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1.

 

그르이 우에니껴?

 

‘그르이 우에니껴?’는 이 고장 말이다. ‘그러하니 어찌합니까?’의 뜻이다. ‘그르이 우에니껴?’에 얽힌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러하니 어찌합니까?’는 음절이 뚜렷하고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르이 우에니껴?’는 음절과 음절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어법이다. 그러니까 매사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어물쩡하게 인식하는 태도다. 좋은 게 좋고 웬만하면 된다는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된 말이다.

인구 십만 정도의 소도시이기에 사람들은 대개 서로 말만 하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이다. 그래서 학교 동기회가 매우 잘 된다. 모임이 결성되면 20명 정도는 쉽게 모이며 한 달에 한 번은 모임을 갖는다. 대도시의 높은 사람들은 흔히 부부동반 모임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도 이를 본받아 부부동반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수구초등학교 45회 동기회도 매우 화기애애하게 이루어진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친목이 사뭇 돈독하게 이루어졌다. 모임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재갑이가 제안했다. 우리도 부부동반으로 모이자. 그래 그게 좋겠다. 요즘 서울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한다더라. 몇몇 가정불화가 심한 친구를 제외하고 모두 찬성이었다.

용칠이는 가정불화가 있어서 다소 거북했지만 다들 찬성하는데 혼자 반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좋은 게 좋다고 찬성하고 말았다. 용칠이 부인은 사실 시골 여자 같지 않게 해말끔한 용모를 지녔다. 행실이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더러 들리기는 했지만 설마 내 마누라가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수구초등하교 45회 동기회는 부부동반으로 바뀐 뒤에도 잘 운영되었다. 만나고 보니 아내들끼리도 누구 아니껴? 하면 안다고 하고 안과 밖이 두루 친목이 돈독해졌다. 낚시도 함께 가고, 등산도 함께 가고, 물가에서 고기 굽는 모임도 함께 하고, 노래방도 함께 갔다. 요즘의 모임 추세는 식사를 마친 다음 함께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불문율과 같은 순서였다. 노래방에서 어울려 노래하고 춤을 추다 보니 누가 누구의 마누라인지 누가 누구의 남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재갑이는 얼굴이 반반한 용칠이 마누라와 춤출 때 야릇한 느낌이 왔다. 그런 느낌을 감추어야 되는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용칠이 마누라 애자에게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용칠이 부부는 댐 건설이 예정된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 용칠이 마누라는 농사짓기보다 댐이 들어서면 보상금을 받아 시내에서 흙 묻히지 않고 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녀도 은근히 도회풍의 재갑이에게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분위기를 이상하게 느낀 친구가 재갑이에게 농담을 했다.

“재갑아, 니는 왜 남의 콩만 보노?”

재갑이는 잠시 당황하다가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 달린 짐승이 어디는 봇 보나!”

좌중이 재갑의 말에 호응했다.

“우리가 남이가? 니는 별 소리를 다 한다! 짜슥아, 분위기 깨지 마라.”

그날의 모임도 저녁 식사 뒤에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 문화라는 게 묘해서 노래 좋아하는 사람 몇 사람만 있으면 30십 분 추가에 30분 서비스를 더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거기에 노래하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가 우선예약까지 하게 되면 시간은 자꾸만 길어지게 마련이다. 노래 못 하는 사람은 애꿎은 술만 죽이고 이래저래 시간이 늘어지기 마련이다. 한참 음주가무에 정신이 없는 판에 술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는 친구가 말했다.

“야, 그런데 재갑이 하고 애자가 안 보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그 둘이 없다.

몇몇 남자들이 밖에 나와 구수회의를 했다.

“이것들이? 눈치가 아무래도 이상하더니.”

“아니야,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

“설마가 사람 잡는대이.”

“맞아, 한번 찾아보자.”

“우선 둘에게 전화해 보자.”

“맞다. 그게 좋겠다.”

아마 재갑과 애자는 일행들이 시끌벅적하게 노느라 자기들의 행방에 대해 무관심하리라는 어정쩡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시골 작은 도시는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 잇는지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후배 건달들을 동원해서 그 둘이 모모 모텔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세상에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어디 있노? 그걸 완전 아작을 내버리자. 그리고 완력깨나 쓰는 친구 몇이서 모텔에 들이닥쳤다.

