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

 

데이비드 로렌스

 

나는 자기 연민에 빠진

야생 짐승을 본 적이 없다.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얼어 죽어 떨어질 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전혀 슬퍼하지 않으리라.

 

 

태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찾아나서는

짐승과 달리

 

아기는 한동안 누워서 지낸다.

누워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산다.

 

아기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아기의 마음이 한껏 부푼다.

풍선처럼 둥둥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다 한순간

바람이 빠져 추락한다.

 

커서도 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 봐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아무도 봐주지 않으면

자신을 학대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려 한다.

 

 

허영자

 

꽃아

정화수에 씻은 몸

새벽마다

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

그 어둠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우리의 희망은

끝내

육체이다.

 

영혼의 집은

육체.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육체에서

영혼이 피어난다.

 

욕정의 불길은

육체에서

영혼을 빚어낸다.

 

 

 

악한 자의 가면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 방 한 벽면에는 일본 목제품이 걸려 있다.

금색 칠을 한 악마 형상의 가면이다.

전율하며 불거져 나온 이마의 핏줄을 보고 있으면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낀다.

 

 

남을 저주하는 사람은

자신의 입에 독을 머금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모든 사람은

알고 보면

내 안의 검은 내 모습들이다.

 

살아오면서

억울하게 혹은

영문도 모르고

당해 온

상처투성이의

내 모습들이다.

 

그래서

사랑은

자신과 남을 향해

동시에 행해진다.

 

 

커브

폴 엘뤼아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우리는 왜

금기를 위반해야 진실에 이를까.

숨 막히는 전율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죄의 강.

그 심연의 강을 건너야 

우리는 진실에 이르게 되는 걸까.

그것은

인간이 금기를 만드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누추해져버리기 때문이다.

누추해져 버린 일상 너머의 금기의 영역. 

그 영역은 신비의 빛으로 가득 차오른다.

 

저 신성한 세계로 가기 위해선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

죄인이 되어 금기의 강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우리는 그 강이 허상임을 깨닫는다.

거기엔 강물도 없고 빛도 없다.

 

아, 그 순간

우리의 누추한 일상이

신비의 광휘에 휩싸인다.

우리는 홀연 깨닫는다.

이 세상이 화엄(華嚴)이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황인숙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만일 새가 없었다면

우리는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은 

우리 머리 위를 짓누르는 

딱딱한 물체였을 것이다.

 

우리가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자

 

하늘은 굳었던 몸을 풀고

해와 달이 돌고

구름이 오가고

별들이 총총총 빛나게 되었다. 

 

 

 

부두 위

토머스 흄

 

 

한밤중 고요한 부두 위

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

달이 걸려 있다. 그처럼 멀어 보이는 건

놀다 잃어버렸던 어린 아이의 풍선뿐이다.

 

 

우리가

어릴 적

잃어버렸던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과 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고

다시 찾고 싶으면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하늘은 거대한 거울이다.

 

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하늘에 비치고 있는 것이다.

 

 

봄 구경

환성 지안

 

 

지팡이 짚고 깊은 골 따라,

홀로 걸으며 봄 경치 즐긴다.

돌아올 땐 꽃향기 옷깃에 배어,

나비가 먼 길 사람 따라 오네.

 

 

봄 산에 올라

꽃향기가 옷깃에 밴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까?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대부분은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간다.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건

내 삶이 되지 못한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이방인

샤를 보들레르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부모? 형제자매?

내게는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다.

친구는?

너는 내가 그 뜻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다.

조국은?

나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미녀는?

불멸의 여신이라면 사랑할 수도 있으련만.

돈은?

싫어한다. 네가 신을 싫어하듯이

그럼 도대체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 불가사의한 이방인이여!

나는 구름을 사랑한다… 저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흰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것들도 다 사랑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은 맑게 흐르고 있기에.

 

누구에게

무엇에게

다가가도

사랑의 손길이 된다.

 

하지만

가족을 국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가족도 국가도

다른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

 

가족에게 매인 마음

국가에게 매인 마음은

굳어 있기 때문이다.

맑게 흐르는 마음만이

사랑의 손길이 된다.

 

 

파장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 새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원시 사회에는

권력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

정치를 하는 수장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권력을 가진 왕이 등장했다고 한다.

 

왕이 등장하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권력 관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간과 인간이 권력 관계로 만나면

전인격적 만남이 되지 못한다.

만나도 흥겹지 않다.

 

인간의 본성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은

권력과 거리가 먼

‘못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

그들은

진한 인간의 향기를 풍긴다.

 

 

대추 따는 노래

이달

 

이웃 집 어린 아이가 대추 따러 왔는데

늙은이 문 열고 나와 어린 아이를 내쫓는구나.

어린 아이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진 살지도 못할 걸요.

 

 

대추를 따는 아이와

대추를 지키려는 할아버지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감돌지만

그 긴장엔 여유와 해학이 있다.

 

아이는 아이답게

대추를 마구 따먹으려 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대추가 온전히 자신의 것만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대추나무는 사실

하늘과 바람과 비와 땅이

기른 것 아닌가?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인류는

만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처럼

함부로 사고파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술꾼 봉도

이동순

 

흰 눈은 나려

고죽 마을을 덮었는데

새알산도 하얗고

밭엔 못 뽑은 배추가 그대로

눈 뒤집혀 썼는데

이런 날 봉도는 술 생각이 나서

땅 속에 어찌 누워 있나

 

속알못 쪽

봉도 무덤으로 가는 길도

이미 눈이 파묻혔다.

 

오늘 같은 날

봉도는 필시 누웠던 땅에서 일어나

머리에 눈을 맞으며

주막집으로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으리라

 

 

술을 마셔

몽롱하게 되면

(엄마의 품처럼 포근해지면)

 

우리 안의 아기가

깨어난다.

