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눈물을 덜어줄지언정,

누군가에게 슬픔이 되지 말자

 

햇빛이 되어줄지언정,

누군가에게 구름은 되지 말자

 

아.프.다.라고 쓰고

긴 외로움이라고 읽자.

 

아프지, 슬프지, 힘들지, 말자 우리!

 

(당신의안부를꼬박꼬박물어야하는요즘)

 

미처 읽기도 전에 많은 것들이 지나간다.

명명되어지는 것

 

약력

2010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석사), ‘예술문화협동조합 청연’ 상임이사.

대구 ‘김광석 벽화거리’ 인근에에 〈시인보호구역〉이란 집필실을 두고 있다.

E-mail : poetry2000@daum.net / 전화 및 문자 : 070-8862-4530

 

붉은, 당신,

 

정훈교 시인의 첫 시집 『또 하나의 입술』은,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이 겉으로 보면 평이한 듯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섬세한 결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난해하거나 어려운 단어들을 의식적으로 구사하거나 언어의 실험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시적 언어는 다른 어떤 시인의 그것과 전혀 다른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시적 실험과 언어 실험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이유는 새로운 시의 형식이 곧 시인의 언어 감각에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는 시인들은 보통 자신의 언어적 자의식에 몰입하거나 새로운 시적 문장의 탐색에 몰두하고는 한다. 정훈교 시인의 시도 이 점에서는 시적 언어의 긴장도가 이미 자신의 고유한 언어 감각을 창조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경지에 있는 듯하다. 다만, 시인의 이러한 언어 감각이 언어에 대한 의식적인 실험이나 뒤틀기를 통한 방법론적 천착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시인의 천성적인 자질과 감수성, 그리고 서정적 기질에서 산출된 것이라는 점은 다른 실험적인 작풍의 시인들이 지니지 못한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정훈교 시인의 시적 감수성은 다분히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가정사라든가, 성장기 체험, 그리고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정훈교 시인이 전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묘사와 서정적 정조는 체험의 깊이를 담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사실 체험이란 객관화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계량적이거나 세월, 연륜 같은 것과 동일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체험이란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어떤 상황, 기억에 대한 시인의 진정성을 측정하는 한 척도에 가깝다. 상상이든, 실제의 경험이든, 혹은 그 양자의 뒤엉킴과 굴절이든, 시로 표현된 체험의 깊이는 근원적으로는 진정성, 혹은 영혼의 깊이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체험과 정서의 상관성은 이 점에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시적 사실에 의해서 그 진정성과 깊이, 감동을 산출해낸다. 어떻게 느꼈는가와 어느 정도로 느꼈는가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존재론적인 관계 맺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이고 그것이 결국 시인의 실존적 자의식을 결정해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시인이 사물 혹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대화’에 견주어 말한 적이 있다. 즉,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이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물이 시인에게 무엇인가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 양자의 과정 속에서 의미가, 시가 생산된다. 시가 진정 세계와 우주, 인생의 비의를 담고 있다면, 아마 이 대목에서 그 비의의 한 축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정훈교 시인의 감각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서’로 환원된다. 시의 언어가 평이한 듯하면서도 그 나름의 고유한 음색을 지닌 것으로 느껴지는 까닭이 이 점에 있다. 예를 들면, 정훈교 시인의 붉음, 붉은색에 대한 정서는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어쩌면 시인이 구축하고 있는 시적 세계의 첫 번째 관문은 시인의 이 붉음에 대한 감각이 산출하고 있는 정서인지도 모른다. ‘붉음’은 어떤 구체적 감각이나 의미로 환치되지 않는다면 시각적인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한 것이 된다. 더구나 그 관념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지니고 있는 주관성까지 함축한 감각적 관념이니 더구나 모호하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 추상성에 구체성과 실재를 부여하는 것이 시의 문맥이고, 그 문맥을 만드는 힘이 바로 정서이다. 정서란 오랜 시간을 두고 축적된 기억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감정의 묵은 퇴적층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지층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층대 속에는 이미 무수한 시간의 층과 체험이 담겨 있고 그 퇴적층 전체의 아우라는 오직 시인의 실존적 몰입에 의해서만 산출되는데, 아마도 이런 상태를 시적 진정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훈교 시인의 작품은 이 점에서 보면 어떤 한 국면에 서로 다른 이질적 시간대의 기억이 접속을 하고 있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시인이 ‘붉다’고 말하는 것은 그 붉음을 환기시킬 수 있는 무수한 기억을 단 한 번에 동시적으로 ‘호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적 정황의 모호함은 오히려 이런 다원적인 시간대의 동시접속이 만들어낸 기억의 흔적을 그의 시가 담아내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에 해당한다.

