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나에게 시는

해가 지면 돌아가는 집이다.

참 다행한 일이다.


오늘은

아직은 부족한 나의 사랑을

다 들어주지 못한 노래도

애썼다고 토닥여주고 싶다.


그래, 더 사랑하며 살자.


2014년 초가을                                              

김주애






해설


시인의 눈에 보이는  것들


고석근(시인)


랭보는 ‘시인은 견자(見者)’라고 했다. 왜 그는 시인을 ‘보는 자’라고 했을까? 그럼 보통 사람들은 보는 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우리는 다들 세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보고 있는 걸까? 엄밀히 말해 보통 사람들은 세상을 보지 않는다. 자신의 망막에 비치는 것들을 볼 뿐이다. 그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할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르다. 항상 그의 마음은 그의 몸을 탈주한다. 하늘을 날며, 땅 위를 달리며, 물속을 헤엄치며, 세상 곳곳을 누빈다. 그의 눈은 항상 새로운 것들을 ‘발견’한다.

발견된 것들은 시인에 의해 이름이 붙여지고 그것들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시인은 항상 ‘천지창조’ 중이다. 시인의 눈을 따라 우리도 함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여행을 떠나보자.

시인은 「늙은 호박」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본다. 시인은 늙은 호박 속에서 돋아나는 싹들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안에도 저런 생명력이 있을 거야!’


늙은 호박을 몇 년 묵혀 두었더니 껍질이 파랗게 변했다지 반을 잘라 보았더니 호박 속에 싹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다지


꽃이 지자 두엄더미도 마다않고 죽어라고 살았던 거야

단단하게 한 생 잘 살았다고 방 한 칸 차지하고

골골이 패인 주름도 자랑이었겠지

그러다 새금새금 살아나는 소리들

몇 날 밤을 뒤척였겠지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분노로 타올랐을 거야

제 속을 할퀴어 뼈마디 썩고 속이 문드러져 갔을 거야

푹푹 썩어 진물이 흘러

속살에서 단내 나는 뿌리 하나 올라왔을 거야

그렇게


―「늙은 호박」 전문


우리의 희망은 끝까지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의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서 파릇이 돋는 새싹을 봐야 한다.

원래 몸은 늙어도 정신은 늙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자신을 노인이라고 하면 분노하는 것이다.

어느 인간이 자신을 늙어버린 인간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원시인은 자신의 나이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시인은 담을 뚫고 구멍을 만들어 그 구멍에서 “헐거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개를 본다. 흡사 포도주 통에서 햇살을 즐기는 디오게네스 같지 않은가? 그 앞에서 알렉산더 황제는 기가 죽었다지.



이끼 낀 담에


쩍 금이 가더니


주먹만한 구멍이 생겼다

 

개 한 마리가 구멍을 파


들락거린다


금계줄 같던 담


스스로 문이 되었다


느슨해진 철조망이나 허물어진 담


개구멍은 늘 지름길이다


이제 개는 구멍에서 잠을 자면서


금계가 사라진,


헐거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개구멍」 전문



담은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금계줄이었다. 개는 금계줄을 없애고 그 사이에 안주했다.

‘사이’에는 신성한 함이 존재한다. 겨울과 봄을 연결하는 제비,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뱀, 지하와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나무…….

이 사이에는 ‘인간의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는 게 아니라 시간이 샘처럼 고인다. 그 고인 시간은 다시 이 세상의 시원이 된다. 

이 시간의 성소에서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천지창조가 다시 일어난다.

시간은 인간이 서로 간에 담을 쌓으면서 생겨났다. 그렇게 태어난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간다. 우리는 모두 강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흘러가야 한다.

강물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는 담을 헐어야 한다. 다시 샘처럼 고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과거, 미래는 없으니까. 오로지 현재만이 빛나는 게 삶이니까.

