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이승과 저승 사이는 얼마나 멀까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일까

 

방랑하는 길이 멀수록

방황하는 발길이 어지러울수록

어깨는 무겁고 발바닥은 아프리라

 

‘나’를 찾아 방황하는 동안

수천 리 방랑하는 동안

불안과 상실, 불확실의 강을 건너

보편의 진리에 닿으리라

 

삶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흙 같은 것임을.

 



약력


1958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와 국민대학교 교육대학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3년 《심상》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바다로 간 사내』,『우목 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등이 있고, 『검은 늪』의 영역시집 『Mother's Dawn』이 있다.

2001년 시 「목련」으로 ‘동서커피문학상’, 2003년 시 「장마」로 ‘시흥문학상’, 2012년 시집 『붉은 꽃에 대한 명상』으로 ‘아르코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 강신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중이다.


 

 


존재의 허무가 일궈놓은 긍정의 시학

 

박지현(시인․ 경희대 강사)

 

 

 

빠르게 진화하는 시대에 시인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 것일까? 시대의 변화에 재빠르게 순응하고 함께 진화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일 것인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속도의 시대에 시인의 어깨는 자꾸 무거워져만 간다. 지난 그 어느 시대도 요즘처럼 안과 밖이 분리되고 상충을 야기한 때는 없었다. 속도의 위력은 그만큼 위험하다. 따라서 시인의 정서적 감응의 속도 역시 시대의 변화에 덩달아 변화해야 하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시대가 요구한다고 해서 모든 시인이 직진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 직면한 현실에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변화무쌍한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내어야 한다. 그래야 시인의 역할이 빛난다. 권순자 시인의 경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대에 무작정 편승하거나 단편적인 서정에 함몰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치열한 시대정신, 즉 상처, 꿈, 욕망, 사랑, 그리움, 외로움, 어둠, 빛으로 명명된 무형의 상징어를 소재로 잃어버린 세계를 되찾고자 부단히 애를 쓰는 것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꽃, 구름, 폭포, 단풍, 달, 파도, 사막, 모래톱, 나비, 풀, 바람, 길, 새, 불빛, 뼈, 뿌리 등의 원형적 상징어에 내재한 시인의 정조가 체험적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존재론적 물음에 닿아 있다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시인이 감각한 허무의 인식은 결코 비관적인 것을 노래하거나 푸념하지 않는다. 기억 저 쪽의 시간과 현실세계의 자아와의 대립, 유형, 무형의 대상과 서정적 자아와의 대립을 방치하거나 갈등의 구조에 빠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화해를 이끌어내는 긍정의 미학을 선택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성을 자연어에 투사시켜 끊임없이 순례하며 순수한 자기회복에 이르고 있다.

 

1. 어둠의 시간들, 회복을 꿈꾸는 자아

 

시인은 분주하다. 시선에 포착되고 획득된 자연물을 잘 솎아내어 말을 건네거나 그 안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리고 대상에 집중하며 응시한다. 현재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서정적 자아의 대립적 구도는 현재의 시간성에서 세상을 떠도는 대상을 ‘저녁’, ‘어둠’이라는 시간성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가정된 의미와 이미 도래한 현재의 시간이 중첩된 도입부의 ‘저녁이 되면’으로 이어진다. 대표작 「순례자」를 살펴본다.

 

저녁이 되면 낯선 마을 처마 밑을 맴돌지요

달빛이 휘영청 길을 열어주지만

길도 추워서 바람이 머물지 않지요

한 몸 뉠 곳 없는 고양이

주뼛주뼛 처마 밑을 서성거리지요

 

흙에 묻힌 역사는 다시 살아 되풀이 되는데

창백한 꽃들이 달빛에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데

 

어둠이 왜 자꾸 짙어만 가는지

꽃들의 잔기침 소리, 목울대를 흔드는 소리 어느 새

길고 가늘게 뻗어 밤안개로 피고 있어요

안개끼리 기침하고 있어요

 

뿌연 고통의 뿌리들이 사방에 퍼지고 있어요

 

제 가슴 두드리는 넝쿨손, 허우적허우적

반짝이는 푸른빛들이 날카롭게 허공을 조각내는 한밤

앞서간 순례자들이 뼈를 이어

하늘로 다리 놓고 있어

―「순례자」전문

 

