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있는 풍경

 

 

진란

 

 

 

 

여러 해 묵은 가지의 틈을

헤집는 돌개바람

탄력을 잃은 목선의 주름진 고랑 사이

밤새 웅웅거리던 귀울음 앉은 딱지에서

하나씩 비집고 나오는 매화 꽃잎들

눈雪 속에서 파르르 떨고 있다

저렇게 핀다는 것은 독한 짓이다

생살을 찢는 일이 그만 있었겠는가

폭설의 냉골에서도

남보다 먼저 치맛자락을 펼쳤길래

철없는 햇살에 자궁을 열고

검푸른 마음 한 켠에 열매를 가지는 것이다

 

햇살 한 줌 부둥켜안고 하얗게 부풀어 오르고 있을

그 여자, 꽃구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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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돌아오는 저녁

 

진란

 

 

 

일상의 긴 그림자 지쳐 산모롱이 돌아오고 있을

노을에 기대어 하염없는 마음, 당신

아내는 어머니고 어머니는 아내였던

그 때 바람은 당신을 업어 어디를 서성이고 있었을

해름참 뜬 구름에 얹혀 있기도 하였을,

저런 남자가 없었을 익명의 시간이었을지도

 

그런 쓸쓸함을 안아 줄 해어화가 그리운 저녁이다

어찌 살아왔는지, 이마 모서리 내려앉은 희끗한 모발로

허전한 가슴에 옷고름을 매어보는 저녁이다

 

붉어진노을이마을어귀의아이들그림자를지우며

어머니의아궁이로건너와내력이영롱한식구들을

된장국의온기와쌀밥한그릇으로도란거리게하는

건너온시간과건너갈시간이정지되는흑백의사진

 

당신의 저녁은 그리움이 돌아오는 집이다

당신의 저녁은 추억이 머물고 가는 집이다

누구에게나, 돌아와서는

서로의 내력을 애틋이 하나로 엮는

저녁의 오래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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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똥의 철학적 고찰

-산토끼가 똥을 누고 산 뒤로 뛰어간* 후 산토끼똥은 철학자가 되다

 

진란

 

 

 

오래오래 울리는 이런 생각,

존재란 그런 것이다 가령

너와 내가 한 몸이라고 생각한 동안만

우리라는 울타리에 갇히는 것

관계란 그런 것이다 가령

너와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동안만

우리라는 벽에 서로를 가두는 것

교감이란 그런 것이다 가령

너와 내가 사랑하고 있었다고 믿는 동안

일어나는 무성의 울림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다 떠나고 오랜 후에는

맨숭맨숭, 지나가는 저 그림자만큼도 아닌

 

텅 빈 들판

 

멀리에서 바라볼 때의 들판은 비어있는 것 같아

들판 가운데 서서 하늘을 보거나 발밑을 보면, 거기

가득가득 너희들이 너무 많아,

그 속에 서로 부대끼면서 말이지

그런데도 똥일까, 토끼일까,

그 생각이 자꾸 숨이 차

쉬어가는 쉼표처럼

 

 

 

 

*송찬호시인의 시 "산토끼 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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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진란*

 

진란

 

 

 

 

장마가 길어진다고 하였다

지루하게 비가 쏟아졌다가 그쳤다 우기의 횡포이다

인사동을 걷다가 비를 피해 들어간 갤러리,

순간의 틈새,  파르르 피어난  너를 만났다.