애자는 속옷만 걸치고 도망을 가고 재갑이는 그 자리에서 아작이 났다. 한참을 그리하다 보니 재갑이 죽을 것 같았다. 한 친구가 더럭 겁이 나서 말했다.

“그만하자!”

그리고 그들의 완력이 끝났다. 누군가 말했다.

“병원에 데리고 가야 안 되나?”

“이깐 놈 살릴 필요 없다!”

“그르이 우에노…….”

이른바 의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늘어진 재갑을 들쳐 업고 응급실을 통해 입원을 시켰다. 그것이 이 고을의 의리라는 것이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실천했다. 다행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입술이 깨지고 갈비뼈에 금이 가서 당분간 입원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작은 동네니까 이 소문이 금방 퍼져서 사람들 사이에 화제 거리가 되었다. 재갑의 선배들도 알게 되었다. 행실을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몸이 그렇게 상했다니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의리는 지켜야지.”

그것이 이 고을의 정서였다. 재갑의 선배들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병실에 문병을 갔다. 재갑은 온몸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눈은 감기고 입은 겨우 빨대를 꽂을 만한 틈밖에 없었다. 선배들은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아, 우에다가 이래 졌노?”

재갑이 한참 있다가 겨우 터진 입으로 말했다.

“그르이 우에니껴?”

도시가 술렁이고 있었다. 도시의 남쪽에 댐이 생긴다는 것이다. 용칠이네 마을이다. 용칠이는 사과 농사와 고추 농사를 지어 어렵지도 넉넉하지도 않게 산다. 그런데 댐이 생겨서 물에 잠기게 되면 농사도 지을 수 없게 되고 이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관에서는 형식적인 공청회를 열고, 형식적인 주민 설명회를 열어 댐 건설을 기정사실화 했다. 모든 일이 어떻게 손 써볼 재간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댐 건설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졌다. 비교적 농토를 많이 가진 사람은 그 땅에 농사를 짓는 것보다 댐에 수용되는 토지의 보상가가 더 높기 때문에 큰돈을 만져볼 수 있어서 은근히 댐이 빨리 지어지기를 기대했다. 반면에 농토가 적거나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보상가도 적게 받게 되고 그 돈으로는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기에 반대했다. 그러나 마을엔 펼침 막이 걸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는 반대 일색인 것처럼 보였다. 찬성하는 사람들도 환경이 파괴되는 것과 정든 고향이 물속에 잠기게 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대 시위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은 거세게 반대함으로써 보상가를 더 올려 받으려는 계산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밭에 어린 묘목을 사다가 새로 심는 사람도 있었다. 밭에 과일 나무가 있으면 보상가가 높아진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상가가 가장 높은 나무가 무궁화라 했다. 그래서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 무궁화를 심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의 인심은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댐 예정지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시민들은 댐 건설을 반대하는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시민과 수몰 주민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기도 하고 반대 집회를 열기도 했다. 대책위원회 사람들이 관청을 항의 방문했다.

관청에서는 수몰민들 대다수가 댐 건설을 찬성한다는 것이다. 대책위원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다. 시청 직원은 그 근거로 수몰민들이 서명날인한 동의서를 내 놓았다. 그들이 내놓은 서명용지를 보고 대책위원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댐 건설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설득해서 겨우 반대 서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찬성 용지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 용칠이의 이름도 보였다. 동기회를 하다가 오쟁이를 진 용칠이었다.

위원장은 어이가 없었다. 사청에서 나오자마자 찬성과 반대에 모두 서명을 한 사람들을 만났다. 관에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간곡하게 말하는데 아는 처지에 야박하게 거절할 수 없어서 서명했다는 것이다.

“용칠 씨, 용칠 씨는 보상이 나와 봐야 그 돈으로 농사지을 만한 땅도 마련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쩌려고 서명을 했습니까?”

용칠이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고 어렵게 말했다.

“그르이 우에니껴?”

 

글2.