이 시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놓인 대상들이 모두 하나 같이 떨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다. ‘낯섦’과 ‘추위’에 내몰린 탓이다. ‘낮’ 즉 밝음의 대척점에 서 있는 저녁 즉 ‘어둠’의 세상은 시인에겐 몹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밝음의 시간은 어느새 지나고 어둠의 시간이 도래했다. 그래서 도입부에서부터 예측된 ‘저녁이 되면’을 통해 긍정의 시간은 끝나고 부정의 시간이 왔음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생명의 대표적 표상인 ‘고양이’와 ‘꽃’을 통해 존재의 향방이 가늠되는데 ‘달빛이 휘영청 길을 열어주’면서 긍정의 첫발을 연 것은 매우 희망적이다. 하지만 곧 서정적 자아는 부정의 시간을 인지하고 만다. 그나마 달빛이 있어 다행이라지만 곧 그 달빛조차 부정적 인식에 놓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길’이 추워 ‘바람’조차 머물기를 거부한다거나, 고양이와 꽃들은 각각 보금자리와 출구를 찾아 헤매나 어둠은 이들을 좀체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더욱이 ‘달빛’에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 꽃들은 어둠에 쫓겨 밤안개로 변이되는 극한 상황에 내몰린다. 일반적으로 달빛은 서정적이며 매우 긍정의 시어로 장치된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부정적 시어로 활용되고 있는데 왜일까? 그것은 앞서 파악한 긍정의 시간과 부정의 시간의 교차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변이된 ‘꽃들⟺밤안개’가 제 존재를 무화시키는 외부적 압력에 맞서 아직 살아있음을 소리를 통해 즉 ‘기침’으로 알리는 부분이다. 핍박에 핍박이 더 가해져 고통의 극점에 이르더라도 ‘제 가슴 두드리는 넝쿨손’은 결코 주저앉지 않고 허우적이며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자아는 어둠에 갇힌 ‘고양이’와 ‘창백한 꽃들’의 몸부림을 직시하고 이들의 행로를 좇아 계속 시선을 이동시키면서 ‘순례자’라는 구원투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시인이 처한 현실의 갈등구조를 ‘긍정의 낮’과 ‘부정의 밤’이라는 구도로 양분한 것이다. 실현되지 못한 내적 욕구가 상호 충돌할 때 어떻게 그 위기를 모면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정적 자아와 동일한 선상에 놓인 ‘순례자들’의 발걸음 즉 ‘뼈’로 지칭되는 앞서간 이들의 고통스런 삶의 흔적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 부정적 현실을 적극적 의지로 잘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각인시킨다.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갖는 ‘저녁’과 ‘어둠’은 다음의 몇 편의 시에서도 부정과 긍정으로 교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윽고 달이 뜨면 창백한 ‘달빛’에 모든 것을 내맡긴다. 달빛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간다.

 

염전에 소금이 쏟아져 내렸다

오랜 동안의 그리움이 알알이 맺혀

허공에 가늘게 떨며 빛나다가

어둠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시간이면

어제의 기억들이 하얗게 쏟아졌다

 

허기진 노래처럼

울림 깊은 소리로 온몸으로 피었다

비우고 다시 비운 뒤에 찾아온

현기증 나는 달빛

타는 속내 파동으로 읽어내는 몸짓

―「어두워지면」부분

 

사막의 연애는 기괴하다

여기는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르고

반짝거리는 모래벌판

약간의 풀도 바람에 말라

허기진 바람이 빛나는 입술을 들이대는 곳

 

죽음의 발걸음은 달빛처럼 차갑게 오는데

모래를 건너는 짐승이

허기진 바람의 입술에 쓰러진다

―「사막의 연애」부분

 

