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어설픈 몸짓으로 걸어온 생의 발자국을

흔적으로 남긴다

 

눈물겨운 보랏빛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 잘 들여다보지 못하고 지나온 시간들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시 앞에서

좀 더 정직해져야겠다

 

2014년 늦가을                                              

이미령


이미령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현재 상주문협, ‘느티나무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고있다.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의 이미지

이미령의 시세계

      박찬선(시인)

 

 

 

  1.

  차가운 기술도 따뜻한 감성을 입는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를 ‘융합의 시대’로 규정했다.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이 단순한 기술의 개발을 넘어서 융합을 통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로 급속히 전환하고 있다. 18세기 노동자본 중심의 농경시대, 19세기 산업화시대, 20세기 통신과 정보기술 IT 기반의 정보화시대를 거쳐 21세기는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기술, 산업, 인문학 등이 소통하는 융합시대에 접어들었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스마트폰도 융합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다. 무미건조하고 생명이 없던 IT기기에 인문학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지능적이고 감성적인 스마트기기가 탄생했다. 이제는 모든 첨단기기에 인문학적 요소를 가미하지 않으면 외면받는 시대가 되었다.

  요즈음은 학문에 있어서도 융합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학자가 인문학에, 인문학자가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풍토를 일컫는다. 대학에서도 문과와 이과, 예술을 융합한 전공도 늘어나고 있다. 모든 학문은 상호연관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서 융합은 시가 처음 나오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초기에는 신을 경배하고 자연을 예찬하며 인간을 사랑하는 내용으로 차 있었다. 이후 시의 발전은 인접 예술인 미술과 음악, 연극 등과 연계됨으로써 새로운 진경을 보여주었다. 그뿐 아니라 시인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시의 변화도 예민하게 나타났다. 한 편의 시에는 시인의 생활공간에서 체험된 여러 가지 사항이 두루 다루어지며 시인의 감정과 의식이 담겨진다.

  돌이켜보면 이미령 시인의 시력도 꽤나 오래되었다. 1988년 『상주문학』 제2호부터 모임을 같이 해왔으니 사반세기가 넘은 셈이다.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시의 밭을 가꾸어온 시인으로서 그의 생활전체가 녹아있는 이번 시집은 어쩌면 그동안의 창작생활을 총결산하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유년의 체험에서부터 인간관계에서 얻어진 기쁘고 슬픈 이야기와 만화경 같은 시장풍경, 사랑하는 가족, 아름다운 자연 등 이미령 시인의 시적 영역은 총체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이 함께 나타난 융합성이 돋보인다.

  그런 속에서도 스스로 그만이 가진 청동 손잡이가 달린「문」은 이미령 시인이 꿈꿔온 시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초점의 대상이 된다.    

       

  나는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을 가졌다

 

  길을 걸을 때나 일할 때

  덩그렁 덩그렁 소리를 내며 심금을 울린다

  혼자 있을 땐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려

  고요한 생각의 강으로 나를 데려간다

  사는 일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울 때

  슬픔의 어둔 그림자가 머리를 감쌀 때도

  말없이 문을 열고 앉아

  남빛 우물 같은 안을 들여다본다

 

  살아온 날만큼 햇살과 바람으로 단단해진,

  아무도 열 수 없는

 

  나는 꽃과 새 그리고 별이 수놓아진 문을 가졌다  

―「문」 전문    

 

  위의 시를 읽으면서 바로 떠오른 것이 이상이 스스로 자기를 그린 「자화상」과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이다. 전자는 그림으로 자기의 얼굴에 심리적 상태까지를 잘 나타내주었으며 후자의 시 또한 어두운 시절의 밉고 가엾은 자기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자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자화상은 자기가 자기 모습을 그린 것이다. 따라서 자화상을 통해서 시인에 대한 일차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모든 생각은 관찰에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자세히 살펴보는 고찰의 과정을 거쳐 온통 밝혀서 살펴보는 통찰, 그리고 반성하며 살피는 성찰의 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마지막에 비로소 창조적, 혁신적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미령 시인의 「문」은 먼저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을 가졌다”. 청동은 중후한 느낌을 준다. 그 문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 심금을 울리는 문으로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감동은 닫힌 마음을 움직여서 열게 한다. 정서적인 공감대의 형성은 시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다. 더구나 “혼자 있을 땐” “저절로 열려”서 “생각의 강”으로 데려가는 문.

