신이지, 중앙지 출신이야, 대단해”하는 존경사와 후한 대접을 좀 받고 좌석에서 말발이 좀 안 섰겠나. 이거 뭐 지방신문 흔해빠진 월 시단에 겨우 비비적댔고, 늦깎이로 시집 한 권 달랑 낸 신세이다 보니 모임에선 늘 술상 귀퉁이 차지다. 하지만 핏줄 탓인지 성격 탓인지 환경 탓인지 그렇게 설치고 싶지는 않았다. 지방신문 월시단 세 번 발표도 그냥 투고했더니 실어주었고, 동인지 『말ㅆ․ㅁ』 내고는 두루 보냈더니 반응들이 좋았다. 첫시집 『霜寒圖』를 내서 보냈더니 역시 반응이 좋았고, 이걸로 2001년에 『교단문학』에서 신인상을 주어서 받았다. 또, 고맙게도 맹문재 평론가가 이 시집을 받고는 시 「보리들」을 『농업기반』통권 198호에 실어주더니 2002년 봄에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집』(북갤럽)에 실어주어서 이름 석 자가 비로소 빛을 봤다. 여태까지 유명시인이나 편집자를 찾아가 인사 땡기고 뭐 좀 하고 부탁한 적이 없다. 이것도 성격인데, 그 성격도 핏줄 타는지 조상 내력이 그렇다. 우리 8대조께서 봉화 소천 두메로 은둔하신 후 선조들께서 해마다 선영들이 있는 충주 목행마을에 묘사를 다녔는데, 한 번은 증조부께서 말을 타고 어느 마을 앞을 지나다니 종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선 “어느 놈이 감히 우리 양반마을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느냐”며 시비하더란다. 증조부께서는 의젓하게 말 위에서 “소천 박 아무개 지 말 지 타고 간다 해라아”라고 하셨다는 구전이다. 핏줄 내림은 어쩔 수가 없는 지,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시에서도 나는 자만이 심한 편이다. 비록 못난 시라 하더라도 내 시 내가 쓰는 데 무어 꿇릴 일이 있으랴! 시든 학문이든 빚진 게 없다. 시 스승과 글 스승이 있는 사람들은 스승의 그늘과 동문들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지만, 나는 스승 없이 자득하고 있으니, 눈치 보아 깎고 보탤 까닭이 없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인이다. 말을 보탠다면, 각 분야에서 태두인 사람들은 모두 자득파였지 스승의 문학과 학문을 그대로 답습하는 순종파가 아니었다. 또 시는 청춘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감성의 시를 일컫는 경우이고, 진중한 시는 젊은 날의 반짝이는 재기가 아니라 자아와 타아의 삶을 깊이 사색하는 걸음걸음에서 엉킨 오랜 내공에서 우러나오고, 또 그렇게 할 때 시가 비로소 청춘의 문학이 아니라 생애의 문학이 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철석같으니, 비록 문단의 변방에 위치한다 해도 ‘인부지이불온불역열호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내 소년시절부터 시작된 문학에 대한 관심이 문청시절을 거쳐 장년시절을 통과하더니 이제 노년시절로 접어들었다. 문학의 길을 걷는 많은 동지들이 그러하듯 나도 초기 습작기와 중기 습작기간 내내 참담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내게 시는 투철한 자기응시였다. 집요하게 내면을 응시하면 샘물이 차츰차츰 차올라 저절로 넘쳐흐른다는 맹신만을 가졌다. 재주가 모자라는 걸 진작에 알고 시를 포기했다면 편케 살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무언가 모를 강렬한 욕구가 내면 저 깊숙이에서 치받아 오르는 바람에 도저히 안온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안온한 것도 아니다. 재주가 없다보니 시로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학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이모의 머리털이 되었다. 정상적으로 문학공부를 배웠다면 훨씬 쉬운 길을 걷고 좋은 시를 많이 썼을 텐데, 실업계 고등학교와 낭인시절, 그리고 교대시절과 군대시절, 또 호구에 바쁜 초등학교 교사생활에 골몰하는데다가 본래 성격이 청강스럽고 고집스러우며 자존심이 강하다보니 배움과 사귐이 넓지를 못했다. 그러다보니 경험과 식견이 쪼글해지면서 시도 생기를 잃고 말았다. 스승을 모시고 정규로 문학을 배운 게 아니라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서 자득하다보니 깊고 견고한 이론은 없다. 단지 영감이랄까, 시는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피로 그리는 것이라는 느낌 하나만을 붙들고 예까지 왔다. 그래서 유창한 시론을 대하면 괜히 지근지근 골치만 아프다. 정치한 이론과 견고한 구조를 가진 시론을 갈파하는 논객들을 보면 ‘야 저 정도로 이론에 밝으니 시는 얼마나 잘 쓸까?’ 부럽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쓴 시는 내 수준으론 참 난해하다. 내가 볼 때는 삶에 대한 통찰력보다는 미학적 이론만 승한 것 같은데 많은 시인들이 그러한 시를 높이 치고, 대학 강단문학론에서 주류를 이룬다.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시단에서는 창작과 평론이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도 이 둘이 혼재되어 편리하게 쓰인다. 그리하여 작가, 평론가, 독자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생산자와 중개자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작가가 소비자와 중개자의 요구에 따라 물건을 대량생산 해내는 공장공업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시란 게, 아니 정신작업인 예술, 학문, 종교까지도 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성과 전문성이란 두 개의 큰 흐름을 이룬다. 정신문화론자들의 논문 결론은 그 둘의 조화가 상투이지만, 더 엄밀히 논한다면 그 둘은 영원한 평행선이다. 평행선이라야 개념과 적용이 분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화론을 주장하며 초점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좁혀서 시만 보더라도, 전문성이 높은 시는 극소수 시인들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대중성이 높은 시는 잘 팔려 거금을 손에 쥐기도 하고 유명인이 되어 이리저리 강연 다니며 존경을 받는다. 잘하면 대학교수도 쉽게 되고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는 관운도 거머쥘 수 있다. 그래서 ‘시인 + 대학교수 + 평론가 + 감투’가 완성되면 전문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췄다고 공인받는다. 그런데, 큰 흐름 중 하나인 전문성이란 난해한 시론공학으로 만든 기계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직접 몸으로 생산한 생물시를 말한다. 생물시란 김소월의 시가 갖는 대중성과 이상의 시가 갖는 난해성의 교감이 아니라, 시가 언어로 표현되는 미학 예술의 정수란 기본에 충실할 때 자연히 응결되는 구름이다. 대부분의 나날 동안 그 구름이 그냥 한 하늘을 흘러가지만, 옳게 엉키면 뚝뚝 비 되어 삼라만상을 촉촉이 적신다. 구름이 어찌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는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는 것은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뿐이다. 그 매연은 대량인구의 시대가 요구하는 대량서정용 구름 과자일 뿐, 비를 만들지 못한다. 젊은 날에 들었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수십 수백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언뜻 손바닥에 생기는 꽃이 바로 시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오십 대 이후부터 머리털 다 빠지도록 골몰한 덕분에 날꽃은 아니지만 종이꽃을 만들어 일반시집 한 권, 초등학교 연작시 두 권, 산문집 두 권 분량을 정리하며 출판 준비 중이다. 또한 넓게 보아 문학 영역에 걸치기도 하지만, 시골생활을 시작한 1986년의 30대 초부터 논어부터 한문고전을 독학하기 시작해서 그럭저럭 한 20여 년 꾸준히 하다보니 문리가 약간 틔어 공부가 손가락 한 마디 남짓 발전한 덕분인지 학문집 세 권 정도 펴낼 분량이 축적되었다. 이걸 보면 내 팔자가 늦깎이인 게 확실하다. 이 넋두리의 제목을 ‘산맥 속에서 춤추는 학’이라고 했는데, 고향 집 배산 이름이 무학봉이다 보니 짐짓 차용한 거고, 내가 학 만큼이야 훨씬 못 되지만 춤 흉내라도 내다가야 안 되겠나 하는 생각이 요즘 자꾸 든다. 그런데 춤추는 학이 맞긴 맞는데 발목이 묶여 있다. 주욱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이 아니라, 태백의 산줄기가 남으로 내리치다가 꽈악 한 번 조였다가 확 푼 산이 무학봉이다. ‘꽈악 한 번 조였다가 확 푸는’ 부분은 바위 절벽으로 고등학생 때 내가 이름 지어 龍鄕原이라 하였다. 그런데 곧 착공 될 삼척 가는 4차선 도로가 그 조인 부분을 치고 나간다고 한다. 그러면 발목을 묶고 있는 줄이 끊기고, 수천 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학은 한 바탕 화려한 춤을 추고는 소천을 따라 도호까지 간 다음, 어느 선비가 운둔하였다는 제비산의 음기를 충전하여 일단 낙동강 상류를 타고 이륙비행을 하다가 안동쯤에서 우뚝 비상하여, 북영남 땅 곳곳에서 비상한 여러 학들과 함께 훨훨 구만리 장천을 날아갈 것이라는 쾌. 두 해 전에 명퇴를 한 덕분에 이제 나만의 시간을 한껏 가질 수 있으니, 숨 질 직전까지 펼쳐질 후기 습작기 동안 화려하게 살면서 내 마음에 꼭 드는 시 세 편만 썼으면 좋겠다. 자연과 인간이 고르게, 적당하게, 알맞게 교감하는 시, 자연의 아름다운 의미를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거나 대변하는 시, 인간의 아름다운 의미를 자연의 언어로 표현하는 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잇는 시, 본질이 현상의 원천이며 진실이란 현상이 본질에 충실할 때임을 증거 하는 시, 제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언하는 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진화가 선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믿음의 시를 쓰고 싶다. 무겁고 둔탁한 언어가 아니라 가볍고 낭랑한 우리말로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을 부르는 시를 쓰고 싶다. 열 살 남짓 때 먹은 <향수>의 감동을 더 진하게 해서 후인에게 전달하고 싶다. 큰 학재가 없고 예리한 관점은 미숙하지만, 기존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정수를 체득한 다음에 나만의 학설을 정립하고 싶다. 나의 학설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월등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보통 정도는 된다는 후인들의 평가와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우주의 침묵에 속상해 하는 인간들에게 한 줄기 이해의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고,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아파하는 의식인들에게 한 가닥의 치유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이왕에 성리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더욱 궁구를 심화하여 ‘근거와 치유’의 묘책을 찾아내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하여 형이상학이 유형화 될 수 있음을 내 생애에서 증명할 수 있을는지. 연못에 떨어진 낙엽 한 닢이 그리는 동심원이 조용히 퍼져나가고, 물이 넘치면 흐르듯이 내 마음에 흡족한 시라면 남의 마음에도 흡족할 것 아니랴. 학문에서도, 천성이 아둔한 자이다 보니 화려한 명예는 없을 것이지만, 반백이 전백이 되도록 공책시집과 일기장에서 에너지를 보충 받으며 한 시와 한 학문을 마침내 이루어, 후인들로부터 ‘춤추는 학의 산’ 舞鶴峯이 낳은 시인이자 학자란 소리 듣고자 하나 글쎄. 水禪 어르신이 실수하신 모양이지요 화장실 바닥에 미처 두 점 괄약근을 지나 노천탕에 앉으니 꼭 맞다 둥둥 뜨는 몸 늘 무게를 받기만 하던 하체가 따뜻한 물에 상체를 띄우고 휴우 좀 쉬자 머리칼 다 빠지고 추리하기만 해 좀 깔끔해야 하는데 내가 할 소리 남이 하는 혼자 말 들으며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옷을 입는다 2013년 1월 23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開山兩白 박 희 용 넋두리하다 약력 1. 1954년 6월 14일 경북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출생 2. 안동교육대학, 대구교육대학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과 졸업 3. 1978년 대구매일신문 4월시단에 「비비추새」, 1979년 영남일보 3월시단에 「필부가」, 1981년 영남일보 7월시단에 「강 언덕 너머에는」 발표로 작품 활동 시작 4. 1982년 ~ 1985년 안동에서 임명삼, 서정오 등과 문학동인회 <말ㅆ․ㅁ> 활동 5. 2000년 7월 시집 『霜寒圖』( 도서출판 그루) 발간 6. 2001년 3월 『교단문학』 제31회 신인상에 시 「바람 부는 날」, 「풀」, 「神詩 ․ 5 인 간의 싸움-」으로 당선 7. 2010년 『兩白集 秋 疏論筆談』(주)에세이퍼블리싱) 발간 8. 2005년부터 <경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회원.  
23 (남태식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034 2012-12-26
 몽상가들의 마을 몽상가들의 마을에서는 몽상이 비처럼 음악처럼 또 신화처럼 흐른다. 신화는 데카메론의 시절 수세기동안 내와 강과 바다를 넘나들며, 빈번한 급사 객사 과로사로 한 대륙을 휩쓸어 인적 드문 마을로 새 판 짜던 토스트. 도시에서 세차게 일어난 신화는 하수구를 거쳐 운하를 타고 시골과 숲과 사막까지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신화에 자발적으로 감염된 몽상가들, 쥐 먹은 토스트를 삼키고 미처 봄 오기도 전에 공든 탑 부수고 나가 봄날 꽃노래에 취한다. 신화는 이제 몽상가들 마을의 최선의 주식. 신화에 얹는 아빠의 손맛으로는 부자와 성공이 단연 으뜸. 몽상가들은 부자와 성공을 곁들인 신화 식탁으로 온 몸 다 밀어 한껏 줄기를 뻗는다. 가난의 맵고 쓴 맛 씹든 씹지 않든 신화 토스트 전염에 적극 자원한 광신화 바퀴들, 부자와 성공의 광고판을 높이 달고 이리저리 행을 걸치며 우물우물 빠르게 말 굴리며 달리는 밤. 신화 토스트 뼈 속속 침투시킨 몽상가들, 봄여름가을 부지런히 잎 주고 꽃 주고 열매 주고도 깊은 잠에 드는 겨울마저 깨워 쉴 사이를 잊는다. 온 줄기에 주렁주렁 살과 피를 태우는 조팝꽃등 달고, 슬쩍 연을 걸친 부자와 성공의 신화 문장 틈에서 덧쌓이는 피로 맨몸으로 견디며 억억, 틔는 열꽃 밤새 터뜨린다. (2009. 02) 오늘은 오늘은 꿈이 자살처럼 솟는 날이다. 오늘은 꽃이 기절처럼 터지는 날이다. 오늘은 봄이 비명처럼 틔는 날이다. 오늘은 저 먼 길의 끝을 당겨 우뚝, 절벽을 세운 날이다. 짧고 뜨거운 봄 여름 가을 꿈결인 듯 지나쳐 차고 거친 긴 겨울을 문득, 덥석, 안은 날이다. 돈에 휩쓸려 애써 잊은 만성두통을 찾은 날이다. 우리 미처 잠을 다 깨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봉오리를 다 빚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화음을 다 맞추지 않은 날이다. 당긴다고 당겨온 길의 끝이 벼락처럼 꺼져 오가는 길 모두 돈처럼 가르는 날이다. 오늘은 잠도 꿈도 아닌 잠에서 깨어 다시 깊은 잠을 자는 날이다. 올곧은 꿈을 꾸는 날이다. 사철 숨과 숨을 이어 환하게 터지는 꽃, 다시 씨앗을 뿌리는 날이다. 오래 함께 환호하며 부를 봄노래, 다시 목청을 가다듬는 날이다. 꿈이 이미 자살처럼은 솟지 않는 날이다. 꽃이 이미 기절처럼은 터지지 않는 날이다. 봄이 이미 비명처럼은 틔지 않는 날이다. 돈으로 일찍 늙힌 민주 회춘하여 오늘은 굽은 머리카락 허리 펴는 날이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해보는 날이다. (2009. 05) 아니오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2010. 01) 벗다 무덤에 안 드니 경칩 지난 눈바람도 무지 매섭다. 골골 휘저으며 눈발로 등성이를 내리 뭉개니 시려 가슴을 웅크려 오므린다. 눈밭에 몸을 숨기니 겨울은 아무래도 못 건넌다. 무덤에 드니 한겨울의 칼바람도 다소곳하다. 찬 기운 오래 일도록 밤새 빚은 눈의 뼈 굳히지 않고, 잠깐 든 햇살에도 모두 삭힌다. 무덤에 몸을 묻으니 겨울은 아무튼지 건넌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다 벗는다. (2010. 04) 앓는 강 막무가내 모래를 퍼 올리는 기계소리에 꿈이 어지럽다. 없는 무덤에서 고려장 당한 주검으로 웅크려 숨을 졸인다. 물길을 막으니 오탁에 썩어 찌든 눈언저리의 검은 그림자가 두껍다. 오랜 선잠에 샘이 끊어진 마른 눈이 쓰라리다. 인공샘물을 채우고 더듬거리며 꺼풀을 찢는다. 보일락 말락 언뜻번뜻하는 눈동자는 맑은 하늘을 담지 못 한다. 오래 하늘을 품지 못한 눈동자는 녹이 슬어 벌겋다. 인공샘물은 밑 빠진 독이다. 묻지 마 관광에 묻지 마, 미래를 저당 잡아 당겨쓰는 이 누구인가. 마침내 밑 빠진 시멘트 독에 취해 실명하니 첫 키스의 풍경을 다 잃는다. 미래가 가뭇없다. (2010. 04) 무너져라, 벽! 큰 집 대문과 무덤 사이에 벽이 있다. 귀를 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벽은 눈을 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벽은 입을 잃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벽은 번듯한 군대마냥 나름 꿋꿋하고 도시에 쏟아진 폭설처럼 호들갑스러우나 시방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춘 피로한 식물이다. 가로막은 벽 이 편 무덤가에는 큰 집 대문을 향해 나아가는 무덤을 뛰쳐나온 거듭 거듭나는 여러 무리의 새 아이들 벽을 무너뜨려라. 쿵!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앞서며 땅을 밟으니 쿵! 쿵!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뒤이어 땅을 밟고 쿵! 쿵! 쿵! 또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연이어 땅을 밟는다. 무너져라, 벽! 무너진다, 벽! (2011. 01) 양치기 이 양치기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착한 양치기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노을을 등진 늙은 양치기 (근대화양치기친일양치기반공양치기사대주의양치기신자유주의양치기시장만능싹쓸이양치기자유민주주의양치기역사망각노예육성양치기......) 수시로 붉은 안개 속에 얼굴을 감추고 이념의 모자를 바꾸어 써도 모자 아래의 이마는 늘 탐욕으로 번지러워 근본은 전혀 바뀌지 않는 1% 기득권자 들판 가운데 버려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잃었다는 한 마리의 양까지 끝끝내 찾아서 가두네. (2011. 10) 꽃과 새가 있는 집 1. 꽃들이 창백하다. 이 집에 든 꽃들이 창백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름만으로도 앞뒤 어떤 꾸밈말 없이 색깔만으로도 어울림만으로도 어여쁘고 빛나는 이름들이 이 집에 들어 창백하다. 하늘의 무지개 하늘의 별도 이 집에서는 경쟁이다! 전쟁이다! 모두, 창백하다. 2. 일요일, 봄맞이 산행을 갔다. 마른 나무껍질을 비집고 틘 어린 새들을 보았다. 무엇을 버티는 것일까, 날개를 한껏 오므린 어린 새들. 내려올 때 보니 올라갈 때보다 더 날개를 말며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뒤집힌 계절의 깡 추위와 오랜 가뭄이 이 어린 새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감옥이구나, 무덤이구나. 뒤이어 떠오르는 아이 생각. 0740 0730 0720 0710 0700 에서 2300 2310 2320 2330 2340 까지. 아이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학교에 갔다. 3. 나의 꽃잎, 너의 꽃잎, 나의 깃털, 너의 깃털, 하나만이라도, 창백한 꽃잎, 오므린 깃털, 그러하더라도,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자꾸 내밀고 또 내밀게 바꾸면, 처음엔 한 이파리 스치듯 지나는 가벼운 바람일지라도, 내민 꽃잎 내민 깃털 함께 꼭 잡게 바꾸면, 협력의 물결 고요하게 일렁이고, 공생의 바람 반란처럼 온 이파리 흔들어, 마침내 바뀌는 집, 마침내 따라 다 바뀌는 세상. 우선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2012. 06.) 숨은 꽃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 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손닿을 수 없는 벼랑 끝의 영원히 손닿지 않는 꽃이다. (2012. 07) 하늘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실직한 30대 전직회사원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무직의 20대 청년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술에 취한 일용직 30대 노동자가,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분노한 30대 전직회사원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절망한 20대 청년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술에 취해 자포자기한 30대 노동자가,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뭉뚱그려 우리는 이 모두를 묻지 마 범죄라고 부른다. 묻지 마 하류, 묻지 마 벼랑 끝, 묻지 마 칼부림, 묻지 마...... 퇴근길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는 분노한 하늘이, 오후 울산의 단골가게에서는 절망한 하늘이, 심야 수원의 어떤 가정집 거실에서는 자포자기한 하늘이, 칼을 휘둘렀다. 모두 지난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2012. 09)  
22 (남태식 시인)시작노트 - 안개, 무덤, 안개무덤, 시
편집자
2503 2012-12-26
 안개, 무덤, 안개무덤, 시 안개 안개는 산에서 내리고 바다에서 오르고 강에서 핀다. 안개는 뱀처럼 기어 골목골목으로 스며들어 온 동네 휩쓴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흐르는 안개 물러가지 않는다. 물러서기는커녕 내 몸속까지 들어와 살림 차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눈 뜨고 안개의 얼굴 두드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에 안개 섞고 비빈 안개의 밥 먹는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문 열고 안개의 길 떠난다. 안개는 성큼성큼 앞서서 간다. 안개의 뒤 따른다. 어느 사이 안개 사라진다. 사라졌다가 어느 사이 또 허둥대는 내 뒤에 다가와 가볍게 등 떠민다. 안개와의 동거는 즐겁다. 아늑하게 아름답다. 안개 속에서 안개의 베개 배고 안개의 이불 덮고 안개의 잠잔다. 안개의 잠 속에서 꾸는 안개의 꿈은 달다. 안개의 꿈속에서 안개의 시 쓴다. 안개 향한 시 쓴다. 안개의 시는 달다. 안개와 나는 찰떡궁합이다. 안개 속에서 밤새 헐떡이며 무기 벼린다. 아침이 되면 무기는 곧 안개 속으로 스며든다. 안개 속으로 스며든 무기는 힘을 잃는다. 무기는 곧 안개가 된다. 내가 벼린 무기는 좀체 무기가 되지 못한다. 안개의 칼날은 날카롭다. 안개의 몽둥이는 무지하다. 애써 잡고 있으려 하면 안개의 칼날에 손 베인다. 안개의 몽둥이에 가슴 멍든다. 안개와의 동거 달아도 안개 돌아서면 스스럼없이 떠나보낸다. 그리고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산모퉁이 돌아 바다 건너 강물 거슬러 또 다른 안개 내게로 기어온다. (2007. 03) 무덤 오랫동안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다. 무덤가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시를 쓴다. 애써 무덤가를 떠나라, 떠나라, 언제나 속삭이는 삶을 위하여 언제나 무덤가를 떠나지만, 또 번번이 다시 무덤가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시를 쓴다. 느껴서 떠나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이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이 무덤가에서 마시는 술은 무덤의 술이다. 이 무덤가에서 부르는 노래는 무덤의 노래다. 이 무덤가에서 꾸는 꿈은 무덤의 꿈이다. 해서 이 무덤가에서 쓰는 시는 당연 무덤의 시다. 언제부터 이 무덤가에 머물렀을까, 언제부터 이 무덤가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을까, 생각해본다.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난 뒤인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전 내기로 결정한 때쯤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님, 어쩌면 처음부터 이 무덤가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 무덤가를 떠나 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 이전 무덤가에 대한 기억과 반복해서 무덤가를 떠나고 돌아온 기억이 없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 기억이 아니라 애써 지운 기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운 기억은 지운 기억일 뿐 어떠한 경우에도 없는 기억은 아니다. 오늘도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다. 서성이며 시를 쓴다. 몸은 때로 이 무덤가를 착각처럼 떠나 바쁘게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시간에도, 시만은 고집스럽게 이 무덤가를 서성이게 하고 시를 쓴다. 무덤의 술을 마시며, 무덤의 노래를 하며, 무덤의 꿈을 꾸며, 시를 쓴다. 당연 무덤의 시를 쓴다. 무덤의 꿈이 되는, 무덤의 노래가 되는, 무덤의 술이 되는, 무덤의 시이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술이 진정이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노래가 진정이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꿈이 진정이다. 해서 이 무덤가에서는 당연 무덤의 시가 진정이다. (2012. 01) 안개무덤 지금은 무덤에 안개가 짙다. 온갖 먼지들이 겹겹이 껴있는 안개다. 안개에 껴있는 먼지는 오래된 먼지다. 과거의 논리로 따지자면 한편 굳건한 먼지이기도 하다. 이런 먼지와 안개가 뭉쳤으니 안개는 너무 두꺼워 애써 벗기려 한다고 쉽사리 벗겨질 것 같잖다. 해서 이제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라 안개무덤이다. 이때껏 무덤이라도 보려고 하기만 하면 보기는 했으나 안개가 너무 두꺼우니 이제부터는 보려 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무덤이 무슨 잊지 못 할 애인이라고 못 보는 것이 서러워 무덤 속으로 뛰어들 일이야 없겠지만, 무덤 앞에서 무더기로 봉사 귀머거리 벙어리가 될 수도 있으니 이건 서러워 아니할 수가 없다. 잠을 설친다. 속은 쓰리고, 하루, 이틀, 사흘, 연속해서 잠을 설친다. 잠이 대체 내게로 올 생각을 않는다. 오는 잠이야 애써 쫓을 일 없겠지만 아예 오지를 않으니 이건 또 어쩔 도리가 없다. 해서 잠을 설친다. 갔으면 싶은 속 쓰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잠은 대체 오지를 않아, 나흘, 닷새, 잠을 설친다. 그리고 오늘은 이렛날이다. 잠을 가로막은 벽이 무너진다. 이 잠의 벽을 무너뜨린 건 무엇이었나. 아니 이 잠의 벽을 쌓은 것은 무엇이었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중요한 건 벽이 아니라 끝, 시작의 반대편에도 있으나 옆자리에도 있는 끝,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잠은 기절처럼 와서 강물 깊이 가라앉는다. 14시간을 내쳐 잔다. 자고 일어나 생각한다. 안개가 짙을 때는 안개의 시를 쓰고,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시를 썼으니, 무덤에 안개가 덮였으면 안개무덤의 시를 쓰자. 시작이나 희망 같은 상투적인 말없이 여태처럼 본대로의 시를 쓰자. 해서 이제부터 쓰는 시는 안개무덤의 시. 이것이 그 첫 안개무덤의 시다. (2012. 12)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21 (박승민 시인) 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265 2012-11-23