앞의 「순례자」에서는 ‘어둠’을 부정의 시간으로 받아들였다면 위의 시 「어두워지면」에서는 긍정의 시간으로 인지하고 있다. ‘어둠’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이라는 긍정적 결정체가 서정적 자아의 부정의 시간을 ‘어제의 기억들이 하얗게 쏟아’지는 긍정의 시간으로 치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비우고 다시 비운 뒤에 찾아온/현기증 나는 달빛”을 보면 앞에서 부정되었던 ‘달빛’조차 긍정의 몸짓으로 끌어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된 작업의 반복적 행위 뒤엔 완성된 결과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가. 앞의 시와 유사한 시로 「연인」을 보자. 여기서는 ‘어둠’을 좀 더 다른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경계를 통해 어둠과 빛을 새롭게 인식한다. 흙 속에 묻힌 연인은 어둠을 통해 빛이라는 환골탈태의 모습으로 치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너는 살아 있어/흙 속에 묻히는 건 네 그림자야/(중략) 끝내 부서져 내리는 건/어둠의 일부이기 때문이야/(중략) 보드라운 피부/단단한 근육은 빛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야/(중략) 네가 떠난 흙은 부드럽고 나른해져/따스한 어둠이 되는 거지”) 낮과 밤의 대척은 곧 빛과 어둠의 대척이다. 어둠을 통하지 않으면 빛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그래야만 어둠이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기능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유난히 빛과 어둠을 즐겨 차용한다. 시 「사막의 연애」에서는 ‘달빛’이 다시금 부정의 시간에 놓인다. (“죽음의 발걸음은 달빛처럼 차갑게 오는데/모래를 건너는 짐승이/허기진 바람의 입술에 쓰러진다/(중략)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가/지친 생명이 비틀거리는 지점에서/천천히 체액을 마시고 숨결을 삼켜/자신의 육신을 살찌우는 것이다”) 부정의 ‘달빛’ 은 인내의 시간을 지나서 완성된 결과물로 획득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 숙성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데 있다. 바람과 햇볕에 부서지고 걸러지는 시간이다. 이들의 풍화를 겪어야만 비로소 하얀 결정체를 얻을 수 있다. 이미 시인은 각기 주어진 상황에 따라 고통을 인지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정을 긍정으로, 긍정을 부정으로 다시 환원시키는 것이리라.

이제 어둠을 벗어나 봄을 피우려한다. 회복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어둠은 빛의 생성에 필연적이며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의 공간인 동시에 과정이란 것을.

 

세상의 텅 빈 모퉁이에서

꽃을 피워 올리는 손들이 있다

삶은 늘 소용돌이라서

자주 허리가 휘고 손마디가 꺾이곤 하지만

곡괭이로 쇠스랑으로 긁어댄 자리마다

뽀지직뽀지직 땅이 열리고

독백처럼 낮은 소리로 흔들리며

아픈 열탕 같은 세상 속으로 오는 발길이 있다

 

어둑한 걸음으로

어두운 기슭으로 오는 것들의

궁금한 발길들

구부러진 길에는 푸른 꽃들이 피고

파닥거리는 작은 잎들이 환한 잠을 깨우고 있다

 

네가 보낼 어두운 밤들은 잊는 게 좋겠다

상처를 붙들고 우는 시간을 지우는 게 좋겠다

먹먹해진 귀에 침침하게 내리는 비

침침하던 시간이 천천히 열리는

여기

흙을 미행하는 발들이

네게로 여행을 온 것이다

―「저 들판에 봄이」전문

 

이 시편에서는 유난히 꽃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꽃이 함의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 즉 빛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세상의 텅 빈 모퉁이에서/꽃을 피워 올리는 손들이 있다”고 도입부를 힘차게 열어젖힌다. 삶의 핍진함에 지칠 때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어둠의 또 다른 이름인 ‘어둑한 걸음’ ‘어두운 기슭’을 넘을 때 ‘푸른 꽃들’과 ‘작은 잎들의 잠’을 깨운다. 그것은 시 「봄날」에서도 확인된다. “아픔 사이로 빛이 걸어온다/환하고 눈부신 상처 사이로 온다/(중략) 외로움과 배고픔과 맞서 싸우는/막막하고 아픈 하루를 버티는/희망을 지키고 싶어서/눈을 감고 거친 날들을 견뎌온/아름다운 사람아”하고 힘차게 봄을 외치고 있다. 발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거친 것들과도 당당히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아름다운 사람’이란 억압적 현실에서도 꿋꿋하게 거친 들판을 잘 건너온 ‘자아’를 말한다. 혹한을 잘 견딘 인고의 세월은 시인에게 눈부신 환희를 선물한다. 다음의 시 「꽃밭에서」도 그러하다. “꽃들이 숨 쉴 때마다/꽃들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소리//봄날의 꽃잎은 미소처럼 부풀어/잊었던 무심한 몸짓이/몽롱한 소리들이 화창하게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둠을 매개로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어둠을 딛고 일어서야만 낯선 타자로서의 ‘나’가 아니라 상처 이전의 아름다운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사물들의 보이지 않는 근거이므로 구체적 사물을 통할 때만 계시된다고 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구체적 시어들을 통해 부정적 현실의 저항을 넘어 회복을 이르게 됨을 시인은 잘 보여주고 있다.