  그리고 “사는 일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슬픔의 어둔 그림자가 머리를 감쌀 때”는 “남빛 우물 같은 안을 들여다본다”고 한다. 남빛은 푸른빛과 자줏빛 사이의 빛으로 희망의 빛이자 끌어들임의 빛이기도 하다. 더러는 신비감을 자아내고 물속에 무엇이 잠겨있어서 두레박질을 할 수 있는 우물 같은 안. 그런 안을 본다는 것은 자기의 내면세계를 보는 것이며 성찰에 의한 존재의 확인이다. 이미령 시인의 시가 자리 잡은 데에는 이것이 큰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여기에 “꽃과 새 그리고 별이 수놓아진 문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시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고 자유롭게 꿈꿀 수밖에 없으며 희망이 반짝반짝 빛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햇살과 바람”의 은총과 시련, 빛과 어둠으로 단단해진 “아무도 열 수 없는” 그만이 열 수 있고 그만이 가진 사유와 시의 문. 꽃과 새와 별이 지닌 상징세계는 시인들이 가지고 싶은 구경적이자 이상적인 경지이다. 어쩌면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는 항시 머무르고 싶은 세계일 것이다. 시는 감동이다. 감동은 시를 지탱케 하는 힘이다.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안에 무엇이 있는가? 이미령 시인이 지닌 시의 내실에는 무엇이 놓여있는가? “꽃과 새 그리고 별이 수놓아진 문”을 들여다보자.

 

  2.

  등을 보이고 떠나는 사람의 등 뒤로//등꽃은 핀다//정든 발걸음소리 아슴아슴 멀어질 때마다//보랏빛 꽃송이 잠결에 눈뜨듯 피어난다//그래서 등꽃은 그리움일까//보내는 가슴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온 씨앗을//가는 이의 등위에 빽빽이 뿌려놓고//참아도, 참아내어도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눈물로 키워낸 그리움일까//그래서 등꽃은 그렁그렁 피는 걸까//등꽃을 보려고 눈을 비비면//떠나는 사람의 덩그런 등이//그래서 보이는 걸까              

    ―「등꽃 1」 전문 

 

  “등을 보이고 떠나는 사람의 등 뒤로/등꽃”이 피는 것을 보는 눈이 시의 눈이요, 등꽃을 눈물로 피워낸 그리움의 꽃으로 보는 것이 시심이다. ‘등’과 ‘등 뒤’와 ‘등꽃’으로 이어진 동음의 전개와 시상의 뉘앙스는 절묘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떠남으로써 피어나는 꽃이기에 떠난 사람의 등이 보이는 것도 가경(佳境)의 연상이요, 정든 사람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질 때마다 비례하여 보랏빛 꽃송이가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것도 애틋한 발상이다. 그것은 보내는 사람의 가슴에서 꺼낸 씨앗을 “빽빽이 뿌려놓고” “눈물로 키워낸 그리움”이 아닌가.

  “그렁그렁 피는” 등꽃을 보려고 하면 “떠나는 사람의 덩그런 등이” 먼저 보이는 서운함과 허전함의 등꽃. 등꽃이 지닌 꽃말로 환영, 사랑의 결합, 사랑에 푹 빠짐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전통정서인 이별의 한이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본다. 나아가 “너의 적막을 환히 밝히는/보랏빛 등불로 오래 서 있고 싶다”(「등꽃 2)에서 더욱 굳어진 심지를 보게 된다. 등꽃을 보는 시안과 그리움을 담은 시심이 잘 어우러진 「등꽃 1」은 보편적 정서의 승화와 함께 정제된 감각을 보여준다.