팔의 힘을 빼고 내공을 실어 필살의 선으로 휘익

공간을 가르며 피어난 여백의 핏방울이 

빈 들에서 만난 소낙비처럼  영혼에 스민다

 

시간을 갈아 농도를 조절하는 붓의 힘으로

난을 친 적 있었던가

고쳐지지 않는 오랜 습성으로 살아온 마흔아홉수로

곡선이 멈추는 뿌리에 닿아본 적은 있었던가

뼈대도 없는 난의 문장과 행간을 짚어보기라도 하였는가

아홉수를 놓는 수壽틀에 너를 뜨며

난 잎을 울력하는 빗소리와도 맞장을 뜨고 볼 일이다

다짐하는 사이, 햇살이 난향에 앉는다

 

 

 

 

*난蘭의 한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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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비

 

진란

 

 

 

 

어디로 갔을까 그 많은 나비들

겨울을 어쩌고 봄 오면 너훌거리며

날아오는 것일까

둥근 꿈으로 고치를 짓고 동면하는 것인가?

수없이 보던 자연 다큐멘터리나

아이들 자연 백과사전에서는 잘 알 것 같은데

이 사소한 곳에서 막막해지다니

나비가 순간 동안거에 드는 것일까

햇살 고른 마루에서 꿈을 꾸는 것일까

-이웃집 나비가 니야웅 하품을 한다-

그 나비가 환한 봄날에

나비를 희롱하는 꿈을 꾸는 것인지

꿈의 그 나비가 고양이 등으로 들어가 버린 것인지

 

사라졌다

그리고 또 나타나고

어느 날 갑자기 다 어디로 가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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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연밭에서

 

진란

 

 

 

몸살은 적막하다

연잎이 연꽃잎을 받아내듯

제 몸의 살점 하나도 소중하여

저 만나러 오는 바람까지도 아끼는 일

그렇게 바람을 감싸 안는 것

욕심을 비우며 면적을 넓혀가는 일

 

여름,

몸살은 달콤하다

떨어진 꽃잎 멀기도 전에

제 그림자 비추어 절정의 순간을 기억하는 일

꽃 진자리 바리때에 연밥을 채워 가는 일

다음 생을 위해 뿌리의 힘을 키우며

무게를 비워가는 일

 

하여, 몸살은 하안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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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노는 숲

 

진란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지고

그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다시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 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창경궁 홍화문을 지나서 춘당지로 가는 숲 속에 흐르는 물길, 옥천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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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한 잔의 당신

 

진란

 

 

 

 

문득 잊고 있던 꽃잎을 뜨거운 물에 띄워본다

오래 눌려있던 향기가 피어난다

들에 피면 들국화로 알던 당신, 이름을 알고 난 후

낯선 산길을 가다 마주치면 오랜 지기처럼 향기롭고

바람결로 들어도 그리운 이름처럼 다정하다

만나면 헤어지고 긴 노독의 시간을 견디어야

후생으로 만나게 될, 그 때 그 꽃은 아니라지만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피어나고 또 피어나고

내 옆에 항상 있어주었으면, 다른 데 눈길 돌리지 말고

나만 보아 주었으면 구구절절 애닳아지는

 

그런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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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누가 지나갔다

 

진란

 

 

 

 

숲을 열고 들어간다

숲을 밀고 걸어간다

숲을 흔들며 서있는 바람

숲의 가슴에는 온전히 숨이다

숲을 가득 들이쉬니 나뭇잎의 숨이 향긋하다

익숙한 냄새, 킁킁거리며 한참 누구였을까 생각하였다

그대 품에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금세도

이 숲에 스며들었었구나

개똥지빠귀 한 마리 찌이익 울며

숲 위로 하늘을 물고 날아갔다

어떤 손이 저리도 뜨겁게 흔드는지

숲이 메어 출렁, 목울대를 밀고 들어섰다

거미줄을 가르며, 누군가 지나갔다

붉은 것들이 함성을 지르며 화르륵 번졌다

숲을 밀고 누군가, 누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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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비상에 대하여

-배우 이은주*

 

진란

 

 

 

 

말하지 마

줄 하나 의지하여 날아가 버린 것에 관하여

철렁,

떨어져 내릴 때의 날개의 무게에 관하여

 

알을깨고나오던애벌레의삶이

푸른수액으로몸을채워고치가되었던통증이

눌린날개를펼치다만나비의삶이었다고

표본실에포르말린으로박제가되기전에

더높이

비감하게날고싶었던거라고

제발

피다만꽃이었다고

그만큼만피고싶었던거라고

거기서만머물고싶지않았을뿐이라고

날개를찢기면서까지머물고싶지않았던세상에대하여

우울한각서한장남겼을뿐이라고

 

한 세상을 닫기 위하여 날개를 찢어야만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쉿!