 

 

2. 존재의 확인과 욕망의 변이

 

시인은 미국에 체류할 때 개인적 삶의 역사를 되짚어보게 된다. 또한 뿌리의식에 강한 저항을 경험한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아올린 삶의 값진 결과가 어느 순간 뒤흔들리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지금 눈앞에 전개된 현실은 매우 낯설다. 익숙했던 과거의 경험적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낯선 공간의 이물감이다. 사정없이 발밑을 흔들어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할 수 없이 타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현재의 자신을 확인한다.

 

여기는 꿈을 가공하는 즐거운 공장이죠

장미꽃 입술들이 수천 개 떠다니기도 하는

뜨거운 꿈 제작소이죠

단단한 절망도 뭉게뭉게 희망으로 발효시키는

아름다운 곳이죠

 

천 개의 달이 바다에 빠지면

천 마리의 갈매기가 날아오르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란 없죠

명랑한 돌고래가 춤을 추는 곳이죠

아픈 기억이 안개처럼 옅어지죠

여기는 기억을 지우는 묘약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곳이죠

야자나무 춤추는 손들이

지친 눈을 시원하게 닦아주죠

 

무거운 이야기를 순하고 가볍게

변질시켜주죠

 

힘들고 괴로운 당신,

구름공장으로 놀러오세요

막다른 골목에서 갑자기 길 막힐 때 숨 막힐 때

하늘 한 번 쳐다보고

구름공장에 놀러오세요

당신이 건너갈 사다리 금방 제조해줄게요

 

사막 한가운데 지쳐있나요

구름공장에는 낙타 몇 마리쯤

금방 만들어주죠

 

자, 힘내봐요

구름공장을 찾아오세요

명랑하고 기쁜 선물

만들어 줄게요

―「키라고/마이애미 구름공장」전문

 

일상의 어느 날, 시인은 존재의 발밑이 궁금하고 불안하다. 보편적으로 구름은 불안한 현실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한다. 「키라고/마이애미 구름공장」은 제목부터 싱그럽고 재미있다. 낯선 공간 낯선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대화체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도 그렇다. ‘구름’이라는 정서적 감응에 민감한 소재를 차용하여 ‘꿈’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하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한 것은 아마 시인이 ‘마이애미’라는 특수한 이질적 공간 경험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광대하고 특이한 자연풍광, 특히 탁 트인 거대한 공간을 채운 다양한 형상의 구름덩이들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고도 남을 것이다.

도입 부분의 “여기는 꿈을 가공하는 즐거운 공장이죠/장미꽃 입술들이 수천 개 떠다니기도 하는/뜨거운 꿈 제작소이죠/단단한 절망도 뭉게뭉게 희망으로 발효시키는/아름다운 곳이죠” 그 어조를 보면 경쾌하고 부드럽다 못해 달콤하기까지 하다. 분명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줄 수 있다는 강한 신뢰가 경도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현실에서의 꿈이란 갖은 애를 다 써도 대개 한바탕 헛된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은 낯선 땅에서 거대한 꿈 제작소를 연다. 바로 이 순간, 그 어떤 절망도, 좌절도 희망으로 발효시킬 수 있는 절대적 공간으로 기능하게 된다. 장미꽃의 입술은 정말 매혹적이지 않은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제작하고 필요하다면 기억도 지울 수 있는 곳. 그 무한한 긍정의 공간을 그냥 두고 볼 리 없는 시인은 자신이 가진 모두를 기꺼이 내어놓고 자기위무의 선을 넘어 공동체적 의식의 한 가운데로 진입한다. “힘들고 괴로운 당신,/구름공장으로 놀러오세요/막다른 골목에서 갑자기 길 막힐 때 숨 막힐 때” 기꺼이 힘겨운 현실을 건널 수 있게 사다리를 놓겠다고 도우미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자유를 구가하는 「백 년 동안의 구름」에서는 불안한 시인의 자화상을 연출하고 있다. 첫 행부터 “칼을 숙성시키면 애인처럼 말랑해질까/오랫동안 꿈꾸면 거친 삶이 달콤하게 친해질까/거짓말 잔치를 계속 연다면”하고 구름에 투사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내면의 우울한 양상을 기꺼이 보여주고 있다. 전방위로 자아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일상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구체화된다. 향수병에 걸린 시인은 고등어를 통해 자칫 놓치고 있던 일상을 재구성한다. 낯익은 일상의 재발견이다.

