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그물은 볼품없는 외관이지만,

거기엔 수많은 물고기 비늘과 물살의 시간들이 묻어 있다

존재가 은폐된 바다, 허위의 침묵이 떠다니는

거대한 시의 바다 속에서 유실된 그물 같은

흩어진 시들을 찾아 어떻게든 떠나야 한다

아직도 못 끝낸 내 시들은

나를 오늘도 불면의 밤으로 이끈다




<서정화 시집 해설>




소외와 파괴에 대한 기억


정수자/시인․문학박사



1.



‘첫’의 떨림은 길다. ‘첫눈 ․ 첫사랑 ․ 첫 키스’만 아니라 첫 시집의 떨림도 평생 간다. 대책 없는 열정으로 시에 빠져든 무렵부터 자신의 전부가 담긴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엔 온갖 열망과 동경과 좌절과 갈망 그리고 간간이 맞이한 뜨거운 희열의 눈물도 있다.

『유령그물』은 등단(2007년) 후 시인이 찾고 헤매고 주저앉다 일어나 다시 쓴 듯한 궤적을 담고 있다. 이는 ‘나’를 넘어 ‘이웃’으로 ‘사회’로 향하는 시선의 변화에서 먼저 감지된다. 개인적 감상 같은 등단 초의 작품 세계를 넘어 삶의 현장과 진실에 더 육박하고자 하는 고투가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소외된 이웃, 환경 파괴에 따른 생태계와 삶의 파괴 등 현실 속의 쟁점들에 주목한 작품들은 한층 넓어진 시선의 폭을 보여준다.

서정화 시인의 이러한 도전과 모색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퍽 고무적이다. 아직도 날선 현실인식이나 문제의식보다 회고 같은 단상에 머무는 경향이 많은 시조단 현실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아무리 새로운 관점이나 비판적 인식이라도 미적 완결성을 담보하지 못 하면 거친 시도에서 그칠 수 있다. 하지만 첫 시집부터 편안한 구도 안에 머문다면 시세계를 너무 좁은 곳에 안주시킨 채 새로운 모색을 하기 어려우니 시도는 많을수록 힘든 것일수록 좋다.

그렇다면 서정화가 어떤 시선으로 어떤 세계를 그리고 있는지 함께 거닐어보자.


2.


현대는 풍요롭지만 위험이 가득한 사회다. 어떤 면에서는 풍요가 곧 위험을 초래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더’ 좋고 ‘더’ 많은 풍요를 누리기 위해 싫어도 힘들어도 저마다 일을 하고 산다. 그런데 풍요가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면 분명 ‘과잉’이 그 원인일 것이다. 풍요의 지나친 추구가 환경오염이나 쓰레기 양산, 빈부격차, 소외 같은 현대의 많은 문제들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풍요의 과잉이 낳은 문제 중 하나로 비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비만은 우리의 건강 위협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질병의 유발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비용이 점점 늘어나는 인류 전반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서정화도 이런 현상과 비만에 빠진 사람들의 상황을 짚어본다.

 

 

밤에만 움직이는 초고도 비만 군단

두 눈 딱 감다가도 우겨넣는 식탐 버릇

터질 듯 살찐 몸뚱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축 늘어진 뱃살 아래 퉁퉁 불은 두 다리

거대한 살에 갇혀 두 눈만 껌벅이는

날마다 잠수종같이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성형수술 TV광고 다이어트 솔깃하여

한동안 단식 돌입 간신히 버텨내다

또다시 폭풍 흡입 후 긴 잠에 들어간다

 

「박쥐인간」 전문

 

 

「박쥐인간」에서 우리는 “초고도 비만 군단”을 통해 현대인의 또 다른 고독을 만난다. 비만은 요즘 사회에서 풍요의 상징이 아닌 자기 관리를 못 하는 게으른 ‘루저’의 표상인 양 차별의 대상이 되어 있다. 비만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가가 관리에 나서기도 하지만, 끝없이 식욕을 자극하는 세상에서 자기 통제는 그만큼 어렵다. 특히 비만 유전인자를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비만의 위험에 처한다. 살이 찌면 다이어트를 하고, 그러다 요요현상이 오면 다시 다이어트를 하고, 어느 순간 포기하고 “폭풍 흡입”을 반복하는 상황에 빠지기 일쑤인 것이다. 물론 대부분 현대인이 섭취 ‘과잉’에 따른 체중과의 다이어트 전쟁을 치르며 살고 있다. 그런데 초고도비만이라면 사회에서 아예 격리된 삶을 살기 십상이고, 점점 더 고독한 자기 움집에 갇히기 쉽다. 그래서 “박쥐인간”으로 “비만” 속의 우울한 삶을 감내하게 된다. 앞으로는 마른 사람을 연구한다던 어느 개그처럼 비만의 기준이나 세상의 시선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자기 관리 못 한다는 비난과 차별을 받는 비만인도 사회적 약자처럼 소외 속에 살고 있다. “거대한 살에 갇혀 두 눈만 껌뻑이는” 그로테스크한 「박쥐인간」은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또 다른 소외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아래 시조는 현실에서 밀려난 노인들의 삶을 통해 노년의 소외와 고독을 그려낸다.