 

교포파

 

교사가 되기 전 나는 교사가 늙으면 교장이 되는 줄 알았다. 교사가 된 후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보다 승진을 하는 일에 요즘 말로 올인 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선배 교사들끼리 근무 평점이라는 것을 다투다가 돼지우리에 뒹굴면서 싸우는 것을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이라 다투는 일이라면 아예 포기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게다가 겁이 많아 싸움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젊은 나이에 이른바 교포파가 되었다. 교포파란 교감이나 교장 되기를 포기한 교사들을 가리키는 교육 전문용어다. 별달리 능력이 없었기에 섭생을 도모하자면 아마 교사 노릇을 오래 하기는 해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나름대로 무슨 신조 같은 것이라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몇 가지의 원칙을 정했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 존재한다.

늙어도 평교사로 남겠다.

봉투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

젊은 시절에 정한 이 원칙을 지킨다고 몇 번이고 외면서 잊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지켰다고 할 자신이 없다. 시골 초등학교에 있을 때 소풍 날 학부모로부터 담배 몇 갑 받은 적도 있고, 가정 방문을 해서 담근 술을 과음하여 돌아오는 길에 논둑에 넘어진 적도 있다. 후배가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어 부임할 때는 사람들의 눈길에 무능함에 대한 비웃음의 빛깔은 없을까, 심기가 편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영화 「선생 김봉두」가 흥행에 성공할 무렵 영화의 김봉두와 동명이인인 김봉두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교육 목표가 승진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교포파 동지라는 것을 확인하고 집나간 자식 만나듯 반가워하였다. 그리고 마치 부랄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퇴근 후에 교사끼리 만나면 점수 이야기가 화재의 주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교사의 승진은 점수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해마다 교장 교감이 수우미양가로 매기는 근무평점이라는 것이 있고, 연구대회에서 받은 상에 의해 매겨지는 연구점수가 있고 벽지에 근무하면 받을 수 있는 지역점수가 있다. 그래서 승진에 관심이 많은 교사들의 화제는 점수이기 마련인데 그 점수라는 것이 쪼잔하기 이를 데 없어서 0.01이니, 0.001이나 하는 모양이다. 퇴근 후의 술자리에서 이 점수 이야기가 나오면 술맛 달아난다. 그래서 되도록 교사를 하는 친구와는 만나지 않으려 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술안주 가운데 으뜸은 마주 앉은 사람이다. 사람을 먹을 수는 없지만 마주 앉은 사람이 향기로우면 술맛 또한 향기롭다. 서로가 서로의 안주라는 점에서 봉두도 나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 눈치였다. 봉두와 내가 만나면 0.01이니 0.001이니 하는 점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봉두와 내가 만나는 날은 대개 장날이 아니면 휴일 오후였다. 함께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사람 사는 느낌도 충전하고 시골 할머니들이 난전에 펴 놓은 푸성귀도 조금 사면 우리들의 시장 순례는 끝나고, 대포집 ‘끝순네 집’에 가서 막걸리 한 사발에 파전 한 접시로 파티를 연다. 그러면 파전보다 더 좋은 봉두의 안주가 차려진다.

“요즘 명예퇴직인가 뭔가 하면 퇴직할 때 교감으로 승진시켜서준다며?”

한 잔 같이 마셨다.

“만약 나한테 교감 승진시키면 난 반납할 거야. 반납 안 받아주면 나는 소송할 거야.”

또 한 잔하고

“내가 왜 교감이야? 교감보다 교사하겠다는데 왜 억지로 교감 하라고 해?”

다시 한 잔 하고

“어정쩡한 놈들 말이야! 교감이 뭐 대단한 벼슬인 줄 아나보지?”

그러면서 또 반 잔 하고

“퇴계 선생이면 됐지, 퇴계 교감이라 하나, 퇴계 교장이라 하나?”

나도 맞장구를 쳤다.

“아암, 그렇지!”

“이누무 자슥들 말이지.”

봉두의 이야기는 나의 평교사로서 열패감이나 주눅을 한꺼번에 날리는 청량음료와 같은 시원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봉두는 나로 하여금 또 한 잔의 술을 권하는 것이었다.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술 권하는 봉두라 해야 합당할 것이다.

