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작 10>

1, 노숙

2,

3, 2H+O=2HO

4, 절망이 향기롭다

5, 빈도시의 가슴에 전화를 건다

6, 개미지옥의 아침

7, 사과의 슬픔

8, 선운사 동백

9, 강의 노래

10, 사랑 그 낡은 이름이

 

 

 

 

노숙(露宿)   *   권  천  학 

 

 

꽃자루의 행랑채

씨앗의 숨소리가 들리는

이슬의 집에서

하룻밤

 

어둠 깊은 씨방에서도

하룻밤

 

태풍의 눈

기막힌 고요 속 절벽에서도

하룻밤

 

월식(月蝕)의 일그러진

비탈

비좁은 들창너머

종점 없는 바람의 길로 흘러들어가는

풍찬노숙(風餐露宿)

목숨 한나절

 

 

혀   *   권  천  학 

 

 

상처 속을 휘젓던 간교한 혀

 

혓바늘 돋던 일도

깨물어 부셔버렸던 조각들도, 흘렸던 피도

쓰리고 아린 아픔도 지나고 나면

온통 다 그리움이다

맵짜고 구린 온갖 맛을 다 보고 나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내었던 일도

지금은 따뜻함이다

 

이제는 서로의 입 속에 깊숙이 밀어 넣는

뜨거운 키스를 하고 싶다

 

 

2H+O=2HO

 

 

산소 같은 여자와 수소 같은 남자

둘이 만나 물이 되었다

상큼한 꿈과 투명한 힘

고운 꿈의 여자와 폭발하는 힘을 가진 남자

처녀와 총각,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아득히 떠돌다가

어느 바람 부는 날

부딪쳐 소리 내고

부딪쳐 빛을 내면서

서로 뭉쳐

스미고 섞이면서

씻어주고 품어주면서

하늘에도 같이 오르고

선인장 가시에도 함께 이른다

엉기지 않았던들

한 여자와 한 남자로

각각의 미립자 너와 나로

꿈 없는 꿈과 힘없는 힘으로

무의미의 세포로 떠돌았을 것을

운명의 어느 날

푸른 여자와 뜨거운 남자가 만나

물이 되었다

물이 되어

구름 위에서도 살고

꽃잎에서도 머문다

 

 

절망이 향기롭다    *   권  천  학

 

 

이상한 일이다

절망이 향기로웠다

 

막막함에 쩌 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어둠뿐인 동굴 속

출구가 없는 싸늘한 벽이거나

끝없는 허허벌판

길이란 낭떠러지뿐

 

시시각각 조여 오는 공포 속에서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더듬이도 떨어져나가

맨 털털이가 된 채

절망의 뿌리 근처로 내려앉는다

 

점점 어둠에 익숙해져간다

멀어버린 망막 속에서

시신경 한 오리 살아나

실핏줄 같은 빛을 기억해낸다

뒤엉켰던 끈의 매듭이 풀리고

서리서리 휘감아 옥죄었던

어둠의 똬리가 몸을 푼다

 

그 무렵이다

먹물 같은 절망에서

소올 솔 묵향이 번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빈 도시의 가슴에 전화를 건다    *   권  천  학

 

 

전화를 건다

빈 집, 빈 방, 도시의 빈 가슴에

여보세요, 여보세요 ▶►▸▹▹▹◦◦◦ … … …

정좌한 어둠이 진저리를 친다

화들짝 놀라 깬 침묵이 수화기를 노려본다

거미의 파리한 손가락이 뻗어 나와

벽과 벽 사이

공허의 모르스 부호를 타전해온다

뚜뚜뚜⦁⦁⦁⦁뚜뚜⦁⦁⦁⦁⦁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 ~ ~

뼈마디를 일으켜 세운 싸늘한 어둠이

몰고 온 찬바람

구석진 한 귀퉁이에 겨우 발붙이고 있는

체온을 딸깍 꺼버린다

가느다란 신경 줄 하나

수화기 옆에 오똑 웅크리고 앉아

오로지 듣고 있다, 침묵의 제 발자국 소리를

공허의 빈 들판에서

우롱, 우롱, 우롱‥ ‥ ‥ 소용돌이 치는

죽음 같은 절망, 절망 같은 죽음을 쓸고 오는

금속성의 바람소리를,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는 정막의 물살 위에

부딪쳐 미끄러지는 벨소리

메아리 진다

빈 집, 빈 방, 빈 도시의 가슴에서

헛되이 ~

헛되이 ~

 

 

 

 

 

 

개미지옥의 아침     *   권  천  학

 

 

쇠똥구리에겐 쇠똥이 우주이고

개미에겐 개미지옥이 지옥이다

 