 늦가을 볕의 임종 늦가을 볕의 긴 손가락이 허공을 가만히 감았다 놓았다하는 사이 뒷산 갈참나무숲에는 누가 죽어 가는지 흙이 붉어 가는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장수반점을 지나 흥농종묘를 지나 고추밭에 든 추월댁 체육복 등에 기대인 채 둘은 한참동안 따사로운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잡을 수 없어 늦가을 볕은 늦가을과 함께 자꾸 늙어가서 수숫단 꼭대기 잠자리 마지막 날개 위에서 한 줌 골고루 金光으로 번진 後에야 턱, 숨을 내려놓는데 체육복 등엔 어둠이 파스처럼 한 장 붙는데 그루터기 문신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의 차상위계층 안방 장롱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가 물고 있는 것은 얼음조각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식한 뿌리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있는 그루터기들 아직은 배후를 말할 수 없다 누런 설탕에 쟁여둔 까칠 복숭아 달이 서에서 동으로 기울 때 체액을 자꾸 밖으로 게워낸다. 마지막 병상에서는 너도 물 한 모금도 거절했지. 뼈를 간신히 감싼 살가죽만 남아 糖위에 붕 떠있다. 滿月은 자기의 노르스름한 배후만 남기고 어느 구름 속으로 져버렸는가? 살을 받은 糖이라든가 화장장, 너를 태우고 날아간 연기 같은 것을 아직은 너라고 부를 수 없는 이 푸릇푸릇한 기억의 얼굴이 고무줄처럼 풀렸다가는 다시 되돌아오고야 마는데 마지막 힘 고구마를 걷어낸 밭에 상강서리가 내리던 날 늙고 썩어 버려두었던 사과나무에 활짝, 하얀 꽃이 피었다. 3년 내내 풍으로 앓아누운 주영광 씨 어느 날 번쩍, 눈떠 자기 마누라 한번 쓱 보더니 머라고,,, 한 마디 하더니 그 길로 세상을 떴다. 저 미안하다는 한마디 결구를 맺고자 참으로 오랜 세월 혼자서 무던히도 참고 몹시 아팠던 것이다. 무릉(武陵에서 길을 잃다 노모가 風으로 입원한 유리한방병원은 거대한 명부전冥府殿 같다. 열두 개의 침상에는 머리에 소복하게 눈 맞는 보살들이 산국山菊처럼 앉아있다. 현재와 과거로 가는 모든 실핏줄들은 끊겼는지 가끔씩 마른 손톱으로 식탁을 치는 목탁소리만 경내를 울린다. 이따금 주사바늘이 엉덩이에 죽비를 칠 때말고는 좀처럼 감은 눈을 뜨지 않는다. 종당에는 찾아온 아들까지도 영영 잊어버리고 무념무상이다. 가끔씩 노모의 눈을 들여다보지만 그 깊은 우물까지는 두레박을 뻗을 수 없어 나는 안절부절이다. 세상을 한 순배 돌고 온, 말을 버린 입술과 표정을 비운 얼굴로 길을 일러주지만 또 그 길을 읽을 수 없어 쩔쩔맨다. 이정표를 보니 이곳이 무릉武陵*이라 한다. * 경북 안동시 무릉면에 있는 지명 결 당신의 流速은 너무 빨랐습니다 그럴수록 당신의 몸에 내 몸 섞으려는 제 마음의 보폭은 더 성급해져서… 저는 차창 밖에서 가만히 낯익은 발소리만 기다리는 항시 어떤 정거장일 뿐이었습니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전봇대에 매인 벽보 한 장의 삶일 뿐이었습니다 城밖 민박집을 나와 강둑을 걷다 보았습니다 강물의 속도가 얼음의 속도와 꽉 물려 있는 아주 편안한 체위로 흐르는 강물의 결 위에 자신의 몸을 슬쩍 얹고 눈부신 陰刻으로 만나는 어젯밤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요? 下流의 시 다가오는 것은 下流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를 견뎌준 건 먼 과거의 어느 시간쯤에서 만난 한 순간 순간의 火印 以後는 물에 갇힌 수몰주민의 생이었고 때로는 이미 지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어떤 多福을 나는 무성의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루가 습속이 된 이 가죽옷에도 나비의 날개가 헌 눈처럼 부서지고 시계를 보지 않아도 다가올 시간을 예감하는 나이 첫 소절만 들어도 노래의 끝을 개괄할 수 있는 나이 임종이 최후의 목적지가 아니어도 알고 보면 모두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지나가는 下流의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흘러가지 않는 바람이 없었고 머물 수 있는 바람도 없었고 花氣 - 능소화 먹물 담뿍 적신 구름 떼 옥수숫대 바싹 마른 수염을 채색하는 늦여름 양조장집 뒷담 보초 서던 능소화 저 환한 주홍빛 일주문 열고 들어가면 미련도 미련 없이 해탈할까? 허공의 本殿까지는 사방팔방 문살 가장 먼 순례는 자기 내부로 뻗은 길 문짝을 뜯는 안간힘이 반짝 꽃술 필라멘트에 등불 켜지만 풀린 염주 알처럼 뒹구는 몸들 그 육즙 위를 뭉개며 마시며 늙은 구렁이 대낮부터 취해 담벼락 빠져나가네 천공天空 스물두 살 때 폐에 구멍이 생기는 기흉氣胸을 앓은 적 있었지 웃으면 가슴이 바늘로 찔린 듯 그래서 웃음의 바깥으로만 돌아다니던 시절 어찌어찌 不惑 지나 天命을 알리라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는 아직도 반 뼘 바람구멍이 있는 듯 채우자마자 휙,,, 휘리리,,, 풍선처럼 빠져나가는 천공天空이 숨어사는 듯 늘 복대를 하고 깻단의 마른 몸 이쪽저쪽을 옮겨 놓으시는 음지마을 할매의 몸속에도 그런 살바람 쿨럭이는 구멍이 있는지 흙바닥이 거울인양 서울로 공무원 살러간 아들의 주름살도 보이고 중증장애 손녀도 보이고 종종 영감도 다녀가시는지 오늘은 부처님의 영험까지도 고구마줄기처럼 내려오시는지 흙의 법당 마루로 자꾸 고개를 숙이는데 숙이기만 하고 가끔은 고개 드는 것도 깜빡깜빡하시는데, 삼배 삼백배 일만이천배를 느릿느릿 채우고 내려가는 고샅길 너머 빨리 온 가을, 빨리 늙는 은행나무 옹이 곁으로 한창 불붙은 맨드라미들 짙붉은 융단을 펼쳐들고 겹겹이 벽을 두르고 있는데 살구나무의 길 당신과는 거친 눈길 한번 흘긴 적 없습니다 당신이 하루 종일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저도 순한 초등생처럼 얌전해졌습니다 어쩌다 당신이 우수수 흔들리며 바람의 말 몇 마디 짧게 건네면 저도 포도씨 같은 말 몇 마디 조용히 뱉어냈습니다 나의 그늘이 너무 짧은 여름날 당신은 긴 어깨로 저를 감싸고 저는 제 마음을 당신에게 보낼 줄 몰라 긍긍하였습니다 아직 나에게는 이름이 없는 당신 흔하디흔한 그 나지막한 등성이 아직도 분홍 웃음으로 서 계신가요?  
20 (박승민 시인)내가, 나를 말한다면
편집자
1618 2012-11-23
 내가, 나를 말한다면─『지붕의 등뼈』(푸른사상사, 2011) 박승민 *문학적 모태 유년기, 남들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학을 가서도 그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수시로 변할 수 있는 보호색이 없었던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얼굴색부터 붉어져서 늘 낭패였다. 말투에는 억센 경상도 방언들이 출신성분을 한눈에 알아보게 했다. 그런 선병질적 촌놈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감히, 도무지, 어쩌자고 문학회 문을 두드렸다. 나나무스꾸리를 닮은 생머리의 여자 선배가 담배 연기를 이쪽으로 날리면서 선문답을 걸어왔다. 他: “아가, 여긴 머더러 왔냐?”我: “시쓸라고요”他: “니가 시를 알간?”我: “모르는데요---”他: “언제까정 쓸거시여?”我: “평생 쓸건데요” 그 대답을 듣자 그 나나무스끄리 선배는 피식, 웃었다. 용기만 가상하다는 듯… 그때부터 열심히 써클실 웨이터로 살았다. 선배들은 문학 대신 술을 가르치려 덤볐다. 시집 대신 사회과학서적을 놓고 언어의 적절성 여부를 따졌다. 소주병이 화염병이 되었고 교내 보도블록들이 짱돌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주 당연히 나는 나의 문학적 모태신앙은 80년대 중반, 그곳에 있다고 믿는다. 1 최루탄이 등꽃처럼 터지던 날 143번 버스가 학생회관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대가 있는 대학극장 4층 목조건물까지는 이 세상 가장 긴 일주문 낡은 중세의 유리창 위로 일몰의 서해가 황금 도가니탕처럼 끓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原典 사랑이지만 그대가 앉아있는 무대 위 불란서식 고급살롱에는 소작농의 후예가 오를 수 없는 곳 ―「등꽃」 부분 *청산가리의 문제 고등학교 다닐 때, 민음사의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가 책장에 있었다. 형이 보려고 사다놓은 것인지… 어쨌든 숫자개념에 태생적 장애를 안고 있던 나는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대신 그 시집을 뽑아들었다. 혁명, 설움, 고독, 비애, 자유… 라는 이 이방인의 언어는 나를 단칼에 때려눕힌 주술적 방언들이었다. 나는 한 단어가 한 젊은이의 행로를 역주행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동안 멍, 했다. 대학 입학 후, 역시 민음사의 『김수영산문집』을 알았고 역시나 행간의 의미는 무시한 채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이 문장에 걸려서 또 낑낑거렸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통과할 수 있을까? 죽으면 가능할까? 폐결핵과 우울증까지 겹쳐 청산가리를 사러 청계천 근처 화공약품 상회를 배회했다. 죽음이 허무와 닿아 있는 듯도 했다. 허무가 초월과, 초월이 혁명과 닿아 있는 듯도 했다. 결국 김수영 식으로 “죽음은 자유다”라고 속단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변적(思辨的)으로 내 내부는 사변(事變)이 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죽었다. 1996.3.16 생~2004.12.14 몰(沒). 너무 짧았다. 그 아이의 죽음 이후 사변적 죽음이 구체적 죽음으로 턱밑까지 차올랐다. 이제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 요즘은 죽음을 기다리지도 재촉하지도 않는다. 오면, 그냥 받을 뿐이다. 전봉준이 희끗희끗, 나무 가마 타고 눈발의 검(劍)을 받듯. 아이는 방안에만 누워 있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우연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인간이 무엇을 예측할 수 있을까 그는 대답도 없는 질문을 혼자 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의 고무줄이 너무 빨리 당겨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 내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生은 어차피 낯선 여인숙에 들러 누군가 죽어나간 이불위에서 생시처럼 一泊하는 것 아이는 갱도 같은 식도가 점점 막히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 부분 *눈부신 음각(陰刻) 어찌어찌해서 시집을 냈다. 피라미드구조로 되어 있는 한국문학의 상층부부터 원고를 투하해서 낙방하는 동안 자존심도 좀 상했다. 작심3일이듯 그러나 상처도 3일만에 잊기로 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삶이 기본적으로 “찬 도시락 싸들고 공공근로 나온 행위”이거나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전봇대에 매인 벽보 한 장의 삶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시간들이 나에게 희망이랄까, 전망이랄까, 뭐 그런 것들을 조금씩 버리게 했다. 그 결과 내가 하향지향적 희망수치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별 불만도 없다. 다만 살아가는 날까지 강과 얼음이 한 몸으로 만나는, 나와 당신이 눈부신 음각(陰刻)으로 만나는 그런 희한한 장면 한 두개가 더 내 생애의 목록에 추가된다면 아주 밑지는 삶은 아니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당신의 流速은 너무 빨랐습니다 그럴수록 당신의 몸에 내 몸 섞으려는 제 마음의 보폭은 더 성급해져서… 저는 차창 밖에서 가만히 낯익은 발소리만 기다리는 항시 어떤 정거장일 뿐이었습니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전봇대에 매인 벽보 한 장의 삶일 뿐이었습니다 城밖 민박집을 나와 강둑을 걷다 보았습니다 강물의 속도가 얼음의 속도와 꽉 물려 있는 아주 편안한 체위로 흐르는 강물의 결 위에 자신의 몸을 슬쩍 얹고 눈부신 陰刻으로 만나는 어젯밤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요? ―「결」 전문 ─『시에』 2011년 겨울호 박승민 경북 영주 출생. 2007년 『내일을여는작가』로 등단. 시집 『지붕의 등뼈』.  
19 (최기종 시인) 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1427 2012-10-21
 뱀사골 지리산 하산 길에 뱀사골 병풍소 계곡물에 아내는 땀을 씻었다. 청류수(淸流水) 물방울 듣는 아내의 얼굴에는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여름날, 기나긴 오후의 햇살이 눈부셔 깜빡 눈을 감았다. 새가 떠난 자리 새가 떠난 자리 새가 없는 자리 나도 없고 나뭇가지만 흔들립니다. 나도 없고 활시위만 마냥 떨어댑니다. 고드름 겨울밤이었다. 아버지가 따온 고드름 양푼에 가지런히 담긴 눈물의 크리스탈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동생도 하나씩 입에 넣고 깨물었다. 올해는 틀림없이 풍년이 든다고 이가 시리도록 으득으득 씹었다. 약손 어머니 아들놈 횟배 앓으면 아픈 배 슬슬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 시진만 문지르면 아들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천번만번 만져주면 방정떨던 회충이 꽁무니 뺐고 아픔도 불안도 짜증도 사라졌다. 그렇게 하늘도 감동시켰던 것이다. 슬슬 쓰다듬는 손이 신들린 듯이 횟배 안팎을 오가면서 환부도 씻어내고 통증도 감싸주고 그 손으로 밤을 밝혀 빛을 내면 아들놈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배고프다고 왜장쳐댔다. 지금도 어머니 아들놈 배 아프다고 하면 대바늘 내려놓고 손부터 내민다. 임종 병상에서 어머니 새로 태어나고 계셨다. 동쪽으로 머리를 두시고 쪽머리 곱게 단장하시고 껍질에서 깨어나려고 참꽃 되려고 몸살하고 계셨다. 꽃잎 지는 오후였다. 아직도 창문 너머 봄꿈이 푸르른 데 어머니는 이제 탄생의 환희를 염려하는지 호흡이 가파라지면서 지독한 산고를 견디고 계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 연줄이 연줄을 낳고 이제 어머니는 푸른 하늘을 보면서 당신의 당신을 낳고 계셨다. 물거품처럼 어머니가 새로 태어나고 계셨다. 눈에 밟히며 꾸르럭거리는 소화불량처럼 뱃속에서 도무지 나오지 않는 당신의 당신이 아주 천천히 연줄을 끊어내고 계셨다. 환시 돌아가신 어머니 방 가운데 앉아 계시다. 옥색 한복 입고 곱게도 앉아 계시다. 이젠 여기 사람 아니니까 어서 돌아가라고 해도 여기가 당신 집이라고 끄덕도 않으신다. 반갑고 고맙지만 이젠 저기 세상 가야 한다고 애원해 봐도 눈을 부라려도 그대로 앉아 계시다. 이러니 허물할 수 없어서 오늘은 밤이 이슥하니 주무시고 내일 가시라고 잠자리 보아 드렸더니 모로 누워 잠이 드신다. 나도 그 곁에 모로 누워서 이 얼마만인가 이렇게 아들과 자리하는 게 어머니 소원이었던 모양이다. 연리지(連理枝) 은적산 능선 삼거리에서 아내와 둘이서 결이 통한 때죽나무 연리지(連理枝)를 보았다. 살가죽을 맞대고 비집고 들어차서 한 나무가 되어버린 가시버시 때죽나무에게도 사랑이 있었나보다. 연리지 연결부위를 쓰다듬었다. 나무 매듭 거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온다. 다름을 인정하기 위하여 왼 하나가 되기 위하여 20년 겹으로 덧씌운 화해의 육질이었다. 때죽나무에게도 아픔이 있었나보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아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때죽나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굴절되는 호기심이 수관(水管)을 타고 도는데 우리 부부에게도 사랑이 있었나보다. 나무 위의 여자 아침 무렵, 석산(石山)을 오르는 길 산중턱 쉴참마루에서 한아시 굴참나무를 보았다. 아내는 먼동을 본다며 세월의 틈새를 디디면서 ‘나무 위의 여자’가 되었다. 하늘햇살 내리는 황금이파리 가지마다 거미집 이슬방울 아찔한데 ‘나무 위의 여자’가 된 아내는 매미소리 흉내 내고 새소리도 지어내면서 말하는 굴참나무가 되었다. 바람이 흔들고 가는 자리 범접하지 못할 위대함이여. 이제 ‘내 사람’이 아닌 아내 높고 높은 내 머리 위에서 주인처럼 위세를 부린다. 굴참나무 굵은 가지에서 뒤바뀐 권력이 춤을 춘다. 새벽은 온다 가장 캄캄할 때 새벽은 온다. 어두운 밤의 갈기에 완전히 밀리고 절망할 때 새벽은 온다. 그믐밤 긴긴 죽음의 시퍼런 묘지를 열치고 뚜벅뚜벅 걸어서 온다. 가장 두려울 때 새벽은 온다. 족제비 살쾡이 으르렁거리고 검은손이 목덜미 잡아가도 새벽은 온다. 믿음의 깊이만큼 주린 좀비들 몰아내고 양떼들 거느리고 온다. 가장 아파할 때 새벽은 온다. 꽃이 피어나는 아픔으로 온몸으로 피 흘릴 때 새벽은 온다. 이산저산 소쩍새 소리 바우가 깨어지는 감격으로 새벽은 온다. 모래알 바닷가 모래알 그 폭신한 것이 각을 세우고 맨발을 자극한다. 작은 모래들도 저마다 고집이 있는 것일까 짓밟히고 밀리면서도 원각으로 치받는 걸 보면 저렇게 어처구니에게 눌려서 가슴이 빠개지면서도 백악기 연륜으로 풍상의 두께로, 역사로 맞선다. 움푹 파인 자리마다 푸른 하늘 은하수  
18 (최기종 시인) 약력 및 나의 문학의 길
편집자
1799 2012-10-21
 약력 1956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하다. <만경강> 동인, 교육문예창작회 활동을 하면서 1992년 <이 땅의 헤엄 못 치는 선생이 되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무 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가 있으며 현재 목포작가회의 회장, <포엠만경>동인, 전남제일고등학교 교사로 있다. 나의 문학의 길 초등학교 3, 4학년 때 담배은박지를 주우려 다녔다. 학교에서 가져오라고 했는데 그 용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은박지가 많은 곳은 구실아짐 댁이었다. 그 집 문간방 측백나무울타리에는 담뱃갑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우리는 거기 울타리 구멍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은박지를 모았다. 거기 문간방에는 기인이 형이 살았다. 기인이 형은 거기서 소설을 쓴다고 했다. 어쩌다 기인이 형은 우리들을 불러들여서 먹을 것도 주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 햇빛 쏟아지는 문간방 툇마루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 문학과의 처음 만남이었다. 기인이 형은 1년 정도 지나서 문학상을 탔다. 부상으로 송아지를 받아 와서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그날 아버지에게 나도 기인이 형처럼 소설을 써서 송아지를 타겠다고 불쑥 말했더니 아버지는 코웃음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이놈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느리라.”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담임선생님께서 내 글을 뽑아 주셨다. 제목이 <우리 아기>였을 것이다. 그때는 글이라는 것도 몰라서 그냥 일기 쓰듯이 썼는데 그것이 뽑힌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도 <수업시간>을 글제로 시를 썼는데 국어선생님께서 칭찬을 해 주시며 직접 그 시를 읽어 주셨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막내외삼촌이 왔다. 나보다 4살 많아서 형처럼 따르는 외삼촌이다. 그때 외삼촌은 서라벌예고에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연극대사도 외워대고 노래도 곧잘 했다. 그날 저녁에 한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심심하다며 시 읽자고 시집을 찾았다. 그래서 가영이 누나 집에서 빌려 왔다. 김소월의 <<못잊어>>였다. 외삼촌이 곧바로 시낭송을 시작했다. 낭랑한 목소리로 서글픈 가락들이 읊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만 시는 외워서 읽어야 제 맛이라며 나보고 따라 읽으라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외웠던 시가 <초혼>이다. <초혼>의 가락이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진달래꽃>도 <산유화>도 <못잊어>도 외워서 읽었다. 외삼촌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심정으로 낭송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밤을 꼬박 세워서 시낭송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아름다운 밤이었다. 이것이 나의 문학의 뿌리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내 꿈은 부풀어져서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이었다. 그게 어떤 상인지도 모르고 그냥 막연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느리라’라는 코웃음을 받아야 했다. 그런 문학적 열망을 가지고 문학 소년이 되어서 중, 고교를 보냈고 대학도 국문과로 진학했다. 1989년은 나에게서 삶의 분기점이 되었던 해였다. 전교조 운동으로 교직을 버리느냐 그대로 남느냐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갈등 속에서도 해직의 길을 택했다. 사실 그 때 해직의 길을 택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이 기회에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는 한참 글이 나오려 했던 때라 그 길을 간다고 해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그렇게 놓아두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보다 교육운동가의 길이 우선 급한 것이었다. 글보다는 우선적으로 현장의 무너진 조직을 복원하는 게 급선무였다. 학교를 방문하여 전교조 신문과 유인물을 돌리고 현장교사들 북돋아 일으켜 세워야 했고 지역 단체와 연대를 꾸리고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거리 캠페인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다고 해서 나 혼자 편하자고 그 틈바구니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글을 쓴다는 것은 사치로나 여겨졌다.(지금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물론 그 때도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로 교육시나 논평 같은 것을 썼지만 본격적인 시의 길을 갈 수 없었다고나 할까? 어떻든 교육운동에 치중하다 보니 글 쓰는 것은 차 순위로 밀리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동지들과 부대끼면서 논쟁하고 변혁을 꿈꾸다가 절망하기도 했다. 나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작은 일에도 환호하고 아파하고 신음하고 분노하고 화해하면서 삼사십 줄을 넘어왔다. 그런데 나에게도 기특하게도 글쟁이의 기회가 왔다. 몸이 아파서 1년 정도 요양한다는 작정으로 외딴 섬을 자원해서 부임했는데 거기서 그리움을 찾게 된 것이다. 가거도에는 가거도에는 갯돌이 많다. 오라지게 물밑을 구르다가 문들어져 심(心)만 남은 갯돌도 많다. 가거도에는 후박나무가 많다. 사시사철 푸르디푸르게 질긴 울음 우는 후박나무도 많다. 가거도에는 그리운 아내도 많다. 오매불망 몸살하며 만물정령으로 태어나는 아내도 많다. 시집<나무 위의 여자> 중에서 나에게서 아내는 동지이자 후원자였다. 전교조 문제로 밥줄이 잘릴 때에도 누군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며 필자를 북돋아 주었다. 해직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상할 때에도 함께 해 주었던 사람이 아내였다. 그런 아내와 떨어져 살다보니 그리움이 쌓여서 아내를 소재로 시를 쓰게 되었다. 그것도 1주일에 두세 편씩 나왔다. 그것을 엮어서 첫 시집 <<나무 위의 여자>>를 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첫 시집을 내고 나서 필자에게도 자신감 같은 것이 붙었다. 까짓 것 혼자 즐기면서 여가로나 취미로나 글을 쓰다가 그렇게 빛발로 나섰더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모색으로 꽃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졌다. 들이나 산이나 민가에서 피어나는 들꽃들이 인간사의 갖가지 모습으로 보였다. 방죽머리에서 피는 수련은 고독한 절대자의 모습으로 보였고 용천사의 꽃무릇에서는 뒷북치는 짝사랑의 아픔이 배어났고 금계화는 아메리칸 이글 바람을 일으켰고, 사대풀꽃은 이주노동자의 모습이 배여 있었다. 나이 오십을 지천명이라고 했던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치를 조금은 깨달을 나이에 이르러서 두 번째 시집 <<만다라화>>를 펴냈다. 재작년에는 어머님께서 저 세상으로 가셨다. 불치병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를 소재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마음에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엮은 시집이 <<어머니의 나라>>이다. 올해에는 우리 현실을 반영했던 시들을 모아서 시집 <<나쁜 사과>>를 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빗겨가지 않고 온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상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세상의 아름답고 슬프고 피 흘리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시들이다. 정권교체기에 해가 바뀌면 사장될 지도 모르는 이런 시들을 모은 것이다. 내 성격은 되도록 자신을 감추고 나서지 않는 내성이다. 이런 내성 때문인지 나는 들꽃을 좋아했다. 들판이고 산이고 후미진 곳에 가면 내 눈에 들꽃들이 잘 든다. 외딴 곳에 피어 있는 들꽃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한다. 사람들이 잘 가꿔주는 정원에는 가기 싫고 구중궁궐에서 호강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이름 없는 들녘에서 살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들꽃이 되고자 한다. 어쩌면 내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딴 곳에서 피어난다고 해서 들꽃의 삶이 시시한 것은 절대 아니다. 들꽃의 삶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었다. 봄에는 가뭄을 걱정해야 하고 여름에는 열사를 걱정해야 하고 가을에는 비를 걱정해야 하고 겨울에는 냉해를 걱정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쉽게 피는 꽃이 그 어디 있으랴? 비바람과 무서리와 숱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시심을 피우려고 한다. 더 많이 사색하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각고하면서 세상의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는 꽃으로 피고자 한다.  