 

고등어 있나요

스웨덴에서 온 게 있어요

꽁꽁 언 몸을 녹인다

배를 가르니 동해바다 냄새가 난다

멸치 냄새 미역 냄새가 난다

파도소리 갈매기 울음소리가

사방에 번진다

만 리 타국 인디언의 나라

노란 옥수수 알들이

햇살에 알알이 붉은 노래 부르는 나라

고등어를 굽는다

비린내가 파도를 타고 사방에서 철썩댄다

코리언 바다가 물결쳐 와서

인디언 붉은 땅에 입술을 댄다

―「 고등어, 향수」전문

 

지금 한국의 대형마켓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노르웨이산 고등어처럼 낯선 이국땅에서 스웨덴 산 고등어를 발견하곤 시인은 향수에 젖는다. 비록 출생은 다르지만 한국의 고등어나 북유럽 고등어가 생김새나 그 맛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배를 가르니 동해바다 냄새”가 나고 “멸치 냄새 미역 냄새”마저 풍긴다. 뿐만 아니라 동해바다의 파도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까지 함께 실려와 집안을 지난 시절로 되돌려 놓고 있다. “고등어를 굽는다/비린내가 파도를 타고 사방에서 철썩댄다/코리언 바다가 물결쳐 와서/인디언 붉은 땅에 입술을” 대는 것을 한껏 즐기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외로운 걸 참지 못하지요/공기도 허전하면 하늘에 오르기도 하고/땅으로 내려오기도 하잖아요”하며 직설적 표현을 감추지 못하고 “애인과 동거하기 시작하면/본색이 드러나죠/나를 조종하고 욕망의 링에 초대”(「애인을 찾아서」)하고 만다.

욕망의 대상은 욕구의 대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본질적으로 주체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것의 자리를 무엇인가가 차지하게 되면 그것은 욕망 속의 대상이 된다는 자크 라캉의 말처럼 주체의 빈자리, 즉 소외의 현실에서 자아는 숨겨진 욕망을 단순히 욕망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있다. “나는 발이 없소 입이 없소/데굴데굴 굴러 소리를 대신하죠/애인은 귀가 없소 입만 있소//나비처럼 날아가는 날개가 있소”하고 자신의 삶에서 박탈된 주체적 자아의 뼈아픈 현실을 자각한다. 어떻게 해야 이 외로움을 견딜까.

하지만 시인은 드디어 나에게로 다다르는 방법을 찾는다.

 

한 남자가 꿈을 밟는다

꼬리 잘린 꿈이 유리문 나서면

얼른 꼬리를 재생한다

출구는 투명하지만 삭막하다

지나가는 통로는 좁고 날카로워

꿈을 자주 벤다

봄바람이 생채기에 나른한 입김 불고

긁힌 자리에 꽃이 피고

소리가 흐른다

(중략)

꿈이 방황하다 길 잃고

꼬리는 자꾸 잘린다

―「도마뱀의 하루」부분

 

당신은 나의 뿌리

내 초록의 줄기와 잎이 무성하게 뻗어 나온

당신은 사시사철 축축한 흙에 발을 내리고 있다

 

나는 야멸차게 당신으로부터 물을 뽑아올리고

당신의 목숨 일부까지 끈질기게 뽑아올리고

그래도 모자라서 야금야금 당신을

몰락시키고

당신은 낡아가고 비어간다

(중략)