 

 

 

 

 

 

 

 

* '오! 수정'(2000), '번지점프를 하다'(2000), '하늘정원'(2003), '연애소설'(2004), '태극기 휘날리며'(2004) '주홍글씨' (2005) 등 작품을 남기고 25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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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진란

 

 

 

 

나는 바람처럼 날아가요

푸른 숲의 저 잎 하나하나 눈여겨

날개에 새기면서 날아가요

날다가 푸른 잎들의 이쁜 짓을 생각하면 힘이 나니까요

맑은 햇살에 몸을 헹구고 하나의 바람만을 말해요

그 눈빛으로 숨을 불어보아요

당신에게 가고 싶어

햇살 한 올 한 올 풀어내어 당신의 몸을 묶고

당신의 가슴에 전각을 새길거야

그리고 몸을 떨면서 그 이름을 부를거야

이 헛된 바람의 끝이라고

팔베개의 아슬한 춘몽이라고

 

당신 손바닥에 잠시 머물다

난 또 날아가요 그 눈짓에 멍이 들어서

따스했던 순간이 이생이었기를

보드라운 꽃잎의 바람이었기를

나는 바람으로 날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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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2

 

진린

 

 

 

 

묻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길래

망초라 했을까

무성한 꽃대들의 손짓 너머로

실족한 남자가 휘뚝휘뚝 걸어간다

어쩔 수 없었던 허방

마음껏 뻗을 수 없었던 걸음이 주춤거린다

남루한 목숨으로 모질게 남아

묵정지에 와서는 망부가忘婦歌로 피는구나

한때는 젊음과 열정의 카르페디엠,

치열하던 노선도 놓아버리고

서울역 광장이며 지하에 피어난 무심한 꽃들

어쩌면 우리네 남편이었을

아니, 우리 아이들의 아비였을

저 하얀 소금꽃

지천으로 피어나는 백귀白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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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풍경

 

진란

 

 

 

 

외로운 그대가 서서 바라보는 그 곳은 먼,

우리가 아직 닿지 못한 곳

즐거운 내가 누워서 꿈꾸는 그 곳은 가까운,

우리를 쓸어간 바람 같은 것

그대와 내가 기다리는 것은 여기, 혹은 저기에

나비거나 꽃잎으로 팔랑팔랑 흩날리는

귀울림 깊어지는 늦봄 뻐꾸기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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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진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꽃도, 나무도, 별도 달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미움도, 원망도, 회한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랑도, 미련도, 눈물도 아니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첫봄처럼 개나리봇짐을 메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타오르는 꽃불을 들고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문을 통하여

손에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네, 사람 사는 세상이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어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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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귀

 

 

진란

 

 

 

 

가끔 시가 안된다는 말을

사람이 덜 되었다는 말로 듣는다

더러는 사람이 덜 되었다는 말을

욕심없이 무지랭이 같다는 말로 듣는다

그래도 밟히면 꿈틀 할 걸?

아하 그건 본능적이야

본능적이라는 말 왜

말초적으로 반응한다는 말로 들릴까

제 듣고 싶은 말을 들으면

후벼파고 싶을 만큼 가렵고

제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온 신경이 곤두서서 전사가 된다

그리운 귀, 고高 귀貴는 어디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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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시

 

진란

 

 

 

 

꽃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발바닥과 무릎과 종아리, 목과 등과 팔뚝이 쑤시고 아파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인을 만난 날이라

심장까지 저미지 않는다

사람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쓸 말은 하나도 없이 쓸모없이 주절거려 쓸쓸하다