당신은

어느 종족에도 속하지 못한 붉은 나무입니다

바람 불면

몇 잎의 꽃들 아우성입니다

 

당신은

쓸쓸하기도 하거니와

허공을 지우며

발아래 물아래 다녀가는 종족이기도 합니다

 

붉은 음색을

사위에 깔며 더디 가는 당신

 

우우우

곧잘 바람이 되곤 합니다

 

무너지는 침묵을

길 위에 펼치는 당신은

봄밤

오래된 나무

 

당신은

개화에도 자유롭고

낙화에도 자유로운

 

붉은 나무

―「붉은 나무」 전문

 

시인이 말하는 “붉은 나무”가 어떤 것인가는 이 시의 문맥만으로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나무가 암시하는 느낌과 분위기만은 독자에게 잘 전달되는데, 이 붉은 나무의 정체는 그래서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 시인의 세계에 대한 태도이자 정서의 함축에 해당한다. 시인이 붉은 나무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훈교 시인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당신이 언제나 ‘그리움’, ‘결핍’, ‘상처’ 등의 느낌을 환기시키는 대상이듯이, 실체라기보다는 감정이고 정서이다. ‘붉은색’과 ‘당신’은 이 점에서 정훈교 시인의 시적 정서와 세계관의 특정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개화에도 자유롭고/낙화에도 자유로운” 그런 대상은 사실 실재한다기보다는 시인의 상상과 정신이 만들어낸 ‘표상’이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이 점에서 특정한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상 이전의 시인의 심상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그것은 장소일 수도 있고 특정한 시간, 특정한 체험, 특정한 국면을 환기시키는 모든 이미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적 표상으로서의 ‘당신’이 붉은 나무로 그려질 때, 그 붉은 나무는 상상의 나무이면서 시인이 그려낸 단 하나의 의미가 된다. 멜랑콜리 혹은 유니크함을 담은 정서에 대해, 말로 표현하거나 그릴 수 없는 어떤 느낌에 대해, 소통과 교감을 만드는 행위, 그것이 이미지를 산출하는 상상력의 기능이라면 지금 시인이 만들어낸 ‘붉은 나무’는 시인이 잠시 머물렀던 자유와 우울의 세계를 표상하는 눈앞의 이미지이고 바로 그가 이 순간 그리워하는 ‘당신’이 되는 것이다. 우울과 자유가 뒤섞인 상태에서 이 세계를 스쳐가는 바람 같은 존재, 그런 존재를 ‘당신’이라고 부른다면, 그 존재의 외피와 표상을 시인은 지금 ‘붉은 나무’라고 스스로 그려내고 있다. 이건 하나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당신과 ‘붉음’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알레고리.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군요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군요 옛 읍성에서 누군가를 품은 뿌리였다가 옛 신화에서 파에온(Paeon) 당신이었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 짝사랑이었다가 오늘 깨뜨리지 못한 속내이기도 한 당신, 봉분 아래 꽃그늘이 더욱 환하군요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군요 뿌리내린 또 한 계절을 유물론으로 채우는 당신, 울음으로 피었다가 망국으로 지는 꽃들의 전설을 지금 기록 중이군요 5월 신부의 부케였다가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돈의 난장이었다가 지는 붉은 꽃들의 저 무수한 잔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이군요 당신이기 전에 당신,이 버린 최후의 불립문자

