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피어나는 것들

 

 

지독한 겨울을 견뎌냈다네

바람에 폭행당하고도 눈물 흘리지 않았다네

입술 깨물고

껍질은 더욱 거칠어져갔네

제 안의 살을 보듬으며

지친 몸을 제 껍질 속에 단단히 가두었네

조용한 눈빛으로 차가운 정신으로

깨어 있었네

갈라지고 터진 살 사이에

따가운 바람이 쉼 없이 날아와 박혔네

 

먹먹한 아픈 자리에

괴로움이 몸을 말고 기다리다가

어느 날 문득

하나씩 꺼내어 햇살에 내어놓네

울긋불긋

쟁여놓은 아픈 자리를

꿈길처럼 열어보이네

 

 

         


   순례자

 

 

저녁이 되면 낯선 마을 처마 밑을 맴돌지요

달빛이 휘영청 길을 열어주지만

길도 추워서 바람이 머물지 않지요

한 몸 뉠 곳 없는 고양이

주뼛주뼛 처마 밑을 서성거리지요

 

흙에 묻힌 역사는 다시 살아 되풀이 되는데

창백한 꽃들이 달빛에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데

 

어둠이 왜 자꾸 짙어만 가는지

꽃들의 잔기침 소리, 목울대를 흔드는 소리 어느 새

길고 가늘게 뻗어 밤안개로 피고 있어요

안개끼리 기침하고 있어요

 

뿌연 고통의 뿌리들이 사방에 퍼지고 있어요

 

제 가슴 두드리는 넝쿨손, 허우적허우적

반짝이는 푸른빛들이 날카롭게 허공을 조각내는 한밤

앞서간 순례자들이 뼈를 이어

하늘로 다리 놓고 있어요

 

             



어두워지면

 

 

염전에 소금이 쏟아져 내렸다

오랜 동안의 그리움이 알알이 맺혀

허공에 가늘게 떨며 빛나다가

어둠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시간이면

어제의 기억들이 하얗게 쏟아졌다

 

허기진 노래처럼

울림 깊은 소리로 온몸으로 피었다

비우고 다시 비운 뒤에 찾아온

현기증 나는 달빛

타는 속내 파동으로 읽어내는 몸짓

 

잠결 같은 물소리는 바래고 바래서

하얗다

여위는 파도소리

오랜 호흡도 우려내면

저렇게 투명해지는가

 

핏빛 울음도 붉어지던 눈자위도

기다림의 시간을 달이고 달이면

꽃보다 환한 빛으로 태어나는가

 

           



   사막의 연애

 

 

사막의 연애는 기괴하다

여기는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르고

반짝거리는 모래벌판

약간의 풀도 바람에 말라

허기진 바람이 빛나는 입술을 들이대는 곳

 

죽음의 발걸음은 달빛처럼 차갑게 오는데

모래를 건너는 짐승이

허기진 바람의 입술에 쓰러진다

 

바람은 연애질에 익숙해서

실패하는 법이 없다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가

지친 생명이 비틀거리는 지점에서

천천히 체액을 마시고 숨결을 삼켜

자신의 육신을 살찌우는 것이다

 

꿈틀거리는 것들은 사라지고

뼈들은 모래알처럼 하얗게 부서져내리지만

숱한 혀들은 허공에 걸려 휘파람을 분다

바람의 귀에다 대고

증발하지 못하는 슬프고 그리운 곡조를 분다

 

           



   봄 날

 

 

아픔 사이로 빛이 걸어온다

환하고 눈부신 상처 사이로 온다

 

붉은 딸기 앞세우고

비탈을 지나 벼랑을 타넘고

바람소리 따라 지독히 외로운 섬들을 지나

버리고 버리고 버린 뒤에

아지랑이 깊은 흔들림으로 오는 것

 

생각하고 깨닫는 사이

밤이 지나고

햇빛이 꽃을 물고 나른하게 내려앉은 날

새들도 깃털에 바람을 품고

앙상한 가지에 조용하다

 

외로움과 배고픔과 맞서 싸우는

막막하고 아픈 하루를 버티는

희망을 지키고 싶어서

눈을 감고 거친 날들을 견뎌온

아름다운 사람아

 

가시처럼 따갑던 바람을 기억하더라도

살 에이는 날 선 추위를 건너온

부러지지 않고

꽃 피우는 모든 가녀린 가지들에게

봉긋한 꿈을 안겨주는

따스한 손길아!

