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꼬리에 지느러미를 다는,

遊泳하는 말의 갈기를 자유로이 다듬어 쓰는

그녀의 말은 길다

뱀의 혀를 빌리었을까

조금의 쉴 틈도 남겨 놓지 않고

요리조리 버무리는 말의 농간에

재채기가 난다, 말버즘이 핀다, 곰팡이가 슨다

그녀가 버무리는 커다란 입 속으로

한 알의 사과가 굴러 들어간다

꺽,

통째로 그녀가 삼킨 사과

그녀는 쉴 사이 없이 즙이 단,

구렁이를 뱉어내기에 여념이 없다

 

그녀의 말은 너무나 길다

 

 

 

 

 

 

 

 

 

 

 

 

 

 

 

 

거울 속으로 난 길

 

 

욕실거울을 닦는데

거울 한 쪽이 닳아있다

거울도 외로웠을까

드나드는 사람들의 고정된 눈길을 따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길을 내었다.

아무나 볼 수 있지만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없는

저만의 길을 내놓은 거울의 길속엔

오랜 슬픔으로 다독여진

깊은 상처가 웅크리고 있다.

거울속의 길엔 볕이 들지 않는다

응달 속,

햇볕을 담지 못한 여린 잎맥 사이로

배추흰나비 애벌레 한 마리 숨어 든다

슬픔의 모퉁이만 갉아 먹고 자란 애벌레의 체액에는

한껏 슬픔을 이겨낸 쓸쓸함이 들어앉아

시간의 마디를 채워나간다

거울은 빠짐없이 그 시간의 마디를 닮은 길을

내게 보여준다

생의 무엇이 되었건 간에

정점에 닿아본 적이 있는 것들이란

가벼이 기억의 회로를 통과하지 않는다는 듯

거울 속으로 난 길들은 모두 닮은 예각을 지니고 있다

 

마악 허물을 벗은 배추흰나비 한 마리

날개를 퍼덕여 거울 밖으로 날아 오른다

 

 

 

 

 

 

 

 

 

후숙後熟

 

 

노란 빛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보여주고 있는

바나나는 지금 기도 중이다

적도에 두고 온 뿌리의 간절함을 향해

오체투지 중이다

아무리 먼 곳에 몸 있어도 서로를 나누는

마음 주고 받듯 먼 이국 시멘트 바닥의 차가운

냉기에도 남극을 향한 마음 놓지 않고

그리움 견디고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적도의 햇볕

굽은 가슴으로 받아 마시며

등허리로 쏟아져 내리던

낯 따갑던 사랑의 말들

눈감아 주워 담고 있는 것이다

 

쉿, 바나나는 묵언수행 중이다

 

 

 

 

 

 

 

 

 

 

 

 

 

 

 

 

냉장 사랑법

 

 

아마도 난, 얼음의 사촌쯤 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전생에서 얼음이었다 현생에서

더 가까이 사람들에게로 물들고 싶어

부품으로 연결된 기계의 몸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크고, 묵중하고, 간간히 살아 있다는 신호체계를

쌕쌕거리는 숨소리처럼 뱉어가며 이십세기의

혁혁한 발명품이 되어 진화한 이십일세기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목마른 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내 가슴을 벌컥 열어

일정온도 차가움으로 무장하고 있는 나의 냉기로

자신들의 심장버튼을 누른다

압제된 그들만의 고독이 심장으로 빨려 들어가고

척, 척으로 살아가는 가슴의 휑한 어둠의 잔상이

밀폐된 유리용기 위에 앉아있다

어둠과 밤사이 차가운 것은 세상을 끌어안고

체화된 냉기가 된다

 

난 목마른 갈급의 종결어미

외로움이라는 냉각된 슬픔을 장신구처럼 달고

내 가슴으로 들어오는 쓸쓸한 그들의 손

얼음이 얼음을 사랑한 빙산의 고독처럼 내민

그들의 손은 자그마하다

그들이 지니고 있을 최소한의 온기마저

가차없이 내게로 품어버리는 나는 어쩌면

이십일세기의 가장 영악한 발명품인지도 모르겠다

 

얼음의 전생을 지닌 나는 이미 온기를 잊은지 오래,

자비란 없다

나의 냉정함이 그들의 온몸을 관통한다

 

 

 

 

숲속의 진언

 

 

어느새 숲이 넓어졌어요

살금살금 숲속으로 기어들어 온 시월이

건초더미처럼 야위고 있어요

낮은 나무 위로, 높은 나무 아래로 웅크리고 앉아

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시월

타닥타닥 불타오르는 숲 속으로 천천히

가을이 태어나고 있어요

아시나요?

숲 속 나무들은 하지 이후로는 자기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대요

그냥 그대로 마르고 말라 나무를 떠나간대요

숲속의 법칙엔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하는 법

숲속에선 꽃보다 아름다운 뿌리의 힘으로

좌절조차 금지되는 것을 아시나요?