시인은 공터의 힘을 본다. 버려진 땅. 그래서 그는 가장 강한 힘의 소유자가 되었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


어둠 속, 아파트 옆 공터가 소란스럽다


유물이 발견되었을 무렵만 해도

한 톨 먼지마저 쓸어내어 윤을 내던 땅

행여 돌무더기 부서질까 먼 길 둘러가게 만들더니

갇혀있던 시간을 들어내자

몇 년째 발길이 끊겼다


버려진 땅은

떨어지는 모든 걸 품어 늪이 된다

멋모르고 자라는 풀들은

언제나 허리가 꺾여있었다


또 봄은 와서

벙실벙실 부푸는 흙

기어이 부러진 허리를 후벼서

씨앗들 쏟아진다


―「공터」 전문



노자는 말했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하지 않음’은 못할 게 없다. “아파트 옆 공터”는 아파트의 미래라는 듯, 잠시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고는 다시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모든 유위(有爲)는 끝내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알고 싶으면 공터에 잠시 서 있어 보면 될 것이다. ‘공터의 말씀’이 들려올 것이다. 

시인은 탱자나무를 보며 명상에 잠긴다.


촘촘하게 가시를 품고

지나가는 바람도 걸러낼 것처럼

빈틈도 없어 보이는 탱자나무 속

참새떼가 날아든다

그렇게 독하게 들이밀던 가시는 다 어디가고

저 느슨함이라니

제 집인 듯 폴랑거리며 날아다니는 저 날개 좀 봐

짹짹거리는 소리 가시 끝에 매달고

감히 손도 뻗지 못하게 감싸안는다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독을 품은

벽인가 했더니

저렇게 쉴 곳 많은 빈 곳 투성이라니


―「탱자나무」 전문


가시로 만든 문이 저렇게 쉽게 열리다니! 벽이 문이 되는 기적. 수도승들은 문을 벽으로 만들어버린다지. 문을 수십 년 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날 펑 벽이 뚫린다지. 앞이 환하게 열린다지.


“탱자나무”와 “참새떼”는 저렇게 쉽게 벽을 문으로 만들며 놀고 있는데, 인간의 수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시인은 교차로에서 “한가득 닭을” 싣고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차 한 대를 본다.


사거리 교차로

한가득 닭을 실은 차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 숨죽인 꼴이라니

한쪽 발을 내밀고

아님 날개라도 내밀고


그런 중에도

부리는 칼날 같아

한평생

날개 삼아 다리 삼아

살아왔을 비장함이 보인다


철창 속 고개를 내밀고

마지막 가는 길

서로를 위해서 운다

유서 쓰듯

꼬꼬꼭 꼭 꼭


신호가 떨어지자

긴 행렬 뒤를 따른다


―「부리」 전문


“신호가 떨어지자” 닭들을 실은 차가 비명을 지르며 “긴 행렬 뒤를 따른다”. 차들이 부리를 내밀고 긴 행렬 뒤를 따른다. 차들이 닭울음소리를 내며.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라고 한다. 사람들은 둔감해 오랫동안 물속에 있어도 산소가 부족하다는 걸 쉬이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엔 잠수함에 토끼를 태워서 항해를 했단다. 토끼는 산소가 조금만 부족해도 숨을 헐떡인단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잠수함의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한다.

시인은 바로 이런 토끼의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산소가 부족한지도 모르고 즐겁게 먹고 마시고 놀 때 시인은 숨을 헐떡인다. 그런데 이제 시인이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아, 얼마나 치명적인 시대인가!

시인은 흐린 날 철길 옆에 있는 집 한 채를 본다. “기적소리”가 없는 “철길 옆 집 한 채”는 얼마나 슬픈가!


철길 옆 비탈길 위

식어버린 연탄재 같고

갈 곳 없는 노인 같고

부모 잃은 아이 같고

말라비틀어진 풀포기 같고

빈 밥그릇 같은

집 한 채

기도 중이다

빈 하늘

기적소리도 울리지 않는

철길 옆 집 한 채


―「흐린 날」 전문


우리는 언제부터 기적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기적소리 없이도 철길 옆을 태연히 지나가게 되었을까? ‘핵폭발 후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시인은 닭들이 모여 자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다.


