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핀 같은, 오색구슬의 언어

 

이형권(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

 

 

이 시집에는 <시 없는 시집>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시가 한 편 실려 있다. 시의 내용은 “내 생애 통틀어/최고조의/환희를 선사했지요//당신,/모르핀 같은”이 전부이다. 이 짧은 시에는 시정신이 살아있지 못한 시에 대한 부정 정신과 현실의 고통을 위무하는 시에 대한 긍정 정신이 암시되어 있다. 시의 제목인 “시 없는 시집”에서 “시”가 일종의 작위적 형식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시집”은 그러한 형식을 넘어서는 어떤 근본적인 세계를 암시한다. 이 “시집”의 세계가 온 “생애”를 걸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조의 환희”라는 표현에는, 시(집)의 최고 가치는 피상적인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근본적인 삶의 인식에서 성립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시집”을 “모르핀 같은” “당신”과 동일시한 것은, 진정한 시는 속악한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고 망각하게 해주는 예술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시 없는 시집”의 내포적 의미는 껍데기의 시가 없고 알맹이의 시만이 살아 숨 쉬는 카타르시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이 형식적, 수사적 현란함을 배제하고 인간애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시정신의 차원을 지향하는 것도 “시 없는 시집”에 대한 추구와 관계가 깊다. 그 추구하는 마음이 진솔하고 열정적이어서 이 시집은 진정 ‘시 있는 시집’임에 틀림없다.

이 “시 없는 시집”에는 작고 초라한 것들에서 크고 빛나는 삶의 원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편들이 산재한다. 메타포를 운명으로 삼는 시에서 작고 초라한 것들은 위대한 삶이나 세계의 원리와 같은 관념적 본의를 발현시켜 주는 구체적인 비의에 해당한다. 실제로 관념적 진술은 세상과 삶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유도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미감에 기초한 구체적 감각과 정서적 감동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시인이 기본적으로 비유적 언어를 구사(해야)하는 것은 시가 비유를 통해 사상이나 관념을 예술적 감각으로 고양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가 예술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작고 초라한 것들을 매개로 삶의 역설적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시인이 실패한 인생, 소외된 사물, 추레한 사건 등속에 마음을 주는 것은, 그것들이 비록 현실적 가치는 미미할지라도 시적 진실이나 예술적 가치의 차원에서는 결코 미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생각할 때에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나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시가 무엇보다도 역설의 원리를 근본적 생리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의 몸은 비록 비속한 현실에 얽매여 있어도 그 영혼은 항상 탈속의 “피안을 넘겨다 본 흔적”(<왼손잡이 그녀>)을 지향하는 것이다.

김채운 시인은 작고 초라한 것들이 존재하는 장소를 ‘후미진 자리’라고 명명한다. 이 시집에 빈도 높게 드러나고 있는 ‘후미진 자리’는 현대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을 표상한다. 하지만 그곳은 다중적 존재들이 인간적인 진실과 아름다운 서정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다.

 

푸른 밤길 지나던

어느 칠칠치 못한 신이

흘리고 간 오색구슬 한 됫박

은하수 타고 흘러들어

하늘자리에 총총 박히었다

후미진 자리까지도 환하다

 

푸른 밤 지새우는

어느 눈 맑은 시인이

간간이 굴러 떨어지는 오색구슬을

결 고운 붓으로 쓸어 모아

꿈자리에 꼭꼭 담아두고 있다

마음 귀퉁이부터 환하다

 

―<시> 전문

 

시적 자아는 “시인”의 의미를 밤하늘의 별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어두운 하늘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그 별들은 “칠칠치 못한 신”이 흘려 놓은 “오색구슬”이라고 본다. 시적 자아는 그것들이 “은하수”의 거대한 흐름에 흘러들어가면서 “후미진 자리까지도 환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때 별빛을 비유하는 “오색구슬”은 삶에 대한 긍정적 가치로서의 평등과 박애 정신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후미진 자리”와 대비된다. 어느 곳이든 고샅고샅 파고드는 별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고 아름다운 곳으로 변모시킨다. 그런데 시적 자아는 이러한 광경을 시적 발견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어느 눈 맑은 시인”의 존재를 떠올린다. 그는 “푸른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어두운 세상 너머의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예술가이다. 그가 “오색구슬을/결 고운 붓으로 쓸어 모”으는 행위는 시를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 시의 “시인”은 시라는 것은 별빛과 같이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한 셈이다. 그래서 시를 “꿈자리에 꼭꼭 담아두고 있”으니 “마음 귀퉁이부터 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의 “시인”은 아마도 김채운 시인과 다르지 않을 터, 그녀가 이 시집을 통해 보여주는 시편들은 대부분 “후미진 자리”에서도 빛나는 “오색구슬”과 같은 것이다.

