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自序

정상도

정상일 때

정상이라고

등급을 매겨주어야

비로소 정상

자기야,

맨날 입때까지

조율도 되지 않는

잡동사니를 조몰락거리는

굴왕신같은 내 등짝을 치며 짐짓

‘정상正常!’이라고 소리쳐줄래?

2012년 이른 봄

큰섬마을에서

차영호

 

차영호(車榮浩)

1954년 충북 청원 출생.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사)한국작가회의, (사)우리시진흥회, 무크지『문학만』, 시동인『푸른시』, 대구경북불교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시집「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애기앉은부채」「바람과 똥」등

youngghc@hanmail.net

790-824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도동 512 상도빌라 303

 

 

<서 평>

 

과 길에서 울리는 말의 비늘들

—차영호* 시집 『바람과 똥』

 

손창기

 

 

얼마 전 중국 베이징에 간 적이 있다. 명 ․ 청 시대에 황제들이 제를 지내던 곳으로 유명한 천단공원의 회음벽(回音壁)이 소리를 가둘 수 있는 것은 담벼락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벽면이 매우 매끄럽고, 벽 위에는 기와를 얹은 처마가 있어 소리가 분산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울리는 소리와 바깥세상의 경계에 처마가 존재하는 셈이다. 이런 예는 일찍이 우리나라 범종(梵鐘)에도 있었다. 절에 가면 필자는 종구(鐘口) 안쪽을 만져볼 때가 많다. 안으로 오므라들게 처리되어 있는데 만져보는 촉감도 촉감이려니와 소리가 아직도 여기에 갇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종구가 오목한 형태를 이룬 것은 종의 공명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배려한 의도적인 장치로 추측된다. 이는 좋은 종소리의 음색을 결정짓고, 소리를 은은하게 울리는 여운을 가져다준다.

회음벽에 있는 기와 처마나 종구 안쪽의 오목한 부분은 바로 시의 경계선이 아닌가. 시인이 밤새도록 시를 써 마음속에 공명(共鳴)으로 한 번 걸러내고, 독자에게 떠나보내는 것과 같다. 종의 바로 밑 움푹 파인 공간, 즉 울림통(혹은 鳴洞)은 다시 한 번 공명 진동을 일으켜 여운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고 보면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은 중국의 회음벽보다 한 수 위다. 종소리도 이러할진대, 제 몸을 통과하는 고통의 언어를 맑고 아름답게 여과시키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 자폐적인 시가 난무하다. 시인조차 시를 해독하기 어렵다면, 그 시의 독자는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대중이 아닌 시를 읽는 특수집단이라도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인만이 시를 짓고 시인만이 시를 읽어야 하는 독자인가. 차영호 시인은 시어를 조탁하고 은은한 여음을 내기 위해 명동자리를 깊게 파고 시의 수명을 늘어나게 하려고 애를 쓴다.

 

1. 향토의식과 시공간 확장

 

“물끄러미 포항에 살”면서, ‘포항’이라는 지역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차영호 시인의 시적 전략이다. 차 시인의 시는 상당수가 향토의 유물 유적이나 촌락에 뿌리를 두고 그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데 있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대한 집착이 이번 시집을 엮어내게 한 것 같다. 지역에서 내는 ‘포항문학선’ 시리즈 세 번째로 시집을 발간한 것도 이런 계산이 깔려 있다. 그의 공간의식은 과거의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기보다는 현재에서 미래의 시간을 읽어내고자 하는 무한한 시간의식에 가 닿는다.