17 (박찬선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3092 2012-09-19
 돌담 쌓기  쌓은 높이만큼 무너지고 있었다.  브레진스키가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날  나는 저마다 멋대로 생긴 돌로 돌담을 쌓았다.  판에 박은 벽돌처럼 일정한 것이면  쉽게 쌓을 수도 있는 일인데  좀처럼 그렇게 되어 지질 않았다.  모가 나고 벙거지고 납작 넙적 하고 동실한가 하면  크고 작은 것이어서 어렵기만 했다.  그런데 어인일인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한 이것들이  아래위와 좌우로 용케 맞아 떨어져서  제 모습을 지니면서도 맞아 떨어져서 한 계단 한 계단 높아지고 있음은  담이 높이 오를수록 나는 발돋움을 해야 하고  목을 빼면서 하늘을 보아야 하고  이만큼 물러서서 산을 보아야 했다.  논두렁에 핀 허연 망초꽃도 보이지 않고  청개구리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는 자꾸만 이런 것들과 결별을 하고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나를 가두고 있었다  공화국의 백성이 되고 있었다.          東學 -尙州 (2) 창덕가唱德歌 한 구절에서 싱싱한 풀잎의 음성을 듣는다. 아픔의 빛을 품고 어둡고 머언 산하山河를 넘어온 사내여 오늘 우리는 가슴이 막혀 박제가 된 피에로. 말해다오. 북더기 같은 거친 손에서 깨끗한 피의 불꽃이 밝혀짐을, 짓밟혀 온 가슴에서 빛의 뿌리는 더욱 튼튼해짐을 , 쓴 익모초益母草 짙은 물이라도 벌컥벌컥 마시고 여름을 나야하는 그래서 박쥐의 거짓을 알려야 하는 접신接神의 땅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팔매질 하는 아이들의 손바람에 이는 하늘 가르는 풀잎소리를 듣는다.        바위  나를 벙어리라고 그러지 말게  나를 고독하다고 그러지 말게  나는 여지껏 나의 언어를 수 놓으며 살아왔네  그래서 내 가슴은 굳어졌네  나는 줄곧 내 심정을 노래하며 살아갈 것이네 그래서 내 가슴은 더욱 굳어질 것이네  내 소리를 들은 척도 말게  내 전부를 아는 체도 말게  나를 아는 이는 나를 낳아 길러준 산뿐이네  아니 참으로 나를 아는 이는 나뿐일 것만 같네         굴뚝새      -새(10) 굴뚝새가 보이지 않는다. 굴뚝새는 캄캄한 굴뚝 속으로 영영 숨었는가. 메마른 겨울 복판에서 굴뚝새를 기다린다. 귓전에 싸락눈 내리듯 재재거리는 소리가 앉는다. 포록포록 나는 어둔 갈색의 줄무늬 굴뚝새는 어디로 갔는가. 골 깊은 강원도 너와집 마을로 떠났는가. 사할린 찬 땅에 누운 동포의 무덤가로 떠났는가. 소쿠리에 담긴 따뜻한 꿈은 부서지고 긴 겨울의 끝 봄은 느린 황소걸음이다. 굴뚝새가 오지 앉는다. 굴뚝새처럼 사는 사람도 오지 않는다. 비인 벌판 바늘 같은 바람 속에 침엽수림이 울고 있다. 풀린다      풀린다는 말  그 소리에는 길이 열린다  얼어붙었던 땅의 근육이 부드러워지고  핏줄처럼 따뜻하게 이어진 길  길 가에 냉이 꽃다지  앙증스러운 꽃들이 하늘거린다  바람이 꽃대를 흔들고 간다  산과 들을 깨우며 가는 바람의 노래  노래로 밝아오는 세상  한 시대를 옭아맸던 끈이  실개천 같이 누워있다.     은행나무   나무의 시(35)  땅속에서도 빛나는 황금의 말을 가졌다.  그의 말은 인생독본이나 명언집의 말보다 아름답고 깨끗하다. 떠나는 순례자의 마지막 모습  진한 상징의 손짓을 알지 못한다.  부끄럽다.  그냥 떨어지는 잎만 볼 뿐이다.  그냥 수북이 쌓인 잎만 볼 뿐이다.    짚   나도  함께 묻어다오.  소의 먹이가 되고 싶다. 느긋하게 되새김질하는  나도 함께 묻어다오  소의 덕석이 되고 싶다  차디찬 땅속에 묻힌    바늘 길을 베고   尙州 (111)              비둘기소리 후줄근히 젖는 진종일 비 오는 날이면 엄마는 반짇고리 난전처럼 펼쳐 놓으시고 베게모를 만드셨습니다. 쓰다 남은 색색가지 자투리 천으로 모자이크하듯 베게모를 만드셨습니다. 호박꽃이 담장을 밝게 비추면 어울려 피는 엄마의 여름 꽃밭 뒤웅벌이 윙윙거리며 화답을 합니다. 작은 조각이 어울려 그려낸 머리맡의 아름다운 세상 티벹스님의 만다라 같은 무념無念의 공간이 자리 잡습니다. 이 쪽과 저쪽이 다른 색으로 맞이한 가지런히 오고 간 바늘 길을 베고 나는 꿈을 꿉니다. 향기로운 꽃 속에 포근히 잠자다가 길속에서 길 찾는 꿈을 먼 길 헤매다가 돌아오는 꿈을    일미식당 아주머니   尙州 (114) 동아아파트 옆 일미식당 아주머니는 혼자 국수를 내놓으신다. 철따라 나오는 푸성귀로 전을 부치기도 하고 재바른 열 손으로 스무 해가 넘도록 익혀온 국수 자식들 공부 시키고 새집지어 몸져누운 어른도 편안케 하신다. 밀가루 반죽에 묻어나는 가정사 이야기를 들을 양이면 국수물 같은 진한 눈물이 속으로 흐르고 사는 게 국수같이 구수하고 후룩후룩 국수물 마시듯 쉽지도 않아 국수 삶듯 삶을 삶아온 아린 세월 마음 끓이는 날은 국수를 삶으며 긴 국수발 같은 한숨을 마시며 전 굽듯 쉽게 뒤집지도 못해 어쩌다 쉬는 날은 산문을 찾아 절을 하며 정성의 탑을 쌓는다. 아픈 다리와 저린 허리를 편다. 열무김치 익는 일미식당에 가면 국수발같이 긴 이력의 길이 열리고 푸짐한 고향의 정을 안고 따뜻한 집을 나선다.   가을에는  가을에는 어디론가 떠나야하네  산마루에 올라 사슴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훌훌 털고 떠나야하네 우리들 사랑도 물이 들어 단풍으로 타는 목마른 가을 산의 갈증을 누가 아는가  만남은 낯선 길을 찾다가  숲에 가려 길을 잃듯  늘 서투른 시늉으로 머뭇거리고  쏟은 마음 추수하듯 모두 거둬들이면 뒤주처럼 부풀어 넉넉한 식탁이 될테지만  아닐세,보낸 마음 시래기 엮듯 엮어도  빈 하늘에 비껴가는 새떼들뿐  허수아비의 젖은 속을 누가 아는가  일찍 지는 해도 떨어져  논두렁 허리 아픈 굽은 잔등 위로   땅거미가 몰려든다.  가을에는 어디론가 떠나야하네  손 흔들며 떠나는 잎새들처럼  
16 (박찬선 시인) 지역,시로 통한다.
편집자
2244 2012-09-19
지역,시로 통한다.                                   박찬선  최근에 내가 주로 쓰고 있는 것은 연작시다.이를 것도 없이 연작시는 하나의 주제나 제재를 가지고 이어서 쓰는 것을 말한다.시적 대상이 한 작품으로 마무리를 할 수 없을 때,부족해서 다함이 없다거나 줄기차게 천착하고자 할 때 비롯한다.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내용이 풍부하고 깊어서 한 작품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을 때 이뤄진다.한 마디로 내용의 심원성과 풍요성,제재의 다양성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그것은 시의 광맥이다.노다지를 찾아서 파고 들어가는 광부의 작업이나 풍년 농사를 위해 해마다 경작을 하는 농부의 일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연작의 작업에 尙州와 동학과 낙동강이 있다.내 시의 토양이자 사랑과 보은의 대상으로,나아가 하늘과 땅과 인간을 아우르는 시적 이상으로서의 尙州와 성誠,경敬,신信을 바탕으로 한 정신의 곳집으로서의 동학과 영남의 젖줄로서 풍요를 일궈준 문화가 흐르는 낙동강이 있다.     상주시 만산동 631번지는 7대째 이백 년이 넘도록 살고 있는 붙박이 터.천봉산이 안아주고 북천이 열어주는 곳.시가지 중심이나 도회로 이사 갈 생각도 없이 곰같이 참으로 우직하게 살아왔다.  “상주는 내 선조들이 뼈를 묻고 다져온 터전이요,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며 내 아이들이 자라는 고향이다.어진 이웃들이 흙을 가꾸며 살고 있는 곳이요 소를 키우며 소의 눈망울에 고인 눈물로 가슴을 적시며 사는 곳이다.그런가 하면 상주의 어디엔가 있을 이상향인 우복동의 이야기를 믿고 흙이 지닌 생명과 고향의 의미를 새기며 사는 고장이다.이처럼 상주는 나와 숙명적으로 맺어진 地緣이 두터운 곳이다.상주는 떠도는 내 영혼의 귀의처이자 보금자리이며 내 시의 화두이기도 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자기와 관계 지워진 모든 대상에 대한 고마움을 갖는 행위라 한다면 시는 그 대상에게 언어의 옷을 입혀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것이다.”라고 시집 『尙州』(문학세계사 1986)서문에 적었다.  상주의 설화와 문학,교육과 동학,민요와 축제 등 상주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상주에 뜻을 펴게 되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지역 상주를 통해서 역사와 세계를 보게 되었다.      동학은 눈뜸이요 깨침이자 자존이다.동학은 인간 사랑이요 생명운동이다.수운과 전봉준으로 이어지는 혁명적 실천의 진보적인 면과 수운과 김주희(1860-1944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 창설)로 이어지는 영적 구원을 주창하는 보수적인 면이 공존하는 상주 동학.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이 상주읍성을 점령하고 패퇴하는 과정에서 100여명이 희생됨을 비롯하여 태평루와 남사정 등지에서 60여명이 포살되었다.그해 12월에는 상주유격병대와 일본군이 보은 북실에서 농민군과 접전,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농민군 26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런가하면 천도를 배워 익혀서 체천행도體天行道를 실천함으로써 선천시대의 태평성대를 열어 광제창생廣濟蒼生하는 데 목적을 두고,수운의 이원론적 신관(상제의 내 마음과 수운의 네 마음이 하나라 하여 내유신령內有神靈의 관점을 암시함으로써 일원론적 세계관을 내재시킴)과 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의 주장에 김주희는 하님(天,天主)은 사람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재적 실재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신관 즉 체천주의體天主義로 대변되는 상주은척동학.하님을 모시고 조화를 이루어 영생하고자하는 기원이 담겼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서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든 민족적 자각과 변화를 읽는다.나는 동학에서 풋풋한 솔잎과 댓잎 같은 백성의 소리를 듣는다.구제역으로 기르던 소 돼지를 땅에 묻으며 함께 묻히고 싶다는 농부들의 눈물과 한숨 소리를 듣는다.우리의 學인 동학은 지금도 유효하다.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한 천삼백 리 낙동강은 강다운 강으로 흘러가는 것은 상주에서다.낙동강 칠백 리는 상주에서 비롯한다.옛 상주의 지명인 상낙上洛의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낙동강.낙동강과 상주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구석기 시대(1만년-250만년 전)의 유적과 신라 13대 첨해왕 때 석우로에 의해서 병합된 사벌국 옛터며 낙동강 제일의 경관인 경천대.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노수신,류성룡,정경세,이준 아홉 선생을 모신 영남의 수서원首書院인 낙동강 가 무임포에 세운 도남서원.고려말 백운 이규보로부터 조선말 계당 류주목에 이르기 까지 666년 동안 지속된 낙강시회.조우인의 매호별곡과 채득기의 봉산곡이 빚어진 문학의 현장.모심기노래의 백미인 공갈못 노래의 배경.서애로부터 계승된 퇴계학이 우천학파를 형성하여 영남학 최후의 보루가 된 삼산이수 매화낙지 명당의 이강정사.역사,학문,문학,민요,농업,교통 등 총체적 상주문화의 중심에 낙동강이 있다.유장한 낙동강이 흐르고 흘러 큰 바다에 닿는 자연의 순환과 순리를 본다.   위에 예로 든 상주와 동학과 낙동강은 지역성을 지녔다.지역의 일부로서 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면서도 광역성을 지녔다.지역은 소외된 삶의 변두리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요,현장이다.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주체이자 주인이다.지역에는 그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역사가 있고,지역정신과 생명이 있다.지역이 단순히 지역으로 머무르지 않는 이유이다.더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유형과 무형의 세계를 가늠하면 그 진폭은 훨씬 넓어진다.  지역은 내 시의 중심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지금까지의 내 詩作은 넓게 보면 지역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지역을 아우르는 총체적 요소 중에서 광활한 지역의 극히 작은 일부를 나타냈을 뿐이다.그러한 나머지 지나치게 왜소하고 국부적인 사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든다.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왜냐하면 지역의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보편성의 획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결국 시가 추구하는 구경의 이상적 경지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비상과 초월,회귀의 의지가 거기에 있다.나로부터 떠나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지속성과 일관성을 지닌 詩作.지역 안의 시에서 시 안의 지역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시의 새로운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귀결된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시심詩心을 가지고 정갈하고 뜨거운 시혼詩魂을 불사를 일이며 구경에는 시도詩道를 깨칠 일이다.그렇게 할 때 자연스럽고 여운이 깃든 새로운 세계의 시경詩境이 열려 지리라.   그렇다.지역은 시로 통한다.  
15 (이종암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050 2012-07-18
 수를 놓다 그러니까 까닭 없이 답답하고 우울하면 아니, 세상에 나를 내보낸 인연 그리워 태어나고 자란 곳 금천 지나 매전 고향 마을 찾아간다 동곡재 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황사 구름 속 겹겹의 산 능선들 눈앞에 마주 선다 병풍같다 무릎 꿇고 절하고 싶다 병풍에 새겨진 그림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들 누대의 삶이 수(繡) 놓은 것 저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 병풍,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저기 아버지 마중 나오는 소리가 있다 언젠가 나도 내 아들도 가서 병풍 속 수 하나 또 놓을 것이다 詩塚 말조심의 뜻으로 전해져오는 언총(言塚)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만나고는 캬- 무릎을 치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았건만, 얼마 전 한 평론집 서문에서 만난 시총(詩塚)은 왜 그리 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던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백암 정의번의 무덤. 시총의 주인공 백암공은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적에 포위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훗날 시신도 찾을 수 없어 그 아비가 아들의 옷과 갓을 들고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하여 빈소를 마련하고, 생전에 뜻을 나누던 지우(知友)들의 애사(哀詞)를 모아 관에 담아 묻으니 세상 처음 시총이 나온 바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기룡산 기슭 십만 평의 영일 정씨 하천묘역. 장방형 묘역에 돌올하게 솟은 80여 기의 무덤들 거대한 책 속의 무슨 글자들만 같다. 시총을 찾아가 비문을 손으로 찬찬히 읽고는 엎드려 절하니 사람 묻은 곳보다 더 깊은 무덤이다. 무덤 속에 있을 여러 편의 시와 공을 추모하며 봉분을 둘러보는데, 홀연 나비 두 마리 무덤을 열고 푸르륵 날아오른다. 나비 허공으로 날아간 궤적에 일순간 펼쳐진 문장을 나는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고 태산보다 크나니, 육신이 없어져도 마음은 남아 時空을 초월하여 通한다.> 무덤 속 백암공과 지우들이 남긴 시들도 나비처럼 날아올라 하늘의 별로 빛나는가. 어둠이 깔리니 열사흘 달빛 아래 하늘의 별과 땅 위 시총의 상응이 무한정 좋다. 시공을 건너는 저 시들은 비바람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겠다. 무덤 속 하얀 언어들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꾸 내게로 건너온다. *나는 정진규 시인의 시집『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2009)에서 언총(言塚)을, 그리고 박현수 교수의 평론집『황금책갈피』(예옥,2006)에서 시총(詩塚)을 만나 이 시를 쓸 수 있었다. 개밥바라기塚 시를 묻어둔 무덤이라고 요즘 막 세상의 이목을 받고 있는 시총(詩塚) 바로 앞자리에 작은 무덤 하나 놓여있다. <忠奴億壽之墓>, 영일 정씨 문중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 붙들려간 주인을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한 노비를 어여삐 여겨 문중의 하천묘역 안에 고이 모셔놓은 것. 함께 죽은 주인의 무덤 시총보다 턱없이 작은 게 얼핏 보면 개집 같고 무슨 단추 같기도 하다. 이 작은 무덤의 사연을 세상에 내민다. 시총에 시가 있다면 노비 억수의 무덤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가. 시총의 주인처럼 노비 억수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면 이 무덤 속에는 대체 무엇이 묻혀 있는가. 마음이겠다. 주인을 구하려는 노비 억수의 마음, 그의 죽음을 안타깝고 고맙게 여긴 영일 정씨 문중의 따스한 마음이 여기에 있을 터. 그러면 이는 마음을 모셔놓은 심총(心塚)이다. 마음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여 세상의 빛깔을 바꾸게 한다. 또 마음의 깊은 자리는 세월을 넘어 이승과 저승에까지 이어져 썩지 않는 끈이 된다. 주인의 무덤 시총 앞 <忠奴億壽之墓>는 초저녁 초승달 위에 피어난 별, 개밥바라기를 닮았다. 개밥바라기塚이라 이름을 붙여드린다. 시총과 개밥바라기총 어울림의 앉음새가 하늘의 그림 같다. 개밥바라기총, 세월이 가도 그 자취 없어지지 않고 빛도 잃지 않겠다. 총, 총, 홍홍 여기로 붓글씨를 배운 지 몇 해 한자를 찾다가 옥편에서 우연히 만난 글자, 囍(희) 사십년 전 동네 잔치마당을 펼쳐놓는다 한 일(一)도 두 이(二)도 모르던 일곱 살 무슨 글잔지 아무도 모르는 애들 앞에서 잘난 체 했다 홍홍이라는 글자 아니냐고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囍를 세로로 나누면 喜가 둘이니 홍홍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다) 동네 잔칫날이면 회관 창고에서 나온 마을 공동소유 사기 그릇 밑바닥 또렷이 새겨진 글자, 囍 쌀밥에 고깃국 실컷 먹으니 얼마나 기쁘냐 그러니 囍는 홍, 홍 좋다는 말이라고 홍홍이라고 한자 모르는 애들 앞에 자랑처럼 빛나던 사십년 전 잔치마당처럼 쌓여가던 삶의 무늬 囍, 시나브로 지워져 이제는 헐겁다 아버지들은 다들 어떻게 떠났을까 여기 홍홍을 놔 두고서 구만리 드센 바닷바람 와글와글 구만리* 구릉 끝없이 출렁대는 보리밭 위로 노래처럼 봄날 깊어 가니 밭고랑의 보리 빛깔 하늘로 타오른다 누릿누릿 황금색으로 점점 번져가는 보리밭과 봄볕으로 따스하게 데워진 하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 연거푸 쏟아져 내린다 구만리 바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만큼 몸 바꾸는 보리밭의 색과 노래 잔치 가까운 듯 먼 듯 허공의 종달새 따라 소풍 나온 시인들 또 뭐라 노랠 부른다 봄날은 간다고 떠나가는 봄날의 노랫가락에 속이 다 타들어 가는 구만리 허공이 꽉 찬다 *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 건너가다 포항의료원 중환자실 심장과 폐, 신장 몸 다 망가진 채 건너가려고 며칠 째 저리 사투를 벌인다 넉 달 전, 마누라 먼 곳 떠나보내고 눈물로 하루 또 하루를 보내다 이젠 기어이 먼 길 건너가려 한다 육신의 고통 극에 달하는지 여든 다섯 노인 아이처럼 엄마, 엄마를 부르다 정신을 놓고 다시 봉순아 마누라 이름 부르며 꺼억, 꺽-꺽 숨넘어가는 우리 장인 볼 수도 없고 울지도 못한다 나는 가능만 하다면 어서 건네주고 싶다 몇 시간 후, 고요히 입적에 드신다 산소마스크 심장박동기 내던지고 호呼와 흡吸의 사이마저 다 지우고 혼자서 적멸로 가는, 저 일대사一大事, 노을보다도 더 장엄하다 집 한 채 새로 들어서다 둘레 산세가 꼭 연꽃 모양의 포근한 대전현충원에 한 줌 뼛가루 장인, 장모를 모신다 자기한테 가는 길이 참 힘들더라 그러셨는가요 수고했어요, 당신 또 한집에 이렇게 살게 되는군요 마누라, 고맙데이 다시 손 잡아주니 뼛가루를 담은 두 개의 항아리 땅 아래 곱게 모셔두고 세상에 덜렁 남은 못난 자식들 순서대로 흙을 덮고 두 번 절하고 일어서니, 집 한 채 새로 지어졌다 육 군 배 병 위 장 신 박 봉 정 순 갑 의 묘 고래심줄 텔레비전에서 새끼 낳는 걸 봤다 고래와 고래 古來로 어미의 자식 사랑은 고래심줄이라 했지만 혼자 사는 여든여섯 어미는 대상포진 죽도 물도 넘기기 힘겨운데 고래심줄 다 닳아 간당간당하는데 애지중지 일곱 자식들 제 나온 뜨거운 끈 까맣게 잊고 그저, 저 먹고살기에만 바쁘고 애인과 꽃놀이 가다 대상포진에 기진맥진 집에만 누워있는 늙은 애인 꼬드겨 깊어가는 봄날 꽃놀이 간다 어딜 가나 꽃들이 즐비하다 저기 배꽃 살구꽃 좀 봐요 입술연지 바른 복사꽃도 피었네요 길 아래 저 노랑노랑 유채꽃밭 유치원 아동들의 그림 같지 않아요 내 말 듣는 둥 마는 둥, 우리 어매 꽃들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둘째 아들만 쳐다보고 무어라 뭐라 얘기하기에만 바쁘다 하늘의 해를 향해 목을 빼면서 꽃들 피듯 애인에겐 내가 하늘의 태양인 모양이다 늙은 애인한테 못난 내 낯짝 자주 보여 드려야 하느니 詩論 3학년 9반 교실 독서 수업 시간, EBS수능특강 언어영역 60쪽 황동규 선생의 시 「퇴원 날 저녁」을 가르치다가 “주인이 나오기 전에/배터리 닳지 말라고 속삭인다.”에 밑줄 그으라고, 시인은 저렇게 배터리 닳아가는 자동차에게도 말을 건네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시인은 위대한 거라고, 아이들에게 받아 적으라고 윽박지른다. 괄호 열고, 우리의 이종암 시인 또한 위대하다, 괄호 닫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은 에이, 웩웩, 책상 두드리고 고함지르고 난장판이다. 아이다 야들아, 진짜라니까. 내 말 못 믿는 사람,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와서 봐라. 내 책상 위 물컵 속에 며칠 전 화단에서 꺾어온 매화가지 활짝 웃고 있단다. 그거 내가 자꾸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말 건네서 활짝 웃으며 꽃 핀 거라니까. 시(詩), 세상에 말 걸기이다. 수업 끝.  