김채운 시인이 “오색구슬”을 찾아나서는 것은 세상의 비속성에 대한 성찰적 인식에 의한다. 그 인식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며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만들어 낸 반생태적 현실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물질문명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맹목적 신념으로 자연과 생명을 핍박해 왔다. 최근 발표된 어느 생태보고서에 의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종의 30퍼센트 가량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생태계의 질서가 교란된다는 것은 단지 자연의 위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연의 위기는 곧 인간의 위기로 직결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시인은 반생태적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다.

 

횟집 수족관 뜰채로 건져 올린 건

한 마리 활어(活魚)가 아니다

신음으로 팔딱이는 한마디,

활어(活語)다

 

부릅뜬 두 눈 부딪는

마른 허공에 대해

가까스로 아가미를 통과하는

날숨 들숨에 대해

뜯겨나간 비늘에 대해

난만한 꼬리지느러미에 대해

지리멸렬한 살점과

몸통의 남은 가시에 대해

 

생선으로 명명되는 순간

이미 내 것 아닌 목숨일 뿐

달려나간 바다는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싱싱한 미각을 위해

잘 저며진

신음 한 접시

 

―<불통 1> 전문

 

“횟집”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찾아가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 사람들에게 “횟집”은 싱싱한 “활어(活魚)”를 먹을 수 있는 곳이지만, 물고기의 처지에서 보면 전혀 다른 곳이다. 물고기에게 “횟집 수족관”은 자연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인간의 욕망을 위해 영어(囹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수족관”의 “활어(活魚)”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싱싱한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의 포악한 욕망으로 고통당하는 자연이나 생명을 표상한다. 그래서 “활어(活語)”의 “신음소리”는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향한 저항의 표상이다. 인간의 식탁 위에 “지리멸렬한 살점과/몸통의 남은 가시”로 남은 물고기의 “부릅뜬 두 눈”은 그러한 저항의 절박함을 표상한다. 시인의 눈에 비친 “잘 저며진” 물고기는 인간의 “싱싱한 미각”을 위해 희생당한 “신음 한 접시”일 뿐이다. 그래서 “수족관”의 “활어”를 싱싱한 생명으로 착각하고 식탐을 즐기는 현대인들의 삶은 잔악하고 이기적이다. 시인은 일상의 차원에 불과한 “활어(活魚)”에서 시적인 상상으로서의 “활어(活語)”를 연상하며 반생태적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적 인식은 거시적 차원으로 나아가면 “굴착기 우악스런 손아귀에 물어뜯긴/강줄기마다 신음소리”(<강물아, 흘러 흘러라>)와 같이 무모한 개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반생태적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비시적인 삶이다. 시적인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 모든 생물종들과의 호혜적 상생 관계를 추구하는 생태적 삶의 가치는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생태적 가치는 단순한 자연보호의 차원을 넘어 각박한 일상을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일체의 정신적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시인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현실원칙의 지배자인 “고집쟁이 괴물, 프로쿠르테스의 분신”(<내 머릿속에 괴물 한 마리 산다>)과의 싸움을 통해 고루하고 각박한 현실에서의 일탈을 꿈꾼다.