그의 시는 주로 길 위에서 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마살 낀 사내는 영감을 찾아 떠나는 길 위에서 “대대로 구전된 샛강을 추억처럼(「길」)” 헤매기도 하고, “발치에서도 부끄부끄 티눈 돋"우며 발자국 같은 길을 괴춤에서 꺼내놓는다. 특히 제1부에 배열된 시들의 대부분이 향토 공간에 실재하는 삶의 방식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기억의 주관성에서 벗어나 현장성을 확보하는 미덕을 보여주는 지점에 놓여 있다. 장소를 시제로 내세운 「포항중성리신라비」, 「옥녀봉」, 「학달비재를 넘으며」, 「오월 구만리」, 「고석사 석감미륵불의좌상」, 「통점재를 다시 넘다」, 「기청산 일우(一隅)」, 「하옥에서 달산까지」, 「대도동 512번지」가 있는가 하면, 시 속에 지명이 등장하는 “흥해 덕장(「비상(飛翔)」)”, “어래산 북사면(「삼월」)”, “운제산 오르막길 쇠전봇대 아래(「얼굴을 벗다」)”, “꼭두방재 넘어 대곡지 가는 길(「태풍 매미, 그 이튿날」)”, “먹등대가 보이는 구만리(「동족(同族)」)”도 있다. 지명에 대한 서사와 서정을 읽다보면 포항 지지(地誌)를 펼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실제 필자는 이 시집을 읽고, 포항시 장기면에 있는 고석사 석감미륵불의좌상을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죽도시장 복개된 칠성천 배수갑문에는

쇠말뚝 여남은 개가 도열해 있고

쇠말뚝 하나에 한 마리씩 갈매기

앉아, 똥을 눈다

솟대 끝 나무오리보다 오래 곰삭은 자세

바람이 불면 풍향계처럼 일제히

바람 부는 쪽을 본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바람

똑바로 쳐다보기나 하겠다는 걸까

 

천만의 말씀

뒷바람에 화라락

깃털 날려 똥칠하면 흉하잖아요

우리네 새대가리 깜냥으로도 낯 뜨거운

세상, 여기 앉아 조감하면 빤히 들여다보이지요

어제는 가랑잎만 바스락거려도 풍비박산

오늘은 또 무슨 바람 불어 한통속에서 끙끙

호호호, 먼산바라기 솟대 끝 나무오리도

콧방귀 뀝디다

 

—「바람과 똥」전문

 

 

포항 사람들의 삶을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죽도시장이다. 재래시장은 대형할인점,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시장의 기능마저 퇴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직도 가슴 넉넉한 사람들이 있고 형편에 맞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이 있다. 뱃고동 소리가 들리고 시장을 바탕으로 갈매기가 살찌는 활기 넘치는 공간이다. 그 풍광 속에 갈매기는 풍향계처럼 바람 부는 쪽을 바라본다. 절대로 바람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트는 법이 없다. 그 이유인즉 “뒷바람에 화라락/깃털 날려 똥칠하면 흉하”기 때문이다. 새대가리 깜냥으로도 빤히 보이는 세상을 인간은 바람에 따라 휩쓸려 다니니, 콧방귀 뀌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갈매기에서 솟대 끝 나무오리로 대상이 옮겨진 것은 오리라는 동물이 육(陸), 해(海), 공(空)을 대표하는 새라는 점에서 날짐승의 대표 격이기 때문이다. 날짐승의 입장에서 인간의 해바라기식 처세를 희화했다는 점에서 지역의 공간은 보편성을 획득한다. 한 삶의 풍경으로도 입가에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우리에게 성찰의 자세를 읽게 하는 것 또한 시의 묘미다.

성찰의 문제는 협소한 공간에서 벗어나 현실의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다. 포항시 신광면 호리못을 뒤집어엎던 태풍을 견디어낸 홍시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자살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초라한 존재를 감싸 안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적으로 왕따시키는 현실을 시인은 직시한 것이 아닐까. 홍시가 자살 사이트에 가입한 모양이다.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아요 외로워요 까막까치밥으로라도 남아있기에는 얼마나 더 캄캄해야 할까요 힘껏 졸라 줘요 가까스로 당신이 내민 올가미에 목을 들이민 거예요 장대를 흔들어요 비틀어요 잡아당겨요 오늘은 음력 구월 초사흘, 엷은 귓불을 뚫고 코끼리를 매단 당신의 생일, 준비된 축가처럼 바알가니 속을 까발리고 널브러지고 싶어요

—「홍시」부분

 

