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읽다,

 

수면을 등지고 내게로 옵니다 돌의 무게가 파문의 크기로 옮겨붙는 순간이지요 당신의 고요가 깨어나는, 강가에 서서

 

아직은 수평인 파문에게 물수제비를 띄웁니다

 

당신을 펼치자마자 강의 배꼽이 출렁이고 노을이 자지러집니다 파문마저 이내 수평으로 재우는 당신의 수심을 헤아려봅니다 한 획으로 갈음될 수 없는 비릿한 그 무엇이 꾸역꾸역 솟구칩니다

 

바람이 깨지고 물의 이마가 깨지고 붉은 노을이 깨지고 어둑한 파문이 채 가시지 않는 강가에 나와 당신에게 거룩한 나를 띄웁니다 물결로 채워진 페이지가 쌓이고 나면

 

당신, 어느 날엔 비스듬히 빗겨간 물결들을 읽을 테지요

 

  봄꽃이 피면 나는 망월✽로 간다

봄꽃이 피면 나는 망월로 간다 우리는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필사적으로 도하하는 용감한 족속, 이웃과 이웃이 밟히고 밟히고 내 가족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길 위에서 안식을 염원하여도, 조상과 조상은 이 길을 무던히도 지났을 것이다 비가 강을 범했어도 바람이 사정없이 풀을 눕혀도, 우리는 가고야 만다

 

풀잎 사이로 무지개가 뜨고서야 서로의 낮은 등을 두드리며 울음을 터트린다 내 몸은 이 순간마저도, 다시 나서야 하는 저길 그 어느 때를, 어렴풋이 기억해내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발자국이 생을 위한 우리의 긴 행렬을 장례 행렬로 오인하여도, 우리족속은 가야만 한다

조상과 조상이 감히 건너온, 그 길 위

거룩한 산란을 꿈꾸며, 우리는 가야 한다 

 

✽ 달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월(望月)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 소재의 못으로서, 전국 최대 규모의 두꺼비 서식지이다.

 

목련

 

허공에 처연히 목을 내놓은 당신이 있어, 골목마다 온통 희디흰 슬픔입니다

  

 

적(赤, 迹, 敵, 吊)

― 작약

 

오래 바람에 머물러본 당신, 붉은 꽃잎마다 떨어지지 않는 기록들이군요 5월 흘림체로 바람을 앓는 중이군요 물결에 닿은 당신 이야기가 사방으로 번지는군요 옛 읍성에서 누군가를 품은 뿌리였다가 옛 신화에서 파에온(Paeon)✽ 당신이었다가 플라스틱 화분 속 짝사랑이었다가 오늘 깨뜨리지 못한 속내이기도한 당신, 봉분 아래 꽃그늘이 더욱 환하군요

 

투덜투덜 여인숙을 전전하는 빗소리에 우두둑 당신이 떨어집니다 작약의 발목이 하얗게 봉분을 넘고 있군요 뿌리내린 또 한 계절을 유물론으로 채우는 당신, 울음으로 피었다가 망국으로 지는 꽃들의 전설을 지금 기록 중이군요 5월 신부의 부케였다가 생리통의 뿌리였다가 혼돈의 난장이었다가 지는 붉은 꽃들의 저 무수한 잔치 정작 쓰지 못한 문장들이 주저앉는 중이군요 당신이기 전에 당신,이 버린 최후의 不立文字

 

✽ 작약의 속명 ‘paeony’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의사 파에온이 신들을 치료하기 위해 작약 뿌리를 사용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궤적

 

느릿한 호흡이

몸을 푼다

 

우두커니, 섰는 당신은

길이 되고

 

당신이 흐른 길 위로

붉은 바다가 밀려온다

 

그제야 배꼽 아래 저장되었던

양수가 흘러나오고

 

달의 눈금을 해독할 줄 아는

당신이,

당신을 해독할 줄 아는

바람이,

 

몸을 푼다

 

오랫동안 어머니였던

붉은 바다가

 

점묘법으로 낡아가는,

무렵

 

저마다 꽁꽁 숨겨두었던 속내를,

흘려보내는 것이다

 

 발 없는 게

 

허공을 밀고 가는 발 없는 게를 보았습니다

 

구름을 등에 이고 썰물 밀어내며 바투 섰는 게를 보았습니다

 

개펄에 새겨진 물의 발자국마다 발 없는 게의 흔적입니다

 

소금기 빠져나간 몸을 두고 집게만 내세우는 게를 보았습니다

 

퇴근하는 길,

 

