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첫 시집을 내고 7년이 지났다. 그리고 7년 동안 5년을 외국에서 지내왔다. 회사일로 해외 출장 또는 파견 근무로 타국에 있으면서 일을 했고 시를 읽었고 썼다. 두 번째 시집에선 계속되는 해외 생활로 인해 정적인 것보다는 동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그 감상을 적었다.

 

 특히 한국과 전혀 다른 자연 환경과 정서를 가진 필리핀에서는 다시금 자연의 소중함과 우주의 생성 등 근원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리핀에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한국에서의 생각들을 비교도 해보고 한국의 장점들을 필리핀인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근대 이후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거쳐 온 동질감을 갖고 ‘아시아적 가치’를 찾으려 노력했으며 그것을 작품화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발달된 경제와 정치, 문화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나라의 수준, 특히 낙후된 정치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선 자본주의 체제에서 ‘천민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모든 국민이 경제적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선 한국인의   우수한 창의성을 다시금 확인했으며, 문화산업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으나 작품화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지난 7년 동안 나는 한번 이직을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고, 내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으며 아내는 30대 시절보다 어깨가 처진다고 푸념하곤 하는 것이 현재 나의 가계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던 지난 7년이기에 한없이 미안하고 이번 시집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으면 한다. 또한 해외 생활을 핑계로 모임에 참석치 못하는 나를 항상 이해해주는 주위의 문인들에게도 이번 시집으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4년 우기가 지속되는 필리핀 수빅시에서 



   

*.약력 : 충남 서천 출생, 200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내 몸

        속의 지구』『세온도를 그리다』가 있으며, 시집 『세온도를

        그리다』가 2015년 세종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 E-MAIL : sshish@hanmail.net



열대의 ‘바람’과 동행한 시

 

고 명 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국문과 교수)

 

 

정선호 시인의 이번 시집은 ‘바람’과 동행한다.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절로 흘러가는 ‘바람’의 생래는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모질게 때로는 포근하게 때로는 강퍅하게 모든 존재들과 동행한다. 정선호는 ‘바람’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며 ‘바람’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말하자면, 정선호에게 ‘바람’은 세계이며, 세계는 ‘바람’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바람’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하여 불어대는 그것이 아니라 지구의 “남반구 바다에서 불어와/더 많은 땀을 내는 이국의 바닷길에서”(「밀림 속을 달리다」) 감각하는 그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남태평양의 ‘바람’과 시인은 동행한다.

 

그야말로 태풍 전야다

남태평양 바다는 여름이면 많은 태풍을 만들어

중국과 일본으로, 한국에도 보내곤 하는데

태풍이 오기 전날은 활시위를 당긴 궁사처럼

모든 것이 팽팽한 긴장을 하고 무언가를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태풍 오기 전날엔 내 마음도 서서히

그동안 모아두었던 긴장감을 한 곳으로 모아

강한 바람과 비를 만들고 회오리를 만든 후

고국의 어머니와 가족, 채소와 가축에게 보냈다

 

내 마음의 태풍은 고국을 돌아 소멸되지 않고

우주를 향하게 되었는데 먼저 달에 도착했다

달에 도착한 태풍은 계수나무가 있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달에 처음으로 비를 내리게 하자

토끼들은 신이 나 온 대지를 뛰어다녔다

대지엔 식물과 곡식이 자라나 굶주리며 살았던

토끼들에게 양식이 되었다

 

태풍은 소멸되지 않고 살아 화성에도 도착했으며

화성을 지나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갔다

내 마음의 태풍은 영원히 우주 속에서 살아

평화와 안녕의 메신저가 되어 모든 별을 향했다

― 「내 마음의 태풍」 전문

 