―「적(赤, 迹, 敵, 吊)―작약」 전문

<!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라는 표현처럼, 정훈교 시인의 수사에는 이미지의 연결성 즉 인접성을 원리로 하는 환유적 국면이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이런 환유가 의미의 전복이나 일탈을 꾀한다기보다는 의미의 중첩으로 인한 흔적을 절개하고 그 중첩의 실체를 횡단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투시도의 효과를 나타낸다. 즉, 이건 하나의 기록이고 기억이다. 그 기억을 순차적으로 꺼낸다면 하나의 서사가 될 것이고 그 기억을 횡으로 절개하여 동시에 바라본다면 그건 무수한 순간들의 동시적 현현을 의미할 것이다. 흘림체나 붉은 기록은 이 점에서 기억의 동시적 현현, 다시 말하면 순차성을 무시한 돌출의 순간을 기록하는 한 방식이다. 그래서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는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어쩌면 수많은 윤회와 전생의 순간이 동시에 뒤엉켜서 나타나듯이 펼쳐진다. 그 펼침 위에 옛 읍성의 뿌리였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의 짝사랑이었다가, 신부의 부케였다가,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돈의 난장이기도 한 존재들이 거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적 정서 속에서 모든 대상은 하나이기보다는 중첩이고 펼쳐지는 존재이며, 수없는 변신을 거듭하는 것들, 매 순간 다른 의미가 되어 떠도는 당신들이다. “붉은 꽃들의 저 무수한 잔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이군요 당신이기 전에 당신,이 버린 최후의 불립문자”라는 시구처럼, 비유컨대 “당신이기 전에 당신”은 ‘나’라는 개체가 되기 이전의 중첩의 세계 속에서 존재했던, ‘브라만’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어쩌면 모든 존재의 중첩이 표면적인 대상과 현상을 통해 현현하는 곳이다. 그러니, 기록과 기억을 말하는 시인에게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은 최후의 불립문자, 즉 글로 쓰는 것이 불가능한 기록들에 해당한다. 당신 이전의 당신에 대한 기록이면서 그것을 해독하거나 받아 적을 수 없는 한계, 그 경계선에 지금 시인이 서 있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과 ‘붉음’은 그 경계의 지점에 존재하는 정서이고 대상이다. 당신이라는 호명은 이 세계의 모든 현상 이전의 ‘현상’을 암시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붉음’이라는 정서를 통해 구체화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 속에 나타난다. 이 호명은 본질과 현상을 가로지르는 기록 혹은 관찰을 시도하는 시인의 정신적 특징을 함축하는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나무였을까 바람이었을까

 

구름과 함께 파도가 동네 어귀를 덮고야 말았다 길 저 안쪽엔 미처 떠나지 못한 당신이 있었고 길 이쪽엔 당신의 몸짓을 춤으로 착각한 사내가 있었다

 

파란 하늘이 옥상까지 내려와 이불을 덮어주는 모텔이었다

 

나무와 바람이

나와 당신이

 

새벽녘까지 춤을 추는 동안,

 

수평선에 뜬 별은

모닥불과 함께 사위어갔고

 

등대는 고스란히

어둠을 받아 적었다

 

섬은

밤새 신열을 앓았던 것이다

―「깃―우도」 전문

 

다분히 감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시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와 당신의 변신이 그냥 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전환이나 겹침’을 갈망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섬이 신열을 앓듯이, 나무와 바람이 춤을 추는 동안, 당신과 나 사이의 착각과 교감이 오간다. 그리고 그 순간 사물들은 또 다른 사물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등대가 어둠을 받아 적듯이, 시인은 이 세계가 매 순간 의미를 서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록과 받아 적기는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하이데거의 ‘현존’을 떠올리게 한다. 정훈교 시인은 자신의 몸을 통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우주적 흐름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시를, 시쓰기를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은 사라질 뿐.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록이 이 세계의 흔적을 지금도 남긴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시인이라면, 그의 시쓰기는 언제나 쓸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록에 치중될 것이다.

 

“4번 염색체”는 ‘운명’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인간의 정신적, 지적 태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염색체로 알려져 있다. 시인이 이 염색체에 대해 지닌 관심이 이번 시집에 연작시의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운명’에 대한 사유와 4번 염색체가 이렇게 연관된다면, 시인의 삶은 어쩌면 염색체의 결과나 작용에 대한 실험과 관찰일수도 있겠다.

4번 염색체 위의 ‘울프 호쉬호른(Wolf-Hirschhorn)’ 유전자 위에서 CAG 배열이 39회 이상 반복될 경우 75세 이하에서 치매에 걸릴 확률이 90% 이상이고 66세에 첫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41번이면 54세, 42번이면 37세, 50번이면 27세에 지능을 상실한다고 알려져 있다. 염색체 길이가 정상의 경우보다 조금 짧아서 나타나는 이상의 경우, 염색체 전체의 길이를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정도의 거리로 표현한다면 그 이상 염색체 길이의 차이는 2.5cm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의 지적 사유와 운명을 결정한다는 이 중요한 염색체의 차이란 실제로 거의 미미한 것임에도 그 결과는 엄청나다. 어쩌면 시인이 지금 이 시집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시인의 개성과 삶의 다양한 편차들에 대한 궁금증을 ‘운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염색체에 대한 연구로 ‘알레고리화’해서 표현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수면을 등지고 내게로 옵니다 돌의 무게가 파문의 크기로 옮겨 붙는 순간입니다 당신의 고요가 깨어나는, 강가에 서서