하늘을 통째로 이고 사는 오체투지 발 없는 게를 보았습니다

 

이카로스 302호

 

당신의 날갯죽지는 바람을 가르지 못한다. 단 한 번도 바람을 품어본 적 없으므로

 

마른 입술이 또 하나의 입술을 물고 또 하나의 입술이 당신 이마를 짚는 밤, 낡은 TV 안테나가 당신의 신호음을 감지했다면 그것은 먼 우주에서 먼지로 부유하다 어느 골방에서 침잠하는 제2의 자전(自轉)인 셈이다 당신은 이제,

 

바람의 방향대로 깃을 세우고 부러 낙법을 익혀야 한다 302호 열쇠 구멍에 달을 밀어 넣으며, 낡은 나무 침대를 생각한다 내일과 밤이 없고 별과 오늘이 없는 날갯짓을 하다가도

 

애무 없이도 붉게 타는 노을을 생각하다가도, 계단을 오를 땐 완강기 먼저 찾는다

 

당신의 날개는 퇴화했으므로

 

 

당신이 웃는 날; 雨期

 

웃음을싫어하는사람도있겠다 어린딸을안고종종걸음치는엄마가싫은사람도있겠다 화촉이채꺼지지않은임산부의부른배가싫은사람도있겠다 깔깔대는치맛단짧은여고생의수다가싫은사람도있겠다 욕탕에나란히앉아등밀어주는풍경이싫은사람도있겠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풍경이 말라가는 고요한 식사를 한다 눈을 감은 그의 색깔은 검정일까 파랑일까 100% 온전한 어둠을 쫓는 시인이 있다는데 눈을 감으면 온전한 어둠이 올까 대낮에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찬찬히 어둠을 읽는 사내를 본다 지문이 없는 그의 혀에선 언어도 가뭄이다 쩍쩍 금이 운다 하관 직전인 바람이 플라타너스 잎을 어르고 있다 손가락이 빨갛게 빛으로 타는 중이다 누구도 그의 손가락이 눈썹이 파르르 떨고 있단 걸 읽어내진 못했다

 

그가 천천히 불을 댕긴다 그가 줄어든다 갓 스물 넘은 손가락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오토바이 뒤로 사라졌다 하늘을 난다 무지개가 뜬다 비가 온다

 

 

풍년정미소

 

바람이 한참 만에야 다 익었어 간혹 지나다보면 헬기에서 투하되는 최루탄이라고 생각했어 생뚱맞지만 눈물이 사납게 달려들어도 까끌한 웃음 정도로 대충 버무려 먹었지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둬야 돼 설익은 눈물은 감잎처럼 떫으니까

 

바람에도 물렁뼈가 있단 얘길 듣긴 했지만 이렇게 스치기만해도 살꽃 필 정도로 센 놈이 있을 줄은 몰랐어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스꺼워 느티나무에 매단 할아버지 할아버지 적 방앗간 얘기는 이제 끝난 거야 쌕쌕 울어대는 컨베이어벨트 위로 머리가 딸려 들어갈 것만 같아 벽은 금이 가다 못해 가랑이를 활짝 벌렸어 난 이제 눕기만 하면 돼 넓적다리엔 왕겨의 가는 속살만 잔뜩 쌓여 있어 쌀 찧는 일이 업인 줄 알았는데 방아로 찧고 빻아야 되나봐 칠 타(打) 고운 가루가 되겠지 그런데 쳐서 넘어지면 뭐하게?

 

겨울 장례식

 

당신이 아침부터 와서는 소리 없이 갔다, 첫눈

저녁에 한 번 뜨거웠다 하얗게 갔다, 연탄

고요를 쓸고도 남을, 바람

평행을 달리다가도, 지붕에 닿으면 무너지는 햇살

처녀 때도 못 타본 꽃가마를 이제야 타고, 상여

무너져내리는 허공을 딱 자기 키만큼 떠받치고 있는, 산

낮 동안의 당신을 지우고, 더욱 깊어지는 일몰

그리운 것들이 왕창 몰려와, 모래 무덤이 되는 바다

하도 간절하여 한 번 닿으면 모두 물빛이 되는, 고드름

당신과 내가 아는 그 모든 것들이 되어주는, 눈사람

온전한 허공이 되어야 뭍으로 내려앉는, 연(鳶)

 

첫눈, 연탄, 바람, 햇살, 상여, 산, 일몰, 바다, 고드름, 눈사람, 연(鳶),

 

충치가 빠지고 시리고 시린, 별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