  이미령 시인의 시는 잘 읽힌다. 잘 읽히지 않는 시가 있다면 그것은 불구의 시, 정상적으로 갖추지 못한 모자람의 시일 것이다. 꽈배기처럼 배배꼬인 정서거나 일상의 식상한 정서가 아니면 언어의 폭력으로 설익은 거친 표현일 것이다. 경솔함과 만용이 어우러진 시는 소화불량의 고통을 줄 뿐이다. 이런 점을 극복한 자리에 이미령 시인의 시가 자리 잡고 있다.   

  청남빛 적막이 받쳐 든 새벽/차갑게 눈뜨는 가을의 언저리에/수없이 피었다 지는 꿈빛 풀꽃이여/곱게 피는 법과/아름답게 지는 법 물어/큰 산기슭 작으나마 네 몸 곧게 세우고 있으라/바람은 쉼 없이 네 손목 잡아 이끄니/눈물로 허물고 쌓던 어둠의 눈동자를 기억하라/눈감으면 더 또렷해지는 세상/그리움 위해 무엇을 버리며 가야 하나/알수록 비워지는 사랑/또 무엇을 풀어내며 흘러야 하나/바람이 끝나면/고요가 찾아오리니/이 땅 하늘 아래 낮게 낮게 엎디자/곱게 피는 법과/아름답게 지는 법 물어

                                   ―「들꽃을 위하여」 전문

 

  이미령 시인의 꽃은 아름다움의 정화라는 기본적 의미의 전제 위에서 전개된다. 「들꽃을 위하여」에서 “곱게 피는 법”과 “아름답게 지는 법을 물어” 차분한 정조로 인생에 빗대고 있다. “네 몸 곧게 세우고 있으라”고 이르고 “어둠의 눈동자를 기억하라”고 이른다. 풀꽃에 대한 존재의 천명이다. 자기다운 모습을 간직한 당당함이며, 어두운 상황을 직시하라는 당부이다. 바람이 상징하는 외적 강압이나 유인, 그리고 눈물로 점철된 비극적 상황을 어찌 잊겠는가. “눈감으면 더욱 또렷해지는 세상”의 현실인식 속에서 그리움을 위하고 “알수록 비워지는 사랑”의 역설 속에서 “풀어내며 흘러야” 할 물음을 제시한다.

  어느 철학자의 물음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물음은 우리 스스로를 직시케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보고도 보지 못하고 알고도 알지 못하는 세상과 사랑에 대한 심적 거리를 감지케 한다. 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 “바람이 끝나면/고요는 찾아오리”라고 했으니 희망적이다. 시련이 끝나면 평화는 오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사는 방법으로 “낮게 낮게 엎디자”고 낮은 자세를 권유한다. “꿈빛 풀꽃”의 생존은 곧 인간의 생존을 의미한다.

  이미령 시인의 꽃은 단순히 꽃에 머무르지 않는다. “비 내리는 날이면/살아있는 꽃의/살아있는 음성을 듣는다”(「빗방울 꽃」)고 하여 자연현상에 따른 빗방울도 빗방울 꽃으로 변용하여 꽃에 대한 이미지의 확산을 볼 수 있다. “날갯짓 같은 꽃잎의 숨결이” “내 목숨의 소리” 곧 “살아있는 꽃”으로 환치 심화되는가 하면 “강가에 앉아/반짝이는 강물에 눈을 담그면/문득 꽃피는 소리 들려온다”(「꽃피는 소리」)고 하여 강과 꽃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 정서적, 시각적 이미지에 이어 개념적, 청각적 이미지로 넓혀간다.

  그런가 하면 “밤낮 흙발로 동분서주하면서도 막걸리 몇 잔으로 시름 풀고 낮에는 봉급생활 밤에는 농사일 새벽에는 별빛 버무린 손두부와 청국장을 빚어”내는 “초등학교 동창생 영식이”(「파꽃」)처럼 어렵게 사는 소시민이 ‘파꽃’으로 그려짐으로써 꽃의 상징성이 인간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본다.