 

 

누가 고도리를 꼭꼭 감춰두고 있을까

조심스레 패를 뜨고 종달새 먹으려 움켜쥔 손, 우산 든 사나이에 난데없이 꿩이 날고, 에라이, 똥이나 먹자, 어머나, 자뻑을 다 하시네, 쌍피에 흘깃대는 눈들, 바닥에 깔린 휘파람새 아무도 먹지 않아 입맛 다시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만 봉황도 놓치고 어안이 벙벙, 솔광을 뚝심 있게 내려놓자 두루미가 날아가니 환장하겠네, 공산은 어디 갔는지 철새가 훨훨 날아가고, 헐, 홑껍데기만 남았구나.

 

오늘도 끗발 세우려다 어느덧 해는 지고….

 

「장안경로당」 전문

 

 

「장안경로당」은 수원 화성(華城) 안의 낙후된 동네인 장안동의 경로당이다. 이곳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지키기 위해 성 주변의 건축을 제한하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아파트 개발도 어렵고 발전이 상대적으로 뒤진 편이다. 주로 노인들이 살고 있는 동네라 화투로 무료한 시간을 견디는 게 다반사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본 시인은 해학적이면서도 씁쓸한 삶의 이면을 잡아낸다. 화투 장면은 재담과 개그를 오가는 듯 생동감 넘치는 표현들로 열거와 반복을 통해 고조된다. 화투 그림에 따른 묘사들은 화투판의 흥을 돋워 보는 사람도 같이 들썩거리게 한다. 그런데 “오늘도 끗발 세우려다 어느덧 해는 지고….”로 맺은 종장이 반전을 이루며 “홑껍데기” 같은 경로당 노인들을 비춘다. 해학 속에 감추고 있다가 슬쩍 내비치는 은근한 비판이 낙후된 동네와 함께 저물어가는 노인들의 “끗발” 없는 상황을 넌지시 일깨우는 것이다. 특히 그 이름이 장안(長安) 즉 길게 안녕하길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지명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아이러니의 효과는 더 커진다. 게다가 이런 판이 우리나라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면 의미가 더 심화된다. 초장, 중장, 종장의 역할과 기능을 살려 사설 한 판을 잘 짠 수작이다.

이렇듯 사설의 구조적 묘를 살린 것으로 「고물상밴드」, 「THE DAY」가 있다. 「THE DAY」도 재미있지만, 「고물상밴드」는 버려진 것들의 신명나는 한판 연주라는 점에서 「장안경로당」과 궤를 같이하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고물상에 소나기가 쏜살같이 들이치자

 

빗줄기가 손톱을 세우고 통기타처럼 어둠을 튕긴다, 툭툭 드럼 치듯 흥을 돋우는 세숫대야, 건반을 두드리듯 이 빠진 접시들도 신나게 퉁탕퉁탕, 주전자와 쭈글쭈글한 양은냄비 손때 묻은 프라이팬과 솥뚜껑도 들썩들썩, 잠시 네온간판이 오색조명 비추자 버슴새*로 타 넘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철거로 버려진 것들 신명나게 연주한다

 

「고물상밴드」 전문

 

이 작품은 고물들이 밴드를 연다는 발상부터 색다른 재미와 의미를 담아낸다. 우리가 맘껏 쓰고 내버린 것들 그것도 “철거로 버려진 것들”의 고물상이라면 쓸모없는 것들의 집합인데, “밴드”라는 명명으로 그것들의 쓸모를 새롭게 찾아주는 것이다. 더욱이 ‘고물상밴드’로 거듭나는 상황은 잠시나마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즐거움도 크다. 세상에서 버려진 것들의 한때 흥겨움은 ‘절정을 만끽하고 다시 천천히 뜸을 들이는 연주법’이라는 “버슴새로 타 넘”는 사설 속에서 잘 살아난다. “툭툭”, “퉁탕퉁탕”, “쭈글쭈글”, “들썩들썩”, “덩실덩실”처럼 소리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들의 등장도 “밴드”로서의 입장을 살려주면서 각각의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버려진 존재, 그래서 그늘로 깊어가는 삶에 대한 서정화의 관심과 연민은 시집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들의 쓸쓸한 삶을 비추고 반추하는 행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 않겠다는 시적 표명이자 ‘지금 이곳’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시적 힘이다. 이런 유의 작품은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시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3.