14 (이종암 시인)빚으로 건너온 내 몸의 시(詩)
편집자
2101 2012-07-18
 빚으로 건너온 내 몸의 시(詩) -이종암 * 천하 몹쓸, 내 詩의 첫걸음은 언제 어디서부터였을까? 적성도 고려하지 않고 진학한 공업고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1981년 여름. 지금도 이름이 생소한 기계 다듬질, 용접, 선반 작업 등 공업학교 실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 연습장에 휘휘 써 갈겼던 낙서가 내 시의 첫 걸음이었던 것 같다. 겨우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오랜 갈등과 번민 끝에 부모님을 설득하고, 인생의 향방을 새롭게 수정한 그 힘의 하나가 연습장에 침 묻혀가며 내 마음 속의 무늬를 써 내려간 언어들이었다. 詩가 뭐 별난 것이랴. 내 몸과 마음이 토해내는 넋두리가 詩 아닐까. 그리고 재수를 하여 인문계 학교로 진학하여 찾아간 문학 동아리에서 詩라는 것과 얼굴을 처음 마주했다. 그 詩라는 놈은 얼굴도 예뻤고 몸매도 고왔다. 나는 단박에 그의 매혹적인 향기에 포박되었다. 운동권이었던 대학 시절 나는 일부러 문학을 멀리 하기도 했지만 그와 끝내 헤어질 수는 없었다. 내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그는 그림자처럼, 하늘의 구름처럼 내 몸과 마음에 늘 붙어있었던 것 같다. * 대학 4학년 때 염무웅 교수가 심사를 본 천마문학상 문학평론이 당선된 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평론을 하려고 몇 년간 애를 써 봤지만 그리 쉽지가 않았다. 문학평론을 제대로 하기에는 직장의 여건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시의 향기가 자꾸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詩의 매혹에 이끌려 창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포항 지역의 여러 시인들과 함께 시작한 ‘푸른시’동인 활동에서였다. 내 시의 첫 모양새는 모두 ‘푸른시’ 동인 활동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그때 시 창작의 교본으로 집중해서 읽었던 것이 장석남과 황동규, 정진규 시인의 시집들이었다. 이들의 시는 내게 시 창작의 고혹(蠱惑)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그 낭패(狼狽)를 조금씩 지워내면서 시를 매만지게 되었고, 어느 날 나는 시인이 되었다. * 내가 갖고 있는 시집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읽었고 또 앞으로도 가장 많이 읽을 시집은 아마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집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시집이 아니라 이른바 ‘이종암 시인이 가려뽑은 서정주 대표시선’이다. 미당이 남겨놓은 한 권의『서정주문학전집』(일지사,1972)과 15권의 시집 속에서 110편을 뽑아서 워드로 작업한 것을 손수 묶은 것이다. 이 시선집 제목을 나는 어떤 평론가도 주목하지 않은 미당의 9시집 제목을 빌려 ‘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라고 했다. 미당의 9시집에는『삼국유사』를 비롯하여『대동운옥』『연려실기술』『고려사절요』같은 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는 설화와 역사적 사실을 차용하여 우리 민족의 원형적 삶을 시로 건져 올리고 또 거기에서 우리네 삶이 지향해야 할 삶의 빛과 그늘을 그려내고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미당 시 창작의 절정을 이루었던 4-50대가 아니라 이미 한국시단의 大家로 불려지던 60대 후반의 나이에 씌어진 것이어서 그 극단으로까지 시의 내용을 밀고가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앞으로의 내 시가 추구할 방향의 한 몫을 감히 말한다면 미당 서정주 선생이 노래하려다 다하지 못한 그 부분일 터이다. 덜 지어진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未堂’, 서정주 시인은 자기 시의 집을 세우고 부숴버리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해온 시인이다. 그런 면에서 미당은 한국 시단의 단연 독보적인 존재가 아닐까. * 미당을 비롯하여 소월, 백석, 지용, 목월 등의 先代(선대) 시인들과 우리 시대 여러 선배, 동료 시인들에게 내 시는 크게 ‘빚’을 지고 있다. 더 멀리로는 신라시대 세계적 고승 원측화상의 만법 유식사상과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저작『난랑비서』에서 말한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도(風流道) 사상과『진감선사비문』의 도불원인(道不遠人)의 큰 마음에 내 시는 역시 빚을 지고 있다. 시를 포함한 전 예술의 역사는 바로 이 ‘빚’의 관계로 가능할 터이다. 그리고 내 몸은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 끝없이 이어지는 혈연(血緣)의 ‘빚’으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이 또한 엄청난 빚이 아닐 수 없다. 19대조 이암(李嵒)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목은 이색의 스승이었던 할아버지는 고려말 조맹부체의 一家(일가)를 이룬 서예가요 시인이었고, 또 한국학의 대학자였다. 인민의 복지를 위해 원나라에서『농상집요』를 가져왔고, 민족의 역사서『단군세기』를 저술한 할아버지는 말년에 정승에서 물러나 강화도에서 불계(佛界)와 선계(仙界)를 노닐며 시를 쓰시던 분이다. 沙泉帶草堂(사천대초당) 모래샘이 초당과 마주하고 紙帳卷空牀(지장권공상) 책갈피가 책상위에 뛰논다. 靜是眞消息(정시진소식) 고요함은 이것이 진정 소식이러니 吟非俗肺腸(음비속폐장) 읊조리는 시구 속세의 마음 아니라네. 園林坐淸影(원림좌청영) 정원 숲속의 맑은 그늘 아래 앉아 梅杏嚼紅香(매행작홍향) 매실과 살구 씹으니 붉은 향기 그득하다. 誰住原西寺(수주원서사) 누가 원서사에 머물러 鐘聲送夕陽(종성송석양) 종소리를 저녁 햇살 아래 보내는가. 이암(李嵒) 할아버지의「草堂」이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나는 우리 집안의 족보와『철성연방집』을 통해 이암(李嵒) 할아버지를 만나고서부터 서예(書藝)의 길로 입문했다. 먹과 붓으로 내 詩의 빛깔을 깊고 새롭게 더해갈 작정이다. 내 삶이 다하기 전 이 세상에 미미한 ‘빚’ 하나를 남겨두기 위해 나는 거듭 공부하면서 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는 자, 천둥과 지뢰(地籟)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 세상을 울리는 커다란 퉁소소리 한 자락 남겨둬야 하지 않겠는가. * 천하 몹쓸, 아니라 천하 내 몸 바로 그것, 詩! 내 몸이라는 악기를 통해 세상에 나온 내 노래가 끝내 외롭지는 않아야 할 터인데. <약력> 이종암 1965년 경북 청도 매전 출생. 1993년『포항문학』으로 등단. 시집『물이 살다 간 자리』『저, 쉼표들』『몸꽃』 현재 포항대동고등학교 근무 mulgasarang@hanmail.net  
13 (윤임수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1923 2012-06-10
 나는 나는, 어깨 처져 아이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가장의 손에 들린 호떡 한 봉지이고 하룻밤 젊은것들이 마음을 다 내려놓은 채 돈이니 출세니 하는 것들을 가볍게 혹은 우습게 넘기는 막걸리 한 통이고 봄 햇살 졸음 쏟아지는 좌판에서 그대의 사뿐한 발걸음을 기다리는 축축 늘어진 돌나물 한 소쿠리이고 무거운 한숨 속에서도 따뜻하게 건너가는 찰랑찰랑 소주 한 잔이고, 그러므로 지친 너를 가만 감싸주는 초저녁 벽소령의 구름안개이고 싶고 산속 응달 반쯤 허물어진 무덤 옆에서 그 집 주인을 생각해보는 더딘 발걸음이고 싶고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야윈 그러나 눈빛 고운 그대들을 보듬는 상처의 집 한 채이고 싶고 그 집의 오래된 주인이고 싶고, 경배 안성 칠현산 참나무 숲길 그 단풍 고운 것 미리 알고 노란 듯 불그레한 웃음 한 자락 풋풋한 벌레께서 떼어가셨다. 누가 감히 벌레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는가 사각사각 길게 숨죽이는 그 은밀한 사랑도 알지 못하면서, 왕년 가랑눈 어설프게 흩날리는 날 밤늦은 변두리 포장마차에서 나도 왕년에는 말이야, 탁자를 탁 내리치는 당신을 보면서 에이 뻥치지 마슈, 대뜸 한마디 척 올려붙이려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맥없이 흘러나오는 저, 저, 누런 콧물 때문에 그냥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려주고 아따 술이나 한잔 더 하슈, 빈 잔을 내밀었는데 그런 남의 속도 모르고 됐어, 벌떡 일어나 비틀비틀 외등 아래 그림자 무겁게 끌면서 지린내 전봇대 돌아가는 당신이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오늘 밤은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함박눈이나 오달지게 내렸으면 좋겠는데, 그럼 당신의 구슬픈 왕년도 눈 속에 묻혀 조금은 멀리 흘러갈 것 같은데, 묵호 등대 다시 묵호에 가면 묵호 등대에 등을 대고 불빛을 따라 밤바다에 나서 보리라 그 바닷길 따라 누구도 걱정 없는 내일이 오고 내가 사랑하는 그대가 오고 우리가 마음 놓고 끌어안을 수 있는 참세상이 마침내 올 것이라 믿으며 밤새 철썩거리는 푸른 파도에 순결한 달빛 한 줌도 뿌려 보리라 정작 자신은 비추지 못하지만 아득히 먼 누군가를 위해 십 초에 한 번씩 반짝이는 당신 이 얼마나 넉넉한 품새인가 간혹 묵호 등대를 올려다보면서 아무리 먹물 같은 세상이어도 사실은 절망과 희망 사이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다시, 밤이 새도록 느껴보리라 개펄 태안 조개부리 마을에 가서 종일 엎드려 있는 개펄을 보았다 처음에는 햇볕이 따가워서 그런 줄 알았다 밤새 거센 파도에 시달려 삭신 쑤셔서 그런 줄로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개펄은 품고 있는 바지락이 아무 걱정 없이 자라라고 바다에서 돌아오는 소달구지 진흙길도 판판하게 단단하라고 닳고 닳은 무릎으로 함지박 밀고 가는 세상 모든 어머니의 허리가 더는 휘어지지 말라고 눈을 질끈 감고 가만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나자 비로소 유려한 곡선의 갯고랑 그 깊은 속살이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三笑窟에 들고 싶다 경봉 큰스님이 열반에 들 때까지 기거했던, 포항 사는 사진쟁이 이해준 형이 가끔씩 들어가서 며칠씩 묵고 오는, 양산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가끔은 나도 그 소굴에 들어가서 며칠씩 두문불출, 틀어박혀서 같잖은 인생 뒤집어보고 싶다 온몸을 뒤집어서 가진 것 탈탈 털어내고 마음도 죄다 뒤집어서 오뉴월 댓잎 그 푸른 그늘 아래 아흐레쯤 널어놓고 싶다 그렇게 한 세 번쯤 저 소굴에 드나들면 고집 센 위아래가 없어지고 눈초리 추어올린 안팎도 슬그머니 사라져서 너와 나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우리 앞에 저 극락교 아래 잔잔한 수련과 같이 극락암 부처님도 웃음 한 자락 툭 던지시고 영축산 바위 능선도 허허, 허허 따라 웃으며 땅거미처럼 가만 사람의 마을로 내려올 것 같다 모든 마음의 경계 앞에서 늘 안쓰럽게 머물렀던 내 발걸음 가벼워, 참으로 가벼워 세상 속으로 훌쩍 스며들 수 있을 것 같다 화엄벌 억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눈부시게 늙어가는 것 누가 있거나 말거나 힐끔거림도 없이 햇살에 목덜미 통째로 내어놓고 제대로 말라가는 것 가끔 달빛 따라 먼 길 떠났다가 태연하게 발목 적시며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눈 씻고 다시 또 황홀하게 말라가는 것 세상이 온통 하얗게 될 때까지 가진 것 탈탈 털어내며 이제 그만 이제 그만도 소용없이 천천히 하염없이 말라가는 것 외롭고 슬프다는 것까지도 끌어안고 함께 기꺼이 말라가는 것 어쩌나, 눈부심도 없이 온통 하얀 황홀함도 없이 외로움도 슬픔도 먼저 말라버린 나는 돌아서는 발걸음이 자꾸만 무거워져, 餘慶庵 - 조용한 말씀 오래된 이 절집도 좋고 세상 가득 꽃피울 배롱나무도 좋은데 부처님은 제발 찍지 마세요 오랜 세월 나다니다 돌아오신 지 이제 겨우 몇십 년인데 지금은 그냥 쉬셨으면 좋겠네요 부처님 담아가시면 내 마음도 아프겠지만 티끌세상 돌아오시는 길 얼마나 힘들겠어요 사람들 속에서 여기 기웃 저기 갸웃 쉽게 돌아오시지 못할 거예요 그게 부처님 마음인 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발길 그냥 돌려가세요 정 서운하면 마음이나 한 쪽 떼어놓고 가세요 아침마다 염불 공양 잘 올려 드릴게요 우리 부처님도 간혹 넉넉한 웃음 한 자락씩 던져주실 거예요 금오산 부처 하동 금오산 중턱, 남쪽 바다 아늑하게 내려다보이는, 구멍 숭숭 석굴암에 잠시 세들어 사는, 이마 훤하게 불거진 부처의 일과는, 어둑한 석굴에 누런 허울을 벗어놓고, 하얀 고무신으로 이슬진 남새밭과 오래전 봉수대를 느릿느릿 오르내리다가, 일 년 내내 마르지 않고 맛도 제각각이라는 석간수로 속을 씻은 뒤, 지나는 등산객을 불러 모아 한바탕 국수를 삶아먹고, 낑낑거리는 강아지 소리를 베고 누웠다가, 세상으로 내려가는 뒷덜미들을,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눈길로 가만 붙들어, 그 발걸음들이 석굴암 그늘 아래, 저물도록 머물게 하는 것 그대를 위한 바다 속 뒤집어진다고 탓하지 마라 진드근히 견디지 못한다고 나무라지도 마라 평온에 잠겨 사라지는 삶은 버린 지 오래 가끔은 옴팡지게 뒤집고 흔들어야 신안 젓새우도 토실해지고 벌교 꼬막도 알차게 여물어지는 것 그러니 그대 판판함에 기대어 쉽게 눈감지 마라 맥없이 사그라지지도 마라 바다는 또 내일도 지친 그대를 위해 기꺼이 아픈 제 몸 뒤집을 것이니,  
12 (윤임수 시인) 나의 문학관-따뜻한 시 쓰기를 위하여
편집자
1949 2012-06-10
 따뜻한 시 쓰기를 위하여 나는 산문을 잘 쓰지 않는다. 시도 잘 쓰지 못하는 주제에 산문을 쓴다는 것은 언감생심,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이어서 그렇고 시라도 제대로 써보자는 생각에서 그렇다. 그런 까닭에 『문학마실』 편집자로부터 “문학관”을 써 달라는 청을 받고 참 망설였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는 오래된 경구(내게는 참 좋은 구실?)도 그 망설임이 오랫동안 머무는데 크게 한몫을 했다. 그러나 『문학마실』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어야 한다는 알량한 사명감으로 오랜 망설임을 버리고 이 글을 쓴다. 그러니 크게 기대하지 말기를 우선 부탁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시란 모름지기 음풍농월도 아니며 자아도취도 아니어서 시대나 세상에 대한 공분이나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다.”라고 하셨다.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경부선 이원역에서 새내기 철도인으로 젊은 패기를 다독거리고 있던 나도 다산 선생의 그런 생각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강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공분’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대신 ‘안타까움’을 끌어안게 되었는데,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된 「철도궤도공의 편지」연작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철도 궤도공의 편지 3 삼월이라지만 아직 밤바람은 차갑네요 형님 경부선 간이역 지탄 못 미쳐 금강 제2교량에서 닳고 닳은 구철을 오십 미터 장척 레일로 바꾸고 피곤과 새벽 추위에 쫓겨 서둘러 찾아들어온 면 소재지 여인숙 연탄은 활짝 피었는데 외풍 탓인지 방안은 서늘하네요 힘든 일 끝에 늘 그렇듯이 마른 입술에 흘린 소주 몇 잔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 쉽게 코를 골고 피곤보다 먼저 내 몸을 빠져나간 남은 기력이 아무렇게나 구석으로 밀리는데 쉽게 잠이 오지 않네요 형님 바닷가가 고향인 정 아저씨 젊어서 단단히 챙기려던 한몫을 끝내 못 잡고 고향 바닷가 근사한 횟집을 물 건너보낸 뒤 남은 것은 파삭파삭 마른 살껍질이라더니 자면서도 연방 그렁그렁거려 짜르르 공복을 더듬는 소주 기운으로 움츠린 우리 몇몇 젊은것들 절대로 그러지 말자고 어금니 사이로 오래된 오기를 되씹으며 쉽게 잠을 못 이루네요 형님 평생 쎄빠지게 일하고도 저 꼴이라니 원 아득바득 살아가는 날들이 원망스럽지만 너무 걱정마세요 형님 일당으로 잡혀지는 꿋꿋한 어깨 일당으로 날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너무 일찍 더러운 꼴에 젖었지만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봐야지 않겠어요, 그럼 당시 이원역에서 열차가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철도신호설비 유지보수 업무를 하고 있던 나는 열차운행이 중단된 심야시간에 일하는 철도궤도공을 자주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무거운 침목과 레일을 힘들게 바꾸고 동 틀 무렵에야 여인숙으로 돌아와 소주 몇 잔과 함께 쓰러지는 그들을 보면서 노동과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편지글 형식의 「철도궤도공의 편지」연작에서는 단단함과 희망을 말했지만 사실 그 시절 내게 비친 사람과 사물의 모습은 대부분 ‘안타까움’이었다. 그 ‘안타까움’은 이원을 떠나 상주와 김천, 왜관 등지를 전전하는 동안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고 지금도 가슴 한편에 마치 평생 안고가야 할 짐처럼 남아있다. 이원을 비롯한 현장을 떠나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안타까움’을 멀리 하고 ‘따뜻함’을 가까이 했다. 첫 시집의 후기에서 밝혔듯이 “그늘지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시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울분과 분노도 때로 위안이 되지만 나는 내 삶에 바탕을 둔 시를 통해 너와 내가 만나서 따뜻한 우리가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환한 집 담배참 되어 삽자루 그대로 놓고 철둑에서 땅 파던 보통인부들 호두나무 아래로 들어가니 오종종 개미들처럼 기어드니 지루해, 축 늘어져 있던 호두나무 설익은 호두알 딱딱거리며 일어나네 그늘이 둥둥 넓어지네 아무렇게나 몸을 내린 인부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집 하나 얻었네 이파리들 환하게 웃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위하고 사람과 자연이 기꺼이 교감하는, 평온한 우리들의 세상을 나는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 시는 ‘따뜻한 글쓰기’에 있다. 물론 ‘따뜻함’의 범주를 벗어나는 시도 있지만 나는 아직도 내 시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그리하여 더욱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기를 원한다. 시가 무엇이냐고, 시를 왜 쓰느냐고 물으면 내 답은 간단하다. 시가 내 삶의 버팀목이고 시 쓰는 게 좋으니까 쓴다. 나아가서 내가 좋아하는 내 시를 다른 사람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때문에 나는 좀 더 ‘따뜻한’ 시를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속에 인간 본연의 순수와 진정을 담아서 말이다. 이게 내 문학관이다. 쉬운 듯하지만 실천하기에 언제나 버거운, * 윤 임 수 - 충남 부여 출생 -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 - 시집 『상처의 집』(실천문학사, 2005) - 한국작가회의 회원 - 대전작가회의 이사  
11 (권서각 시인)자선 대표작 10편 file
편집자
2121 2012-05-12
 벌판에서 부러져 넘어진 한 아름 바람을 버리고 오렌지빛으로 불타는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허공을 버리고 슬픔의 무게로 뚝뚝 떨어지는 눈발 속을 그대들은 어디로 가고 잇는가 이 세상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은 내려서 세상은 비어지고 바다 속 깊숙이까지 슬픔이 배인 지금 저마다 또 다른 짐을 꾸려 지고서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너디로도 통하지 않는 쓸쓸한 길 위에 표정 잃응 신호등을 나는 보았다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숨어서 우는 몇 날밤의 어둠과 멍든 바다의 조각들이 끝없다 잎이 진 나무들이 눈 쌓인 산길을 내려와 죽은 강물을 보고 울었다 아, 이제 이루어짐의 모드는 그개 rix에 없다 천근 무게로 밀려오는 잠의 더미 더미 머리 풀고 몸져누운 산하, 그 침묵의 마지막 날까지 빛바랜 낮달은 벤체에서 졸고 잇다 그대들이여 하고 소리쳐 불러도 안개 속에 피었다 질 뿐 허물 수 없는 벽 속에 갇혀서 허망한 몸짓만이 만났다 헤어진다 떠날 것 모두 저대로 떠나고 남은 것만이 허망하게 남아 몸부림해도 일어나지 않는 바람과 두들겨도 소리하지 않는 침묵만이 깊게 깊게 가라앉는다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지난여름 모래는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별은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바닷가 언덕에 모여 근심하였네 모래는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별은 누구에게 맹세할 수 없어서 손가락에 눈물 찍어 어둠에 대고 꼭 눌러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썼네 흩어진 별의 뼈 허물어진 모래성을 지나 지난여름 바닷가 빈 마을로 파도는 배가 고파 물 먹으러 간다 파도는 빈손으로 물 만자러 간다 파도는 눈물이 나서 물 보로 간다 1989, 시집 『눈물반응』 몸성히 잘 있거라 자주 가던 소주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이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를 따라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슬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2005년 시집 『쥐뿔의 노래』 간이역 비둘기호 열차를 탄 우리 인생 속절없이 흔들리고 혹은 남루하게 흔들리고 몇몇 친구들 쪽팔리게 살기 싫다며 간이역에서 내렸다. 잘 가라, 씨방새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흰 상복을 입은 여름이 안개와 더불어 조문 왔다 가고 간이역 모퉁이 빈 가지엔 찢어진 비닐 조각 만장처럼 나부꼈다. 내 인생 아직도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안개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2005년 시집 『쥐뿔의 노래』 어느 신부님의 강론 먹이 사슬 꼭대기에 공룡이 살았습니다 먹을 줄만 알고 먹힐 줄을 몰랐습니다 암 세포도 공룡과 같습니다 다른 세포를 잡아먹으면서 다른 세포에 먹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룡이 죽었습니다 암 세포도 다른 세포가 다 죽으면 죽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주기만 하면 신적인 존재고 받기만 하면 암적 존재입니다 주기만 하면 영원히 살고 받기만 하면 죽게 됩니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 거두어 함께 사시는 신부님께서 이렇게 강론하시는 걸 들으며, 흰 눈 내려 겨울나무의 시린 발목 덮어주고 가지 위의 새도 아멘! 하였습니다. 2005년 시집 『쥐뿔의 노래』 낟알 이 풍진 세상에 한 알의 낟알로 태어나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겪으시고 쌀 이 되시다 뜨거운 솥에서 고난을 겪으시고 밥 이 되시어, 도반들과 더불어 구절양장 머나먼 고행의 길을 거쳐 해우소에서 면벽수도, 용맹정진 하시다가 문득, 해탈하시어 똥 의 형상으로 부활하시다 이밭 저밭 다니시며 이 세상 살아 있는 것들의 거름이 되시더라 <작가정신> 진달래 피는 풍경 서울 큰 병원 갔다 오는 영감 기다리는데 저 멀리 영감 지팡이 짚고 오시네 그래, 다리는 고쳐준답디까? 아니, 연골인지 뭔지가 닳아서 가망 없다네 그럼, 이제 지팡이 짚고 살아야 되니껴? 그렇지 뭐 할미는 앞이 캄캄하다 아이고, 우리 영감 다리가 세 개 됐네 곁에 있던 수다쟁이 할머니 세 개는 뭐가 세 개? 내사 보이 네 개다마는 할미가 그 흔적만 남은 한 개의 다리를 추억하는 동안 앞산 진달래 지천으로 피고……, 있었다 <내일을 여는 작가> 염 불 노스님 만나러 극락사에 갔다 스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늙었으니 눈도 침침하고 귀도 먹먹하고 다리도 성찮고 그렇지 뭐 이제 고기도 좀 드시고 건강도 돌보셔야지요 고기 먹으나 나물 먹으나 그기이 그기지 그래도 나물하고 고기하고 같습니까 소가 나물 먹고 컸으니 소 먹으나 나물 먹으나 그기이 그기지…… 돌아오는 길 숲속에 새 몇 마리 염불을 한다 그기이 그기지 그기이 그기지 산 아래까지 염불 소리 따라오고. 2010. 10. <현대문학> 삼국지풍으로 이름나기 허수아비에 쫓기고 농약에 쫓기고 사람에 쫓기며 방앗간 뒤켠에서 깨진 좁쌀 조각 쪼으며 오랑캐꽃처럼 울었다 참새만한 게, 라고 하고 수풀에 앉은 새라고 함이 나를 두고 이름이라 아, 엄혹한 세월 근근이 살아서 좋은 날 오려나 했더니 금강산 온정리 포장마차에선 통째로 구워져 사람들의 소주를 도왔도다 이게 얼마만의 참새구이인가 반가워하며, 그래도 이름만은 ‘참새’라고 불러주니 세상에 그 이름 헛되이 나는 법 없느니 <문학들,21>, 2010. 가을. 폭 설 이따금 폭설이 내려 집과 집으로 난 마을과 마을로 난 길을 지워버리는 것은 그리하여 너와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그리움의 전용도로인 하얀 길을 만들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눈이 녹을 때까지 밤새워 긴 편지를 쓰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움의 자음과 모음이 맨발로 하얀 길을 가게 하려 하심이다 <작가정신>  
10 (권서각 시인)나의 문학관 및 걸어온 길
편집자
1767 2012-05-12
 나의 문학관 및 걸어온 길 ( 두 편의 산문으로 대신) 울랄래미 약국집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애의 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했기 때문에 그 집을 약국집이라 불렀다. 약국 할배는 젊은 시절 과거공부를 했지만 세상이 바뀌어 시험도 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생계가 막막하였다. 아는 것이 한문뿐이기에 동의보감을 보고 한약 처방을 하여 섭생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약국 할배라 불렀다. 이분이 유난히 인자하고 자정이 많은 분이었다. 그런데 위로 두 손자를 낳자마자 잃은 뒤였으므로 이 아이는 자연 귀한 아이가 되었다. 이런 아이일수록 부실하기 마련이다. 아이는 몸이 약하고 입이 짧았다. 다른 집 아이처럼 푹푹 먹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뜻과 달리 그리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연필로 그려놓은 것처럼 가냘픈 형상이었다.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아이가 심심할 것 같아서 어른들은 걱정이었다. “야야, 사랑방에 가라.” 그러면 조용히 일어나서 사랑방으로 갔다. 사랑방에서 어른들 뒤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가 심심할 것 같았다. “야야, 니는 안방에 가라.” 그러면 또 조용히 걸어서 안방으로 갔다. 잘 먹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착한 아이라 할 수 있었다. 어른들 말씀 잘 듣는 아이가 가장 착한 아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아이에게 거친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 시절은 온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끼니를 잇기 어려운 집이 많았다. 이웃 아이들은 없어서 먹지 못하는데 이 아이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먹지 않으니 그의 어머니는 속이 상했다. 아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번 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좀 처먹어라! 요놈아!” 한 번도 거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후로 아이는 조금만 섭섭한 말을 들어도 우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서 울랄래미라는 별명이 붙었다. 울랄래미는 잘 우는 아이, 즉 평강공주와 같은 울보를 가리키는 지역 말이다. 아이는 웬만하면 울었다. 울지 않아야 할 때 우니까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장난삼아 울리곤 했다. 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매번 울었다. 멀쩡하다가도 누가 “운다. 운다.” 하면 울었다. 홍사용이라는 시인이 눈물의 왕국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라고 노래했는데 그 나라의 2대 왕으로 취임할 만했다. 아이가 점점 자라 총명이 과인하지는 못하나 세종임금이 만드신 한글 덕분에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한글을 대충 깨치게 되었다. 공책이 필요하여 난생 처음 장터까지 가서 공책 사야 할 일이 있었다. 평소 아이가 착했기에 그 집에서는 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고 필요한 만큼 스스로 가져가게 하였다. 아이는 한 번도 필요 이상의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날도 2원을 들고 공책을 사기 위해 5리길을 걸어서 장터에 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것이 공책보다 미리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를 잘라서 작은 피리 모양을 만들고 끝에 물들인 닭털과 고무풍선을 단 장난감이었다. 대나무 끝에 입을 대고 불면 풍선이 부풀고 입을 떼면 풍선의 바람이 빠지면서 리드가 떨려 빠앙~ 하고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것이 가지고 싶었다. 그걸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이 일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지 않은 터여서 그냥 사버릴 수 없었다. 값을 물어보니 얇은 공책이 1원이고 닭털 장난감이 1원이었다. 2원짜리 공책을 사지 않고 1원짜리 공책을 사면 남는 1원으로 그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들을 속이는 일이었다. 아이는 떨리는 가슴으로 부모의 허락 없이 공책과 닭털 장난감을 샀다. 아이 혼자 오솔길을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오월이었다. 길은 좁고 길 양쪽엔 온통 아카시아가 키가 넘게 푸르게 자라나 있었다. 호젓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아이는 닭털이 달린 장난감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불었다. 풍선이 부풀어 오르고 숨이 가빴다. 빠앙~ 하는 소리가 온 산과 들판에 울려 퍼졌다. 아이는 무서웠다. 누가 숲 속에서 뛰어나와 나무랄 것 같았다. 소리가 나는 동안 가슴이 심하게 콩닥거렸다. 빨리 풍선의 바람이 빠져나가기를 가슴을 졸이며 빌었다. 그러나 장난감은 바람이 다 빠진 다음에야 소리가 그쳤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그게 아이의 첫 번째 범죄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몸이 약하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늦게 입학을 시켰다. 5리나 되는 길을 아이 혼자 보내기가 못미더워서였다. 아이는 선생님이 두렵고 낮선 친구들이 두려웠다.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음악 시간과 율동 시간이 싫었다. 노래도 율동도 모두 부끄러웠다. 할배 앞에 꿇어앉아 천자문을 배우며 선비의 몸짓을 익힌 아이에게는 신식학교의 경망스러운 교육과정이 어색하기만 했다. 아이는 한글을 읽을 줄 알았지만 부끄러워서 한 번도 손을 들고 책을 읽지 못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그가 바보인 줄 알았다. 2학년 교과서를 받았다. 새 책 냄새가 좋았다. 1학년 때와는 달리 그림보다 글자 수가 많아졌다. 도덕과 국어 교과서의의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책을 읽어볼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많은 글자가 있는 책이 읽기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읽을 수 있는데, 하고.