사람꽃은 스치는 바람결같이도 상처를 남긴다

말없이도 웃고 속없이도 실컷 웃고

입술 끝이 귀에 걸리게 웃고 들어온 날

내 뒤를 따라 들어와 끝내 울게 하는 것은

사람꽃 속에 함께 있던 바로 나, 내 그림자들이다

행여 지나치는 말로 과하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직설화법으로 말한다며

깊이 박히는 비수를 꽂지 않았을까

내가 받은 비수들을 뽑아내면서 어쩐지 나는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것이다

 

꽃을 본다는 일

사람꽃을 본다는 일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

시퍼런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무법자같은 말

향방없이 달려왔다가 달려갔다가

봄햇살처럼 뜨겁기도 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면 그래 나도 너를 무시하면 된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

바람은 내 안 중심부터 소소하게 흔들리더니

꽃바람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기도 하고

내 귀가 바람의 중심이었다는, 그런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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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 기억

 

진란

 

 

 

 

  떼 지어 놀던 고추잠자리

  울타리에 앉아 졸고 있다

 

  깜빡할사이나무가자라고햇살이맴돌고미끄럼을타고내려

오는바람사뿐히시소를구르는구름삐그덕거리는녹슨그네와

낙엽에묻혀굴러다니는담장의페인트조각땅거미기어드는모

래밭에는꼬막각시의앙징맞은살림살이가어지럽고아이들의

높은웃음과울음이뛰어다니던놀이터에아이들이 없다

 

  가방을바꾸어가며학원을돌다달빛을이고돌아오는아이,웰

빙으로다져지는사각의균형으로아파트의벽은단단해지고,부

모들은공들인탑을더높이올려그들만의영역을과시하고,24시

와0시에옭아매어진아이들은새로짜여진가계의족보와성별된

눈높이에맞추어성주가되는훈련을받는다,좋은줄과나쁜줄을

구별하는눈치를익히고,모국어도채익히지못한아이들의혀는

외국어와더친숙하고체지방으로비대해진도시는놀이터와운

동장을헐어내고황금캐슬을쌓는다

 

  어른들의 소싯적 이야기만 남은,

  해그늘에 밥 먹어라 소리치던

  유년의 그 목소리 지금도

  뜨.거.운.데.

 

  놀이터는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돌아가 쉴 곳이 없다

 

  울타리에 앉아 졸던 잠자리

  붉은 노을 속으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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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 대한 오해

 

진란

 

 

 

새들의 본적은 잘못 적혔다

새가 평생 허공을 나는 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비감이거나

살기 위해 아슬한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다

 

새들에게 모든 길이 열려진 것은 아니다

몸에 새겨진 오랜 습성으로 길을 떠나는 것

위험을 경계하고 길을 내는 사냥터일 뿐

날개 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지말자

땅을 딛고 나무에 내리고 바위에 둥지를 틀고

수풀 속 은신처로 보호구역을 만드는 일

생을 위해 혹은 새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새일 뿐이라는 것

 

누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했는가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간다

온 생을 다한 것들이 단 한번 날아

하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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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묻다

 

진란

 

 

 

 

길 위에 서 있을 때, 나 또 하나의 길이었다

꽃을 바라보고 그를 불러줄 때, 나 또한 꽃이었다

바람 밖으로 가열찬 마음 밀어낼 때에도 난 바람이었다

햇살 받쳐주던 푸른 잎새들이 내 머리에 머물 때

그 잎새 밖으로 난 길을 따라올라 구름으로 가벼워지고

먹장구름 기대어 무거워질 때에는

함께 둥둥거리며 뜨거운 불볕, 그 하늘에서 시렁거렸다

한낮 반짝, 한번씩 소나기로 쏟아지기도 했다

비워지고 가벼워지고 길 위에 다시 서있으면

어김없이 꽃들은 꽃 속으로 나를 숨어있게도 하였다

치렁거리는 이 기억이 한때는 설레임이었고

구석으로 우우우 몰리던 때 이른 나뭇잎들은

꽃잎과 함께 바스락거리며 길 위의 바퀴처럼 눈부시다

어쩌다 나는 길이 되어 있는지, 다시 누군가의

길과 맞닿아야 하는 수레의 흔적을 굴러가는지

길 위에서 길을 꿈꾸는 길치, 그 부림의 날을 바라노니

가멸한 마음으로 길을 가고 또 오고 또 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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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건너는 이유