백석 시인이 『사슴』 시집을 통해 과거 삶에 대한 기억과 성찰에 초점을 두었다면, 차영호 시인은 ‘현재-여기’의 형상화에 초점을 두고, 시간과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키고자 노력한다. 제3부에 배열된 시는 시원의 공간에서 타향으로 변모된다. 이는 확장된 공간으로의 도피라기보다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먼저 지명을 시제로 쓴 「환선굴을 나서며」, 「정동진」, 「점심, 횟집」, 「화곡농원」에서」, 「대청 가는 길」, 「좌사리도」, 「땅끝에서」, 「다산 초당 스냅」 등이 있고, 시 속에 지명이 등장하는 “한밤마을에는 허릿매 고운 돌담들이 오순도순(「돌담에 기대어」)”, “청송 행 비알마다 섬들이 떠 있다(「둥둥」)”, “도남서원 사행당 대청 널찍하니(「가을비」)”, “문경 가은에 가면 연개소문 세트장이 있고(「용사동락락」)” 등이 있다. 제1부가 시원의 공간이라면, 제3부는 확장된 공간이다.

 

청송 행行 비알마다 섬들이 떠있다

 

초록바다 어둠 깊이를 재는 측량선이 닻 내리고 녹슬어 간다

 

막잠 깬 갈누에 뽕잎 갉는 소리

 

통통배들은 꺼병이처럼 양손을 활짝 펴고 하늘을 본다

 

이윽고 짜장면발같이 소낙비 내리꽂힌다

 

주섬주섬 섬들을 뽑아 푸대를 채우던 솔미댁

 

절해絶海에 고도孤島로 혼자 남았다

 

—「둥둥」전문

 

 

“둥둥”은 측량선을 부추기는 흥겨운 리듬이자, 섬이 떠 있는 복합적인 감각이다. 화자는 청송으로 향하는 오지에서 사람이 살아내는 흔적을 발견한다. 순간을 포착한 풍정(風情)은 여러 겹의 섬으로 떠올라 둥둥 떠다닌다. 비알마다 초록빛 섬들이 떠 있고, 초록을 재는 측량선과 통통배는 꺼병이(꿩의 어린 새끼)처럼 하늘을 날 준비를 하는 시각에 초록을 갉는 갈누에와 내리꽂히는 소낙비의 청각적 이미지가 가미되면서 풍광은 절정에 이른다. 아낙이 짓는 농사도, 초록을 재는 배도, 갉아 먹힌 초록도, 모두 푸대에 담겨지면 결국 그 중심에 있던 솔미댁(인간)이 “절해絶海에 고도孤島로 혼자” 남을 수밖에 없다. 시인이 주변부의 거처에서 확장시킨 공간적 상상력은 생의 진경으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여 시공간이 극복된 현 시대에 여행시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의 공간을 기점으로 여백 사이에 많은 섬을 겹쳐놓고, 결국 하나의 “고도孤島”로 수렴하는 시적 장치는 단선적인 공간을 깨뜨리는 자리에 놓여 있다.

 

2. 살코기 속 웃음줄기

 

제2부에서는 개인의 슬픈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변인들, Y형, 꽃집 차씨, 사할린 교포까지 담아내는 서사적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서사의 구성 방식은 생략과 압축의 방법에 의해 시적인 형식의 변형을 시도하고 있다. 자연히 연과 행 사이에 여백이 발생하기 때문에 행간 속에서도 의미가 담겨 있어 시를 읽는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의 바탕에는 해학이 담겨 있다. 해학은 시인이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솜씨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무한한 입담에서 기인한 것이다. 2009년인가, 푸른시인학교에 초청시인으로 온 송수권 선생께서 시인의 인문학적 지식을 인정했던 기억이 난다. 시집 전체에 흐르는 기운은 해학인데, 단순한 유머 센스에만 머물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미학이 해학이라면, 이면적으로 흐르는 기운은 풍자인 셈이다. 해학을 중심부로 내세우면서 부차적으로 풍자를 적절히 혼합했다 하겠다.

 

2

나는 아무르 강가에 서서 파랗게 언 초저녁별을 바라본 적 없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말사슴 궁둥이처럼 아득한

자작나무 숲을 건너보지 못해

시 한 줄 못 쓰는 것인가

그래서 너를 안고 한번쯤 휙휙

내둘러 볼 심산이었을까

KTX!

