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꽃 1

 

 

 

등을 보이고 떠나는 사람의 등 뒤로

 

등꽃은 핀다

 

정든 발걸음소리 아슴아슴 멀어질 때마다

 

보랏빛 꽃송이 잠결에 눈뜨듯 피어난다

 

그래서 등꽃은 그리움일까

 

보내는 가슴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온 씨앗을

 

가는 이의 등 위에 빽빽이 뿌려놓고

 

참아도, 참아내어도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눈물로 키워낸 그리움일까

 

그래서 등꽃은 그렁그렁 피는 걸까

 

등꽃을 보려고 눈을 비비면

 

떠나는 사람의 덩그런 등이

 

그래서 보이는 걸까              






오후 세 시

 

 

 

담장 아래 어깨 축 늘어진 호박잎 위

 

게으른 햇살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다

 

한가로이 누워있는 개 등짝에 붙어

 

파리 두 마리가 천연덕스레 짝짓기를 하고 있다

 

갈비마트 앞 종이박스 줍는 노파의 무덤덤한 눈빛 속에서

 

엿물처럼 녹아든 세월을 본다

 

손님 없는 홀을 지키며

 

대형선풍기가 하품하며 저 홀로 돌아가고 있다






양은주전자

 

 

 

비마저 단풍들어 붉게 내리는 날

막걸리를 마신다, 찌그러진 몸으로

하 많은 허기 술술 달래주는

너를 보면 상주시 무양동 고향집 생각이 난다

술 취한 노을이 초가지붕 위로 쓰러지던 저녁

논고랑 뛰어다니며 잡은 메뚜기 담아놓던

양은주전자, 캄캄한 여름밤 반딧불이처럼

깜빡깜빡 졸던 할배의 긴 대꼬바리 생각난다

놋재떨이 탕탕 부아나신 듯 내려치시면

쪼던 감 내동댕이치고 달아나던 감나무의 까치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배가 쥐여주던 뚜껑 헐렁한 주전자

눈 흘기며 막걸리 부어주던 구멍가게 숙이 언니는

서울로 시집갔다지

갔다가 다시 왔다지

골목길 돌아서며

출렁이는 막걸리 한 모금 슬쩍 마셔보면

달짝지근하면서도 코끝이 찡했다

 

오늘 고향집 앞마당 낙엽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양은주전자 너를 끌어안고

그날의 노을처럼 취하고 싶다

 




추곡 수매하는 날

 

 

 

안개 묻은 벼 가마니를 동개어 놓고

물꼬 터진 논물 같은 장맛비소리 안주하여

해장술부터 들이키는 아버지

끝내 세상의 흙을 고르는 파수꾼으로 남아

긴 긴 여름날 뙤약볕 등에 업고

목덜미 땀방울로 벼 포기 심어놓고

대궁따라 자라는 시름으로

논두렁을 못 떠나는 아버지

왜 진작 삽, 괭일 던져버리지 못하셨나요

자식들의 쐐기 같은 눈초리에도 늘 침묵으로

담배 연기 먼 산으로 뿜어내며

당초부터 그 놈의 희망일랑 팔아먹었던 게지,

매상을 할 때마다 머릿속 계산은 어깃장을 놓아

해 저무는 논길로 돌아오는 아버지 얼굴엔

막잔 턴 노을 꽃 붉게 피고

애당초 팔아먹은 싹 노란 희망이

아버지 걸음처럼 비틀거린다

 

 



 

 

 

나는 청동 손잡이가 달린 문을 가졌다

 

길을 걸을 때나 일할 때

덩그렁 덩그렁 소리를 내며 심금을 울린다

혼자 있을 땐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려

고요한 생각의 강으로 나를 데려간다

사는 일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울 때

슬픔의 어둔 그림자가 머리를 감쌀 때도

말없이 문을 열고 앉아

남빛 우물 같은 안을 들여다본다

 

살아온 날만큼 햇살과 바람으로 단단해진,

아무도 열 수 없는

 

나는 꽃과 새 그리고 별이 수놓아진 문을 가졌다





, 섬에서

 

 

 

  정오의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부스스 눈을 뜬다 방안은 고요의 바다 혼미한 잠 속의 눈물 가볍게 허공을 떠돌아다닌다 탁자 위 바스락 소리 내며 죽어가는 사기화분 속 영산홍 한때는 찬란한 목숨이었던 애써 태연하며 눈빛을 지우는 착한 나는 둔탁한 저음의 계절을 막 빠져나오려는 중 아, 세상이 너무 눈부셔요 나비 등에 업혀 날아다니던 언어들 지운다, 잊는다 위잉 위이잉 가슴 마구 두드리던 문자의 전율 눈을 감고 눈을 뜨고 네가 무언으로 일러준 비움을 배운다 창문 열면 넘칠 듯 찰랑이는 꽃물결 모른 척 고개 돌린 봄날

 




가을 강

 

 

 

세월도 돌아서 가는

나의 강 젖은 기슭

온몸을 비벼 우는 갈대와

안개 묻은 눈썹을 가진 새들이 살고 있는

소리 없이 흐르는 강에도 가을이 와서

점점이 붉은 노래 걸어놓았네

 

강물 깊숙이

눈먼 꽃 저 홀로 취하여

가슴에 세운 뼈를 허물고

 

겨울이 오기 전

서둘러 떠날 줄 아는 새들의 발자국 속으로 지는 낙엽

목숨 빛

, , 기다림  




자목련

 

 

 

안으로만 삼켜온 소리 없는 울음

 

삼월 하늘에 걸려있다

 

때론 생이

 

걸어온 흔적을 지우는 마른 물길질이어도

 

일찍이 엿본 환한 이승의 봄날이

 

화인으로 찍힌 가슴

 

상처가 피워올린

 

붉은 절규

 

 

 

 

 

들꽃을 위하여

 

 

 

청남빛 적막이 받쳐 든 새벽

차갑게 눈뜨는 가을의 언저리에

수없이 피었다 지는 꿈빛 풀꽃이여

곱게 피는 법과

아름답게 지는 법 물어

큰 산기슭 작으나마 네 몸 곧게 세우고 있으라

바람은 쉼 없이 네 손목 잡아 이끄니

눈물로 허물고 쌓던 어둠의 눈동자를 기억하라

눈감으면 더 또렷해지는 세상

그리움 위해 무엇을 버리며 가야 하나

알수록 비워지는 사랑

또 무엇을 풀어내며 흘러야 하나

바람이 끝나면

고요가 찾아오리니

이 땅 하늘 아래 낮게 낮게 엎디자

곱게 피는 법과

아름답게 지는 법 물어

 

 

 

 

 

 

흔적 

 

 

 

저리 쉽사리 꽃 진자리 지워질 수 있는가

 

담쟁이넝쿨 붉은 손 우주로 뻗어나가던

 

가을 저물녘의 기억

 

하마 지워지고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 대궁만 남아

 

겨울바람 앞에 숭숭숭 울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인다, 손 갈퀴에 숨겨진 필사(必死)의 손놀림과

 

담벼락에 각인된 푸른 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