오래 전에 봉두가 근무하던 산골 초등학교에 교육청 학무국장이라는 분이 오셨다. 높은 분이 오는 날은 학교가 한바탕 소나기 내릴 때처럼 부산하기 마련이다. 수업보다 우선으로 청소를 해야 하고 평소 입지 않던 양복도 입어야 하고 모두 긴장해서 높은 분을 맞이한다. 교장은 복슬강아지처럼 높은 이의 곁을 맴돌며 안내를 하기에 바빴다. 높은 이는 학교에 머물며 학습지도나 생활지도 등의 실태를 보고받고 혹은 교육시설 등을 돌아보고 마지막에 모든 교사를 모아놓고 지도 조언이라는 연설을 한다. 학교는 이에 대비해서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며 그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수업에 방해가 되는 일을 하기 일쑤다. 이윽고 하루 일과가 끝나고 국장님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택시를 불러서 국장님을 배웅하려는 교장의 눈치를 읽은 봉두는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교장 선생님, 국장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봉두는 학무국장님을 모시고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왔다. 정류장에서 교육청이 있는 읍내까지의 버스표를 한 장 구입했다. 마침 장날이었기에 버스는 만원이었다. 봉두는 버스표를 국장의 손에 정중하게 쥐여 주며 망설이는 그를 버스로 밀어 올렸다. 고추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버스 안은 고추 포대로 가득했다. 국장은 빈자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고추 포대 위에 않을 수밖에 없었다. 봉두는 애석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정중하게 배웅했다. 까만 양복을 차려입은 국장은 30리 비 포장길을 고추 포대 위에 앉아서 흔들리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인사이동 때 봉두는 사환도 없이 혼자 근무해야 하는 산골 분교로 발령을 받았다. 차라리 봉두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두메산골 학교에서의 근무는 색다른 체험인지라 모든 것이 새롭고 보람 있는 나날이었다. 높은 사람의 간섭이 없으니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일었다. 몇 명 되지 않는 학생은 모두 자식 같았고 순박한 학부모는 가족과 같았다. 아이들 모두 하교한 오후에는 적적하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오후가 되면 반바지 차림에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학교 주변 텃밭을 일구어 고추를 심었다.

그날도 봉두는 아이들이 돌아간 오후 반바지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 호미를 들고 고추밭을 매고 있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선생인가 농부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손을 바삐 움직였다. 땀은 흘러 옷을 적시고 옷은 살에 달라붙었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일까, 고추밭 골에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언덕 아래 오솔길을 따라 양복쟁이 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장학사였다. 인적 끊어진 산골에 사람이 나타나니 봉두는 반가운 마음에 호미를 든 채 장학사를 향해 달려 내려갔다. 호미를 들고 달려오는 봉두를 본 그는 눈이 둥그레져서 오던 길로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질하고 있었다. 봉두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형상으로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봉두의 이 일은 전설이 되어 이 지역 교사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혹자는 봉두가 너무했다고 하고, 혹자는 국장이 당한 일이 고소하다고 하기도 한다. 생각한다. 국장이나 장학사는 그것을 벼슬이라고 생각하고 봉두는 그것을 벼슬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데서 빚어진 일이 아닐까 하고. 덧붙여 말한다면 벼슬 중에는 닭 벼슬이 가장 예쁘다.

 

글3.

 

농민의 얼굴

 