 

  하늘빛에다 갈빛에다/온몸 담그고 싶어하는 것은/우리들의 가슴이 비어있기 때문이다//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꿈꿀 수 없는 늪에서 넘쳐나는 별무리/눈 내려 땅을 보면/밟을 수 없는 깊이에서 뿌리내린 풀꽃//꽃잎같이 여린 가슴 하나/고일 곳 없는 자갈밭에/어쩌다 희디흰 파도가 달려온다면/얼싸안고 물보라로 섞이고 말 것을//바람 울고 가는 언덕 위/날개 탄탄한 새가 되고 싶어함은/우리들의 가슴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빈집」 전문

 

  이미령 시인의 시에 있어서 ‘꽃’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사물이 ‘새’와 ‘별’이다. 공교롭게도 「빈집」에는 “별무리, 풀꽃, 꽃잎, 새”가 다 나온다. ‘빈집’이자 ‘가슴이 비어있는’ 것으로 형용되는 공허한 정신세계, 무의 세계에는 무엇인가를 채워야 한다. 우리의 삶이란 채우는 일이 아니던가. 특히 황금과 명예는 이를 것도 없고, 마음의 곳간에 오욕의 덩어리를 가득 채우는 일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들의 가슴이 비어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뜻한다. 하늘에는 별무리, 땅에는 풀꽃이라고 했을 때 이것을 하늘에는 별, 가슴에는 양심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왜냐하면 빈 가슴이 곧 양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령 시인의 욕심은 “날개 탄탄한 새가 되고 싶어함”에 있다. 새는 하늘이요, 이상이다. 마치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우화를 연상케 한다.

 

  메추라기가 대붕(大鵬)이 나는 것을 비웃으며 말했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나는 뛰어서 위로 날며, 수십 길에 이르기 전에 숲 풀 사이에서(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것이 우리가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데 그는 어디로 가려고 생각하는가?

 

  메추라기는 잡새로 태어난 현실적 새. 현실 세계에서 속박되어 있지만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새로 일상적인 우리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새이다. 대붕은 허구적인 새로 우리의 삶을 조명할 수 있는 초월적 자리를 상징한다.

  대붕의 이야기에는 ‘자기 변형(self transformation)’과 ‘의존성’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의존성은 메추리가 대붕을 조롱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바다가 움직일 정도의 커다란 바람이 불어야만 날 수 있는 새를 어떻게 진정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붕은 현실 세계에서 비약하여 이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도를 확보한 철학자로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인간에게 허용된 조건적 자유, 절대 자유는 우리한테 허용되지 않는다. 내 앞에 주어진 어떤 조건을, 나를 누르는, 나를 옥죄고 있는 그 조건을 넘어서는 게 자유이다. 대붕은 ‘정면에 바람(권력, 자본, 관습)이 와도 후퇴하지 않는다. “태풍은 나를 비약시킬 수 있는 계기로 만든다” 는 신념과 도전에 있다. 바닥에 처박혀 있었던 물고기 곤이 거대한 새로 변해 바람을 얻고 스스로 올라가 아주 먼 시야를 얻어서 날아가는 그것이 바로 대붕의 자유다. 자유라는 나무의 그림자는 고통이다. 고통의 길이만큼 나무는 높다.

  이미령 시인의 “날개 탄탄한 새”는 대붕처럼 태풍에 맞서 넘어가고 험난함에서 성숙되고 애쓸수록 커지고 자유로워지는 새이리라.

 

  바위 같은 어둠을 뚫고 올라/그토록 눈부시게 부서지기 위하여 천 년의 기다림을 간직한 별/흩어진 별 조각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꽃이 되었다

                ―「폭죽」 전문

 

  밤하늘을 수놓는 축제의 불꽃. 아름다운 절정의 한순간을 위하여 오랜 기다림을 삭혀온 별.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 한순간에 태어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존재마냥 그 별은 부서져서 흩어진 조각에 불과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별처럼 아름다운 꽃, 한 편의 시로 읽혀지는 것이다. 「폭죽」은 어둠-별-꽃으로 이어지는 선명한 이미지의 전개가 돋보이는 짧은 시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찬란한 폭죽이 손가락을 퉁기는 탄지(彈指)의 시간이듯이 시 또한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압축성이 빼어나다. 작금 산문성을 지닌 장시이거나 난해시를 걱정하며 신서정의 단시를 주창하는 경향에도 부합한다. 장시가 가진 연막탄의 모호성과 군더더기를 제거함으로써 건강한 시가 된다. 