 

           



 저녁 빛

 

 

붉은 손들이 시간을 만지작거리네

바람이 엉겨 쓸쓸한 잎들이 지네

 

저녁이 울음을 물고 견디며,

바람집을 키우네

열정이 사연 몇 통으로 쌓이는 지금

 

몰래 휘는 노을은

투명한 저녁을 저 혼자 흔드네

시간이 찬찬히 어둠을 불러들이고

 

쓸쓸한 열망이 시드는 순간이네

서성거리던 발길이 기억할 수 없는

지난 날 어딘가로 구겨져 내리고

 

그제야 깨어나 외로운 당신의 얼굴을 보네

 

가늘게 떨고 있는 눈꺼풀,

생은 몇 방울의 열정일까

 

젖어드는 바람

젖어드는 삶

빛이 저물어 어둠을 헤치고 가고

시퍼런 어둠이 뜬 눈으로

바람을 핥고 있네

 

        



 폭포

 

 

오직 한 길만 아는 이

그저 하편향할 뿐이다

추락이 아니라 더 낮아지기 위하여

몸부림칠 뿐이다

더 낮고 더 외진 곳을 향하여

때론 깊은 계곡에서 무지개를 피우기 위하여

더 깊고 더 음습한 그늘을 향한다

부서지는 것은 통증만 유발하는 건 아니다

산산이 부서짐으로써

더 새로워지고 더 맑아지고

더 생생해지는 것이다

얼얼한 피부로 얼얼한 정신으로

눈에 힘이 서고 팔뚝에 근육이

팽팽히 차오르는 것이다

 

 

       




적막한 사랑

 

 

사랑을 피워내는 적막!

적막을 껴안고 그늘에서 앓는 당신,

 

따스한 입김은 허공에서 흩어지고

어둠에 스며드는 당신,

 

나는 단내 풍기며 천천히 말라갔지요

 

그늘에 쭈그려 앉은 나는 헐벗은 꽃나무,

꽃잎들이 바람에 흩어진 뒤로 바싹 마른 허리에

치명적인 슬픔이 엉겨 냄새가 지독했지요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고 곰팡이 피는 생각들을

뜯어내는 동안

사랑은 냄새를 숨기고 꽃을 피우지요

치밀한 시간은 방해받지 않고 자유방임주의에 젖어 있어요

 

비밀의 방에는 자물쇠가 무겁게 지키고 있어

믿지 못하는 당신의 가슴에 쇠창살로 방범창을 달아요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중얼거리는 꽃들이 사방에 날아다녀요

미친 듯이!

깨어나는 순간

핏빛 눈물 흘리는 외로운 남자가

나뭇잎처럼 심하게 떨고 있어요

 

바람이 세차게 부는가요

외치는 소리들이 발자국을 질질 끌며

허공을 걸어가요

당신이 절벽에 머물고 있기에

당신을 사랑한 거예요

 

표류하는 당신

파도가 너무 높은가요

허공을 걸어온 발자국을 지우고 있나요

지우면 이어지는 축축한 길

가슴바닥에 금이 갈 무렵이면

또 한바탕 눈물비가 쏟아지겠지요

 

심장에 새긴 뜨거운 저녁이 다시

붉은 숨결 터뜨릴 걸요

 

 

            


 꿀잠

 

 

구겨진 허물이 누웠네

빈 술잔이 쓰러져

바람과 낯선 길에서 배회하네

아픔은 선명한 흉터자국을 돌에 새겨놓았네

 

한때 추억에 젖은 발들이 다녀가기도 했네

 

몇 겹의 시간을 눈감고

세상의 구멍을 지나

드디어 삶의 곰팡이들을 떨치고

 

한 떨기 목숨이

한 알의 모래알로 누웠네

바람마저 끈적한 입술로

입맞춤하고 가는 저녁

 




초원의 노래 6

 

 

 

 

자작나무 초원에 섰다. 하얀 몸뚱이들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허공으로 손을 뻗은 자작나무들. 누구에게 제 마음 닿고 싶을까. 하얗고 섬세한 손들은 누구를 향해서 저리도 가냘프게 흔들고 있을까. 텅 빈 초원의 언덕에서 외로운 자작나무, 고적하게 당신을 부르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