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백지장에 베일 때가 있다

상처를 지그시 누르고

그를 보면

그는 속도 없다

그저 얇디얇은

하얀 몸이

그의 전부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모두 백지 한 장이다

 

 

네 가슴에 못을 쳐서라도

네가 원하는 것을 걸 수 있게 해야겠다

 

사람浴

 

산림浴 일광浴 해수浴......

나는 사람浴을 하고 싶다

 

쥘 르나르의 뱀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오느라

몸이 길쭉해졌어

미끈미끈

눈도 쪼그만해졌네

이제 얼마나 자유로운지

몸이 너무 길다는 느낌도 안 들어

스르르

가는 대로 길

몸이 길

훤히

이 세상에

내 지도가 보이네

 

자전거 타기

 

초등학교 앞이다

조심조심

양손으로 브레이크를 꽉 잡고 간다

그런데, 앗!

한 아이가 앞으로 돌진해 온다

나는 얼른 멈춰 섰다

아이는 다다다다닥 뛰어 오다

내 앞에서 딱 멈췄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씩 웃자

그도 함께 웃는다

(이게 우리의 암호다 나는 아이 나라에서

어른 나라로 파견된 첩자다)

 

 

나무

 

씨앗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지금도 힘겹게 힘겹게 탈출하고 있다

 

집에 오다

 

현관문을 닫는다

꼬리처럼 따라온

검은 길을 뭉텅 자르고

폐휴지 빈병 빈 박스...... 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쇠똥구리처럼 밀고 올라가는

할머니의 환영도 지우고

검게 탄 몸으로

어기적어기적

따라오는 겨울나무도

모질게 돌려보내고

진눈깨비를 흩날리던

하늘도 보이지 않게

으- 으-

노숙자의 짐승 같은

신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찰칵 현관문을 잠근다

 

어린 시절

 

입술에서 끊임없이

검은 딱지를 떼냈다

급식 빵은 반쪽만 먹고

반쪽은 책보에 싸 두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과학자가 될 꿈을 꿨다

헝아 엄마 죽었어

복숭아나무 밑에 오면

겁이 났다

부스럼이 머리에 가득한 동생들이

빤히 쳐다봤다

 

유배일지1

- 용흥寺

 

나는 여기 용흥寺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알 수 없다

왜 여기

겨울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이 계곡에 옷이 다 벗겨진 채

갇혀 있는지

살결이 오소소 소름 돋으며

기뻐하는 걸 보면

꽤 오래 유폐된 것 같다

뭔가 목울대를 간질이는 게 있지만

나는 이 따스한 햇살에 익숙해져 있다

저 머리 파르라니 깎은 간수들도 나를 이제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다

가끔 팔을 활기차게 흔들며

내 곁을 지나치곤 하는데

이곳을 탈출하지는 말라는

무언의 암시, 경고가 아닐까

때 되면 정량의 밥도 주고

밤엔 꼬박꼬박 연탄불도 갈아 준다

아,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수리공

 

나는 수리공이야

고장 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면서도

은근히 고장 나길 바라는

고치는 걸 즐기는

개수대에 놓인 그릇들을

말끔하게 수리하여

찬장에 정돈하고

이 방 저 방 흩어진 아이들을

깔끔하게 수선하여

학교에 보내고

또 어디

손 봐야 할 데 없나

옷가지들이군

바닥에 먼지도 보이네

한참 수선 떨다

아함, 이제 나를

수리해 볼까

한잠 때리고

저 남자는 어떻게 하지?

에이, 머리 복잡해

고물이 되어 가는 남자

털털털 웃음 지으며

녹슬어 가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