 

환경은 우리 일상에 매우 넓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 중 현대인의 일상이 된 소비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데, 서정화는 이와 관련된 문제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소비가 유발하는 사회적 문제는 매우 다양하지만 불필요한 물건까지 사는 과소비나 그에 따른 어마어마한 쓰레기도 갈수록 심각해서 지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유령그물」은 그런 쓰레기의 문제를 짚어보는 작품으로 서정화의 넓어진 시선을 보여준다.

 

 

그물코에 끼인 채 발버둥치는 물고기

비명소리 쫓아가 뛰어드는 물고기 떼

겹겹의 유령그물이 비명으로 뒤엉킨다

 

게덫과 자망에 걸려 붉게 우짖는 바다새

손을 쓸 새도 없이 쓰레기와 썩어가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악취 속을 떠다닌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 독기들로 가득한

밑바닥 속속들이 파고드는 폐그물

바다의 아픈 유령이 긴 자락을 끌고 간다

 

「유령그물」 전문

 

끝없이 쌓아올린 어마어마한 전자쓰레기

병이 든 채 부품 뜯는 부부 곁에서 노는 아이

모두가 폐품이 되는 오욕의 길 가고 있다

 

「전자쓰레기 마을」 부분

 

 

유령그물은 어선에서 버리거나 유실된 어망으로 이즈음 바다 오염의 한 주범이라고 한다. 바다 속이야 어찌 되든지 고기만 잡으면 버리고 가는 그물들이 엄청난 양이라 “거대한 무덤”이 되고, 거기에 걸려 죽어가는 바다 생물 또한 늘고 있다는 것이다. 바다 오염은 폐그물뿐 아니라 고기잡이에 쓰인 모든 기구나 행락객이 버리고 간 모든 쓰레기의 귀결이겠지만, 상태가 갈수록 심각해지며 유령그물도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이에 대한 경종이나 해결 방법이 계속 나와도 바다 속 역시 육지의 쓰레기나 폐그물이 또 다른 산을 이룰 만큼 쌓여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주목한 이 작품은 바다에서 더 큰 오염의 역습이 닥칠 듯 ‘유령’ 같은 불길한 전조를 일깨우고 있다.

아래 작품은 바다와 달리 뭍의 첨단 쓰레기 문제, 중국 구이위라는 지역의 전자 쓰레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계 전자제품 쓰레기의 약 80%가 아시아로 수입되고 있고 이중 90%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와 전국이 전자제품 폐기물로 뒤덮여 있다’는 설명만 봐도 구이위가 얼마나 심각한 환경오염 집합소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쓰레기를 통해 또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노부부는 병이 들어도 떠날 수 없는데 심지어 아이까지 곁에서 놀고 있으니 모두가 오염 덩어리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곳을 “모두가 폐품이 되는 오욕의 길”이라고 진단하는데, ‘오굥의 길’은 비단 여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듯 자본의 첨단 쓰레기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안고 있는 마을을 통해 시인은 세계적으로 심각하게 쏟아져 나오는 전자쓰레기라는 지구적 문제를 환기한다.

 

 

당목撞木처럼 모셔지던 왕버들 베어지고

꽂아둔 표지판들 흉흉하게 서 있는

밭둑엔 농사를 못해 갈 곳 잃은 노인들

 

먹황새 몰아내고 물 위에 선 포클레인

굽이치던 금모래에 엉켜 묶인 돌무더기

끝내는 댐 공사 받고 길을 내준 모래강

 

「모래강」 부분

 

 

우리의 ‘금수강산(錦繡江山)’에서 강은 이제 수식어를 갈아치우고 있다. ‘4대강’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많은 강이 제 길을 빼앗기거나 원치 않는 시멘트 과잉보호 속에서 속으로 곪는 악취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 강들을 돌아보며 시인은 강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물론 모든 생물들의 터전 상실에 따른 염려를 전하고 있다. “밭둑엔 농사를 못해 갈 곳 잃은 노인들”이나 내몰린 “먹황새”의 처지는 발전이라는 미명에 밀리는 오늘의 삶을 넌지시 일깨운다. 발전의 논리에 가려진 “먹황새 몰아내고 물 위에 선 포클레인”의 폐해는 4대 강을 넘어 넓고 깊은 후유증을 남길 것이므로 시적 관심도 지속적으로 가질 필요가 있다.