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책 읽을 사람 없어?” 아이는 죽을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아이는 타고난 부끄럼쟁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얼굴은 빨갛게 되고 목소리는 떨렸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놀랐다. 바보가 글을 읽은 것이다. 그 뒤로 차츰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른들 말씀과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라고 마을에 소문이 났다. 아이들과 어울릴 적에도 수박서리, 콩서리 등을 하자고 하면 슬그머니 도망을 쳤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는 것이 무서워서였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기 집 아이가 이 아이와 어울려 놀면 안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사타구니에 옻이 올랐다. 부랄이 한 근은 되게 커져서 걸음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학교에도 처음으로 결석을 했다. 지팡이를 짚고 마실을 갔다. 아이들이 얼마나 아프냐고 물었다. 어떤 아이가 말했다. “그래먼 자는 운대이.” 그러자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윤동주 시인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에 온통 부끄러움의 시를 썼지만 아이는 타고난 우랄래미요 부끄럼쟁이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도 부끄러운 기억을 하다가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운동회 때 여학생들은 두 다리에 고무줄이 있는 까만 팬티에 흰 러닝셔츠를 입었고 남학생은 고무줄도 없는 팬티에 흰 러닝셔츠를 입었다. 다리 사이로 부랄이 보일 것만 같았다. 아이는 두 가랑이에 고무줄 없는 팬티를 입는다는 것이 쪽팔려서 여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아이 어머니는 조선시대 사람이었다. 바지저고리나 두루마기는 맵시 있게 만들 줄 알았지만 아이에게 예쁜 신식 옷을 입힐 줄 몰랐다. 장터거리의 아이들은 항상 맵시 있는 옷을 입고 다녔지만 아이의 옷은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는 그게 부끄러웠다. 초겨울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을에 입기에 합당한 옷을 아이에게 입혀 주었다. 바지에 풀을 먹여서 걸어가는데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기에 좀 부끄러웠지만 어머니가 입혀주시는 옷인지라 그냥 입고 학교로 갔다. 혼자 오솔길을 걸어서 학교로 가는데 뒤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오고 있었다. 까만 교복에 하얀 옷깃이 잘 어울리는 예쁜 누나였다. 아이는 부끄러워서 걸음이 잘 되지 않았다. 누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가을 옷을 입었어.” 여학생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아이를 보고 까르르 웃었다.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울랄래미요 부끄럼쟁이인 그런 아이가 있었다. 제 구실을 할까 염려스럽던 그 아이가 자라서 시인이 되었다는 풍문이 들리기도 했다.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 중에서 문청시대 나의 문학청년 시대는 늦게 시작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술과 담배를 하며 문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없는 듯한 학생이었다. 글을 써서 교지에 발표한 적도 없으며, 문학 동아리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시화전을 열고 여학생을 만나고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 뿐 문학 소년의 티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향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변방교육대학에 입학했다. 교육대학은 대학이라기보다 초등교원 양성 기관이었다. 젊으나 젊은 나이에 초등학교 교원이라는 미래가 정해진다는 것은 꿈이 좌절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황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학점을 따지 못해 가을 코스모스 필 때 졸업하는 낙제생들의 모임인 ‘코스모스’ 동아리에 신입생 때부터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 밖에서는 문학을 하는 선배들 모임에 어울리는 것이 일과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낙제를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 2년에 졸업하는 학교를 3년 만에 겨우 졸업했다. 그 3년이 나에게는 문학청년 시절이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지역 문학단체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니까 문학회의 회원이 되라고 했다. 그래서 이른바 문인이라는 사람들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문인이나 시인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가장 설레게 하는 어휘들이었다. 모임에 나가면서부터 모임의 유일한 학생 회원이 되었다. 학교에 가는 일보다 문학회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더 잦았다. 그들은 담배를 피웠으며, 술도 잘 마셨으며, 욕도 잘 하였다. 아, 시인은 그래야 되는구나, 하고 나도 술과 담배를 배웠다. 담배는 가장 값이 싼 새마을부터 시작하여 가장 비싼 신탄진까지 한 갑씩 단계적으로 학습했다. 학습이 끝난 다음 경제적으로 나에게 합당한 백조에 정착했다. 필터가 없는 담배였다. 그런 담배를 피우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담배만은 비싼 걸 피우던 것이 그때 학생들의 풍속도였다. 왜 학생이 그런 담배를 피우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늘 대답을 준비하고 다녔다. “담배를 맛으로 피우나, 이름으로 피우지.” 그러면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학습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기가 김부식이 정지상 귀신에게 불알을 잡혔을 때와 같았다. 심장이 뛰고 더 마시면 결국 전봇대를 잡고 모두 토해내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도 주석에는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그리고 가끔 기회를 봐 가며 욕설을 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난한 노력의 결과로 술은 30대 초반이 되어서야 토하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욕설을 해도 사람들이 욕이라 여기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나는 술 마시고 담배 피고 욕하는 것만 늘었지만,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는 세월이 지난 다음 누구라면 알 정도의 문학적 성과를 거둔 분들이 많다.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 문학청년 시절 나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문학회 모임이 있는 음악다방에 나갔다. 다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한 사람이 제 시간에 맞추어 와 있었다. 검정 고무신에 허름한 작업복차림이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썼다. 얼굴은 영락없는 시골 농부의 얼굴이었다.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겸손했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는 동화를 써서 갓 문단에 나온 동화작가라 했다. 직업은 시골 교회의 종지기라고 했다. 학력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고 했다. 명문 학교를 나와야 훌륭한 문인이 되는 줄 아는 것이 내가 배운 전부인데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이가 어떻게 문학을 하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떻게 글을 그렇게 잘 쓰니껴?” “몰래요. 자꾸 읽고 자꾸 쓰다 보이 되데요.” 그리고는 통 말이 없었다. 모임에서 늘 배경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회의를 마치고 우리가 음주를 하러 갈 때 그는 늘 없었다. 그는 그때 이미 깊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첫 동화집 출판 기념회가 시내 교회에서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치기어린 문학청년들을 말함이다, 출판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로 갔다. 교회에는 그가 종지기로 있는 교회의 신도들이 한복을 차려 입고 와 있었다. 목사님도 몇 분 와 계셔서 온통 교회 사람들로 가득하여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출판기념회가 시작도 되기 전에 이미 조금씩 취해 있었다. 축하의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되었다. 교회 사람들은 찬송가를 불렀다. 문학회에서도 축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가운데 몇이 나가 축가를 불렀다. 군대를 금방 제대한 친구의 의견대로 군대에서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입술만은 돼도 입술만은 돼도 그것만은 안돼요~” 어쩌구 하는 속된 노래였다. 좌중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러나 곧 글쟁이들이란 그런가 보다 하는 분위로 바뀌었다. 주인공인 동화작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민망한 축가가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으리라. 그는 그 후로도 마을 사람들이 지어준 오두막에 김 서방이라는 개와 살면서 동화를 썼다. 그러면서 성자가 되어 갔다. 동화를 써서 받는 고료가 수월치 않았지만 그는 그 돈을 모두 어려운 이웃에 주고 자신은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했다. 그의 오두막에 갔을 때 식사 시간이 되면 소면을 한줌 삶아 건지고 까만 장물 한 종지 내어놓고 만다. “자, 먹시더.” 그게 그의 식사법이었으며 옷은 한 벌 마련하면 다 해져서 못 입게 될 때까지 입었다. 그 동화작가의 집에 임 형이 자주 들렸다. 시를 쓰는 임 형도 고향은 이곳이지만 가족들 모두 떠나고 혼자 산다. 임 형은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젊은 사업가였지만 국가보안법 관계로 모처에서 심신이 피폐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임 형은 매일 밥은 한 공기 정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술로만 사는 이였다. 술도 먹지 않는 동화작가의 집에 찾아가서 소주를 사내라 하여 밤새 마시고 밤새 울고 난리를 떨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동화작가는 몸이 건강하지 못하였으므로 견딜 수 없었다. 거의 성자가 된 사람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동화작가가 말했다. “귀신은 병호 안 잡아 가고 머 하노?” 이게 그가 태어나서 한 말 가운데 가장 곱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임 형은 문학청년들과 함께 문학행사 하는 일과 술 마시는 일로 지역 문학판의 중심에 있었다. 그 후로 임 형은 실천문학에서 시집 한 권을 남기고 일찍 갔다. 내가 교사를 하며 밥을 먹는 동안 동화작가는 기념비적인 동화를 썼다. 그가 쓴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수필을 읽고 문득 성자가 된 그가 보고 싶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그를 찾았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외식을 하자고 하니 거절했다. “집에 밥이 있는데 머 할라꼬 돈 주고 사 먹니껴?” 그가 외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구상에 굶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음식 소비를 할 수 없다고 했다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그를 당할 수 없다. 그러나 그와 따뜻한 밥 한 그릇 먹고 싶다는 나의 목적도 소중했다. 나는 그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로 했다. “모두 외식 안 하면 식당 하는 사람은 머 먹고 사니껴?” 그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게 그와 마지막 식사였다. 문청시절 또 다른 임 형이 있었다. 그는 이마가 훤하고 입이 크다. 문우를 만나면 큰 입을 최대한 벌려 시원하게 웃었다. 수필의 매력에 빠져서 전업 수필가가 되겠다고 교사를 그만두고 구멍가게를 차렸다. 그때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박연구 수필가의 수필집 『바보네 가게』를 좋아해서 가게 이름을 ‘바보네 가게’로 하였다. 시 쓰는 임 형을 비롯한 우리들은 술집에 갈 돈이 없으면 바보네 가게에 죽치고 앉아서 소주랑 안주를 축냈다. 산적 같은 청년들이 가게에 죽치고 있으니 손님이 쉽게 들어올 수도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바보네 가게’는 쫄딱 망했다. 임 형은 후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된 뒤에도 가끔 승복을 입고 나타나곤 했는데 원래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깎으니 더 보기가 좋았다. 나도 나이가 더 들어 대머리가 되면 가발을 쓰지 않고 남은 머리를 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친일불교 연구에 일가를 이룬 학승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천재성을 인정받아 시집을 낸 바 있는 신 형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젊은 나이에 몹쓸 병을 얻어 잘 걸을 수가 없었다. 이 지역 문학청년들의 선망인 그를 찾아갔다. 조그만 셋방에 살았는데 도회풍의 천사 같은 여자가 그의 곁에서 수발을 들고 있었다. 해사한 얼굴에 달변인 그는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는 문학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술을 마셨다. 벽에 붙은 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위트에 넘치는 언어의 발랄함이 있었다. 그를 보면서 시를 잘 쓰면 미인을 얻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몰래 했다. 그의 병세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그는 목발을 짚고 우리가 자주 모이는 음악이 있는 찻집에 가끔 나타났다. 그는 여자에게 얹혀사는 처지고 나는 학생이니 술 마실 돈이 없었다. 가게에서 소주를 사와서 다방에 앉아 술을 마셨다. 1970년대 찻집마다 똑같은 갈색의 엽차 잔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어 엽차 잔에 따르고 엽차 마시는 것처럼 몰래 마셨다. 사실 그의 몸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상태였다. 그는 달변이었고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와 함께 했던 분위기가 매우 시적이었다는 느낌이다. 얼마 후 그는 하늘로 갔다. 늘 그가 하늘로 가는데 일조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아마 별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가 김 형은 담배조합에 서기로 일하는 분이었다. 돈을 한 가방 넣고 시골에 가서 농민들이 농사지은 잎담배를 사오는 일을 한다. 퇴근 무렵에는 큰 가방을 들고 오는 경우가 있다. 가방에는 잎담배를 사고 남은 돈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 가방을 들고 대폿집으로 퇴근하는 날이 더러 있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돈이 많았다. 술값은 언제나 그가 냈다. 때로는 그의 집에 가서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까만 후배들인 우리를 황공하게도 그의 부인에게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술상을 보아오라 했다. 밤늦게까지 마시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우리가 겨우 잠에서 깨면 그는 이미 깨어서 엉덩이를 하늘로 추켜들고 엎드려 글을 쓰고 있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깨알 같은 글씨로 대학노트에 빽빽하게 적었다. 나는 늘 돈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술자리가 파할 때면 매번 그는 당당하게 걸어가서 주모에게 말한다. “마구 얼매이껴?” 마구는 모두의 고장 말이다. 그 자리의 모든 매상을 계산하겠다는 뜻이다. 그런 당당한 뒷모습이 더 없이 멋있게 보였다. 나도 언젠가 당당한 모습으로 ‘마구 얼매이껴?’라고 묻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담이 좋았다. 술자리에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얼마 지나면 문예지에 그가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그대로 소설로 발표되곤 했다. 그의 단편이 평론가들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 “결혼을 머 그키 일찍 했니껴?” “늦게 하면 그걸 마이 못하지.”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그리고 그는 아내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조선에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음악이 있는 찻집이 있었다. 나는 가끔 혼자 찻집에 우두커니 혼자 있을 때도 있었다. 저쪽 자리에 그가 미모의 여성과 마주 앉아 있었다. 한참을 심각하게 앉아 있더니 여자가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내 자리로 왔다. 술 마시러 가자고 했다. 아예 여관에 들어 밤새 마시자 했다. 도우미 여성도 한 사람 불렀다. 그리고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 여관에서 서각이와 술 마시고 늦게 간다 했다. 술이 오고 여자가 왔다. 막 시작하려는데 자그마하고 예쁜 그의 부인이 들어왔다. 집에 전화해서 장소를 소상하게 일러준 게 화근이었다. 도우미 여자는 황급히 도망을 갔다. 그의 예쁘고 착한 부인은 연암 박지원의 소설에 나오는 허생의 아내처럼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는 신이 뚤버져서 아침에 라면 봉지로 틀어막아 신고 학교 갔니더. 그런데 이게 머이껴?” 그는 큰 키를 구부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 했네.” 그는 시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아내를 따라갔다. 늘 그가 술값을 내기에 나는 그가 돈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기도 어려우면서 가난한 문청들에게 늘 보시를 했던 걸 그제야 알았다. 얼마 후 그는 전업 작가가 되어 서울로 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서울에 상 받으러 갔을 때 그는 무교동 어느 대폿집에서 축하주를 사 주었다. 나는 추운 겨울 상 받으러 간다고 처음으로 단벌 양복을 입고 갔다. 몹시 춥게 보였을 것이다. 그의 부인은 소설가가 입던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입혀 주었다. “시인은 이런 걸 입어야 되니더.” 그 겨울 그걸 입고 중앙선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 문청 시절의 객기와 치기와 열정과 슬픔이 차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중에서 권서각(權鼠角) 1951년 경북 순흥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권석창. 안동교육대학과 대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벌판에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눈물 반응』『쥐뿔의 노래』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등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이사  
9 (김은령 시인) 자선 대표작 file
편집자
1917 2012-04-14
 통조림 대형마트 진영대 위,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완두콩 통조림 금빛 양철 뚜껑을 열어젖히는 순간 오래된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들은 거세당한 얼굴들로 빠져 나오고 생의 절정인 그 순간만을 불하받은 푸른 알갱이들은 유효기간도 모르는 채 둥글고 깊은 진공 속에서 발아의 꿈을 꾸고 있다 이도시의 중앙으로 진공의 통로가 열려있다 그 길 따라 가면 발아점을 상실한 21세기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선택되어 포박당한 우리들의 탱탱하게 부풀어진 욕망의 결정들 부패되지 않게 봉인되어 역사의 한켠에 빼곡하게 진열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한 두엄조차 될 수 없는…… 봄날은 간다 오봉순, 삼십대, 나이 정확히 모름 경북 경산시 하양읍 동서3리, 이장님의 눈총과 배려 속에 마을회관에서 2년째 살고 있는 여자 남편, 가끔 보이기도 함 출생내력, 알지 못함 한글을 모를뿐더러 숫자개념이 없어 시간제로 일하는 단순노동의 임금을 종종 떼어먹히는 줄도 잘 모름 유일한 희망이자 낙은 그날 번 일당으로 마을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맥주 한 병 사 마시는 일 아이 셋, 또래와 같이 학원도 보내야 하고 컴퓨터 사 달라고 졸라 당분간 맥주 한 잔 포기한다고 구멍가게 아줌마와 이장님께 선언함 대추꽃 피는 마을 마을회관 높은 방 벽과 벽 사이 삼각의 꼭지점 거미, 집을 짓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막 기진맥진한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투명한 알 지금 부화 중이다 직소*에 들면 길 있는가 내 안에 곧게 뻗은 길 있는가 내 정신을 직선으로 깍아 내릴수록 삶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生이여 내가 나를 얼마나 더 깍아 내려야 너의 정점과 만나겠느냐 스스로 높아지기 위해 제 살을 깍아온 절벽까지 와서야 꼿꼿하게 일어서는 직소에 들면 굽히지 않으면서 낮은 곳으로 흐를 줄 아는 직소에 들면,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패배나, 굴욕이나, 기다림…… 때론 엉겨 붙지 못하는 희망 같은 거 순결한 저 물소리에 씻겨지겠냐 내 정신의 절벽까지 와서 生이여! 너에게 묻노니 나 이대로 직소에 들면 네에게서 곧은 길 하나 얻어 저 관음에 이르겠느냐 *직소 : 변산8경 중 제 1경인 직소폭포 깡, 꽃잎을 반이나 뭉텅 뜯기 우고도 시들지 않은 수레국화가 뜯긴 꽃잎의 무게만큼 땅 쪽으로 기우는 몸을 끙, 들어 올린다 무심하게 놀린 누군가의 손짓거리가 분명해 바라보는 내가 참 불편하다 차라리 깔끔하게 지고말지, 무슨 깡을 부리나 생각하는 사이 벌 한 마리 날아와 꿀을 빤다 꽃의 목대가 파르르 떨린다 수레국화가 생애의 완성을 위해 반편의 얼굴로 매춘하는 지금 꽃의 뿌리는 깡,깡,깡 울 것 같다 반편인 내가 살아 보겠다고 파르르 떨 때 마다 저 까마득한 곳에서 깡,깡,깡 우는 엄마처럼 살아오는 동안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 목울대가 눌리어 파랗게 질릴 때 내가 내미는 히든카드는 ‘깡’, 울어서,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린 내 뿌리의 마른 울음인 그 깡,이다 행운 내가 ‘행운’이라 말하며 뚝 꺾었을 때 악! 하고 새파랗게 질렸을 그 순간이 빳빳하게 정지 된 채 있습니다 토끼풀 一家는 원하지 않은 일족을 어떻게든 내쳐야 했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하늘은 맑죠 햇살은 눈부시죠 아롱아롱 여울지는 초록의 촘촘함에서 행운이라 명명되어진 특별히 다른 하나를 가져가라는 유혹 얼마나 매혹적이었겠는가를 하여, 이제는 부끄러운 내 싸구려 취향은 토끼풀 가의 음모에 휘말려 그들이 축출시킨 가문의 기형아와 함께 깔끔하게 코팅처리 되어 책갈피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늦은 봄날 나는 토끼풀 일가가 찾은 행운이였던 거지요 꽃들의 팔뚝 연뿌리 두어 개를 사왔다 뽀오얗게 다듬어 얄팍얄팍 썰어 놓으면 꽃 모양 반찬이 되는 그것 이전의, 팔뚝같이 생긴 연꽃의 뿌리 흙 털고 껍질 벗기는 중에 스치는 생각 뿌리가 뿌리 이전의 한 알의 씨앗이었을 때의 설레임이 꽃을 피우는 일은 깜깜한 진흙 속에 파고들어 통뼈인양 시치미를 떼고 버티는 노고 숭숭숭숭 바람 든 이력을 짜-잔 하고 꽃모양으로 변해주는 눈물겨운 결단 깨끗이 다듬어져 도마 위에 나란히 뉘인 백골 같은 그 뿌리 겨냥해 칼 갖다 대다가 해 본 생각 진흙구렁텅이인 이 땅덩어리에 피어 있는 꽃들의 팔뚝 경배, 그 절집 뜨락에 불두화 피었습니다 등애……,나비……, 진딧물 까지 도나 개나 다 모여 들었습니다 와중에 꿀벌 한 마리 그만 코 박고 죽었습니다 둥글고 환한 불두佛頭가 감춘 건 꿀이며 독이었던 것 부처도 아닌 것이 부처의 형상만 훔쳐 야단법석, 난장을 펼치는 저것을 우러러 손 모아 절한 이 어찌 저 꿀벌뿐이겠습니까 밥줄이거나 사랑이거나 오체투지로 가 닿아 절명한 곳이면 그도 성지 아닐런지요 접견하다 서울 사는 오모시인이 부처님 오신 날 즈음해서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원 합니다, 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안부를 전자 우편으로 보내 왔다 아내와 함께 도봉산 산행 길에 들렀던 관음암에서 찍었다는 사진 한 장도 따라 왔다 현판도 주련도 보이지 않는 당우 햇살이 사선으로 비켜 가는 섬돌 위에 나란히 계신 흰 고무신 한 켤레 닳고, 닳아서 찢어진 뒤꿈치를 이제는 사라진 일거리 인, 이불호청 꿰맬 때나 쓰는 굵은 흰 무명실로 꽁꽁 꿰맨 고무신 한 켤레 나도 모르게 두 손 가슴에 모우고 모니터를 향해 꾸벅 절했다 침향 그것은 구천까지 가 닿았으나 내침당한 생목숨이 다시, 사랑 같은 지독한 문양을 새긴 죄로 천길 땅속에 매장 당한 나였던 것 한 천 년 내가 나를 버리다가 항아의 물길이 열릴 때 수월관음 발아래 엎디어 젖은 몸 사루는 것 뼈 속까지 태워 흔적 없어지면 비로소 화엄에 침투 할 수 있는 것 차경借憬 이제 막 피고 있는 석류꽃 꽃 진 자리가 불안한 늙은 산능금나무 어제처럼 그렇게 지는 해 어제 보다 조금 더 비켜서 눕는 내 그림자 가, 있는 마당에 흰나비 한 마리 왔다가 가네 왔다가 그냥 가네  
8 (김은령 시인) 나의 문학관 - 갈증 혹은 허세
편집자
2463 2012-04-14
 갈증 혹은 허세 문학관이라니! 나에게 그런 것이 있기나 하겠는가? ‘문학’이라는 단어의 값도 아직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시라는 것도 그렇다. 초등학교 삼학년 때 동시 써오기 숙제가 있었다. 그 무렵 우리집은 가세가 막 펴지는 때였던지 꽤나 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 집 뒷곁에 꽤나 넓은 남새밭과 더불어 집 울타리 안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전에 살던 집엔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감나무 한 그루 없었으므로, 집안의 감나무에서 직접 감을 따 먹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신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숙제로 써간 동시는 희미한 기억으로 되살려 보니 감나무에 까치가 날아와 ‘감하나 주세요. 감하나 주세요.’라고 했다는 것과 그렇게 해서 나와 까치가 친구가 되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때 아침 마다 감나무에서 깍깍깍 하고 까치 소리를 들었기에 그것을 형상화해서 쓴 내용이었는데 어쩐 일로 선생님께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칭찬을 하셨고 그 일을 계기로 학교 대표로 군 대회에까지 나가게 되었다. 우리학교가 생긴 이래 군 대회에서 문예부(?)가 처음 입상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군 대회에서 쓴 작품(?)은 ‘나비’라는 제목이었는데 어린아이 눈에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개 짓이 아름답게 보여야 정상일진데 참 꼴값스럽게도 나는 꿀을 찾아 ‘노를 저어간다’고 했다. 아마 하늘을 나비의 바다라고 하였던 것 같다 그 일 이후 선생님(진은옥선생님이시다)께서 이담에 크면 ‘시인’이 되겠다는 주술 같은 말씀을 나에게 남겨 주셨고, 나는 그것을 ‘진언’처럼 간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창시절, 청년시절을 그냥 보냈으며, 시라는 것은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 했었고, 급급하게 살았다. 어찌어찌하여 30여년 후 시를 ‘생각’ 사람이 되었다. 시를 생각하고, 어쭙잖게 긁적거리기 시작한지 15여년이 되었다. 이 짧은 시간동안에 시에 대해, 문학에 대해 무슨 적확한 생각을 가졌겠는가? 그러나 첫 시집(통조림)과 두 번째 시집(차경)의 해설에서 똑 같이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 ․ ‘자기 성찰의 서사’라는 분에 넘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을 보면, 나의 시(문학)에 대한 생각은 거기쯤이 아닌가 싶다. 지금 나의 이름 앞에 혹은 뒤에 자의로 타의로 ‘시인’이란 이 위험하고 황홀한 것을 달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갈증 혹은 허세이다. <김은령의 연보> *1960년 1월 7일 (음력), 대구시 대명동에서 태어났으나 돌배기 시기 경북 고령군 성산면 박곡동으로 이사. 호적엔 1961년 3월 1일 경북 고령 출생으로 되어 있음. *1967년 박곡초등학교 입학, 6학년 까지 줄곧 부반장(여자는 반장을 할 수 없었음)을 할 정도로 꽤나 똑똑하다는 소리 들음. 3학년 때 동시 ‘우리집’을 계기로 학창시절 백 일장에 다수 참가. 다수 수상하였음. *1973년 성산중학교 입학, 2학년 3월 아버지 돌아가심. 충격과 슬픔으로 몽상가가 됨, 성적 도 떨어짐. 급격하게 가세 기울어 짐. *1976년 대구여자 상업고등학교 입학, 상업고등학교임에도 ‘부기’와 ‘주산’ 급수를 취득하지 못함. 반 62명중 석차 36등으로 졸업함. 내 생애 가장 짜증나고 적응 못한 시절이 었음. (실패.1) *1979년 고총사촌 오빠가 대표로 있는 회사(꽤 규모가 큰 건설관계 회사)에 취직. 도대체 세상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기 시작함. 이후 2년간 사회생활 경험.(실패.2) *1982년 7월, 가족 몰래 경북 상주에 있는 남장사 부속암자인 모 사찰에서 절밥을 먹기 시 작함, 몸의 부적응으로 결국 절집에서 퇴출, 집으로 돌아옴.(실패.3) 1년 정도 구 속 수준에서 치료와 감시받음. *1986년 4월, 구속의 장소가 집에서 남편 김용식의 집으로 바뀜. 딸 둘을 낳았고, 지금 까 지 그런대로 잘 견디고 있음. *1998년 『불교문예』에 송수권시인의 심사로 <겨울 폭포>외 9편으로 신인상 받음. *1999년 2월,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대구지회 입회함 .*2000년 1월,『사람의 문학』편집위원으로 합류, 2011년 말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 음. *2000년 2월, 염무웅, 김용락, 두 분 선생님의 추천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본회 입회함. 김용락 시인의 추천으로 대구시인협회에 입회함. *2000년 3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함. *2001년 2월, 한국작가회의 대구지회 총무직을 맡아 이하석, 김용락 시인을 회장으로 차 례로 모시고 4년간 일하였음. *2001년 봄, 22인 공동시집 『작은새가 잠긴 늪』에 참여함. *2002년 9월, 도서출판 <모아드림>에서 첫 시집 『통조림』출간함 *2003년 6월, 30여명의 직원을 데리고 회사를 운영하던 남편이 준비 없이 완전히 망함. 문학 판엔 철저히 함구하였음. 문학 판을 제외한 모든 관계들로부터 간벌 당함. 학업 포기함. *2004년 3월, 가산의 풍비박산 와중에 어떤 힘에 끌려 현대불교문인협회 대구․ 경북지회 발족함. 2007년 6월까지 초대지회장직을 수행하였음. *2009년 2월, 한국방송통신대학에 복학하여 2010년 학업 마침. *2010년 3월, 영남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입학함 *2012년 2월, ‘원효 설화 연구’ 논문으로 영남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석사 마침. 현재 박 사 과정 진행하고 있음. *2012년 2월, 대구시인협회 제무국장직 맡음 *2012년 2월, 도서출판 <황금알>에서 시집 『차경借憬』출간함.  