숲이 깊어졌어요

슬그머니 숲 속으로 기어들어 온 어둠 안에

동그랗게 눈 뜬 시월

가을이, 숲속에서 자신의 또 다른 생애에

화들짝 놀라고 있어요

 

 

 

 

 

 

 

 

 

 

 

 

 

 

 

미스 홍당무

 

 

이쁜 것들은 모두 땅속에 묻어야 해

나는 내가 창피해 마음보다 먼저 얼굴이 달아오르지

사랑이라 믿었던 의혹들 모두 테잎 풀어지듯 늘어지고 나면

외설처럼 욕설처럼 입안에 껄끄럽게 남는 좁쌀 같은 언어의 굴욕들

모두 얼굴로 가 붉은 꽃잎처럼 피어나지

 

슬픈 건 내가 나를 욕망한다는 것

부재된 사랑의 힘 알 수 없어

모든 것 사랑으로 착각된다는 거지

착각이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저 수많은 눈들 속에서

내가 숨을 곳은 나밖에 없다는 거지

 

내안에 꽃피는 이 착각

정말 사랑인지도,

분노인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거지

정말 슬픈 건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

세상을 향해 터져 나가는 일갈의 침묵도

내 안의 침묵인지 알 수 없다는 거지

 

나는 나, 너는 너

우리로는 함께 꿈꿀 수 없는 슬픈 방정식의 함수

밤마다 거울 속에서 확인 사살하는 총구는

나를 향하고 있다는 거지

혼재된 욕망이 열꽃처럼 핀 얼굴로

멋들어지게 버무려 견뎌내야 한다는 생의 법칙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구겨 던져버릴 수 있다는

내 안의 착각 신전처럼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거지

 

숨을 곳 없는 붉은 꽃잎들의 흔적

오늘도 밤을 흔들어 내 어깨를 깨워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이 삶의 정의

비록 꽃 필수 없다 해도

나는 나의 꽃

 



원반 던지기


원반을 날린다

제 가슴 상처를 모두 드러내고

생존의 원형질만 남겨 놓은 채

허공으로 몸을 날려 달리는

저, 속도의 변형

제 자리에서 멀어질수록

제 안 울림의 파장을 더욱 크게 남기는

밑 가슴 터진 슬픔들

동그란 원을 탈출하여

스스로 다시 서는 반복을 무수히 되풀이 하며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또 다른 허공으로 몸을 부리는 순간

날아가 비상을 꿈꾸는 저것,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의 기울기

직각으로 받아내는 반짝임을

가끔씩 바람처럼 제 안에 품어 보는 저것,

아무리 멀리 던져져도 무디어 지지 않는 삶의 날을

퍼렇게 갈아 다시 한번 일어서 보는 저것,

그 힘의 중심에 자신의 온몸을 읽어내는

바람의 속도가 있다

 

 

 

 

 

 

 

 

 

 

 

 

 

 

Spica*

 

 

길이 끊긴 길 위에서 너를 찾아내는 단 하나의 방법은

길 위의 불빛을 모두 거두어

동병의 어둠에 나를 휘묻는 것이다

보여주지 않는 길들의 길을 어둠 속에 접어 넣고

어둠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 너는 희미하게 네 모습 드러내어 길 하나 밝히고

땅의 먹빛에 순백의 은회색 빛을 뿌려줄 것이다

 

천천히 부유하는 빛을 따라 농부는 씨앗을 뿌리고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시간의 아득함을 흘릴 것이다.

시간의 야속함마저 땅 끝에 심는 이 사라짐에 대해

너는 무슨 말을 보태어 세상 한 자락 품어 안을까

묵묵히 둥글게 생의 幻을 돌고 있는 자리 맴돌다

네가 사라진 자리에 뜨거운 입맞춤 조용히 내려놓으면

네가 사랑이라 명명했던 팽팽한 슬픔들

모두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 있는 건지

 

너는 단 한 번도 쉬임 없이 길들의 길을 위해

어둠위에 서 있었음을

나 어둠과 함께 이마를 맞대고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야 알았다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 법

나, 그렇게 뒤늦게라도 너를 찾아

어둠 속의 어둠을 끌어안고 네게 붙박히는 것이다.

시작의 끝에 또 다른 시작을 매다는 둥근 원처럼

네 주변을 하나의 점처럼 서성이는 것이다

 

 

*spica : 처녀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별

 

 

 

 

낡은 가방의 회상

 

 

사실, 난 헤어진 전 애인의 애장품이었어요

느낌표가 많았던 애인은 내속의 나를 요구하며

주머니마다 지퍼를 달고 접혀진 메모지마다

함구하는 자화상을 그려달라 칭얼거렸죠

 

 

쑥청색 네모 반듯한 고정관념은 날마다 공격 받기 일쑤였고

내게서 튀어 나오는 것들은 모두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 것들

가끔씩 나는 어두컴컴한 구석 의자에 허리가 꺾일 만큼의 난타를 당하며

고흐처럼 살다간 친구의 자서를 떠올리며 울기도 했었죠

 

애인이 아껴 준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날마다

희망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거리 곳곳을 누볐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지구 밖을 향해 가도 나쁠 건 없지 않겠냐며

봄여름 가을겨울 사계절을 애인의 어깨에서 돋아나는 새싹과

지는 나뭇잎의 고해성사를 들었어요

 

사랑이 어떻게 왔다 어떻게 가는지를 보았어요

이제 난 다시 또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가야해요

빈 기억의 창고라도 지켜야 하는 전 애인의 아주 단순한 습관 때문에

내가 걸어가야 하는 이 길

 

사실, 누군가의 모든 것을

반듯하게 담아 간직 한다는 것

그게 제 운명인 걸요

 

 

 

 

 

 

 

 

하루를 건너는 법

 

 

창이 기지개를 켠다

팔월의 폭염이 탁구공처럼 굴러온다

굴러온 공의 흔적을 찾아

 

커피가 달콤한 책을 먹는다

빙빙대며 죽어가는 소음이 전화기를 먹는다

나무는 나무의 하늘

나무의 전성기를 먹고 전설처럼 남은 후일담을

뱉어내며 햇살을 만든다

양탄자처럼 날으는 나의 전생을 건넌다

 

나는 굴러가는 창문이다, 커피 공화국이다, 입 벌린 책이다

발 달린 전화기다, 거울달린 나무다

나는 나를 먹고 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