  여기에 나온 ‘꽃’ ‘새’ ‘별’은 참 아름다운 사물들로서 이미령 시인의 시를 상징하는 낱말들이다. 시에 입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것들을 주제로 한 시를 빚었거나 쓰려고 하는 대상이다. 그만큼 이들의 독특한 형상도 관심의 표적으로 사랑을 받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포적 의미가 더욱 희구하는 요소로 그려지고 있다.

  ‘꽃’은 사랑, 연인, 아름다움의 의미를 지녔다. 특히 아름다움은 영원히 변치 않는 참(진리)이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새’는 신성과 예시, 하늘의 안내자, 상서로움과 비상의 의미를 지녔다. 땅위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고결한 정신을 나타낸다. ‘별’은 꿈, 광명, 운명, 길조를 뜻한다. 빛나는 별은 시공을 넘나들며 간구하는 요체이다. 지상을 대표하는 ‘꽃’과 천상을 대표하는 ‘별’과 그 사이를 연결 지워주는 ‘새’가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 우리는 꽃과 새와 별이 가진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그들이 그려내는 이상세계를 그리워하고 꿈꾸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3. 

  어느 자리에선가 이미령 시인을 “사물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눈이 깊다. 따라서 시가 앉을 자리와 시를 그려내는 힘을 지닌 시인이다.”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이미령 시인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도 예외는 아니다.

  시가 앉을 자리는 궁극적으로 시가 태어나는 내면의 자리이며 시를 앉히는 능력과 다름 아니다. 어떤 대상이라도 이미령 시인의 시적 포충망에 들면 영락없이 시로 환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대상에서 시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추출하는 힘을 가졌다. 그러니까 시적 요소와 비시적 요소의 한계를 꿰뚫고 있음이다. 그것은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것이라야 하며,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는 가장 기본적이자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단단한 무장은 시를 빚는 힘으로 나타난다. 

 

  양은주전자, 캄캄한 여름밤 반딧불이처럼/깜빡깜빡 졸던 할배의 긴 대꼬바리 생각난다/놋재떨이 탕탕 부아나신 듯 내려치시면/쪼던 감 내동댕이치고 달아나던 감나무의 까치들/학교에서 돌아오면/할배가 쥐여주던 뚜껑 헐렁한 주전자/눈 흘기며 막걸리 부어주던 구멍가게 숙이 언니는/서울로 시집갔다지/갔다가 다시 왔다지/골목길 돌아서며/출렁이는 막걸리 한 모금 슬쩍 마셔보면/달짝지근하면서도 코끝이 찡했다//오늘 고향집 앞마당 낙엽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양은주전자 너를 끌어안고/그날의 노을처럼 취하고 싶다

-「양은주전자」 부분 

 

  산업사회와 대응하는 현대예술의 경향을 기술한 오르테카의 ‘예술 비인간화’가 있다. 산업사회의 병적 징후는 계층 간의 갈등과 소외다. 여기서 예술과 대중의 분리라는 현대문명의 하나의 특성이 발생한다. 예술의 비인간화는 물신숭배(物神崇拜)의 타율적 인간의 집단인 대중에 대한 혐오감에서 근거한다. 그것은 가진 자 부르주아의 세속적 가치체계와 현대문명의 비인간화에 대한 예술적 대결을 보여준다. 물신숭배의 산업사회에서 시는 의도적으로 현실과 대결의 시가 된다. 여기서 사물시(事物詩)와 비인간화의 인간부재의 시가 탄생한다.