 

그러면서 저를 푸는

그 힘, 단단한 뿌리의 힘

북받치게 슬프거나 슬프지 않은,

무성한 뿌리의 카랑카랑한 소리

―「나의 뿌리는 아직도 카랑하다」부분

 

자신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외부적 압력에 굴복하기보다 미련을 끊고 잘라냄으로써 주체적 자아를 회복하는 극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재생과 반복의 패턴을 통해 긍정의 미학에 다다르고 있다. 억압된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인은 자신을 지탱하게 한 ‘꿈’을 끝내 놓을 수가 없다. 크고 힘센 타자가 내 꿈을 밟을 때 일부가 잘려나간다. 하지만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고 ‘얼른 꼬리를 재생’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 선택을 한다. “출구는 투명하지만 삭막”하고 “지나가는 통로는 좁고 날카로워/꿈을 자주”베지만 “봄바람이 생채기에 나른한 입김 불고/긁힌 자리에 꽃이 피고/소리가 흐”르게 되는 미학적 구조를 통해 시인의 현실은 그다지 삭막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외로워도 강압적 타자에 의해 내 자리를 내어줄 때도 재생 반복을 통해 내 삶의 자리를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끊임없이 주체적 자아를 향해 전진하여 빼앗겼는가 하면 어느 새 내 자리를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 「나의 뿌리는 아직도 카랑하다」에서는 ‘뿌리’의식을 당차게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나의 뿌리/내 초록의 줄기와 잎이 무성하게 뻗어 나온/당신은 사시사철 축축한 흙에 발을 내리고 있다”라고 확언하고 있다. 이보다 더 분명한 긍정의 뿌리의식이 어디 있는가. ‘당신’이라는 이인칭의 자아는 강한 생명성을 존재에 붙박음으로써 더 이상 흩어지지 않는, 그 어떤 외부적 압력이나 위협에도 자신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라는 한정된 부사어를 동원했다는 것이 조금 걸린다. 어쩌면 미래의 위협에 방어적 기제로서 작동한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미래보다 현재에 더 의미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개인에 있어서 뿌리의식은 개인의 역사와 직결된다. 내 삶이 그곳에서 비롯되었으니 그곳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그곳으로부터 삶의 의미가 규정되어야 한다. 권순자 시인의 삶의 궤적이 미국에서의 경험적 인식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되고 반복 재생의 구도 속에 굳건하게 자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3. 일상의 따뜻한 시간과 거리두기의 미학

 

권순자 시인의 시편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서정적 소재들은 온기어린 시어들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상상의 세계에 선명하게 진입한다. 가령 나비, 꽃, 나무, 길, 구름, 햇살, 달빛, 새, 모래, 돌멩이, 산, 바다, 파도, 풀잎, 뿌리 등은 그리움, 괴로움, 바람, 허공, 꿈, 영혼, 어둠, 기억, 냄새, 슬픔, 기쁨, 숨결, 노래, 시간, 소리, 웃음소리 등을 만나면서 구체적 형태를 띠고 과거 또는 현재의 일상을 불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상에서 포착된 자연물을 통해 모험을 시도하거나 삶의 긍정을 노래한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물들과 일정한 거리두기로 접근을 시도한다. 때로는 균형 잡힌 긴장감이, 때로는 단호하고 한편으로 너그럽다. 이러한 시도들은 그 이전의 삶과 구별되며 확연하게 다른 서정의 알레고리에 놓인다.

시인은 미국 생활에서 과거의 삶과 화해하고 자신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과거와 현재의 틈에 이국이라는 풍경의 틀이 끼어든 때문인데 시인의 시의 특질이 여기서 생성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피워내는 적막!