 

열네 살, 첫 달거리가 끝나던 날

월남전에서 왼다리를 잃은 삼촌의

자전거 훔쳐 타고 내달린 적 있지

숨 가쁘게 페달을 밟으면 두 바퀴에 칭칭

햇살은 감겨들고 한달음이면 솟구쳐 오르던

언덕배기 바람보다 더 빠르게

다리를 건너고 들판을 지나 아랫마을까지

 

되짚어올 만큼만 달렸을 뿐

마을의 반경 십 리도 벗어나지 못했네

떠남과 돌아옴의 경계 그 안전선 언저리에서

가슴 졸이며 머뭇거렸을 뿐

 

밋밋한 길바닥 같은 마흔 해

 

나 이제라도 길 잃어야겠네

해묵은 페달 기운차게 밟아

사뿐히 바람을 싣고 녹슨 바퀴살에

눈부신 그리움 챙챙 감으며

당신을 향한 일방통행의 길 좇아

삼천리보다 더 머나먼 세상 밖으로

나 이제부터

 

―<길, 잃어야겠네> 전문

 

“나”는 자신의 삶은 “밋밋한 길바닥 같은 마흔 해”라고 정의한다. 일상적 생활에 이끌려 온 삶의 “밋밋한” 상태는 “열네 살” 시절에 “삼촌의 자전거”에 의지하여 온 동네를 달리던 기억과 흡사하다. 그 시절에 “자전거”를 타고 “아랫마을까지” 내달려 보았지만 결국은 “마을 반경 십 리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동안의 삶도 “떠남과 돌아옴의 경계 그 안전선 언저리”에서만 맴돌았을 뿐 새롭고 자유로운 삶을 향한 모험을 실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시인은 마음을 바꾸어 먹는다. 그동안 안전선 안에서만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이제라도 길 잃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이 다짐은 일상에서의 탈출을 통해 자유와 예술의 세계에 진입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의 표현이다. 그래서 “당신을 향한 일방통행의 길”을 따라 “머나먼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 한다. 뮤즈를 지향하는 일탈의 욕망은 그동안 익숙했던 길을 잃음으로써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나”가 추구하는 새로운 길은 넓게는 통속적 일상에 얽매이지 않는 고졸한 삶이고, 좁게는 예술적 상상과 자유 영혼을 간직한 시인으로서의 삶이다. 아마도 김채운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도 이러한 삶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관계가 깊다. 그렇다면 그녀가 시를 쓰면서 발견하는 탈일상적 가치의 목록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상적인, 너무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비일상적, 탈일상적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김채운 시인의 특기이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할 줄 아는 시인이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주요 목록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일 터, 가령 아래의 시에서는 식생활의 한 장면에서 삶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뒷골목 허름한 식당 구석자리에

덩치 큰 짐 가방이 놓이고

둘러앉은 세 식구

가정식 백반으로

늦은 허기를 달래고 있다

 

닳아빠진 식탁귀퉁이 같은 무표정한 가장과

흐릿한 형광등에 점점 박힌 파리똥 자국처럼

얼굴에 기미 수북이 내려앉은 부인이

번갈아 아이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준다

그릇 부딪는 소리들 간간이 떠다니고

 

뒷가르마 또렷한 갈래머리 아이가

밥상 다 물리도록

의자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

높은 식탁 위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대하는

저, 공손한 자세

 

―<공손한 식사> 전문

 

이 시의 주요 소재인 “가정식 백반”은 일상의 밥이지만 일상성을 넘어선다. 시의 주인공인 “세 식구”는 “뒷골목 허름한 식당 구석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큰 짐 가방”을 들었고 “늦은 허기”를 채우는 것으로 보아 가난한 떠돌이 가족의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시인이 주목한 것은 힘겨운 세상살이에 찌들어서 “무표정한 가장”과 “얼굴에 기미 수북이 내려앉은 부인”이 아니다. 시적 자아가 마음을 주는 것은 이 가난한 부부의 “갈래머리 아이”가 식사를 하는 자세이다. 즉 “아이”는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대하면서 너무도 “공손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 광경은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넘치는 오늘의 세상에서 삶의 근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일용할 양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경건한 마음이 사라진 오늘날의 경박하고 통속적인 세태와 비교할 때 소중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밥”이 자연에서 얻은 생명의 근원임을 망각하고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인간 삶의 원천인 자연과 생명을 소홀히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다고 해도 결코 윤택한 삶을 영위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어린 “아이”의 “공손한 자세”는 아직 어리지만 저의 생명과 그 원천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지극히 사소한 식사 장면에서도 경건한 삶의 가치를 발견한 셈이다.