  남태평양 바다에서 생성되는 태풍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말 그대로 태풍 전야는 “모든 것이 팽팽한 긴장을 하고” 큰 피해 없이 지나쳐가길 바랄 뿐이다. 자칫 세계를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태풍을 반기는 이는 없다. 그런데 시인은 태풍에 대한 이 같은 통념을 전복시킨다. 태풍 전야에 시인은 고국의 그리운 것들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욕망을 “한 곳으로 모아/강한 바람과 비를 만들고 회오리를 만든”다. 그렇게 아주 빠른 속도로 남반구를 통과하여 북반구에 있는 시인의 그리운 대상들을 휩싸는 태풍을 욕망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시인의 이러한 욕망이 지구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를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소멸되지 않은 “내 마음의 태풍은” 태양계뿐만 아니라 태양계 밖의 “영원히 우주 속에서 살아/평화와 안녕의 메신저가 되어 모든 별을 향”하고 있다. 이렇듯이 시인의 ‘바람’은 남태평양에서 생성하여 북반구를 지나 소멸되지 않은 채 태양계 곳곳을 흐르고 심지어 태양계 바깥 우주의 영원 속으로 ‘평화’의 전령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은 시인에게 존재의 시작이며 존재의 궁극 그 자체일지 모른다. 이번 시집에서 ‘바람’에 관한 주요 심상은 매우 중요하다.

 

야자나무를 닮아 거친 피부의 적도 사람들은

밋밋한 야자나무의 몸뚱이를 타고 올라가

, 열매를 따 야자나무로 엮은 집으로 갔다

붉은 사랑의 흔적 찾아 음식을 만들고

해와 달의 슬픔과 바람의 흔적을 마셨다

— 「야자나무라는 짐승」 부분

 

경기장은 제 몸을 갉아 바람에게 주었다

바람도 그걸 받아 후손에게 넘겼으며

후손들은 그걸 먹고 세차게 불어댔다

경기장 안에선 바람들도

검투사와 맹수를 대신해 싸웠다

— 「콜로세움에 지구를 집어넣다」 부분

 

추사(秋史)가 유배지 탐라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을 무렵, 난 필리핀 루손섬에서 세온도(歲溫圖)를 그렸다 세한도의 소나무 대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나무와 파파야나무 그려 넣고 초가 대신 바파이쿠보를 그려 넣었다 그가 세찬 바람과 눈 내리는 탐라에서 독한 술 마실 때, 난 바닷가 카페에서 차가운 맥주 마셨다 추사가 그림의 소나무처럼 변치 않는 기개를 바랬으나, 난 열매 맺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에게 주는 나무들의 풍요로움을 간절히 원했다

 — 「세온도(歲溫圖)를 그리다」 부분

 

  정선호 시인은 적도 사람들의 음식과 집의 주재료가 되는 야자나무로부터 “해와 달의 슬픔과 바람의 흔적”을 만난다. 야자나무의 생장과 적도 사람들의 생활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분리될 수 없는 양자의 관계를 매개해주는 것이 바로 ‘바람’이다. 따라서 이 ‘바람’은 인간의 삶의 차원과 구분되는 기후 환경의 차원에서 유의미성을 갖는 게 아니라 적도 사람들의 문화생태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바람’은 로마의 검투사들과 함께  로마의 흥륭성쇄와 관련한 역사를,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환기한다. 비록 텅 빈 콜로세움이지만 그때, 이곳을 가득 채웠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욕망들 사이에서 솟구친 로마의 숱한 정치경제학적 욕망들이 지닌 역사의 흔적을 시인은 텅 빈 콜로세움의 적막을 휘감아 흐르는 ‘바람’을 통해 인식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필리핀 루손섬에서 열대의 과실수와 열대의 전통가옥을 그리며 “가난한 나라의 사람에게 주는 나무들의 풍요로움을 간절히” 원한다. 시인은 추사의 저 유명한 세한도를 패러디한 세온도를 그리는데, 세한도에서 불어대는 맵짜한 한풍(寒風)이 남반구 열대의 필리핀 섬에서 열풍(熱風)으로 전도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세한도의 한풍(寒風)과 그것에 조응하는 소나무가 유가(儒家)의 지식인의 윤리적 염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시인이 그린 세온도의 열풍(熱風)과 과실수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염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세온도를 그리며 열풍 속에서 과실수들이 풍성히 생장함으로써 적도 사람들의 행복과 풍요를 염원한다.  