속 시끄러운 우리말 젖혀놓고

속 편하게 KTX, KTX……

영문도 모르는 영문약자英文略字를 곱씹으니

보이는구나, 한강 밤섬이 라그랑자트나 오리노코의 언덕쯤으로

장독대도 똥간도 이국풍물로

 

현재 시속 309km!

 

산맥을 뚫고 새가 날아든다

수십조수십조 지저귀며 눈 깜짝할 새

꽁무니에 날 꿰차고 날아오른다

 

어딜 가서

누굴 만나라고

몽니를 부리는 게냐

내가 버린 질그릇이며 절구 놋요강 바지랑대 같은 것

모두들 평안히 잠들어 계시더냐

뒷걸음 쳐서라도 달려가 문안 드려야 할 선산 한 뙈기

마련 드리지 못한 한가위

보름달, 어디서든 살가운 마음 달뜨면

그깟 달 못 보랴

 

대한민국 비좁은 땅에서 최고로 빨리

빨리 달리는데도/배가 고프다

 

—「시장기」부분

 

 

시의 발상이 재미난 것은 ‘시장기’에 대한 네 가지 에피소드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시장기’는 배가 고픈 느낌을 말한 것이지만, 시장기가 말하는 이면성은 각기 다르다. 첫째 시장기를 느끼는 것은 정상을 차지하지 못한 데 있다. 정상은 무엇이고 왜 시장기를 느끼는 것일까? 정상은 “곰질곰질 솟아오르는 찌”이고, 그 정상을 위해 세 끼를 굶었지만 “한 끼 더 굶어보기로 작정”한다. 처음부터 시는 육감적인 어투인 “풍만한 그녀가 여름내 풍풍 퍼질러놓은 애액愛液/거웃처럼 무성한 부들 틈새에/미늘 깊숙이 박고 은빛 비늘을 기다린다”로 출발한다. 비단 화자가 말한 정상이 낚시에 있을지라도, 인간의 욕심이 성욕과 같이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한다는 의미심장한 비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화자의 고속열차 KTX 탑승체험과 연관되어 있다. 속도가 빠른 현 시대에서 우리 것보다 더 범람하는 외국 풍물은 오히려 낯이 익다. 그래서 고속열차라는 말보다 오히려 KTX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여 “속 편하게 KTX, KTX……/영문도 모르는 영문약자英文略字를 곱씹으니”와 같이 언어유희(pun)가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화자가 이러한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고, 사나운 속도에 비례하여 시장기가 더욱 깊어간다는 데 있다. 이국적 풍물인 “아무르 강가,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 라그랑자트, 오리노코의 언덕”과 토속적인 풍물인 “장독대, 똥간, 질그릇, 놋요강, 바지랑대”의 이항대립 사이에서 후자는 밀려날 수밖에 없다. “수십조수십조” 외치는 물질문명은 속도전이다. 속도전에 밀려난 화자는 결국 비애를 느끼다가 이 세상을 향해 한줄기 희망, “살가운 마음”을 던진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풍자가 한층 더 강화된 느낌이다. 풍자의 핵심은 “돌고 도는 돈에 홀려/원을 그리는 것인지/환을 치는” 더러운 세상이다. 정치권과 재벌간의 검은 돈 거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반성할 줄도, 개선할 줄도 모르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보릿고개조차 모르는 작금에도 화자는 시장기를 느낀다. 네 번째 부분은 고향 상실에서 기인한 시장기다. “공동空洞 우물”은 바로 고향의 환유가 분명할 터. 고향은 인간에게 순수한 마음을 갖게 하는 공간이었다. 이것이 없어진다는 건,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시장기를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익살스럽게 묘파한 다음 시에도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드러난다.

 

세상 떠들썩한 줄기세포라는 게

요 미역귀같이 꼬들꼬들한 거여?