며칠째 내리는 비

처마 밑 닭장이 질척하다

사선으로 부는 바람

오돌오돌 돋아나는 닭살

아무리 모가지를 흔들어도

축축하게 스며드는 빗물

먹음직스럽게 오른 살점들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차츰 몰려드는 어둠에

대쪽 같던 다리가, 부리가

모여든다

서로 날갯죽지에 머리를 들이밀고

쉼 없는 잠꼬대로 젖은 날개를 비비고 있다


―「닭들이 모여서 잠을 잔다」 전문


인간도 오랫동안 모여서 함께 잠을 잤다. 참 아득하다. 사람 냄새가 좋았던 시절. 이제 사람들은 모여서 잠을 자지 않는다. 따로 자다 보니 사람 냄새를 맡으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 모든 기술을 동원해 사람 냄새를 맡지 않고 사는 ‘깨끗하고 위생적인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립다. 짙은 사람 냄새가. 언젠가는 인류에게 종말의 위기가 닥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코를 킁킁거리며 사람 냄새를 맡을 것이다. 사람 냄새만큼 향기로운 냄새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인은 넋을 잃고 보고 있다. 인류의 ‘오래된 미래’를.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침묵’일 것이다. 언어라는 건 얼마나 무서운가!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다. 삼라만상은 누군가 호명하여 탄생하였다.

누구나 한번 이름을 불리면 그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운명이란 누군가의 호명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침묵해야 한다. 누군가가 내게 붙인 이름은 진정한 나의 이름이 아니다.


삼일 동안 비운 방


남쪽 창 아래, 청개구리 한 마리


앞발 가지런히 모으고


하늘 향해 침묵 중


꼿꼿하게


눈물 한 방울도 없이


살뜰히 말라버린


온몸으로 던지는 한마디


텅 빈 방 개구리


말문이 막히다


―「묵언수행」 전문



시인은 개구리의 ‘묵언수행’을 본다. 개구리의 이름을 버린 거룩한 한 존재를 본다. 우리도 저렇게 자신의 이름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개구리는 한평생 자신이 개구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멋있게 입적할 수 있었다.

인간의 감옥은 언어이다. 언어에 갇혀있는 한 우리는 단 한 번도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세상의 많은 언어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시공을 넘어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넘어 세계와 화해하는 극적인 순간에 태어난다(파스).

그래서 시인은 무당이다. 그의 말은 “불붙은 신에 의한 불 같은 예언(파스)”이다. 시인은 작은 화분에 핀 꽃 한 송이에서 자신을 본다.


내 방 작은 화분에

나를 닮은 꽃이 피었다


―「꽃이 피었다―경아에게」 부분


바깥의 풍경은 내면의 풍경이라고 한다. 밖에 내가 있다는 기적. 나를 넘어선 나. 이때 우리는 ‘진정한 나’를 체험한다. “인간은 워래 하나로 꿰뚫어진 구슬이다. 하나가 울면 전체가 운다(석가)”.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 「봄비」를 배치했나 보다.


땅속에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밥알 같은 비가 내린다


―「봄비」 전문


시인은 조용히 읊조린다. ‘겨울이 깊으니 봄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게 ‘이 세상의 이치’라고. ‘땅이 꽁꽁 얼면 풀리게 되어있다’고.

시인은 봄비소리를 들으며, “땅속에서/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다. 아, 얼마나 그리운 풍경인가! 쌀 씻는 소리, 아이들 칭얼거리는 소리,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니체는 인간을 ‘초인’과 ‘최후의 인간’으로 나누었다.

최후의 인간은 쾌락과 자기만족에 빠져 창조력을 잃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이다. 바로 우리 현대인들이다.

반면에 초인은 넘치는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는 인간이다.

시인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일 것이다. 시인을 만난다는 건, 초인이 되어보는 일이다. 최후의 인간, ‘막장 인간’을 잠시 벗어나 보는 일이다.

그래서 자신도 초인을 예감해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