밋밋한 일상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일상이 지닌 통속적이고 속악한 속성 너머의 창조적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 가령 이 시집에는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인간 군상들이 적잖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시를 쓰기 전까지 김채운 시인에게 그들은 결코 관심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건대 그들은 비록 후미진 자리에 있는 궁색하고 비루한 것들에 불과하지만 삶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존재이다.

 

인력시장 부근 멈춰 선 버스에

허름한 사내 서넛이 오른다

 

하루를 허탕 친 고생보따리들

뒷좌석에 함부로 구겨진 채

 

밀려오는 허기 곱씹고 있는지

이따금씩 차창을 부딪는 마른기침소리

 

눈을 떠도 감아도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두터운 안갯속으로 순례 마치고 돌아가는 사내들

 

어제를 빼다 박은 오늘도,

술래

 

―<순례> 전문

 

시의 주인공인 “허름한 사내 서넛”은 “인력시장”을 떠돌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난 주변인들로서 매일매일 일감을 구해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 “고생보따리”와 “마른기침소리” 등은 그들의 신산스런 삶을 드러낸다. 얼핏 생각하면 무능력하고 운이 없는 삶의 주인공들이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인생의 깊이를 느끼며 사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사실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오늘날의 무한경쟁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무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한경쟁은 인간의 기능적 역할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 일종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비인간적 메커니즘이다. 그렇다면 무한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어쩌면 속악한 세태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인간적인 사람들일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도/술래”처럼 우리 사회의 궂은 역할을 담당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진지한 “순례”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랑은 단순한 동정심과는 구별된다. 동정심이 타자에 대한 우월적 자리에 있는 사람의 시혜의 감정이라면 사랑과 관심은 상호 공감을 바탕으로 한 상호 소통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김채운 시인이 이 시집에서 형상화한 어두운 자리의 인간 군상들은 대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떠받치며 살지만, 삶에 대한 진정성과 인간에 대한 진실을 간직하고 사는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칸칸이 궁핍을 들인 골목길”에서 “죽음과의 거리”(<녹슨 방>)를 좁히면서 살아가는 군고구마 장수, “허름한 역”에서 구걸하며 “세상의 어둑한 모퉁이를 표류하는/낮별 같은 가난한 부자”(<가난한 부자>), “버스정류장 모퉁이”에서 “국화꽃”을 파는 “말문이 트이기 전 목숨 대신/말소리 놓아버린”(<국화꽃을 굽는다>) 벙어리 노점상, “유예된 기다림으로 유통기한까지 살아내는” 구멍가게 주인 “구 씨”(<구 씨네 구멍가게>), “재래시장 한 모퉁이”에서 “쭈글쭈글 고욤살이”같이 한평생을 시장에서 “고용살이”(<고욤, 도대체>)처럼 살아온 행상, “버스정류장 모퉁이에/푸성귀들”을 팔고 있는 “고구마 퉁가리 같은 노인”(<손톱 밑이 까맣다>) 등과 같은 인간 군상들이 모두 그러하다.

탈일상의 가치를 발견하려면 현재보다는 과거나 미래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라는 시간이 각박한 현실을 제어하는 것이라면, 과거나 미래는 그러한 현재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시집에는 유년기의 아릿하고 아름다운 추억들이 산재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김채운 시인이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 의식이 강렬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년기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체험은 오래된 미래와도 같은 것으로서 현실에 복속된 삶을 정화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

 

저녁 비린내 곰실대는 살진 올갱이

소쿠리 그득 채워지면

사위(四圍)는 어둠에 그들먹해지고

저녁 짓는 연기 허공을 늘이고 있다

된장을 뚝 뚝 풀어 끓이는 올갱이국 냄새

싸리울 넘어 골목골목 쏘다니다

논둑길 기로질러 마실을 가는지

뒷마당에 멍석이 펼쳐지고

탱자나무 가시에 쏘옥 이끌려 나와

졸깃하게 씹히는 들큰쌉싸롬한 살점들

근대 아욱 어우러진 해장국에

시골밥상 들썩이며 허기를 내몰고 나면

포만감에 젖은 열사흘 달 불끈 떠올라

어두워지는 하늘가를 훔치어 내고 있다

파르스름한 올갱이 살점 같은 별들

빛의 똬리 회회 틀고 있다

 