  사물로서 「양은주전자」를 보면 꼭 오르테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그 이전에 그냥 유년의 애틋한 정감이 담긴 시임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상반된 논리를 벗어나서 원초적 자리에 시가 있다고 하면 되겠다. 찌그러진 노란 양은주전자를 보면 옛 고향집 생각이 나고, “할배의 긴 대꼬바리”와 “숙이 언니” 생각이 나고, “한 모금 슬쩍 마셔”본 찡한 막걸리 맛에 “너를 끌어안고/그날의 노을처럼 취하고 싶”은 오늘이 있다. 지난시절의 생활상이 한 단면으로 투영되어 온다. 굳이 비인간화를 거론치 않더라도 시는 따뜻한 사랑으로 빚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시인은 몸으로 보고 몸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온몸을 이유 없는 자발성에 맡김으로써 시라는 또 하나의 몸을 세계 안에 탄생시킨다. 세계를 자각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 몸이다.(김인환 『상상력과 원근법』 389)라는 말이 실감 있게 다가온다.

 

  하늘 파아란 가을 한낮 멀리 감 익어가는 소리에 엄마 생각이 나요 들일 마치고 돌아오시는 엄마 손에 빛깔 고운 단풍잎과 은행잎, 감잎이 자주 들려 있었지요 덕분에 어린 시절 제 책갈피마다 어여쁜 꽃잎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을 따라 저도 붉고 노란 꿈을 꾸기도 했고요 어느 해 원피스 사 달라는 절 달래느라 만들어주신 감꽃 목걸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살며시 가슴에서 끄집어내어 목에 걸어본답니다 감이 익어갈수록 그리움도 깊어만 가요 감꽃 닮으신 엄마, 늦가을에 남장사 감잎 지는 소리 들으러 함께 가요 사르락, 발밑에 떨어진 감잎을 밟으면 해질녘 노을빛 얼굴로 들에서 돌아오시던 엄마의 발걸음소리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감잎 편지」 전문

 

  시인이 사는 고장이 감고을이라고 두둔하지 않아도 감나무에는 절로 정감이 묻어난다. 특히 가지를 적당히 뻗고 묵직하게 앉아있는 오래 묵은 감나무의 경우는 인자(仁者)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더구나 상처받은 고통 끝에 깊숙한 속 자리에 그려 넣는 각고의 검은 무늬를 생각하면 성스럽기까지 하다. 

  “감 익어가는 소리에 엄마 생각이 나”고, 감잎을 밟으면 “엄마의 발걸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하게 펼쳐진 시. 엄마가 주워온 단풍잎 그 빛깔에 따라 여러 가지 빛깔의 꿈을 꾸기도 하고 목에 걸어보는 “감꽃 목걸이”에 유년의 고운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난다.

  엄마는 감나무다. 봄에는 노란 감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풋풋한 잎을 달며 가을이면 햇빛의 감을 주렁주렁 달아주는 감나무이다. 감꽃 닮으신 엄마는 감나무의 생명이자 사랑이며, 은혜이자 기다림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에 대한 열의가 있음을 뜻함이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의 트임을 말한다. 우리가 꾸는 꿈이 꿈을 낳듯이 우리 엄마는 엄마를 낳는다.

  이미령 시인의 유년의 체험은 이어진다. “해 저무는 논길로 돌아오는 아버지 얼굴엔/막잔 턴 노을 꽃 붉게 피고”(「추곡 수매하는 날」) “노을빛 꽃물 든 중년의 머리 위로/꽃들이 하나, 둘 지고 있다”(「봉숭아 꽃물」) 에서 보듯 유년은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 유년의 체험은 사라지지 않고 꽃처럼 피어난다.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낯선 땅 강원도 춘천/102 보충교육대에 아들을 내려놓고 돌아오는 길/먼 산이 물안개 꽃으로 덮여있다//해 저문 소양강 처녀/손 흔들며 누워있는 흰 구름떼/강물도 오래 말이 없다//눈물과 웃음 버무린 이십 년 세월/속울음으로 우뚝 선 아들/푸른 꿈 새긴 옷 잠시 벗어두고 갔다//억새풀 흔들흔들 숨은 울음 사이로/손마디 굵어진 여자 우두커니 서 있다

-「우두커니」 전문

 