커다란 우주가

내 몸 안에서 돌며 아침을 열고

깨알만 한 나는

우주 속에서 돌며 커튼을 젖힌다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풀잎 하나에

가장 맑은 창을 가진

투명한 우주들이

조롱조롱 매달린 아침

 

아침이 아침을 연다

 

 

 

사과의 슬픔    *   권  천  학

 

 

시장 통 입구

가을빛 출렁이는 과일좌판 위

윤기 자르르,

피고 지는 서러움 다 걷어내고

먼 길 더터온 득도가 황홀하다

아직도 묻어나는 향기

사과 꽃 필 때의 아픔이

득도라 하지만 색향(色香)이다

이름도 향기도 다 버리는

무색무취의 해탈, 참 멀다

 

탁발 나선 걸음

허름한 좌판에 결가부좌 틀었으니

이번 하안거에서도 이루지 못한 해탈의 길

떠나자 다시 한 번!

 

아자작!

구겨진 지폐 몇 장에 팔려 한 입에 바숴지는

아찔한 순간

개벽의 아침이 오려나

지나 온 봄여름가을겨울이 그리고 또 봄이

고행 길 후렴으로 스쳐 지나간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 아프!

세상을 씹어대던 그 자의 이빨

말의 찌꺼기 그득한 어금니 사이에서

유언을 남길 겨를도 없이 박살이 나는

순수의 화두

더는 묻지 말자

원망도 접자

혼을 흔들어대던 비바람과

양심을 마취시키던 독한 농약

새의 부리와 폭풍의 밤을 견디던 기억들이

줄줄이 줄줄이 한 순간

수수리 사바하·····

더께 낀 혀 아래

구린내와 침샘의 농간이 무성한 입안에서

, 시크!

시큼한 땀 냄새에 새콤달콤에 붉은 성깔은

그 자()의 성감대를 자극할 뿐

, 슬프!

 

절벽 아래 도사린

위대한 탐욕 덩어리 밥통 속

짓이겨 섞이는 세상살이 법대로

쓰고 맵고 짠 뒤범벅 속

푸르던 생애도 득도의 희망도

쓸모없는 이름과 함께 녹아들어

이제는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다

 

위험 표지판들이 즐비한 길을 구불구불

온갖 세균들이 들끓는 시궁창을 지나

드디어 한 덩어리의 똥 찌꺼기가 될 때까지

오직 비타민이고자 하는 풋 정열,

살아있었구나 사과?

 

무념무상!

똥통을 빠져나오면서도

마지막 끈을 놓지 않고 있다니

아직도 이름에 매달리다니

, 이 질긴 집착이여

 

멀었다 슬픔에 이르는 일도

더더욱 멀었다 해탈의 길은

지금부터는 묵언수행이다

삭고, 삭고 또 삭아서, 없는 듯 있으면서

그 무엇이든 길러내는 거름이 되기까지

!

 

 

선운사 동백     *   권  천  학

   

 

차라리 다 주어 보낼 걸

있는 대로 다 놓아버릴 걸

더는 나아가지 못 할 이곳에서야

목숨마저 떼어 보낼 걸

 

온 날 온 밤을

붉은 몸살로 지새워도

핏빛 그 한 마디 주어 보낼 걸

 

언약의 말씀에 배어있는 찬바람도 함께

씻어 보내버릴 걸

 

 

 

강의 노래     *   권  천  학

   

 

구비 구비 휘감아 도는

융숭한 몸짓을 알겠네

 

잔물결 일으켜 부는

낮은 음계의 노래에 실려

너울너울 추는

춤의 뜻을 알겠네

 

흔적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조용조용히

뜨겁게 뜨겁게

낮은 곳으로만, 낮은 곳으로만

머물지 않고 흐르는 그 마음 알겠네

 

씻으며 지우며 이 세상을 건너는

저 강도 끝내는 바다에 이르려니

 

 

사랑, 그 낡은 이름이     *   권  천  학

   

 

저냥 스산한 가을 길에서 길 떠난 한 사람을 만났다

억새밭이 내려다보이는 가을 문지방에 걸터앉아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에 대하여 오래 이야기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모자라고 진부한가

때로는 얼마나 불안정한가에 대하여

그러나 그 순간에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니까

속마음을 전하기 위해

낡고 오래된 도구를 사용하는 거라고

 

그렇다

사랑한다는 말을 진부하다는 명분으로

교묘히 빠져나가는 헛된 모순

그 명분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헛되고

그럴듯해 뵈는 명분이

낡은 도구보다 더 쓸모없다

 

바람이 불면 쓸쓸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듯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듣고 싶다

그것만이 추위타는 나를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기에

그 낡은 도구를 찾아서

함께 쓸 누군가를 찾아서

나는 또 황망히 길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