적막을 껴안고 그늘에서 앓는 당신,

 

따스한 입김은 허공에서 흩어지고

어둠에 스며드는 당신,

 

나는 단내 풍기며 천천히 말라갔지요

(중략)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고 곰팡이 피는 생각들을

뜯어내는 동안

사랑은 냄새를 숨기고 꽃을 피우지요

치밀한 시간은 방해받지 않고 자유방임주의에 젖어 있어요

 

비밀의 방에는 자물쇠가 무겁게 지키고 있어

믿지 못하는 당신의 가슴에 쇠창살로 방범창을 달아요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적막한 사랑」부분

 

한때 소복하게 쌓였던 네 그림자

그늘은 깊어지고 진해서

바람의 냄새는 가슴 속을 헤집고 날아다닌다

까칠하게 꼬들하게 말라가는 기억

기억을 먹는다 씹는다 기억의 결이 질기다

달콤하고 시다

―「기억의 맛」부분

 

“사랑”을 찾아내는 종요한 모티프는 기억이다. 기억의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시인의 적막한 세계는 세차게 부는 바람으로 어지럽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망망대해의 조난자처럼 시인은 “그늘에서 까칠하게 꼬들꼬들 말라”(「기억의 맛」)가고 있다. 덩달아 말라가는 기억의 결에서 사라져 가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사랑=적막”은 미각적, 후각적 기억에 의해 되살려지고 한 발 두 발 진입하고자 하나 “비밀의 방에는 자물쇠가 무겁게 지키고 있어”(「적막한 사랑」) 어쩔 도리가 없다. “한때 소복하게 쌓였던 네 그림자/그늘은 깊어지고 진해서/바람의 냄새는 가슴 속을 헤집고 날아다닌다/까칠하게 꼬들하게 말라가는 기억/기억을 먹는다 씹는다 기억의 결이 질기다/달콤하고 시다” (「기억의 맛」)라고 푸념한다. 시인이 기억이라는 추상적 시어를 동원해 궁극적으로 가 닿고자 한 그 곳은 정말 어딜까. 잃어버린 사랑일까? 상상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동안 기억 저 쪽에 있는 과거의 자아를 만나기 위함은 아닐까? 자물쇠로 채워진 비밀의 방은 건드리면 먼지가 풀풀 날 것만 같다. ‘당신’이라 불리는 또 다른 자아를 더듬더듬 불러내는 이 행위는 매우 조심스럽다. 물론 단절의 키워드인 ‘자물쇠’ 탓이다. 여기서는 반드시 ‘기억’을 통과해야만, 불러낼 수 있다. 시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이유는 그것은 놓쳐버린 과거의 ‘나’, 잃어버린 과거의 나를 대면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긴장의 연속선상에서 나를 만나기 위한 처절한 이 몸부림은 다양한 서정적 시어들을 통해 발현된다.

 

뉴멕시코에서 온 여자. 코리안. 장아찌를 담그고 김밥을 잘 싸는 여자. 초원에서 함께 웃으며 경주 이야기꽃을 피운 여자.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잇고. 이제 다시 뉴멕시코로 돌아간다. 아메리칸 동네로 다시 간단다. 부디 안녕하시게. 그리움일랑 하늘로 날려보내시게. 어디서 살든, 삶은 초원의 빛으로!

―「초원의 노래7」전문

 

연작시리즈인 ‘초원의 노래’는 총 10편이다. 시인은 거대한 들판을 가진 미국 땅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다. 온갖 풀들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사막을 품고 있는 이 광활한 땅은 우리를 단번에 압도한다. 대자연에 경도된 시인의 모습이 충분히 연상되는‘ 초원의 노래’ 연작은 전체 시들이 모두 산문시 형태로 창작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법 하다. 끝도 없이 열려있어 매우 시적이면서 산문적인 자연풍광 탓일 것이다. 이런 풍경 속에서 한갓 미물임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이 한 편의 짧은 시는 시인의 일상과 서정의 온기를 잘 읽을 수 있다. 할 말은 많지만 말을 다 하지 않음으로써 할 말을 다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 자아의 정체성, 현실의 거대한 장벽을 명민하게 인지하고 있는 시인은 현실의 삶을 위해 이렇듯 한 발 떨어져 감정을 추스르며 ‘나’와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래의 시에서 시인이 사뭇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리타국에도 봄이 오네

벚나무 가지마다

봄소식이 하늘로부터 배달되었네

잡지 한 권은 택배비가 만 원이라는데

저 수많은 꽃송이들은

얼마의 값으로 배달되었을까

(중략)

 

서울 안마당 홍매화는

올해는 더욱 붉게 피어나겠지

텅 빈 마당으로 밤마다

달빛은 더욱 길게 드리우겠지

(중략)