  이렇듯이 우리는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그동안 한국시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열대 지역에 기반한 심상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지구화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관념적 상상력이 아니라 시인의 낯선 곳의 생활경험 속에서 피어올린 심상은 한국시의 경계를 심화 확장시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시 장르의 속성상 시적 화자의 고백이 주류인데, 국경 너머 낯선 문화생태를 관광의 차원이 아니라 일상의 차원에서 부딪치는 가운데 래디컬한 시적 성찰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가볍게 간과할 사항이 결코 아니다.

 

멀리 적도의 나라에서 해변을 걸었다

더운 바람 북반구에서 불어오고

연인들은 더위에도 서로 살 부비고 있다

내 몸에선 겨울의 모든 것 빠져나갔다

처절하게 가슴 아팠던 생각들과

아픔으로 인해 깊어지던 사랑과

추운 바람에 여미던 그리움,

파도에 실어 보낸 삶과 죽음의 그것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해수욕을 했다

아프지도 처절하지도 않은 이곳에

난 그것들 잠시 여행을 보냈다

―「겨울, 수빅만에서」 부분

 

언제나 버스는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았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의 종착지는 스페인이거나

필리핀의 한 마을이나 한국의 내 고향이거나

저승의 문턱일 거다, 그곳까지 멀리

에둘러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야 했다

지금은 호흡을 가다듬고 꿈 속 헤매듯

망고나무의 잎 떨어져 싹 오를 때까지

내 몸의 푸른 피 마를 때까지

버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 「망고나무 아래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부분

 

  시적 화자는 적도의 나라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그곳에서 시적 화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꿈 속 헤매듯”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서 그가 마주하는 일상의 풍경은 겨울이 부재하는 적도 고유의 풍경이 그렇듯, “아프지도 처절하지도 않”다. 하지만 시적 화자의 성찰적 아픔은 동면(冬眠)을 취하며 다가올 신생의 기운을 애타게 기다려야 하는, 매서운 겨울을 견디는 과정에서 수반하는 처절한 아픔과 또 다른 존재론적 아픔을 겪는다. 비록 적도의 지역이 겨울은 부재하지만 새로운 열매를 풍요롭게 맺기 위해서는 새싹이 움터야 하며, 그 과정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즉 “내 몸의 푸른 피 마를 때까지”의 시간을 견디는 고행이다. 사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성찰이 갑작스레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적 화자는 일찌감치 ‘나’의 성찰을 적극 실천해왔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을 “지명수배 해”오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일들과/누군가 정해 놓았을 내 운명을 수배”하고, “또한 내가 복제되어 어딘가에 살고 있을/수많은 나를 지명수배 했다”.(「지명수배자」)

  그렇다. ‘지명수배’라는 시적 행위를 통해 시인은 그동안 자칫 권태롭고 나태해질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심문하고 있다. 좀 더 부연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넘어 시인 주변의 현실과 삶을 향한 날카로우면서 웅숭깊은 성찰의 시선을 보인다. 가령, 시인은 시적 화자의 중학생 딸의 높은 학구열이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과 계약직을 벗어나기 위한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이 빚어놓은 데 불과하다는 것을 매우 예리하게 비판하고(「창밖에 동백꽃 피다」), 오늘날 복잡한 문제적 현실의 근원적 해결책으로 자본주의 신봉자들을 우주 밖으로 추방시키고 태곳적 인류로 돌아가 지구의 새로운 삶을 도모하는 만화적 상상력의 비판적 풍자를 보인다(「주말농장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동시대의 현실에 대한 시인의 비판은 한때 진보적 가치를 노래했던 시()들의 흔적을 되밟는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노동운동하던 이들이 시의원이 되고

대기업 노조의 간부가 되기도 했지만

근래에 늘어난 비정규직과 계약직의

임금과 복지를 외치는 이들 보기 어렵다

 

하지만 변함없이 노동자의 권익을 주장하며

아직도 민중가요를 부르는 시인들 있다

― 「노동시의 즐거움」 부분

 