7 (김종인 시인) 나의 문학관 file
편집자
2690 2012-03-09
 시란 무엇인가 김종인 1. 들머리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시를 쓴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시는 내게 자연스레 찾아온 것 같다. 김천중학교 2학년 때, 작문을 가르치던 배병창 선생님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기(旗)’가 당선된 시조 시인이셨다. 그 때 우리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석정(石井)’이란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다. 시를 공부하고 시를 쓰게 된 최초의 사건은 아마 이 때부터일 것이다. 우리는 선생님께 시조를 열심히 배웠다. 언어를 갈고 닦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시조의 전통적인 율격에 언어를 싣는 법을 그 때 배운 것 같다. 내가 쓴 ‘무지개’라는 시조가 처음 활자화되어 ‘송설’이란 교지에 실렸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문예반 특별활동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좋은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감상하게 했다. 아직도 나는 그 때 선생님께서 읊어주셨던 김종한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란 시를 잊지 않고 있다.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같은 구절이나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傳說)만 길어 올리시네” 같은 구절이 생각나면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는 흘러오는데/ ― 물동이에서도 아즈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에서는 그만 아득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김천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맥향(麥鄕)’이란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맥향에서는 주로 선배들에게 시를 배웠는데,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은 동화작가 윤사섭 선생님이셨다. 당시 도서관을 맡고 있었던 선생님이 좋아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밤낮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참 행복했다. 도서관이야말로 나에게는 천국이었다. 당시 특별활동 시간에 문예반을 맡고 있었던 김문웅 선생님은 대구에서 고등공민학교 교사를 하면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면서 느낀’ 것을 쓴 자작시를 칠판에 적어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내 마음 속에 오래 오래 기억되고 있다. 도시 변두리의 불빛과 밤늦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화자의 마음과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는 나이 먹은 학생들의 삶이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오랜 세월 뒤 나는 떡갈나무 등걸에 박힌/ 내 화살을 찾았네/ 그것은 여태도록 꺾이지 않았네./ 노래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내 친구의 가슴속에 고이고이 되살아 있는 것을 나는 보았네.” 헨리 롱팰로우의 시 “화살과 노래(The Arrow and the Song)"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허공에 대고 화살을 쏘았는데, 어디에 떨어졌는지 몰랐으나, 오랜 세월 뒤에 떡갈나무 등걸에 박힌, 내가 쏜 화살을 발견했다는 것과 허공에 대고 노래를 불러, 그 노래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몰랐으나, 오랜 세월 뒤, 내 친구의 가슴속에 그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이고이 되살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온전히 기억할 수 없지만, 선생님이 가장 절실하게 쓴, 그 현실적인 삶을 노래한 시가 내 가슴속에 화살처럼 박혀 오늘 내 시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북대학교에 입학하여 복현문우회란 문학 동아리에서 시를 공부하면서 강의시간에 김춘수 시인에게 시론을 배웠다. 시집 “타령조 기타”부터 시선집 “처용”과 “꽃의 소묘”까지 열심히 읽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는 새로운 것이었다. 어렵고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무의미 시론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와 같은 ‘처용’이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越冬하는 인동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라는 ‘인동잎’을 줄줄 외우며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를 깨우치기 위해 무진 노력했으나 도무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초겨울의 붉은 열매’와 ‘꽁지가 하얀 새’,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과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이라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연결이 지금도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입술에 맴돌고 있다. 2. 시란 무엇인가. 시란 시인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샘물을 퍼내는 행위가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욕구를 풀어내는 행위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하는 행위가 아닐까.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 시대와 자연과 사회와 사물과 자기 스스로와 대화하고, 고민하고, 발언하고, 소통하는 자가 아닌가. 신동엽 시인은 스스로가 “참여, 즉 자기와 자기 이웃에의 인간적인 애정과 성실성”을 갖춘 시인이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는 시인정신론에서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이나 “언어를 재료로 한 무의미한 공예품”을 비판하고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대로의 인생 인식과 사회 인식과 우주 인식과 우리들의 정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스런 몸짓으로 창조해 내야 한다”고 했다. 하여 시인은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해야 한다고 했다. 아아, 시인이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 것을 내가 왜 일찍이 몰랐던가! 군에서 제대하고 울진종고에 초임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1980년대 초, 어느 날 국어시간. 나는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시인의 시를 가르치며 시와 삶에 대해 거품을 물었다. 한 학생이 왈, 그렇게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선생님은 시를 쓰느냐고, 어떤 시를 쓰는 시인이냐고?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정말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등단한지 20여 년 동안, 저 가혹한 80년대의 역사 한복판, 그 현장에서 발품을 팔아 온몸으로 시를 써 오면서 ‘교육과 문학’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허나 천생이 우둔하여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김종한 시인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처럼 아름다운 서정과 ‘맥향’에서 배운 현실주의적 절실함과 ‘복문’과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에서 배운 아름답고 선명한 이미지와 신동엽 시인의 시인정신을 자양분으로 하여, 쉽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 한 편 쓰고 싶다. 내 친구의 가슴속에 화살로 박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이고이 되살아나는 그런 시 한 편 쓰는 것이 소원이다. 3.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 현재 우리 나라에는 수만 명의 시인이 있으며, 한 계절에 발간되는 시집은 제쳐두고라도 20여 종의 문학지에 발표되는 시가 500여 편은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이름 있는 문학 잡지의 경우 잡지마다 10명 안팎의 시인들이 20여 편 정도의 시를 발표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좋은 시를 실었겠지만, 그 많은 시들을 읽어보아도 가슴을 울리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감동적인 시 한 편, 정말 아름다운 이미지로 눈을 씻고 다시 읽게 하는 시 한 편,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입이 스스로 읊조리게 하는 리듬에 안달이 나는 그런 시 한 편 찾을 수가 없다. ‘푸념도 못 되는 넋두리’이거나, ‘저도 모를 소리를 암호처럼’ 나열한 것이거나, 풍자와 반어와 역설과 모순어법으로 저의를 감추고 난해함을 자랑하는 오만한 시거나, 아직도 음풍농월이요, 모더니즘이요, 이미지의 장난에 다름 아니니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하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집은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인은 차고 넘치는데, “시인다운 시인은 찾아보기 힘들구나”라는 장탄식 뒤에는 오늘날 우리들의 시에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는 말이다. 신동엽 시인은 이미 40여 년 전에 시인정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우리 현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大圓的)인 정신은 없다. 정치가가 있고, 이발사가 있고, 작자가 있어도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과 철인은 없다. 현대에 있어서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시인 정신이며 시인혼이 문제되지 아니하고, 그 시업가의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 문제된다. 핵분열 연구가가 헐리웃 광대에게 입힐 기구망신스런 옷을 꾸며내듯, 또는 발광한 빠리의 화가가 자기도 모를 색채로 화면을 난칠해 놓듯, 시업가들은 언어를 화구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지금 읽어보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비판이다.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일 뿐이며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으로 언어를 화구 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양산해 내고 있다는 비판이 귀에 따갑다. 주위를 둘러 보라. 신동엽 시인이 찾아 헤맨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 은 어디 있는가. 아니 그가 쓴 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시인 정신이며 시인혼으로 쓴, ‘생명의 발현이며,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시를 찾아 이 좋은 계절 여행을 떠난다. 4. 우리가 보통 시라고 부르는 것은 서정시를 말한다. 오늘 날 우리가 보통 시라고 부르는 것은 서정시를 말한다. 시의 종류, 시의 분류, 서정시란 무엇인가 따위의 학술적 논란은 워낙 복잡하니 그만두고, 소위 '서정시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통해 “아! 답답하구나. 잃어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을까?”의 해답을 구해보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 - 이인로 시는 원리와는 관계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허균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정약용 요사이에는 시가 없다. 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다운 시가 없는 것이다. -김득신 시는 제 2 의 자연이요, 생명의 표현이므로 하나의 유기체다.-조지훈 우리들의 선조 시인들이 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견해들을 살펴 종합해 봤을 때, 서정적 장르로서의 시를 의미하며, ‘마음에서 우러난다, 생각함이 깊다, 사상이 있어야 한다, 생명의 표현이다’라는 것을 ‘시다운 시’로 생각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하겠다. 서정적인 장르로서의 시는 주관적이고, 순간적이며, 감정적이다. 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의 서정시란 순수한 감정 체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언어의 의미 전달 기능보다는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이 자기 개개의 상태에 있어, 체험에 있어, 줄거리 없이 표출하려 할 땐 우리들 앞에는 서정시가 놓인다.”라고 치모프예브가 「문학이론」에서 밝힌 것은 서정시에는 ‘개개의 상태, 체험, 줄거리가 필요 없는 표출’을 서정시의 기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서정시란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이란 주관적임을 뜻하므로 시인의 눈을 통하여 관찰되는 사물, 시인의 영감에 의하여 감지되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정시이다 “모든 좋은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발생적 표현이다”라고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 서문에서 말했다. 물론 이 말에는 감정의 중요성이 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헤겔 역시 “서정시의 내용은 주관적이며 내면적인 세계이고, 숙고하고 느끼는 감정의 세계이다.”라고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서정시를 “고양된 감성의 서술”이나“열정적 감정의 직접적 표현으로 보게 된 것이다. 5.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 강물은 흘러가고 산은 언제나 푸른 자태로 저렇게 서 있는 것이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 미학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중에서 고단한 몸 주저 마시고 오세요 가까이 와서 가만히 볼을 비벼 봐요 가파르게 오른 길보다 더 숨이 찼던 당신의 화산지대를 지워드리겠어요 사느라 이마에 맺힌 땀이 꽃보다 향기로워요 삶이란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 마음놓고 키가 클 수도 없고 앞을 내다볼 수도 없는 안개의 세월 가슴 속 깊이 뿌려주는 사랑의 비로 내 오래 간직한 빛깔을 가져가세요 내 오래 품어온 향기를 묻혀가세요 그러고도 잊지 못할 그리움이 있다면 빈손이어도 좋으니 다시 걸어오세요 맨발이어도 반가우니 다시 다가서세요 그땐 꽃잎 살포시 열어 웃고 있겠어요 (김윤현, ‘두메양귀비- 들꽃시편 Ⅱ’ 전문) 두메양귀비는 고산지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데, 7-8월에 황록색의 꽃이 피는 야생화이다. 두메양귀비가 시적 화자가 되어 속삭인다. “고단한 몸 주저 마시고 오세요/ 가까이 와서 가만히 볼을 비벼 봐요”라고. 두메양귀비가 사는 곳까지 찾아갔다면, 그는 아마 지치고 피곤한 몸일 것이다. "삶이란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이니 "사느라 이마에 맺힌 땀"이 그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두메양귀비는 다시 속삭인다. “내 오래 간직한 빛깔을 가져가세요/ 내 오래 품어온 향기를 묻혀가세요”라고. 바람과 냉기의 연속적인 기류를 맞으면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빛깔과 향기를 나눠주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이미지가 두메양귀비이다. 이것이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피었다가 또 저렇게 지는 것이다.”란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들꽃처럼 아름답고 예쁜 서정시이다. 귀뚜라미가 울음을 멈췄을 때 어머니 돌아가셨다 마당에 동그랗게 남아 있는 달빛 고목이 된 느릅나무는 옛 자리에 그대로 서서 두 손 맞잡고 머리 숙였다 남쪽으로 갔다는 아들은 반 백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하늘가 저쪽 구석에서 누군가 이것이 다다 이게 다다 라고 외쳐댔다. (김규동 “임종” 전문)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쓴 시인 것 같다. 마당에 동그랗게 남은 달빛, 고목이 된 느릅나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한다. 아니 고목이 된 느릅나무가 곧 어머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시가 끝났다면 거저 평범한 어머니들의 죽음일 뿐이지만 시인은 그 의미를 확산시킨다. ‘남쪽으로 갔다는, 반 백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임종을 맞이하는 북쪽에 사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슴이 찡해온다. 개인의 슬픔을 넘어 민족의 슬픔이요, 그러한 어머니들이 남과 북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남과 북으로 헤어진 어머니와 아들들이 만나고 있다. 이대로 만남이 지속된다고 해도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고, 만남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수많은 늙으신 어머니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아들도 없이 쓸쓸하게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하늘가 저쪽 구석에서 “이게 다다”라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것이 다인데 왜 그들은 만나지 못하는가. 이대로 남과 북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마지막 소망을 정치적인 이유로 끝내 외면할 것인가. 하루빨리 남과 북의 모든 어머니와 아들, 형제자매들과 아버지들의 마지막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백석의 시를 보는 것 같다. 짧지만 그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감동적이며 심금을 울린다. 서정시의 본령을 보는 것 같다. 공사판, 자갈에 깨지고 흙에 뒹군 하루를 등에 진, 사내가 방에 들어선다 장화에 곤죽이 되어 들러붙은 허기진 저녁도 그를 따라 들어선다 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나날의 노동에 겨워 자신의 몸이 늪이 되는 밤, 붉은 꽃망울 터 올린 가로등이 탈진한 육신의 향기 진동하는 방에 무단 침입해 있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 장마 곰팡이들은 잠 속까지 번져든다 구절초 푸른 혈관을 쥐어 잡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일터에서 하얗게 버티던 시간들이 그가 잠든 동안 삐걱거리는 그의 식탁 위에 고봉밥으로 올라와 있다 그의 몸이 맑게 개여 다시 깰 때를 기다려 구절초 수북하게 차려져 있다 (권순자 “구절초” 전문) 공사판에서 하루의 노동을 마친 사내가 곤죽이 되어 그 피로하고 허기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왔다. 저녁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잠에 떨어진 사내의 꿈속에 고봉밥 같은 구절초가 핀다. “사내의 방에서 구절초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라고 하지만 기실 사내의 방에는 구절초가 없어도 좋다. 아니면 공사판에서 일하다 돌아오는 길에서 구절초 한 그루를 캐어 화분에 올리고 사내의 방에 가져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사내의 식탁 위에 고봉밥처럼 피어 있는 구절초, 사내는 일용할 한 끼의 고봉밥을 위해 곤죽이 되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와 쓰러졌다. 그 식탁 위에 피어난 구절초의 이미지가 바로 고봉밥 같다는 것이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놀고 먹는 부자들의 식탁에 구절초가 고봉밥으로 피었다면 말이 되지 않지만, 공사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지쳐 쓰러진 사내의 꿈속에서 고봉밥으로 피어나는 구절초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아름답다. 꼭 맞는 표현이다. 가을의 초입에서 우리들의 산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쑥부쟁이나 구절초의 모습을 보면서 이 시를 읽어보자. 좋은 시란 이런 것이다. 감동적인 시란 이런 것이다. 서정시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푸른 안개에 덮인 골짜기를 지나며 나도 머리를 깎고 싶어졌다 허공에 걸린 절집에 머물면서 새들만 날아드는 산속에서 차르르 어깨를 흔드는 기척 검고 숱 많은 내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인 듯 서늘해지는데, 산이 꺾이는 골짜기 벼랑 위 한 뼘 햇살이 머무는 곳에 작은 무덤, 언젠가 산에서 만난 아이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처럼 은방울꽃 피어서 웃고 무덤 주인은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갔을 터인데 이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생을 무덤 곁에서 우는 벌레도 있다 두 손 모아 절을 하듯 날개를 비비며 (김수영, “은방울꽃 무덤” 전문) 옛날 그리스의 전설에 용감하고 두려움 없이 싸우는 청년이 있었는데, 사냥을 갔다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독사를 만나 힘겨운 격투 끝에 승리를 했다. 그러나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질 듯이 걸어가는 그의 발자국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고 그 핏방울이 떨어진 자리에서 예쁜 꽃이 방울처럼 피어났다고 한다. 바로 이 꽃이 "은방울꽃"이다. 초여름에 높이 20~35㎝의 꽃줄기가 나오며, 지름이 약 1㎝ 쯤 되는 종 모양의 순백색 꽃이 5~10개 가량 나란히 밑을 향해 핀다. 가느다란 줄기에 초롱초롱 매달린 하얀 꽃망울들을 야생화 답사에서 본 적이 있다. “푸른 안개에 덮인 골짜기”에 많이 피는 은방울꽃, “허공에 걸린 절집”을 연상하고는 하얗고 매끄러운 “종 모양의 꽃”을 보면서 머리를 깎고 싶다고 한다. “작은 무덤,/ 언젠가 산에서 만난 아이”에서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로 은방울꽃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있다. 절묘하게 은방울꽃을 형상화하고 있다. 아니다. 아름답다. “이 향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라면서 딴청을 부리는 듯하지만 “일생을 무덤 곁에서 우는 벌레”로 연결하면서 향기가 벌레소리로, 다시 절을 하듯 날개를 비비는 모습으로, 즉 향기-벌레소리-절을 하듯 비비는 날개로 후각적인 이미지가 청각적인 이미지로, 다시 시각적인 이미지로 은방울꽃을 형상화시키고 있다."고양된 감성의 서술"이나“열정적 감정의 직접적 표현”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서정시라 하겠다.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을 풀어 쓴 정민 교수는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픈 사랑의 이별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시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연암은 말한다. 그런데도 정작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쓰지 않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고 쓰고 있구나. 먼데 사람까지도 이목구비를 단정히 그려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화가는 이발소 그림이나 그려서 좋을 화가다. 이런 자들과 어찌 문장의 정경(情境)을 말하랴. 사랑을 모르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 사랑의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을 얹어낼 수 없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 그림에 먼 뜻이 담길 때라야 경(境)은 살아난다. 할 말을 다 해버리면 경(境)은 사라진다. 이 이치를 모르고서는 문장의 정경(情境)을 운위하지 말라. 벌레의 더듬이를 보고, 꽃술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는 문심(文心)이 있는 자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보고 무릎을 치는 사람은 글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물과 만나 그 의미를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도 사물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나 진배없다. 아름다운 새소리에 아무 느낌도 일지 않는 사람은 귀머거리나 한가지다. 정신의 귀가 멀고, 가슴의 눈이 멀고 보면 예술은 빛을 잃는다. 성색정경(聲色情境)은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물들 속에 녹아 있다.” 좀 길게 인용한 것은 위의 시를 읽으면서 너무도 아쉬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프다고 쓰지 않고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고 쓰고 있구나.”란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리 처절한 사랑의 아픔을 경험해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시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아니다. 감동이 물결쳐 오지 않는다. 아픔이 가슴을 적시면서 여운이 남아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랑의 마음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을 얹어낼 수 없는 자 문학을 말하지 말라.”를 보라.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6. 다시, 시란 무엇인가 고등학교에서 시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시란 무엇인가 물어 보았다.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시의 여러 가지 요소들과 이미지와 운율과 의미에 대해서 얘기했다. 모두 맞는 말이다. ‘시란 무엇인가’를 자꾸 되묻는 것은 지금 우리 나라의 시단에서 이미지와 운율에 경도된 많은 모더니즘 시인들의 시들이 너무도 의미를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흥기(興起)할 수 있고, 득과 실을 관찰할 수 있으며, 조화롭게 무리 지을 수 있으며, 성내지 않으면서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로는 임금을 섬길 수 있고,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시(詩) 공부를 강조했다. 다산 선생은 시에 대한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다산 선생의 말씀이다. 다산 선생은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써,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아야 시가 되며,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의 작품이 지닌 이러한 바탕에서의 미의식(美意識)은 현실 비판적 요소가 강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풍자적이면서도 기법 면에서는 사실주의적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미의식은 다산의 언급처럼 부단한 자기 수양과 성실한 공부를 통해, 한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과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고민하는 현실 인식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는 “무릇 시(詩)는 뜻을 주장으로 하는데, 뜻을 갖추기가 제일 어렵고 사연을 엮는 것이 그 다음이다. 뜻은 또한 기(氣)를 주장삼으니 기의 우열(優劣)에 따라 깊고 얕음이 있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 근본하여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가 모자라는 자는 글을 만들기에만 힘쓰고 뜻을 먼저 두려 하지 않는다. 대개 그 글을 새기고 치장함에 있어서, 구절을 단청(丹靑)하면 실로 아름답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깊고 무거운 뜻이 없어서 처음 읽을 때는 잘된 듯하나 두 번째 씹으면 벌써 맛이 없다.”고 했다. 또한 농암 김창협은 그의 진시(眞詩)론에서 이르기를 “시의 정도(正道)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시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성정과 천기가 드러나는 꾸밈없는 시, 즉 <진시(眞詩)>여야 한다.”고 했다. 7. 마무리 - 대저 시란 무엇인가? 이 계절에 수백 편의 시를 읽으면서 느낀 아쉬운 점은 조태일의 “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에서 말하고 있는 “시인은 사회 현실과 자기 내부 간의 갈등을 끊임없이 부딪쳐 현실도 밝히고, 미래도 밝히는 불꽃을 점화시켜야 합니다. 이 점화의 순간이 시를 쓰는 순간이요, 시 완성의 순간이 됩니다.”라는 말에 합당한 시를 찾지 못함이다. 또한 이 계절에 그리운 서정시를 찾아서 떠난 여행에서 정말 아쉬운 점은 다음과 같은 신동엽 시인의 말이다. “하여 내일의 시인은 제왕을 실직케 할 것이며, 제주를 실업케 할 것이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할 것이다.” 아, 나는 스스로 천기를 예보하는 시를 찾고 싶다.  