 

바람아,

내 진한 그리움도 배달해다오

그리운 이 안녕하신지 알아봐다오

―「벚꽃 배달」부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면

하늘까지 소식이 닿을까

오라버니 사는 하늘이 하늘하늘 내려올 듯 한 봄날

 

벚꽃 만발한 길을 열고 오라버니 하늘하늘 하늘나라로

길 떠났지 꽃잎들도 봄바람에

하늘하늘 하늘나라로 날던 날이었지

(중략)

나는 꽃잎을 많이도 날려보냈지

(중략)

 

하늘 길 분분히 날고 있는 꽃잎들

하나님이 우체국으로 꽃편지 배달시킨 게 아닐까

―「벚꽃」전문

 

낯선 땅의 봄날은 그리움의 병을 앓기에 딱 좋다. 가지마다 활짝 벌어진 벚꽃들을 보면 고국의 벚꽃들도 덩달아 피어난다. 어찌 참을 수 있으리. 시인은 “잡지 한 권은 택배비가 만원이라는데/저 수많은 꽃송이들은/얼마의 값으로 배달되었을까”하며 능청스레 운을 뗀다. 수많은 꽃송이들이 현기증이 날 만큼 봄날을 채우지만 변덕스런 봄바람은 향수병에 도진 나를 수시로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절기에 맞춰 피는 봄꽃들은 꽃샘추위라는 것을 견뎌야하는 법. 봄꽃 속에 흘러가버린 서울에서의 기억은 시인에게 그리움 그 자체로 텅 비어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내맡겨진 공허한 일상을 확인이라도 하듯 “서울 안마당 홍매화는/올해는 더욱 붉게 피어나겠지/텅 빈 마당으로 밤마다/ 달빛은 더욱 길게 드리우겠지”하며 기억 속의 시간에 편승한다. 그래야만 부재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살면서 잃어버린 것을 어떻게 셀 수 있으랴. 하지만 혈육일 때 쉽게 잃어버렸다고 말 못한다. 극적상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놓쳐버린 것이 아니다. 떠나보낸 것이다. 우체국 앞에서 시인은 시간의 저쪽에 있는 오빠를 불러 일방적으로 말을 건다. 벚꽃 만발한 봄에 떠나보낸 오빠를 벚꽃 만발한 봄에 되살리고 싶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오빠를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벚꽃’이다. 그래서 벚꽃 피는 봄날이면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진다. 하필 봄날에 우체국을 찾는 시인은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면/하늘까지 소식이 닿을까/오라버니 사는 하늘이 하늘하늘 내려올 듯한 봄날//벚꽃 만발한 길을 열고 오라버니 하늘하늘 하늘나라로/길 떠났지 꽃잎들도 봄바람에/ 하늘하늘 하늘나라로 날던 날이었지”하며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오빠를 한 없이 그리워하고 있다. 이 시에서 ‘하늘’이라는 명사가 총 7번이나 나오는데 오빠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겠는가. 또한 ‘하늘하늘’이라는 부사어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각별하다. 장소의 의미인 ‘하늘’과 물체가 단단하지 못하여 무르고 흔들리는 모양을 연결시켜놓은 것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시인과 상호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속도의 시대에 온몸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시인은 감정의 표피가 생각보다 얇아서 외부의 충격에 자칫 부서지거나 깨어지기 십상이다. 아무리 잘 방어를 해도 스며드는 물길에 발을 빠뜨리기도 하고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어느 시인인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권순자 시인의 경우, 시편들에서 살펴본 시세계가 무한한 상상력의 집합소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외부적 강압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갈등의 구조 속에서도 길을 찾아내고 화해를 시도하여 잃어버린 자아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시인의 체험적 현실인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때론 존재의 허무에 갇혀 견딜 수 없는 나락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구름=자유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자기회복의 완성을 꿈꾸고 있다.

무엇보다 시인의 감성어린 정조와 시정신의 건강성이 유무형의 시어에 자유롭게 투사되어 개성적인 시세계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부정의 시간을 긍정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 시인의 강한 생명의지는 눈부시고 경이롭다. 그러므로 표제시 ‘순례자’처럼 이 시대의 순례자로 그 누구보다 제 몫을 다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