  군대에 입영한 아들을 두고 돌아설 때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물안개 꽃으로 덮인 산, 말 없는 강물, 숨은 울음의 억새풀 사이로 열심히 살아온 엄마가 거기 “우두커니” 서 있다. 정신없이 멀거니 서 있다. 한 가정을 위해서 손마디가 거칠고 굵도록 일해온 엄마. 훈련을 받고 군 생활을 해야 할 아들과의 별리가 엄마를 “우두커니” 서 있게 만들었다. “이십 년 세월” 눈물과 웃음 속에 푸른 꿈 새겨온 아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아리고 저민 심정일까. 찡하게 떨려오는 엄마의 정이, 다함없는 엄마의 사랑이 억새풀 숨은 울음과 함께하고 있다. 이제는 극진한 모성이 위대하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린다.

  「감잎 편지」에 담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우두커니」에서 자식 생각하는 엄마의 심정, 그리고 “어머니 붉은 입술 엷어질수록/어머니 흰머리를 빗겨 드리지 못하고 나는/흰머리로 빚는 눈사람이 되어간다/검은 머리 빛나는 딸아이 내 그리움을 얹고/눈사람이 되어간다”(「눈사람 모녀」)3대에 걸친 끈끈한 혈연에서 우러나는 숭엄한 사랑이 담겨있다. 이 땅의 어머니가 가지는 뜨거운 사랑과 정성이다.

 

  인평동에 사는 수덕 씨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일등 농사꾼, 야들야들한 상추며 팔뚝만한 무, 감과 배 맛이 모두 일등품입니다 나를 보면 손짓 발짓 연신 분주하다가 눈 흘기며 손가락을 코끝에 슬며시 갖다 댑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 두 손으로 바치면 그제서야 7080 번호판 오토바이에서 박스꾸러미를 풀어놓습니다 잊지 않고 적어놓은 이미령♡ 시간 내어 글 가르쳐줬더니 사랑공세만 자꾸 퍼붓습니다 첫 마누라 도망가고 두 번째로 들인 다방여자 돈 털어 야반도주한 옛이야기를 웃음 섞인 수화로 풀어낼 줄 아는 그는 참 유쾌한 사람입니다

                                                      ―「수덕 씨」 전문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일등 농사꾼” 수덕 씨는 천심으로 사는 사람이다. 본래 농사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짓는 일이기에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다.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에 수덕 씨 같은 분이 살기에는 힘이 든다. 날을 세우고 살아야 될 세상에 “손짓 발짓”만으로 살기에는 어려운 세상이 아닌가. 그러기에 맞이한 두 여자도 상처만 남기고 떠났으니 배신감과 회한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글을 배워 “사랑공세”를 펴는 수덕 씨를 통해 착한 세상이 있음을 확인한다. 수덕 씨가 받은 삶의 고통이 삶의 희망이자 기쁨으로 뒷자리에 남아있다. 내면의 아픔을 삭이면서 “웃음 섞인 수화로 풀어낼 줄 아는 그는 참 유쾌한 사람”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 이면에 바위처럼 누르고 있을 불쾌의 상흔을 지울 수 없으리라.

  문제는 시인이 수덕 씨를 내세워 그리는 세계다. 어딘가 조금은 모자람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면서도 공감대에 놓인 선의 이데아, 이데아 중의 최고이자 최상의 이데아,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간취하게 된다. 즉 참된 인식의 대상으로서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되고, 초월적 본질이 되는 이데아를 전제로 하여 암시해주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수덕 씨의 인간다운 착함이다.

 

  4.

  내 몸을 다 적시고

 

  네 마음도 다 적시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도 다 적시고

 

  선하디선한 하늘의 눈마저 다 적시는

 

  저, 불길

                             ―「노을」 전문

 

  군더더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제된 작품이다. “내 몸”과 “네 마음”을 다 적시고 “흐르는 강물”과 “하늘의 눈”마저 다 적시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노을이다. “내 몸”의 나와 “네 마음”의 너의 설정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강물의 지상과 하늘의 천상으로 극단의 두 세계를 설정했다. 이것을 다시 두 가지로 압축하면 나와 너의 인간과 강과 하늘의 자연이다.