 

두멍보다 더 큰 눈 두렷거리는

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 몰라

꿈속에서조차 연구하기 시작했지

흘레붙는 감조차 앗아간 인간들

도대체 무슨 욕을 얼마나 더 얻어 처먹어야

쌀까

 

—「소꿈」부분

 

 

소의 입장에서 원초적인 욕망인 “흘레붙는 감조차 앗아간 인간들”을 욕하고 있지만, 결국 인공수정, 세포배양은 인간세계가 당면한 문제다. “쇠 뱃구레에서 말랑말랑 피어오르는 말울음” 소리가 나듯, 인간의 수정도 자신의 정자가 아닌 다른 요소들이 끼어들지도 모른다는 자조 섞인 말이 절로 나온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때 고스란히 그것의 악(惡)을 받는 것이 주변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실을 시인은 분노하기보다는 뜬세상에 대한 야유와 비웃음 아래, 우리의 꼴이 얼마나 우습게 희화화(戱畵化)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때론 “사할린 교포 몇 명의 영구 귀국(「북관대첩비」)”을 검버섯에 비유하여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기저에는 해학의 전통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3. 느물거리는 말의 비늘

 

운율을 무시한 산문시가 난무하는 시대에 차영호 시인이 구사한 말은 리듬을 탄다. 그의 시어 선택은 대쪽 같기도 하다. 시인이 적확한 언어를 선택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는 시집 한 권에서 발굴된 시어를 추려내면 금방 알 수 있다. 먼저 생동감 넘치는 의성어와 의태어들의 적절한 활용이다. 예를 들면 “찔깃찔깃한, 굼실굼실, 도톨도톨, 찰람찰람, 찰방찰방, 비빚비빚” 등이다. 현 시대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고유어와 방언을 찾아내어 살려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인의 몫이기도 하다. 인상 깊은 시어들은 “자드락길, 된비알, 늦사리, 낡삭은, 생뚱맞게, 어기뚱한, 옹송그리고, 별쭝맞은, 추운탐하는, 배동바지, 날망, 도롱테, 호비작거려” 등이다. 이 시집에서 낯설고 아름다운 시어를 찾아내면 한 되박은 족히 넘을 것이다.

 

다이아플렉스 29가 운다

웅웅 발밑을 파고드는 품이 여간내기 아니다

조심해야겠다

 

에러!

 

왜 이 놈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일까

곧 무슨 실수라도 저지를 걸 예견함인지

생뚱맞게 느물거리는 말의 비늘

심마니들은 물고기를 에러라고 부른단다

산중을 헤집고 다니는 이들이 물고기를 하필

에러라고 이름 지었을까

 

야구에서는 에러를 실책으로 순화했다니

그럼 나는 물고기보고 실책이라고 불러야 하나?

캔옥수수알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물 밑바닥에서 깜빡거리고

이번에는 오래 손때 묻은 50대 찌불이 은하를 가른다

 

실책씨, 말 좀 물어봅시다

이번에도 내가 알을 까고

묵은 조상이 만세를 부르게 될는지

 

—「에러」전문

 

 

평범한 풍경에서 가져온 말장난은 하나의 물고기를 생소한 말로 명명하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낚시의 손맛을 아는 낚시꾼인 시인은 언어의 맛을 잘 요리할 줄 안다. 하여 민물 낚싯대에 걸려 든 물고기를 “에러”로, 다시 “실책”으로 명명하고, 이어 낚시꾼이 알까기를 하면 묵은 조상도 자신을 “에러”라고 부를 것이라는 시어의 연쇄작용이 나타난다. 그 속에 강태공만이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숨어 있다. “캔옥수수알처럼 흩뿌려진 별들이 물 밑바닥에서 깜빡거리고”, “손때 묻은 50대 찌불”이 캄캄한 밤에 별처럼 은하를 가르는 장면은 말장난의 평이함을 극복한 것이며, 묘사와 서사가 한 데 어우러진 것이다. 생생한 말의 비늘이 「얼음 낚시터」에서는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묘사되는데, 구멍을 뚫고 바늘을 넣는 장면이 사뭇 육감적으로 비춰진다.