강시위는 전형적인 이 땅의 농민이다. 검게 그은 얼굴, 깊게 패인 주름, 투박한 손이 누가 보아도 이 땅의 농사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덕에 시위는 텔레비전에 매우 자주 출연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출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농민 집회를 취재하는 카메라 기자의 예리한 눈이 전형적인 농민의 얼굴을 놓칠 리 없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그를 한두 번은 보았을 것이다. 며칠 전에도 농민 시위 사진이 신문에 크게 실렸는데 어김없이 거기 시위가 있었다.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이 민중 판화가의 작품처럼 새겨져 있고 머리에는 띠를 두르고 주먹을 불끈 쥔 손이 허공을 향해 힘차게 벋은 모습의 사진이었다. 군사정권 이래로 이 땅의 농민이 공화국 국민으로서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음은 두루 아는 바이다. 아무리 힘들여 농사를 지어도 비료 값, 농약 값, 농자금을 제하면 오히려 빚을 져야 하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그래서 농촌은 피폐해지고 농촌 인구는 나날이 줄어들어 이제 농촌에는 젊은이가 없고 늙은이와 개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도 시위는 농사짓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농사가 천하지대본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기에 얼마 되지 않는 농토지만 귀하게 여기며 힘겨운 농사일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그러면서 시위는 아직도 농민 운동의 깃발을 내리지 않고 있다. 성실하게 농사지으며, 농민회 활동도 줄기차게 하고 있다. 시위가 하는 일은 이 두 가지뿐이다. 농사짓기와 농민회 활동이 그것이다. 1970년대, 1980년대에 민중 운동을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깃발을 내리거나 혹은 정계로 진출하거나, 하다못해 기초의회 의원이라도 하는데 강시위는 아직도 깃발을 내리지 않고 농민 집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반드시 참가한다. 지역에서 하는 집회는 물론이고 서울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부지런하고 남에게는 친절한 사람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낮추어 말을 하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일단 집회에 참가하여 시위를 할 때면 그는 무서운 사람으로 변한다. 그는 언제나 시위대의 맨 앞에서 깃발을 들고 섰으며, 맹렬한 기세로 저지선을 돌파하곤 했다. 이 지역의 경찰치고 그의 솥뚜껑 같은 손에 뺨 한두 대 맞지 않은 이가 없을 지경이다. 체구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그의 손에 한번 맞아본 경찰은 누구나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고 고백하곤 한다. 정 형사가 햇병아리 형사 시절 처음 담당한 사람이 강시위였다. 운동판에서는 자기를 맡은 담당 형사를 담임이라 불렀다. 강시위의 담임이 정 형사였던 것이다. 그날도 서울에서 집회가 있는 날이어서 정 형사는 동료를 대동하고 강시위의 집 주위를 감시했다. 담임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다. 강시위가 서울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시위는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다. 담임을 발견한 시위는 타작을 멈추고 형사들을 불렀다. 나이 지긋한 분이 부르니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임에도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더 들어 보였다. 한번은 농민회 사무실에서 그와 내가 허물없이 반말을 주고받는 것을 본 후배가 술자리에서 내게 쓴 소리를 했다. “형님, 실망했니더.“ ”무슨 일인데?“ ”난 형님을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했니더, 강시위 씨 있잖니껴, 그 어른한테 반말을 하데요. 암만 그래도 그래면 되니껴?“

나는 그 후배의 오해를 풀기 위해 그와 내가 동갑내기라는 것을 긴 시간 설명을 해야 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은 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것과 나의 무죄를 증명하는 설명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는 형사들에게 시위는 태연하게 말했다. “서울 가는 거 때문에 왔니껴? 타작이 바빠서 오늘은 서울 못 갈시더.” 시위는 부엌으로 가서 집에서 담근 농주를 한 주전자 담고 술상을 보아 왔다. 늦가을이고 아침이라서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추운데 이리 와서 농주나 하시더” 형사들은 날씨도 쌀쌀한데다 순박하게 생긴 어른의 인심을 뿌리치지 못해서 시위와 함께 농주를 마셨다. 그리고 두 형사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위가 내온 술은 집에서 담근 술의 원액인데 이른바 전배기라 하는 독한 술이었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이었다. 정 형사는 볏짚 더미에 꼬꾸라져 있고, 동료 형사는 낟가리에 기대서 잠들어 있었다. 급히 정신을 수습하여 강시위를 찾았지만 그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경찰서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그들은 입을 맞추었다. 강시위 씨는 타작하느라고 집회에 가지 않았다고 보고하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선량하게 생기고 인정 많은 분이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형사과장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예, 강시위 씨는 타작 일이 바빠서 서울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무실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전국농민회 집회 소식이 방송되고 있었다. 농민들이 쌓아놓은 고추포대에 불길이 솟고 화난 농민들이 시위를 하는 장면이었다. 과장의 시선과 정형사의 시선이 티브이로 향했다. 텔레비전 화면 가득히 채운 얼굴은 바로 농민 대표 얼굴 강시위였다. 그때 정 형사의 볼에 불이 번쩍 났다. “야, 이자슥아, 타작하는 사람이 티브이에 나오나!” 정 형사의 경찰 생활은 강시위로 하여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