 

아기가 깨어나면

어른답게

사는 사람은

순수하게 되고

 

어른답지 않게

사는 사람은

유치하게 된다.

 

봉도는

어떤 술꾼일까?

 

 

일곱 걸음에 지은 시

조식

 

콩깍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콩은 가마솥 안에서 우는구나.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 이다지도 급히 삶아대는가.

 

 

인류 최초의 살인은

형제간에 일어났다.

 

가부장 사회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진 존재다.

자식들은 그것을

갖기(이어 받기) 위해

서로 간에 싸움을 한다.

 

아버지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싸움은 더 치열해진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잘난 아들을

더 사랑한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큰 그늘을 드리운 거목이다.

 

 

독나무

윌리엄 블레이크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다.

내놓고 말하니 화가 사라졌다.

나는 적에게 화가 났다.

참고 있으니 화가 자라났다.

 

나는 두려워하며 내 화에게

밤이고 낮이고 눈물을 뿌려주었다.

미소와 간계로

내 화에게 볕을 쬐어 주었다.

 

그러자 화는 밤낮으로 자라나

빛나는 열매를 맺었다.

나의 적은 빛나는 열매를 보고

그것이 내 것임을 알아보았다.

 

어둠이 세상을 가리었을 때

그는 내 정원으로 살며시 숨어들었다.

아침이 왔을 때 나는 기쁨에 차서

나무 아래 뻗어 있는 내 적을 보았다.

 

 

어떤 인디언들은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걷는다고 한다.

바람과 대지가

그의 화를 걷어갈 것이다.

 

우리는 화가 나면

어떻게 하나?

화를 내면 남을 상하게 하고

화를 참으면 내가 상한다.

 

화를 내지도 않고

내가 상하지도 않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은 화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다.

화났을 때 화난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마음을

선악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화난 마음은 서서히 가라않는다.

파도가 잦아들듯이.

 

 

또 다른 고향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고향은 편안하다.

엄마의 자궁 같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을

꽃 피우기 위해선

우리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

 

위대한 정신은

우리의 등 뒤에서

채찍질을 한다.

 

어서

고향을 떠나라고.

 

우리는

혼의 고향을 찾을 때까지

방황할 것이다.

 

 

사람 지나간 발자국

이경림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옛날 성자들은

매 맞는 노예들을 보면

자신들의 등에

채찍 자국이 깊게 났다고 한다.

 

한 사람의 마음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사람은 살다보면

여러 문제에 부닥친다.

 

그때마다 그 문제들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풀어가는 사람은

점점 큰 사람이 된다.

 

하지만

자신만의 문제로 보며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은

점점 작아지게 되어

결국은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감자 꽃

권태응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어릴 적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다들

처음 본 것들이니까.

그러다

차츰 익숙해지면서

그들은 더 이상

신비의 빛을 뿜어내지 않는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가 만나는 것들은

다 처음이다.

해도 어제의 해가 아니고

사람들도 어제의 그들이 아니고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다.

 

다들

처음이니까.

해를 해로 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그들로 보지 말아야 한다.

나를 나로 보지 말아야 한다.

 

 

소스라치다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우리 눈에는 왜

다른 동물들, 천지자연이

무서워 보일까.

 

그건 우리 마음이

그만큼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을 잘 관찰해 보면

그들은 그렇게 무섭지 않다.

 

원시인들은 우리처럼

잔인한 전쟁을 하지 않았고

짐승들도

이유 없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천지자연도

그들의 길만 함부로 막지 않으면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약점을

남에게 투사하는 존재이다.

 

 

매우 가벼운 담론

조말선

 

 한 쌍의 질문을 새장 속에 가둔다. 시금치를 먹고 크는 질문 한 쌍. 멸치를 먹고 크는 질문 한 쌍. 모이를 줄 때마다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우리는 언제 날 수 있죠? 언제 대답이 되죠? 새장은 날마다 작아지고 있다. 질문은 구슬프게 노래부른다. 질문의 깃 속에 질문을 파묻고 잠든다. 질문들은 성숙해진다. 질문들은 스스로 대답을 낳는다. 새장 속에 한 개의 둥근 대답이 있다. 스무 날 품은 대답. 의혹이 품은 대답. 대답 속에서 촉촉한 질문 하나가 태어난다.

 

 

새가 질문을 하는 한

그는

진짜 원하는 답을 들을 수가 없다.

 

그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는

새들의 역사와

새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억되어 있다.

 

그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그의 몸은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다.

 

 

표절

김경미

 

우리는 매일 표절 시비를 벌인다

네 하루가 왜 나와 비슷하냐

내 인생이

네 사랑은

그렇고 그런 얘기들

 

밤 전철에서 열 사람이 연이어 옆 사람

하품을

표절한다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내 것이라고 당당히 우길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 다녀와서

사 온 물건을 꺼내 놓는데

아이가

‘엄마, 나도 가져 왔어.’ 하며

과자들을 꺼내 놓더란다.

아이는 모래밭에서

예쁜 조약돌들을 줍듯

과자 봉지들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눠 쓸 수 있으면 좋겠다.

특히 예술가가 예술품을 만들면서

돈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끔찍한가!

그 예술품의 가치 중에

예술가의 몫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조 혜능의 게송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마음의 거울은 틀이 없네.

본래부터 텅 비어 있는데,

그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건

지금 이 순간이

진리의 꽃으로 가득 피어난다는 건

명상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면

다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금방 지나고

우리는 다시

고통의 바다에 빠져들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을 숭배하는 세상이라

혼이 물질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마저 환영이다.

우리가 물질을 숭배하지 않으면

물질은 제 무게를 잃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현자는 말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면

그곳에서 진리가 피어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