 

아직은 수평인 파문에게 물수제비를 띄웁니다

 

당신을 펼치자마자 강의 배꼽이 출렁이고 노을이 자지러집니다 파문마저 이내 수평으로 재우는 당신의 수심을 헤아려봅니다 한 획으로 갈음될 수 없는 비릿한 그 무엇이 꾸역꾸역 솟구칩니다

 

바람이 깨지고 물의 이마가 깨지고 붉은 노을이 깨지고 어둑한 파문이 채 가시지 않는 강가에 나와 당신에게 거룩한 나를 띄웁니다 물결로 채워진 페이지가 쌓이고 나면

 

당신, 어느 날엔 비스듬히 빗겨간 물결들을 읽을 테지요

―「저문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읽다,」 전문

 

정훈교 시인은 지적 관심과 사유의 열망이 상대적으로 강한 시인으로 보인다. 기록이나 읽는 행위가 단순히 ‘문자’라는 것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시인의 작품에 유난히 기록, 읽기의 의미 부여가 많은 것은 그가 여전히 쓰는 것과 알려고 하는 것의 열망을 간직한 시인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처음에 말했듯이, 정훈교 시인에게 시란 쓰는 것이면서 동시에 읽는 것이고 또한 말하면서 듣는 것이다. 기록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역사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시의 밑바닥에 감추어져 있더라도, 이러한 인식의 힘은 그의 시가 진정성의 축을 향해 나아가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파문”을 수평으로 재우는 물결의 “수심”은 시인이 발견한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이다. “한 획으로 갈음될 수 없는 비릿한 그 무엇”은 쉽사리 쓸 수도 없고 또 쉽게 읽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시인이 던진 물수제비의 파문은 이 점에서 갈음되지 않는 기록의 무수한 반복일 것이다. 이 반복되는 작업은 어쩌면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이미 예정한 것이리라. 파문을 일으키고 그것이 다시 잠재워지는 순간을 반복해서 지켜보면서 시인이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한 나”의 조건은 어쩌면 이렇게 지치지 않고 획을 긋는 행위, 파문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물결의 수심에 의해 잠재워질 것이지만, 한 개인의 흔적이란, 강물의 수심 위로 사라질 물결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물결로 채워진 페이지를 남김으로써만이 비로소 ‘당신’에게 전달될 무엇을 남길 수 있다고 시인은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운명이나 역사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드러내는 한 단초이기도 하다. 정의, 사랑, 믿음 등 어떤 가치라도, 결국 역사라는 수심 위의 물결일 것이고 한 개인의 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그것을 무수한 물결의 페이지로 만들어 어떤 의미로 구축하는 것이다.

변신 모티프와 읽고 쓰는 행위가 정훈교 시인의 시 속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 점에서 시인의 중요한 특질로 보인다. 변화는 사물의 다차원을 포섭하고 기억의 중첩을 다루는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또 읽고 쓴다는 것은 사물과 우주의 의미가 표층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관찰과 기록으로서의 시세계를 지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특징들은 시인의 시적 자질인 서정적 감수성과 만나 독특한 문체와 개성을 만드는 힘이 된다. 역사와 삶, 운명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개인의 삶이 남긴 궤적이 지닌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시인은 자신의 작품 안에서 직접적인 언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만들어낸 다차원적인 엉킴과 변신의 수사 등은 이미 사물과 세계의 경계 없는 소통을 지향하고 있다. 그 지향이 지닌 장점은 글로 쓸 수 없는 것들, 말해지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체험과 느낌을, 우리의 공동체 내부로 다시 돌려주고자 하는 작업의 한 방향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언제나 우리가 보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을 초과해 있는, 잉여이면서도 동시에 결핍을 자각시키는 존재들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역사의 표면을 부유하는 것들이 일상적 삶의 궤적을 만든다면, 아마도 시는 그 위에 던져진 물수제비, 즉 ‘파문’에 해당될 것이다. ‘역사와 우주’의 깊은 수면 위에 불가능한 흔적의 페이지를 반복해서 남김으로써 어느 순간 초월적 의미의 층위에 도달하려고 하는 불가능한 꿈이 ‘당신’과 ‘우리’의 소통을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