6 (김종인 시인)걸어온 길
편집자
4673 2012-03-09
<걸어온 길> 1954년 경상북도 금릉군 남면 초곡동(초실)에서 빈농이었던 아버지(김윤기)와 어머니(이말순) 사이, 장남으로 태어남. (호적에는 1955년 생으로 되어 있으나 갑오생 말띠로 일년 늦게 호적에 올려짐) 1962년 김천시 아포면 소재 대신초등학교에 아홉 살의 나이로 입학, 지역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단골로 참가했지만 장원을 해 본 적은 없음. 초등학교 1학년 때 『어깨동무』란 어린이 잡지를 읽게 됨. 교실 한 칸밖에 안 되는 작은 도서실의 책을 거의 다 읽음. 박영옥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책을 빌려서 읽기도 함. 한골에 사는 김상덕이란 친구의 집에서 친구 누나의 책을 많이 빌려 봄. 『철강왕 카네기』, 김형석의 수필 『영원과 사랑의 대화』, 『고독이라는 병』 같은 책을 밤새워 읽은 기억이 있음. 1968년 김천시에 있는 김천중학교에 입학함. 1969년 2학년 때, 작문 시간과 문예반에서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시조시인 배병창 선생님을 만나 문학 공부에 맛을 들이게 되었고, 문예반 친구들과 함께 문학 동아리 <석정(石井)>을 조직, 석정이란 팜플릿 동인지를 내어 학교에서 돌려 읽고 우쭐했던 기억이 있음. 배병창 선생님께 본격적으로 시조를 배웠으며, 교지 『송설』에 “무지개”란 제목의 시조가 실려 친구들로부터 문학 소년으로 인정받기 시작함. 교지에 실린 활자로 된 시를 처음 보고 가슴 떨리는 신비한 마력에 전율함. 이 때부터 습작을 하기 시작함. 주로 시와 시조, 소설을 쓰기 시작함. 배병창 선생님으로부터 김종한 시인의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란 시를 배우고 너무 좋아 외우고 다니기도 했음. 1970년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구미에 사는 윤광주란 친구가 소설을 쓰는 것을 보고 부러워 소설을 쓰기 시작, 원고지 30매 정도의 『세 친구』란 소설을 처음으로 씀. 중학교 3년 동안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함. 도서관 담당 사서 교사이자 미술을 가르쳤으며 아동문학가인 윤사섭 선생님의 지도로 도서부가 되어, 마음 놓고, 자유롭게, 무한정, 책을 빌려 볼 수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함. 온갖 잡다한 책을 탐독함. 김소월, 이상, 유치환,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의 시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음. (그 당시 유행하던 『꿀단지』란 소설을 몰래 빼돌려 학급 내에서 선풍적인 호응을 박기도 했음) 박영준이란 친구의 누나가 만화방을 했는데, 그 집에 드나들면서 공짜로 만화 수백 권을 독파함. 무협소설을 무지막지하게 읽음. 때로는 무협소설을 노트에 쓰기도 했음.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목포 유세문을 수업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함. (영어를 가르쳤던 이승현 선생님이 그 유창한 달변으로 읽어줌) 1971년 한강 이남에는 송설이 있고 한강 이북에는 개성중학이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지역 명문 사학 김천고등학교(송설학원)에 입학함. 1학년 때 담임교사인 김문웅 선생님(후에 대구교육대학교 교수)에게 문예반에서 시를 배움. 선생님께서 대학교에 다닐 때, 복음고등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늦게 집으로 가며 느낀 것을 쓴 내용의 시였는데 현실적이며,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런 시로 기억함. 깊이 감명을 받음. 당시 김천고등학교에 있던 문학 동아리『맥향』에 가입하여 활동함. 백일장에도 종종 참가함. 후에 대학 동기로 시인이 된 윤희수 선배를 만남. 경북대 영어과를 나온 박춘호, 부산외대 교수가 된 현기홍 등과 함께 활동함. 당시 김천역 앞의 2층 목조 건물에 있던 양지다방이란 곳에서 배병창 선생님과 함께 백수 정완영 시조시인을 만난 기억이 있음. 배병창 선생님께 시조를 배우며 운율의 창조와 시어의 조탁에 대해 많이 배우고 고민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 김천극장에서 밤 9시에 상영하는 심야영화에 심취. (이 시절 무수한 공상과 상상과 환상, 술과 친구와 축구와 마라톤에 사로잡혀 지냄.) 1974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 ( “제발 대학을 가지 마라. 네 동생들도 생각해야지. 네 때문에 소를 팔고 나면 농사는 어떻게 짓느냐. 5급 공무원이나 되어 남면 사무소 면서기를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식자우환이다. 네 4촌 형들을 봐라. 4.19 때, 6.25 때 다 죽었지 않았느냐. 농사가 제일이라, 농사보다 맘 편한 게 없다.” 라는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고 가출과 좌절과 절망과 포기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고3 때 담임 이재민 선생님 말씀과 평소 존경하던 국어과 전장억 선생님의 영향으로 경북대 사대 국어과에 진학함.) 1학년 때, 지금까지 교육마당과 문학판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배창환, 김윤현, 김재환 시인, 정병윤, 정만진 소설가 등을 처음 만남. 문학 동아리 『복현문우회』에 가입하여 문학 토론과 시화전에 참여하였음. 2학년 때 김춘수 시인에게 시론을 배움. 이미지에 대해 많이 배웠음. 『문맥』이란 학과지에 수필이나 소설이 실리기도 했음. 1978년 2년 동안 훈련을 받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제16기 ROTC 육군 소위로 임관함. 전라북도 여산에 있는 육군하사관학교에서 군대 생활을 함. 전주, 부여, 익산, 논산, 강경, 군산, 서산, 대천, 옥구 등지를 헤매며 시작에 몰두함. 첫시집에 나오는 시들은 대부분 이 때 쓴 것임. 광주민주화운동을 군대 내에서 간접적으로 겪음. 많은 충격을 받음. (군대에서 교관으로 근무할 당시 별명이 F.M(야전 군사교범적인 모범 군인)으로 경계교육에 매진하여 제대 후 후배들에게 많은 폐를 끼침.) 1980년 6월 말에 제대하여 울진종합고등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음. (교단에 선 이래 지난 30여 년 동안 포항중학교를 거쳐, 김천지역 학교에서 주로 근무해 옴.) 울진 지역의 『울림』이란 문학 동인들과 어울림. 매년 여름방학이나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울진 지역의 방언, 민요, 고시조, 고전가사, 고소설 등을 발굴, 조사하러 다님. 시조 딱지 30여 수, 고소설(이대봉전, 양주봉전, 반씨전 등 발굴), 고전 가사 화전가, 관해록 등 발굴. 대구 한일극장 앞 사무기기 판매점에서 747타자기를 사서 매일 밤 소설을 씀. 몇 번 신춘문예 등에 응모했으나 매번 소식도 없이 떨어짐. 밤마다 들리는 타자기 소리 때문에 주인집 할아버지로부터 수상한 간첩으로 오인되어 신고될 뻔함. 1983년 『세계의 문학』겨울호에「강구에서」외 3편을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하게 되었음. (친구 정만진 왈 “이번 겨울호에 시를 발표한 김종인이 우리가 아는 동기 김종인인지 연락해 보자” 라는 모의에 의해 대구에서 천리 떨어진 울진에서 친구들의 확인 요청 전화를 받고 그 해 겨울 동안 대구의 배창환, 정만진, 김윤현 등을 만나 대학 졸업 이후의 일들을 서로 나누며 회포를 품었음.) 1984년 2월 동아백화점에서 있었던 대구의 『오늘의 시』 동인 시낭송회에 배창환, 김용락 등과 참석하면서 함께 동인을 하기로 약속한 것이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이미 오늘의 시 동인을 하고 있었던 배창환과 함께 뒤풀이를 빠지고, 청주에서 온 도종환, 김창규, 김희식 등을 만나 의기투합, 새로운 동인을 만들기로 약속함. 그 날로 『분단시대』동인을 결성. 5월에 동인지 1집 『이 땅의 하나됨을 향하여』(온누리)를 발간함. 5월에 포항 지역의 대표적인 문인 손춘익(작가) 선생님을 만나 포항문인협회 회원들인 김일광(동화작가), 김정구, 김만수, 이대환(소설가), 정안면, 정원도, 윤석홍 시인 등 문우들을 만남. 1985년 1월에 분단시대 동인지 2집 『이 어둠을 사르는 끝없는 몸짓』(온누리), 12월에 『분단시대 판화시집』(대구, 도서출판 우리)을 내고(분단시대 판화시집은 분단시대 1집에 이어 판금조치를 당했고, 여기 실린 시 때문에 많은 동인들이 고초를 겪었음. 심지어 정보과 형사와 도교육청 장학사는 시행의 곳곳에 빨간 밑줄을 긋고,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함. 특히 ‘민심은 천심이라 모조리 갈아엎고, 새로운 흙을 넣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 “객토”란 시를 문제 삼아 토요일 오후 내내 교장실에서 시달려야 했음). 대구우리문화연구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당시 포항여고에 근무하는 김재환, 제철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윤일현, 강원산업에 근무하던 정원도, 제철화학의 김석춘, 포항제철의 김정구, 윤석홍, 공광규 등과 함께 <포항우리문화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지로 <포항문화>란 소책자를 간행하였으며, 12월에 서울의 온누리 출판사(사장 김용항)에서 제1시집 『흉어기의 꿈』을 간행, 포항의 남화랑에서 출판기념회를 함. 1986년 5월 포항우리문화연구회 주관으로 채광석 시인 초청 문학 강연과 <제1회 민중시 낭독회>를 포항 죽도성당 대회의실에서 열었음. 이 낭독회 사건은 당시 포항 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만들어 200여 명의 교사, 종교인, 야당 인사(김병구), 문화예술인, 노동자, 문인 등이 대거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음. (포항지역 최초로 전경이 동원되어 죽도성당 앞 골목길에 진을 쳤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재환 선생은 영해로, 윤일현 선생은 제철학원에서 쫓겨나 대구 일신학원으로 가야하는 계기가 됨. 당시 포항교육청에서는 나에게 울릉도로 가라고 종용하였으나 그 제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버팀. 당시 독서토론회를 함께 하던 회원 중 윤일현, 공광규, 윤석홍, 정원도, 김재환 등이 시인으로 등단하였음.). 포항 영일 지역에 전해지는 고전소설, 가사, 민요 등을 수집하여 <포항문학>에 싣고 정리함.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4.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문인 서명이 5월 30일 서울신문에 보도됨. (도교육청 장학사와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서명을 철회하라고 강요함. 끝까지 서명 철회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방송국으로 서명이 잘못되었다는 항의문까지 써서 보내라는 강요가 있었지만, 버티고 버티는 도중 6월 항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떠 밀려감. 포항지역 민주인사들이 노동자와 결합하여 육거리를 점거하고, 육거리에서 오거리에 이르는 중앙통과 포항역 광장과 형산대교 근처에서 벌인 많은 행사에 뛰어다니면서 6.29를 맞았음. 6.29이후에는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조용해졌음.) 6월 <분단시대> 동인지 제3집 『민중의 희망을 노래하자』(학민사)를 출간. 10월 31일 대구경북교사협의회 창립. 87년 5월부터 준비한 포항교사협의회를 12월 초에 결성하여 사무국장을 맡았다가, 다음해 3월 갑자기 김천여자고등학교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김천으로 오게 됨(후문에 의하면 포항교육장, 장학사 등이 특별히 힘을 모아 후배를 아끼는 마음에서 고향인 김천으로 발령을 냈다고 함). 포항문학의 대부인 손춘익 선생님의 권유로, 경북문인협회에 가입하여 김일광, 하재영, 조무근, 이대환 등과 함께 활동함. 1987년 실천문학사에서 발행한 교육시선집, 『내 무거운 책가방』에 ‘사회수업 외 1편’을 실음. 1988년 3월 김천여고에 부임. 5월에 대구경북 교협 활동을 하던 한일여중의 구자숙 선생님을 만나 함께 김천지역 교사들을 규합하여 12월에 김천교사협의회를 결성, 사무국장을 맡게 됨. 김천중학교 은사 윤사섭 선생님의 권유로 김천문인협회에 가입하여 노중석, 장병우, 황명륜, 박기하 등 시조 시인과 권숙월, 민경탁 시인 등과 함께 <김천문학>에서 활동함. 8월 <분단시대> 동인지 제4집 『분단문학에서 통일문학으로』(학민사)를 펴냄. (분단시대 동인들이 각기 자기 지역의 교육 운동에 앞장을 서는 바람에 자주 모일 수 없게 되고 자연히 동인 활동은 주춤하게 됨). 민중시 특집호 『금수강산 오량캐꽃』(군을 주제로 한 민족자주화 70인 시선집)에 ‘부동자세’ 외 2편 실림. 19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고 7월 10일 전교조 김천지회를 창립하여 사무국장을 함. 전교조 참여교사로 징계위에 회부되면서 교단에서 쫓겨나게 됨. 8월초부터 열흘간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을 함. 농성 중 <민족문학의 밤>에서 “단식농성장에서”란 시를 낭독함. (이 시는 전교조 신문과 『노동해방문학』에 실리게 됨.) 8월 19일부로 징계위에서 해임 결정을 받아 해직교사의 길에 서게 됨. 청주의 도종환, 대구의 배창환, 정만진, 김천에서 김종인 등이 전교조 결성 혐의로 교단에서 해직되고, 분단시대를 통한 문학 활동은 잠시 뜸하게 됨. 전교조 김천지회장으로 활동. 해직. 현직교사들의 신작교육시집, 『교사는 노동자다(교육문예창작회)에 ‘법정에서’ 외 3편 발표. 8월 17일 해직된 이후 전교조 김천지회 사무국장, 제2-3대 지회장 등을 하면서 관내 90여 개 학교를 방문하고, 전교조 합법화의 정당성과 논리를 광고, 선전하면서 이상석 선생, 도종환 선생, 유상덕 선생 초청강연회를 개최함. 제3문학시선 55인 시선집, 『교과서와 휴전선』에 ‘스승의 날에’ 외 1편을 실음. 1990년 실천문학사에서 제2시집 『아이들은 내게 한 송이 꽃이 되라 하네』(서울, 실천문학사) 출간. 대구 영남일보에서 대량 해직된 기자들과 합세하여 신왕 기자를 중심으로『우리신문』 창간 작업을 하면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나, 결국 창간 준비호를 내는데 그치고 자본의 힘 앞에서 신문 창간에 실패함. 참교육을 위한 전교조 문집, 『단식일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엮음)에 전교조 명동성당 단식농성 때 쓴 ‘단식일기’가 실림. 1990년 상반기 올해의 좋은 시에 “별”이 선정됨.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온갖 잡다한 선언문, 항의문, 추도문, 수필, 꽁트 등을 씀. 포항 MBC 구성작가로 1년 동안 매달 50분짜리 『영남시대』(교양 다큐멘타리)에 구성과 글을 맡아서 함(이보근 피디와 최부식 피디 담당). 지역 현안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한 토론 프로그램의 구성과 글을 씀(이보근 피디 담당). 1991년 환경시집, 『이 땅에 살기 위하여』(한국영상문학연구회 엮음)에 ‘철강공단’이 실림. 1992년 대구에서 『우리신문』 창간 작업을 하던 전 영남일보 해직기자들과 『하나신문』 창간 작업을 하다가 신문은 어렵게 창간했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도중하차함. 자유사상시선 『시는 어디 있는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창작위원회 엮음)에 ‘객토’, 한반도의 젊은 시인들 제2집 『서로 일으키는 땅』에 ‘감포 어부의 노래’ 외 2편, 교육문예창작회 신작시집, 『대통령 얼굴이 또 바뀌면』에 ‘그대에게 가는 길’이 실림. 1993년 대구의 『하나신문』 기자를 그만 두고 김천으로 와서 김천 지역신문인 『새김천신문』(발행인 김영만) 취재 부장으로 지금의 『김천신문』권숙월 국장(시인)과 함께 근무함. 김천에서 극단 『삼산이수』(대표 강정식)를 창립하고 지역 최초의 극단으로 등록. 「청산리 벽폐수야」, 「방황하는 별들」, 「산불」 등을 공연하면서 기획, 총진행 등으로 참여함 (이후 10여 년 간 총 15회 공연). 1994년 5년간의 해직 생활을 청산하고 복직 기념으로 제3시집『별』(대구, 사람의 문학)을 출간. 3월 1일부로 감문중학교에 복직한 이래 1997년 지례중학교, 2000년 김천중앙고등학교, 2004년 김천여고를 거쳐 2006년 이후 현재까지 구미 선주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음. 대구에서 『분단시대』 동인을 중심으로 문학종합계간지를 발간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정대호, 김윤현, 김용락, 윤일현, 정만진, 배창환 등과 함께 종합문예지 계간 [사람의 문학] 발간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함. (94년 봄호를 창간호로 첫선을 뵌 후 12년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잡지를 발행해냈다는 사실에 그 의의가 깊다. 이후 사람의 문학은 2007년 현재 통권 53호를 기록 중) 1998년 시와 현실 9인 신작시집, 『메마른 일상에서 돌아와』에 ‘봄날은 가네’ 외 5편, 포항문학시선 『몸속을 지나는 바람』에 양파 외 3편을 실음. 1999년 여름 시노래 모임 『시하나 노래하나』 창립 기념 음반에 「한 송이 붉은 꽃」(곽우영 작곡, 국순철 노래)이 실림. <김천 부곡초등학교 뒤 공터에서 노래공연 기획 중(친구 박병주와 함께) 장마와 태풍으로 열리지 못함.> 2000년 오랫동안 포항의 손춘익 선생님과 함께 경북작가회의 창립을 준비해 왔으나 지역이 워낙 넓고 사람이 부족하여 창립을 미루던 중, 5월 포항의 이대환을 중심으로 (사)민족문학작가회의 경북지회를 결성하여 김천지부장을 맡음(지회장-이대환(소설가) 부지회장-안상학(시인) 사무국장-이종암(시인) 구미지부장-육봉수 예천지부장-임대수 안동지부장-조영옥 울진지부장-김진문 영천지부장-이중기). 2001년 사람시선 『작은 새가 잠긴 늪』( 21인 공동시집, 사람의 문학 발간) ‘가만히 겨울나무를 보라’ 외 5편이 실림. 2002년 경북작가회의시선집 『너의 빛깔이기도 하다』에 ‘압해’도 외 2편. 교육시선집, 『나는 선생이 아니다』(우리교육)에 ‘낙엽을 태우면서’가 실림. 김천지역에서 나홍연, 김양헌(평론가), 손정호, 이교상, 김대호, 구미의 박원식, 김영수 등의 시인들과 함께 <등등시> 동인을 결성, 독서 토론과 시에 대한 토론으로 매월 만나 문학기행, 시낭독회, 문학 강연, 백일장 등을 하면서 2003년 동인지 제1집 『광장으로 간 소나무』 ( ‘이어진 바위는 길을 막는다’ 외 7편을 실음)를 발간하고, 2005년까지 동인지 3호까지 발간. (그 동안 이교상 시인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서 당선, 김영수 동인이 진주신문 문예공모에서 시부문 당선 등의 성과를 거둠.) 2003년 제3시집 『별』을 발간한 후 10년만에 『나무들의 사랑』(대구, 문예미학사)을 발간. 김천자유예식장에서 고 박원식 시인이 시 퍼포먼스를 하는 가운데, 화가 이성환 선생이 그린 시화전을 겸해서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함. 8월 경북작가회의시선집 [벼랑의길](도서출판 출판시대)에 참여. 등등 동인지 제2집 『푸른 것으로부터 온 답신』에 ‘산수유 같은’ 외 7편으로 참여함. 2004년 동인지 제3집 『저기, 얼마 전 순수』에 ‘세느강 편지’ 외 8편. 2005년 경북작회의시선집 『기느리댁 사랑채』(권석창외 42인)에 ‘난지도에 버려진 적이 있다’외 2편, 경북, 울진 시인들의 시선집 『푸른 문장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저녁’ 외 7편. 2006년 <등등시> 동인들의 내부 사정으로 동인을 전격 해체하고 <세모시> 동인을 결성. 김천의 나홍연, 손정호, 이교상, 김대호, 박화남, 구미의 김영수, 조영숙, 김연화 시인이 참여함. 경북작가회의 대표시선집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강상률 외 33인)에 ‘이 황량한 겨울 들판 외 2편을 실음. 근무지를 구미 선주고등학교로 옮기면서 구미지역의 대표적인 문학단체인 <수요문학회> 카페를 기웃거림. 같은 학교 한문과 교사이며 성균관대학교 한문학 박사 출신인 권오웅 선생과 함께 구미지역 구석구석, 여기저기의 문화와 삶의 현장을 답사함. 2007년 제5시집 『내 마음의 수평선』 (시와에세이) 발간. 경북작가회의 시선집 『붉디붉게 환장하도록』(경북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 금오산8 외 2편 발표. 2008년까지 구미 선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2009년 다시 김천으로 돌아와 김천농공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매년 포항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 작가정신, 시에, 사람의 문학, 김천문학, 경북작가회의 시선집 등에 거의 의무적으로 시를 발표하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짐. 1960년대 김천 지역의 향토지에서 한문으로 쓴 장시 『감문가』와 『구성가』를 발굴하였으며 감문가는 주석을 달고 감수하여 김천문학에 발표하고, 구성가는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권오웅 박사의 감수를 거쳐 작가정신에 발표함. 2011년 김천농공고의 교지를 발간하다가 1951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발간된 김천농고의 교지 추풍령을 발굴하여 지역 신문에 그 사실(김천농고 출신의 오세도 변호사의 제보를 받고 김복술 전 김천농고 교장이 소장해 온 1951년 발간한 교지 제6호)을 소개, 게재하고 교지 추풍령을 발간하였으며, 2012년 현재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구 김천농공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음.  