이렇듯 서정화의 시선이 많이 닿는 곳은 발전이나 부를 앞세우다 심각해진 오염과 파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들이다. 「사라진 바람집-맹그로브숲」, 「큰 부리새를 찾아서」, 「영산강에서」, 「치맥을 먹다 말고」, 「플라스틱 아일랜드」, 「싱크홀」등 여러 작품이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초래하는 다양한 삶의 파괴를 다루고 있다. 다만 현장 고발성 제시에서 더 심화된 인식으로 나아간다면, 서정화의 개성적 권역으로 자리 잡는 것은 물론 시조의 지평 확장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주의 일상화에 따른 다국적 삶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겪고 있는 민감한 문제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지구인들이 인종과 민족을 떠나 국경을 넘어 삶터를 옮겨 다니며 갈등과 분쟁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찍부터 주입된 단일민족 이데올로기 탓인지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나 배척이 더 심한 편이다. 특히 우리보다 못 사는 동남아인이나 흑인에 대한 외국인 노동자 차별과 체불 같은 문제가 심각해서 개그나 영화의 소재로 회자될 만큼 씁쓸한 치부로 남아 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져 ‘다문화’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현실 속에서 찾지만, 모두의 행복한 어울림은 어디서나 여전히 큰 과제로 놓여 있다.

그런 현장 경험 덕분인지 서정화 시집에는 지역과 사람이 좀 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의 시선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약자인 외국인에게도 향하는데, 「조각보 여자」는 그런 관심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캄보디아에서 시집온 새댁인 영세 호앙

전통 치마 한 벌과 1달러 지폐 몇 장뿐

그녀의 소지품 중엔 주민증이 아직 없다

 

남편과 정성 들여 일구는 농장처럼

손끝에 꽃잎 깁듯 자투리 천 덧대가며

한 올씩 그리움 꿰매 조각보를 만들었다

접고 펴다 뒤틀어져 풀려나간 생의 조각

다독이듯 매만지며 이어 덧댄 개미상침

오방색 바둑무늬로 환한 봄빛 걸려있다

 

「조각보 여자」 전문

 

 

이 작품 속의 “캄보디아에서 시집 온 새댁”은 다행히 조각보 만드는 솜씨가 좋은 여자다. 시인은 그 여자가 “자투리 천 덧대가며” 만든 조각보를 그녀의 삶으로 바꿔 읽는다. ‘세땀상침 바느질법’이라는 개미상침이며 “접고 펴다 뒤틀어져”도 “생의 조각”을 열심히 깁는 모습의 묘사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환한 봄빛”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조각보는 자투리를 잇대어 만든다는 점에서 ‘다문화’라는 아름다운 섞임을 전제할 수 있으니 소재로서도 매우 좋은 선택이다. 게다가 “자투리 천”을 이어 만드는 조각보야말로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인데, 거기에 자신의 삶을 교직하는 캄보디아 여인의 조각보니 그 자체만으로도 조화의 무늬로서 승화의 가치를 지닌다.

 

 

화려한 조명 아래

무대에 선 소녀들

 

꽃들인 양 춤추는

탱글탱글 엉덩이에

 

네 자리 출근번호가

문신처럼 박혀있다

 

 

봉 하나에 매달린 채

수렁을 넘어가는

 

납빛 눈그늘에

슬픔을 장전한 채

아파도 웃어야 하는

너의 몸은 전쟁터다

 

「앙헬레스의 천사」 전문

 

자동차 의자 속에

제 몸을 감추는 이들

 

화물선 바닥 깊이

제 몸을 끼우는 이들

 

온몸을

접고 끼워서

국경의 벽 넘는다

 

「벽5-파키스탄」 전문

 

 

앙헬레스(Angeles City)는 미군기지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 북쪽의 도시로, 500여 개의 바와 성인남성클럽이 밀집되어 있어 24시간 개방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시인은 이곳에서 본 여자들의 생활고를 지나치지 않고 그리면서 지구촌 곳곳에 상존하는 어슷비슷한 여성 문제를 환기한다. “네 자리 출근번호가/문신처럼 박혀 있”는 “탱글탱글 엉덩이”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어린 여자들의 슬픈 책임을 집약한 성소 같은 곳이다. “아파도 웃어야 하는” 그들의 삶을 그나마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전쟁터”이니 말이다. 그렇게 봉춤을 추며 젊음을 소모하는 듯해도 들여다보면 식구들 밥벌이를 품고 가는 고달픈 몸이다. 그래서 시인이 그녀들에게 부여하는 “천사”라는 호칭은 약자에 대한 연민의 따뜻한 울림을 만든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소녀가장들이 얼마나 많은지 주변의 삶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벽5-파키스탄」도 갈등과 분쟁이 극심한 나라의 당면 현실에 주목한 작품이다. 하지만 「벽」 연작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모두가 지구촌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만큼 서정화는 지구촌 곳곳의 문제를 향해 열려 있는 시선으로 다른 곳의 일들도 ‘지금 여기’와 관련지어 읽고자 한다. 벽은 ‘벽창호’처럼 불통이나 사회적 문제 탐구의 은유 등으로 줄곤 쓰여 온 상징성 높은 대상이다. 새롭게 쓰기가 어려운 대상을 연작으로 택한 셈이지만, 서정화는 그것을 다른 나라의 문제들로 폭을 넓혀 넘어가고 있다. 모두 단수의 형태라 구체적 실감과 현장의 역동적 조감이 쉽지 않지만, 지구촌 문제를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읽는다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확장이다.