시인의 유머 센스는 여러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떡 주무르듯 종횡무진 시어를 부릴 줄 아는 그의 장기는 소중한 유산이 될 만하다. 하정 선생(동화작가 손춘익)과의 개인적 체험을 이야기한 “통점재,/통점痛點이란 아픔을 느끼는 감각점/도나캐나 아픔 감지하며 넘어야 제격이지(「통점재를 다시 넘다」)”라는 구절에서 보듯, 가파른 고개 이름인 “통점재”의 “통점痛點”이라는 시어를 선택하는 진폭은 널리 퍼진다. 다음 시에서 말을 부리는 솜씨는 압권이다.

 

배불뚝이건 말라깽이건

허여멀건 맨살, 더러는 문신 용틀임하는 근육

전신욕, 반신욕, 족탕, 찜질, 사우나

♀♂ 가리지 않고 비지땀 흘린다

뻘뻘

 

봐라, 이렇게 많이 땀 흘리는 걸

이래도 내가 불한당이냐

 

눈 부라리지 않아도 푸른 서슬

재보지 않아도 두꺼운 낯가죽

나는 꼬리를 한껏 내린다

아예 발라당 드러누워 꼬리를 살살 흔든다

 

불한당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불한당不汗黨에 대하여」부분

 

 

신성한 노동 뒤에는 땀이 흐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지땀을 흘리기 위해 오히려 “꼬리를 한껏 내린다. 아예 발라당 누워 꼬리를 살살 흔”드는 현대사회의 장면은 창조적인 노동의 대가로 발생한 땀이 아니다. 체력관리를 위해 땀만 흘리면 되는 현대인을 “이래도 불한당(不汗黨: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이냐”고 자조 섞인 말로 되묻는다. 정당한 땀의 가치를 알고 정당한 대가를 얻는 것이 자연의 합리라면, 이런 가치가 전도된 삶을 화자는 “불한당(不汗黨: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사람의 무리)”의 삶으로 간주한다. 진정한 노동 가치가 상실될 때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삶이 발생한다. 역설적이게도 도둑 같은 불한당의 삶이 판치는 세상을 향해 화자가 “불한당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외치는 말장난 속에는 비판도 담겨 있다.

 

4. 견딤의 시학

 

시인은 살아 있는 꽃들, 새소리, 나무들 등 항상 생물들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모양이다. 하여 생명을 가득 머금은 역동적인 시를 탄생시킨다. 주로 제4부에 등장하는 식물인“꽃다지, 암매岩梅, 능소화, 꽃무릇, 둥근잎꿩의비름, 눈잣나무” 등과 동물인 “뜸부기, 왕우렁이” 등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시인은 걸어 다니는 동 · 식물대사전인가? 특히 계절이나 날씨의 변화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덕목도 지니고 있다. 칼날 같은 겨울 속을 견디는 힘과 생명을 뽑아 올리는 신비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만물이 품고 있는 생명의 견딤을 노래함으로써 시작 행위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 아닌가.

 

꾸역꾸역 밀려드는 황사에 누렇게 녹슬고

가래 짙은 배기가스에 쿨룩거리는

봄비

그 용한 족집게

눈멀면 어쩌지?

 

살구나무 등걸에서 불쑥 악마의 발톱*

제비꽃 불탄 자리에서 돼지풀이나 벌레잡이통풀

갈대 우듬지에서 미국자리공, 가시박 따위

마구, 마구 뽑혀 나오고

살판난 말라리아모기며 흰불나방, 솔수염하늘소, 꽃매미, 황소개구리, 배스, 블루길, 붉은귀거북, 뉴트리아

와글와글 설쳐대면 어쩌지?

 

벌이나 풍뎅이, 제비, 송사리 떼……

참말로 순진해서

어쩌지?

어쩌지?