―<그 여름날의 올갱이> 부분

 

“올갱이”를 잡아서 “해장국”을 끓여먹던 유년의 풍경이 아련하다. 이 시는 추억을 말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기억의 생동감과 현장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어렸던 시절에 시골 냇가의 “올갱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아주 요긴한 찬거리가 되어 주었다. 냇가에 “올갱이”가 자란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도 건강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정서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시절의 “그 여름날”에 “올갱이국 냄새”는 온 동네를 알싸하게 감싸고 돌면서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어 주곤 했다. “멍석”에 펼쳐지는 저녁 자리 위로 휘영청 “열사흘 달”도 떠올라 분위기를 한껏 돋우니, 먼 하늘의 “별들”은 마치 “올갱이 살점”처럼 푸르게 빛을 발한다. 이때 비로소 지상의 “올갱이”와 천상의 “별들”이 하나가 되는 우주적 식탁이 차려지는 것이다. 이 위대한 식탁은 오늘의 아파트 한 구석의 파리한 전기불빛 아래 차려진 것과는 전연 다르다. “별들”이 만든 “빛의 똬리”로 우주적 생태의 식탁이 차려지는 것이다.

유년기나 청년기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추억은 이 시집에 빈도 높게 드러난다. 이 시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오줌을 싼 잘못으로 “뒷문가에 세워진/네 살배기 계집아이”(<오줌싸개>) 시절의 추억이다. 이후 “수몰 전 고향동네 아홉 살 흑백풍경 속”(<팔도라는 사내>)에서 살았던 시절에서 “이월되지 않을 순수를 애도하며 가슴 밑바닥까지 헤집어 끌어낸 격정”을 간직했던 “스무 살의 봄날”(<1988, 그해 오월의 끝>)까지 다양한 기억들이 재현되고 있다. 기억은 비록 과거의 사건에 속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삶에 영향을 끼칠 경우에는 현재의 사건이 된다. 순수했던 과거를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순수성을 상실하고 통속적 가치에 매몰된 현재의 삶에 대해 성찰을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시집에서 남편이나 자식과 같이 현재에 함께 사는 가족보다도 부모로 대표되는 과거에 함께 살았던 가족이 자주 호명되곤 하는 것도 과거 혹은 유년기에 대한 호의의 마음과 밀접히 관계된다. 즉 “자박자박 보폭 좁은 어머니”나 “골목의 외등으로 선 아버지”(<허구한 날>)”의 생애는 모두 고달프지만 아름답고 따뜻한 것이었다. 이렇듯 유년기나 청년기의 순수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지배하는 “문법의 외투”를 벗어버리고 “실재의 알몸”(<하나밖에, 있어요>)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순수했던 유년은 물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지나간 시간이지만, 유년이 간직했던 순수함은 다시 추구하고 싶은 아름다운 가치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김채운의 시 쓰기는 이렇듯 속악한 현실에서의 일탈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녀가 일탈하고자 하는 현실은 개인적 차원의 고루한 일상사에서부터 생태계 오염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가 넓다. 그녀는 그러한 현실에서의 일탈을 위해 후미진 자리에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을 주면서 일상의 사소한 일일지라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변두리 인생들의 초라한 삶 속에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한다든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에서 오래된 미래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도 모두 그러한 의미 찾기와 관련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인이 세상을 새롭게 보려는 것은 결국 참신한 시를 쓰려는 의도와 일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능한 시인이라도 그 의도를 쉽사리 실현할 수는 없을 터, 사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진정한 시에 대한 부단한 도전 정신의 발로이다. 시가 일종의 예술적 이상에 대한 욕망의 형식이라면 그것의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시에 대한 부단한 부정 정신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만 한다. 시인은, 프로메테우스처럼, 운명적으로 세상과 언어를 향한 “철회하지 못하는/사랑”(<달>)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