시인이 또 주목하는 것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적 상황들이다. IT강국이라는 긍정적 입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 문제와 그늘도 그 중의 하나다.

 

 

막장의 길목에 선 댓글의 혓바닥들

 

신음할 새도 없이 등에 겨눈 숨은 칼

긴 혀들 입맛 다시며 Wi-Fi 타고 흐른다

 

「댓글 천국」 부분

 

 

댓글이 사람까지 죽이는 온라인상의 흉기로 화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한 댓글도 많고 ‘선플’ 운동까지 벌이고 있지만, ‘악플’은 여전히 범람하며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욕이나 비난을 통한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도 악성 댓글의 유혹은 그만큼 강한가 보다. 서정화도 그 문제에 착안해 그 속의 “숨은 말”과 “긴 혀들”이 늘 “입맛 다시며 Wi-Fi 타고 흐”르는 상황을 주시한다. 댓글이 대사회적 욕구 표출이나 불만 해소의 창구 같은 순기능도 있지만, 악플의 폐해는 IT강국으로서 반드시 해결하며 가야 할 사회적 숙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인터넷 강국의 그늘과 함께 서정화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적 현상들이다. 쇼핑의 일상화를 넘어 중독까지 가는 현대인의 소비 문제를 짚은 「쇼퍼 홀릭」이나 또 다른 편리와 쇼핑의 진화인 「피커」, 스펙 쌓기 혹은 취업 준비로 마모돼가는 삶을 보여주는 「골뱅이 고시원」, 뭔가를 못 견뎌 일탈한 가출 청소년에 주목한 「위험한 동거-가출팸」 등이 그런 예다.

그런 중에 세상을 바꾸면서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려는 희망과 의지도 보여준다. 아프고 힘든 곳마다 찾아다니며 “매만지고 보듬으면 주름도 꽃이 되는” 세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듯 소박한 대로 우리가 당면한 삶을 ‘리폼’하다 보면 자신의 ‘봄’ 또한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바늘 끝에 실을 물고 시침하는 보슬비

실표 뜨기 점선 따라 가위로 재단하듯

도처에 처진 어깨들 솔기 터서 가봉한다

겹침 많은 굴곡에 얽혀 감긴 상처들

매만지고 보듬으면 주름도 꽃이 되는

이제 막 새 자켓 입은 봄이 성큼 걸어간다

 

「봄, 리폼」 전문

 

 

5.

 

지금까지 서정화의 『유령그물』 속을 돌아봤다. 다양한 관심을 보여주는 시편 중에서 우리는 주로 사회적 약자나 환경 파괴 같은 문제의식이 두드러진 작품에 주목해 그의 시적 관심과 행보를 읽었다.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은 서정화의 시선이 ‘지금 이곳’의 문제에서 지구촌의 여러 현장까지 시조 안에 끌어오는 등 시적 품이 퍽 넓어졌다는 점이다. 이런 특성은 ‘저곳’의 문제가 곧 ‘이곳’의 문제로 얽히게 되는 현대의 상황을 환기하는 한편 우리의 낮고 외롭고 쓸쓸한 주변을 더 돌아보게 하는 힘으로 작동하면서 시조단에 환기하는 바가 크다.

서정화 시인은 자신이 추구할 방향과 시세계의 가닥을 어느 정도 잡은 듯싶다. 그래서 더욱 곁들이고 싶은 주문은 작품의 완결성과 함께 앞으로 개척해갈 영역에 대한 인식의 심화다. 이는 『유령그물』을 통해 읽어본 개성과 가능성이 이후 더 역동적인 시조로 도약하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독자들도 “서로의 바깥이 되어 틈바귀를 메”(「아이티 대지진」)우는 아름다운 시세계를 기대하며 이번 시집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