* 스트라이가. 아프리카에 서식하며 옥수수, 수수, 벼, 조 같은 농작물의 뿌리에 기생하는 식물

 

—「그런데, 봄비」전문

 

 

이 시는 바로 앞에 배열된 「봄비」의 후편으로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두 시가 동일하게 “봄비는 용한 족집게를 가지고/봄을 뽑아 올린다”는 발상에서 출발하고, 시제의 접속어 “그런데”가 전시(前詩)에 대한 화제 전환이기 때문이다. 자연(自然) 상태에서는 “벌이랑 풍뎅이, 제비, 송사리 떼/한눈팔아도 걱정 없다 (「봄비」)”지만, 황사와 배기가스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용한 족집게인 봄비는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살구나무 등걸에서는 살구꽃이 아닌 농작물을 완전히 말라죽게 만드는 악마의 발톱인 “스트라이가”가, 제비꽃 불탄 자리와 갈대 우듬지에서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식물인 “돼지풀, 벌레잡이통풀, 미국자리공, 가시박 따위”가 득실거린다. 토종인 “벌이나 풍뎅이, 제비, 송사리 떼”들은 참말로 순진해서 외래종을 이기지 못하니 매 연마다 “어찌지?”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시인은 “천지 사방에 연두 물감이/확! (「신록(新綠)」)”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사회는 우리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부정적인 인자를 소유한 채 흘러가고 있다. 부정적인 질서의 중심에는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생각 않고 오늘을 축내는

사람이라는 종種, 요새는 방앗간에 참새 떼 마냥 복닥거리지만, 어쩔래

가까운 날에 뜸부기마냥 종적 묘연해지면

—「뜸부기 생가生家에서」부분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종種은 곤달걀도 삶아 먹고

개소주를 내려 먹었더구나

허구한 날 오래 살라고 걸터듬고도 절종이라니

호박범벅처럼 버무려진 실타래

요기 몇 군데만 호비작거려 봐라

눈감고도 너끈히 풀지

21세기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여기저기 애써 파보지 않아도 될 거야

—「보물창고」부분

 

부정적인 세계의 대한 고통스런 형상화는 바로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인간조차도 지구상에서 멸종의 한 종이 되고 말 것이다. 풀밭 속에 평등한 위치에 자리 놓이지 않는 한, 지구상에서 인간은 생명을 빼앗는 도둑이 되고 만다는 통렬한 사고가 「풀밭 위의 점심」에 펼쳐진다. 풀 이름의 명칭에서도 식물과 동물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닭의장풀, 쇠무릎, 강아지풀, 개불알꽃, 꿩의비름, 여우꼬리, 까치수염에서 도둑놈의갈고리에 이르기까지 나열된 47종의 식물명은 높고 낮음이 없는 일원론적인 입장에 서 있다. 이분법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이 있는 한, “사람놈의갈고리”라는 식물도 탄생될 법하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질서로 가득 차 있을 때 비극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 비극적인 세계관을 극복하는 방안은 시인이 내세우는 견딤의 미학에 숨어 있다. 생태주의를 뿌리에 둔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인위적인 자연을 본래의 자연으로 전도시켜 물신화한다는 점이지만 시인은 여기에서 비켜서 있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에 빠지지 않고 인위성이 가져오는 삶의 불모성을 일상에서 읽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어느 한 유형으로 전형화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시인이 시집을 비평하는 것이 역부족임을 인정하고도 싶다. 비평은 역시 전문 평론가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역에서 함께 시를 쓰고 토론하는 푸른시 동인의 좌장인 차영호 시인과의 인연으로, 되지도 않는 깜냥으로 이 글을 쓴 것을 널리 이해하시기를. 그는 자신의 울림통을 깊고 넓게 파고 있는 중이고, 어쩌면 그것을 팔 또 다른 장소를 모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울림통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소리의 음색이 많아진다는 좋은 징조이다. 그의 장소 모색은 이제 생물과 자연의 생태에서 벗어나 도시로 향할 것이고, 지엽적인 장소에서 벗어나 우주로 향할 것이고, 해학과 풍자가 민중을 위한 것이라면 한층 성숙한 면모를 가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 차영호 1954년 충북 청원 출생. 1986년 《내륙문학》 등단.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 부채』, 『바람과 똥』. youngghc@hanmail.net

 

손창기 1967년 경북 군위 출생. 2003년 《현대시학》 신인상. 시집 『달팽이 聖者』. jangoyes@naver.com