 

진란

 

 

 

1

 

낙타를 타고 붉은 사막을 건너고 있어요

쏟아지는 땡볕에 온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아도

밤이면 뼛속 저미는 추위에 살결 고운 여자가 그리워요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면 속살대는 모래의 이야기가 들려요

살아야 하는 이유, 이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간절한 명분이 생기는거에요

보세요 그 여자의 뽀얗고 둥근 둔부가 눈부셔요

고비, 너머에 신기루로 떠있어요

저기까지는 가야해요 고비 너머

대오를 물고 가는 악다구니의 사내

그 바램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푸른 새벽의 낙타는

사막을 건너가는 거라구요

 

 

2

 

너무 오래 걸었다

이제 무릎연골이 녹아 휘도록 걷는다

 

황사가 길 끝에서부터 내달아

돌개처럼 온 몸에 부딪히고

말린 눈썹에 모래먼지가 눈꼽으로 뭉칠 때

갈증은 등골을 돌아 꼬리뼈로 흘렀다

길 끝까지 가야하리라

새벽빛에 얼금얼금 뼈가 시리다

이 고비를 어떻게, 지나야 하나

고비마다 천년의 닝샤寧夏 서하의 희미한 실크로드

말 달리는 족속은 다 어디로 갔는가

고비의 꿈속에 가끔 묘음새 날아와

카라호토와 초록색 커다란 뱀과 칭기스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게르의 남루조차

타인의 땅을 빌어야 하는 영광의 뒤안

마두금 흐르는 초원의 몽골, 칸의 슬픔을 지저귄다

 

너무 오래 걸었다

사막에서는 메말라 죽는 게 아니라

바등대는 갈증을 덮치는 거대한 폭우에 빠져 죽는 것이다

몬순을 건너기 위해서는 입 속에 침을 가두어야 한다

비바람과 구름의 냄새, 혹은 우기를 알아차려야 한다

졸음을 쫓으며 가는 고단한 몸뚱아리가 되어야 한다

유목의 자유로움과 떠남과 비움에 대하여

긴 밤과 지루한 낮과 하루치의 하루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

 

 

 

3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파고드시길 권합니다,

모래 위를 나뒹굴며

눈발로 내리는 수만의 나비이거나

황금의 전갈들이 불개미 떼가 되어

걸어온 걸음의 모든 길을 에울지라도

설마, 독이 온 몸을 스스로 번졌다고

꺼져들어간 옛 성들처럼 감추어져서는 안 되니까요

 

모래성을 쌓았다 흩는 차도르의 여인처럼

제 젖무덤을 키우는 바람만이 애인일 뿐인

낙타의 지극한 속눈썹 속으로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린넨으로 온 몸을 감은 미이라의 마른 몸과

부스스 날아가 버린 흰 뼈들이 낮달로 떠올라

거대한 이빨로 당신의 등을 누를 때

무겁다는 비명을 질러서는 아니 되겠지요

 

날아가십시오

파고드십시오

녹아버리세요

이유는없어요

살아야한다는

 

파라독스도 없답니다

패러디도 없답니다

파라다이스도 없답니다 오직

새벽에 뜬 이국의 푸른 달과 사막나비들의 유영

자신의 몸과 당신들의 짐을 나르는 낙타의 묵묵한 침묵

사막을 배후로 사는 모든 숨막히는 삶에게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그 곁을 지나는, 당신은

그림자일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