  한때,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의 꽃이 만개한 적이 있었다. 노동해방의 기치를 높이 들며, 노동해방이 곧 민중해방이며, 이것은 인간다운 삶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한 역사의 진보를 향한 사회운동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노동운동의 역사는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이 직시하고 있듯, 예전의 노동운동과 관련한 사람들은 사회적 기득권을 확보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새로 불거진 노동문제(비정규직과 계약직)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동운동은 보기 어렵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현실에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래디컬한 성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노동시의 즐거움’이란 제목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노동운동의 현저한 위축 속에서도(“모두 떠났다/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노래는 끝났다/(중략)/절친했던 노동시인 형은 술병으로 죽었다”―「죽음 또는 영상」) 노동의 가치를 향해 그리고 새롭게 불거진 노동의 문제를 응시하는 시들이 지속적으로 쓰여지는 한 ‘노동시의 즐거움’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시를 과거에 대한 퇴행적인 낭만적 감성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망고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나무 그늘이 짙습니다

난 그 그늘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고국의 모든 강산에는 온통 눈으로 덮였고

나무들은 앙상하고 소나무만 푸르게 서 있겠지요

청년 시절, 우리는 겨울만 되면 무언가에 아파했고

눈 덮인 강가를 걸으며 문학을 얘기했지요

 

때론 봄이 아득함에 대한 안타까움이며

분단된 나라와 야근에 시달리는 누이들 떠올리며

찬 소주를 새벽까지 마시고 노래하며

원고지의 빈 칸을 밤새도록 채워 넣곤 했지요

오지 않을지도 모를 사랑 찾아 걸었으며

사랑이 너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지금 고국의 들판엔 바람이 가득이 살겠지요

사람들의 마음에도 바람이 살아 겨울엔

허전한 마음이 더 자리하고 있겠지요

또한 고국은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예전의 누이들은 청소 일과 식당에서 일하다

정규직을 외치며 차가운 거리로 나섰다지요

 

겨울이 없이 여름만 지속되는 적도의 나라에서

따뜻한 일상을 보내는 것도 죄 짓는 것 같아

망고나무의 풍성함이나마 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지금도 겨울이 오면 잊지 않고 강을 찾아

원고지에 뭔가 빼곡하게 채워 넣고 있을 당신을

이국에서 또렷하게 생각하며 지내겠습니다

― 「K시인에게」 전문

 

  적도의 열대에서 시적 화자는 K시인에게 뜨거웠던 청년시절을 회상하면서 동시대의 비열한 현실을 우두망찰 목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향한 자기성찰을 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없는 분단의 상처, 여전히 노동현실의 모순과 억압 속에서 삶을 저당잡힌 노동자들……. 좀 더 복잡해지고 정교해진 노동 착취의 현실은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문제해결이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열대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시적 화자는 아직도 “원고지에 뭔가 빼곡하게 채워 넣고 있을 당신을” 그리워한다. 여기서, 우리는 K시인을 정선호 시인의 또 다른 자아로 겹쳐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몸은 적도의 열대에 있으나 ‘바람’을 통해 쉼 없이 한국사회와 소통하고 있는 시인의 시적 실천을 눈여겨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바람’의 오묘한 힘은 정선호 시인에게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횡단할 수 있도록 한바, 시집에서 곧잘 보이는 고대 사회의 유적 및 유물과 관련한 시편(「해반천을 따라 달렸다」, 「수로왕비릉 앞에서 물을 긷다」, 「다호리에서 밭을 일구다」)과 태곳적 원시와 관련한 시편(「수빅영화관 앞에서」) 역시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의 삶과 시가 무관할 수 없듯, 어떤 한 곳에 붙박힌 삶이 아닌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이방의 삶을 성실히 살고 있는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숭고한 아름다움을 표상한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겸허히 성찰하고 있는 정선호의 시쓰기가 진흙탕에서 불처럼 피어나는 연꽃의 심상으로 표상되는 것 역시 ‘바람’의 작용임을 몰각해서 안 된다. 왜냐하면 연꽃이 “불처럼 피어났다”는 데서 우리는 연소(燃燒) 과정에서 반드시 ‘바람’이 매개되어야 한다는 진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불처럼 피어났다

아이들이나 나도 진흙탕에서 살고 있다

염원과는 다르게 펼쳐지는 이승의 골짜기,

때로 그 염원이 이루어지는 때 있긴 했지만

순간일 뿐, 언제나 진흙탕에서 숨 쉬고 있다

― 「연꽃을 말하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