5 (김종인 시인) 자선 대표작 10편
편집자
1944 2012-03-09
 이 황량한 겨울 들판 털털거리는 경운기 위에서 아우는 공단으로 떠난 친구 얘기에 열을 올리고 아버진 끝내 한 말씀 안 하시며 새터 모래논에 참흙을 넣는다. 모래논엔 참흙이 제일이지 알맹이끼리 어울려 떼알무리가 되어 물스밈도 좋아지고 공기도 들락날락 화학비료만으로 높은 수량 내는 것은 땅힘의 수탈 위에 피는 한철뿐인 꽃이란다. 아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다문다. 지력의 수탈 위에 피는 단명의 꽃 떠나리라, 타관살이 십 수년에 돌아온 고향 헛되이 살아온 세월, 활활 벗어 던지고 알맹이끼리 어울려 떼알무리 만들어 벼이삭 알차게 하는 참흙. 가을을 위하여 우리는, 황량한 겨울 들판에 흙을 넣는다. 폭포 유계리 여름비 오락가락 하는 계곡에서 폭포 아래 들어가 물을 맞았다. 고개를 들기조차 어려운 물의 힘 앞에 어깨죽지 등허리 가득 물을 맞았다. 물은 갈라져서 쏟아지지만, 떨어진 뒤에도 이내 하나가 되어 웅덩이 가득 흘러 넘쳐 시내가 되어 흐른다. 유계리 동구 팽나무 숲에는 칠순 노인 너댓 명 둘러앉아서 막걸리를 들며 시국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워 귀를 열고 눈을 씻었다. 떨어져 부서져도 하나가 되는 물이여 온몸으로 달려 내려오는 폭포여 고개 들어 우러러 보았다. 부서져야 한다 친구여, 우리 함께 온몸으로 떨어져 부서져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폭포 아래 끝없이 부서지던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우리는. 단식 농성장에서 ---저들의 미친 칼 아래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곳곳에서 가로막는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우리는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삼삼오오 모여든 제일백화점에서부터 온갖 비상한 수단을 다해 모여든 이 곳 고색 창연한 명동성당 본당 뒤 돌바닥 광장 우린 쓰러지러 왔다. 죽으러 왔다. 결코 걸어서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왔다. 태풍 주디의 비바람 속에서 새우잠을 자며 견뎠다. 아련히 일어나는 현기증, 담배 연기의 유혹. 노점상 형제들이 끓이는 된장국 냄새 벌겋게 끓고 있는 매운탕, 풋고추, 상추쌈, 호박잎 정문 앞 원분식집 간판에 있는 통만두, 물만두, 군만두, 비빔밥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우리는 생수와 식염으로 하루를 보낸다 오늘이 단식 7일째 아침 계성여고 학생들 등교하는 걸 본다. 마지막 수업을 하며 나는 애써 웃었지. 부끄러움의 양심으로 가장 괴로워했던 사나이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길’을 간다던 윤동주의「서시」를 가르치며 운동장 플라타너스에서 치열히 부르짖는 매미소리를 들었지 한 마리가 조심스레 울다 보면 마침내 이 곳 저 곳 수없이 울부짖는 염천 아래 매미들의 합창을 들으며 참교육의 길, 민주․민족․인간화교육의 길 교사의 자주적 교육권을 찾는 이 길, 양심으로 가지 못 한다면, 십 년 세월 아이들 앞에서 서시를 가르쳐온 내 삶이 거짓일 뿐이라고 교사의 양심을 지키는 이 길, 목소리 맞춰 부르짖지 못한다면, 다시는 아이들 앞에서「서시」를 가르칠 수 없기에 나는 ‘나의 길’을 가노라고 웃으며 말했지 십 년 세월, 얼마나 부끄러이 살아왔던가. 십 년 교단, 얼마나 괴로이 몸부림쳐왔던가. 이제는 나 당당하네 사랑으로 가르치는 이 길 이제는 나 떳떳하네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네 혼탁한 세월, 이기와 허영, 안일과 사치 부정과 부패, 왜곡과 과장, 거짓이 판치는 세상 인륜, 도덕,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에서 내 스스로 피 흘려 가르쳐줄 수 있는 이 작은 교사의 양심 한 조각. 우리는 죽으러 왔다. 명동성당 돌바닥에 대가리를 부딪치고 일어서다 퍽퍽 쓰러지고 두 발로 걸어서 나가지 않으리라 아직도 미친 발악을 하는 저들의, 저들의 미친 칼 아래 우리들의 모가지를 내밀고 저들의 칼날을 두려움 없이 받으리라. 붉은 피 철철 백주대낮, 삼복염천 이 명동성당 돌바닥에 선연히 흘리리라. 우리들의 깃발, 참교육의 기치 지키기 위해서라면 굴종보다는 서서 죽으리라. 굶어 죽으리라. 보라, 의연히 견디는 육 백여 동지들의 눈빛 ‘살아 숨쉬는 교육’을 노래하는 결의에 찬 모습 벌써 50여 동지가 실려 갔다. 그들을 보내며 우린 눈물 흘리지 않았다. 이제 곧 우리들이 갈 길이기에 민주․민족․인간화교육을 위해서라면, 자주적 교육권, 진리와 양심으로 가르치는 교육을 위해서라면, 꿈이 살아 있고,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을 위해서라면, 우리들의 투쟁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라면, 이 땅의 교육민주화 없이 모든 민주화가 없음을 아는 우리들이 갈 길 간다, 저들의 미친 칼 아래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고 웃으며, 웃으며 간다. 교사들의 양심을 지키는 나의 길, 우리의 길, 웃으며 간다. 철조망 앞에서 지난 한 해는 위대했습니다 어깨 위로 내리치는 가공할 철퇴를 이기며 골리앗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행렬은 끝이 없었고, 시퍼렇게 일어서는 억새처럼 삽이나 괭이 든 손에 높이 더 높이 깃발을 세우는 사람들, 무너지는 장벽으로 통일 물결 넘쳐흘러 들어와 동방의 위대한 나라 마침내, 후꾼후꾼 달아오르는 용광로였습니다. 아직도 통일의 노래 부르던 사람들 신부며, 목사며, 아리따운 학생이 감옥에 있는데 겉으로 통일을 부르짖는 자들은 북방으로, 북방으로 자기들만의 독점으로 웃음을 팔고 있을 때 동해안 바닷가 대폿집에서 우리는, 쓴 막소주를 마셨습니다 수제선 따라 북으로 휴전선까지 삼천리 금수강산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반도 한 걸음 척 나서면, 망망대해 펼쳐지면 바닷가에서 쓴 막소주나 마시며 통일을 불렀습니다 어서 오라고 부르는 우리의 통일 노래는 철조망에 갇혀 바다로, 바다로 퍼져가지 않았습니다. 해는 지고 해안을 경비하는 어린 병사들 바닷가 모래밭에서 철조망 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 속으로 몰려가는 양떼들처럼 형편없는 모습으로 대폿집 좌판 위에 앉았을 때, 철조망은 우리 눈앞에서 하늘 끝까지 뻗쳐 올라가 초승달 싸늘한 그 끝에 걸리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르는 소리, 목에 잠겼습니다. 지난 날 삼팔선에 처음 철조망이 쳐지고 휴전선으로 고쳐져 이중삼중 철통같이 높아만 갈 때, 집이며 과수원이며 학교며 주요 관공서 울타리마다 한 겹 두 겹 철조망은 높아만 같습니다 방송국과 과수원과 학교 울타리까지 잡아먹고 그 놈의 쇠불가사리 같은 철조망은 마침내 마음과 마음에까지 둘러 쳐지고 말았습니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우리는 철조망 안에 길들여지고 철조망 안에서만 안심하고 잠들 수밖에 없었지만 빛나는 유월의 그 뜨거운 함성에서부터 이 땅의 모든 민주화와 함께 우리가 목매어 부르는 통일 소원으로 우리들의 논밭과 과수원에서 학교에서 방송국에서 집과 집 마음과 마음에서 철조망이 벗겨지고 있을 때, 쇠파이프와 최루탄으로 무장한 저들의 음흉한 음모아래 삼천리 금수강산 동해안 수제선 따라 새로운 철조망은 반도를 휘감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철조망 속에 갇혀 털이나 깎이우며 발버둥칠 때, 철없는 아이들은 철조망에 매달려 흔들고 흔들고 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갔습니다. 우리는 바닷가 대폿집에나 앉아 막소주 들이키고 입으로만 통일을 노래부를 때, 돌멩이를 던지고 꽃병을 던지고 철조망 울타리 밖으로 몰려나오는 아이들 무리 지어 몰려가 머리띠 동여매고 스크럼 짜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온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털이나 깎이우고 안심하고 있을 때, 저들이 불러주는 통일의 노래에 취하고 있을 때, 동해나 바닷가 선술집 좌판에서 술이나 먹다가 바닷가 모래밭으로 나아가 소주를 마시다가 해는 지고 총부리 들이대는 어린 병사들 앞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술도 못 마시냐고 우기고 있을 때, 칠천만 한겨레 살아가는 금수강산에 둘러쳐진 거대한 철조망 앞에서 함성이 들리고 함성이 들렸다가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어디론가 실려가고, 잡혀갔다가 풀려나고, 또 함성이 들리고, 피 냄새가 나고 최루탄 냄새가 거리를 덮고 돌멩이와 꽃병이 날고 그리고 더 큰 통일 함성이 들렸습니다 시인은 광장에서 교수는 강단에서, 음악가는 노래로 화가는 그림으로, 장사하는 사람은 물건으로, 실업가는 자본으로 운동 선수는 운동으로, 종교인은 복음으로 하늘이며, 땅이며, 물이며, 바람이며, 산천만물이 일어나 세상이 온통 함성으로 가득 찼을 때, 저들은 은밀히 자기들의 손아귀에 통일을 독점하고 정권의 유지와 가진 자들의 이익 보호에만 급급해 온갖 케케묵은 법으로 위장하고 온갖 교묘한 거짓과 술수를 동원하여 철조망은 이제 없는 듯이 보이고, 없는 듯하다가 있는 듯이 보이고, 온갖 달콤한 거미줄을 쳐 있으나마나 한 듯이 보였다가 장막을 들추는 사람들만 어디론지 사라지고 그러다가 이제는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들 아직도 이 거대하고 교묘한 철조망 안에서 털이나 여전히 깎이우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들이 들려주는 감미로운 통일의 노래에 스스로 마취되어 가는 우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겨울 동해 바닷가 선술집에서 문득 저 멀리 밀려오는 파도를 봅니다. 저 파도 한 무리 두 무리 지어 오, 자유를 한껏 누리며 밀려옵니다 바위에 부딪치고 또 물러가 무리 지어 허옇게 부서지며 밀려와 방파제 두들기고 끝없이 밀려와 부서져서 하나가 되나니 보셔요, 우리들 거대한 철조망에 갇혀 술이나 마시고, 털이나 얌전하게 깎이우며 길들여지고 있는 것을 이 겨울 동해안 철조망 앞에 와서 해만 지고 나면 들이대는 총부리를 보셔요. 감미로운 술에서 깨어나 떨치고 이 거대한 철조망 거두어내지 않으면 삼천리 방방곡곡 우리들 가슴마다에 쳐진 철조망 마침내 거두어지지 않음을 학자는 강단에서, 노동자는 공장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농민은 들판에서, 교사는 교단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에서 마침내, 시인은 거리에서 두 팔 걷어 부치고 철조망에 찔려 피 흘리며 이 거대한 철조망 걷어내지 않으면 우리들의 소원인 통일 노래는 저 자유의 한 바다로 나아갈 수 없음을 여기 이 동해바다 철조망 앞에 와서 보셔요.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무더운 장마와 불볕 더위를 거치고 홍수가 천지를 휩쓸고 대지 위에 낙엽이 하나 둘 지고 있다. 없는 사람에게는 더 빨리 찾아오는 겨울이 저만큼에서 제법 쌀쌀한 바람을 우리들 허한 목덜미 사이로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는 위대했다. 우리들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와 한번 올린 깃발 결코 내릴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사수했으므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사방이 얼음벽으로 가로막혀도 온몸을 부딪쳐 피워 올리는 사랑의 열기로 우리는 오히려 더웠다. 찬란히 밝아올 90년대의 봄, 역사의 한가운데 서리라 다짐하며 우리는 오히려 행복하였다 그러나,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배신과 좌절과 절망의 대야합을 보면서도 우리는 꺾이지 않았다 다시 오는 봄을 두 주먹 불끈 쥐고 맞으며 오이팔을 향해 발바닥 부르트게 뛰었다 해맑은 웃음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동지들이 타는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짐했다 눈앞의 이익을 바라고 택한 길이 아니라고. 이제는 다들 잊으려 하는 현실도 보았다 입으로만 말하는 공치사 앞에 허허로운 웃음을 날리며 돌아서기도 했다 눈물로 떠났던 사람들 안스럽게 바라만 보던 사람들 부끄러움 거두고 나타났을 때, 우리는 말없이 두 손을 굳게 잡았다. 우리들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빼앗긴 교단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서명을 할 때, 차오르는 희망과 가슴속 열기를 주체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한 동료애까지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 억장으로 무너지는 가슴 쥐어뜯었다. 교단에서 쫒겨나 거리의 교사 된지 1년 하릴없이 낙엽은 하나 둘 떨어지고 선들선들한 바람이 목덜미 사이로 불어오고 있다. 그 동안에도 참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억압과 굴종의 교육현실 속에서 먼저 시들어 떨어지는 못 다 핀 꽃송이들 죽어 가는 아이들 살려내자고 떨쳐 일어선 동지들 연탄가스로, 암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시 조여오는 억압의 사슬을 견디지 못해 대구에서, 청주에서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교사들이 쓰러지고 있다 하루종일 분필가루 속에서 과로하다보니 기관지와 폐와 위장과 간장, 허리 디스크, 관절염, 신경통으로 교사들이 쓰러지고 있다 최루탄과 방패와 쇠파이프에 찍히며 서울로 대구로 집회에 참가하느라 삼시 세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동지들 간염, 폐렴, 위장염, 과로로 쓰러지고 있다 어제의 동지들, 어느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을까 생활고에 시달려 말 못하고 떠난 동지도 많다 좌절과 절망과 불면의 밤을 어디서 곱씹고 있을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교육을 애타게 바라던 그들 죽어 가는 아이들 살려내는 교육을 하자던 이들이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거늘 아직도 우리는 논리와 이기에 빠져 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선 이 자리, 그들이 떠나간 이 교단에서 지난 날 부끄러움 같은 사치는 이제 버려야 할 때, 툴툴 털고 일어서 대오를 정비해야 할 때, 다시 참교육이란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할 때, 근무여건 개선운동으로 교육유해환경 척결운동으로 작은 것 하나라도 이제는 실천으로 무기 삼아야 할 때. 낙엽이 지고 나면 어느새 겨울은 우리도 모르게 닥쳐온다 겨울이 오기 전에 먼길을 떠날 채비를 차려야 한다 겨울로 통해져 있는 먼 길 이미 우리는 이 길을 많이 걸어 왔다 눈앞의 더운 밥을 위하여 택한 길이 아니다 오다가 화적떼를 만나기도 했다 애초 우리들이 택한 길이었으므로 우리들 이미 당당히 걸어온 길이었으므로 가다 보면 또, 어깨동무할 길동무도 만나고 열 고개, 스무 고개 넘고 넘어 때로는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릴 때도 있겠지만 마침내 우리 앞에 펼쳐질 참교육 해방의 지평을 위해서라면 지금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우리들이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세상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이 머나먼 길 위에 있다 무더위와 장마, 폭염과 홍수를 지나왔다 낙엽이 지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봄이 오고 또다시 낙엽이 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지금 우리는 가고 있다 그 날은, 우리가 바라는 그 날은 이 길 위에서 맞이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우리다함께 어깨 걸고 가는 지금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고래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마감하자 가도 가도 끝없는 망망대해 물밑 깊이 찾아다녀 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고 아득하고 막막함이여, 아스라이 수평선을 넘어가면 또 다시 나타나는 거대한 바다 내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으로 물밑 잠행의 세월이 너무 길었네 몸 속 한 방울의 물까지 다 내뿜어 은빛 분수로 솟아오르자 사랑이여, 번번이 검은 물 속에 곤두박히고 마는데, 이제 그만 잠행의 세월은 청산하자 비겁과 안일과 욕심과 이기 또 무슨 말로써 수사가 필요하리 솟구쳐 올라 분수처럼 떨어져 온몸 다 저 치열한 바다에 던지자 사랑이여. 공용 게시판 앞에서 한 손에 풀통 들고 또 한 손엔 풀손 들고 골목 구석구석 게시판을 찾는다. 아이들은 지금쯤 꾸벅꾸벅 졸고 동료들은 분필가루 속에서 목이 쉴 시간, 우리들은 거리를 헤매며 포스터를 붙인다. 골목을 돌아서면 혹시나 아는 이라도 만날세라 여전히 뒤통수가 따갑지만, 잽싸게 풀칠을 하다보면 손등과 소매로 풀이 달라붙지만, 애써 웃으며 풀칠을 하고 게시판에 가득히 붙여놓으니 어두운 골목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다. 보아라, 저 힘차게 치켜든 손 부릅뜬 눈, 벌린 입에선 모이자, 모이자, 모이자!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풀칠을 하자 썩썩썩 힘차게 풀칠을 하자 나의 지나온 세월 위에 부끄러움과 허위, 위선과 가식 위에 말로만 호사스러운 스승 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풀칠을 하자 손등과 손바닥에 말라붙는 풀쯤이야! 너덜너덜 붙어 있는 온갖 잡것들 가려버리고 우리들 참교육의 깃발 휘날리며 의연히 부르짖는 사나이를 보아라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노동 뒤에 우렁우렁 들리는 ‘살아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풀칠을 한다 교육악법 위에, 온갖 비열한 탄압 위에, 거짓으로 왜곡된 선전물 위에, 우리들 참교육의 깃발을 휘날린다 포스터를 붙인다. 어두운 저 골목골목을 환히 밝히고 불이 켜질 때까지 우리들의 발길은 점점 물이 오른다. 또 다른 고향 갈수록 험악해져 가는 저들의 음모 어디에선가 흉흉한 소문이 눈앞에 다가온다 전교조 교사는 빨갱이라고, 당국의 온정 어린 설득에도 남아 있는 우리는 사상범이라고, 사랑하는 아이들, 동료 교사들 앞에서 오늘도 미소 띤 얼굴로 매도하는데 양심을 팔아서 밥을 빌라 참교육을 팔아서 살아야 하나 모두들 무심히 잠든 밤에 일어나 먼 데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낮이나 밤이나 저 놈의 개 짖는 소리, 차라리 이 한 몸 물어뜯어라 갈기갈기 옷이 떨어지고 살점이 떨어지고 피 흘려 얼어붙은 이 땅 적신다면 하마 우리들 쌓아온 죄를 씻으랴 내일은 한가위, 고향에 가야 한다. 저들이 빨갱이라 매도하는 것만 믿어 온 집안 어른들 남부끄러워 하는 고향 고향이 날 나무라네 배운 놈이면 배운 값을 하라네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서 하는데 실정법을 어겨가며 반역해서 되느냐고 하늘같은 스승을 노동자가 웬 말이며 6․25 때, 우리 마을 적치하에 들어가 구들장까지 파헤쳐진 것 벌써 잊었냐고 소 팔고 논 팔아 대학까지 시켜서 학교 선생 노릇 자랑으로 여겼는데 나쁜 물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며 막무가내 나무라는 고향에 가야 한다. 십 년 세월 교단에서 피땀 흘려 지키려는 오직 참교육 한마음뿐인데 가자, 찾아가자 내 고향 우리들 이미 올린 깃발 앞세우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그곳으로 가자, 피 터지게 쓰러지면서도 가야 할 우리들 양심이 지키는,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위하여. 별 별을 보아라 돌바닥을 베개삼아 누워서 서울이라 도심 명동하늘 쏟아지는 별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마냥 허위허위 다려온 지난 날 하늘 한번 쳐다볼 여유 없이 살아온 세월 이렇게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며 저렇게 도심의 빌딩 숲 아스라이 별이 별로서 빛나고 있음을 보아라 희뿌연 소금 같네 생수와 함께 한 알 한 알 씹어온 소금 내 안에서 자라나 하늘 가득히 은하수로 머리 위에 걸려 있으니 가을이 이제 멀지 않았네 누구의 눈물인가? 오로지 양심 하나 지키려는 마음으로 이렇게 돌바닥에 누워서 바라보면 아이들의 슬픈 눈 망울망울 보이네 마침내 저 하늘 별로 떠올라 말없이 도타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 수많은 별을 보아라 부패한 세상에 소금 한 알 한 알 썩지 않고 자라나 하늘 가득 별이 되는 것을. 한 송이 붉은 꽃 아이들은 내게 한 송이 붉은 꽃이 되라 하네 책상 위 빨간 장미 한 송이, 꽃이파리 떨어져 그네들 포근한 꿈이 되라 하네 꽃다운 젊음 지키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라 하네 가시에 심장이 찔려 흐르는 피로 땅을 적시고 앙상한 몸뚱이 푸른 희망으로 덮일 때까지, 스스로 붉은 꽃, 자꾸자꾸 피워 올리는 한 그루, 붉은 꽃나무가 되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