  이러한 두 대립된 존재를 아우르는 융합의 정점에 “불길”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시어로 “선하디선한”이 있다. 바로 전장에서 언급한 ‘선의 이데아’에서 선, 그것이다. 선은 악의 대로서 착하고 좋은 것을 이른다. 나아가 친하고 상서롭고 길함이며 옳게 여길 선이기도 하다. 착한 말을 남에게 하여 주는 것은 베나 비단으로 남을 따뜻하게 하여주는 것보다도 낫다(善言暖於布帛)고 하였으며 금이나 옥이 보배가 아니고 선언(善言), 선행(善行)이 세상의 귀한 보배라(善以爲寶)고 하지 않던가. 착함은 인간이 바라는 진, , 3덕목 중 하나다. “선하디선한 하늘의 눈”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이요, 가장 밝은 눈이며, 가장 높은 자리의 눈이라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저”라는 지시어다. 지시어에는 근칭으로 ‘이’, 중칭으로 ‘그’, 원칭으로 ‘저’가 있다. 아주 가까운 ‘이’나 상대적인 ‘그’를 떠나 ‘저’는 제3의 초월적 자리이다. 1음절의 지시어 ‘저’가 가지는 의미가 가볍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노을」은 단일한 형식과 언어의 정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사유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일이다.

  이제 다시 출발의 자리로 돌아가 보자. 융합은 문화적 차원에서도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픽션물, 과거의 시대적 배경과 현대의식이 혼융된 퓨전물, 융합형 양상의 형태가 대중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 음식에 있어서도 퓨전 음식이 나오고 있으니 융합을 통한 미각도 변이의 맛을 즐기는 때가 되었다.

 

  어느 바다에서 노닐던 멸치인가//대가리 큰 멸치 두 움큼 좋게 넣고/다시마, , 대파, 양파, 둥둥 조각배 띄운다//솥 안에서 태풍이 불고 큰 파도가 덮친다/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위기를 견디는 듯하다//스스로를 버리고 하나로 어우러진 육수에 된장을 풀고/두부 아저씨의 오래된 한숨과/노총각 황씨 호박꽃에 스민 그리움 몇 토막 넣는다//청양고추 같은 남편 잔소리도 똑똑 썰고/손전화에 뜬 딸내미 웃음소리 양념으로 듬뿍 넣으면/풋나물 맛나게 비벼먹는 얼큰한 된장찌개

                                          ―「풀어내다」 전문

 

  “멸치, 다시마, , 대파, 양파”가 얼싸안고 어우러져 육수가 된다. 여기에 된장 풀고 “두부 아저씨 오래된 한숨과/노총각 황씨 호박꽃에 스민 그리움 몇 토막”, “남편 잔소리”와 “딸내미 웃음소리”를 듬뿍 넣어 끓여내면 얼큰한 된장찌개가 된다. 모두가 어우러져서 빚어내는 융합의 맛이다.

  융합은 여럿이 녹아서 하나로 합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것이 섞여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뜻을 나타낸다. 극단으로 양립된 모순 상극의 상대적 체면을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원융자재(圓融自在)의 경지,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쪽과 저쪽에 걸림이 없는 중도의 자리, 통합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창의성과 시적 자유는 우리가 바라는 바의 이상적 경지다.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의 이미지. 청동은 BC 3000년경부터 만들어졌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그리스의 불의 신인 헤파이토스가 용광로에 구리, 주석, , 금 등을 넣어 아킬레스의 방패를 만드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청동은 종동(鐘銅)으로 조상용(彫像用)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러한 중후한 의미가 전제된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꽃과 새와 별의 이미지와 유년의 체험과 정다운 삶의 시가 전개된다. 한마디로 이미령 시인의 시는 곱게 물든 감잎처럼 아름답다. 아름다운 요소의 융합을 통해 시의 새 영역을, 시인으로서 꿈꾸는 이상적인 시의 세계를 보여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